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튿날 동녘이 푸름이 밝아오자 병완이 바깥에 나와 움막으로 올라가려고 했다. 그러자 장학산은 서쪽 방을 가리키면서 자라는 시늉을 했다.
병완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장학산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할 대신 한족 말을 몰라 엄지를 내둘렀다.
그는 기준을 돌아보았다.
“어찌 주인집에 계속 얹혀살겠느냐? 바깥에 나가 돌아보면서 집터를 잡아 놓고 명년 봄에는 집을 짓고 나가자.”
그들은 장학산에게 인사하고 문밖을 나섰다.
간도의 눈보라는 황야를 휩쓸고 기세 사납게 윙윙 휘몰아쳤다. 모래알 같은 눈가루가 얼굴을 마구 두드리고 목에도 마구 날아 들어갔다. 엄동설한 세찬 강바람에 소서구로 들어가는 그들은 숨이 헉헉 막혀 바로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다. 게다가 무릎까지 펑펑 빠지는 눈 위로 황야를 걷는다는 것은 실로 힘들었다.
병완은 눈 덮인 골 안을 돌아보면서 기준에게 “네가 지은 움막은 어데 있느냐?” 하고 물었다.
기준은 소서구 막바지를 가리키면서 “저기 막바지에 있습니다. 이제도 한 2 리 올라가야 됩꾸마.” 하고 대답했다.
창준은 상길을 둘쳐 업고 걷다가 골 안 중간에 있는 움막을 가리키며 “저건 누구네 움막이냐?” 하고 물었다.
“건 재작년에 회령에서 들어온 주현경이란 조선 사람의 움막이요.”
병완은 걸음을 멈추고 눈썹을 치켜 올리며 창준과 기준을 보더니 정색해 말했다.
“누구든지 우리 정체를 모르게 해야 한다. 명천에서 온 말을 하지 말고 함흥에서 왔다고 해라. 이제부터 너희들도 애명을 써라. 창준의 애명은 문칠이고 기준의 애명은 경칠이다.”
창준은 “예.” 하고 인차 대답했다.
기준은 이렇게 동을 달았다.
“아버지 말씀이 맞습니다. 진수해 위안 소 위안부 년들이 아버지를 알아 본 후 어쩐지 한길수의 패거리들이 여기까지 눈에 난 발자국을 밟아 찾아올까봐 꽤나 근심됩꾸마.”
그러나 창준은 도리머리를 가로 저었다.
“눈보라 휘몰아치는데, 발자국 어데 남겠어? 일본 놈들이 제 아무리 코 개라 해도 이 골 안까지야 찾아오겠느냐?”
기준은 창준의 잔등에 업힌 상길을 돌아보면서 신신당부했다.
“상길아, 누구와도 우리 명천에서 온 말을 해선 안 된다. 알만하지?”
“예. 우린 함흥에서 왔잖았습둥?”
기준은 상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오, 그래. 우린 함흥에서 왔지. 상길은 참 총명한 애지. 최구장네 서당에서 공부할 때도 공부를 제일 잘했지. 한자도 참 잘 쓰고. 영특한 조카지.”
그때 주현경이 움막에서 나와 소리쳤다.
“어이, 돌아왔소?”
“그래, 돌아왔어. 아버지와 형님만 들어왔소.”
움막 안에서 애들이 머리를 내밀고 그들을 내다보았다.
병완은 주현경의 움막까지 올라가 인사했다.
“함흥에서 왔소. 이웃사촌이라고 이후에 형제처럼 서로 도우면서 살기요.”
“예. 그래얍지. 다 살 길을 찾아서 이런 골 안으로 왔는데 서로 도우면서 살아야지.”
주현경은 움막 안을 가리키었다.
“스산한 움막이라도 잠간 숨을 돌리고 올라가오.”
그러나 병완은 “아니, 기준이 지은 움막이랑 밭이랑 올라가 봐야겠소.” 하고 움막에서 내려왔다.
그들은 한참 걸어서야 겨우 막바지에 지은 움막에까지 올라갔다.
병완과 기준은 목수였지만 반토굴이나 다름없는 움막을 보고 도리머리 질을 할 지경이었다.
병완은 기준의 소개를 들으면서 움막 주위를 둘러보았다. 움막 옆 눈 속에 얼지 않은 샘터에서 샘물이 흘러 골 안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서쪽으로 쭉 뻗어온 소서구 막바지 서쪽과 남쪽, 북쪽에는 눈 덮인 산등성이였는데 싸리나무와 개암나무가 꽉 들어선 황무지였다. 다만 동쪽에만 골 안이 열려 있었다.
“밭이 얼마나 되냐?”
병완의 물음에 기준은 “한 서너 짐 밖에 안 됩니다.” 하고 대답했다.
병완은 남산등성이와 서산등성이와 북산등성이를 둘러보았다.
“제일간 저 황무지가 욕심나는구나. 저걸 괭이로 부대를 일구면 좋은 밭이 될 것 같다.”
병완의 말에 기준은 “그렇습니다. 고향의 너럭바위 깔린 산 비탈밭보다 훨씬 낫습니다. 봄에 장 지주와 말해 저 황무지를 일궈 반작을 하깁소.” 하고 동을 달았다.
“그렇게 하자겠니?”
창준의 말에 기준은 “내 지난해 괭이로 황무지를 떠서 몇 고랑 더 만들었더니 장 지주가 좋아 입이 함박만해집데.” 하고 말했다.
“그럼 됐어. 그런데 움막만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황무지하구 가까워서 일하기는 좋겠는데 살림살이를 장구하게 할 곳은 아닌 것 같아. 소낙비가 내려도 그렇고 산사태가 지면 경사진 곳에 집을 지어서야 견디겠냐?”
기준은 머리를 끄덕이었다.
“나도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런데 당분간에야 어찔 방도가 있습둥?”
병완은 멀리 골 안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어제 소서구에 오면서 보니 태평강이라던가 그 강이 흘러나간 저 아래 큰 골 안 어귀에 버드나무우거진 평평한 곳이 있더구나. 거기 버드나무와 비술나무를 베서 집을 지으면 좋을 것 같더라. 풍수를 봐도 앞이 트인 곳이 좋아.”
창준은 인차 “좋을 거 같습구마.” 하고 찬동해 나섰다.
