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수로 쏟아지는 소낙비를 피해 종호와 려향은 광화문 앞 과화지하철역으로 부랴부랴 달려들어갔다.
그들 부녀간은 지꿎게 쏟아지는 소낙비와 으르렁거리던 우뢰소리를 뒤로 하고 개찰구로 나가면서 안도의 한숨을 후- 내쉬었다.
서울은 다른 건 몰라도 지하철이 사통발달해 좋았다. 지하철에는 소낙비를 피해 달려 들어온 행인들로 발 내디딜 틈도 없을 정도로 붐비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하철이 달려왔다.
종호와 려향은 책짐을 갈라 들고 붐비는 지하철에 올랐다. 뜻밖에도 지하철에는 손님이 별로 없었다. 구석 쪽으로 해 좌석에 나란히 앉았다.
종호는 책짐을 보배처럼 품 안에 꼭 껴안고 얼굴을 반쯤 돌려 려향을 보고 물었다.
“취직 방향은 고려해봤니?”
려향은 한숨을 호- 내쉬었다.
“시간 좀 주세요. 이젠 제가 벌어서 아빠한테 효도해야죠.”
종호는 려향을 보면서 자기 의향을 넌지시 꺼냈다.
"교보문보 같은 큰 출판사 편집이나 하면 좋겠는데. 작품이나 책이나 내기도 편리하겠는데. 아니면, 어느 신문사 기자질을 하면 어떻니?"
려향은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녀는 자기 도사인 허교수가 하던 말이 떠올랐다.
"지금 시대에 삼대로 문학을 하면 집안이 망할 거야."
그러나 아빠를 실망하게 할가 봐 그 말은 못하고 에둘러 완곡하게 말했다.
"아빠 한뉘 기자질 했는데 지겹지도 않아요? 아빠는 출판사에 책을 내러 다녀보지 않아 그래는가요? 지금 출판사도 책이 잘 팔리지 않아 힘들어요.딱 출판사나 신문사에 들어앉아야 글을 잘 쓸 수 있는게 아니라고 봅니다. 회사에서 일하면서도 생활을 축적하면 얼마든지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다고 봐요."
종호는 의아한 눈길로 딸애를 마주 바라보았다.
“도대체 어떤 데 취직하려고 그래?”
려향은 아빠한테 속속들이 말했다.
“어제 최전무한테서 전화 왔는데요. 자기네 회사 회장 비서에 취직하지 않겠는가고 묻습디다.”
“최전무라니? 잘 아는 사람이냐?”
“내 구명은인입니다. 밤중에 보라매공원 부근에서 흑인강도한테서 날 구해준 구명은인입니다. 절대 믿을 수 있습니다.”
려향은 그날 밤중에 있은 섬찍한 일을 들으면 아빠가 놀랄가 봐 이제껏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은 경우에 따라 쭉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됐다.
“인터넷으로 검색해보았는데요. 최군철 전무는 원래 중국 S시 한국 한 반도체회사 부총경리, 전무입디다. 그는 대공무사한 당대표던데요. 지금 한국 본사 지회사에서 전무 겸 기술팀 팀장을 겸해 주관하더군요. 최군철 전무는 믿을만한 분입니다.”
종호는 머리를 끄덕이었다. 그는 딸애의 취직에 대해 자기 의견을 너무 강요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 생존이 우선이지. 네가 알아서 취직해라. 민족의 얼을 지키려는 마음만 있으면 어떤 취직을 하더라도 잘 해나갈 수 있지.”
종호는 려향이 선선히 대답하자 자기 꿈이 이뤄지는 것 같아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려향이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간에 자기 뒤를 이어 민족의 얼을 지키고 전주 리씨 집안의 대를 잇게 하는 것만이 종호의 유일한 꿈이었다.
그는 전번에 춘희가 하던 혼사말을 꺼낼가 하다가 그만두었다.
(우리 귀한 딸을 어떻게 애 둘이나 달린 홀애비한테 시집 보낸단 말인가. 안돼, 절대 안돼.)
지하철을 몇번 갈아타고 대림역에서 내렸다. 이날만은 예전처럼 단돈 백원이라도 남으려고 몇 역 먼저 내리지 않았다. 뜻밖에도 언제 소낙비가 쏟아졌는가 싶이 하늘이 활짝 개이지 않았겠는가.
그들은 책짐을 들고 콧구멍만한 셋집도 제 집이라고 돌아왔다.
