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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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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실화소설 38선에서 싸우던 나날에(10)
2018년 12월 24일 21시 33분  조회:1350  추천:0  작성자: 김장혁



                                      


                                                        군사분계선에서의 대적선전
1954년 상반년, 미군 제2사단이 아군 정면에서 철거한 후 남조선(한국)군은 원래 한개 사단 외에 2개 사단이 더 증파돼 왔다.
적정 변화에 따라 리해식 소속 군단에서는 전연사의 2개 민경대대마다에 조선족간부 15명 가량씩 배치하였다. 원래 영어번역원까지 합하면 한개 민경대대에 30여명 대적공작간부가 배치돼 비무장지대에서 활동하였다.
정전 후 우리 지원군의 맞은켠에 있은 괴뢰군 제2사단은 네번이나 우리 지원군에게 호되게 족치워 4만여명이나 살상되거나 포로됐다. 괴뢰군 수도사단은 상감령전역에서 8천여명이나 섬멸되였다. 금성전역에서 괴뢰군 수도사단의 “백호련대” 련대장 임익순이 포로되고 병사들이 전멸되였으며 장갑차련대 련대장 륙근수는 격사당했다.
그리하여 괴뢰군은 우리 지원군 민경들을 보기만 해도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들은 우리 민경들의 곁을 지날 때면 총가목을 꽉 틀어쥐고 경계하는 눈길로 쏘아보면서 지나갔다.
한번은 적 민경이 산에서 스적스적 걸어내려오더니 분계선 부근의 양지바른 언덕 풀무지에 힌들 드러누워 코를 드렁드렁 골았다.
그러다가 발자욱소리에 깜짝 놀라 버덕덕 일어나 앉았다. 그는 철조망 너머 맞은켠에서 우리 지원군 민경이 걸어오는 것을 보자 화닥닥 일어나더니 총이고 뭐고 다 버린채 선불 맞은 노루처럼 뺑소니쳤다.
한번은 리해식은 남측 괴뢰군 민경 셋과 맞띄우게 되였다.
리해식은 그들에게 “어이, 여기 와 담배나 피우오.” 하고 말을 건넸다.
그들 셋은 서로 마주 보더니 하나는 총을 벗어들고 경계하고 하나는 경계하는 눈길로 리해식 등 셋을 살피면서 다가왔다. 그 자는 권연을 받아쥐면서도 온 얼굴에 겁기를 꽉 띄운 채 황황한 눈길로 리해식이 멘 총창을 힐끔힐금 쳐다보았다.
후에 리해식과도 면목익힌 뒤에 그 민경은 이렇게 말하였다.
“처음에는 당신들의 총창을 보니깐 간담이 서늘해지더라구.”
괴뢰군 민경들은 리해식 등과 자주 만나면서 면목을 익히게 되자 함께 담배를 피우고 한담하며 과자나 통졸임, 술 같은 것을 먹고 마셨다.
상감령고지의 딱 맞은켠 서남산의 적 민경 중사 백만호는 리해식 등과 16차나 만났다.
어느날 지원군 민경 둘이 대적공작과 간부와 함께 분계선 철조망 옆을 순라하다가 백만호와 또 만났다.
“어이, 만호, 와서 담배나 피우지.”
“걸케 할라우.”
대적공작간부는 권연을 한통 꺼내 철조망 사이로 넘겨주었다. 백만호는 온지박이권연을 한대 꺼내 붙여물었다. 그는 한모금 길게 들이빨아 후- 연기를 내뿜더니 혀를 끌끌 찼다.
“하, 거 담배 맛 둏다(좋다)!”
그가 권연갑을 되넘겨주려 하자 대적공작간부는 도로 밀어주었다.
“까짓 걸, 피우라구.”
“걸케 해 될가유?”
“되고 말고.”
백만오는 알고보니 전라도의 가난한 농민의 자식이였다. 그는 생활이 구차한데다 핍박에 의해 입대했던 것이다.
대적공작간부는 그의 이런 특점에 근거해 정치공작을 들이댔다.
“량식창고라고 불리우는 남조선엔 권연도 흔하잖아요?”
“쳇, 모르는 소릴. 쌀 지어놓으면 주인량반들이 다 퍼가는데두유.”
“우리 새 중국은 달라요. 백성들이 밭을 고루 나눠가지고 제 밭에서 지은 량곡은 땅세를 내놓고는 몽땅 농사군 거라고.”
백만오는 한숨을 후- 쉬며 부러워 볼멘 소리를 쳤다.
“당신들 중국 대단하오. 헌데 우리 한국은 돈 있는 량반들 세상이죠. 울처럼 천한 사람의 지옥인데요.”
옆에 서 있던 민경이 끼여들었다.
“북조선도 우리 중국과 같다오.’
그러자 백만오는 한숨을 담배연기에 섞어 후- 내보내면서 철조망을 건드리며 말했다.
“이까짓 철조망 쳐버리구 조선이 통일됐으면 얼마 좋겠시우.”
이때라고 대적공작간부는 아예 철조망을 사이 두고 백만오와 마주 앉았다. 민경이 호주머니에서 통졸임과 술병을 꺼냈다.
“자, 한잔 합세.”
“어, 거참, 매번 페를 끼쳐서 안됐시우.”
백만오가 뒤더수기를 긁적거리면서도 다가앉아 술병을 들었다.
“캬, 거 술맛 둏다(좋다). 이전에 늙은이들한테서 드을라니 중국 도수 높은 술이 맛 둏다던디우(좋다던데요). 마실수록 정 든다.”
그는 민경이 신문지에 담아 넘겨주는 통졸임을 손으로 집어씹다가 “조선보”신문에 눈길을 박았다. 그는 신문을 들여다보면서 물고기를 질근질근 씹어댔다.
“평화적으로 조선문제를 해결한다? 참, 맞아요. 전쟁 해서 뭘 해요? 숱한 도시 재더미로 됐시우. 허우, 분계선 저쪽에 가봐요. 김화군엔 아무 것도 없는 쓸쓸한 재더미로 됐시우.”
그는 술병을 들어 꿀꺽꿀꺽 들이켰다. 대번에 울기 올라 얼굴이 빨개졌다.
“만약 미군이 안 들어왔어봐요. 싸우긴 뭔 졷대가릴 싸워? 조선문제는 진작 풀렸을 걸, 쳇.”
그는 물고기통졸임을 집어 입에 넣고 질금질금 씹으면서 뒤말을 이었다.
“이 신문에 쓴 게 맞아요. 북한의 평화주장이 맞아요. 이담 평화통일이 되면요. 중국에도 놀러 갈테요.”
“좋소. 우린 환영하지.”
우리 대적공작간부는 시간이 좀 간지라 일어섰다. 그러자 맥만오는 술을 둬모금 꿀꺽꿀꺽 더 마셨다.
“야, 거 술맛 일품이유.”
“가져다 마시오.”
