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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오빠네 이야기
글 / 강순화
20세기30년대, 일본놈들의 쇠사슬에 얽매인 한반도 백성들은 여전히 가난과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었다. 이때 전라남도 장흥군 부산면의 한 농가에서는 련 며칠 눈물바다가 되었다. 아들 다섯, 딸 셋으로 팔남매를 둔 강씨네 가족은 만주로 이민가려 결정한 것이다. 일제의 압박착취를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을까? 소문에 의하면 땅이 넓고 토지가 비옥하다는 그 두망강 건너 만주벌에 가서 논밭을 일구고 부지런히 농사를 지으면 이 지지리한 가난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지 않을는지? 어린것들을 더는 배 굶기지 않고 공부라도 좀 시킬 수 있지 않을가 하여 우리할아버지 강만조 어른이 내린 결심이다.
1934년 칼바람이 휘몰아치는 어느 겨울날, 드디여 이삿짐은 다 꾸려졌고 이미 출가한 두 딸은 친정에 달려와 짐 실은 수레바퀴를 끌어안고 발버둥치며 부모님과 오빠들의 만주행을 막아보려고 울부짖었지만《어서가자!》하는 할아버지 호령 한마디에 무정하게 길을 떠나버리고 마는 짐수레를 결코 막지는 못하였다.
그렇게 무작정 갈라져 버린 친 혈육의 리산은 장장 기나긴 반세기 세월을 넘었다. 1989년, 서울길이 열려서 아버지와 형님들을 따라 떠났던 우리아빠- 아홉 살 막내가 60이 퍽 넘어서야 엄마와 함께 홍콩길을 에돌아 한국 전라남도 장흥군의 고향마을에 찾아갔다 하지만 그때 두 고모는 이미 모두 세상을 떠나 버렸었다. 그러니 55년 전의 그 리별은 고모들의 생각 그대로 진짜 천륜지연을 갈라버린 생리별이 되었던 것이다. 다행히 그 고모들의 자식들인 나의 고모사촌 형제들이 여러분 계셔서 그나마 혈육의 정은 끈끈이 이어갈 수 있었다.
우리 두 고모와 자식들인 사촌 오빠 언니들이 그땅에서 살아 온 세월들을 먼 이국에서 나서 자란 나로서는 알리 만무하지만 길이 열린 후 90년대 초부터 수년간 서로 오가면서 들어오고 나누어 온 옛 이야기들은 나에게 얼마간이나마 그들의 파란만장한 인생길과 곡절 많은 삶의 륜곽들을 다소 알려주고 있었다.
한국이란 이 자그마한 분단국 섬나라에서 평생 일본놈과 미국놈들의 식민통치, 그리고 지주、자본가 세력의 압박착취 속에서 모두들 어떻게 살아 왔을까? 올해로 80세를 맞이한 큰고모의 둘째아들 -봉식오빠가 들려 준 인생담이 바로 한국 남정들과 그 가족들이 살아 온 인생길이 아니겠는가 생각되여 이렇게 필을 들었다.
서울의 봉식오빠는 1938년, 우리 할아버지가 강씨 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떠나버린 4년 후에 태여 난 나의 고모사촌이다. 우리고모부는 그 세월 젊은 나이에 그래도 머리가 총명하여 일찍부터 가난하기 짝이 없는 고향땅을 선뜻 떠나 돈 벌수 있다는 일본으로 건너 갔다고 한다. 그곳에서 온갖 밑바닥 허드레 일들을 가리지 않고 도맡으며 밤낮없이 일하여 얼마간의 돈을 모인 후 다시 집에 돌아와 고모를 데려갔단다.
그리하여 오빠네 네 남매는 모두 일본땅에서 태여났다. 봉식오빠가 일곱 살 되던 해 광복이 되어 고모부는 가족을 거닐고 다시 고향땅에 돌아왔으며 그간 해외에서 벌어 온 돈으로 고향마을 산밑의 넓은 땅을 사고 그 언덕에 큰 기와집도 지었으며 식구 모두 굶지 않는, 조금이나마 유족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세상풍파란 알수 없는 것, 자기 두손과 피땀으로 이루어 낸 농사군의 평범한 생활도 오래동안 영위할 수 없는 것이 그 세상이였다. 광복이 되어 몇해 안 지나 또 <6.25전쟁>이 터진 것이다. 마을에서 좀 떨어 진 동산 언덕에 널찍히 자리잡고 살던 오빠네 집은 산속에서 헤매고 있는 빨지산 군인들의 피신처로 지목되어 밤이면 그네들이 무작정 몰려 내려와 헛간의 쌀로 밥을 지어 먹고 갔으며 수시로 들락거리기 시작하였다. 물론 얼마간의 보상은 좀 주더라지만 순진한 농사꾼인 고모네는 그저 그렇게 당할 수 밖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그 빨지산 군인들의 비밀행차는 오래가지 못하였다. 드디여 어느날 고모부는 그 죄로 경찰서에 끌려 갔으며 모진 매를 맞아 정신을 잃고 쓰러져 버렸다. 평생 일로 굳어져 소문난 감농군이였지만 얼마나 시달렸으면 그 미열로 끝내 중병이 들어버렸고 그후 몇달 버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단다. 고모도 세대주가 떠나버린 그 청천병력의 봉변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지눕이를 하시더니 역시 고모부를 뒤따라가고 말았다.