종호는 딸을 데리고 셋집에 들어서면서 땅이 꺼지게 한숨을 후- 내쉬며 막연한 생각을 했다.
(반토굴이나 다름없는 셋집에도 쨍 하고 해 뜰 날이 있을까?)
려향은 아빠의 책짐을 받아 옷궤 위에 높이 정중히 올려놓았다. 뒤이어 팔을 걷고 구들부터 말끔히 닦았다.
려향은 아빠를 침대에 모셔놓고 부엌에 다가가며 생글 웃어 보이었다.
“누워 쉬세요. 맛있는 밥을 지어 아빠한테 드릴테니 기다리세요.”
종호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얘, 먹을데 없다. 우리 얘기나 하자.”
“좀 기다리세요.”
한참 후 부엌에서 감자장이 보글보글 끓는 소리 들리었다. 구수한 감자장 냄새가 풍겨왔다. 전기밥가마에서 쌕- 쌕김이 새나오는 소리 듣기좋게 들리었다.
이윽고 밥상에 감자장국에 고들고들한 밥 두그릇이 올랐다. 김치접시도 따라올라 왔다.
“맛있게 드세요.”
종호는 숟가락을 쥐어 감자장국 한숟가락 퍼서 후루룩 들이켜보았다.
“야- 참 맛있구나. 효녀 덕분에 오랜만에 감자장국을 맛있게 먹겠다.”
려향의 걀죽한 얼굴에도 기쁨이 넘쳤다.
“네- 호호. 맛있게 많이 드세요.”
종호는 연신 치하하면서 넌지시 이런 말을 꺼냈다.
“너도 이젠 시집가도 되겠다. 장국도 맛잇게 끓이지. 문학박사지. 뭣이 모자라니? 내게 손자를 좀 안겨주렴. 사람 인생에 자식들 일 이 잘 풀려야 행복한 거야.”
“또, 또. 아빤 어째 세마디 안팎에 또 결혼 말을 못 떠나는가요?”
“내 실패한 인생을 네나 좀 만회해 줬으면 해서 그런다.”
려향은 아빠한테 실망을 주고 싶지 않았다.
(아빠 자살 원인의 하나가 내가 결혼하지 않은 것과 관계될 거야. 아빠는 우리 전주 리씨 대를 끊는 걸 칠거지악에 속한다고 하잖았는가. 아빠는 나를 보고 재생을 결심했을 수도 있다. 무남독녀인데 절대 실망하게 할 수 없다. 황차 오늘 아빠한테 중대한 부탁을 하자면 이벤트를 해야지.)
려향은 아빠와 한차례 중대한 거래를 하려고 작정했다.
“아빠, 좋은 총각 만나면 결혼하지요.”
종호는 의아한 눈길로 려향을 마주 바라보며 려향의 손을 덥썩 잡았다.
그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
“진짜? 결혼하겠니?”
려향은 활짝 웃는 얼굴로 아빠를 마주 보면서 또박또박 말했다.
“그래요. 결혼해 아빠한테 숱한 손주도 낳아주겠어요.”
종호는 너무 기뻐 어쩔줄 몰라했다.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리던 반가운 말인가.
활짝 웃는 아빠를 보는 순간, 려향은 아빠가 가여워 보였다. 사랑도 행복도 없이 수십년 동안 살아온 아빠가 너무나도 불쌍해났다.
(엄마는 이젠 날 보고 전주 리씨를 따르지 말고 한고조 류방의 류씨 성을 따르라고 했는데. 민족도 한족으로 고치라는데. 그래야 광활한 중국 대지에서 전도 있다고 하던데. 그런줄도 모르고 아빠는 딸한테 기대다니...)
려향은 아빠를 보고 진심으로 권고하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다.
그녀는 뜻밖에도 이렇게 말했다.
“아빠, 이제라도 엄마와 리혼하고 젊고 이쁜 색시를 만나 행복하게 사세요. 혹시 우리 전주 리씨 집안 대를 잇겟는지 아는가요?”
종호는 너무나도 뜻밖의 말에 숟가락을 쥔 채 휑하니 딸애를 마주 바라보았다.
그는 한참만에야 밥숟가락을 뜨며 무거운 입을 뗐다.
“무슨 롱담이냐? 대를 잇는 일이야 네가 해야지.”
