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해살은 나무이파리 끝초리에 대롱대롱 매달린 이슬을 꿰 옥구슬을 만들어 퇴원하는 종호의 목에 걸어준다. 병원 울안 수림에서는 새들의 지저귐소리 귀를 간지르며 재생을 노래한다. 알락달락한 코스모스 꽃들이 하느작거리며 춤추며 반긴다. 어디에서인가 재생의 찬가가 은은히 들리어 기분이 한결 상쾌하게 한다.
오늘은 종호가 퇴원하는 날, 종호는 병원 울안을 떠나면서 재생의 기쁨에 겨워 가슴마저 설레이었다. 그는 그간 자기를 보살피2권느라고 수고 많은 지영과 려향, 나영한테 한턱 쏘기로 했다.
그들은 려향의 제안대로 택시를 타고 광화거리 종각역 부근에 가서 내리었다.
려향은 점심식사는 아직 너무 일찍해 아빠랑 언니들을 데리고 교보문고로 들어갔다.
서점은 종호가 제일 좋아하는 곳이기도 하였다. 병실에서 항상 우울했던 종호는 서점에 줄느런히 진렬된 새 책들을 둘러보면서 기분이 확 바뀌어 활기를 되찾은 것 같았다.
려향은 얼굴의 주름살마저 쫙 펴진 것을 보고 무등 기뻤다.
종호는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는 어떤 책은 자꾸 펼쳐보고 책꽂이에 되꽂아 넣었다가도 다시 꺼내 펼쳐 보았다.
려향은 아빠한테 다가가 무슨 책을 보는가 여겨보았다.
리종호 작 “동만 항일영웅 이야기” 아니겠는가.
려향은 여점원한테 그 책을 들어보이면서 물었다.
“이 책이 잘 팔리는가요?”
여점원은 피끗 려향을 보며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잘 나가지 않아요. 동만 항일력사를 관심하는 한국인들이 몇이나 있겠어요?”
종호는 실망스러워 머리를 툭 떨어뜨리었다. 고향에서도 그의 책의 운명은 마찬가지였다.
(아, 어쩜 이럴가? 동만 조선족의 항일력사는 전반 조선민족 항일력사의 일부분이 아닌가? 얼마나 고생스레 취재해 쓴 책인가. 엄동설한에 삼도만에서도 몇십리 떨어진 평강촌에 가서 토비숙청전투를 취재할 때 죽다 살지 않았던가. 평강촌에서 취재하고나니 그만 뻐스를 놓쳐 점심도 못 먹고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무인지경 수림 속 길을 걸어 새까만 밤에야 삼도만까지 돌아왔댔지. 배고프면 길 옆의 눈을 웅켜 먹으면서 승냥이들이 우는 소리 여거저기 들리는 산길을 걸어 간신히 돌아왔댔지. 그렇게 애나게 력사이야기를 하나, 하나 취재해 쓴 책인데. 보는 사람이 없다니? 참 야속하다, 야속해.)
종호는 책을 매만지면서 도리머리를 홰홰 저었다.
옆에서 려향은 어두운 그림자가 흐르는 아빠 얼굴을 지켜보면서 코마루가 시큼해났다.
그녀는 아빠가 또 정식자극을 심하게 받아 병이 도질가 봐 부쩍 겁났다.
그때 나영이 종호의 기분을 전환시키려고 다가섰다.
“리사장님, 전번에 제가 서점에 왔을 땐 숱한 사람들이 리사장님 책을 사 가던데요.”
여점원은 어이없어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나영을 흘끔 쳐다보았다. 전번에 책을 사가던 나영이 눈에 익었던 모양이다.
"전번 날엔 잘 팔렸지요?"
나영은 여점원한테 눈까지 찔끔 해보였다.
눈치챈 여점원은 제꺽 말을 바꾸었다.
"네. 그래요. 간혹 이 책을 사가는 중국에서 온 조선족들이 많았어요."
