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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강 순 화
중국이 세계를 향해 문을 열면서부터《돈을 벌자면 외국에 가야하고 배우자고 해도 외국에 나가야한다》는 것이 거의 진리처럼 되고 있다. 하지만 한국, 일본 등 아세아지역은 모두들 많이 다녀왔어도 서방의 발달한 나라들, 그중에서도 가장 발달한 나라인 미국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불모지이며 쉽게 가볼 수 없는 미지의 세계였다. 게다가 지난 몇년간 미국 부시정부가 책동한 이라크전쟁으로 인하여 미국이란 나라가 세상의 인심을 다 잃어 버려서 그곳과 우리는 평생 가도 별 인연이 없을 듯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세상은 변해도 많이 변했다. 글로벌화, 정보화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실감하는 때이다. 2만리 밖에 있는 지구촌 한끝에서, 그것도 체제와 리념이 전혀 다른 태평양의 건너편 나라인 미국땅에서 중국연변에도 녀성들의 교육과 권익신장을 위해 열심히 뛰고 있는 조선족녀성단체가 있다는 소식을 알고《문화교류와 협력》의 차원에서 우리들을 초청한 것이다. 지난 2008년 3월, 우리는 이렇게 미국 로스안젤레스에 있는 KAWA한미여성회(Korean American Women's Assciation) 의 초청으로 생각지도 못한 미국행을 떠나게 되었다.
미국서부의 관문도시 로스안젤레스
백문불여일견이라고 15일 동안의 짧은 려행이였지만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서방 선진국에 대한 첫 수업이였으므로 그 감수 또한 유달리 깊었다. 저녁 9시 비행기에 탑승했으니 장밤을 자며말며 태평양을 날아 넘어 도착한 곳은 바로 불야성을 이룬 미국서부의 관문도시 로스안젤레스(Los Angelees)였다. 백인, 흑인, 멕시코인들로 이루어진 미국세관 관원들의 안내하에 손님들은 질서정연히 줄을 섰다. 한 20여분이 지나 내 차례가 되자 멋진 멕씨코 관원아저씨가 앉아 있는 창구에서 나를 불렀다. 그런데 영어로 재빠르게 묻는 그의 말을 나는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우리세대로 보면 중학교시절에는 로어를 배웠고 대학에서는 일어를 배워서 영어는 겨우 인사말이나 할줄 아는 수평이라 언제 대화를 할수 있겠는가? 하는수 없이 미안한대로《노 잉그레스!》하고 말하니 그가 다시 중국어로 몇가지를 묻는 것이였다. 세계각국 손님들을 대상하여서인지 세관 관원들이 중국어도 좀 알고 있어서 영어를 모르는 우리들도 순리롭게 입국수속을 마칠 수 있었다.
마중 나온 중국류학생들을 따라 맨 처음 도착한 곳은 로스안젤레스에 있는 <코리아 타운>이였다. 즐비하게 늘어선 가게들에는 눈에 띄게《꽃게랑 아구랑》,《시누랑 올케랑》이요,《종로 설렁탕》,《순천 고추장》이요 하는 재미있는 한글간판들이 걸려 있어 마치 서울의 종로나 인사동의 한 거리에 온 것만 같았다. 뜨끈뜨끈한 된장찌개, 두부찌개에 얼큼한 배추김치로 저녁을 배불리 먹고 역시 한국인이 경영한다는《뉴 서울호텔》에 가서 행장을 풀었다. KAWA 한미여성회와도 인츰 연락을 취하고 이튿날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우리 동포들이 모여 사는 로스안젤레스의 <코리아 타운>은 아늑한 고향마을 처럼 우리를 정답게 맞아주었다.
이튿날오전 일찍 호텔 경리의 안내로 택시를 불러 타고 약속지점인 JJ 호텔에 도착하니 KAWA한미여성회의 에스터김회장일행 세분이 달려 나왔다. 그녀들은 마치 오랜 옛 친구를다시 만나기나 하듯이 우리들을 반가히 맞아 주었다. 우리일행은 화려한 호텔 레스토랑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불고기며 아구탕으로 정성스레 차린 점심을 맛나게 먹으면서 행사일정들을 토론하였고 신문, 방송을 통해 홍보하고 대회장을 마련하는 등 일에서도 의견을 모았다. 그녀들은 또 호기심에 찬 우리들의 물음에 따라 이곳 한인들의 이민사에 대해서도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차창 밖으로 흘러가는 로스안젤레스는 참으로 천사의 마을이라는 이름 못지않게 아름답고 살기 좋은 도시였다. 워낙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데다가 백인, 황색인, 흑인에 혼혈종들까지 섞여 살고 있어 그야말로 세계의 인종전시장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였다. 그중에서도 제일 마음이 쏠리는 것은 수십만의 한국인을 포옹하고 있는 <코리아타운>과 중국 남방의 한 도시를 방불케 하는 붉은색 건물들이 즐비한 <차이나타운>이였다. 밝고 깨끗한 한국식 거리와 울긋불긋한 중국특색의 건물들, 그리고 그 삶의 모습들은 바로 이 머나먼 아메리카대륙에 와서도 자기들의 전통문화를 끈질기게 고수하면서 모국의 풍격 그대로 집을 짓고 학교를 꾸리며 대대손손 부지런히 가계를 이어가는 근로하고 총명한 한인과 화교들의 인생 축도인 듯 싶었다.