기준은 좀 심중한 표정을 지으면서 “아버지 말하는 거기에 웬 부자가 집터를 잡구 지난해 토성을 둬 키도 넘게 쌓아 놓았습니다. 별난 집이요. 먼저 토성을 쌓고 올 봄에 집을 지을 예산인 거 같습더구마.” 하고 말했다.
“조선 지주더냐?”
병완이 묻는 말에 기준은 “듣는 말에 의하면 조선 지주라는 것 같습더구마.” 하고 대답했다.
“조선에서도 잘 살 수 있겠는데 이상해. 조선 지주가 고향을 떠나서 이런 간도 산골에 와서 뭘 한다느냐?”
병완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이 절레절레 도리머리를 저었다.
“우리 저 골짜기 어구 나무숲 속으로 가 돌아보자.”
병완의 말에 창준과 기준은 따라나섰다.
풍설이 일었지만 그래도 서북풍을 등지고 산을 타고 골짜기를 내려가기가 올라올 때보다는 걸음이 빨라졌다.
그들은 추워서 오돌오돌 떠는 상길을 장학산네 집에 두고 3부자만 다시 바깥으로 나왔다.
어느 결에 그들은 태평강 반에 아름드리 버드나무와 비술나무가 우거진 골짜기 어귀 평평한 곳에 이르렀다.
병완은 사위를 둘러보면서 말했다.
“내 풍수를 잘 모르지만 여기가 집터로는 좋은 곳이다. 산을 등지고 서쪽에는 태평강을 끼고 저 멀리 남쪽으로 부르하통하가 내다보이는 이 골 안 어귀는 제일 좋은 집터야. 뒤에 골짜기 빠져나갔기에 장차 뒤로 황무지를 끝없이 개간할 수도 있다.”
병완은 눈보라 휘몰아치는 비술나무숲속에 우뚝 솟은 키 넘는 토성을 보면서 덧보탰다.
“다만 조선부자 집 옆에 집을 짓기 싫다. 이리 좋은 자리를 중국 지주들이 주겠는가는 것도 그렇구.”
기준은 아버지와 형님에게 안심시켰다.
“근심하지 맙소. 여기 지주들은 산의 황무지는 한 치도 양보하지 않지만 별나게 이 강바닥은 아름드리나무들이 꽉 박아서서 그러는지 저 부자 집에서 여기다 집을 지어도 말하는 지주 하나도 없습꾸마.”
기준은 근심거리를 수태 털어놓았다.
“저기 소서구 밭과 너무 먼 게 흠입구마. 저렇게 먼데 어떻게 일하러 다니고 곡식을 실어 들이겠습둥?”
창준도 자기 생각을 털어놓았다.
“낟알이야 거기 움막에 있으면서 털어서 절반 장 지주를 주고 나머지만 달랑 메고 오면 된다. 집터는 아버지 말씀대로 편안한데다 잡는 게 옳다.”
형님까지 좋다고 하자 기준은 입을 다물어버렸다.
병완은 조선 부자 집 토성 앞에 한 일리 되는 곳에 육십 자는 실히 되게 하늘을 찌르고 서있는 비술나무를 보더니 창준과 기준을 돌아보았다.
“저기 묵은 비술나무 밑에 집을 지어도 좋을 거 같아. 부자 집과도 멀리 떨어졌고 골 안 딱 어구지지. 뒷산을 등져서 산의 정기는 낫을 것 같다. 갇힌 감도 없이 앞과 좌우가 확 트여서 여기보다는 벌방인 감이 나겠다.”
기준은 단마디로 반대해 나섰다.
“아버지는 어째 점점 소서구와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자고 이럽둥? 묵은 비술나무에서 동북쪽으로 한 200미터 쯤 떨어진 곳에 조지주가 있습구마. 그래서 그 둔덕진 곳을 모두 조개덕(조가덕)이라고 합더구마. 이전에 누가 그 비술나무 밑에다 집을 짓자고 하니 한 풍수를 볼 줄 아는 중이 지나가다가 이런 말을 했답더구마. ‘거기에 집을 지으면 잘 되면 아주 큰 부자 되고 못 되면 망한다.’ 좋긴 소서구 골 안에 숨어 사는 게 좋습구마.”
병완은 언짢아했다.
“그럼 넌 소서구에서 살아라. 우리 집은 여기다 짓겠다.”
기준은 뒷덜미를 긁적거렸다.
“차라리 그게 낫겠습구마. 소서구 움막에서 농사를 짓고 별일이 없는 겨울에는 여기 내려와 살고.”
병완 삼부자는 일단 집터를 정하고 장 지주네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병완은 기준을 돌아보았다.
“장 지주와 먼저 말해보고 집 지을 차비를 하자.”
그는 창준에게 머리를 돌리면서 뒷말을 이었다.
“통나무들을 베다가 장 지주를 주면 좀 좋아하겠니? 장 지주는 어쩜 저 좋은 나무를 두구 베다 때지 않았다니?”
이튿날부터 병완은 장 지주에게서 톱과 도끼를 얻어들고 창준과 기준을 데리고 태평강 가에 집터라고 잡고 아름드리나무를 베서 톱으로 토막토막 끊어 팡팡 팼다.
그러자 석은 형제도 찾아와서 일손을 거들어주었다.
병완 삼부자는 지게를 만들어가지고 땔나무를 지게에 담아 장지주네 집 울안에 져갔다.
장 지주는 입이 헤벌쭉해 그들에게 엄지손가락을 내둘렀다.
여우도 얼어 죽을 맵짠 엄동설한 날씨에 눈보라가 휘몰아쳐도 간도 황야에 집을 짓고 황무지를 일구면서 끈질기게 살아나가려는 그들의 강렬한 생존욕망을 막을 수는 없었다.
저쪽 아름드리나무 가지에 새 두 마리가 남쪽에서 날아와 앉아 둥지를 틀려는지 꼬리를 달싹거리면서 지저귀고 있었다.
제10장고난의세월
1. 그물만치고고기를놓쳐
한편 명천 우시장에서는 야단났다.
기준과 상길을 놓친 뒤를 이어 병완과 창준마저 운주동에서 사라진 것을 알고 한길수는 경찰국 옆에 있는 자위대 사무실에서 외눈깔로 영팔과 수길을 쏘아보면서 닦아세웠다.