“고마와요. 저 전번에 보던 ‘평화와 행복’이란 화보 있는가요?”
“여기 있소.”
대작공작간부는 미리 준비해가지고 간 그 화보를 꺼내주었다.
“자, 다시 만납세.”
백만오는 화보를 11장이나 품 속에 깊숙이 걷어넣더니 비칠거리면서 떠나갔다.
괴뢰군 제21사단의 1등병 장유익도 우리 민경들과 16번이나 만났다.
그는 조선정부의 평화통일 호소문을 우리 민경들에게서 듣고 철조망을 총탁으로 탁 내리치면서 석쉼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호소문에서 말한게 도리 있어요. 리승만이 미제 말을 듣지 않았으면 무슨 이 놈의 철조망이 생겼겠어요. 이 놈의 철조망 땜에 우리 겨레 마음대로 드나들지도 못하잖아요.”
그러자 우리 대적공작간부는 한술 더 떴다.
“그렇소. 만민이 증오하는 이 놈의 철조망 때문에 전쟁으로 하여 흩어진 부모형제들이 만나지 못하고 있는게 아니고 뭐요.”
장유익은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이 놈의 철조망이 아니면 나도 뭘 할락꼬 이 놈의 뒈질 곳에서 굶으면서 개고생하겠어요?”
대적공작간부는 이날 예기했던 목적에 달했기에 자리를 떴다.
우리 군 대적공작은 사전에 방안을 세우고 지도부의 비준을 받은 후 해나갔다. 선전하는 내용도 우리 나라의 평화외교정책과 조선정부의 평화통일 각항 관점에 따라 진행하였다. 선전하는 대상에 대해서도 가정환경, 민경대에서의 지위, 성격, 사상기초를 깐깐히 분석연구한 다음 선택성있게 골라 선전하였다. 주로 하층민경들을 대상해 선전했다. 그러나 적 민경 속에 잡입해들어온 특무나 군관은 아예 접촉도 하지 않았다.
한번은 381고지에서 대적공작간부 김권식과 김봉춘은 분계선 철조망 부근에서 몇몇 적 민경과 만나게 됐다.
구레나룻이 더부룩하고 마흔이 훨씬 넘은 키꺽다리가 민경병사들 속에서 그들한테로 스적스적 다가왔다. 보나 마나 직위 높고 심상치 않은 자였다. 그 뒤를 따라오는 민경들은 김권식이나 김봉촌을 잘 아는 사이였지만 이날만은 얼굴에 긴장한 그늘이 졌다.
구레나룻은 김권식이네를 가까이 만나자 이런 것부터 물었다.
“친구, 왜 모택동이 준 군사견장을 달지 않았는가요?”
“김권식은 아닌 보살을 떨었다.
“우리 병사가 어찌 그런 일을 다 알겠소?”
구레나룻 꺽다리는 나무꼬챙이를 주어쥐더니 쭈크리고 앉아 땅바닥에 한자로 이런 글귀를 썼다.
“마음만 먹으면 세상에는 어려운 일 없으리라.”
그는 우쭐 일어서더니 철조망 맞은켠의 김권식이네를 보고 물었다.
“이 글 무슨 뜻인가요?”
김권식과 김봉춘은 서로 마주보면서 눈직하고는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모르겠소.”
김권식은 진짜 모르는 것처럼 뒤더수기까지 썩썩 긁었다.
구레나룻 꺽다리는 그들에게 또 웅글진 목소리로 물었다.
“정치는 뭘 배웠소? 로씨야 사람들의 ‘정치경제학’을 배웠는가요?”
“모르겠소.”
그러자 구레나룻이 더부룩한 꺽다리는 깔보는 눈길로 그들을 쓸어보더니 손에 쥐였던 나무꼬챙이를 홱 집어던지고는 뒤짐을 지고 가버렸다.
그 놈이 간 뒤 상급에서는 통보를 민경대대에 내려보냈다. 원래 구레나룻 꺽다리는 서울의 한 적특무기관의 두목이였다. 그는 비무장지대 전연에 직접 와서 우리측 민경들의 정황을 시탐하러 왔다고 하였다. 그 자는 그번에 돌아가서 “그쪽의 자식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애숭이들이더군.”라고 하였다고 한다. 우리 군 통보에서는 김권식과 김봉춘이 모르는 것처럼 했기에 우리 대적공작간부들의 신분과 사업의도를 숨겼다고 칭찬하였다.
어느 한번, 리해식은 대적공작이 비교적 잘 되는 381고지 민경관측소에 가서 적민경들과의 “련환모임”에 참가하려고 하였다.
“가지 마십시오. 면목이 없는 사람이 나타났다가 보이지 않으면 적들의 의심할게 아닙니까?”
민경전사들이 말렸다.
“리동무 얼굴은 우리 얼굴처럼 해볓에 그을지 않아 검실검실하지 않습니다. 몸도 실해서 간분게 인차 알립니다.”
그러나 리해식도 가야 할 리유가 있었다.
“두개 사단 민경주둔지에 한번씩 가서 적정을 알아야겠소. 이번에 꼭 가야 하오.’
그러자 민경들은 “그럼 관측소 관병인척 하면서 조선말을 하지 말고 한족민경인 척하시오.”라고 하였다.
민경들은 아주 솔직하고 모든 것을 주밀하게 타산하고 있었다.
리해식은 속으로 못내 감탄하였다.
그날 원래 오후 3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적민경들은 벌써 오후 2시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괴뢰군 민경들은 물자공급이 잘 안돼 밥도 온전히 먹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북쪽의 우리 지원군 민경들과 련환모임이나 하여 중국의 먹거리를 얻어먹으려고 들었다.
리해식 등이 나타나자 적민경 넷이 우쭐우쭐 일어나 웃으며 마주나왔다.
김관식이 나가면서 인사했다.
“미안하오. 오래 기다리게 해서.”
적민경들은 낯선 리해식을 보고 나직이 물었다.
“저 친구는 첨 보는데.”
“오- 우리 관찰소 관찰병이요. 늘 나오지 않다가 우리 여기서 재미있게 논다니깐. 우릴 따라 온 거네.”
“음, 그래? 자, 친구도 앉으랑께.”
리해식 등은 적민경들과 분계선 철조망을 사이두고 나란히 마주 앉았다. 그들이 호주머니에서 술과 통졸임을 꺼내자 적민경들은 입이 함박만해져 헤벌쭉거렸다.
“아따, 번마다 신세져 잘 먹네.”
적민경들은 해식이네가 권할 새도 없이 벌써 너도 나도 한잔씩 부어 마셨다.
“캬, 중국 술은 참 맛 좋아.”
“그래, 벌써 배꼽이 쨍해난데이.”
적민경들이 통졸임통에서 절인 돼지기를 꺼내 맛나게 먹을 때였다. 김관식은 적민경 김관웅한테 술별을 건네며 물었다.
