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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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미국 서남부 기행 댓글:  조회:5942  추천:23  2012-12-17
                                                                          미국 서남부 기행                                                               글/ 강 순 화    제39회 로스앤젤레스 한인축제      지난 10월초, 재단의 초청으로 나는 또다시 미국행에 나섰다. 이번이 세번째로 되는 미국행이지만 한국도 아닌 미국땅에서의 는 도대체 어떻게 진행될가 궁금하기도 하고 신비하기도 한 일이였다. 전세계 720만 해외 한인동포들의 문화행사중 가장 긴 력사와 큰 규모를 자랑하는 로스앤젤레스 한인축제가 올해로 39주년을 맞이한 것이다. 10월4일, 로스안젤레스 코리아타운의 심장부에 있는 에서 4일간 진행 예정인 한인축제는 드디여 막을 열었다.    아침 일찍 떠오르는 태양과 더불어 로스앤젤레스 온 거리는 채색기발과 각종 표어들로 명절의 분위기에 부풀어 있었고 어른 아이 모두들 즐거움에 들떠 있었다. 축제 마당에는 일찍부터 한인들 뿐만 아닌 백인, 흑인, 황색인 등 각종 피부의 인파들이 모여들어 마치 세계박람회나 열린듯 이채를 돋구고 있었다.      2010년 미국 인구조사 결과에 따르면 미국내의 한인인구는 142만 3784명으로 미국 전체 인구의 약 0.5%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지만 신분상의 문제 등으로 인구조사에 집계되지 않은 한인들을 감안한다면 미국내 전체 한인 인구는 약 250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고 한다. 그러니 미국에서의 한인수는 사실상 중국에서의 조선족 인수 보다도 더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금년에는 우리 겨레의 명절 한가위를 이어 제39회째로 되는 한인축제를 개최하면서 미주와 미국 전역에서는 물론 전 세계의 관심을 모아왔다고 한다. 축제의 주제는《한류: 세계를 향한 새로운 도전》으로서 우리 겨레의 얼과 문화 그리고 한류의 우수성을 자랑하고 널리 알리므로서 우리민족 후손들로 하여금 미 주류사회에서 주역으로 발전해 나갈수 있는 터전을 만드는데 기여하고자 하는 세계박람회나 다름없는 큰 행사였다.    주최측의 소개에 의하면 한인축제가 시작된것은 1974년 11월이라고 한다. 바로 39년전, 한국관광공사 도쿄지점 홍보실장을 지닌 김진형씨가 미국으로 이주해 오면서 으로 하여 한국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이민자들을 보고 미국 한인사회의 수도인 로스앤젤레스에 을 세울 꿈을 안고 이 축제를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후 의 주최로 한글간판달기 운동, 한국종합의료원 설치, 주립대학 한인타운교실과 영어학원 설립, 한인학교 설립, 한인타운의 각종 문화행사 개최 등등 많은 활동들을 진행하여왔고 해마다 에는 미국측 주지사, 로스앤젤레스 시장 등 굵직한 지도층들을 초청하여 참여케 함으로서 축제의 권위와 분위기를 한층 높혔다고 한다.    금년에는 로스앤젤레스 중심에 무대를 세우고 한국 의 정채로운 한국전통무용과 농악무 표연, 전통한복모델 표연, 의 시범표연 등 민족풍격이 넘쳐나는 각종 연출들을 진행하였고 또 재미동포단체는 물론 미국, 중국, 일본, 멕시코 등 나라들에서 온 수십개의 문화예술단체들이 각종 민족무용, 노래, "강남스타일"등으로 축제기간 내내 다채로운 축하공연을 펼쳤다.    그 현장에서는 또 생각외로 중국예술인들이 표연하는 도 연출되여 미국땅에서 중국민족의 예술을 직접보고 느끼는 그 심정은 참으로 감개무량하였다. 축제가 진행되는 내내 올림픽 거리는 물론 주요 골목마다에 태극기 물결이 넘쳤고 동포 년로자들은 물론 어린이들까지도 색동저고리와 색바지 또는 치마를 입고 다문화사회인 남가주 일대에 한국의 멋과 풍류를 알렸으며 축제한마당에서는 한국 전 지역에서 직접 들여 온 각종 특색의 생산품과 여러 가지 먹거리들을 선보이면서 큰 장터를 벌리고 있었다. 이제 이곳 한인축제는 미국 로스앤젤레스 코리아타운의 행사만이 아닌 전 세계적 규모의 한민족 전통문화와 예술의 축제가 되고 있음을 심심히 느끼게 하는 현장이였다.      US아주투어와의 미국서남부 관광      급변하는 시대의 흐름속에서 삶을 잃지않기 위해 잊고 지내야만 하는 여유, 랑만, 휴식 그리고 행복, 우리는 려행을 통해 그것들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영원히 살것처럼 래일을 꿈꾸고, 래일 죽을것처럼 오늘을 살아라》라는 말이 있듯이 려행도 마찬가지이다. 려행을 꿈꾸고 오늘 려행이 마지막인 것처럼 즐기고자 하는 마음을 가질 때 무심코 흘러버릴 수 있는 많은 것들이 가슴에 다가오기 마련이다. 아는 만큼 보이고 발품 판 만큼 눈이 깊어진다고 하지 않는가. 이번 미국행에 다시금 돌아보는 미국서남부의 땅은 참으로 자연의 웅위로움과 우주의 신비가 숨쉬는 그 자체였다. 나는 일망무제한 모하비사막에서 끝없이 달리는 려행길 내내 도정신하여 신나게 샤터를 누르고 부지런히 가이드의 말들을 기록하였다.     이번 려행길에 와 함께 돌아 본 코스는: 천사의 도시 로스앤젤레스, 야자수가 늘어선 산타모니카 해변, 장엄한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인랜드/엠파이어, 미국 최고의 동물원을 가진 샌디에고, 모하비사막 자연보호구역에 속해 있는 신비의 땅 데저트지역, 요세미티, 킹스캐년 국립공원, 미국 전역 최고봉인 해발 1만4천5백피트(약4420메트)의 휘트니산과 시에라 네바다 산맥의 최정상을 중심으로 넓게 펼쳐진 시에라 고원지역, 사계절 축제가 끊이지 않는 프레즈노와 이국적인 전취가 물씬 감도는 명품도시들이 즐비한 센트럴벨리지역, 전미의 최고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해안선과 침엽수 숲,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어우러진 변화무쌍한 샌프란시스코의 도심, 세계 최고양질의 와인을 생산하는 와이너리로 유명한 베이비 지역 등이다. 아래에 그중의 몇곳만 소개해 보려 한다.      로스앤젤레스      천사의 도시라는 애칭을 가진 로스앤젤레스는 불가능을 모르는 도시라고 한다. 누구나 언제든지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전 세계 이민자들의 도시, 인종、언어、소득、종교、과거의 경력 등이 모두 다른 수많은 이민자들이 다같이 어울려 살 수 있는 꿈의 도시이다. 