“뭐라던가? 병완이 어디로 가는가 잘 감시하라는데. 네놈들이 끝내 놓치다니? 밥통 같은 것들. 내 어떻게 끼무라 국장의 낯을 보겠느냐?”
영팔과 수길은 머리를 숙인 채 찍소리 하지 못하고 장대기처럼 꼿꼿이 서 있었다.
“왜 자네들을 중대장으로 임명했나? 어이고, 등신 같은 놈들. 이제라도 병완의 형 병권 영감네 일가를 잡아들여서 신문해. 병완의 종적을 밝혀 내지 못해 봐! 네놈들을 놔두는가 봐라!”
“옛!”
영팔과 수길은 차렷 자세로 경례를 붙이고 사무실을 나갔다.
수길은 자위대 한개 중대를 풀어 명천군을 서캐 훑듯 하기 시작했다.
영팔은 자기 수하 자위대원 십여 명이나 끌고 곧게 신설동으로 덮쳐갔다.
그들은 나무숲속의 신설동 마을 어귀에 자리 잡은 병권이네 집 삽작문을 걷어차고 미친개처럼 뛰어들었다.
“병권은 나와서 우리 영팔 중대장의 심문을 받아라!”
딱 옛날 포도군사들과 같았다.
미닫이문이 스르륵 열리면서 병권이 하얀 수염을 흩날리면서 나와 의아한 눈길로 영팔과 자위대원들을 둘러보았다.
“대체 무슨 일이오?”
병권의 뒤로 관준과 상철이가 방문을 열고 나와 마루에 죽 섰다. 형내도 이젠 스무살 되는 청년인지라 허리에 양손을 찌르고 자위대원들을 쏘아보았다.
그때 영팔이 졸개들에게 호령했다.
“땅바닥에 꿇려라!”
졸개들이 병권에게 덮쳐들자 관준과 형내가 막아 나서면서 졸개들을 마루 아래로 콱 밀었다.
영팔은 목에 지렁이 같은 피 줄을 세우면서 고함쳤다.
“저 놈들을 몽땅 묶어라!”
“예이!”
십여 명 졸개들은 욱 몰려왔다. 관준과 형내, 상철까지 졸개들을 밀치면서 반항했지만 몽땅 포승에 결박당했다.
“꿇려라!"
영팔이 고함치자 졸개들이 발길로 관준과 상철, 형내의 종아리를 내리 걷어차 꿇어앉혔다.
“말해! 병완이 어디로 갔어?!”
병권은 시치미를 따고 영팔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병완이 어데 갔는가?!”
영팔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네놈이 분명 병완 네를 숨겨뒀어. 얘들아, 매우 쳐라!”
그러자 졸개들이 예순이 훨씬 넘은 병관에게 물매를 안겼다.
“아버지!”
관준이 벌떡 일어나며 아버지 몸에 날아드는 몽둥이를 몸으로 막아섰다.
그러자 졸개들은 관준이고 상철이고 형내까지 몽둥이로 마구 조겨 댔다.
그때 부엌간에서 관준의 처 리화영과 상철의 처 박만식이가 뛰어나왔다.
“아이고, 우리 영감이 무슨 죄가 있다고 이러오?”
“작은집에서 달아난 게 우리캉(우리와) 무슨 관계있소?”
그러자 영팔은 “그만!” 하고 외치더니 채찍으로 손바닥을 툭툭 치면서 병권에게 다가갔다. “봐! 노친의 말 들었지? 병완 네가 도망친 사실을 모르면 어떻게 저렇게 말하겠는가?”
상철은 영팔을 손가락질 하면서 “배은망덕한 놈이라고. 어디 이런 놈이 있는가? 이전에 너 어미 폐병에 걸렀을 때 우리 할아버지가 병을 봐준 일을 잊었는가?” 하고 욕했다.
그러자 영팔은 밸이 울꺽 치밀었다.
“몽땅 끌고 가!”
졸개들이 결박한 그들 삼대를 끌고 갔다.
“어디로 끌고 가?!”
상철의 처 박만식이가 소리치면서 삽작문 밖까지 뛰쳐나왔다.
한 졸개가 상철의 다리를 붙잡고 놓지 않는 만식의 머리를 총 박죽으로 내리깠다.
“아이고!”
상철의 처가 외마디 비명소리와 함께 땅바닥에 폭 쓰러졌다. 총 박죽에 타박상을 입어 머리에서 피가 줄줄 흘렀다.
“여보!”
상철은 아내를 되돌아보며 애간장을 끊는 소리로 불렀다.
“걸어!”
졸개들이 상철의 양팔을 잡아 홱 나꿔채며 떠밀었다.
마음이 약한 상철이가 눈물을 흘리면서 머리를 숙이더니 중얼거렸다.
“우리 조손삼대가 무슨 죄 있다고 이러는가?”
영팔은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면서 을러멨다.
“계속 개소릴 치겠는가? 한 대장한테 가서 계속 개소릴 쳐봐라! 주둥이를 찢어놓지 않는가.”
형내는 세 귀 눈을 부릅뜨고 영팔과 졸개들을 쏘아보며 마루기둥에 걸어놓은 낫을 벗겨들었다.
“무슨 일을 치려고 이러니?”
할머니가 형내의 손에서 낫을 빼앗아 치웠다.
형내는 의사공부를 한 선비와는 달리 주먹을 으스러지게 틀어쥐고 씩씩거리면서 졸개들에게 끌리어 멀어져가는 아버지 네를 바라보았다.
해가 질 무렵에야 영팔 등은 병권 조손삼대를 끌고 자위대 사무실에 들어섰다.
한길수는 불똥이 뚝뚝 떨어지는 눈길로 병권이네를 쏘아보았다.
한참 후 한길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병권에게로 다가왔다.
“말하오. 동생네는 어디로 갔소?”
병권은 한길수를 눈귀로 흘려보고 눈길을 먼 천정에로 돌리었다.
“난 동생과 한마을에서 살지도 않는데 어떻게 알겠소?”
한길수는 형틀에서 채찍을 내리워 들고 손바닥을 툭툭 치면서 지껄였다.
“시치미를 떼겠는가? 기준이가 간도로 들어갈 때 당신네 집에 들린 걸 내가 모르는 것 같소?”