“여보게, 친구, 그저껜 왜 오지 않았소? ‘6.25’ 에 전쟁준비 하느라고 못오게 하던가?”
김관웅은 술병을 받으면서 혀 꼬부라진 소리를 하였다.
“쳇, 관계없어. 전쟁 나면 누가 너거한테 총 쏜대? 총 들어 아무데나 마구 쏴대면 다야.”
“하하하.”
그 소리에 모두 한바탕 웃어댔다.
“자넨 진짜 전투고수야. 사격묘수 있거든.”
권커니작커니 술이 여러 순배 돌자 적민경들은 집 일로부터 세상만사, 조선전쟁에까지 다 말해도 개의치 않고 맞장구를 쳤다. 이럴 때 리해식은 제꺽 숱한 례를 들어 6.25전쟁은 미제와 리승만괴뢰군이 먼저 발돌한 것이라는 것을 까밝혔다.
적민경 김관웅은 그의 말을 듣고 머리를 끄덕였다.
“아, 원래 그런 판이였구만. 그런 걸 우린 당신들이 먼저 쳤다고. 원참.’
목적에 도달하자 리해식 등은 술을 가지고 가서 마시라고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선전용 신문으로 통졸임을 싸주었다. 통졸임을 먹을 때 보게 하려는 것이였다.
“여보게, 친구. 잘 먹겠수다.”
적민경들은 나머지 술병과 통졸임을 주어넣고 비칠거리면서 떠났다.
그후 이 민경관측소에서는 적민경 소대장 김룡삼을 낚으려고 짜고 들었다.
어느날 점심, 김권식과 민경들은 김룡삼이 분계선 철조망 부근에 있는 걸 보고 순라하는 척하면서 다가갔다.
“아니, 김소대장 아니요?”
“오, 권식이, 허허.”
그들 둘은 철조망을 사이두고 굳게 악수까지 나눴다.
이때 우리측 민경관측소의 민경이 이쪽에 대고 소리쳤다.
“어이, 점심이나 먹으라구-“
등의덕이 대답했다.
“우린 여기서 이 친구와 놀겠소. 좀 있다가 먹겠소.”
이윽고 취사원민경이 계획대로 물만두를 “죽엽청”술병과 함께 가져왔다. 김이 물물 나는 물만두를 보자 김룡삼은 군침을 꼴깍 넘겼다. 그는 아쉬운대로 떠나려고 하였다.
“어이, 친구, 우리 중국 물만두나 맛보라구.”
“걸케 해 될가요?”
“되구말구요.”
그들은 철조망을 마주하고 술도 마시고 물만두도 먹었다.
김룡삼은 잘게 싼 물만두를 맛나게 먹으면서 연신 “하, 별맛이다. 별맛이야!” 라고 하였다.
술도 다 마시고 물만두도 기껏 먹은 김룡삼은 이런 엉뚱한 궁리를 내놓았다.
“권식 친구가 딱 맘에 들어요. 우리 결의형제를 맺으면 어때요?”
권식은 등의덕과 마주보고 눈치를 맞추고 나서 인차 응낙하였다.
“좋구말구요.’
그리하여 한살 이상인 권식이 의형이 되고 적민경 소대장 김룡삼은 동생이 되였다.
그후 그들의 관계는 더욱 밀접해졌다. 김룡삼이 휴가를 맞고 결혼하러 가게 되였다. 그러자 권식은 그에게 결혼부조로 그물수건을 보냈다. 김룡삼은 결혼하고 돌아와 권식에게 결혼사진마저 꺼내 보였다.
한번은 권식이 김룡삼을 보고 “심심해 죽겠네. 뭘 볼 것두 없구. 거게 뭘 신문 같은게 없소?”하고 물었다.
김룡삼은 고려도 없이 “우리한텐 ‘륙군보’ 밖에 없어요.”라고 하였다.
이튿날로 김룡삼은 괴뢰군 “륙군보”를 가져다가 철조망 너머로 쑥 내밀었다.
권식과 리해식이 보니 별로 가치 없었다.
권식은 이튿날 신문을 김룡삼한테 되돌려주기로 하였다.
김봉춘은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적민경과 장기를 두었다. 김권식은 김룡삼과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김권식은 호주머니에서 “륙군보”를 꺼내 김룡삼에게 넘겨주면서 넌지시 물었다.
“신문은 재미없소. 다른 건 없소?”
“요새 우에서 내려보낸 3급비밀문건이 있어요. 부대 편제와 화학무기, 원자무기 훈련 같은 내용인데요.”
김룡삼은 후에 슬그머니 그 비밀문건을 가져다다 김권식에게 주었다. 김권식은 그 비밀문건을 중대부에 가지고 와서 촬영해두고 원본을 인차 김룡삼한테 넘겨주었다.
이 적민경관측소의 민경들은 괴뢰군 제11사단의 수색중대에 속했다.
어느날 밤, 리해식과 20여차나 만나본적이 있는 한 적민경이 군사분계선을 가만히 넘어와 의거하였다.
민경들이 그를 민경중대부에 데리고 갔을 때였다. 언제나 민경전사복을 입고 늘 그 적민경과 만나던 김권식이 소위견장을 단 지원군 군복을 입은채로 리해식과 그를 만났다.
그러자 그 적민경은 깜짝 놀랐다.
“아니, 당신이 군관일줄은 꿈에도 몰랐는데요.”
상급에서는 적민경과 김권식이 익숙한 사이이기에 김권식을 보고 그 적민경을 데리고 평양에 있는 조선인민군 총정치국 련락부에 호송하라고 하였다.
그 민경을 데리고 평양에 갔을 때 련락부 장부장은 김권식의 손을 굳게 잡으면서 칭찬하였다.
“지원군동무들은 비무장지대에서 대적정치공작을 참 잘했습니다.”
뒤이어 장부장은 김권식한테 차에 안내자까지 보내 평양구경을 시켰다.
후에 들을라니 의거해온 그 적민경은 학교에 가서 공부한 후 좋은 일자리를 찾아 잘 먹고 잘 산다고 하였다.
리해식은 늘 대적공작처 부처장 려광은 상감령지구 비무장지대에 가서 대적공작조 동지들을 도와 사업하였다.
추석 전 어느날 오후 3시, 리해식은 관찰병으로 가장하고 대적공작조 석정과, 조홍권, 리병정 그리고 두 민경과 함께 선전화보와 조선신문으로 싼 술 두병과 통졸임 두통, 월병 14개 그리고 배, 복숭아, 오이 20여개를 들고 분계선 철조망 곁으로 갔다. 이날 그들은 이 곳에서 적민경들과 “련환모임”을 가지기로 하였다.
그들이 가서 얼마 안돼 적민경 다섯이 산에서 내려왔다.
“안녕들 하오?”
“예, 안녕해요?”