그때 봉식오빠는 열네살, 금방 아래에 열두살, 그리고는 모두 열살 미만인 동생 셋이 있었다. 두 살 위인 형이 있기는 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온 가족의 생계는 둘째인 봉식오빠의 두 어께에 모두 지워졌단다. 그 난리판 형국에 공부는 둘째 치고 우선 온 식구의 때 끼니만은 이어대야 했다. 동네 형들은 숫한 동생들을 거느린 오빠가 너무 불쌍하여 여기저기 소일거리들을 알려주면서 돈을 벌게 하였다.
그 중에서도 제일 흥미나던 일은 미군기지에 가서 딸라를 벌어 오던 일이란다. 동네 형들이 맡아온 짝퉁 악세사리들을 상자에 담아 가지고 미군이 주둔한 부대의 철조망에 다가가《헤-로! 》하고 소리를 치면 보초서던 미군들이 다가온단다. 인차 그 악세사리들을 그들 눈앞에 흔들어 보이면 웬일인지? 바로《오-케이!》>하고 웃으며 딸라를 쥐여 주고는 그걸 모조리 걷어갔다고 한다. 그렇게 몇날몇일만 뛰여 다니면 그 돈으로 쌀 몇 포대는 살수 있어서 애들이 그나마 굶지 않고 지낼 수 있었다.
살아오면서 온갖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수도 없이 격어 왔었지만 그러다가도 생각 외로 기회가 생겨서 돈벌이가 될 때도 있었다고 한다. 한번은 친구와 차집에서 만나고 있는데 옆 좌석의 나이 지긋한 두 손님이 무언가를 진지하게 담론하고 있었다. 무얼 저렇게 흥미롭게 토론할가 싶어서 넌지시 건너다 보았더니 그중 한 어른이 눈치 채고 미소를 건네며《젊은친구, 뭘 좀 해볼 생각이 없나?》하고 물었단다.
사연인즉 인천부두가에 온갖 페철무지가 산더미처럼 쌓였는데 그 페철들을 정리하여 연과 동들을 떼여낸다면 큰돈이 된다는 것이다. 자기들은 나이 들고 힘이 모자라 하기 힘드니 젊은이들이 해보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 참 좋은 아이디어였다.
한번 해볼 마음으로 주소를 확인한 후 친구와 함께 즉시 뻐스를 타고 인천부두까지 달려가 보니 참말로 말 그대로였다. 유관부문을 찾아 알아보고 허가를 맡은 후 일을 시작했는데 진짜로 수입이 좋아서 인건비를 넉넉히 주고도 적지않은 돈을 벌수 있었다. 이를 기초로 오빠는 아예 부근에 철공장을 세웠으며 그때부터 페철분류 사업을 주업으로 하기 시작하였단다.
이렇게 항창 사업이 흥성할 무렵, 하숙집 부근에 이모집이 있어 찾아온다며 오빠한테 길을 묻던 한 예쁜 아가씨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훗날 우리 형님으로 된 경산북도의 한 시골처녀 장씨였다. 그때는 오빠처럼 머나먼 남쪽 지방에서 서울에 올라와 자리 잡고 사업한다는 것은 큰 벼슬이나 한것처럼 시뚝하는 때라 시골처녀들의 선망 대상이기도 했었단다.《오빠는 어떻게 저런 예쁜 형님을 만났나요?》하는 나의 천진한 물음에 대한 오빠의 흐뭇한 답변이였다.
형님과 결혼하여 함께 열심히 일하니 살림은 피여 갔고 자식들도 잘 커서 모두 학업을 마치고 저마다 사업에 뛰여 들었다. 아들은 명문대인 서강대 전자학과를 졸업하고 삼성전자 미국주재로 사업하다가 후에는 자기 자신의 회사를 꾸리고 번창한 사업을 하고 있단다.
