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서남부 기행
글/ 강 순 화
제39회 로스앤젤레스 한인축제
지난 10월초, 재단의 초청으로 나는 또다시 미국행에 나섰다. 이번이 세번째로 되는 미국행이지만 한국도 아닌 미국땅에서의 는 도대체 어떻게 진행될가 궁금하기도 하고 신비하기도 한 일이였다. 전세계 720만 해외 한인동포들의 문화행사중 가장 긴 력사와 큰 규모를 자랑하는 로스앤젤레스 한인축제가 올해로 39주년을 맞이한 것이다. 10월4일, 로스안젤레스 코리아타운의 심장부에 있는 에서 4일간 진행 예정인 한인축제는 드디여 막을 열었다.
아침 일찍 떠오르는 태양과 더불어 로스앤젤레스 온 거리는 채색기발과 각종 표어들로 명절의 분위기에 부풀어 있었고 어른 아이 모두들 즐거움에 들떠 있었다. 축제 마당에는 일찍부터 한인들 뿐만 아닌 백인, 흑인, 황색인 등 각종 피부의 인파들이 모여들어 마치 세계박람회나 열린듯 이채를 돋구고 있었다.
2010년 미국 인구조사 결과에 따르면 미국내의 한인인구는 142만 3784명으로 미국 전체 인구의 약 0.5%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지만 신분상의 문제 등으로 인구조사에 집계되지 않은 한인들을 감안한다면 미국내 전체 한인 인구는 약 250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고 한다. 그러니 미국에서의 한인수는 사실상 중국에서의 조선족 인수 보다도 더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금년에는 우리 겨레의 명절 한가위를 이어 제39회째로 되는 한인축제를 개최하면서 미주와 미국 전역에서는 물론 전 세계의 관심을 모아왔다고 한다. 축제의 주제는《한류: 세계를 향한 새로운 도전》으로서 우리 겨레의 얼과 문화 그리고 한류의 우수성을 자랑하고 널리 알리므로서 우리민족 후손들로 하여금 미 주류사회에서 주역으로 발전해 나갈수 있는 터전을 만드는데 기여하고자 하는 세계박람회나 다름없는 큰 행사였다.
주최측의 소개에 의하면 한인축제가 시작된것은 1974년 11월이라고 한다. 바로 39년전, 한국관광공사 도쿄지점 홍보실장을 지닌 김진형씨가 미국으로 이주해 오면서 으로 하여 한국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이민자들을 보고 미국 한인사회의 수도인 로스앤젤레스에 을 세울 꿈을 안고 이 축제를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후 의 주최로 한글간판달기 운동, 한국종합의료원 설치, 주립대학 한인타운교실과 영어학원 설립, 한인학교 설립, 한인타운의 각종 문화행사 개최 등등 많은 활동들을 진행하여왔고 해마다 에는 미국측 주지사, 로스앤젤레스 시장 등 굵직한 지도층들을 초청하여 참여케 함으로서 축제의 권위와 분위기를 한층 높혔다고 한다.
금년에는 로스앤젤레스 중심에 무대를 세우고 한국 의 정채로운 한국전통무용과 농악무 표연, 전통한복모델 표연, 의 시범표연 등 민족풍격이 넘쳐나는 각종 연출들을 진행하였고 또 재미동포단체는 물론 미국, 중국, 일본, 멕시코 등 나라들에서 온 수십개의 문화예술단체들이 각종 민족무용, 노래, "강남스타일"등으로 축제기간 내내 다채로운 축하공연을 펼쳤다.