푸른 바다를 옆에 끼고 있는 해안도시라 공기 또한 더없이 맑고 싱그러웠다. 거리와 골목마다는 온통 푸르른 잔디를 입혔고 각가지 아열대식물들이 키 돋음을 하고 있었다. 규칙있게 심어놓은 길 량켠의 종려나무들과 그 사이사이에 흐드러지게 피여 있는 가지각색의 아름다운 꽃들은 아담한 고급주택들과 어울려 생기롭고 평화로운 정취를 풍기고 있었다.
우리가 도착한 2월말은 그곳도 겨울철이라하지만 거짓말 같았다. 집집의 정원마다에는 파란 참대숲이 곧게 뻗어 올라가고 있었고 오렌지나무에는 황금빛 열매가 무너지게 열려 있었다. 또 어떤 가옥들에는 붉은 장미꽃 타래가 너울같이 뒤덮여 황홀한 꽃단장을 하고 있었다. 하늘을 찌를듯이 높이 자란 야자수는 이상하게도 곧게 솟은 전선대처럼 허리통에 난 가지들은 말끔히 쳐버리고 머리통만 둥그렇게 피여 가지고 큰길 량옆에 늘어서 있었는데 그 모습들은 마치 그 거리를 지키고 줄지어 서 있는 키다리 초병들 같았다.
저녁에는 친구의 초대로 미국식 레스토랑에 갔는데 여러 가지 삶은 육류들을 양념에 절여서 만든 료리가 나왔다. 푸른 남새 잎으로 정교하게 포장한 서양식 음식이였는데 나이프와 포크로 이쁘게 썰어 먹는 그 맛은 그야말로 별미였다. 저녁식사를 마친 후 우리는로산젤레스<코리아타운> 북서쪽에 위치한 세계적인 영화의 거리인 할리우드(HOOLLY WOOD)에 갔었다. 그 곳에는 미국의 명배우들의 이름이 새겨진 오각별야광등이 거리바닥 한켠에 현란하게 밖혀 있었다. 책에서나 보았던 거리이름인지라 매 하나하나의 전성기시절의 옛건물들이며 그 호화로운벽에 그려진 여러가지 영화장면들이 신비하게만 느껴졌다. 우리는 쉴새없이 샤터를 누르면서 기념촬영을 하였다.
사흩날에는 한미여성회 심영이리사의 초청으로 그녀가 살고 있는 바다가거리 싼타모니카(SanTaMonKa)로 갔다. 그곳의 특이한 풍경은 넓은 바다와 아름다운 주택들이였다. 바다가의 드넓은 백사장에는 이라크전에서 희생된 전사들을 기념하는 십자가가 수없이 줄지어 있었는데 그옆을 지나가는 시민들은 숙연히 묵도를 드리고 있었다. 그 어느 나라나 백성들은 모두 침략전쟁만은 똑같이 반대하는 것이였다.
다시 기분을 풀어 멀리 내다보니 푸른 바다가에 정연하게 줄지어 지어진 양옥마다는 그모양과 꾸밈새가 특이하여 마치 그곳에서 <미국식 가옥 박람회>나 열리고 있는듯 싶었다. 앞뜰마다에 활짝 핀 꽃나무들이며 파란 잔디로 뒤덮인 정원, 그 한가운데는 맑고푸른 수영장까지 있어 그야말로 그림속의 에덴동산을 방불케 하였다. 여러가지 한식료리와 자연산 나물뭍임으로 정성들여 차린 저녁상에 마주앉아 아름다운 정원을 바라보며 이야기꽃웃음꽃을 피워가니, 그 만찬은 참으로 진주성찬에 금상첨화가 아닐수 없었다.