여점원은 나영을 가리키면서 "이 분은 단골인데요." 하고 덧붙였다.
사실, 나영은 교보문고에 와서 종호의 책이 잘 팔리는가 알아보았다. 책이 잘 팔리지 않은 걸 알면 종호가 정신타격을 받을가 봐 몇번이고 책을 사다가 연길랭면점에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종호의 책을 보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훌훌 무료로 나눠주었던 것이다.
여점원은 눈치를 좀 챘든지 제꺽 사과했다.
“죄송해요. 이 책의 저자님인줄도 모르고 그만…이제 잘 팔릴겁니다.”
나영은 종호를 돌아보며 어색한 분위기를 제꺽 돌렸다.
“저기 다른 책 보러 갑시다.”
그녀는 어정쩡해 서 있는 종호의 팔까지 끼고 다른 책꽂이 앞에 다가갔다.
지영은 종호한테 지나친 친절을 보이는 나영을 곁눈질하면서 아니꼬운 표정을 지었다.
(춘영이 상을 할래? 리사장을 꼬시려는건가?)
기실 지영은 나영이 자꾸 종호를 보러 오는 것도 속으로 내켜하지 않았다. 나영을 보면 자꾸 여우 같은 춘영이 떠올라 괴로웠던 것이다. 그러나 수십년 극진하게 친해온 친구라고, 마음의 빚을 진 친구라고 항상 나영이 앞에서 한발 물러서군 했다. 그녀는 춘영이 때문에 오랜 지기까지 잃기는 싫었다.
나영도 그런 눈치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춘영이 때문에 지영이 한테 죄를 자기가 지은듯한 심정이었다. 그리하여 항상 지영이한테 잘해주려고 했다. 기실 한국에 도망쳐 온 후에는 지영한테 해준 것보다 받은 것이 더 많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지영은 나영이 낙태수술 할 때도 극진히 도와나섰고 시술후 친자매처럼 살뜰히 해주었다. 또 부탁대로 성림을 한국에 데려다 주었던 것이다.
나영은 지영의 얄미워하는 표정에 개의치 않고 종호를 데리고 가서 책을 여러개 뽑아보이었다.
“리사장님은 이 책을 보면 좋을 거 같아요.”
지영이 보니 한국의 대작가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과 “아리랑”이었다.
지영은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열권씩이나 되는구나. 그리 긴 소설을 언제 다 보겠니?”
옆에서 려향은 종호한테 물었다.
“아빠, 이 책을 사고 싶은가요?”
지영이 옆에서 또 끼어들었다.
“아니, 이리 긴 책을 언제 다 보겠느냐? 리사장님은 언론인이기에 수필이나 칼럼 같은 짧은 글을 보는게 좋은 거 같애.”
려향도 한마디 했다.
“그래요. 아빠, 아빠는 언론인이란 장기를 살려서 짤막한 수필이나 칼럼 같은 걸 쓰면 좋을 거 같아요.”
지영도 또 께끼었다.
“지금 모두 생활의 절주가 빨라져서 핸드폰으로 짤막한 글을 보기 좋아해요. 지하철에서도 몇역 가는 시간 내에 볼 수 있는 짤막하고 재미나는 글을 보기 좋아하죠. 짧은 글에 철리를 담으면 얼마나 매력적인가요. 저는 그런 멋진 수필을 음미하기 좋아해요.”
나영은 시답잖은 눈길로 지영한테 눈짓했다.
(간호원 출신이 뭐 안다고 자꾸 끼어들어?)
눈치 챈 지영은 입을 꼭 다물어버렸다.
옆에서 나영이 어색한 기분을 풀어주었다.
“지영은 그래도 고향에서 어머니수필콩쿠르 수필문학상 대상을 탄 적이 다 있소.”
종호는 지영이 앞에 엄지를 척 내들었다.