그 현장에서는 또 생각외로 중국예술인들이 표연하는 도 연출되여 미국땅에서 중국민족의 예술을 직접보고 느끼는 그 심정은 참으로 감개무량하였다. 축제가 진행되는 내내 올림픽 거리는 물론 주요 골목마다에 태극기 물결이 넘쳤고 동포 년로자들은 물론 어린이들까지도 색동저고리와 색바지 또는 치마를 입고 다문화사회인 남가주 일대에 한국의 멋과 풍류를 알렸으며 축제한마당에서는 한국 전 지역에서 직접 들여 온 각종 특색의 생산품과 여러 가지 먹거리들을 선보이면서 큰 장터를 벌리고 있었다. 이제 이곳 한인축제는 미국 로스앤젤레스 코리아타운의 행사만이 아닌 전 세계적 규모의 한민족 전통문화와 예술의 축제가 되고 있음을 심심히 느끼게 하는 현장이였다.
US아주투어와의 미국서남부 관광
급변하는 시대의 흐름속에서 삶을 잃지않기 위해 잊고 지내야만 하는 여유, 랑만, 휴식 그리고 행복, 우리는 려행을 통해 그것들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영원히 살것처럼 래일을 꿈꾸고, 래일 죽을것처럼 오늘을 살아라》라는 말이 있듯이 려행도 마찬가지이다. 려행을 꿈꾸고 오늘 려행이 마지막인 것처럼 즐기고자 하는 마음을 가질 때 무심코 흘러버릴 수 있는 많은 것들이 가슴에 다가오기 마련이다. 아는 만큼 보이고 발품 판 만큼 눈이 깊어진다고 하지 않는가. 이번 미국행에 다시금 돌아보는 미국서남부의 땅은 참으로 자연의 웅위로움과 우주의 신비가 숨쉬는 그 자체였다. 나는 일망무제한 모하비사막에서 끝없이 달리는 려행길 내내 도정신하여 신나게 샤터를 누르고 부지런히 가이드의 말들을 기록하였다.
이번 려행길에 와 함께 돌아 본 코스는: 천사의 도시 로스앤젤레스, 야자수가 늘어선 산타모니카 해변, 장엄한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인랜드/엠파이어, 미국 최고의 동물원을 가진 샌디에고, 모하비사막 자연보호구역에 속해 있는 신비의 땅 데저트지역, 요세미티, 킹스캐년 국립공원, 미국 전역 최고봉인 해발 1만4천5백피트(약4420메트)의 휘트니산과 시에라 네바다 산맥의 최정상을 중심으로 넓게 펼쳐진 시에라 고원지역, 사계절 축제가 끊이지 않는 프레즈노와 이국적인 전취가 물씬 감도는 명품도시들이 즐비한 센트럴벨리지역, 전미의 최고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해안선과 침엽수 숲,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어우러진 변화무쌍한 샌프란시스코의 도심, 세계 최고양질의 와인을 생산하는 와이너리로 유명한 베이비 지역 등이다. 아래에 그중의 몇곳만 소개해 보려 한다.
로스앤젤레스
천사의 도시라는 애칭을 가진 로스앤젤레스는 불가능을 모르는 도시라고 한다. 누구나 언제든지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전 세계 이민자들의 도시, 인종、언어、소득、종교、과거의 경력 등이 모두 다른 수많은 이민자들이 다같이 어울려 살 수 있는 꿈의 도시이다. 로스앤젤레스는 주변의 패서디나, 컬버시티, 잉글우드, 산타모니카, 롱비치 등 위성도시를 포함해 인구 7백만을 넘는 거대한 도시권을 형성하고 있어 미국에서는 뉴욕 다음으로 두번째로 큰 규모의 도시이다. 로스앤젤레스는 미서부와 남부 해안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 펼쳐져 있어 전세계로부터《아메리카 꿈》을 안고 모여들어 온, 가장 많은 이민자가 사는 곳으로 《자유와 기회의 땅》이라 부르며 다종다양한 이국의 문화가 서로 어우려져서 로스앤젤레스만의 독특한 문화를 형성한 서부 미국의 얼굴이라고 한다.
