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어쩌다가 하늘에 구름 한점 없이 맑게 개이었다.
밝은 햇빛은 아침이슬로 옥구슬을 하나, 둘 꿰고 있었다.
병원 뜨락 나무 이파리 사이로 아침 햇빛이 스며든다.
따뜻한 햇살은 자애로운 사랑의 손길을 뻗쳐 창문 베란다를 부드럽게 매만지고 있었다.
똑똑똑.
조용한 노크소리와 함께 김춘희 박사가 회진하러 들어왔다.
그녀는 상냥한 외까풀눈으로 종호의 침대머리에 다가왔다.그녀는 칼로 벤 상처자국이 드러난 종호의 손목을 보고 상을 찡그리었다.
종호는 일어나 앉으려고 애썼다.옆에서 지영과 려향이 종호의 잔등을 춰 일으켜 앉혀주었다.
춘희 박사는 청진기를 종호의 가슴에 넣고 심장박동을 들어본다, 페에 대고 호흡도 청진해본다 하면서 세심히 검사했다.
뒤이어 우쭐 일어나더니 종호를 보고 환한 웃음을 지었다.
"빈혈이 심했는데요. 따님의 피를 많이 수혈했기에 지금 괜찮아요. 심장박동이 고르롭고 페 호흡도 괜찮아요. 이제 다음 주 쯤에 리사장님은 퇴원해도 될 거 같아요."
"고맙습니다."
종호는 김춘희 박사한테 깎듯이 인사했다.
김춘희 박사는 려향의 아래위를 훑어보면서 종호한테 혀를 끌끌 차보이었다.
"리사장님은 참 훌륭한 효녀를 두었군요. 한국에서 무슨 일 하는지요?"
종호는 그때라고 딸 자랑을 했다.
"아직 박사공부를 하는 중입니다."
춘희는 반색했다.
"박사생?참 대단해요."
그녀는 려향의 어깨를 다독이면서 혀를 끌끌 찼다.
"뭘 전공하는 박사생인가요?"
려향은 머리를 다소곳이 숙이면서 나직이 대답했다.
"문학 공부를 해요."
"네-"
춘희는 한숨을 호- 내쉬었다.
(지금 세월에 문학을 해서 밥 먹기도 힘들겠는데.)
옆에서 듣는 지영도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녀도 고중시절까지 글짓기를 하다가 그만 두었던 것이다. 전국 백일장에서 대상을 탄적도 있는 실력파였지만 필을 놓고 위생학교에 들어갔댔고 지금은 간병으로 구을어다니면서 살지 않는가.
(글을 써서 이름을 날리는 멋은 좋은데. 성공하자면 어디 그리 쉬운가?)
춘희는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종호를 되돌아보며 엄지를 척 내들었다.
"리사장님은 좋은 후계자를 두었구만요."
종호는 코웃음쳤다.
"후계자는 무슨? 죽어도 글을 쓰지 않겠다는데도.허허.혹시 한국에서 글을 쓰면 성공할지도 모르는데 글쓰기를 딱 싫어하니 별 수 없습니다."
춘희는 피뜩 무슨 생각이 머리를 탁 치는 것이었다.
(려향을 군철한테 붙여 놓으면 어떨가?)
그녀는 려향한테 머리를 돌리었다.
"려향이,남자친구도 박사겠지?"
려향은 머리를 다소곳이 숙이었다.
종호가 부르튼 소리로 두덜거리었다.
"남자친구 있으면 좋지.로처녀 돼가지고서도 시집 안간다는데.흥!무서운 독신주의자!"
"아빠! 그만해요.지금 마흔살이 돼도 시집가지 않는 처녀들이 수두룩한데요. 삼십대 중반인데 로처녀라니요? 참."
려향은 종호한테 외까풀눈을 곱게 흘기었다.
춘희는 환성을 지르다싶이 놀란 소리쳤다.
"아니, 이렇게 이쁜 박사처녀 시집 안 간다니 웬 말인가요?"
춘희는 종호와 려향을 번갈아보면서 말했다.
"내 좋은 남자 있으면 소개해 줄까요?"
종호는 온 얼굴에 주름이 쫙 퍼지더니 반색했다.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난 쟤 시집가는 걸 보면 원이 더 없겠습니다.쟤 시집가지 않는 날엔 훌 죽어 버리겠습니다. 살아서 뭘 하겠습니까?"
려향은 부끄러워 아빠한테 외까풀눈을 곱게 흘기더니 병실에서 훌 나가 버리었다.
기실 려향은 결혼하려는 생각이 꼬물만치도 없었다.
“아빠와 엄마처럼 맨날 싸우면서 살 거면 결혼해 뭘 해?”
그녀는 천번이고 만번이고 속으로 시집 안 간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러나 결혼하지 않으면 아빠가 자살하려고까지 하기에 별 수 없이 핍박에 의해 량산에 오르게 되었다.
춘희 박사가 불시에 혼사말을 꺼내자 려향은 경악했다.
(올게 끊내 왔구나. 이렇게 빨리도 올줄이야.)
려향은 핍박에 의해 입으로라도 시집 갈 것처럼 해 아빠의 자살을 막아야 했다.
춘희는 려향의 속내는 모르고 제 좋은 궁리를 하면서 혼사말을 하려고 들었다.