“참 대단하오. 이전에 나도 칼럼을 썼댔소. 그런데 백성들을 위한 여론감독 작용이 별로 없어서 그만뒀소.”
려향은 옆에서 엄지를 내둘렀다.
“그만두길 잘했습니다. 아빠는 전문 백성들이 관심사나 사회 문제성 비판보도나 칼럼을 쓰기 좋아했댔소. 헌데 그런 글을 쓰면 항상 비판받은 자들한테서 시끄러움을 당해야 했지요. 아빠는 비판보도를 쓰다나니 항상 편안한 날이 없었소. 어떤 자들은 신문사에까지 찾아와 행패를 부리었지요. 심지어 폭력으로 보복하려고 들기까지 했댔소. 누가 먹을 알도 없는데 그런 말썽거리 글을 쓰겟소?”
종호는 머리를 절레절레 저을뿐 가타부타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정치에 민감한 그는 습관처럼 남의 말을 듣기만 좋아하고 혀끝을 주의하고 있었다.
나영은 지영과 려향의 말에 반론을 내놓았다.
“리사장님은 력사 인물과 이야기를 쓰기 좋아하기에 이런 력사대하소설을 보는게 좋을 거 같아요. 력사 한페지를 다룬 이런 대하소설은 거대한 원자탄과 같단 말이예요. 수필이나 칼럼은 소총이나 경기관총에 불과하다고 봐요. 력사대하소설을 보면 력사 인물이나 이야기를 쓰는데 도움이 될 거예요.”
종호는 그녀들의 말을 듣기만 하고 묵묵부답했다.
한참 후에야 그는 나영을 보고 물었다.
“이건 무슨 력사를 쓴 책이오?”
“이 대하소설 <<아리랑>>은 조선반도와 동북, 태평양 연안 하와이와 동남아 등지를 넓은 배경으로 항일력사이야기를 쓴 소설이죠. <<태백산맥>>은 광복후부터 1949년 사이 남조선로동당 지도아래 태백산맥에서 유격대들이 한국 독재정권에 맞서 괴뢰군과 유격전을 벌린 피어린 력사이야기들 쓴 소설인데요.”
종호는 머리를 끄덕이며 그 책을 다시 펼쳐보면서 만지작거리었다.
나영은 종호가 사고 싶어한다는 것을 눈치챘다.
“제가 리사장님께 사드리죠. 시간 나지면 한번 보세요.”
나영은 기어이 조정래의 대하소설책을 사서 종호한테 선물했다.
지영은 머리가 베아링처럼 잘 돌아갔다.
그녀는 제꺽 수필집을 하나 사서 종호한테 드리었다.
종호는 사양하다가 책을 감사히 받았다.
“감사하오. 잘 보겠소. 그런데 애나게 번 돈을 많이 팔게 해 미안하오.”
나영은 걀죽한 얼굴에 볼우물까지 옴폭 파며 웃었다.
“천만에 말씀을요.”
려향은 아빠한테 문학리론책을 사 드리고 나서 이렇게 제의했다.
“아빠, 우리 커피나 마시면서 언니들과 함께 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 어때요?”
이건 려향이 미리 계획했던 스케줄이었다.
종호는 인차 머리를 끄덕이었다.
“그러자. 글이야 문학석사 나영이나 대상수상자 지영이가 선생님이지. 글에 대한 고견을 듣고 싶다.”
그는 문학박사 학위를 탄 려향도 시험치고 싶었다.
나영은 지영과 눈길을 마주치고나서 종호를 마주 바라보며 볼우물을 옴폭 팠다.
“황송해요.”
지영은 나영의 우유빛볼에 옴폭 파이는 볼우물을 보고 온몸을 전률했다. 나영의 옴폭 파인 볼우물을 보는 순간 춘영의 볼우물이 눈앞에 피뜩 떠올랐다.