그 다음날에는 로스안젤레스 중심거리에 가보았다. 주민구역과는 달리 높이 솟은 고층건물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길 량옆에는 푸르른 록움이 우겨져서 행인들에게 서늘한 그늘길을 만들어 주고 있었다. 건물 주위에는 목에 명찰을 걸고 서로 무언가를 토론하며 분주히 오가는 백인, 흑인 공무원들이 많이 보였다. 내가 정말 미국에 왔구나 하는 실감을 가지게 하는 곳이였다. 전자사전을 손에 들고 영어간판들을 번역해 보면서 용케도 시청까지 들어가 보았고 반나절이나 큰거리들을 쏘다니며 길옆의 상점들마다 기웃거리고나니 다리가 아팠다. 마침 길 건너에 지하문화광장이 있는지라 우리는 긴 걸상을 찾아 휴식할 수 있었다. 시골뜨기 녀인들에게는 그곳에도 구경거리가 많았다. 죄송하지만 허리통이 마대같이 뚱뚱한 백인신사들이 뒤뚱거리는 걸음걸이도 가관이지만 맥주컵을 올려놓아도 떨어지지 않을 만큼 괴상하게 툭 삐어져 나온 흑인녀인들의 엉덩이는 참으로 볼만하였다. 우리는 마치 아메리카신대륙에서 새 인종이나 발견한듯이 놀랍고 신기한 눈길들을 감출수가 없었다.
행사 이튿날엔 에스터 김회장이 직접 우리를 안내하였다. 그의 고급 승용차에 앉아 한시간반이나 달려서 도착한 곳은 바로 봄나무온천이라는 뜻을 가진 팜스프레이의 카지노(Casino)였다. 높은 언덕우에 솟아있는 희한한 고층건물의 대청에는 가로세로 줄지어 늘어선 도박기계들이 황홀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노랗고 흰머리를 한 백인남녀들이 오색찬란한 컴퓨터 화면에 파란 눈동자들을 몰밖고 있었는데 그 화면의 수치변화에 따라 밑도 끝도 없이 동전을 밀어 넣고 있었다. 그 관경을 보노라니 가슴이 섬뜩하였다. 하루에 얼마나 많은 동전을 밀어 넣어야 딸라를 벌수 있을가? 잃으면 분해서 못 일어나고, 따면 더따보려고 자리를 못뜬다는 자석같은 그 자리, 부자들이나 할 노릇이지 돈 없는 서민들이야 어찌 엄두나 낼수 있겠는가. 놀지도 않으면서 기웃거리는것이 미안스러워 얼른 나가자고 하였더니 김회장은 미안해할것 없다고 했다. 이곳에서는 길가는 사람들도 들어와 보는것을 환영한다고 한다. 누구든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을 알고만 간다하여도 카지노주인한테는 무료의 홍보효과가 생기므로 그냥 들어와서 화장실만 쓰고 가도 좋다는것이다. 그야말로 상상도 못할 무서운 경영정신이였다. 말 타고 꽃구경하듯 도박판을 한 바퀴 휘둘러보았는데 아직 오후 시간이 퍼그나 남았으므로 우리는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는 케티박물관에 가보기로 하였다.
케티박물관을 다녀오는것은 문명한 관광코스라고 한다. 1983년 정부에서는 산타모니카산맥의 산기슭 91만 8천평의 부지에 모더니즘건축예술가로 유명한 건축사 마이어를 모셔다가 박물관을 설계하였다한다. 그는 독특한 스타일과 전통적인 자재를 결합하여 케티의 뿌리와 현재, 미래에 대한 신념을 이 건물에 완정하게 부여하고 표현하였다. 캘리포니아 후추나무 숲의 무성한 잎사귀 사이로 언덕우에 우뚝 솟은 박물관이 보였는데 투명유리로 된 웅장한 건축물과 그 주변의 세련된 조경이 조화를 이루어 밝음과 개방성을 련상시키고 포괄적이면서도 미묘하고 명쾌한 기분이 들게 하였다.
풍요롭고 다양한 조경들을 감상하고 나서 미술관에 들어섰다. 본래 미술에는 문외한이지만 서방 중세 회화의 진수를 그대로 보존한 작품들을 보면서 감탄을 금할수 없었다. 800년에서부터 1800년에 이르는 사이에 창작된 작품들은 그 기교와 예술성, 그 재료의 화려함에 있어서 극치를 이루었다. 15세기 금박유화에서 정교한 삽화가 있는 중세기의 책, 한때 금붕어를 담았던 웅장한 샹들리야에서 반고호의 친숙한 꽃 유화에 이르기까지 그 생동하고 정밀함이 모두가 마치 살아숨쉬는 마리아의 눈빛처럼 신비하고 아늑한 분위기를 이루고있었다.