로스앤젤레스는 주변의 패서디나, 컬버시티, 잉글우드, 산타모니카, 롱비치 등 위성도시를 포함해 인구 7백만을 넘는 거대한 도시권을 형성하고 있어 미국에서는 뉴욕 다음으로 두번째로 큰 규모의 도시이다. 로스앤젤레스는 미서부와 남부 해안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 펼쳐져 있어 전세계로부터《아메리카 꿈》을 안고 모여들어 온, 가장 많은 이민자가 사는 곳으로 《자유와 기회의 땅》이라 부르며 다종다양한 이국의 문화가 서로 어우려져서 로스앤젤레스만의 독특한 문화를 형성한 서부 미국의 얼굴이라고 한다.    태평양 경제권을 형성하는 지리적 환경, 진취적이고 자유분망한 도시, 1년 내내 온화하고 쾌적한 기후, 230년 력사를 자랑하는 유서 깊은 사적지와 현대적인 문화공간으로 충만된 다운타운, 각 민족 뿌리의 색깔이 엄연하게 드러나는 한인타운、차이나타운 등등의 로스앤젤레스의 모습은 그 자체가 다문화적인 캘리포니아의 진면모였다. 특히 한인타운은 한국의 어느 거리와 다름없을 정도로 다양한 상가와 건물들이 한글간판을 달고 있고 또 차이나타운에 즐비한 한자 간판과 붉은색 건물, 화려한 광동、사천 요리점의 네온사인은 흡사 중국에 온듯한 풍경을 마음껏 연출하고 있었다. 거기에다 또 중국인들의 이민력사와 문화풍습이 전시된 도 있어 중국에서 나서 자란 우리에게는 더욱더 친밀감과 긍지를 안겨 주고 있었다.    아메리칸 원주민 촌락이 산재했던 이 지역은 1542년 탐험가 후안 로드리게스 가브리요가 도착하면서 서방세계에 처음 알려졌고 230년 전인 1781년 에스파냐인 44명이 다운타운 지역에 처음 이주하면서 비로서 로스앤젤레스의 력사가 시작되였다고 한다. 1848년 미국과 멕시코 간의 전쟁 결과로 캘리포니아는 미국에 편입되여 미국령토가 되었다. 남태평양 철도의 완공(1876년), 석유분출(1891년), 파나마운하 개통 및 샌 페드로만 축항(1914년)은 20세기 도시의 급속한 발전기반이 되었으며, 할리우드를 중심으로한 영화산업의 발전, 감귤류 재배와 가공업의 발달, 교통로 확충에 의한 관광의 발달 등은 도시 번영의 기반이 되었고 지금은 정밀기계, 섬유, 화학, 전자산업 및 우주항공산업 등이 중요한 경제적 지주로 로스앤젤레스 형성의 근간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로스앤젤레스에는 캘리포니아주립대학을 비롯한 10여개 주요대학 및 자연력사 박물관, 미술박물관 등이 있고 뮤직센터, 관현악단 등이 있는 교육, 문화, 예술의 중심이기도 하다. 로스앤젤레스는 태평양 건너에서의 인구유입지 역할을 하고 있고 또 과거 스페인 멕시코 령토였기에 히스패닉계의 인구 비률이 매우 높아 라틴아메리카인이 41%나 되고 백인은 36.9%이며 한국, 인도, 중국 등 동양계 이민과 아세아인은 11.5%, 흑인은 10.3%라고 한다. 로스앤젤레스 중심거리인 다운타운은 하늘을 찌르는 고층건물에 대부분 백인들이 집거해 있어 진짜로 미국땅 같았지만 우리가 거주한 코리아타운의 볼먼거리 리월드골목 량옆에는 여전히 많은 멕시코인들이 거주하고 있어 그곳은 아직도 미국땅이 아닌듯 싶었다.      싼타모니카      로스앤젤레스에서 가장 잘 알려진 해변 휴양지 산타모니카는 아름다운 바다가 도시이다. 한미여성회 신영이 이사님 댁이 바로 그곳에 있어서 지난번에도 가서 하루밤을 자고 왔었는데 이번에도 또 초청되여 찾아뵙게 되었다. 아담한 2층 양옥의 앞뒤 마당에는 여러 가지 남방 식물들과 아릿다운 꽃들이 만발하고 있었고 그 옆에는 자그마한 미국 성조기가 정연히 꽂혀 있었다. 첫문을 열고 들어서니 마치 마냥 문어귀로부터 온 객실과 침실 주위의 모든 공간에 수십가지의 크고 작은 골동품들이 빼곡이 진렬되여 있었다. 모두가 한국에서 해마다 날라온 기념품들이란다. 인젠 온 집안이 넘쳐날 정도여서 찾아오는 사람들 기분에는 리해가 안될 정도로 잡다하기 그지없는데 그들 내외는 그것이 애호인지라 끝없이 모이고 또 모이고 싶은 모양이였다. 하도 예전과 다름없는 열정과 따뜻한 마음씨들이 고마워 나는 그런데는 전혀 개의치 않고 낮에는 밖에 나가 바다가의 아름다운 자택들을 감상하고 쉼없이 촬영하느라 여념이 없었고 밤에는 노트북을 펼쳐놓고 밀린 메일들을 체크하고 좋은 글들을 전달하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다. 이튿날 아침에는 약속대로 6시가 되자 그들 내외와 함께 싼타모니카 등산길에 올랐다. 산허리를 빙빙 돌아 한시간 넘게 올라가니 산 꼭대기에 도달할 수 있었는데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싼타모니카 도시도 유난히 아름다웠지만 그보다도 앞에 끝없이 펼쳐진 넓은 바다, 그리고 그 지평선에서 갓 솟아오르는 아침 태양의 진붉은 빛발은 그야말로 감탄을 자아내는 천하의 절경이였다.    최고의 쇼핑거리로 명성이 높고 할리우드영화의 단골 배경으로 되는 산타모니카 피어와 레스토랑에서 신영이 이사님 내외의 초대로 미국식 음식을 맛보는 일도 하나의 특이한 려행 일정으로 되었다. 여러가지 모양과 색갈의 피자와 핸버거 그리고 솜같이 폭신하게 만든 각종 빵들은 그 빛깔도 이쁘고 맛도 좋았거니와 그보다도 항상 초만원을 이루며 모여든다는 가지각색 피부와 체형의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는 그 풍경 또한 가관이 아닐수 없었다.    샌프란시스코      세계적인 려행전문잡지 에서 선정한 자리를 20년 가까이 놓치지 않은 곳이 바로 금문교의 도시 샌프란시스코라 한다. 이번 미국행에서 나의 주요 목적 역시 이 유명한 미국 서남단 도시 샌프란시스코에 가 보는 것이였다. 아주려행사의 관광뻐스를 타고 꼬박 하루 낮을 달려서 도착한 곳이 바로 이 절정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신비의 도시였다. 가파른 언덕 위의 빅토리아풍 건축물, 짙푸른 바다와 부둣가가 이루는 그림 같은 풍경에 독특한 력사와 자유로운 문화가 어우러지고 하늘의 축복을 받은듯한 온난하고 쾌적한 기후는 단 한번 방문한 려행객 일지라도 평생을 두고 그 여운을 즐길 수 있으리 만큼 활력과 매력이 넘치는 도시가 바로 이곳 샌프란시스코였다,    1848년 시에라 네바다산맥 북쪽에서 금광이 발견되면서 수많은 세상사람들이 금을 캐려 이곳에 몰려 들었고 1860년 이후 이곳미국 서부의 경제, 문화적 중심지로 발돋음 하였다 한다. 1906년 대지진으로 도시 대부분이 파괴되였지만 이후 1936년 대형 공공프로젝트가 진행되면서 도시 전체가 새롭게 건설되였고 자유와 젊음을 자랑하는 도시로 되었다.    랑만적인 항구의 짙은 안개 사이로 우아한 자태를 뽐내는 붉은 현수교, 한세기 넘게 구불구불한 언덕 위를 오르내리는 케이블카, 그 자체만으로도 랑만과 추억이 충만하였다. 나는 즉석사진 한장에 15딸러라는 돈도 아끼지 않고 샌프란시스코를 배경으로한 바다가에서 전문가 촬영사들이 찍어주는 기념사진 한장을 소중한 기념품으로 간직하였다.    