적민경들은 인사를 받으면서 분계선 철조망을 넘어와 땅바닥에 된장국 한곽과 과자 두봉지를 내놓았다. 한 적민경은 난생처음 월병을 보는지 주어들고 신기해하며 한입 뚝 떼 먹어보았다.
“이건 무슨 과잔가요? 이리 맛있는가요?”
“월병이요.”
“오- 월병, 거 보름달처럼 생겼다고 월병이라는 모양이지.”
리해식은 술을 권한다 월병을 먹으라고 쥐여 준다 하면서 월병의 래력을 말해주고 추석이면 온집식구가 다 모여 월병을 먹으면서 명절을 쇠는 중국의 전통풍속을 알려주었다.
조홍권은 사단 대적공작과 조리원 석정과를 가리키면서 그럴듯하게 말했다.
“월병은 우리 부분대장이 명절에 먹으라고 사온 거요. 이 복숭아는 우리절로 마련한 거고 오이는 우리 심은 거요. 오늘 우리 실컷 먹고 마음껏 놀기요.”
애숭이티 나는 적민경이 혀를 끌끌 찼다.
“보라우, 남들은 분대장이 병사들한테 먹을 걸 다 사준다네. 얼마나 좋겠나.”
이때 조홍권이 적민경에게 술병을 쥐여주며 말했다.
“다 먹지 말고 남겼다가 전번처럼 관측소 형제들두 주라구. 관측소엔 몇사람이 남아 있소? 요걸루 되겠소?”
적민경은 별로 고려없이 “되구 말구요. 어제 온 세 사람 밖에 없는데요. 이걸 다 마시면 배 터질라구요.”하고 말하였다.
적민경은 새로 온 동료들 이름마저 낱낱이 알려주었다.
한창 권커니 작거니 할 때였다. 마흔이 넘은 려광 부처장이 허리에 흰 앞치마까지 두르고 얼굴에 밀가루칠을 좀하여 취사원으로 그럴듯하게 가장하고 물만두를 대야에 듬뿍 담아가지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관측소에서 내려왔다.
조홍권은 적민경들에게 그를 가리키면서 소개하였다.
“이 분은 우리 취사원이요. 물만두를 실컷 자시라구.”
려광 부처장은 만면에 웃음을 담고 적민경들에게 물만두를 권하면서 말하였다.
“물만두는 우리 중국 사람들이 젤 즐겨 먹는 음식이요. 자, 내 손재간이 어떤가 맛보라구.’
주름살이 죽죽 간 그가 취사원으로 꾸미고 척 나서니 실로 그럴듯하였다. 적민경들은 술이 거나하게 된 적민경들은 그를 의심하기는커녕 그의 후더운 거동에 마음이 훈훈해나서 조흥권이랑 손을 잡아 일으키더니 어깨춤을 덩실덩실 춰댔다. 노래소리, 웃음소리가 철조망 남북 저 멀리에로 울려퍼졌다.
조흥권과 춤 추던 적민경은 떠나면서 그에게 귀속말을 하였다.
“오늘 오전에 351고지에서 전화로 날 오라지 않겠나요. 가보니 20여명이 새로 왔더구만.”
이때 한 적민경이 조홍권에게 “요 며칠새 중공군과 만났는가요?” 하고 물었다.
“아니요.”
“만약 누굴 만나든간에 오늘 일을 말하지 마세요.”
그러자 조홍권은 그를 안심시켰다.
“우린 친구니깐. 시름놓으라구.”
적민경들은 헤여지기 아쉬워하면서 철조망을 넘어갔다.
이번 “련한모임”을 통해 적들의 새로운 병력배치정황을 알아냈다.
한번은 상감령 맞은켠 적민경 중사 박상원은 우리 민경에게 한가지 부탁하였다.
“내 고향은 북반부 세포군 세로리죠. 거긴 저의 삼촌이 있는데 몇해 되도록 편지로 문안마저 하지 못했는데요. 편지라도 전해주겠는가요?”
그의 눈에는 크게 희망을 걸지 않으면서도 간절하게 부탁하는 빛이 어려 있었다.
“되구 말구요.”
지도자의 동의를 거쳐 그가 써준 주소대로 한 간부를 보내 그의 삼촌에게 편지를 전해주었다.
눈보라가 윙- 윙- 휘몰아치는 날에 인차 그의 삼촌의 회답편지를 손수 가져다가 주었다. 박상원은 매우 감격하여 만면에 웃음을 피우고 우리 대적공작조 간부의 손을 굳게 잡았다.
“난 편지를 주면서도 당신들이 정말 전해줄가고 근심했죠. 인제야 당신들이 진짜 절 도와준다는 걸 알았어요. 이 편지는 확실히 제 삼촌이 친필로 쓴 거예요. 어떻게 하면 이 은혜를 갚을가요?”
그는 감격된 나머지 뜨거운 눈물까지 두 볼에 주르르 흘렸다.
“저의 부모들 모두 한국에 있으니 말이죠. 부모들이 아니면 벌써 고향에 돌아갔을 거예요. 전 자나깨나 제가 나서 자란 고향을 생각해요.”
이 일을 알게 된 후부터 적민경들은 더 각근히 굴었다. 하여 우리 군의 정치영향은 적군들의 가슴에 뿌리를 내리고 그 가족들에게까지 뻗쳤다. 이에 따라 북에 의거해오는 적민경들의 수는 점점 늘어났다. 리해식 소속 군단 맞으켠의 적민경들만 해도 82명이나 의거해 넘어왔다. 그 속에는 중위급군관 3명과 사단부 특무대 특무 설종태도 들어 있다.
상감령 아래 하감령 아군 방어구역 안에는 작은 금광이 있었다. 이 금광의 광석은 금함량이 매우 놓았다. 그런데 전쟁 후에 비군사구역이 디면서 누구도 파내지 못하였다.
이 금광에서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400여메터 떨어진 곳에 적민경보초소가 있었다.
한 적민경 분대장은 어느날 밤에 보초를 서는 기회를 빌어 보초병에게 동정을 살피게 하고 미국식 손전지와 밥곽, 작은 마치를 가지고 분계선 철조망을 슬쩍 넘어와 서서 동정을 두리번거리면서 살피다가 슬금슬금 금광 굴 안으로 들어갔다.
좀 지나 굴 안에서 마치로 금광석을캐는 소리가 딱딱딱 들려왔다.
그의 거동을 진작 지켜보던 우리측 민경 넷은 한 사람이 분계선 쪽을 경계하고 세 사람이 동굴어귀를 포위하였다. 한 20분이 지나자 적민경 분대장이 밥곽 안에 금광석을 꼴똑 캐담아가지고 나왔다.
“꼼짝 말엇!”
갑자기 시꺼먼 총구멍이 셋이나 겨누자 적민경은 와들짝 놀랐다. 그는 손전지와 마치를 땅바닥에 뚝 떨어뜨리고 사시나무 떨듯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나 금광석이 든 밥곽만은 놓지 않고 오히려 품에 꽉 껴안는 것이였다.