차에 앉아 밖을 내다보면 끝없이 펼쳐진 고속도로와 그 위로 달리는 각양각색의 차량들은마치 줄을 맞추고 달리는 듯 질서정연해 보였다. 고도로 발달한 시스템들이 작동하고 있는지 거리에는 경찰 한명 볼수 없었지만 모두들 교통규칙은 철칙으로 지키고 있었다. 음주운전을 했을때는 벌금 뿐 아니라 아예 영창에 잡아들이고 위법운행으로 사고를 냈다면 그 당사자들에게는 몇천 달러의 거액의 벌금은 물론, 일주일간이나 교통법을 다시 배우는 학습반에 참가해야 한다니 출근하지 못하여 직업을 떼울 위험까지 있는 것이다. 이렇게 밥통과 목숨이 다 걸려 있는 최대의 불이익을 알고서는 그누가 감히 교통규칙을 위반할수 있으랴? 참으로 인간을 다스리는 놀랍게 발달된 제도였다. 하기에 우리 이곳에서는 흔히 볼수 있는 크고 작은 교통사고들을 그곳에서는 찾아 볼 수도 없었다.
승용차에 앉아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두루 살펴보니 그 성시에는 높은 빌딩이 별로 많지않았다. 까닭을 물으니 택시기사 아저씨가 하는 말이《로스안젤레스는 지진이 자주 일어나는 곳이므로 사람들이 사는 집들은 다 이처럼 단층집을 짓는답니다. 그리고 미국은 원체 땅이 흔하니까 땅을 넓게 차지하고 써도 무방하지요.》하고 알려주었다. 100년전 큰 지진이일어난 후 부터 정부에서는 안전을 기하기 위해 높은 집을 짓지 못하게 하였다한다. 그래서 개인 주택들은 모두가 단층이 아니면 이층으로 된 양옥이였다. 그리고 나라적으로 이웃이 같은 양식의 집을 꾸미지 못하게 함으로 주택 하나하나가 색다른 풍격으로되여 있었다. 미국에서는 국가나 개발상들이 아름다운 양옥들을 지어놓고 세를 주든지, 아니면 수년간, 지어 평생을 할부로 집값을 갚게끔 하고 판매한다고 한다. 웬만한 부자가 아니면 몇십만 딸러에서 100여만 딸러씩 하는 가옥을 쉽게 사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백성들의 생활수준차를 고려하여 물건구입도 저소득층이 감당할수 있는 저렴한 가격의 상점들을 따로 만들어 경영하고 있었다. 그런 삼점들은 통칭으로《99센트》라 하는데 대부분의 물건가격이 1달러 이하인 99센트이므로 아무리 수입이 적어도 능히 사서 먹고 살수 있는 가격의 식품과 생활용품들이였다. 또한 무릇 그 나라 시민이라면 65세이후 로후보장에서도 능히 생활할 수 있는 700-800딸러의 최저표준 보장에서 부터 시작하여 그 사람의 일생동안 국가에 바친 세금과 공헌의 다소에 따라 그 이상(2000-3000달러)의 로후생활금과 저렴한 가격의 주택을 분여 받을수 있다고 하니 그 땅의 국민이라면 어찌 평생 열심히 일하지않고 그 무엇을 바랄 수 있겠는가?
더욱 흥미로운 것은 국민의 건강의식을 제고하는 힘있는 조치였다. 매년 3월의 첫번째 일요일을 미국 전 국민의 마라톤행사일로 정한 것이다. 마침 3월2일은 일요일이라 아침 일찍부터 맑고 푸른 하늘에는 [MARATON]이라 쓴 하얀 프랑카트들이 채색풍선에 걸려 날아다니고 있었다. 주간 거리의 차량들은 모두 통제되였고 골목마다는 사람들로 명절의 분위기를 이루었다. 마라톤경기의 로정은 로스안젤레스 공항에서부터 시청까지 26마일(약
행사 외의 짬들을 타서 우리는 백화점과 슈퍼마켓들을 돌아보았다. 여러 가지 기념품과 약품들을 사 보면서 우리는 저도 몰래《이 나라는 참으로 세금의 나라, 팁의 나라이구나》하는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모든 경영자는 물론이겠거니와 소비자에 한해서도 빠짐없이 물건값의 8-10% 이상의 세금이 지출되였었다. 세금액 규정은 물건마다 다르고 상점마다 달랐다. 중국에서는 오직 기업에서나 장사군들만이 세금을 낸다고 생각한 우리에게 있어서는 생소한 일이였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참으로 공평합리한 제도임이 느껴졌다. 무릇 이 땅에서 먹고 살려면 소비해야하고 소비하는 사람은 국가에 세금을 내야하니 나라경제가 온당할 수밖에 없지 않는가. 뿐만 아니라 모든 서비스업에서 소비자는 자기가 소비하는 금액의10-15%좌우를 팁으로 내야 하는데 이 팁은 가계주인이 가지는 것이 아니라 제일 밑바닥에서 땀흘리며일하는 서비스일군들의 손에 나누어진다니 기분이 크게 나쁘지는 않았다. 국내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자본주의의 경영방식이며 또한 최하층 인간에 대한 존중의 표현인듯도 싶었다.
