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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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땅에서 만난 연길아줌마
2009년 07월 03일 00시 18분  조회:5180  추천:67  작성자: 강순화
            미국 땅에서 만난 연길아줌마


    지난 3월초, 미국 로스안젤레스 한미녀성회의 초청으로 나는 난생처음 미국땅을 밟게 되었다. 북경공항에서 비행기에 올라 태평양을 건느며 13시간, 2만여리를 날아 넘어 도착한 곳은 바로 미국 서부에 위치한 로스안젤레스였다. 인구가 천만이나 된다는, 미국에서는 두번째로 큰 도시라고 한다.

    생각밖에 이 도시에는 수십만에 달하는 한국인들이 <코리아타운>을 이루어 살고 있었고 연변을 비롯한 중국 여러 지역에서 건너간 조선족들도 수천여명이나 체류하고있었다.《종로설렁탕》이요,《원조할머니보쌈》이요,《순천고추장》이요 하는 한글간판가게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고 <코리아프라자 마켓>이며, <나리학교>, <우리은행> 등 한국식 이름의 건물들이 줄을 이어선 거리의 모습은 마치 서울의 종로나 인사동의 한 거리를 방불케 하였다.

    공항까지 마중을 나온 중국 류학생들의 안내를 받아 우리 일행은 한식점에 들어가 뜨끈뜨끈한 된장찌개도 먹을수 있었다. 우리가 려장을 푼 <뉴 서울호텔> 역시 한국인이 경영하고 있어서 영어에 서투른 우리도 불편없이 지낼 수 있었다. 장밤을 비행기에서 자며말며 태평양을 건너 날아왔었는데 로스안젤레스에 도착하니 또 초저녁이였다. 그냥 잘수만 없어서 온밤을 이야기하며 지새웠더니 이튿날에는 흐리멍텅하여 정신을 차릴수 없었다. 중국과 로스안젤레스는 이렇게 16시간의 시차로 밤과 낮이 바뀌여 있었던것이다.

    호텔에서《한미녀성회》와 련락을 취하고 행사일정을 잡고 있는데 우리 일행 중 친척집에 갔던 한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떤 연변아줌마가 우리를 자기집에 모시려고 한다는 것이다. <미국호텔에서 하루 120달러나 되는 숙박료에 비싼 음식을 사먹으면서 지낼 건 뭐람? 우리 집에 와서 계셔도 되는데... ...> 하고 자기 일처럼 걱정하며 이튿날 저녘에는 호텔까지 쫓아와서 우리를 자기 집에 데려가려 하였다. 물론 초청측인《한미녀성회》에서 주식배치를 다 하겠다고 하였지만 그 연변아줌마의 따뜻한 인정이 더 마음에 끌리여 우리는 결국 그 아줌마의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그런데 세상은 참으로 넓고도 좁은 모양이다. 정작 만나고보니 그녀는 연길 서시장에서 떡장사를 하였던 녀성이였다. 비록 서로가 생면부지였지만 어찌나 다정하고 살뜰히 대해 주는지 우리는 어느새 언니, 동생하며 친자매처럼 마음 편하게 지나게 되였다.
   《한미녀성회》에서 매일매일 빈틈없이 안배한 일정에 따라 여러 가지 행사를 마치고 돌아오면 보통 밤 10시가 다 되군 하였는데 그녀는 언제나 한밤중인 11시 가 지나서야 일터에서 돌아왔다. 밤은 깊어 가건만 우리는 마치 친자매가 서로 오랜 세월 갈라져 있다가 다시 만난 것처럼 밤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의 인생이야기는 참으로 눈물겨웠다.

    그녀는 가난한 농민의 딸로 나서자랐단다. 어려서부터 일로 뼈가 굳어진 그녀는 50대 초반의 나이지만 그야말로 산전수전 다 겪었었다. 그녀는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깊은 시골에 있는 한 마을에서 가난에 쪼들리는 생활로 어린시절을 보냈다. 그녀의 꿈은 언젠가는 연길시내에 가서 남 보란듯이 사는 것이였다. 그녀는 스므살이 잡히자 친척의 소개로 연길시교의 한 농촌에 살고있는 운전기사이며 종가집 막내인 최씨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다.  