태평양 경제권을 형성하는 지리적 환경, 진취적이고 자유분망한 도시, 1년 내내 온화하고 쾌적한 기후, 230년 력사를 자랑하는 유서 깊은 사적지와 현대적인 문화공간으로 충만된 다운타운, 각 민족 뿌리의 색깔이 엄연하게 드러나는 한인타운、차이나타운 등등의 로스앤젤레스의 모습은 그 자체가 다문화적인 캘리포니아의 진면모였다. 특히 한인타운은 한국의 어느 거리와 다름없을 정도로 다양한 상가와 건물들이 한글간판을 달고 있고 또 차이나타운에 즐비한 한자 간판과 붉은색 건물, 화려한 광동、사천 요리점의 네온사인은 흡사 중국에 온듯한 풍경을 마음껏 연출하고 있었다. 거기에다 또 중국인들의 이민력사와 문화풍습이 전시된 도 있어 중국에서 나서 자란 우리에게는 더욱더 친밀감과 긍지를 안겨 주고 있었다.
아메리칸 원주민 촌락이 산재했던 이 지역은 1542년 탐험가 후안 로드리게스 가브리요가 도착하면서 서방세계에 처음 알려졌고 230년 전인 1781년 에스파냐인 44명이 다운타운 지역에 처음 이주하면서 비로서 로스앤젤레스의 력사가 시작되였다고 한다. 1848년 미국과 멕시코 간의 전쟁 결과로 캘리포니아는 미국에 편입되여 미국령토가 되었다. 남태평양 철도의 완공(1876년), 석유분출(1891년), 파나마운하 개통 및 샌 페드로만 축항(1914년)은 20세기 도시의 급속한 발전기반이 되었으며, 할리우드를 중심으로한 영화산업의 발전, 감귤류 재배와 가공업의 발달, 교통로 확충에 의한 관광의 발달 등은 도시 번영의 기반이 되었고 지금은 정밀기계, 섬유, 화학, 전자산업 및 우주항공산업 등이 중요한 경제적 지주로 로스앤젤레스 형성의 근간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로스앤젤레스에는 캘리포니아주립대학을 비롯한 10여개 주요대학 및 자연력사 박물관, 미술박물관 등이 있고 뮤직센터, 관현악단 등이 있는 교육, 문화, 예술의 중심이기도 하다. 로스앤젤레스는 태평양 건너에서의 인구유입지 역할을 하고 있고 또 과거 스페인 멕시코 령토였기에 히스패닉계의 인구 비률이 매우 높아 라틴아메리카인이 41%나 되고 백인은 36.9%이며 한국, 인도, 중국 등 동양계 이민과 아세아인은 11.5%, 흑인은 10.3%라고 한다. 로스앤젤레스 중심거리인 다운타운은 하늘을 찌르는 고층건물에 대부분 백인들이 집거해 있어 진짜로 미국땅 같았지만 우리가 거주한 코리아타운의 볼먼거리 리월드골목 량옆에는 여전히 많은 멕시코인들이 거주하고 있어 그곳은 아직도 미국땅이 아닌듯 싶었다.
싼타모니카
로스앤젤레스에서 가장 잘 알려진 해변 휴양지 산타모니카는 아름다운 바다가 도시이다. 한미여성회 신영이 이사님 댁이 바로 그곳에 있어서 지난번에도 가서 하루밤을 자고 왔었는데 이번에도 또 초청되여 찾아뵙게 되었다. 아담한 2층 양옥의 앞뒤 마당에는 여러 가지 남방 식물들과 아릿다운 꽃들이 만발하고 있었고 그 옆에는 자그마한 미국 성조기가 정연히 꽂혀 있었다. 첫문을 열고 들어서니 마치 마냥 문어귀로부터 온 객실과 침실 주위의 모든 공간에 수십가지의 크고 작은 골동품들이 빼곡이 진렬되여 있었다. 모두가 한국에서 해마다 날라온 기념품들이란다. 인젠 온 집안이 넘쳐날 정도여서 찾아오는 사람들 기분에는 리해가 안될 정도로 잡다하기 그지없는데 그들 내외는 그것이 애호인지라 끝없이 모이고 또 모이고 싶은 모양이였다. 하도 예전과 다름없는 열정과 따뜻한 마음씨들이 고마워 나는 그런데는 전혀 개의치 않고 낮에는 밖에 나가 바다가의 아름다운 자택들을 감상하고 쉼없이 촬영하느라 여념이 없었고 밤에는 노트북을 펼쳐놓고 밀린 메일들을 체크하고 좋은 글들을 전달하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다. 이튿날 아침에는 약속대로 6시가 되자 그들 내외와 함께 싼타모니카 등산길에 올랐다. 산허리를 빙빙 돌아 한시간 넘게 올라가니 산 꼭대기에 도달할 수 있었는데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싼타모니카 도시도 유난히 아름다웠지만 그보다도 앞에 끝없이 펼쳐진 넓은 바다, 그리고 그 지평선에서 갓 솟아오르는 아침 태양의 진붉은 빛발은 그야말로 감탄을 자아내는 천하의 절경이였다.