마침 이《명동교자집》바로 옆이 우리가 기숙하는 주인집 연변아줌마가 일하는《나루터》술집인지라 저녘식사 후 우리는 그 식당의 주방을 찾아 들어갔다. 그녀는 한창 땀을 흘리면서 물고기 튀김을 하고 있었다. 손님들의 주문과 재촉에 눈코 뜰새 없이 바쁘게 돌아치고 있었는데 안주는 만들어지는 족족 멕시코애들의 쟁반에 담겨 손님들 상으로 옮겨졌다. 좁다란 주방에서 매일 12시간씩 펄펄 끓는 기름가마를 마주하고 비오듯한 땀을 훔치며 일하는 그 연변아줌마를 바라보니 저도몰래 코등이 찡해났다.
3월1일, 행사일이였다. 오전 일찍 행사장에 당도하니 에스터 김회장 일행도 이미 와 있었다. 마련된 대회장의 좌석들에는 멋진 재미교포 녀성들과 단정한 옷차림의 조선족녀성들이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그녀들은 모두 신들린 사람처럼 무대 옆 텔레비죤화면에서 나오《연변중로년모델표연》과《연변녀성태권도표연》을 보고 있었다. 우리가 가지고 간 비디오테이프가 방영되고 있었던 것이다. 모두들 중국에 사는 조선족녀성들의 멋지고 씩씩한 모습에 찬탄을 금치 못했다.
회의실 주석대의 정면에는《KAWA한미여성회와 중국조선족여성회 간의 상호교류협정 의식》이라는 현수막이 유표하게 걸려 있었다. 한국 중앙일보와 한국일보 미국지사의 기자들이 촬영기를 들고 인터뷰에 분주하였다. 대회에서는 두 단체 회장의《교류협의서》서명과 내가 준비한《중국조선족과 녀성문제》라는 테마로 된 특강이 있었다. 개혁개방 후 중국조선족녀성들의 변화된 삶과 산업화시대의 새로운 이산가족의 출현 및 그 극복 대책에 포인트를 둔 이번 강연은 재미교포에게는 물론 그곳에 체류하고있는 조선족형제자매들에게도 훌륭한 내용이였기에 모두들 흥미진진하게 청취하고 있어 기분이 좋았다.
KAWA한미여성회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재미한국인의 력사에 대해 다소나마 료해하게 되었다. 한국인의 초기이민은 20세기초에 이루어졌는데 그때는 주로 로동이민의 성격을 가졌었고 그들은 이미 오늘날 재미한국인의 주체가 아니였다. 현재 재미한국인의 주류를 이루는 사람들은 모두 1965년이후에 이주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망명이민이나 강제이민이 아니라 보다 나은 생활을 하기 위해, 또는 자녀들에게 더 훌륭한 교육환경을 마련해 주기 위해 미국으로 이민한 사람들로서, 그 대부분이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며 한국에서도 중류 혹은 상류층의 생활기반을 가졌던 엘리트들이였다. 김회장이나 한미여성회 주요리사들 역시 한국의 명문대인 서울대, 연세대, 이화여대를 나왔었고 지금 모두 병원이나 복장가계 등을 차리고 있어 그들의 경제생활은 보편적으로 유족하였다.
중국인 거리인 <차이나타운>을 한나절 돌고 기숙사에 돌아오니 재미중국조선족동포련합회에서 련락이 왔었다. 신문과 방송에서 우리의 소식을 듣고 찾았다는 것이다. 정작 만나고보니 리사장이라는 40대 남성은 연변대학교법률계 졸업생이고 상담소 소장이라는 녀성도 연길에서온 분이라 금시 가까워졌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지금 로스안젤레스에 체류하고 있는 중국조선족은 무려 8000여명이나 된다고 한다. 참으로 생각밖이였다. 수많은 우리동포들이 낯설고 물선 미국땅에서 말을 모르고 법을 몰라서 무시당하고 배척 당하며 모진 고생들을 겪고 있다고 했다.