    남편은 날마다 뻐스를 몰고 다녔고 그녀는 시가편의 두 시형과 동서를 따라다니며 부지런히 농사를 지었다. 하지만 사철 허리가 휘게 일해도 가을에 차례지는 수입은 별반 없었고 살림은 늘 쪼들리고 궁색했다.
마침내 시장경제의 세찬 바람이 불어쳤다. 망둥이가 뛰니까 전라도 비자루도 뛴다고 촌사람들도 터밭에서 나는 고추며 오이며 감자를 캐 들고 장거리에 나섰다.
    <남이 하는 일을 나라고 왜 못하겠는가! 나도 돈을 좀 벌어 보아야지... ... >

    그녀는 빚을 내서 서시장에 작은 매대를 임대하고 떡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날마다 한밤중에 일어나 100여근 남짓한 쌀을 씻고 찌고 떡을 빚었다. 방안에는 열기가 후끈후끈하고 시허연 김이 꽉 들어차서 온몸이 물자루가 되였다. 날이 밝으면 떡함지를 밀차에 싣고 시장에 끌고나가 팔았다. 온종일 서서 사구려를 부르고나면 두 다리가 물러날 것만 같았다. 그래도 이튿날 새벽이면 또다시 어김없이 일어나  이를 악물고 떡을 만들었다. 어느덧 이런 세월도 3년이 흘렀다.

    그런데 괘씸한것은 남편이였다. 밤낮 다람쥐 채바퀴 돌듯 허리 한번 펼 사이 없이 일했지만 남편은 출근한답시고 늘어지게 늦잠을 자기만 했다. 아궁이에 불 한번 지펴주지 않았고 떡함지 한번 들어주지 않았다. 그녀는 그만 울화가 터졌다.
    <종이장도 맞들면 가볍다고 하는데 잘살아 보려고 아득바득하는 나를 좀 도와주면 안되는가? 내가 그래 나혼자 잘먹고 잘살려고 이렇게 발버둥이를 치는가? 모두 이 가정, 이 식구들을 위해서가 아닌가... ...>
일이 고된것 보다도 남편의 처사에 더 울화가 치밀어 못살것 같았다. 그녀는 바가지를 긁기 시작했고 그만큼 남편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날마다 거친 욕설을 듣고 있느니 아예 문을 박차고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에 가서 뼈빠지게 일해 먹더라도 저 꼴을 보지 않았으면 얼마나 좋으랴!>

    그녀는 마침내 독한 마음을 먹고 90년대 중반에 8만원이라는 거액의 변돈을 꿔가지고 위장결혼을 해서 한국으로 갔다. 그런데 마디마다 옹이요, 갈수록 심산이라더니 한국에서 만난 상대는 감옥을 집처럼 들락거리는 범죄전과자였고 사기군이였다. 같이 살지 않겠다는 조건으로는 거액의 돈을 지불해야 했는데 그 시달림을 5년이나 견뎌내야 하였다. 그녀는 찜통같은 주방에서 온갖 어지럽고 힘든 일들을 혼자 도맡아했다. 아글타글 번 돈은 시도때도 없이 찾아오는 그놈의 호주머니에 다 들어갔다. 더군다나 만날 때마다 퍼붓는 욕설과 기시는 차마 들어 낼 수가 없었다.

    한국에서 일하다가 4년만에 연변에 돌아와 보니 워낙 일하기 싫어하던 남편은 직장에서 물러나 놀고 있었다. 그는 안해가 피땀으로 벌어 보낸 돈으로 매일 흥청망청 먹고 마셨고 웬 계집을 끼고 딴 살림을 하고 있었다. 9살 때 동서에게 두고 간 아들애는 공부를 하지 않아 고중에도 못가고 엄청 많은 학비를 내야 하는 사립학교를 들락거리고 있었다. 학교는 다닌다는 명색뿐이고 날마다 비슷한 처지의 또래들과 몰려다니면서 허송세월을 보내는 것이였다. 옛날의 따뜻한 가정을 이젠 더는 찾을 수 없었다. 그녀는 눈앞의 어처구니없는 현실에 억이 막혔다.