최고의 쇼핑거리로 명성이 높고 할리우드영화의 단골 배경으로 되는 산타모니카 피어와 레스토랑에서 신영이 이사님 내외의 초대로 미국식 음식을 맛보는 일도 하나의 특이한 려행 일정으로 되었다. 여러가지 모양과 색갈의 피자와 핸버거 그리고 솜같이 폭신하게 만든 각종 빵들은 그 빛깔도 이쁘고 맛도 좋았거니와 그보다도 항상 초만원을 이루며 모여든다는 가지각색 피부와 체형의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는 그 풍경 또한 가관이 아닐수 없었다.
샌프란시스코
세계적인 려행전문잡지 에서 선정한 자리를 20년 가까이 놓치지 않은 곳이 바로 금문교의 도시 샌프란시스코라 한다. 이번 미국행에서 나의 주요 목적 역시 이 유명한 미국 서남단 도시 샌프란시스코에 가 보는 것이였다. 아주려행사의 관광뻐스를 타고 꼬박 하루 낮을 달려서 도착한 곳이 바로 이 절정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신비의 도시였다. 가파른 언덕 위의 빅토리아풍 건축물, 짙푸른 바다와 부둣가가 이루는 그림 같은 풍경에 독특한 력사와 자유로운 문화가 어우러지고 하늘의 축복을 받은듯한 온난하고 쾌적한 기후는 단 한번 방문한 려행객 일지라도 평생을 두고 그 여운을 즐길 수 있으리 만큼 활력과 매력이 넘치는 도시가 바로 이곳 샌프란시스코였다,
1848년 시에라 네바다산맥 북쪽에서 금광이 발견되면서 수많은 세상사람들이 금을 캐려 이곳에 몰려 들었고 1860년 이후 이곳미국 서부의 경제, 문화적 중심지로 발돋음 하였다 한다. 1906년 대지진으로 도시 대부분이 파괴되였지만 이후 1936년 대형 공공프로젝트가 진행되면서 도시 전체가 새롭게 건설되였고 자유와 젊음을 자랑하는 도시로 되었다.
랑만적인 항구의 짙은 안개 사이로 우아한 자태를 뽐내는 붉은 현수교, 한세기 넘게 구불구불한 언덕 위를 오르내리는 케이블카, 그 자체만으로도 랑만과 추억이 충만하였다. 나는 즉석사진 한장에 15딸러라는 돈도 아끼지 않고 샌프란시스코를 배경으로한 바다가에서 전문가 촬영사들이 찍어주는 기념사진 한장을 소중한 기념품으로 간직하였다.
샌프란시스코 려행지의 한 중요코스인 악명 높은 죄수들의 감옥 알카투로즈 섬은 려행객들에게 남다른 기분과 정서를 남겼다. 1934년부터 1963년까지 캘리포니아련방정부의 형무소로 사용했던 곳으로 단 한명의 탈옥수도 용납하지 않은 무시무시한 감옥이였는데 이제는 유명한 관광명소가 되었다. 과거의 암흑한《인간지옥》이 오늘의 자유로운《유람지》로 변모하여 세상사람들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다.