한길수는 눈길을 병권에게 쏘며 표정변화를 읽고 있었다.
그러나 병권의 대답은 “알면서 물을게 뭐요?” 라고 할 뿐이었다.
“영감! 어째 아들과 손자를 죽여야 입을 열겠소?”
한길수가 고함쳐도 병권은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죄 없는 내 동생과 조카들을 왜 못살게 구오? 자네가 어지간히 놔두었어도 그 애들이 왜 고향을 떠나 헤매겠소?”
한길수는 제자리에 뚜벅뚜벅 걸어가 앉더니 사무실이 떠나가게 고함쳤다.
“호되게 족쳐라!”
“예이!”
영팔은 졸개들과 함께 우르를 덮쳐가 병권이네를 형틀에 거꾸로 달아맸다. 뒤이어 사무실안에서는 채찍을 휘두르는 휴~휴~ 소리와 처량한 비명소리가 들리었다.
이때 사무실문이 벌컥 열리였다.
“무슨 짓인가!”
모두들 보니 끼무라 국장이 군도를 들고 사무실에 들어섰다.
한길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굽혔다.
“끼 국장님, 죄인들을 족치고 있습니다.”
류강철이 번역하자 끼무라는 한길수를 한쪽으로 불러가더니 귀속 말로 쑥덕거렸다.
끼무라는 병완 쪽으로 돌아서서 졸개들에게 손짓했다.
“명천의 유명한 의사 김병관 어른을 풀어줘라!”
한길수는 못마땅한 눈길로 끼무라를 흘끔흘끔 곁눈질해보았다.
병권이네가 상을 찡그리면서 일어나자 한길수는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내 조선 팔도를 다 뒤져서라도 병완의 새끼들을 몽땅 붙잡아 칼탕을 쳐놓지 않는가 봐라! 씨를 말릴 놈들!”
끼무라가 휭 하니 나가자 열을 받은 한길수는 채찍을 들고 씽 달려오더니 병권과 관준에게 채찍을 짱, 짱 안겼다.
병권은 상을 찡그리면서 신음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며 참았다.
한길수는 시어머니 역정에 개 배때를 차듯이 영팔에게 화를 냈다.
“자넨 왜 일을 이따위로 해? 이따위 무용지물들을 잡아다 뭘 해? 성칠의 유일한 단서 검둥개가 보이지 않네. 당장 병완네 새끼들을 붙잡아오지 못할까!”
“옛!”
영팔은 졸개들을 끌고 사무실을 부랴부랴 나갔다.
한길수는 졸개들을 시켜 병권이네를 놓아주고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면서 두덜거렸다.
“더러운 일본 놈의 두상! 한의나 하는 병권네게 잘 보여서 만년장수 하겠다고? 흥! 그물만 치고 고기를 잡지 않으니 이거야 원. 그래, 놔주지, 놔줘. 병완 놈아, 네 놈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한길수는 외눈깔을 딱 감고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이튿날 점심 무렵에야 영팔은 졸개들과 함께 병완의 둘째손자 상우를 붙잡아가지고 왔다.
한길수는 상우를 보자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눈에서 불티가 튕겼다.
“말해! 너 애비랑 어데 갔어? 엉?!”
실팍하게 생긴 상우는 한길수를 흘끔 쳐다보더니 “낫을 들고 나무하러 갔수다. 우리도 찾는 중입구마. 어데 있는지 알면 알려줍소.” 하고 입안소리로 중얼거렸다.
한길수는 벌떡 일어나며 버럭 고함쳤다.
“이 능청스러운 놈, 매를 들이대지 않고서는 어디 바른 말을 하겠느냐? 호되게 족쳐라!”
영팔은 졸개들과 함께 상우를 형틀에 매고 몽둥이로 사정없이 때렸다. 상우의 머리고 잔등이고 엉덩이고 다 터져서 뻘건 피가 낭자하고 상처투성이로 돼버렸다. 드디어 그는 머리를 툭 떨어뜨리더니 정신을 잃고 까무러쳤다.
이때 끼무라가 류강철과 함께 또 고문실에 나타났다.
“한 대장, 말하던가?”
한길수는 머리를 푹 수그리더니 절레절레 가로 흔들었다.
“물어보나마나. 어느 빠까 모노(멍청이)가 제 애비를 물어먹겠는가? ‘간도로 갔소.’ 이렇게?”
끼무라는 오늘 따라 더욱 빈정거렸다. 그는 한길수를 데리고 사무실에 들어가더니 조용히 말했다.
“다 풀어주게. 갈 테면 가라지. 한 대장, 한대장의 눈에 든 가시 같은 철천지원수가 가버렸으니 얼마나 좋아? 한대장이 고향에서 그놈들과 싸워 끝내 이긴 것이 아니고 뭐야? 으흐흐흐. 그 놈들도 여기서는 우리 대일본제국과 한 대 장이 있는 한 살수 없다는 걸 뒤늦게나마 알게 된 걸세. 그 놈들이 우리와 등을 지고 살 수 있어? 흥! 으흐흐, 하하하하!”
외눈깔을 띠룩띠룩 굴리던 한길수도 몇 해만에 징글맞게 너털웃음을 웃었다.
“으흐흐, 어, 어허, 허허허허.”
한길수는 흥이 나서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을 하늘로 쳐들어 쫙 벌리며 소리쳤다.
“병완, 이 놈아! 난 끝내 네놈을 이겼다! 우리 고향에서 네놈을 몰아내고 내 세상을 만들었어! 병완아, 산에서 얼어 죽고 굶어나 죽어라!”
끼무라는 정신 나간 것 같은 한길수를 멍하니 바라보면서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에이, 사람이. 이제야 스꼬시(조금) 아는군.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놈. 대일본제국 황군이 있는 한 고까짓 병완이나 성칠을 겁나할 게 뭔가? 황군은 독립군도 안중에 없어.”
한길수는 끼무라의 발밑에 입이 닿을 지경으로 넙적 엎드려 절을 하였다. 그런데 잘 보이려고 절을 한다는 게 세번이나 해버렸다.
그런 줄도 모르고 끼무라는 입이 헤벌쭉해서 어쩔 줄 몰라했다.