“걸엇!”
민경관측소에서 책임자가 그의 손에서 밥곽을 받아 금광석을 들여다보면서 물었다.
“금광석을 캐서 뭘 하려오?”
그는 머리를 푹 수그리면서 쥐구멍에 기여드는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저의 어머니 중병에 걸렷어요. 돈 없어 어머니 병치료 못하고 있는데요. 어머니 치료비 좀 만들려고 금광석이라도 캤어요.”
책임자는 엄숙하게 말하였다.
“당신은 정전협정을 어기고 분계선을 넘어왔소. 우린 뒤에 보내 처리해야겠소.”
그 소리에 그는 벌떡 일어났다가 무릎을 꿇고 안자 두 손을 싹싹 비비면서 울먹울먹한 얼굴로 책임자를 바라보며 간곡히 빌었다.
“제발 그러지 말아요. 절 놓아줘요. 제가 갇히면 우리 어머니는 돈이 없어 병치료를 못해요. 이 금광석을 팔아 어머니 병치료하게 되면 제가 온 분대 민경들을 몽땅 데리고 와서 의거하겠어요. 은혜를 꼭 갚겠어요.”
“일어나오. 우리 우에다 말해보지.”
책임자는 그가 어찌나 불쌍한 처지를 절절히 빌고 또 태도가 성실한지 상급의 비준을 거쳐 그날 밤으로 보초를 바꾸기 전에 놓아보냈다. 그리고 정전협정에 위반되는 행위라고 남조선측에 항의를 제기하지도 않았다.
우리 측 인도주의 처사에 감화된 그 적민경 분대장은 금광석을 팔아 어머니 병을 치료한 후 진짜 어머니까지 모시고 그의 분대 민경들을 몽땅 데리고 상감령 동쪽 조선인민군에 의거해왔다.
38선에서 대적공작사업은 피의 대가도 치르면서 위대항 업적을 쌓았다. 조선족대적공작간부 리병정, 조명석, 강남필 등 동지는 38선에서의 대적투쟁에서 영광스럽게 희생되였다. 38선에 붉은 피를 휘뿌린 그들은 아직도 조선 38선에서 고이 잠자고 있다.
 
              리목리암살사건
1956년 하반년, 지원군의 정치적 영향이 적군 내부에 점차 확대되여감에 따라 38선을 넘어 이북에 의거해온 적군이 날로 늘어났다. 당시 중국과 쏘련의 국제주의적인 지원을 받는데다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일성 주석께서 령솔한 조선로동당의 령도아래 조선 인민들은 신속히 전쟁의 피해를 극복하고 재더미 우에 위대한 사회주의 강국을 건설하여 인민들의 생활수준도 남반부보다 훨씬 높았다. 그리하여 남반부의 평민백성들과 군인들이 월북하는 사건도 비일비재였다. 그리하여 적군 상층기관의 우려를 불러일으켰다.
리승만괴뢰군의 한 사단에서 남조선(한국) 괴뢰군 국방부에 한 보고에는 이런 애탄이 적혀 있었다.
“철원지구의 비무장지대에서 공산군은 늘 우리 한국 군에게 정치선전하고 있다. 하여 쌍방은 적의가 없어졌다. 숱한 군인과 백성들이 월북했다. 만약 계속 이렇게 해나간다면 우리 한국 군의 사기에 영향줄 것이며 앞길이 막막하게 될 것이다.”
이런 정황에 근거해 아군 맞은켠 적군지휘부에서는 일찍 민경들이 아군 민경들과 만나는 것을 금지할데 대한 명령을 내렸다. 또 전문 훈련받은 한무리 특무들과 헌병들을 민경들 속에 파견해 정전협정을 어기고 파괴활동을 감행하였다.
1956년 9월 20일, 상감령지구를 들썽케 한 리목리암살사건은 바로 그 철증으로 된다.
리목리는 38선 북쪽, 상감령 서쪽과 5킬로메터 떨어진 군사분계선 부근에 있는 마을인데 전쟁 때 포격에 재더미로 되고 말았다. 이 곳은 정전 후 적아쌍방 민경들이 늘 만나는 곳이였다.
9월 20일, 추석 이튿날이였다.
대적공작조의 석정과, 리병정과 민경전사 왕동무는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술 한병과 과자 두봉지를 가지고 순라하러 나갔다.
그들 셋은 허리를 치는 잡초를 헤가르면서 순라선을 따라 살피면서 리목리로 갔다.
10시 쯤 되였을 때였다. 그들 셋을 본 적민경 셋이 351고지에서 슬금슬금 내려왔다. 그들은 리목리마을 뒤산 둔덕에서 만났다.
“추석 잘 쇴소?”
“엉? 음, 그래.”
“어젠 왜 안 왔소?”
“그럴만한 일 있었네.”
적민경 남종석이란 자가 얼버무리면서 흘끔거렸다.
서로 면목이 있는지라 석정과네는 무람없이 분계선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리병정은 앉자마자 술병과 과자를 꺼내 벌려놓았다. 적민경들은 좋아라고 술병을 주어들어 꿀꺽꿀꺽 둬모금 마셨다. 그들이 서로 한담을 하며 권커니작커니할 때 우리측 민경 왕동무는 뜻밖의 일을 막으려고 총을 멘채 옆에 서서 구경만 하였다.
한참 지나서 남종석이 바지춤을 쥐고 일어섰다.
“야따, 술 좀 마시니 오줌 마렵군.’
그 자는 한쪽으로 가서 소변 보는 것처럼 하였다.
그 놈은 권총을 슬쩍 꺼내 바지주머니 안에 넣어 총끝을 오줌구멍으로 해서 리병정에게 두방 쐈다.
땅! 땅!
야무진 총소리 울렸다.
리병정은 아래배와 왼가슴을 맞고 피못 속에 쓰러졌다. 그는 권총을 빼서 남종식을 겨누었지만 쏘지도 못하고 희생되였다. 피못 속에 쓰러진 그는 분노에 찬 두눈을 부릅뜨고 철조망 맞은켠을 무섭게 쏘아보았다.
남종석과 그 짝패들은 미군식보총 두자루를 던진 채 데굴데굴 구을어 산 아래로 내려갔다. 석정과와 왕동무는 그 놈들에게 사격하였다. 한 적민경이 맞아 비칠거리다가 두 놈의 부축을 받으면서 도망쳤다. 뒤이어 나무숲 속에서 여러 놈이 나와 엄호하였다.
(분명 저 놈들이 미리 짜고 들어 암살한 것이구나.)
석정과와 왕동무가 풀숲에 엎드려 찬찬히 보니 철조망 건너 풀밭에 미군식보총 두자루와 미국제톰식권총 탄알까지 2개가 풀밭에 있었다.
이때 부근에서 순라하던 조홍권이 총소리를 듣고 한개 소조의 민경들을 데리고 뛰여왔다. 그들은 인차 사람을 띄워 대대부에 알리는 한편 사건현지를 지켰다.