(바로 저 살인볼우물이야. 사내들의 눈깔을 빼가는 저 볼우물, 간을 녹이는 저 살인 볼우물이야. 국현도 저 춘영의 옴폭 파인 볼우물에 풍덩 빠찌고 말았지. 저 볼우물에 뽀뽀하면 별란가? 개 같은 국현 새끼, 씨.)
순간 지영은 나영마저 미워났다.
나영은 그런 눈치는 채지 못하고 지영의 손을 잡고 려향의 부녀간을 따라 커피숍에 다가갔다.
커피숍은 처녀총각들로 활기 넘치었다. 숱한 젊은이들이 키피숍에서 차탁에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책을 보고 있었다.
(얼마나 짙은 문학의 향연이 풍기는 곳인가?)
종호는 새 세상이 열리는 것만 같아 기분이 한결 상쾌했다. 그는 딸이 고마웠다. 이런 서향이 풍기는 곳에 다 데려다 주어 내심 고마웠다.
사실, 그는 이제껏 책 출판비용을 벌려고 건설현지에나 다니면서 고생하다나니 이런 문화적인 공간에 언제 와 본 적도 없었다.
그들은 유리창문 곁으로 해 자리를 잡았다. 종호와 려향이 나란히 앉고 나영과 지영이 맞은 쪽에 앉았다.
이윽고 그들은 아메리칸 커피 한잔씩 들면서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종호는 커피숍에서 책을 골똘히 보는 젊은이들을 둘러보면서 입을 뗐다.
“여기 와 보니까. 한국 젊은이들은 아직도 책을 잘 보고 있구만."
려향은 어깨 으쓱해 말했다.
"이게 한국의 선진적인 문화풍경선이죠."
종호는 여간 감탄해마지 않으며 혀끝을 끌끌 찼다.
"우리 고향에도 이런 문화분위기 있어야는데."
려향은 반색했다.
"우리 고향 대학가 부근 커피점에 가면 이러루한 풍경이 보이는데요. 대학생들은 이젠 책을 봐도 커피숍에 와서 보기 좋아하죠."
종호는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우리 고향 젊은이들은 서점을 별로 찾지 않는 것 같던데. 내 모교 대학 도서관에 가보았는데 도서관이 텅텅 비었더구나. 도서관의 그 싯누런 명작도서가 그저 썩어빠지는게 아깝다, 아까워. 우리 대학을 다닐 때엔 진짜도서관 책을 빌려내다가 목마른 사람이 물 마시듯 보았는데.”
“그래요.”
나영이 동감을 표시했다.
“제랑 대학에서 공부할 때도 간혹 학사나 석사 론문 자료를 찾느라고 도서관을 찾았지요. 평소에는 별로 책을 보지 않았어요.”
지영이 또 끼어들었다.
“지금은 온라인시대이기에 컴퓨터나 핸드폰으로 글을 보는 사람이 더 많아요. 리사장님도 이젠 아까운 돈을 팔아 자꾸 책을 내기보다 인터넷홈페이지나 핸드폰 위챗동아리에 글을 올리세요.”
나영도 동감했다.
“맞아요. 온라인에 올리면 책에 내기보다 더 많은 분들이 볼 수 있지요.”
나영은 종호의 눈치를 힐끔 건너다보았다.
그녀는 종호가 골똘히 귀담아 듣는 것을 보고 뒤말을 이었다.
“책은 소장가치와 사회 작용이 있지만요. 제한성도 있지요. 책에 내면 그저 우리 고향 분들만 보겠지만요. 온라인에 올리면 우리 중 국 뿐만아니라 한국, 일본, 지어 미국의 우리 동포들이 다 볼 수 있지요.”
종호는 머리를 끄덕이었다.
지영은 종호의 눈치를 보면서 말했다.
“리사장님이 하시는 일에 도움이 되겠는가 해서 스스럼없이 말씀 드리는데요. 널리 량해하세요.”
종호는 흔쾌히 대답했다.