샌프란시스코 려행지의 한 중요코스인 악명 높은 죄수들의 감옥 알카투로즈 섬은 려행객들에게 남다른 기분과 정서를 남겼다. 1934년부터 1963년까지 캘리포니아련방정부의 형무소로 사용했던 곳으로 단 한명의 탈옥수도 용납하지 않은 무시무시한 감옥이였는데 이제는 유명한 관광명소가 되었다. 과거의 암흑한《인간지옥》이 오늘의 자유로운《유람지》로 변모하여 세상사람들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다.    샌프란시스코 최대 쇼핑가인 피어 39번가는 유난히 돋보이는 명소였다. 본래 선착장이지만 지금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쇼핑가로 자리 잡아 1300여개가 넘는 전문상가들이 밀집되여 있고 각종 콘서트와 길거리 공연들이 있어 사람들에게 신선한 볼거리를 제공하였다. 그곳에서는 또 관광객들 가슴마다에 동그란 귀빈카를 붙혀주고 물건을 50%나 감가해 준다고 하지만 그 딸라들을 따져보면 역시 엄청 비싼 가격이므로 나는 근본 살 엄두도 못내였다.    샌프란시스코 다운타운 린근에 널찍하게 자리잡은《차이나타운》은 일찍 19세기 50년대에 이주한 중국인들이 백인들의 속박에서 벗어나려고 자체로 뭉쳐서 중국타워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1969년 중국정부의 직접적인 지원하에 재개발되여 지금은 인구 80여만이 밀집한 서부 최대 규모의《차이나타운》이라고 한다.《차이나타운》내의 건물들은 모두 중국스타일로 되어있는데 1층은 대부분 상가이고 2-3층은 살림집들 이였다. 큼직하고 화려한 중국글 간판의 상가들과 붉은색 장식들은 그야말로 중국냄새를 물씽 풍기고 있어서 내가 지금 중국땅 한 복판에 서 있지 않나 하는 착각을 일으킬 정도였다. 한국인 가이드는 우리들을 인솔하여 이《차이나타운》을 소개하면서《중국은 대국이라 외국에서 사는 중국인들도 이렇게 크게 배려하는데 우리한국에서는 언제나 해외 한인들을 돌볼 수 있겠는가?》하고 한탄하였다. 우리 관광팀의 43명 려행객들 중 유일한 중국인이였던 나는 저도몰래 내가 나서 자란 조국-중국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으로 하여 흐믓한 기분을 감추지 못하였다.    샌프란시스코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명소는 바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로 불리는 샌프란시스코의 상징인 붉은빛 금문교이다. 금광을 찾던 초기 개척자들의 첫 관문이였던이 다리는 1937년 완공 당시 지주 사이가 1.7마일(2.72km)로 전 세계에서 가장 긴 현수교였다. 이 다리는 당시 샌프란시스코 시민들이 성금을 모아 세운 것이며 또 중국사람들이 건설하였다하여 더욱 의미가 깊었다. 지금은 일년 내내 50여명의 페인터들이 이 다리를 붉은 색으로 색칠하고 있어 그 붉은 색 다리는 유난히 밝게 빛나고 있었고 밤이되면 더욱 찬란한 빛을 뿜는 다리로 변신하였다.    금문교 남단에 자리한 골드게이트 파크는 세계 최대 규모의 공원으로 크고 작은 호수들, 수족관, 미술관, 동물원, 식물원 등이 있어 유람객들로 언제나 북적이였다. 금문교 건너 길을 따라 가면 풍부한 자연 경관과 함께 수많은 예술가들이 생활하는, 집값이 천만딸러에 달한다는 랑만의 거리 마린카운티가 있고 북쪽으로 50마일(80km)쯤 더 올라가면 양질의 와이너리가 산재한 레스토랑들이 있는데 려행자들은 이곳에서 음악을 들으며 휴식을 취하거나 감미로운 포도 향기를 맡으며 숲속을 거니는 한가로움을 즐길 수 있었다. 특히 미국산 프리미엄 와인의 대부분을 생산하는 나파밸리는 와이너리 뿐만 아니라 세계 최고 권위를 인정받는 유명 레스토랑들이 밀집한 곳이다.    엘로스톤 국립공원     최초, 최대는 물론 최고라는 명예로운 수식어를 항시 앞에 두는 국립공원이 바로 미국의엘로스톤 국립공원이였다. 수십만년 전의 화산폭팔로 이뤄진 화산고원지대로 그 어느곳과도 비길수 없는 다채로운 자연 경관을 나타내고 있었다. 엘로스톤 이란 명칭은 바로 오랜 세월 지하에서 분출된 광물성 온천수가 바위 위로 흘러 내리면서 바위의 표면을 노랗게 변색시켜 붙혀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곳에는 길 량옆과 언덕 위에 빼곡이 자라나는 풀들도 모두 노란색을 띠고 있어 마치 황금색 담요를 펼쳐 놓은듯 신기한 풍경을 이루고 있었다.   1978년 유네스코 자연유산으로 지정된 광대하고 아름다운 엘로스톤 국립공원은 미서부의 웅위로운 그랜드캐년 국립공원보다 세배가 넘는 규모로 북미 최대 산중 호수를 품고 있고 세계3대 폭포의 하나인 나이가라 폭포보다도 그 높이가 2배나 넘는다는 엘로스톤 폭포에 1만여개가 넘는 온천을 지니고 있었다. 거기에다 1만피트(3048m)가 넘는다는 산봉우리도 45개나 된다고 한다.    최고라 칭해지는 이유는 이렇게 웅위롭고 특이한 자연 경관도 그렇겠지만 더우기 그 속에서 마음 놓고 뛰노는 야생동물들의 덕이 크다고 한다. 군데군데에서 만나는 야생동물들은 엘로스톤 국립공원의 최고의 자랑거리이고 볼거리였다. 들소, 사슴, 로키양, 회색곰, 물수리 등 많은 야생동물들이 유유자적으로 자연과 어우려져 살고 있었다. 그곳에서는 초원과 늪지, 강과 호수, 산과 숲, 황야와 협곡, 온천, 폭포, 기암괴석 등을 한번에 만날 수 있었고 특히 폭팔하듯 분출하는 간헐천과 우뢰와 같은 소리를 내는 폭포는 자연의 위대함을 온 몸으로 느끼게 해주고 겸손의 의미를 깨닫게 해 준다.     캘리포니아 와인       관광뻐스에서 창밖을 내다 보니 일망무제한 포도밭들이 질서정연하게 줄지어 지나고 있었다. 가이드가 말하지 않아도 어느덧 포도주의 고향, 와인 생산의 중심지에 들어섰음을 실감케 하는 곳이였다.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캘리포니아에서 와인의 력사는 약 200여년전 프란체스카 수도원의 주니페로 세라라는 신부가 수도원을 세우고 최초의 포도밭을 일구면서 시작됐다고 한다. 이후 샌디에고에서 소노마까지를 이어가는 연선에 21개의 수도원이 세워졌고 수도원에서 사용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와인은 캘리포니아와인의 시초가 되었다 한다.    금광이 발견되면서 인구가 폭팔적으로 증가하고 금광이 없는 곳에는 포도밭이 일궈짐에 따라 와인산업의 기반이 형성되였지만 1920년 포도나무의 뿌리를 공격하는 필록세라가 발생하고 1919년에는 금주법이 시행되였으며 경제 대공황이 드는 등으로 한시기 발전하지 못하다가 1960년대부터 꾸준히 회복됐다고 한다. 1976년 미국 독립선언 200주년을 기념해 파리에서 열린 프랑스-미국 와인비교 시음회에서 예상과는 달리 모든 부분에서 캘리포니아와인이 1위를 차지하게 되면서부터 그 이후로 무섭게 성장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고 한다. 