그날 리해식도 상감령지구 모 사 민경 2대 중대부에 있다가 사건보고를 받았다. 뒤이어 군 수장의 지시에 다라 한 부대장과 함께 한개 패 민경들을 데리고 사건현지에 뛰여갔다.
리해식과 부대장은 분계선에서 10여메터 떨어진 북산언덕 수림에 전투대형을 짓고 엎드려 사건현지를 보호하였다.
이 곳은 맞은켠 적들이 지키는 산보다 훨씬 낮은 개활지대 앞에 있는 산둔덕이여서 아군에게 매우 불리하였다. 산골짜기를 하나 사이 두고 한 백메터 떨어진 맞은켠 산 우의 나무숲에 벌써 철갑모를 쓴 적들이 새까맣게 몰려오더니 시꺼먼 총부리를 이쪽에 겨누고 있었다. 실로 힘껏 당긴 활시위처럼 일촉즉발의 팽팽한 분위기였다.
피못 속에 쓰러진 전우 리병정을 보자 동무들은 눈에 불길이 이글거렸다.
“부대장, 명령하십시오!”
“원쑤를 갚읍시다!”
전사들이 분노에 치를 떨자 부대장도 참을 수 없었던지 리해식을 돌아다보면서 물었다.
“어쩌겠습니까?”
리해식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안되오. 우린 견결히 군단 수장의 지시대로 련합조사조가 올 때까지 사건현지와 리병정동지 시체를 지켜야 하오. 기다리기요. 사태를 확대시켜선 안되오.”
군단과 사낟에서는 점심 전에 사건현지에 직통전화기를 가설했다.
리해식은 전화기 옆을 한발자욱도 떠나지 않고 적정변화을 군단 수장에게 보고하였다.
따르릉, 따르릉.
군단 오보산 정위에게서 전화지시가 왔다.
“동무는 인내성있게 전사들의 사상사업을 해야 하오. 상급의 명령이 없인 누구도 먼저 사격해선 안되오. 그렇게 되면 우린 주동으로부터 피동에 빠지게 되오.”
“예, 알았습니다. 꼭 전사들에게 전달하겠습니다.”
리해식은 송수화기를 놓고 일어났다.
민경전사들은 새로운 지시가 있는줄 알고 총가목을 으스러지게 쥐고 세줄 횡대로 차렷자세로 섰다.
리해식은 부대장한테 대체적지시내용을 말하고나서 분노에 불타는 전사들의 눈길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동무들, 군단 정위 오보산 동지는 다음과 같이 지시했습니다. 비무장지대 일거일동은 직접 국제적인 외교투쟁에 관계됩니다. 전반 국면을 돌봐야지 일시적 충동에 경거망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행동은 지휘에 복종하고 우리 민경들은 정전협정을 지켜야 합니다.”
“옛! 꼭 명령에 복종하겠습니다.”
전사들의 우렁찬 목소리가 분계선 철조망을 뒤흔들면서 저 멀리 산에까지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전사들은 조선 중부의 무더운 날씨에 땀을 철철 흘리면서도 소나무숲이 우거진 산둔덕에 엎드려 맞은켠 산의 나무숲 속에 점점 많아지는 적들을 노려보았다.
이날 오후, 리목리암살사건정보를 받은 중조측조사소조일군들이 차를 타고 달려왔다. 그들은 석정과와 왕동무에게서 사건경과를 들었고 이튿날 공동조사를 할 때 주의사항을 구체조치를 포치하였다.
“리해식동무는 공동조사 경호를 책임지오.”
“옛!”
리해식은 우렁차게 대답하였다.
리해식은 민경들을 데리고 밤낮 사건현지를 지켰다.
이튿날 아침에 군사정전위원회에서 파견한 제3련합관찰소조가 누런 기를 단 찌프를 타고 현지에 달려왔다.
그들은 풀숲을 헤치면서 분계선 철조망 옆으로 해서 산둔덕에 있는 사건현지에 이르렀다.
먼저 미군측에서 데려온 법의가 리병정의 시체를 검사하였다. 뻘건 피가 걸어붙은 굳어진 시체 왼쪽 가슴과 아래배에 총알이 뚫고 나간 구멍이 있었다. 북쪽을 향해 뒤로 쓰러진 시체의 자세나 철조망 남쪽 풀밭에 던지고 달아난 보총 두자루, 탄알깍지를 보아도 분계선 남쪽에서 총을 쏜 것이 불보듯 빤하였다.
그런데도 미군측 조장이란 꺽다리 중좌는 이렇게 얼토당토하지 않은 소리를 지르지 않겠는가.
“총은 당신들 민경이 북쪽에서 이쪽에 대고 쏜 것이구만.”
그 말을 통역하자 우리측 조장 조선인민군 김류근 중좌는 엄숙하게 반박하였다.
“당신들은 당신들측에서 저지른 만행을 반성해야 합니다. 공동조사에 아무런 성의도 없이 사건진상을 무시하고 책임을 우리측에 밀어버리려고 괴변을 부려선 절대 안됩니다.”
미군측 법의가 또 관건적인 문제를 두고 당나귀 떼질을 썼다.
“권총 사격선과 시체에 난 총구멍이 일직선에 놓이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우리측에서 쏜 것이 아닙니다.”
우리측 부조장인 중국인민지원군 왕진강 소좌가 아주 풍자적으로 한마디 툭 쏘았다.
“건 아마 미국의 권총 탄알이 요리조리 에돌면서 괴변 부릴줄 알기 때문이겠죠.”
통역원이 그 말을 영어와 조선어로 통역하자 적측 관찰원들은 입에 빗장을 지른 채 아무 말도하지 못하였다.
뒤이어 우리측 당사자들인 석정과와 민경 왕동무를 하나하나 불러다 사건경과를 일일이 물었다. 그들이 증실한 경과는 똑 같았고 현지실제정황과 딱 맞아떨어졌다.
이번에는 적측의 살인흉수 남종석 등 셋을 조사하게 되였다. 그런데 어처구니없는 장면이 나타났다. 그 놈들 셋은 우리측 민경들에게 얻어맞은듯이 낯판대기에 반창고를 더덕더덕 붙히고 나타나지 않았겠는가.
총에 경상을 입은 놈은 팔에 붕대를 칭칭 감고 나타났다.
우리측 당사자 석정과가 엄살을 부리는 그 자들을 손가락질하면서 욕설을 퍼부었다.
“개놈들, 리병정을 쏴죽이고서두 맞은 척하긴? 반창고를 뜯어라! 상처를 어디 보자!’
우리측 대표가 그 자들의 낯판대기 반창고를 쭉쭉 뜯어버렸다. 아무런 상처도 없었다.
복수의 불길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우리측 대표와 경위일군들의 눈길을 보자 그자들 셋은 고양이를 본 쥐처럼 부들부들 떨었다. 