“상우도 풀어주게나. 간도로 가겠으면 가구 우리 일본제국에는 좋은 일이야. 그 놈의 꼬리를 따라 병완과 성칠 놈의 행적을 찾아내고. 한편 조선 사람들을 간도에 들여보내 간도 황무지를 개간하면서 간도 땅을 차지하면 좀 좋은 일인가? 우리 일본제국이나 조선에나 다 꿩 먹고 알 먹고 둥지 털어 불을 때는 격이지.”
한길수는 일어나 차렷 자세를 취하더니 군례를 척 붙이였다.
“하이(옛)!”
“허허허. 사람이 역은 같은데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거든. 참.”
통역을 듣고 한길수는 중얼거렸다.
“승리의 비애를 느껴야 하겠구먼. 원수가 없어져 할 일도 없게 됐지 않았는가!”
뒤이어 그는 고문실에 들어가 상우를 풀어주라고 했다.
피 못이 된 상우는 쩔룩거리면서 고문실에서 겨우 나갔다.
비틀거리며 나가는 상우를 보면서 한길수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무슨 놈의 심문이야. 대갈통에다 총 한방이면 단데. 에이 참.)
한길수는 후회하면서 허리에 찬 권총집을 탁탁 쳤다.
한편 상우는 눈보라를 무릅쓰고 비틀거리면서 안간힘을 다해 해질녘에야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는 병권큰할아버지와 관준 큰아버지가 와있었다.
“아니, 그 놈들이 이게 뭐냐?”
병권이 둘째손자를 부축하는데 사련은 맏아들이 불쌍해 얼굴을 매만지면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
“이게 웬 일이냐? 얘가 무슨 죄가 있다고 이 지경으로 만들어?”
19세의 성인이 다 된 상우는 구들에 꽈당 쓰러지더니 어린애처럼 엉엉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지새금은 숱한 어른들 앞이라 그저 손으로 입을 막고 벽 쪽으로 돌아앉아 어깨를 들먹이면서 눈물만 하염없이 흘렸다. 그녀는 옷고름으로 눈물을 닦고 천천히 돌아서서 피 못이 된 남편을 마음 아파 바라보았다.
일곱 살 난 상순은 “형님-” 하고 상우를 붙잡고 와 울음보를 터뜨렸다.
성질이 어진 상우는 구들에서 간신히 일어나더니 상순을 품에 껴안고 흑흑 흐느끼면서 말했다.
“우린 이젠 고향에서 살 길이 없습니다. 아버지를 따라 간도로 가야 합니다.”
상우의 누이동생 월금은 오빠를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며 손바닥으로 눈물을 닦았다.
사련은 손사래를 저으면서 “좀 기다려보자. 시아버지하구 시형이 기별을 보내면 들어오라고 하지 않았니?” 하고 만류했다.
그러나 상우는 상우대로 고집을 부렸다.
“한길수 등살에 할아버지네 기별을 기다리다가는 온집 식구들이 맞아 죽겠습니다. 아버지가 간도에 간지 1년이 거의 되는데 그래 아버지를 간도에 두고 여기서 살겠습니까?”
병권은 한숨을 길게 후- 내쉬었다.
“이전에 동생이나 조카들이 간도에 가자고 했을 때 난 말렸소. 그런데 지금 보면 동생네는 간도로 가는 것도 옳은 것 같소. 우리 집은 글쎄 여기서 두루 병을 보면서 살겠지만 동생네는 뭘 먹구 살겠소? 일본 놈들은 터 밭에까지 나무를 심으라지. 손바닥만 한 밭도 없이 어디다 곡식을 심어 먹고 살겠소?”
그 말에 여기저기서 한숨소리가 들렸다.
이튿날 병권과 관준은 신설동으로 떠나갔다.
점심쯤에 경인과 어금이 소문을 듣고 근덕을 업고 몇 리 밖에 있는 불붙이에서 황급히 내리달려왔다.
어금은 본가 집 문을 떼고 들어서기 바쁘게 “오라버니가 잡혀갔다더니 상하지 않았소?” 하고 황황해 물었다.
상우의 상처투성이 된 얼굴을 보자 어금은 얼굴을 매만지면서 섧게 울었다. 그는 올케 지생금에게서 상우가 자위대에 끌려가 당한 일을 듣고 격분을 금치 못했다.
“한길수는 어째 한 고향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든다니?”
그러자 경인은 외까풀 눈을 똑바로 뜨며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그 놈 한길수를 비수로 콱 찔러 죽이고 말겠다.”
상우는 매형이 일을 저지를까봐 “그만두오. 똥이 무서워 피하오? 더러워 피하지. 간도로 훌 떠나가면 단 걸. 괜히 매형이 그 놈에게 앙갚음을 당하겠소.” 하고 말리였다.
어금은 “본가 집에서 몽땅 간도로 가면 우린 어찌 혼자 여기 남아 사오? 그러나 저러나 엄마네 간도로 들어갈 때면 우리한테 기별하구 떠나가오. 우리도 조만간에 간도로 들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하고 말하면서 근심이 태산 같았다.
경인 부부는 점심을 먹으면서 어머니와 온 집 식구들을 위안하고 나서 최구장네 집으로 갔다.
최구장은 가만히 서당방 애들에게 조선 글을 배워주다가 경인 부부를 보고 그만두고 아래 방으로 내려와 앉았다.
“아버님,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경인 부부가 절을 올리였다.
어금은 시어머니에게 문안을 드리러 아래 방으로 내려갔다.
경인이가 자리를 잡고 앉자 최구장은 둘째손자 근덕을 품에 안으면서 물었다.
“그래 가시어머니랑 무사하더냐?”
“무사할 리 있습니까? 한길수에게 모질 얻어맞았습디다. 가시집은 여기서 살 거 같지 못합니다. 아마 간도로 들어갈 거 같습니다.”
“음, 내 오후에 문안하러 가야 하겠다.”
최구장은 눈보라가 창호지를 들 부시는 창밖을 물끄러미 내다보다가 머리를 돌리더니 경인과 경숙을 둘러보며 말했다.