숙성이 안된 어린 와인을 대상으로 했기에 제대로 평가되지 못했다는 프랑스측의 주장으로 30년 뒤인 2006년 숙성과정을 거친 와인으로 또다시 경합이 벌어졌지만 결과는 여전히 캘리포니아 와인의 완승으로 결론이 났다한다.    캘리포니아는 다양한 종류의 지형이 나타나는 곳이며 그에 따라 기후도 지역별로 다르다. 캘리포니아 와인은 대부분 태평양 연안과 중앙계곡 사이에서 생산되였다. 서부해안의 여러 만들이 랭기와 적당량의 안개를 제공해 기온과 일조량을 조절하는 역할을 하고 이글거리는 태양의 풍부한 열량과 화산재로 이뤄진 기름진 토양은 최상의 와인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또한 봄철에는 서리가 발생하고 2월에서 10월까지는 비가 거의 오지 않는 기상의 불리함을 과학적으로 극복하는 각종 시스템을 가지고 있어 “불모의 땅”은 지금 세계 최고 수준의 와인을 생산해 내는 “황금의 땅”이 되었다.    미국에서는《한국인을 찾으려면 교회를 찾아가고 중국인을 찾으려면 식당을 찾으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그만큼 중국인들은 전통적으로 음식문화에는 으뜸인듯 싶다.《금강산도 식후 견》이라는 말이 있듯이 4박5일의 려행 일정에서 하루 삼끼의 식사는 주요한 코스였다. 관광스케줄에 따라 미국레스토랑에도 가고 때로는 한국식당과 중국식당에도 갔었는데 피는 속일수 없듯이 민족의 입맛도 속일 수는 없었다. 우유와 건빵이 주식인 미국식 음식은 느끼하고 감칠맛이 없었고 한식은 장국이나 김치로하여 입맛은 돋구나 너무나 단조로웠다. 그래도 식사 후 누구나 만족스레 팁을 놓고 일어서는 곳은 바로 중국식당이였다. 달큼생큼한 탕수육이며 입에서 녹아나는 가지튀기며 파란 브로커리 잡채에 미끈한 짜장면까지 거기에다 카레죽, 닭알국이며 캘리포니아와인까지 올려 주니 이아니 진수성찬에 금상첨화가 아닌가? 나는 또 한번 중국에 살면서 만끽하고 있는 우리 음식문화에 자랑을 느꼈다.    미국 서남부 기행을 마치며    미국이란 이 거대한 땅떵어리는 마치 한 주가 한 나라를 방불케 하는 광활한 대지, 다양한 지형과 기후, 다민족, 다문화의 결합 등으로 특수성과 다양성이 공존하는 가운데 융합과 조화를 이루는 신비한 나라였다. 일찍 전쟁과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또는 종교적 박해를 피해 세상 곳곳에서 희망과 꿈을 품고 머나 먼 바다와 륙지를 건너와 삶의 터전을 열었던 미국의 이민력사와 같이 미국은 실로 온 세상의 가지각색 민족이 모여서 어울려 사는《세계인종시장》이요, 문명과 우매, 광명과 암흑이 공존하는 대천세계이며 이민자들에게 있어서는 실로《자유와 기회의 땅》이다. 태평양을 건너 수만리를 머다않고 이 아메리카땅을 찾아 력사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며 대자연의 웅위로움을 마음껏 느껴보는 세상 사람들의 발길은 어제도 오늘도 래일도 끊기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짧은 20일의 미국서남부 려행을 마친 나는 귀향길에 오르며 착잡한 생각에 잠겼다. 첨단의 문명을 자랑하는 선진국 부자의 나라에서 물질적 풍요로움을 만끽하며 살아가는 로스앤젤레스의 한인들, 딸라를 벌어 잘살아 보려고 부모처자를 남겨두고 고향을 떠나 이 머나먼 지구 반대쪽 코큰사람들의 나라에서 피땀을 흘려가며 일하고 있는 조선족 형제자매들, 또 거기에다 온갖 무겁고 어지럽고 힘든 일들을 운명처럼 도맡아 하고 있는 검은색 피부의 사람들, 그들 모두가 그땅에서 그처럼 열심히 살아가고 있거늘 미국이란 이 초대국이 정녕 이들 모두를 껴안을 수 있는 관용과 아량을 베풀었으면,그리고 이들 모두의 꿈이 진정 현실로 되어 좀 더 행복하고 알찬 삶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도 가져보게 된다.                                                                                       2012년 12월     연길에서   
13    사진으로 보는 미국 뉴저지의 단독주택들 (2) 댓글:  조회:4030  추천:63  2010-03-04
12    사진으로 보는 미국 뉴저지의 단독주택들 (1) 댓글:  조회:4181  추천:71  2010-03-03
11    사진으로 보는 미국 동서부 카지노건물 내외의 풍경 댓글:  조회:3726  추천:55  2010-03-02
사진으로 보는 미국 동서부 카지노건물 내외의 풍경
10    사진으로 보는 미국의 수도 워싱톤의 이모저모 댓글:  조회:3463  추천:55  2010-02-24
사진으로 보는 미국의 수도 워싱톤의 이모저모
9    사진으로 보는 세계영화의 중심 할래우드 촬영현장 댓글:  조회:3242  추천:47  2010-02-23
사진으로 보는 세계영화의 중심 할래우드 촬영현장
8    사진으로 보는 뉴욕 맨하탄과 플레싱의 중국인거리 댓글:  조회:3572  추천:45  2010-02-20
7    사진으로 보는 뉴욕지구 관광명소들 댓글:  조회:3439  추천:45  2010-02-20
사진으로 본 뉴욕건물들
6    사진으로 보는 뉴욕 맨하탄과 플레싱의 한인거리 댓글:  조회:3748  추천:36  2010-02-15
사진으로 보는 뉴욕 맨하탄과 플레싱의 한인거리
5    사진으로 보는 3월의 뉴욕 맨하탄 중앙공원 댓글:  조회:3583  추천:45  2010-02-11
4    사진으로 보는 뉴욕의 고층건물들 댓글:  조회:3294  추천:43  2010-02-10
3    사진으로 보는 미국 뉴욕의 중심거리 댓글:  조회:3491  추천:37  2010-02-09
2    내가 본 미국 땅의 이모저모 (3) - 강순화 댓글:  조회:4427  추천:59  2009-12-07