미군측 조장은 그 난처한 모양을 보고 얼굴을 찡그렸다.
공동관찰소조에서 그 자들에게 사건경과를 물었으나 남족석은 꺽꺽거리면서 대답도 온전히 하지 못하였다. 또 그들 셋의 대답은 각기 달랐다.
미군측 조장은 성이 꼭두까지 치밀어올라 붉그락푸르락해서 영어로 뭐라고 욕지거리를 했다.
후에 리해식이 영어통역에게 물어보니 시켜준 서방질도 온전히 못하는 “밥통들”이라고 욕했다고 하였다.
한참 후에야 남종석은 얼토당토하지 않은 말을 불쑥 했다.
“소변을 보다가 그만 오발했다니께.”
그 놈의 궤변에 우리측 대표가 반박했다.
“련이어 두방이나 오발할 수 있는가? 오발이면 두발 다 명중해 살인까지 할 수 있는가?”
그러자 미군측 대표 중좌는 성난 어조로 “당사자들 조사는 이만합시다. 오늘 쉬고 래일 계속 조사합시다.”라고 하고는 수행인원들을 끌고 산 아래로 우르르 쓸어내려갔다.
조사가 끝나자 리해식은 전사들을 보고 사건현지 경호를 철수하게 하였다.
그날 전우들은 리병정 렬사의 유체를 조선 평강군 성암리의 푸르싱싱한 소나무가 우거진 지원군렬사릉원에 안장하고 리병정렬사의 성명과 가정주소를 쓴 종이장을 넣고 밀봉한 큰 놋그릇을 묘지아래에 엎어놓고 파묻어놓았다. 뒤이어 부대에서는 성대한 추도대회를 열었다.
리병정 렬사는 중국 길림성 휘남현 사람으로서 16세 밖에 안되는 어린 나이에 중국인민지원군에 입대해 조선전쟁터에 나왔으며 선후하여 포병, 통신원, 보병부대 조선어번역원으로 일하였으며 1954년에 비무장지대 대적공작사업을 하다가 불행하게 희생되였다.
9월 22일 오전 9시 좌우, 중조측소조 성원들은 먼저 사건현지에서 서쪽으로 50메터 떨어진 둔덕에 서서 적측대표가 오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적측 대표들이 351고지 동쪽 산골까기에서 알라오고 있었다. 몇몇 괴뢰군 병사들은 낡은 책상과 걸상을 몇개 들고 따라왔다.
이윽고 백명은 실히 될 적측 일군들이 산둔덕에 있는 사건현지에 올라왔다. 그런데 그들은 온 오전 담판에 성의가 없이 질질 끌면서 궤변을 부리기만 하였다.
오후에 담판이 시작되자마자 우리측 소조장 김류근은 적들이 사건현지에 남긴 미국제자동보총 두자루와 미국제톰식권총 탄알까지 두개를 쥐여 미군측 꺽다리조장의 코 앞에 내들면서 말했다.
“보시요. 이건 철증입니다. 당신들측 민경들이 고의적으로 정전협정을 파괴하고 암암리에 총으로 우리측 민경들을 쏘아 비무장지대에 긴장국세를 조성했습니다. 우리는 강렬한 항의를 제기합니다.”
철증 앞에서 미군측 꺽다리 조장은 머리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김류근 조장은 이런 요구를 제기하였다.
“정전협정 해당 규정에 따라 우리는 살인흉수를 호되게 징벌할 것을 요구합니다. 금후 다신 이런 암살사건을 저지르지 않도록 잘 단속해야 합니다.”
입에 빗장을 지르고 있던 미군측 꺾다리 조장은 더는 잔꾀를 부릴 수도 없는지라 “참 유감스럽습니다.” 하고 한마디 하고는 산 아래로 내려갔다.
그의 수행인원들도 우르르 뒤따라 산아래로 내려갔다.
리목리암살사건을 돌이켜보면, 적들이 얼굴에 칼상처자국이 있는 리병정을 군관으로 알고 암살하려고 미리 획책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 범행지점도 사건을 저지른 후 달아나기 좋은 둔덕진 곳을 골라 미리 정해놓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우리측 민경들이 경각성을 높이지 않아 피의 교훈을 얻고 말았던 것이다.
리목리암살사건이 발생한지도 수십년이 되였다. 그러나 소나무가 우거진 산둔덕을 바라볼 때마다 리해식의 눈 앞에는 리목리암살사건에서 희생된 리병정렬사의 묘지가 선히 떠오르군 한다.
 
 
 
 
 
 
 
 
 
 
 
 
 
  
 
 
     제7 조국으로 개선
 
           칠혈육의
1958년 2월 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에서는 성명을 발표하여 조선에서 즉시 모든 외국군대를 철수하고 평화적으로 통일을 실현할데 관한 여러가지 건의를 제기하였다.
2월 7일, 중국 정부에서도 평화적으로 조선문제를 해결할 군면을 열고 미제로 하여 조성된 원동의 긴장국세를 완화시키기 위해 성명을 발표하여 조선정부의 성명을 완전히 지지한다고 표시하였다.
2월 10일, 주은래 총리가 외교부장 진의 등 동지들을 주요성원으로 한 중국정부대표단을 령솔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하였다.
방문기간에 주은래 총리는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 김일성 주석과 회담을 가졌다.
2월 17일, 중국정부와 조선정부에서는 중국인민지원군이 조선에서 철거할데 관한 세계를 뒤흔든 련합성명을 발표하였다.
이튿날, 중국인민지원군총부에서는 성명을 발표하여 중조 두 나라 정부의 련합성명을 옹호하며 1958년 내에 중국인민지원군을 전부 철수하며 4월 말 전에 먼저 6개 사단을 철수한다고 성명하였다. 그리고 성명에서는 미국과 기타 나라의 군대도 조선반도에서 몽땅 철거할 것을 요구하였다.
모든 외국 군대를 조선반도에서 철수하고 평화적으로 조선문제를 해결할데 관한 문제는 조선군사정전협정에 명확히 규정돼 있었다. 정전 후 적아쌍방은 3개월 이내에 고위급정치회의를 열고 모든 외국 군대가 조선에서 철수해야 했다.
그러나 정전된 12일 후인 1953년 8월 8일에 미제와 리승만괴뢰군은 침략성적인 “공동조약”을 맺고 12월 12일에는 모든 외국 군대를 철수할 문제를 협상할 고위급협상회의를 공공연히 거절하였다. 그리하여 바람에 줄곧 그 고위급형상회의를 열지 못하였다. 미제는 또 전쟁준비를 다그치기 위해 중립국감찰소조를 남조선에서 철거하라고 강박했다.
중립국감찰소조가 핍박에 의해 남조선(한국)에서 철가한 이듬해인 1957년 6월, 미제는 증원무기를 조선반도에 들여오지 못한다는 조선정전협정 규정을 무시하고 남조선에 원자탄과 로케트를 끌어들여 계속 조선반도의 긴장국세를 조성하였다.