《우리가 조선족동포들을 대변해 말하지 않으면 누가 말하겠습니까? 이 자유와 기회의 땅에서 열심히 일해서 모두들 부자가 되며 언젠가는 이 L.A(Los Angelees)의 땅에 <중국조선족회관>을 세워서 우리동포들의 합법적 권익을 수호하고 그들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주는 일들을 하려합니다.》라고 말하는 강성 리사장과 김정화 소장의 당찬 모습에서 나는 재미조선족동포들의 밝은 미래를 보는것만 같아 마음이 흐뭇하였다.
애들마냥 호기심에 들뜬 기분으로 아침 일찍 <아주관광회사>에 도착하니 커다란 관광뻐스가 대기하고 있었다. 50세 중반이 될가말가한 한인 가이드아저씨가 우리를 반겨주었는데 그는 한국 설악산에서 수년간 산악가이드로 일했고 이 아주관광에서도 13년간이나 근무했다는 것이다. 보아하니 좋은 가이드를 만난것 같아 출발 전부터 기분이 좋았다. 이어 6년째나 이회사에 다닌다는 듬직하게 생긴 과테말라 출신의 기사아저씨가 운전석에 올라 핸들을 잡았다. 길이 13.5메터나 되고58명이나 수용할 수 있는 크고 화려한 뻐스에 43명관광객이 탑승하였는데 그 대부분이 한국인이였다. 모두가 이 대자연의 정취와 문화의 숨결을 찾아 이곳 미국땅에 찾아 온 것이다.
쉴새없이 이어지는 가이드아저씨의 소개에 따르면 미국의 인구는 3억에 달하고 그 땅은 한반도의 44배에 달한다고 한다. 성조기의 50개의 별은 미국의 50개 주를 대표하며 미국의 인구밀도는 한반도의 10분의 1도 안된다는 것이다. 일망무제라는 성구가 바로 이런 곳을 말하는듯 싶었다. 가도가도 끝이 없는 고원의 사막지대에 정,반 두 방향의 넓은 고속도로가 시원히 펼쳐져 있었다. 낮다란 가시철망으로 끝없이 이어가며 고속도로와 격리시켜 놓은 사막지대에는 이깔나무와 비슷한 수목들이 듬성듬성 자리잡고 있었다. 모래밭에는 가시 돋인 선인장들이 사람 키만큼씩 자라고 있었는데 떡 뻗치고 서 있는 모양이 마치 그 땅을 지키고서 있는 초병들 같았다. 멀리 나무숲 속으로 드문드문 바라보이는 인가들을 보면서 나는《저 사람들은 고독해서 어떻게 살지요?》 하고 물으니 가이드아저씨가 하는 말이 그들은 절대 고독을 모른다는 것이다. 조상때부터 세세대대로 유목민 생활을 하면서 정처없이 떠돌아다녔기에 살기 좋은 곳이면 그 어디든지 다 찾아다니며 저렇게 살고 있다는 것이다. 평생을 한곳에만 눌러 살고 있는 우리들로는 리해할 수 없는 일이였다.
달리는 뻐스 창밖으로 끝없이 펼쳐진 모하비사막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한나절이나 달려서 도착한 곳은 바로 캘리포니아주의 교통중심지인 바스토우였다. 영어로《코리아 레스토랑》이라 쓴 한인음식점에서 간단한 한식부폐로 점심을 마치고 오후에는 라스베가스로 향했다. 서너시간이 넘게 달리고 나니 날이 어두워지고 이어 온갖 채색불빛으로 천지가 대낮처럼 환하게 밝은 시내가 눈앞에 다가왔다. 이곳이 바로 세계적인 카지노도시 라스베가스였다.
엔지엘호텔에 행장을 풀고 인츰 휘황찬란한 야경을 향해 시내관광에 나섰다. 뉴욕 맨하탄에 우뚝솟아 있는《자유녀신상》이 이곳에서도 부드러운 불빛에 싸여 손짓하고 있었고 황금빛으로 솟아오른 프랑스《에펠철탑》이 눈앞에 다가왔다. 마치 미국의 뉴욕이나 프랑스 빠리, 영국의 런던에나 도착한듯 서방 여러나라의 상징물과 유명건축물들이 곳곳에 그대로 모방, 축조되고 있어 한눈에 서방세계를 다 굽어보는것 같았다. 86개나 된다는 호텔들의 대청마다에는 최고급 카지노기계들을 설치해 놓고 세상의 부자들을 부르고 있었다. 황금빛 붕어가 뛰놀고 채색 뽀트가 오가는 푸른 강을 사이 두고 사철 꽃피고 열매 맺는다는 이 도시, 불야성을 이룬황궁같은 호텔들마다는 정녕 세상부자들의 천당인듯 싶었다. 고도의 심리전이라 일컫는 카지노 도박업이 이곳에서는 자본주의경제의 주축으로 되고 있으니 참으로놀라운 일이아닐수 없었다.