내가 본 미국땅의 이모저모 (3) 강순화   시민들의 투철한 준법정신: 주민을 위한 지방자치 제도는 매 주마다 조금씩 법이 달랐다. 그래서 뉴욕에서 범법한 사람이 뉴저지에 건너가면 무사할 수도 있다고 하여 두 주사이의 지하 수로를 이라 이름 지었다고 가이드는 말한다.   교통규칙은 위반만하면 엄중한 후과를 빚어내기에 사람마다 엄하게 지키고 있었다. 골목길마다에는《STOP》라는 붉은 패말이 세워져서 모든 차량들은 그곳에서 잠간 멈추었다가 전후좌우를 다 확인하고야 재출발하는 것이 습관화되었었다. 신호등을 위반하여 사고가 생기면 위반한자가 죽었어도 운전자한테는 책임이 없도록 법이되여 있었고 음주운전이나 교통규칙 위반시에는 보통 3000달러의 벌금에 변호사비 3000달러를 더 내야 간금되지 않을 수 있단다. 그러나 이렇게 거액을 벌금하고 감방에 가지 않았다 해도 그 사람의 평생 시스템에는 범법 전과자로 락인이 딱 찍힌다니 그 누가 감히 교통규칙을 위반하겠는가? 연길에서는 흔히 볼수 있는 크고 작은 교통사고들을 그곳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세차하느라 어지러운 물이 동네를 어지럽히면 이웃은 즉시 위생환경 부분에 신고하여 500$의 벌금을 내도록 하며 이웃에서 잔디를 깍지 않아도 신고하고 개 배때기를 발로 차도 신고되면 6개월 간금되는 괴상한 일도 있다. 아이가 아빠와 놀다가 상하여도 엄마가 신고하면 아이한테 벌금 200$를 주어야 하고 남편이 음주 후 폭행하면 안해가 신고하여 경찰이 잡아갈 수도 있었다. 커피숍에서 종업원의 부주의로 손님에게 커피를 쏟았으면 신고당하여 수천달러의 벌금을 물면서라도 그 커피숍의 이미지를 살려야 하며 식당에서 손님이 종업원을 욕하고 때리면 수만달러의 벌금을 내야 하므로 오히려《맞으면 번다》는 설까지 돌고 있다. 여성들이 가슴증대 실리컨의 집단소송으로 한 성형병원에 2억달러의 배상금을 안긴적도 있다. 차를 살짝 건드렸는데 싸움이 터져 흑인애가 쇠몽둥이를 휘둘렀는데 그 소송으로 150만달러의 벌금을 해야 했다고 한다. 아이 네댓씩 쌍용밀차에 끌고 다니는 멕시칸들이 희구하여 내가 카메라로 찍으려 하니 곁에 있던 친구가《자칫하면 신고 당하여 큰 벌금을 한다》고 알려주어 나는 흠짓 놀랐다. 신고, 소송문화가 우리와는 너무나 달라서 어떤 일들은 참으로 알고도 모를 일이였다.                      어린애 5-6명씩 끌고 다니는 재미 멕시코인들  례의문화: 아침운동으로 길을 걷는 사람들 사이나 출근길에는 언제나 서로《하와유?(How are you?)》,《꿋모닝!(Good morning?)》하고 인사를 나누며 퇴근 할때도《씨유 투모루! (See you tomorrow, 래일 다시 만납시다)》하고 꼭 서로 찾아서 인사를 나눈다. 자가용 차안에서도 밖에 가는 사람한테 인사를 하고 먼길을 갈려면 자기 차를 타라고 말을 건넨다. 마당에서 자기 차를 닦다가도 뒤에서 내가 걸어오니 얼른 돌아서서《헤로!(Hello!)》하고 인사한다. 그리고 감사하다(Thank you)와 미안하다(I'm sorry)는 말은 언제 어디서나 사람마다 거의 입에 달고 있는다. 처음에는 이런 환경이 좀 쑥스럽고 부담스러웠는데 그것도 시간이 지나니 습관화되고 다정해 보여서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식사시간에는 누구나 자기로 자기밥을 챙겨먹고 서로 권하지 않았으며 식당에 가서도 자기 몫은 엄격히 자기가 결산하는 모양이 좋기는 하나 좀 어색하기도 하였다. 권하고 나누고 함께 먹고 마시며 큰솥 밥을 먹는 우리 문화와는 확연히 달라서 어쩐지 좀 린색한 면도 없지는 않았다.   기부문화: 억만장자들이 재산기부로 기쁨을 누린다는 기사가 종종 신문에 실린다. 400억달러의 재산으로 세계 최고부호로 꼽히는 빌 게이츠 MS창업자는 작년 6월부터 경영에서 손을 떼고 재산의 대부분을 부인 멜린다와 함께 2000년에 설립한 세계 최대의 자선기관 빌&멜린다 재단에 기부하여 빈곤,질병퇴치와 교육불평등 해소 등 자선사업에 전념하였다. 그는《모든 억만장자는 재산의 대부분을 기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그러면 자신이 기쁨을 누릴 뿐 아니라 자녀가 행복해지며 세계가 더 좋은 곳으로 변한다... ...엄청난 부는 부자로부터 가난한 사람으로 이전되여야 한다 ... ...그렇다고 자녀들에게 아무것도 남겨주지 않거나 자신을 위해 일부를 남겨둬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는 그가 한 말이다.    370억$의 재산으로 세계 제2위의 부자인 워런 버핏 버그셔 헤서웨이 회장도 2006년 307억$의 주식을 빌&멜린다 재단에 기부하였다.   나와 함께 있었던 복지센터의 간호사를 비롯한 많은 미국인들이 국내외의 장애인 아동들을 입양하고 있었는데 정상적이지도 못한 그 아이들을 천사의 마음으로 돌보고 있었다. 참으로 존경스러운 사람들이다. 물론 이런 가정들에 한해 국가에서도 일정한 보조금을 정기적으로 준다고 한다.    미국 LA타운에 한국계 미군 용사이며 미군에서는 아세아계 첫 대대장을 지닌 고 김영옥 대령의 이름을 딴《김영옥 중학교》가 지난 9월 개교하였다. 이 학교도 도산 안창호 선생의 아들인 랄프안 박사를 비롯한 김영옥 대령의 친구 20여명이 단체를 무어서 후원하여 지은 것이다. 그들은 앞으로 고등학교도 건립할 타산이였다. (다음에 이음)  
1    내가 본 미국 땅의 이모저모 (1) 댓글:  조회:5097  추천:95  2009-12-01
             내가 본 미국 땅의 이모저모 (1)                                                       글 / 강순화       금년 봄 나는 또다시 두번째로 미국땅에 들어설 기회를 가졌다. 작년 첫걸음은 15일간의 미국서부관광이였으니 진짜《말타고 꽃구경》하였다면 금년의 6개여월간의 체류는 어느정도 미국사회에 대해 료해 할수 있는 계기였다. 비록 짧은 소견이나마 를 사랑하는 독자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에 필을 들었음을 밝히고 싶다.         뉴욕 맨하탄 중심거리    미국이란 나라는 북미대륙의 48개 주와 본토 밖의 알래스카 및 하와이를 합쳐 총 50개 주로 구성된 인구 2억8천만명의 련방공화국이다. (2000년인구조사국) 국가의 정식 명칭은 미합중국(United States of America)이며 수도는 워싱턴이다.    미국은 마치 한 주가 한 나라를 방불케하는 광활한 대지, 다양한 지형과 기후, 다민족, 다문화의 결합 등으로 다양성과 특수성이 공존하는 가운데 융합과 조화를 추구하는 나라였다. 일찍 전쟁과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또는 종교적 박해를 피해 세계 도처에서 각기 다른 희망과 꿈을 품고 머나 먼 바다와 륙지를 건너와 삶의 터전을 열었던 미국의 이민역사와 같이 미국은 실로 세계 방방곳곳에서 이민하여 온 다양한 민족이 어울려 사는《세계인종시장》이요, 문명과 우매, 광명과 암흑이 공존하는 대천세계이며 이민자들에게는 실로《자유와 기회의 땅》이였다.    금년 7월4일은 미국 독립 233주년이다. 짧은 200여년의 력사를 가진 나라가 세계의 초대국이요, 고도로 발달한 선진국이 된것은 그들의 투쟁사가 보여주고 있다. 수도 워싱턴에 있는 2차세계대전참전 기념비에는《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Free-dom is not free)》라고 새겨져 있다. 즉 목숨을 내건 지도자들의 용기와 수많은 영웅들의 고귀한 희생 및 인민들의 피의 대가로 미국의 독립이 쟁취되였음을 말한다. 8년간의 독립전쟁에서 미국군 5만명, 영국군 6만8천명이 사망하였다 한다.    현재 미국내 아세아 인구는 1520만명인데 그중 25세이상 인구에서 대학 학사이상 학령자 50%, 대학원 석사 이상이 20%로서 미국인의 28%, 10%보다 훨씬 높다. 