“사돈어른 네는 한길수 눈에 나서 못살 때를 만나게 된 게다. 이전에도 말했지만 너희들은 절대 한길수를 건드리지 말라. 남에게 원수를 지면 아무 때든 앙갚음을 당하게 돼. 그래서 공맹지도에 중용이 제일이라고 하였느니라. 성인들의 말씀대로 언제 어디서나 뾰족하게 나서지 말구 날이 세우지 말라. 이런 흐리터분하고 암흑한 혼돈세상에서는 그저 두루뭉실하게 사는 게 제일이니라.”
경숙은 “예, 옳은 말씀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러나 최구장이 경인에게 눈길을 돌려보니 별로 납득돼하는 것 같지 않아 한마디 보탰다.
“넌 검술을 믿고 한길수나 일본 사람들과 우쭐거리지 말라. 그럴 때면 우리도 사돈어른처럼 고향에서 살지 못하고 쫓겨나는 날이야. 사위와 죽순이랑 간도에 가서 잘 지낸다만 우린 간도에 가지 말아야 해. 어떻게 하나 고향에서 살아야 해.”
그러자 경인은 아버지에게 조용히 말씀드렸다.
“계순이랑 가서 사는데서 그리 멀지 않은 소서구란 골 안에서 가시아버지랑 움막을 짓고 산답구마. 네댓 짐 되는 지주 밭에 소작 농사를 지었는데 기장쌀을 대여섯 마대를 거뒀답니다.”
“음~ 정말 대단하구나. 여기 돌밭 쉰 짐에 심은 것만 소출이 더 낫구나. 확실히 간도는 땅이 많고 비옥해서 농사를 짓기 좋은 모양이구나.”
최구장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곰방대를 뻑뻑 빨았다.
창밖에서는 눈보라가 사납게 휘몰아치는 윙윙 소리만 들리었다. 2. 불쌍한오누이
지루한 봄이 가고 불볕이 쨍쨍 쪼이는 무더운 여름이 다가왔다.
어느 날 할머니 리성단은 근형과 명옥을 불러놓고 “얘들아, 병풍치기에 가서 돌이나 주어 돈을 벌자구나.” 하고 말했다.
그러자 계순은 “나도 가겠소.” 하고 말하면서 따라나섰다.
근형과 명옥은 작은고모 계순과 함께 할머니를 따라 병풍치기에 가서 운주하 강바닥의 돌을 주었다.
당시 일본 놈들은 명천으로부터 갑산 쪽으로 가는 큰길과 북으로 간도 쪽에 통하는 함흥-길주-명천-회룡 철길을 닦느라고 조약돌을 숱해 써야 했다. 강바닥의 돌을 한 하꼬(한 상자)를 주어 바치면 일본사람들이 돈 5전을 주었다.
할머니는 애들을 데리고 자그마한 둔덕에 광목을 딱 벌려 위가 둥그렇게 천막을 쳤다. 소낙비가 올 때면 돌을 모으다가도 천막 안에 들어가 비를 끊었다. 다른 집들에서도 돌을 주우러 와서 천막을 둥그렇게 치다나니 여기저기 그런 둥그런 천막이 옹기종기 널려있었다.
애들은 온 하루 강바닥에 들어가 조약돌을 주어 함지에 담아 놓으면 할머니가 함지를 들어 나무상자 안에 부어놓았다. 어떤 때에는 명옥과 계순은 상자 옆의 조약돌을 자기절로 주어 상자 안에 담았다. 그렇게 온종일 손가락이 다슬 지경으로 자갈을 주어 상자에 주어도 넷이 한나절에 겨우 한 상자를 주었다. 그런데 할머니가 일본 십장 놈에게 가서 한 상자를 다주었다고 손짓을 해가면서 알리면 십장 놈이 와서 상자를 움쭉움쭉 흔들어놓았다. 그러자 상자안의 자갈과 조약돌이 쑥 꺼져 내려갔다.
맥이 풀리는 대로 계순과 명옥은 별수 없이 또다시 조약돌을 부지런히 주어 상자에 담았다.
“에이고, 못해 먹겠다.”
근형은 한 상자를 채우기 아름차서 강물에 손을 훌훌 횡구어서는 둔덕에 올라가 핸들 드러누워 다리를 한들거리면서 놀았다.
할머니가 “야, 근형아, 얼른 와서 자갈을 주어라. 우리 셋이서 언제 한 상자를 줏겠니?” 하고 소리쳤다.
그러나 근형은 둔덕에 반듯이 누워 못들은 척 했다. 그러나 한참 있다가 안 되였는지 둔덕에서 일어나 강변에 내려와 자갈을 주어 상자 안에 담았다. 하긴 일여덟 살 밖에 안 되는 애들은 한창 놀 때인데 지루하게 일하기 정말 싫기 마련이었다.
밤이면 자그마한 천막 안에 넷이 들어 누어 비좁아 몸을 옹그리고 자야 했다.
우르릉 꽝!
천지를 진동하는 우레 소리와 함께 번개 불이 천막 안에까지 들어왔다갔다했다. 명옥과 근형은 질겁해 할머니 옆구리에 딱 들어붙어 옹송그리고 누워 숨이 한줌만 해했다.
“저리 비켜! 이건 내 엄마야!”
계순이 명옥을 밀어내면 명옥은 화가 나서 소리쳤다.
“내 할머니다!”
서로 밀고 닥치고 할 때면 할머니가 말리였다.
“싸우지 말라! 근형과 명옥은 내 손자손녀고 계순에게는 엄마가 맞아. 누구도 다 내 자손들이니까. 싸우지 마라.”
할머니는 딸과 손자손녀를 양팔로 꼭 껴안아주었다. 그러면 애들은 모두 좋아서 싱글벙글거리면서 잠들려고 했다. 그러나 장대 같은 소낙비가 쏟아져 어찌나 천막을 우당탕우당탕 치는지 잠들 수 없었다. 그래도 낮에 너무 곤하게 조약돌을 주었기에 애들은 인차 잠들어버렸다.
남들은 자갈을 주어 번 돈으로 물고기나 명태를 사다 냄비에 끓여서 먹었다. 그러나 성단은 애나게 번 돈이 아까워 남들이 강변에 잘라버린 고마이 대가리와 명태 밸을 주어다가 끓였다. 애들은 명태 내라도 구수하게 나는지라 호호 불면서 국물을 맛있게 먹어 다행이었다.
할머니는 애들을 데리고 자갈을 주어 돈을 몇 전이라도 버는데다가 입 살이라도 할 수 있어 흐뭇해했다.