저녁식사는 호텔에서 마련한 미국식 부폐였는데 우리 동양인들이 먹을수 있는 종류는 아무리 골라 보아도 겨우 마른 빵이나 익힌 땅콩 뿐이였다. 큼직하게 삶아 썰어놓은 육류와 건 우유들은 보기만 해도 느끼한 생각이 들었다. 식사후 야경관광의 첫 코스는 호텔 옆 빌딩 옥상에 마련된 쥬빌리쇼였다. 오색찬란한 전등빛으로 정밀하게 전산화하여 제작한 화면에는 천변만화하는 천연색무대가 펼쳐졌다. 미끈한 서양미녀들이 아릿다운 미니치마를 입고 멋진 몸매를 자랑하며 사뿐사뿐 춤을 추고 있었다.
저녁 여덟시에 시작 된 <리비에라 아이스쇼>는 입장권 한장에 80달러를 받을 만큼 그야말로 세계적인 무대였다. 장장 두 시간 동안 반 라체의 미남미녀들이 수시로 새로운 스타일의 복장들을 번갈아 입고 현대식 춤을 추고 흥겨운 노래를 불러 관중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뮤지컬로 된《타이타니커호》공연은 1912년 대서양에서 빙산과 충돌한 뒤 침몰하여 1500여명의 희생자를 낸 그 력사적인 비극을 재현하였다. 현대화 설비의 작동으로 전체 무대가 마치 검푸른 파도 우에서 몸부림치는 거대한 기선의 몸체 같았다. 무대우의 배우들과 관람석의 관중들이 함께 움직이면서 아이스쇼는 크라이막스로 올라갔다. 온 장내 관객 전체가 마치 무서운 파도에 휘말려 깊은 바다속에 함께 빠져들어간듯 일제히 고함을 질러댔다. 참으로 미국땅에서나 볼수 있는 현대예술의 극치였다.
다음날의 려정은 아리조나고원을 거쳐 인디안들의 보호산으로 불리는 독수리산을 지나 세계적인 관광명소인 그랜드캐년(GRAND CANYON)에 가는것이다. 그랜드캐년이란 웅위로운 협곡이란 뜻인데 해발 2100메터 고원지대에 있는 평균 폭이 16킬로메터이고 길이 1600킬로메터나 되는 거대하고 신비한 대협곡을 말한다. 마치 하늘에서 내려다 보는것만 같은 그 웅위하고 절묘한 풍경의 붉은색 화산 절벽들은 정녕 하늘의 조화요, 신의 창조물인듯 싶었다. 1억 5천만년전 바다밑에서 올라왔다는 설, 600만년전 화산폭발로 이루어졌다는 설, 아무튼 여러가지 설이 있었다. 지질학자들의 고증에 따르면 일찍 4000년전 이 협곡에는 고대선민인 안나사시인들이 살았던 흔적들이 남아있고 그후에는 인류가 살았던 흔적이 없다고 한다. 콜롬브스가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한지 50년도 안되는 1540년 에스빠냐 탐험대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고 1826년에는 프랑스 사냥꾼들에 의해 그 대자연의 신비가 살아 숨쉬는 계곡들을 탐험하기 시작하였다 한다. 1869년에는 미국 남북전쟁에서 공훈을 세웠던 외팔의 소교 웨한 위쓰리뽀위얼장군이 아홉명의 탐험가들을 데리고 이 217영리의 미지의 세계를 80여일간이나 답사했다고 한다. 그 탐험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사람은 6명 뿐 세 사람은 그 무지의 협곡세계에서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한다.
짧은 15일의 미국서부 려행을 마친 나는 귀향길에 오르며 착잡한 생각에 잠겼다. 첨단의 문명을 자랑하는 발달한 선진국 부자의 나라에서 물질적 풍요로움을 만끽하며 살아가는 <코리아 타운>의 한인들, 돈을 벌어 잘 살아 보려고 부모처자를 두고 고향을 떠나 이 머나먼 아메리카대륙에 와서 구슬땀을 흘리며 일하고있는 조선족 형제자매들, 또 거기에다 온갖 무겁고 어지럽고 힘든 일들을 운명처럼 도맡아 하고 있는 검은 피부의 사람들, 그들 모두가 그 땅에서 그처럼 열심히 살아가고 있거늘 미국이란 이 초대국이 정녕 이들 모두를 껴안을 수있는 관용과 아량을 보여주었으면, 그리고 이들 모두의 꿈이 정녕 현실로 되어어 좀 더 행복 하고 알찬 삶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도 가져보게 되였다.