이는 아세아 이주민들의 문화적 소질과 높은 교육열을 충분히 보여준다. 아세아계 인구중 중국계가 354만명으로 가장 많고 다음으로 필리핀 305만명, 인도계 277만명, 베트남 164만명, 한인 156만명이다(2007년 7월). 미국내 류학생수는 72만 2272명인데 그중 한국류학생만 11만으로 15.2%를 차지한다(2008 한국외교통상부).    미국땅에 들어서서 가장 인상깊은 것은《일한 만큼 소득할수 있는 나라, 세금의 나라, 팁의나라》라는 것이다. 그 누구든 일단 그땅에 발을 들여 놓기만 하면 먹고 자고 쓰는 등 소비를 해야 하는데 모든 상품 가격의 5-9%의 세금을 내야하고 식당, 호텔, 미용실, 택시 등 서비스업에는 소비의 10-15%의 팁을 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그 땅에 사는 매 사람이 국가에 대한 공헌이고 그 나라의 서비스에 대가를 지불하는 것으로서 이런 합리적인 시스템은 이미 시민의식으로 굳어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시민권자라면 매 사람마다에 평생의 시스템이 이루어져서 그 언제 어디에서나 이미 입력된 그 사람의 경력과 공과여부를 확연히 들여다 볼수 있었다. 하기에 취직이던 퇴직이던 그 기록에 따라 공평합리하게 혜택을 받거나 혹은 영향을 받게되여 있다. 이것이야말로 선진대국의 고도로 발달한 시스템이 아닌가.     불법체류자도 직장의《온라인 직원신원확인 시스템》으로 확인하면 금방 들어나게 되어 있어 최근에는 봉제공장, 건축업, 음식점 등에서 수색되고 있는데 2008년에는 도합 1.100명이 적발되였고 그중 고용주가 처분 받은 것만 100명이라고 한다. 그런데 아세아계 상인은 비법이민 총인수의 11%나 차지하고 있다니 온라인 확인은 아직도 대다수 직장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하고 있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로산젤레스(L0s Angeles):   천사의 도시로 불리는 미국 서부의 관문도시 로산젤레스는 미국에서 두번째로 큰 방대한 도시이며 전세계 방방곳곳에서 밀려들어 온 이민자들의 도시이다. 지구상의 모든 구석구석에 스며 있는 꿈과 믿음, 언어 풍속과 음식 그리고 건축물들이 여러 문화와 문명으로 어우려지고 뒤섞여져 오히려 로산젤레스만의 독특한 문화가 형성되여 있었다. 하여 로산젤레스는 미국 이민의 사령탑이고 이민자들의 천국이라고 한다. 총 인구는 383만명인데 그중 라틴 아메리카 41%, 백인 36.9%, 아세아인 11.5%, 흑인 10.3%이다. 작년에는 밤 비행기로 도착하였기에 불야성을 이룬 로산젤레스를 보았었는데 금년에는 한낮에 도착하게 되어 비행기 창구로 내려다 본 로산젤레스는 그야말로 거대한 공룡마냥 온 대지를 누비며 꿈틀거리고 있었다.    로산젤레스의 코리아타운에는 100만의 한인들이 집거하여 있었다.《명동교자》, 《뉴서울호텔》,《김씨전기》,《약손한의원》,《종로설렁탕》,《한복이불》,《목마르죵》,《머리하는 날》,《코리아 플라자》등등 한글 간판들이 유표하게 걸려져 있었고 한인 방송국, 한국신문과 잡지 그리고 한인학교와 병원, 한인교회까지 구전히 갖추어져 있어서 마치 서울종로의 한 거리를 방불케 하였다.     로산젤레스에는 중국에서 건너간 조선족들도 8천여명이나 된다고 한다. 우리 단체가 KAWA한미여성회와의 문화교류활동으로 신문과 방송에 소개되자 재미조선족협회에서 소식을 듣고 우리를 찾아왔다. 연변대학법률계 출신인 강성 리사장과 연길복장창 싸이판 출신인 김정화 상담소장은 재미조선족들을 위해 많은 좋은 일들을 하고 있었다. 이민자들의 주거마련과 취직을 위해 항상 동분서주하고 있었으며 자기 집에 직접 데려다 한동안씩 거처시킨 조선족들만 하여도 30여명이나 된다고 한다. 현재 강성이사장은 한 합자기업의 부사장직을 맡고 있었으며 김정화씨는 상담소 출근 외 짬짬의 시간으로 조선족들의 우편배달과 카드판매, 보건품, 의학품 전달 등 업무들을 맡아하고 있었다.     헐리우드(HOLLY WOOD):    로산젤레스 코리아타운 북서쪽에 위치한 세계적인 영화의 중심인 헐리우드는 1915년 닭농장을 전환하여 영화 스튜디오를 열고 40년 이상 방문객들에게 헐리우드의 흥분을 선사하여 왔다고 한다. 스튜디오에는 전성기 시절의 옛 건물과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화관들 그리고 중국사원식의 호화로운 건물들이 줄지어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멋진 콘서트 전용 극장에서는 신비한 우주여행을 할수 있었는데 좌석에 앉아서도 《지구》를 몇 바퀴씩 돌고돌며 대기속에서 뿌려지는 물기로 옷깃을 적시는 등 환상적인 체험을 할수 있었다. 유명한 영화 촬영현장에서는 헐리우드 최고의 스턴트 맨들의 묘기로 관광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기기묘묘하고 온몸이 소림에 오싹하도록 사람을 놀래우는 300여가지의 아이템과 영화에서의 비행기 충돌 장면, 강력한 자동차 추격장면, 건물들이 불타고 폭팔하는 장면 그리고《미래에 북극의 빙하가 녹아 내리고 홍수가 파도처럼 밀려와 나라들이 물속에 잠기는 시대》를 묘사한 어마어마한 액션장면들이 실제로 표연되여 관객들의 끝없는 환성을 자아내기도 하였다. 헐리우드는 참으로 혼자 보기엔 너무도 아까운 환상의 세계였다.    뉴욕(New York) :   뉴욕시는 맨하탄, 브롱스, 브루클린, 퀸즈, 스테튼 아이랜드 등 5개 큰 보로로 구성되였고 큰거리 옆의 고충건물들은 하늘을 찌르는 듯 높이 솟아 있어 그야말로 웅장하고 번화하고 휘황찬란한 현대화의 도시였다. 뉴욕은 미국에서 제일 큰 도시이고《잠들지 않는 도시》라는 미명을 가지고 있다. 밤이나 낮이나 할것없이 건물 한면을 뒤덮고 있는 대형의 영사막들에서는 오색현란한 광고모델들이 끊임없이 바뀌여가면서 연출되고 있어 말 그대로 천변만화하는 대천의 세계였다.  《세계인종시장》이란 이름에 손색없이 매년 수많은 세계 각국의 이민자들이 뉴욕에 몰려들고 있는데 지난 한해만도 5만 3400명의 인구가 증가되여 현재 뉴욕 인구는 836만명이나 되었다. 온 거리에는 갖가지 피부와 머리색갈의 사람들이 붐비고 있었고 움직이는 인간 광고맨들의 익살굿은 유모아적 모습들은 무시로 행인들에게 유쾌한 웃음을 던져주었다. 맨하탄의 중심심거리 아이랜드를 활보하느라면 꼭대기가 아득히 바라보이는 100여층의 고층건물들이 가지각색의 건축자료와 설계들로 현대화적이기도 하고 또 서양화하여 고풍스럽기도 하였으며 온통 푸른 유리벽으로 이루어 진 건물들은 눈부신 빛을 반사하고 있어 저도몰래 경탄을 금할 수 없었다. 참으로《뉴욕은 세계 문화의 중심이자 금융의 중심이구나》하는 것을 한가슴 뿌듯이 느낄 수 있는 거대한 문명의 도시였다.      