(날마다 그래도 쌀 두근 값은 벌수 있잖은가? 우리 고향 한산 같으면 명태 두 마리는 사는데. 쯧쯧)
할머니는 조롱조롱 옹송그리고 누운 딸과 손자손녀들이 귀여워 얼굴을 매만져주기도 하고 머리를 쓰다듬어주기도 했다.
할머니는 봄과 여름 한철에는 늘 명옥과 계순을 데리고 강변이거나 묵밭에 가서 능쟁이를 캤고 산에 올라가 산짐승들의 위험도 무릅쓰고 삽지, 도라지, 더덕 같은 산나물을 캐다가 데쳐 보탰다.
낙엽이 우수수 지는 가을에는 할머니는 명옥과 계순을 데리고 기운봉 기슭에까지 가서 돌에 돋아난 돌 버섯을 캐고 솔 송치를 뜯어왔다.
단풍이 어제 지는 것 같더니 어느 결에 가을이 스쳐 지가나고 눈이 펑펑 쏟아지는 엄동설한이 다가왔다.
최구장과 리성단 내외간은 다섯째아들 경석이 갑산에서 감자농사를 지어 살림살이가 괜찮다는 말을 듣고 황무지를 일궈 감자농사를 하려고 갑산으로 들어갔다. 경석이네는 나무가 꽉 박아선 산에서 좀 나무가 드문 황무의 나무를 베 내고 밭을 일구었다. 몇 백년 나무 잎이 떨어져 썩은 부식토가 뒤덮여 비옥한 흙속에 감자 씨를 넣고 묻었다. 7월이나 8월이 되여 온 산에 감자 꽃이 하얗고 파랗게 피였다. 약 담배를 너무 피워 아내마저 자살하자고 한 후 경석은 그래도 정신을 잠시나마 차리고 아내를 데리고 일본 놈들이 들어도 가지 않는 갑산 심심산골에 가서 감자농사를 지어 성공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소문을 들은 최구장 내외간은 서당도 일본 놈들의 성화에 잘 차릴 수 없어 갑산으로 들어가기로 마음을 먹었던 것이다. 그들은 막내딸 계순과 어미 없이 자라는 근형과 명옥을 데리고 갑산으로 갔다.
그런데 경석은 의사공부도 하였지만 사람은 덜돼먹은 사내였다. 약 담배를 뻑뻑 피우면서 항상 가슴츠레 뜬 눈으로 밥 축을 내는 근형과 명옥을 곱게 보지 않았다.
(별 것들이 와서 밥을 축내는구나. 미워 못살겠어.)
한편 근형과 명옥은 삼촌이 기장밥을 보글보글 끓는 감자장에 말아 먹는 것을 보고 먹고 싶어서 닭 알 침을 꼴깍꼴깍 넘겨야만 했다.
그럴수록 경석은 미워서 때리곤 했다.
어느 하루 최구장 내외가 바깥에 나간 틈에 경석은 빗자루를 들고 근형과 명옥을 쫓아다녔다.
“요 새끼들아, 밥축을 내자고 왔니? 가라, 가!”
근형은 와닥닥 일어나 바깥으로 달아나갔다. 그러나 명옥은 두 무릅 사이에 머리를 파묻고 두 팔로 싸쥐고 앉아 있다나니 서정 없이 휘두르는 빗자루에 얼굴과 잔등을 맞아대며 엉엉 섧게 울었다.
“엄마, 엄마~”
그래도 모자라 경석은 서너 치씩이나 되는 긴 침을 빼들더니 명옥을 깔고 들어앉아 양볼과 이마 사처에 마구 찔러댔다.
명옥은 피를 흘리며 너무 아파 엉엉 서럽게 울었다.
“야, 뭘 하는 짓이냐? 엄마를 잃은 불쌍한 조카애들을. 너도 사람이냐? 엉?!”
최구장은 사람 같지 않은 경석을 꾸짖으면서 명옥의 우에서 밀어치웠다.
“이렇게 살아선 안 되겠다. 우리 집으로 돌아가자.”
성단은 손자와 동갑인 막내딸을 떼 두고 오누이를 손목을 쥐고 길을 떠났다.
그러자 죽순은 발을 동동 구르면서 “안 돼, 엄마 가면 난 어찌 하겠소? 엄마, 엉엉.” 하고 울어댔다.
그러자 할머니는 어린 막내딸의 얼굴을 매만지면서 눈물을 흘리었다.
“얘, 근형과 명옥은 네 조카가 아니고 뭐야? 얘들은 엄마가 없어 얼마나 불쌍하니? 아버지와 함께 여기 있어라. 응?”
그때 최구장이 죽순을 껴안으면서 얼렸다.
“그래, 오빠는 널 때리지 않을 거야. 아버지와 함께 여기 있자.”
죽순은 아버지 품에 안겨 두 손으로 눈을 비비면서 어머니를 보고 “그럼 엄마 설전에 돌아오우. 예?” 하고 말하며 흑흑 흐느꼈다.
“오, 그래. 내 막내딸 말을 잘 들어 귀엽지.”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산바람이 윙-윙- 휘몰아치는 엄동설한에 할머니는 최구장이 파놓은 함지 세 개나 이고 죄꼬만 근형은 두 개나 지고 명옥은 한 개를 겨우 지고 길을 떠났다. 할머니와 명옥은 박달나무도 얼어터질 그 추운 엄동설한에 치마저고리바람에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산림속의 눈길을 힘겹게 걸었다. 명옥은 키가 너무 작아서 함지가 종아리를 툭툭 쳤다.
두메산골이라 인적이 없고 딱딱 40 리에 막이 하나 있었다. 버선을 신은 다리가 얼어서 꼿꼿해나 더는 걸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할머니는 방법 없어 주막집에 애들을 데리고 들어갔다.
함지를 벗어놓고 언 다리를 붙들고 엉엉 우는데 외할머니는 주막집 주인이 시키는 대로 부엌 앞에 앉은 명옥의 종아리에 찬물을 바가지로 퍼 쳤다. 그러자 다리에 돌아가면서 얼어붙은 얼음이 버선과 신 같은 것이 쭉 벗겨져나갔다. 발이고 다리고 얼어서 파랗다 못해 보기 흉물스러웠다.