큰딸은 의상학과를 전공하고 유명 디자이너로 사업을 벌리면서 40이 되어도 시집갈 생각은 안하고 수년간 번화한 서울 인사동 거리에서 메이커복장과 유럽녀성모자 전문가계로 소문나게 장사를 하였었다. 그런데 사람의 인연이란 년륜에 관계없이 때가 되면 이어지기 마련인가 본다. 늦게나마 지금의 선장 남편을 만나 매일 푸르른 바다가 부두에서 낚씨꾼 어선들을 관리하며 넘쳐나는 해물로 풍족한 생활을 누리고 있단다. 유명디자이너가 바다가 아씨로 둔갑한 모양이다.
둘째딸은 튼튼한 태권도사범 남편을 만나 애들을 잘 키우며 남편 뒷바라지와 살림만 하는 상등 전업주부란다.
오빠는 젊은 그 시절 돈이 좀 모아지면 머리를 굴려 부동산에 투자도 하였고 여기저기 땅도 삿으며 시중심 좋은 곳에 4층빌라도 지었다. 90년대 초, 내가 처음으로 오빠집에 놀러 갔을때만 하여도 오빠 형님은 항상 작업복에 모자 쓰고 장갑을 끼고는 폐철수구소 마당 해볓밑에서 철물들을 분류하여 모이고 또 쉼없이 어데로 실어가군 하였다.
이렇게 땀흘려 번 돈으로 지은 빌라는 참 아름다웠는데 아래 윗층은 모두 남들게 전세를 주고 오빠네는 3층에 살고 계셨다. 내가 처음 서울 목동 오빠집에 찾아가서 보았을 땐 새로 이사한 때라 층계마다 꽃화분통들이 즐비하게 놓여져 있고 방마다 새 가구들이 들어와서 진짜 우리 연변에서는 볼수 없는 작은 <별장집> 같았다.
원래 미국이나 한국의 잘사는 사람들은 터가 널찍한 양옥들에서 살고 밀집한 아파트는 못사는 사람들의 주거지라고 하지 않는가? 오빠네가 사는 빌라 3층은 집안에 또 아래윗층으로 분류된 묘한 설계에 정연한 장식이며 홍송가구들이 저으기 부려움을 싸게 하였다. 집이 여러 층이라 전세돈이 꼬박꼬박 들어오고 거기에 모아진 돈들을 합쳐 여기저기 투자도 하고 그 자금들이 돌고 돌아 리자돈이 올라가고 하여 집 살림은 나날이 피여만 갔다. 그렇게 오빠 형님은 커가는 일남 이녀 자식들을 모두 대학까지 공부시키고 출세시킬 수 있었다.
나는 서울에만 가면 꼭 오빠집에 먼저 찾아간다. 나의 친고모 아들이니 나의 친 혈육이 아닌가? 세상이 험악하여 부모세대에서는 생리별 하였어도 하늘길이 열린 지금 자주 만나지 않으면 또 후회할 일을 만들지 않겠는가?! 더구나 나는 친오빠도 없으니 사촌오빠도 친오빠 같았다. 그런데 또 형님은 얼마나 좋은 분인지《우리고모, 우리고모》하면서 나한테 너무도 잘해 주셨다. 갈 때마다 항상 귀한 손님대접을 받았고 언제나 새옷이며 이쁜 머리수건들을 선물로 주셨다. 만나면 기쁘고 따뜻하여 언제나 마음편히 찾아 뵙고 싶은 혈육들이다.
1992년 9월, 내가 처음으로 출국길에 올라 서울오빠집에 찾아갔을 때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절로 나온다. 그때만 해도 가난한 중국의 작은 도시에서 처음으로 잘산다는 자본주의 나라 수도 서울에 간다니 우선 옷차림부터 신경써야 하지 않겠는가?!
한달 전 부터 나는 거리에 나가 헤매기 시작했다. 늦가을이라 우선 가는 회색털실로 이쁘게 수까지 놓은 계내의를 고르고 그에 맞춰 줄이 간 니즈치마까지 샀다. 또 목걸이도 옷에 맞춰 굴직한 걸로 사서 걸고보니 제법 <귀부인> 차림이다. 해관까지는 조선족들 너나없이 멋부리는 모양이 비슷하여 별 걱정은 없었다. 그런데 오빠집에 도착하니 중국손님 보러 온 서울친척들은 하나같이 수수한 티셔쯔에다 청바지들만 입고 있는데 주역인 나만이 희한한 옷차림과 악세사리까지 마치 북한에서 금방 건너 온 아줌마같이 촌스럽기 짝이 없었다.