코리아타운(Korea Way): 뉴욕시티의 맨하튼 32가도 코리아타운이였는데 이전에는 언어적 장벽과 독특한 구조로 외부인들에게 《숨겨진 세상(Hidden World)》,《맨하탄의 또다른 세상》으로 알려졌었다 한다. 지난 40년간 한국 이민자의 대량유입으로 이곳은 풍부한 먹거리와 놀거리를 제공하는 각종 서비스업의 새로운 시장으로 되었다. 한인타운의 심장부격인 브로드웨이-5애브뉴 사이의 32스트리트는 24시간 운영되는 식당과 뷰티스파, 해질역에 문을 여는 노래방, 새벽 3시에는 한인타운에서만 즐길수 있는 "올나이트 스파" 등으로 다양한 서비스업들이 흥성하고 있었다. 외국 류학생들이 제일 많이 몰려들고 또 아르바이트를 많이 하고 있는 곳도 이곳이다. 뉴욕타임스는 최근 인터넷판 톱기사로 이 코리아타운을 집중 소개하였고 금년 뉴욕시 정부는 이곳을《2009년 뉴욕시 9대 관광명소》로 제정하였다. 지하철 환승역을 옆에 끼고 있어 교통도 편리한 이 코리아타운의 길 량옆에는 고려당, 고려서점, 한국은행, 신세기백화점, 한국옷가계, 한국사우나, 한국맛사지업체와 여러가지 음식점, 만두집, 네일살롱과 미용실 등등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길거리에서는 잔잔한 한국 말씨들을 무시로 들을 수 있었고 밤이고 낮이고 서양인들과 함께 붐비며 지나다니는 한인남녀들을 수시로 볼수 있었다.    자유녀신상(Statue of liberty):   뉴욕시 뉴욕만의 리버치 아일랜드에 있는 자유녀신상은《아메리카 드림》을 안고 뉴욕항구로 들어오는 이민자들이 가장 먼저 보게 되는《횃불을 치켜 든 거대한 녀인상》이다. 자유와 행복을 찾아 수만리 물길을 헤쳐 온 사람들에게 눈앞에 우뚝 솟아 있는 위풍당당하고 단호한 녀인의 모습은 밝은 미래를 약속하는 징표처럼 보인다. 이 자유녀신상은 1886년 미국독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프랑스에서 우호증진을 위한 선물로 기증한 것이라고 한다. 정식 명칭은 세계를 비치는 자유(Liberty Enlightening the World)이지만 통상 《자유의 녀신상》으로 알려져 있다.   녀신상의 무게는 225톤, 높이는 47.5메터, 지면에서 횃불까지 높이 93.5메터이고 녀신의 손가락 하나가 2.44메터나 된다니 참으로 거대한 규모의 녀인상인 것이다.    엘리스 아일랜드 이민박물관:   자유녀신상 바로 옆에 있는 엘리스 아일랜드 이민박물관은 실로 미국 이민사의 애환이 서린 유서 깊은 곳이였다. 미국 국민의 근 절반이 이곳을 거친 이민자들의 후손들인데 1892년부터 1954년까지 약 1200만명의 이민자들이 증기선 3등 칸에 고단한 몸을 싣고 미국에 처음 들어오면서 반드시 거쳐야 했던 곳이다. 이민들은 이곳에서 법적 절차와 신체검사를 통과한 뒤에야 비로서 미국 입국을 허가받았었다. 하여 현재 미국인 40%이상인 약 1억명의 《뿌리》가 이 섬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1990년에 자유의 녀신상과 함께 국립공원으로 만들어져 개관하였고 해마다 200만명의 세계 각국 유람객들이 이곳을 방문하고 있었다.                  뉴욕 당인거리에 있는 공자동상 앞에서   뉴욕시의 당인거리(唐人街)   리틀 이태리와 로어 이스트 사이드 사이를 중심으로 형성된 차이나타운은 현재 미국 최대의 중국인 거리가 되었다. 네거리 량옆 가계의 간판은 온통 울긋불긋한 중국어로 뒤덮혀 있었고 건물들은 물론 전화 부스조차 탑 모양의 디자인으로 되여 관광객들의 시선을 이끈다. 더욱 감명 깊은 것은 중국의 대 성인이요 동방유교의 시조인 공자의 동상이 당인거리 한 복판에 우뚝 서 있었고 그 길 건너편에는 1840년 영국의 아편을 몰수해 불태운 청나라의 애국 흠차대신 림측서의 동상이 의젓히 자리잡고 높이 서있는 것이였다. 엄연한 미국땅인데 마치 중국의 한 직할시나 된듯이 그 기나긴 력사와 함께 중국인들이 그처럼 당당하게 뿌리내리고 있는 모습은 참으로 신기하고도 경의로왔다. 지금 뉴욕지구에만 중국인 100만명이 거주하고 있다니 실로 중국 대륙의 한 도시가 아닌가 착각할 만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세계무역중심: 세계의 3분의1의 금이 저장되여 있다는 110층으로 된 금용중심과 2001년 9월11일 테러리스트들이 납치한 여객기로 충돌하여 2750명의 무고한 사망자를 내고 사라진 세계무역중심 쌍둥이 빌딩 자리는 지금 추모공원을 세우기 위해 재건축하고 있었다. 많은 관광객들이 그 충격적인 테러사건의 현장을 둘러보기 위해 그곳을 찾는다. 그 현장에서 기념촬영을 남기면서 나는 만감이 교차했다. 테러리스트들이 주목한 세계의 심장이 바로 그곳이였기 때문이리라.     련합국총부: 어마어마한 세계적 기구인 련합국총부도 개방하여 대외로 관광하게 하고 있었는데 가장 인상적인 것은 련합국총부 복도 곳곳에 줄지어 걸려있는 력대 련합국 사무총장들의 초상화였다. 제8대 사무총장 자리에 한국인 반기문총장의 미소띤 얼굴이 환하게 보여서 같은 민족의 일원으로서 가슴 뿌듯하고 감개무량하였다. 비록 그의 저자세와 겸손(low profile)이 미국인들에게는《유엔의 보이지 않는 사람(lnvisible man)》으로 평가받고 있었지만 반총장의 측근들은 그를 조용한 외교의 달인으로 묘사하면서 유엔 평화유지군 배치나 기후변화 문제를 세계 지도자들의 화두로 올린 점 등 막후에서의 그의 역할은 컸다고 말하고 있다.    라상관(蜡像馆): 뉴욕중심 시대광장 옆에 있는《라상관》에는 미국의 력대 총통과 유명인사들 그리고 우주항공 등 과학계와 문예체육계 공신들의 형상이 밀랍으로 만들어 산 사람마냥 전시되여 있어 관광객들의 흥미를 자아 냈다. 사람들은 그 형상들 옆에서 쉴새없이 카메라 샤터를 누른다. 나도 오바마대통령 부부 밀랍상과 함께 기념촬영을 했는데 그 사진을 보고 친구들이《뉴욕에서 오바마부부도 만났었는가》라고하여 웃음보를 터트렸었다.    세인트 페드릭스성당: 록펠러센터 건너편에 있는 세인트 페드릭스성당은 미국에서 가장 크며 가장 유명한 성당이다. 1879년 5월 25일에 개방하였다는데 그 높이는 101메터이고 건물에 19개의 커다란 종이 달려 있으며 성당내에는 좌석이 2400석이나 되지만 주일미사에는 항상 자리가 없다고 한다. 웅위롭고 화려한 성당은 마치 고대 로마의 황궁마냥 고풍스럽고 신성하여 그곳에 들어서는 우리들의 마음을 숙연케 하였다.                                       워싱턴의 백악관    워싱턴특구(WASHINGTON D.C.) :   워싱턴 D.C는 1776년 당시 독립군 사령관이며 미국의 제1임 총통 워싱턴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것이다. 인구 598.000명을 가진 워싱턴 D.C와 그 주변 지역은 미국 건국의 력사적 현장이다. 미합중국 헌법이 이곳에서 채택되였고 독립선언도 여기에서 선포되였다. 1791년에 세계 최초의 계획형 수도로 건설되였고 웅장한 건물들과 인상적인 기념물들 그리고 련방정부의 최고 행정기관들이 몰려 있어 워싱턴 D.C는 살아 있는 미국의 상징이라고 한다. 