(려향을 군철한테 붙여놓고 군철을 내 딸과 떼 놔야지. 그럼 문걸도 마음을 돌려 나와 재혼하겠는지 어찌 아는가? 이거야 말로 꿩 먹고 알 먹고 둥지 털어 불을 때는 격이라. 일거량득이 아닌가?)
춘희는 려향의 등뒤에 대고 웃음을 날리었다.
그녀는 지영마저 병실에서 나가자 얼굴을 종호한테 돌리었다.
“저리 물 찬 제비처럼 츨츨한 박사생이 여직껏 시집가지 않다니오?”
종호는 우물에 가서 숭늉을 달라고 할 지경이었다.
그는 안간힘을 써서 바로 앉으면서 춘희한테 물어 보았다.
“그래, 어디 좋은 총각이 있습니까? 딱 박사 아니라도 석사나 학사 쯤도 됩니다. 좋은 자리 있으면 소개해 주십시오.”
춘희는 희죽이 웃으며 느슨히 혼사말을 하기 시작했다.
“있긴 한데요. 나이 좀 많아요.”
“몇살이기에?”
“올해 마흔 둘인데요.”
춘희는 종호의 너부죽한 얼굴을 흘끔 훔쳐 보았다.
종호는 개의치도 않았다.
“내 딸애도 이젠 서른여섯이나 되는데. 여섯살 이상 쯤은 지금 세월에 괜찮아요.”
춘희는 군철의 나이보다도 숫총각이 아닌데다가 애 둘까지 달린 것이 걸리어 제꺽 뒤를 잇지 못했다.
그때 오히려 종호가 다그치었다.
"그래, 그 총각의 학벌과 직업은 어떤 정황입니까?"
종호의 외까풀눈에는 절절한 기대의 빛이 어리어 있었다.
"학위야 있겠지?"
"물론이죠.학벌은 려향보다 좀 낮은데요.북경대학 석사생인데요."
춘희는 종호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으면서 대답했다.
"지금 한 한국 회사 전무입니다.능력가지오. 년금이 백만원도 넘는데요."
종호는 반기기는 고사하고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흘러갔다.
그는 춘희를 치켜보았다.
"한국에 있는 회사서 일하는가요?"
"아닙니다. 중국에 있는 한국 회사에서 일해요."
종호는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중얼거리었다.
"그렇게 유능하다는데, 에헴, 왜 아직도 장가가지 않았답니까? 이 세월에 그런 능력가 로총각도 드문데…"
"그런게 아니라…"
춘희는 차마 군철한테 애 둘이 달려 있다는 말을 더 하지 못했다.종호한테 단통 거절받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그러나 속일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그녀는 종호의 눈치를 살피면서 완곡적으로 에둘러 말했다.
"지금 세월에 어디 그런 로총각이 있겠는가요?"
"그럼?"
"리혼했는데요.애도 둘이 달려 있습니다."
"뭐?"
종호는 깜짝 놀라 입이 함박만해지었다.
(보배 같은 내 딸을 어떻게 보고.흥! 애 둘이나 달린 홀애비를 다 소개해?)
그는 외까풀눈을 꾹 감고 한참이나 입에 빗장을 지르고 가타부타 말도 하지 않았다.
바빠 맞은 춘희는 제꺽 발뺌을 했다.사심에 찬 자기 속내가 발가질가봐 슬쩍 빠져나가는 찰나였다.
"이 혼사말을 꺼내지도 않을 걸로 해요.제가 실수했어요."
"아니,천만에 말씀을."
종호는 외까풀눈을 번쩍 떴다.
"아무튼 제 딸을 걱정해 줘 고맙습니다.애들의 일을 어떻게 알겠습니까?려향한테 물어봐야겠습니다."
춘희는 종호의 그 말은 인사말이라는 것을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려향과 말도 꺼내지 마세요.원래 시집가기 싫어하는 독신주의자 같은데요.혼사말은 잘하면 술 석잔 차례지고 잘 못하면 칼 세자루 차례진다는데요.괜히 리사장님이나 제가 려향한테 욕 먹겠어요."
춘희는 이 혼사말을 계속 하다가 일거량득은커녕 욕을 먹을가 봐 부쩍 근심됐다.그녀는 떡 주자는 사람도 없는데 미역국부터 갖춰놓고 기다리는 격이 되고 싶지도 않았다.
춘희는 려향이 시집가지 않고 나이를 먹는 것이 근심되기보다는 마흔살도 넘는 홀애비 군철한테 보배 같은 외동딸이 전도를 망칠가 봐 근심이 태산 같았던 것이다.
그녀는 딸애 가은(일본 명:마끼)을 얼마나 욕했는지 모른다.
"어쩜 그렇게도 눈깔이 멀었어?서른살도 안되는 새파란 나이에 마흔도 넘은 홀애비한테 반해? 미쳤지, 미쳤어!"
춘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은이한테서 군철을 떼놓으려고 이를 옥물었다.
“안돼. 가은한테서 꼭 군철을 떼놓아야지.”
춘희는 군철한테 려향을 붙여놓고 자기 딸 마끼를 떼내려고 들었던 것이다.
오호, 천하의 엄마의 자식사랑, 그 가련한 마음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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