샌프란시스코 최대 쇼핑가인 피어 39번가는 유난히 돋보이는 명소였다. 본래 선착장이지만 지금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쇼핑가로 자리 잡아 1300여개가 넘는 전문상가들이 밀집되여 있고 각종 콘서트와 길거리 공연들이 있어 사람들에게 신선한 볼거리를 제공하였다. 그곳에서는 또 관광객들 가슴마다에 동그란 귀빈카를 붙혀주고 물건을 50%나 감가해 준다고 하지만 그 딸라들을 따져보면 역시 엄청 비싼 가격이므로 나는 근본 살 엄두도 못내였다.
샌프란시스코 다운타운 린근에 널찍하게 자리잡은《차이나타운》은 일찍 19세기 50년대에 이주한 중국인들이 백인들의 속박에서 벗어나려고 자체로 뭉쳐서 중국타워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1969년 중국정부의 직접적인 지원하에 재개발되여 지금은 인구 80여만이 밀집한 서부 최대 규모의《차이나타운》이라고 한다.《차이나타운》내의 건물들은 모두 중국스타일로 되어있는데 1층은 대부분 상가이고 2-3층은 살림집들 이였다. 큼직하고 화려한 중국글 간판의 상가들과 붉은색 장식들은 그야말로 중국냄새를 물씽 풍기고 있어서 내가 지금 중국땅 한 복판에 서 있지 않나 하는 착각을 일으킬 정도였다. 한국인 가이드는 우리들을 인솔하여 이《차이나타운》을 소개하면서《중국은 대국이라 외국에서 사는 중국인들도 이렇게 크게 배려하는데 우리한국에서는 언제나 해외 한인들을 돌볼 수 있겠는가?》하고 한탄하였다. 우리 관광팀의 43명 려행객들 중 유일한 중국인이였던 나는 저도몰래 내가 나서 자란 조국-중국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으로 하여 흐믓한 기분을 감추지 못하였다.
샌프란시스코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명소는 바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로 불리는 샌프란시스코의 상징인 붉은빛 금문교이다. 금광을 찾던 초기 개척자들의 첫 관문이였던이 다리는 1937년 완공 당시 지주 사이가 1.7마일(2.72km)로 전 세계에서 가장 긴 현수교였다. 이 다리는 당시 샌프란시스코 시민들이 성금을 모아 세운 것이며 또 중국사람들이 건설하였다하여 더욱 의미가 깊었다. 지금은 일년 내내 50여명의 페인터들이 이 다리를 붉은 색으로 색칠하고 있어 그 붉은 색 다리는 유난히 밝게 빛나고 있었고 밤이되면 더욱 찬란한 빛을 뿜는 다리로 변신하였다.
금문교 남단에 자리한 골드게이트 파크는 세계 최대 규모의 공원으로 크고 작은 호수들, 수족관, 미술관, 동물원, 식물원 등이 있어 유람객들로 언제나 북적이였다. 금문교 건너 길을 따라 가면 풍부한 자연 경관과 함께 수많은 예술가들이 생활하는, 집값이 천만딸러에 달한다는 랑만의 거리 마린카운티가 있고 북쪽으로 50마일(80km)쯤 더 올라가면 양질의 와이너리가 산재한 레스토랑들이 있는데 려행자들은 이곳에서 음악을 들으며 휴식을 취하거나 감미로운 포도 향기를 맡으며 숲속을 거니는 한가로움을 즐길 수 있었다. 특히 미국산 프리미엄 와인의 대부분을 생산하는 나파밸리는 와이너리 뿐만 아니라 세계 최고 권위를 인정받는 유명 레스토랑들이 밀집한 곳이다.