할머니는 주막에서 콩알 몇 알에 쌀을 얼마간 넣고 끓인 죽 두 사발을 샀다. 할머니는 먹는 입내나 내고는 거의 두 사발을 모두 근형과 명옥에게 주었다. 배고팠던지라 애들은 죽 한 사발씩 눈 깜짝할 새에 호록호록 다 마셔버렸다. 이윽고 그들 셋은 죽에 취해 잠이 호르르 들어버렸다.
이튿날 할머니가 먼저 깨여나 “얘들아, 일어나 가자.” 하고 말해서야 애들은 곤하게 자다가 두 손으로 눈을 비비며 겨우 일어났다.
그들은 아침을 먹지도 못하고 굶어서 길을 떠나 병풍치기를 건너와 한 15 리를 걸어 사돈집인 신설집 병권네 집에 들리었다.
병권은 원래 인품이 좋은 사람인지라 그들 셋을 보자 환한 웃음을 지으면서 마중했다.
"어서 들어옵소. 안사돈어른, 아이구, 이 추운 겨울에 함지까지 이고 지고 어떻게 여기까지 왔습둥?"
병권영감과 관준영감은 마루바닥에서 성단이가 인 함지 세개나 받아내리웠다.
상철의 내외간도 나와서 마중했다.
상철이가 명옥이와 근형의 잔등에서 함지를 벗겨 내릴 때었다.
상철의 처 박만식이 함지를 받아들더니 “아이고, 이리 좋은 함지를 우리를 주자고 가져왔소?” 하고 주책없이 말했다.
성단은 그 말에 아주 난처해했다.
관준이 만식을 흘겨보았다.
그러자 상철은 안쓰러워 아내 손을 툭 치면서 “이리 놓소. 남이 집에 가지고 가려는 게요.” 하고 말했다.
성단은 “아니 함지 하날 사돈며느리에게 줄 테니 쓰오.” 하고 말하여 어색한 장면을 타개했다.
“아이고, 함지를 잘 쓰겠소.”
상철의 처 만식은 좋아라고 함지를 안고 달려 들어갔다.
병권은 너무 난처해 손비를 나무랐다.
“안사돈, 허물하지 마시오. 자위대 놈들의 총 박죽에 머리를 맞은 후부터 저 손비는 골병이 들어 드문드문 저렇게 주책없이 놉구마.”
성단은 사람 좋게 “별 말씀을 다 합니다. 좋은 의사가문에서 약을 쓰면 낫겠지요.” 하고 화제를 돌렸다.
관준의 아내는 성단이네를 아래 방에 모셔 들여갔다.
“시아버님과 우리 집 영감의 약을 썼는데도 어찌나 세게 맞았는지 골병이 통 낫지 않습니다.”
“쯧쯧, 자위대 놈들이 나쁜 놈들입니다.”
성단은 손자손녀를 데리고 그 집에서 점심과 저녁까지 잘 먹고 따뜻한 구들에서 편안히 잤다.
이튿날 아침까지 잘 얻어먹고 길을 떠나려고 할 때 경숙이가 말을 몰고 찾아왔다. 원래 전날 상철이가 불붙이에 달려가 성단이네가 신설동에 왔다는 것을 알렸던 것이다.
“엄마, 길에서 고생했습꾸마.”
“응, 마중 와서 이젠 살았구나.”
경숙은 뒤이어 병권 조손 삼대에게도 인사를 올렸다.
“여기 와서 폐를 끼쳤습꾸마.”
“천만에 말씀을. 사돈이 한 호적이라고. 내의를 하지 맙시오.”
상철이가 인사를 받았다.
이때 명옥과 근형이 “아버지!” 하고 소리치며 경숙의 품에 와락 안겼다.
“오, 그래. 근형아, 명옥아.”
경숙은 어미 없이 불쌍하게 자라는 어린 아들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는 함지 네 개를 말 잔등에 싣고 제일 우의 함지에 근형과 명옥을 싣고 바 줄로 함지를 꽉꽉 동여맸다.
경숙은 말고삐를 잡고 사돈들에게 다시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어머니를 모시고 길을 떠났다.
“감사합니다. 운주동에 오면 들리시오.”
경숙의 인사말에 병권은 손을 들어 흔들면서 인사를 받았다.
“잘 가오. 아차, 사돈네는 간도로 갈 예산이오?”
경숙은 “갈 거 같지 않습니다. 아버진 굶어 죽어도 고향에서 살겠답니다. 사돈어른은 간도로 가겠습니까?” 하고 되물었다.
“우리도 여기서 병이나 보면서 살 예산이오. 될수록 고향을 떠나지 말구 사는 게 옳소.”
병권의 말에 경숙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옳습니다. 그럼 편안히 계십시요.” 하고 인사하고는 고삐로 말 잔등을 툭 쳤다.
이때 상철의 처 만식이가 따라 나와 또 주책없는 소리를 했다.
“함지 하나만 주고 다 가지고 가오?”
“또 무슨 소리를? 에이고, 저걸 어쩌겠니?”
상철은 멍청이가 돼버린 아내를 마구 집안 정지로 떠밀어 넣었다.
경숙 등이 신설동에서 반나절 내려가니 눈보라 속에 불붙이가 나졌다.
“경인 네 집에 들러 하루 밤 쉬고 가깁소.” “그래, 그게 좋겠다. 둘째네도 본지 오래다.”
그들이 집에 들어서자 경인과 어금은 반가와 어쩔 줄 몰라 했다. 근덕은 형님과 누나가 왔다고 좋아 퐁퐁 뛰며 짝짜꿍까지 짱짱 쳐댔다.
근형과 명옥 오누이는 난생처음 밥을 배불리 먹었다.
저녁에 잠자리에 눕자 경숙은 명옥과 근형의 얼굴을 번갈아 어루만지면서 “이 추운 겨울에 너희들이 얼어 죽지 않고 돌아왔구나.” 하고 말하더니 오래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튿날에야 성단과 경숙은 오누이를 데리고 고향 운주동에 돌아왔다.
집 앞의 늙은 비술나무 위에서 까마귀 한마리가 눈보라 속에서도 그들의 불길한 앞날을 예고하듯이 이 나무 가지 저 나무 가지 옮겨 앉으면서 까욱, 까욱 하고 울부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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