    <애들은 엄마만 없으면 공부도 못하고 철도 못 드는가? 아빠라는 인간은 어쩌면 저렇게 정신이 빠져가지고 자기가정 하나, 자기새끼 하나 온전히 건사하지 못할가?>

    참으로 환장할 일이였다. 그녀는 눈물을 머금고 다시 한국에 갔다. 이를 악물고 뻗치면서 5년간 억척스럽게 돈을 모아 다행히 빚은 다 갚게 되었다. 하지만 그 위장결혼을 한 <남편>은 그냥 그녀를 물고 늘어졌다. 악에 바친 그녀는 <시집>에 찾아가 <남편>을 신고하겠다고 울러메도 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젠 한국을 떠나는 수 밖에 다른 길은 없었다.

    기회만 엿보고 있던 중 그녀는 한 친구의 권유로 6000달러의 거금을 내고 카나다, 멕시코 관광길에 올랐다가 용케도 미국 땅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미국에 정착한지도 어느덧 6년 세월이 흘렀다.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진 그녀는 그 어디를 가나 궂은일 마른일 가리지 않고 억척스럽게 일했다. 지성이면 감천이고, 티끌모아 태산이라고 그녀는 얼마간 돈을 모이게 되었고 지난해는 30만원이라는 거금을 지불하고 오매에도 그리던 아들애를 미국에 데려와 일식집에 취직시켰다. 지금 그들 모자는 밀입국 비용으로 낸 빚을 갚느라고 매일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어제도 오늘도 래일도 그녀는 <나루터술집>의 떡시루같은 주방에서 하루 12시간씩 소고기, 돼지고기를 삶고 닭과 물고기를 기름에 튕기면서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천하의 엄마 마음은 다 같은지, 그녀는 날마다 그토록 뼈빠지게 일하면서도 항상 자식의 앞날을 걱정하고 있었고 연변에 두고 온 놀부남편이지만 그래도 애들 아빠라고 한달 건너 500달러씩 꼭꼭 생활비를 보내주고 있단다. 그동안 애를 키워준 시집도 등한시하지 않고 가끔 용돈을 보내주고 있고 동서들과도 자주 통화를 한다고 했다. 아직은 손에 쥔 돈이 별로 없어 고향으로 돌아가지는 못하고 있지만 그녀는 지금 그래도 돈벌기 좋은 미국 땅에서 뭔가를 더 해보려고 짬짬이 영어와 스페인어를 배우고 있었다. 언젠가는 봉제사가 되여 순박한 멕시코애들을 데리고 복장업을 경영해 보는 것이 그녀의 꿈이라고 한다.

    그녀의 파란만장한 인생살이는 시장경제의 폭풍취우에 부대껴온 우리 민족 녀성들의 삶의 축도에 다름 아니다. 칠전팔기하는 그녀의 인생살이에서 나는 우리 연변아줌마의 강인한 의지과 근면한 성격을 보았으며 남성을 초월하는 드넓은 흉금과 끈질긴 모성애를 보았다. 이들이야말로 우리 조선족농사군들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였고 외화를 벌어 들여 나라의 재정수입 증가에 기여하고 있는 고마운 분들이 아닌가.

    안해를 외국에 로무일군으로 내 보낸 남편들 중에 아직도 집에 앉아 마작이나 뒤섞고 술판이나 벌리며 무도장을 휘젖고 다니는 분들이 있다면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시라. 개도 안먹는다는 그 돈때문에 안해가 이국타향에서 참고 견디고 있는 그 험악한 모욕과 기시, 어려운 로동현장에서 흘리고 있는 그녀들의 눈물과 땀방울을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란다. 매번 안해가 부쳐오는 그 외화의 무게와 가치를 깊이 헤아려주기를 바란다. 비록 지금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을지라도 마음만으로라도 안해와 함께 그 아픔과 고통을 나눌 수 있다면 집에 있는 우리 아이들도 잘 교육시킬 수 있을 것이고 가정도 반듯하게 지킬 수 있지 않을가, 재삼 생각해보게 된다. 
                                           ( 연변녀성잡지--2008년 제6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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