엘로스톤 국립공원
최초, 최대는 물론 최고라는 명예로운 수식어를 항시 앞에 두는 국립공원이 바로 미국의엘로스톤 국립공원이였다. 수십만년 전의 화산폭팔로 이뤄진 화산고원지대로 그 어느곳과도 비길수 없는 다채로운 자연 경관을 나타내고 있었다. 엘로스톤 이란 명칭은 바로 오랜 세월 지하에서 분출된 광물성 온천수가 바위 위로 흘러 내리면서 바위의 표면을 노랗게 변색시켜 붙혀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곳에는 길 량옆과 언덕 위에 빼곡이 자라나는 풀들도 모두 노란색을 띠고 있어 마치 황금색 담요를 펼쳐 놓은듯 신기한 풍경을 이루고 있었다.
1978년 유네스코 자연유산으로 지정된 광대하고 아름다운 엘로스톤 국립공원은 미서부의 웅위로운 그랜드캐년 국립공원보다 세배가 넘는 규모로 북미 최대 산중 호수를 품고 있고 세계3대 폭포의 하나인 나이가라 폭포보다도 그 높이가 2배나 넘는다는 엘로스톤 폭포에 1만여개가 넘는 온천을 지니고 있었다. 거기에다 1만피트(3048m)가 넘는다는 산봉우리도 45개나 된다고 한다.
최고라 칭해지는 이유는 이렇게 웅위롭고 특이한 자연 경관도 그렇겠지만 더우기 그 속에서 마음 놓고 뛰노는 야생동물들의 덕이 크다고 한다. 군데군데에서 만나는 야생동물들은 엘로스톤 국립공원의 최고의 자랑거리이고 볼거리였다. 들소, 사슴, 로키양, 회색곰, 물수리 등 많은 야생동물들이 유유자적으로 자연과 어우려져 살고 있었다. 그곳에서는 초원과 늪지, 강과 호수, 산과 숲, 황야와 협곡, 온천, 폭포, 기암괴석 등을 한번에 만날 수 있었고 특히 폭팔하듯 분출하는 간헐천과 우뢰와 같은 소리를 내는 폭포는 자연의 위대함을 온 몸으로 느끼게 해주고 겸손의 의미를 깨닫게 해 준다.
캘리포니아 와인
관광뻐스에서 창밖을 내다 보니 일망무제한 포도밭들이 질서정연하게 줄지어 지나고 있었다. 가이드가 말하지 않아도 어느덧 포도주의 고향, 와인 생산의 중심지에 들어섰음을 실감케 하는 곳이였다.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캘리포니아에서 와인의 력사는 약 200여년전 프란체스카 수도원의 주니페로 세라라는 신부가 수도원을 세우고 최초의 포도밭을 일구면서 시작됐다고 한다. 이후 샌디에고에서 소노마까지를 이어가는 연선에 21개의 수도원이 세워졌고 수도원에서 사용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와인은 캘리포니아와인의 시초가 되었다 한다.
금광이 발견되면서 인구가 폭팔적으로 증가하고 금광이 없는 곳에는 포도밭이 일궈짐에 따라 와인산업의 기반이 형성되였지만 1920년 포도나무의 뿌리를 공격하는 필록세라가 발생하고 1919년에는 금주법이 시행되였으며 경제 대공황이 드는 등으로 한시기 발전하지 못하다가 1960년대부터 꾸준히 회복됐다고 한다. 1976년 미국 독립선언 200주년을 기념해 파리에서 열린 프랑스-미국 와인비교 시음회에서 예상과는 달리 모든 부분에서 캘리포니아와인이 1위를 차지하게 되면서부터 그 이후로 무섭게 성장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고 한다. 숙성이 안된 어린 와인을 대상으로 했기에 제대로 평가되지 못했다는 프랑스측의 주장으로 30년 뒤인 2006년 숙성과정을 거친 와인으로 또다시 경합이 벌어졌지만 결과는 여전히 캘리포니아 와인의 완승으로 결론이 났다한다.
