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시인 윤동주를 그리며
글/ 강 순 화
지난 2월16일, 룡정 윤동주연구회에서는 우리민족의 걸출한 시인 윤동주탄생 100주년과 시인 윤동주 옥사 72주기를 기념하여《100명 시민 100년 시인을 노래하다》는 테마로 룡정과 연길시의 100여명 시민들을 이끌고 룡정 명동 동산에 자리잡은 윤동주묘소를 찾아 경배활동을 진행하였다.
필자도 소식을 듣고 이 뜻깊은 행사에 참여하였는데 현장에서의 감회는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하기 힘든《깊은감동》그 자체였다. 특히 젊은 문화인들이 주최하고 어린 학생들까지 참여한 이 행사를 보면서 우리민족시인 윤동주에 대한 사랑과 추모는 세세대대로 이어지고 있음을 심히 느끼게 되었다.
사실 나는 80년대부터 중국조선족의 걸출한 학자이고 교육자이며 우수한 작가와 평론가이신 원 연변대학 부총장 정판룡교수님을 보좌하면서 그이께서 병환으로 돌아가실 때까지 12년간 함께 사업할 수 있는 행운을 가졌었다. 수년간 정판룡교수님을 따라 진행해 온 우리민족 문화사업중 시인 윤동주묘소를 찾고 시인 윤동주를 세상에 알리는 각종 기념활동들을 조직하면서 동분서주했던 그 나날들이 오늘따라 유달리도 새롭게 머리에 떠오른다.
일찍 80년대 초만 하여도 우리는 시인 윤동주에 대하여 잘 모르고 있었다.《룡정에서 태여나고 룡정에서 공부를 하였으며 지금도 룡정 동산에 고이 잠들고 있는 우리고향 시인 윤동주》는 사실 우리와 가장 가깝고 가장 자랑으로 여겨야 할 엄연한 우리민족 시인임에도 오랜 세월동안 우리는 마치 그저 외국에서나 기념하는 우리와는 거리가 먼 력사인물로만 여긴 것이다.
운명적인 시대의 풍운으로 하여 시인 윤동주는 짧디짧은 28년의 생애에 무려 17년이란 세월동안 두만강을 넘나들고 한국, 일본땅을 정전하면서 학업의 끈을 놓치 않았고 일제의 박해와 이역땅의 고통, 지어 옥중에서도 민족의 량심과 예지로 저항하며 피와 정열과 재능으로 엮어진 주옥같은 시로서 민족의 넋과 얼을 굳게 지켜 왔다. 하지만 그의 고향땅에 살고 있는 우리는 그이가 세상을 떠난 50년이 되도록 그에 대해 잘 모르고 지냈던 것이다.
윤동주시인에 대하여 깜깜부지인 연변땅에 처음으로 등불을 밝혀 정보를 가져오고 룡정 동산에 묻혀있는 그의 묘소를 발견한 이는 바로 연변대학에 객좌교수로 오신 일본 와세다대학교 오오무라 마스오교수였다. 그이는《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모든 죽어가는것을 사랑》하는 학자였다. 오오무라 마스오교수는 1950년대 중반부터 조선문학에 관심을 모았고 특히 세월의 거치른 언덕에 묻히여 망각되였거나 희미해진 항일지사와 문인들을 발굴하고 자료를 수집하며 그들의 생애를 추적하는 많은 저서들을 펴냈다. 하여 일찍부터 윤동주연구에도 힘을 기울려왔고 그의 생애와 문화적 업적을 정리하면서 시인 윤동주는《고향이 낳은 세계적 대 시인》이란 평가까지 하고 있었다.
시인 윤동주묘소를 찾은 5일 후인 1985년 5월 19일, 연변대학 정판룡교수, 권철교수를 위수로한 5명교수와 연변민족박물관의 책임일군 그리고 오오무라 마스오교수와 부인 등 일행 9명은 정성껏 제물을 갖추어가지고 시인의 묘소에 가서 조선민족의 풍습대로 제사를 지냈는데 이번 행차는 이곳 룡정땅에서 광복후 최초로 되는 시인에 대한 추모의식이였다. 그 이후로부터는 학생들, 친척들 그리고 각분야의 인사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추모활동들을 이어 왔다.
1995년7월14일과 15일에는 연변대학조선한국연구중심, 중국작가협회연변분회, 연변문학예술연구소, 연변대학조문학부, 연변대학조선언어학연구소, 룡정시문학예술계련합회의 공동주체로《민족시인 윤동주50주기기념학술토론회》를 가졌다. 반세기만에 처음으로 시인의 고향땅 룡정에서 첫 기념회를 가졌고 고향이 낳은 세계적인 시인 윤동주를 기리게 된 것이다. 이 회의에서는 기념활동으로 시랑송과 노래표연, 학술론문발표, 모교참관과 묘소에서의 제사 등 행사들을 진행하였다.