“좋소. 오늘 우리 스스럼없이 자유토론을 하기오. 내 관념이 형세에 뒤떨어진 것 같소. 저네 힌트를 접수해야겠소. 대단히 좋은 아이디어요.”
려향이 종호의 태도가 바뀐 것을 보고 반색했다.
“이제야 아빠 새 시대를 따르는 대작가 같아요.”
그녀는 지영과 나영의 손을 잡고 말했다.
“언니들 충고 정말 고맙소. 이전에 내 말하면 아빠는 돈이 아까워 책을 내지 말라는가고 오해했댔소. 내 말을 곧이듣지도 않았댔소.”
종호는 나영과 지영을 둘러보면서 물었다.
“저넨 문학지식과 글쓰기 실력이 있는데 왜 글을 쓰지 않소? 난 려향하구 글을 쓰라고 말하다 못해 이젠 맥이 진했소.”
나영과 지영은 서로 눈길을 마주치며 새무룩이 웃었다.
나영은 대답하지 않으면 실례인 거 같았다.
“저 처지에 먹고 살기도 어려운데 제가 언제 글을 쓰겠는가요?”
지영도 맞장구를 쳤다.
“그래요. 제가 글을 써서 어디 죽벌이나 하겠는가요? 어떤 땐 좋은 글감을 만나면 짤막한 수필이라도 쓰고 싶은 충동이 생기지만요. 어데 그런 여가가 있어야죠.”
종호는 머리를 끄덕이었다.
“나는 한평생 우리 민족 력사 인물과 이야기를 썼소. 그런데 그런 책을 보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어 참 실망스럽소. 어떤 사람들은 항일력사이야기 책을 증송하려고 하면 어쩌는지 아오? 리사장, 이런 력사책은 이젠 때 지났소. 좀 짜릿짜릿한 사랑이야기를 쓴 책이 없소? 이런단 말이오.”
려향이 스스럼없이 말했다.
“아빠는 이젠 력사이야기만 쓰지 말고 현실생활에 눈길을 돌려 현실문제를 해결하는 글도 썼으면 좋겠습니다.”
순간 나영과 지영의 눈길은 동시에 종호의 표정을 살피었다.
종호의 표정은 확 바뀌었다. 눈섭꼬리가 치켜올라가고 외까풀눈이 데꾼해 려향을 쏘아보는 것이었다.
종호는 려향의 한마디 말에 한뉘 쌓아온 닭알무지가 단번에 와그르르 무너지는 감이 들었다.
“력사이야기를 쓰지 말고 어떤 걸 쓰란 말이냐? 애잡짤한 련애나 사랑 이야기나 쓰라니? 말초신경까지 짜릿짜릿해나는 그런 련애소설을? 나보고 언어장난이나 하거나 음풍영월이나 하라고? 어림도 없어. 나는 정치학부 졸업생이 돼서 소설을 못 써. 그런 건 네나 써라.”
려향은 한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아빠라고 해도 분촌은 따져야 했다.
“아빠, 력사이야기를 쓰지 말라는 건 절대 아닌데요. 우리 민족의 력사이야기를 써서 민족의 혼을 지켜야죠. 민족의 전통력사책을 써서 우리 민족의 기념비를 세워 천추에 길이 빛나게 해야지요.”
그제야 종호의 눈섭꼬리가 느슨히 처지었다.
나영과 지영은 려향이기에 그렇게 터놓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다고 여겼다.
려향은 계속 충고했다.
“아빠는 이젠 황혼기에 들어섰는데요. 력사이야기도 계속 쓰고 황혼기에 들어선 중로년들의 현실생활에 눈길을 좀 돌리세요. 황혼기에 들어선 분들의 실제문제를 풀어주는 글도 쓰면 좋을 거 같아요. 아빠는 언론인이기에 충분히 인기 수필이나 칼럼을 잘 쓸 수 있다고 봐요.”