캘리포니아는 다양한 종류의 지형이 나타나는 곳이며 그에 따라 기후도 지역별로 다르다. 캘리포니아 와인은 대부분 태평양 연안과 중앙계곡 사이에서 생산되였다. 서부해안의 여러 만들이 랭기와 적당량의 안개를 제공해 기온과 일조량을 조절하는 역할을 하고 이글거리는 태양의 풍부한 열량과 화산재로 이뤄진 기름진 토양은 최상의 와인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또한 봄철에는 서리가 발생하고 2월에서 10월까지는 비가 거의 오지 않는 기상의 불리함을 과학적으로 극복하는 각종 시스템을 가지고 있어 “불모의 땅”은 지금 세계 최고 수준의 와인을 생산해 내는 “황금의 땅”이 되었다.
미국에서는《한국인을 찾으려면 교회를 찾아가고 중국인을 찾으려면 식당을 찾으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그만큼 중국인들은 전통적으로 음식문화에는 으뜸인듯 싶다.《금강산도 식후 견》이라는 말이 있듯이 4박5일의 려행 일정에서 하루 삼끼의 식사는 주요한 코스였다. 관광스케줄에 따라 미국레스토랑에도 가고 때로는 한국식당과 중국식당에도 갔었는데 피는 속일수 없듯이 민족의 입맛도 속일 수는 없었다. 우유와 건빵이 주식인 미국식 음식은 느끼하고 감칠맛이 없었고 한식은 장국이나 김치로하여 입맛은 돋구나 너무나 단조로웠다. 그래도 식사 후 누구나 만족스레 팁을 놓고 일어서는 곳은 바로 중국식당이였다. 달큼생큼한 탕수육이며 입에서 녹아나는 가지튀기며 파란 브로커리 잡채에 미끈한 짜장면까지 거기에다 카레죽, 닭알국이며 캘리포니아와인까지 올려 주니 이아니 진수성찬에 금상첨화가 아닌가? 나는 또 한번 중국에 살면서 만끽하고 있는 우리 음식문화에 자랑을 느꼈다.
미국 서남부 기행을 마치며
미국이란 이 거대한 땅떵어리는 마치 한 주가 한 나라를 방불케 하는 광활한 대지, 다양한 지형과 기후, 다민족, 다문화의 결합 등으로 특수성과 다양성이 공존하는 가운데 융합과 조화를 이루는 신비한 나라였다. 일찍 전쟁과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또는 종교적 박해를 피해 세상 곳곳에서 희망과 꿈을 품고 머나 먼 바다와 륙지를 건너와 삶의 터전을 열었던 미국의 이민력사와 같이 미국은 실로 온 세상의 가지각색 민족이 모여서 어울려 사는《세계인종시장》이요, 문명과 우매, 광명과 암흑이 공존하는 대천세계이며 이민자들에게 있어서는 실로《자유와 기회의 땅》이다. 태평양을 건너 수만리를 머다않고 이 아메리카땅을 찾아 력사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며 대자연의 웅위로움을 마음껏 느껴보는 세상 사람들의 발길은 어제도 오늘도 래일도 끊기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짧은 20일의 미국서남부 려행을 마친 나는 귀향길에 오르며 착잡한 생각에 잠겼다. 첨단의 문명을 자랑하는 선진국 부자의 나라에서 물질적 풍요로움을 만끽하며 살아가는 로스앤젤레스의 한인들, 딸라를 벌어 잘살아 보려고 부모처자를 남겨두고 고향을 떠나 이 머나먼 지구 반대쪽 코큰사람들의 나라에서 피땀을 흘려가며 일하고 있는 조선족 형제자매들, 또 거기에다 온갖 무겁고 어지럽고 힘든 일들을 운명처럼 도맡아 하고 있는 검은색 피부의 사람들, 그들 모두가 그땅에서 그처럼 열심히 살아가고 있거늘 미국이란 이 초대국이 정녕 이들 모두를 껴안을 수 있는 관용과 아량을 베풀었으면,그리고 이들 모두의 꿈이 진정 현실로 되어 좀 더 행복하고 알찬 삶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도 가져보게 된다.
2012년 12월 연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