그러나 려향은 걀죽한 얼굴에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아빠는 아직 젊어요. 사랑하는 안해가 필요해요. 한평생 이렇게 사랑도 없고 안해도 없이 살 순 없잖은가요?”
종호는 장국을 후후 불어들면서 말했다.
“부탁이야. 더 미루지 말고 결혼해라.”
려향은 인차 대답했다.
“아빠 부탁대로 꼭 결혼하겠어요.”
그러자 종호는 희죽이 웃으면서 머리를 끄덕이었다.
려향은 아빠가 기분이 한결 좋아진 것을 보고 자기 결혼승낙을 앞세워 아빠와 거래하려고 들었다.
“아빠, 한가지 중대한 일을 부탁드립시다.”
종호는 려향을 돌아보며 물었다.
“중대한 일이라니? 뭐든지 부탁해라. 하나 밖에 없는 딸을 위해서라면 최선을 다할 거야.”
려향은 아빠를 마주 바라보며 정색했다.
“엄마는 필경 나를 낳은 친엄마 아니고 뭔가요? 난 절대 엄마를 중국에 보내 총살당하게 놔둘 순 없습니다.”
려향은 아빠의 손을 잡고 말했다.
“지금 엄마를 구하려면 한국 인터폴에서 중국에 인도하지 말게 막아야 합니다.”
종호는 눈이 데꾼해졌다.
“류려평이 죽을 죄라도 졌다더니? 죽을 죄를 졌으면 한국에도 법이 있는데 가만 놔두겠느냐? 우리 무슨 수로 막을 수 있겠느냐?”
려향은 아빠한테 다가앉으면서 말했다.
“한국 법은 중국 법에 비해 좀 무르잖습니까? 엄마는 한국에서 판결받으면 살아남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렇구나.”
종호는 동정어린 눈길로 려향을 마주 바라보았다.
“낸들 조강지처가 죽기를 바라겠느냐? 그래서 전번에도 려평이 링겔병에 뭘 주사해 넣은 것도 덮어주었다. 내 자살하자고 탄 거라고 했지.”
려향은 절절한 눈길로 아빠를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
“그걸 뒤집어야 엄마는 한국에서 판결받고 중국에 인도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종호는 의아해 했다.
“무슨 소리냐?”
려향은 나직이 차근차근 말했다.
“한국에서 판결받으려면 엄마가 아빠를 죽이려고 염화칼리움을 링겔병에 주사해넣었다고 해야 합니다.”
종호는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엄마는 살인미수죄로 한국에서 처형당하지 않을가? 괜히 구하려다가 해치지 않알까?”
“절대 아닙니다. 한국에서 고의살인이 아니면 한 5년 판결받죠. 길어도 15년이나 받을 수 있지요. 황차 어머닌 살인미수죄기에 극상해 몇해 감옥살이 하면 되지요.”
“그거야 그렇지.”
려향은 아빠 두 손을 잡고 간곡히 부탁했다.
“아빠는 엄마 살인미수 죄행을 사실대로 경찰에 인증을 서 주십시오. 그러면 엄마를 구할 수 있습니다.”
종호는 머리를 끄덕이었다.
“알았다. 너네 엄마를 구할 수만 있다면야 못할 일이 뭐겠느냐?”
려향은 기뻐 아빠의 두 손을 꼭 잡았다.
“고마워요. 아빠, 엄마를 구해준다면 이 딸은 절대 아빠 은공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겁니다. 아빠 부탁대로 결혼해 손자도 낳아주고 아빠를 계승해 항일투쟁사도 써나가겠습니다.”
“그럼 약속하자.”
그들 부녀간은 빼끼손가락으로 깍지걸이까지 하면서 약속을 다짐했다.
“백년동안 오늘 약속을 뒤집지 못해요.”
“그래, 너도 꼭 결혼햐야 해.”
이 시각 아빠와 딸은 한차례 특별한 거래를 벌이었다. 그들은 각자 제 좋은 꿈을 꾸면서 약속을 다짐하면서 황홀한 환상에 잠겼다.
단칸방 셋집에서는 밤늦도록 부녀간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주고 받는 말소리가 들리었다.
종호는 잠자리에 들어 눈을 살며시 감자 마치 끌끌한 백마왕자가 려향한테 성큼 성큼 다가오는 황홀한 그 날을 방불히 보는 것만 같았다.
그는 이 반토굴 같은 셋집에도 쨍 하고 해 뜰 날이 돌아오는 것만 같아 자못 흐뭇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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