1993년 2월 25일 연변대학조선한국연구중심, 중국작가협회연변분회, 룡정시문학예술계련합회와 시인의 친속들은 공동으로《윤동주생가 유지에 문학비를 세울데 대한 발기서》를 발표하고 모금활동을 벌리였다. 1993년 6월30일에는 다시 윤동주생가를 복원하고 그 정원에 표식비를 세우자는 의견에 합의를 내오고 연변대학의 정판룡교수를 회장으로 권철교수를 주관으로 한《시인 윤동주생가복원촉진회》를 성립하였다.
시인 윤동주 생가는 1900년에 그의 조부 윤하현선생이 명동촌으로 이주하면서 지은 집으로 기와를 얹은 10간과 고간이 달린 조선민족전통구조로 된 농가집이다. 시인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이 집에서 태여났다. 1932년 4월 시인 윤동주가 은진중학교에 승학하게 되자 그의 조부는 가족을 이끌고 룡정으로 이주하였다. 나중에 이 집은 매도되여 다른사람이 살다가 1981년에 허물리운 것이다.
1993년 3월 지신향 명돈촌이 룡정시의 관광명소로 지정되면서《윤동주생가복구》가 의사일정에 오르게 되였다.《시인 윤동주생가복원촉진회》를 내온 후 우리 연변대학조선한국연구중심에서는 전문가를 초청하여 직접 설계도를 그리고 경비예산을 연구했으며 복구자재를 락실하는 등 많은 일들을 벌리였다. 그 과정에서는 실로 많은 어려움이 부딪쳤으나 국내외 인사들, 특히 리윤기선생 등 한국한민족연구회와 룡정시지신향정부 등 단위의 협찬하에 1994년 8월 28일 드디여 이 생가와 명동교회당을 복원하게 된 것이다.
그동안 필자 역시 이 사업 추진회의 한 일원으로 연길-룡정-명동을 수없이 오가며 문건을 전하고 후원금을 전달하였는데 그때에 어데 지금같이 통신이나 은행계좌가 구전했던가? 한국이나 사회 각지에서 전해 온 딸라나 한화로 된 후원금들은 현금 그대로 봉투에 넣어들고 룡정문련을 찾아 다녀오던 일들이 아직도 어제일 같이 떠오른다.
한번은 답사를 갔다오던 자동차가 명동촌으로 가는 올리막 산비탈에서 번져지는 바람에 연변대학 권철교수가 앞가슴 륵골 다섯대나 부러지는 큰 사고를 내고야 말았다. 그때 온 가슴을 붕대로 감고 병상에 누워 입원치료를 하면서도 우리에게《생가복구》일정을 문의하고 의견을 주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선히 보인다. 선인들의 이같은 각고한 노력이 있었기에 시인 윤동주 생가도 다시 복구될수 있었고 시인의 정신은 오늘도 래일도 드팀없이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가장 민족적인 시인만이 세계적인 시인으로 될수 있으며 또 모든 세계적인 시인은 우선 먼저 민족적인 시인으로 되어야 하는 것처럼 시인 윤동주도 우선 먼저 우리의 시인이면서 동시에 전 민족의 시인인 것이다. (정판룡)》우리는 연변이 낳은 민족시인 윤동주의 숭고한 지조와 그가 우리민족문화 발전에 기여한 거대한 공헌을 영원히 잊지 말아야 할것이다.
윤동주의 생애는 너무나도 짧았고 그가 남긴 유작도 많지 못하다. 하지만《시인이란 슬픈 천명인줄 알면서도》《주어진 길》에서《한점 부끄럼》없이 분투한 그의 일생과 불후의 시편들은 세세대대로 세인들의 경탄과 찬사를 받고 있다.《그처럼 캄캄한 일제하의 암흑기에 윤동주는 한민족에게 그 어둠속에 빛나는 빛줄기였다》라고 오오무라 마스오교수는 말한다. 서서히 빛을 뿌리는 혜성 윤동주는 영원히 우리의 마음속에 살아있을 것이다.
오늘 다시금 시인 윤동주묘소앞에서 그의《서시》를 정히 읊으니 가슴은 뭉쿨하고 눈시울이 붉어진다. 또한 한없이 숙연해 지기도 한다. 우리모두 시인의 유지를 받들어 그이처럼《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이《주어진 길》에서 떳떳이 걸어갈 수 있을까 가슴에 손을 얹고 다시한번 심사숙고 하지 않을 수 없다.
2017년 2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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