하늘을 찌를듯 우뚝 선 워싱턴 기념탑, 몰 주위에 즐비하게 들어선 세계적 수준의 박물관들, 그리고 삼권분립의 현장을 보여주는 백악관, 의사당, 대법원 등은 미국의 민주주의 심장으로 기능하고 있다.   워싱턴주는 면적의 55%가 산림지대로 상록수의 푸르름과 대자연의 싱그러움이 넘치는 곳이다. 태평양을 따라 펼쳐진 산과 바다에 110개의 공원이 있고 침엽수가 빽빽이 들어 선 숲과 맑은 호수가 연출하는 아름다운 풍경은 가히 미국의《스위스》라고 불릴만 하였다.    백악관: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뉴스의 산실이자 미합중국 대통령이 거처하는 관저이다. 미합중국 건설의 아버지 조지 워싱턴은 이곳에서 살지 않았고 제2대 대통령인 존 애덤스 대통령이 1801년 이곳에 처음 입주했다고 한다. 원래 이름은《행정부 관저》였으나 1812년 전쟁 당시 불에 탄 흔적을 지우기 위해 흰색으로 외관을 칠하면서《백악관》이라는 별명을 가졌다 한다. 미국 권리의 상징인 백악관은 건물 꼭대기 복판에 성조기를 휘날리고 있었고 량옆 건물들은 푸른 나무숲에 싸이여 그 진면모를 가리고 있어서 더욱 신비하고도 존엄스러웠다.    링컨기념관: 몰의 서쪽에 위치한 노예해방의 수령으로 불리는 미국 제4임 총통 링컨의 기념관은 워싱턴 D.C에서 가장 감동적인 명소중의 하나였다. 링컨대통령을 기리기 위해 1914년에 세워진 이 기념관은 미국현대사의 상징이기도 하다. 미국내 50개주에서 가져온 대리석으로 만든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 스타일의 웅장한 건물 안에는 거대한 링컨 대통령 동상이 앉아 있다. 링컨 기념관은 앨링턴 국립묘지와 함께 미국에 온 각국 정상과 귀빈들의 단골 방문장소로 되고 있다. 은빛 대리석으로 된 높은 계단 우에 웅장하게 세워진 건물은 올려다 보는 것만으로도 미국인들의 자부심을 느낄수 있었다.      2차 세계대전 참전기념관 : 링컨 기념관과 워싱턴 모뉴먼트 사이에 자리잡고 있는 기념관은 대리석과 청동으로 만들어 진 기념물과 거대한 광장으로 구성되여 있다. 광장을 둘러 싼 56개의 대리석 기둥은 전쟁에 참전했던 미국병사 1천600만명의 출신지인 50개주와 지역을 상징한다. 남쪽과 북쪽에는 대서양과 태평양을 의미하는 대리석 조형물이 있고 주변에는 진주만 공습으로부터 히로시마 원폭투하까지 시간순으로 2차세계대전 격전지들이 새겨져 있다.     국립 우주항공박물관: 오바마대통령이 취임연설을 하였던 국회산장의 파란 잔디로 뒤덮힌 넓다란 광장을 세로 질러가면 푸른색 유리건물로 찬란한 빛을 반사하는 국립우주항공박물관이 관광객들의 발길을 이끌고 있다. 모두 23관으로 나누어 진 전시관에는 라이트 형제가 만든 최초의 비행기로부터 린드버그가 최초로 대서양 횡단 비행에 성공한《스피릿 오브 세인트루이스호》, 우주를 향한 인류의 꿈을 실현시켰던 아폴로11호, 달 착륙선과 달에서 채취해 온 화석, 화성의 무인탐사위성 등 수만점의 전시품이 진열되여 있었다. 또 대기권 상공에서 지구의 모습을 내려다보거나 우주선을 타고 우주비행을 하는 경험을 할수 있는 아이맥스 영화관도, 태양계 이외의 천체를 경험할 수 있는 알버드 아인슈타인 천문관 등도 마련되여 있어 그야말로 현대과학의 극치를 체험할 수 있었다.        비성(費城): 비성은 미국의 10년 수도였고 미국에서 여섯 번째로 되는 큰 성시이다. 이곳에는 미국독립을 세계에 선포한 미국독립기념당이 있다. 기념당 앞에는 1752년《권리헌장(权利宪章)》반포 50주년을 기념하여 만들어 졌고 1776년 7월 8일 독립선언의 발표를 위해 울렸던 2000파운드나 되는《자유종》이 있다. 이《자유종》은 미국 노예해방의 상징이고 미국 독립 투쟁의 상징으로 빈주 정부대청에서 90여년간 울렸다고 한다. 지금은 오랜 세월로 닳고 금이 가서 소리가 나지 않치만 의연히 력사의 견증자로서 사람들에게 과거를 잊지 않도록 경종을 울린다고 한다.《자유종》에는 영문으로《이 땅에 자유의 소리를 불러 일으켜 매 국민의 마음에 울려 퍼지게 하리라 》는 글발이 뚜렷이 쌔겨져 있었다.   라리동(羅利洞): 미국 동부 관광에서 뉴욕으로 돌아 오는 마지막 코스는 라리동관광이다. 1879년 세 아이가 산중에서 놀다가 발견하여 유명한 관광코스로 되었다 한다. 중국 운남성 려고호의 100여메터 높은 산우에 있는 신비한 석굴《녀인동》도, 한국 제주도의 천년기념물《만장굴》도 가 보았지만 이번 미국의《라리동》처럼 화려하거나 현대화적이 되지는 못하였다. 라리동 동굴 입구에는 세계 각국의 언어로 된 미니 수화기가 마련되여 있어 20개 구간으로 나뉘여진 동굴 안의 매 구간에 대해 능히 우리 언어로 상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동굴 속 암석들은 온통 황금빛으로 되어 있어 더없이 황홀하였고 더우기 자유자재로 구간마다에 대해 상세한 해설을 듣게 되니 참으로 편리하고도 생동하였다.     니아가라대폭포(NIAGARA FALLS 尼加摞大瀑布): 누군가 미국에 갔다가 니아가라대폭포를 못본다면 평생의 유감이 된다고 하기에 역시 하나의 중요한 여행코스로 잡았다. 미국과 캐나다 국경에 있는 이 거대한 대폭포는 말 그대로 세계 3대 폭포의 하나로서의 그 장관을 충분히 과시하고 있었다. 니아가라대폭포는 온타리오호와 이리호를 있는 나이아라강에 있으며 강 가운데에 있는 고트섬(미국령토)을 경계로 48메터 높이의 캐나다폭포와 51메터 높이의 미국폭포로 나뉘어 있었다. 말 그대로 신비롭고 황홀한 신부면사포 폭포요, 안개속의 녀신 폭포요, 말발굽 폭포요 하는 것처럼 7색 무지개비낀 폭포의 아름다움과 천군만마가 달리는듯한 거세찬 물결 소리는 련속 관광객들의 환성을 불러 일으켰다. 캐나다 폭포기선을 타고 동양도 월량도에서 물보라를 맞으며 감상하는 폭포도 장관이였지만 전등불 찬란한 7색 야경의 폭포는 더더욱 신비스러웠다. 어디 그뿐인가? 1800개 크고 작은 섬으로 이루어진 미국과 캐나다 국경의 자연보물고 천도명승지의 섬들에는 억만부호들의 별장이 아름답게 지어져 있었는데 작은 섬에는 집 한채 나무 한그루, 큰 섬에는 5성급의 호화로운 호텔식 건물들이 자리잡고 있었다.《애정의 섬》이라는 곳은 포선생이라는 한 부자가 발렌타인 데이(情人節)에 부인에게 선물한 섬이라고 하는데 하루 한칸씩 쓰라고 365칸의 호화별장을 지었었다. 그런데 건물내부 장식이 채 끝나기도 전에 부인이 불행하게도 별세하였다고 한다. 하여 그 포선생은 그 섬을 아무에게도 팔지 않고 그대로 국가에 바쳐 관관코스로 만들었었다. 더욱 신비로운 것은 세계에서 제일 짧은 국제다리인데 그 총 길이가 고작 7.5메터 밖에 안되였다. 캐나다와 미국의 국경에 위치하고 있어 다리 끝에는 두나라의 국기가 바람에 나붓기고 있었다.   (다음기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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