대형문학잡지《장백산》 2010년 제2기에 실렸음
미 국 서 부 기 행
` 북경공항에서 국제항공편으로 장장 13시간, 망망한 구름바다 우에 떠올라 태평양을 날아넘으며 미국으로 향하고 있는 비행기의 좌석에서 나는 만감이 교차했다. 어려서부터 우리가 알고 있는 미국이라면 침략자이고 제국주의자였다. 그들은 우리의 철천지 원쑤였고 그들이 살고있는 땅은 헐벗고 굶주리며 인간이 살 곳이 아닌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중국이 개혁개방을 하면서 물밀듯 들어오는 서방나라들의 영화나 비디오, 그리고 미국을 다녀온 류학생이나 교수들의 이야기를 통해 점차 미국이란선진국의 물질문명과 과학문명을 다소나마 알게 되었다. 하지만그이미지를 바꾸어 놓기에는 너무나도 피상적이고 보잘것 없는 지식뿐이였다.
로스안젤레스 명승지의 이모저모
다음날 KAWA한미여성회에서는 차를 내여 시교에 있는 헌틴턴삼림공원을 유람하게 하였다. 헌틴턴(HunTingTon)이라는 한 부자가 세상을 뜰 대 평생 이루어놓은 재산인 이 수백평에 달하는 정원과 진귀한 도서관을 나라에 기증했다는 것이다. 참으로 아름다운 마음을 간직한 부자였다. 그날따라 관람객 대부분은 백인이였고 가끔씩 흑인과 황색인들도 보였다. 공원에는 또 각가지 아열대 식물들이 앞다투어 자라고 있어 마치 세계적인 식물박람회를 한눈에 보는듯 하였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최근에 신축하였다는중국 특색을 보여주는 류방원(柳芳园)이였다. 중국 남방도시의 풍경을 그대로 옮겨 놓은 푸른호수며 정교한 루각의 조각들, 거기에 또 전통적인 중국차집도 있어서 여기가 소주나 항주가 아니냐고 착각할 지경이였다. 그 외에도 일본식 다다미방이며 하얀 인공자갈밭이며 가지각색의 아름다운 꽃과 식물들이 이채를 돋구어주었다.
선진국의 발달한 시스템들
닷새 되는 날 저녁, 우리는<캘리포니야주 재미조선족협회>의 초대약속으로 일찍 집을 나섰다. 그런데 거리에는 온통 고급스런 자가용뿐이지 택시라곤 한대도 찾아 볼수 없었다. 하도 이상하여 주인집 아줌마에게 물었더니 여기는 집집이 차가 있고 사람마다 차가 있어 택시를 쓸 필요가 없으며 혹시 외지인들이 택시를 부르자면 전화 한통이면 택시가 곧바로 온다는 것이다. 그가 핸드폰을 꺼내들고 200-1818을 누르면서 여기는 웨스턴 4거리 윌턴820호라고 하니 5분도 안 되여 까만 승용차 한대가 달려와 멈춰서는 것이였다. 마치 어디에서 우리를 기다리기라도 한듯 금세 달려온 것이다. 참으로 편리한 시스템이였다. 현지인들이 알려준대로 5딸러의 택시비에 1딸러의 팁을 얹어 6딸러를 드리니 목적지까지 편안하게 실어다 주었다.
중국조선족과 재미교포들
며칠후 우리는 중국조선족축구의 발전을 위해 거대한 기여를 한 최은택 감독님의 망명인 양평자사모님의 초대를 받게 되였다. 남편이 그토록 애써 춰세워 온 조선족 축구의 고향--연변에서 온 손님이라는 리유하나에서였다. 약속장소인《명동교자집》에 들어서니 홀에서 왔다갔다 하면서 손님을 맞아들이는 아가씨가 별로 눈에 익었다. 다가가 물어보니 아니나 다를가 그 역시 연길에서 온 녀성이였다. 참으로 우리 조선족녀인들은 못 가는데 없었다. 그녀의 안내로 양사모님과 함께 아늑한 방에 자리를 잡고 앉아 사모님이 들고 온 최감독 부부의 사진액자를 앞에 모시고 최감독님의 연변사랑이야기며 양사모님의 조선족에 대한 따뜻한마음의 이야기들을 시간가는 줄 모르고 나누어 가면서 따끈한 교자와 졸깃졸깃한 칼국수를 맛나게 먹었다.
세계적인 명승지 -- 라스베가스와 그랜드캐년
3월5일, KAWA한미여성회의 초대로 마침내 본격적인 미국서부 려행이 시작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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