종호는 한숨을 푸 쉬었다.
“너네 말에 눈앞이 탁 트이는 거 같구나. 한 조선족 장군은 생전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우리 조선족들은 이젠 묵은 그루에 이밥 먹을 생각을 하지 말고 새 시대에 지혜롭게 살아갈줄 알아야 한다.'고. 나이 들면 고집이 많고 새 관념과 신생사물을 잘 접수하지 못하는게 흠이지. 내 자살하지 않았기에 또 할 일이 생긴 것 같구나. 조선족들을 위해 력사도 쓰고 현실과 미래를 위해 짤막한 칼럼이나 수필도 써야지. ”
지영은 자기 말도 먹힌 것 같아 반색했다.
려향의 충고는 끝나지 않았다.
“아빠, 무슨 글이나 내용도 중요하지만 예술성도 아주 중요해요. 아빠는 어떻게 독자들이 재미나게 읽을 수 있게 하겠는가, 머리 쓰면서 글을 써야 해요. 지금까지 쓴 력사이야기를 보면 예술성이 너무 차해요. 읽는 사람들이 재미없을 수 있어요.”
종호는 생각 밖으로 이번에도 흔쾌히 접수했다.
“그래. 이젠 글을 써도 예술성도 고려해야지. 이전에 책을 내려고 출판사에 갔다가 내 글이 ‘예술성이 낫다’, ‘화약냄새와 피냄새만 짙다.’ 이런 말을 많이 들었다. 이젠 그대들이 사 준 문학리론 책도 읽고 소설책도 읽고 힘써 예술기량도 제고해야지.”
종호가 오늘 따라 려향의 충고를 모두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을 보고 지영도 용기를 내서 한마디 했다.
“몽실이나 전상무 수필은 짤막해도 현실생활에서 부딪친 많은 문제를 아주 생동하고 재미나게 다뤘지요. 나름대로 생활철리도 폭폭 쏟아냈지요. 이런 수필은 숱한 독자들의 인기를 끌고 있어요. 리사장님은 생활경험이 풍부하고 민감하고 예리한 관찰력이 있지요. 때문에 우리 생활 구석구석에 숨어 있는 문제를 발견해내 콕콕 찔러주고 눈을 틔워 주는 철리도 개괄해 보여줄 수 있다고 믿어요.”
나영은 말할가 말가 하다가 한마디 했다.
“제 말은 귀에 거슬릴 수도 있는데요. 그저 저의 문학에 대한 취미를 말할 뿐인데요. 괜찮겠는지요?”
종호는 너부죽한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기대에 찬 눈길을 나영한테 보냈다.
“스스럼없이 말하오. 문학석사생이니까. 문학이야 나영이 전문이지.”
나영은 손사래를 쳐댔다.
“아니, 천만에 말씀을요.”
그녀는 아주 조용히 말했다.
“제 생각에는요. 사랑은 문학의 영원한 주제라고 생각해요. 사랑은 모든 사람의 관심사지요. 사랑, 련애, 혼인, 가정을 제재로 글을 쓰면 숱한 사람들이 즐겨 볼 거 같아요. 사랑을 쓴 글은 시대가 변해도 수많은 사람들이 재미나게 읽으리라고 봐요. 그런 작품은 진짜 시대가 변해도 영원히 명작으로 남게 되지요.”
종호가 머리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나영은 계속 뒷말을 이었다.
“가정이 화목해야 만사가 흥성할 수 있다고 해요. 가정은 사회의 젤 작은 세포인데요. 가정이 깨지면 사회도 혼란해지고 사람들도 행복하게 살 수 없지요. 가정이 깨지면 천길만길 깊은 고통의 쁠랙홀에서 헤매게 되지요. 당면해서 사랑과 가정 문제만큼 중요한 일이 또 어디 있는가요?”
나영은 어두워지는 종호의 표정을 보고 말미를 감추었다.