제풀에 몸둘바를 모른 나는 얼른 그 화려한 옷과 악세사리들을 벗어버리고 형님더러 편한 티와 바지 하나를 달라 하여 바꿔 입고서야 그들과 다시 어울릴 수 있었다. 이튿날 나는 당장 거리에 나가 그때는 나에게 큰 돈이였던 한화 이만원을 주고 흰적삼과 청바지 하나를 사 입으니 다행히 중국티를 면할 수 있는 것 같아 마음이 편해졌다.
지금도 보면 어쩐지 서울사람들 보다 아니 중국에서도 북경이나 상해, 광주사람들 보다 우리연변조선족들이 더 옷차림에 신경을 쓰는 것 같다. 아마 류행을 먼저 따라서 일가? 아니면 아무 쓸모도 없는 그 <자존심>、<허영심> 때문일가? 여하튼 알고도 모를 일이다.
객지에서 손님으로 다니면 참으로 불편한 점이 적지 않다. 그래서《아무리 금옥(金屋)이요 은옥(銀屋)이요 해도 자신의 초옥(草屋)이 제일이다》는 말이 참 진리인 것 같다.
특히 생소한 외지에 가면 제일 힘든 것이 아마 목욕과 녀성들이 소홀히 할 수 없는 머리손질이지 않는가? 형님은 벌써 이를 알고 계셨다. 내가 도착한 이튿날 형님은 나를 데리고 목욕탕부터 찾았다. 며칠째 여기저기 떠돌아 다닌 나에게는 진짜로 최고의 대접인 듯 싶었다. 시원히 목욕을 마치니 또 미장원에 데려 간다. 지금은 아마 사라진 듯 싶은데 쇠절가락을 화로에 달궈 머리를 감아 지져서 멋진 헤어스타일을 만드는 곳이다.《그냥 다녀도 괜찮은데요...? 》하는 나의 말은 그냥 무시해 버리고 끝내는 나를 이쁘게 단장시켜 주었다.
마침<해외동포 모국방문단>에서 동포대표로 선정되였으니 저더러 래일<오코일호텔>에 집합하라는 통지전화가 왔다. 한국관광공사에서 부분적 해외동포들에게 베푸는 무료관광 혜택이였다. 나는 형님 덕분에 멋진 모습으로 신나게 일주간의 전국려행을 마칠 수 있었다. 관광을 마치고 돌아오니 형님은 또 나를 동대문시장에 데리고 가서 중국에서는 볼수 없는 예쁜 장식품들과 칠색비단으로 된 바느질 광주리까지 여러 가지를 사 주었다. 2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알뜰히 쓰고 있으니 이 기념품들은 참으로 나의 즐거운 추억으로 되고 있는 것이다.
2019년 여름 나는 임플란트하러 서울에 가게되여 또 봉식오빠댁에찾아 갔었다. 인젠 두분 모두 80세 좌우이시니 이전처럼 먼 길은 떠나시기 힘들어 하시고 매일 일상은 <로인정>에 가셔서 같은 년배의 친구들과 어울리며 활동하시다가 점심밥도 함께 드시고 가까이 산책도 하시며 편한 나날들을 보내는 것 같았다.
오빠는 아직까지도 차운전을 하시였으며 나를 데리고 맛있는 <추어탕>집에 찾아가 점심도 사 주셨다. 평일에는 매일 아파트 앞의 한강강변에 가셔서 한시간씩 걷기운동도 하신다고 한다. 한국은 로년복지도 잘된 것 같았다. 두분의 매달 기본 년금 40만 한화를 가지고 20여평 아프트 운영비 18만 제하고도 남음이 있어 채소비도 보태고 투자한 자금들의 리자도 나오므로 여생의 생활은 근심걱정이 없는 듯 하였다.
평생을 허리 펼새 없이 일하며 손끝으로 벌어서 자식들을 키워오고 뒷바라지 해 온 우리 서울오빠와 형님, 인제는 한생의 할 일들을 다 하셨으니 마음 편히 건강하게 여생을 즐기며 사시는 것이 당신들의 소임이요 행복이 아니겠는가 생각되네요. 부디 로년에 만복을 누리며 무병장수하시기를 이 동생은 빌고 또 비는 바입니다.
2022년 5월 연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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