“그렇다고 리사장님을 보고 사랑이야기만 쓰라는 말은 아닌데요. 그저 인기글을 쓰려면 그래도 사랑이야기를 쓰는게 좋을 거 같다는 말이예요.”
종호는 커피잔을 들어 쭉 마시더니 뜻밖의 말을 했다.
“오늘 돈을 주고도 어디서 듣지 못할 보귀한 말을 잘 들었소. 나영과 지영 덕분에 이젠 출판비용도 더 팔지 않게 됐소. 이젠 무거운 책짐을 벗어메게 돼 얼마나 홀가분한지 모르겠소.”
그는 땅이 꺼지게 한숨을 후 내쉬더니 뒷말을 이었다.
“이전에 수원에 나와 책을 낸 적이 있소. 그때 무거운 책짐을 메고 다니던 일을 생각하면 신물이 날 지경이오. 신도림역에선 어쩌겠소. 책배낭을 어깨에 메고 무거운 책트렁크를 안고 그 높은 층계를 올라가다가 그만 허리띠 툭 끊어지지 않았겠소.”
그 말에 나영과 지영은 입을 함박만큼 쫙 벌리었다.
“숱한 행인들 앞에서 괴춤이 다 훌 내려갔댔소. 그때 얼마나 창피했던지. 다행히 지나가던 마음씨 착한 녀대생을 만나서 책짐을 봐주었기에 신도림역매장에서 허리띠를 사 띠고 책짐을 지고 안고 지하철을 탔지. 그렇게 애나게 책짐을 메고 지하철을 타고 비행기를 타고 국내에 가져갔댔지. 그렇게 애나게 가져간 책을 증송하겠다니 어떤 이는 어쩌는지 아오? 서재공간을 차지한다고 안 가지겠다오. 또 어떤 이는 책을 증송하겠다니 긴 글이라면 딱 질색이라면서 짐이 된다고 거부하더란 말이오. 또 어떤 이들은 책을 받긴 해도 근본 보지도 않고 앞에 쓴 서명을 쭉 찢어버리고 쓰레기통에 남몰래 버린단 말이오. 혹은 낡은 책장사한테 페지로 팔아먹기도 한단 말이오. 그래서 수상시장에서 책장사가 낡은 책으로 팔기도 하더란 말이오. 이젠 온라인시대를 따라야지.”
나영과 지영은 못내 감탄하며 긴 한숨을 호- 내쉬었다.
종호는 내심을 남김없이 솔직히 털어놓았다.
“나영의 말이 맞소. 나는 절대 사랑과 가정 문제를 외면할 수는 없소. 나도 산산히 파탄난 내 가정을 생각할 때면, 그 소설 같은 비극적인 이야기를 회상할 때면 글로 쓰고 싶은 충동을 느끼군 하오. 그러나 나는 소설을 쓰는 재간이 없어 못 쓰오.”
그는 몸을 반쯤 돌려 옆에 앉은 려향을 돌아보며 넌지시 말을 건넸다.
“려향이나 아빠와 엄마 비극을 가지고 장편소설을 좀 쓰렴.”
려향은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산산 박산난 우리 집 일을 생각만 해도 가슴이 미여지는 거 같은데. 어떻게 소설로 씁니까?…”
려향은 어찌나 마음이 아픈지 쓰라린 두 볼에 눈물을 줄 끊어진 구슬처럼 줄줄 흘렸다.
나영과 지영도 각자 깨어진 자기 가정을 떠올리면서 가슴이 아픈 나머지 눈굽을 찍었다.
커피숍의 문학의 향연은 여전히 그들의 사이에서 솔솔 풍기는데 활기찼던 자유토론 분위기는 가뭇없이 사라져간다.
쓸쓸한 괴로움이 한숨소리를 반주하여 구슬프게 흐느낀다.
커피숍 유리창문에 서글픈 황혼의 피빛락조가 쓸쓸히 비끼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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