이와 반대로 중국인민지원군은 조선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하였다.
조선을 곧 떠나게 되자 지원군과 조선 인민군, 인민들은 피로써 맺어진 친선의 정을 잊을 수 없어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조선전쟁터에서 중조 부대와 인민들은 피로써 친선의 정을 맺었다.
지원군이 38선 부근에 진군했을 때였다.
상감령, 평강지구 조선인민들은 몇백명이나 되는 전선원호대를 무어가지고 지원군의 부상병과 탄약을 날라주었다.
19세 민청원 처녀 김명옥은 담가로 부상병을 들어나르다가 적기가 날아오는 것을 발견하였다.
(죽더라도 지원군 부상병을 살려내야 한다.)
김명옥은 재빨리 담가를 나무숲 아래에 내려놓고 자기 몸으로 지원군 부상병의 몸을 덮었다.
쌩- 꽈르릉, 꽝꽝!
적기가 던진 폭탄이 그들의 옆에 날아와 작렬하였다.
담가 옆에 서 있던 나무가 날아나고 파편이 김명옥의 허벅다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치마에 피가 뻘겋게 물들었다.
적기가 날아가자 그녀는 허벅다리에서 흐르는 피를 손으로 쓱 문지르고는 이를 옥물고 담가를 메였다.
그것을 본 부상병은 두 볼에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담가에서 내리려고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김명옥은 지원군 전사를 설복해 되눕히고나서 이를 옥물고 담가를 들더니 아픈 다리를 쩔룩거리면서 앞으로 한걸음한걸음 나갔다.
그녀가 상감령전선에서 10킬로메터나 떨어진 전선병원에 이르렀을 때에는 피가 코신에 질벅하였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고 깨문 입술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19세 나는 조선 처녀 석길영은 이름난 전선지원모범이였다.
석길영의 집은 상감령 뒤쪽의 김화군 장덕면 매송리에 있었다. 그녀의 부모는 모두 가증스러운 미제공중날강도의 폭격에 목숨을 잃었다. 원쑤를 갚으려고 그녀의 오빠는 조선인민군에 들어갔고 그녀는 혼자서 늘 적들의 비발치는 포화를 무릅쓰고 산에 올라가서 도라지와 야들야들한 삽주이파리, 개암나무버섯 같은 산나물을 캐다가 지원군부대에 가져다주군 하였다.
1952년 6월의 어느날 그가 광주리와 괭이를 가지고 산에 올라가 도라지를 캘 때였다.
갑자기 적들이 쏜 포탄이 날아와 부근에서 작렬하였다.
꽝!
굉음과 함께 석길영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그때 부근에 있던 지원군 취사원들이 피못 속에 쓰러진 그녀를 발견하고 달려갔다. 석길영이 캔 돌라지는 사처에 널려 있었고 석길영의 왼쪽발이 뭉청 날아나고 끊어난 발목에서 뻘건 피가 줄줄 흘렀다. 하여 바삐 석길영을 업어 부근 지원군병원에 가서 구급하였다.
석길영이 캔 도라지랑 삽주랑 반광주리는 지원군 모부 진지 무후좌력포패에 보내졌다. 취사원들이 광주리 안에 써넣은 편지를 보고서야 모두들 석길영이란 조선처녀가 이 산나물을 캐오느라고 왼쪽발을 적들의 포탄에 잃었다는 것을 알고 모두들 비통에 잠겼다.
이튿날 전투에서 그 패 전사들은 “석길영의 원쑤를 갚자!” 하고 드높이 구호를 부르면서 적 땅크(탱크) 6대나 까부셨다.
그해 가을 상감령전역의 포소리가 울렸다. 지원군 의료일군들의 치료받아 상처를 완치한 석길영은 출원하자마자 지팽이를 짚고 마을의 처녀들과 함께 전선으로 통한 큰 길 옆에 더운물공급소를 차렸다. 그녀들은 적들의 포격을 무릅쓰고 마른 나무가지를 주어다가 물을 끓여 뜨거운 정이 듬뿍 담긴 더운 물을 지나가는 지원군 아저씨들에게 드렸다. 물이 특별히 귀한 상감령전역의 목마른 지원군 전사들은 그녀들의 뜨거운 물을 마시고 고무돼 영용히 적들을 무찔렀다.
마을의 숱한 녀성들은 석길영을 본받아 분분히 일떠나 “석길영담가대”, “석길영수혈대”를 무어가지고 전선지원에 일떠섰다. 온 마을에서는 전선지원의 열조가 일어났다.
조선정부에서는 석길영 처녀의 전선지원공적을 표창하기 위해 2급국기훈장을 수여하였다.
후에 지원군 부대에서는 석길영 처녀에게 재봉침 한대를 선물하였다. 그러자 그녀는 밤낮 외발로 재봉침을 돌리면서 지원군 전사들의 옷을 기워주었다.
조선전쟁이 끝난 뒤 지원군 군단에서는 석길영에게 새 벽돌기와집을 지어주었다. 그러자 석길영은 군 수장에게 열정이 넘치는 감사신을 써보냈다.
그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저 석길영은 그대들의 뜨거운 보살핌과 치료를 받은 수천수만의 조선 인민 가운데 한 사람인데요. ‘조중 인민들은 친혈육과 같다.’는 이 한마디 말은 저의 몸에서 낱낱이 드러난다고 생각돼요.
제가 적포탄에 맞아 왼쪽발을 잃어 목숨이 위험할 때 중국인민지원군 간호원언니들이 국제주의정신을 발양해 자기들의 붉은 피를 뽑아 저의 몸에 넣어 저를 살려냈습니다.
어디 이뿐인가요? 그대들은 끊임없이 먹을 쌀과 생활용품을 가져다주었고 저에게 재봉침 한대를 가져다주었어요. 이번에는 또 저에게 새 집까지 지어주었죠. 하여 저는 생활상의 모든 곤난을 이겨나갈 수 있었어요.
저는 이런 한마디 말을 하고 싶어요. 저도 중국 인민들처럼 그대들 중국인민지원군을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이라고 부를 것이예요.”
1958년에 중국인민대표단 단장 곽말약동지가 친히 석길영에게 기념장 하나를 드리자 그녀는 두 볼에 뜨거운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저의 혈관에서는 지원군의 피가 흐르고 있어요. 저의 심장이 뛰는 날까지 저는 조중친선을 위해 싸울 거예요.”
후에 석길영은 지원군 그 군단 주둔지에서 이사해갔다.
리해식은 귀국하는 도중에 신문에서 석길영이 지원군에 대한 깊고 깊은 감정을 품고 지팽이를 짚고 머나먼 길을 걸어 평양에까지 와서 귀국하는 지원군 전사들을 환송했다는 소식을 보았다.
1952년 10월, 세계를 들썽한 상감령전역의 총소리가 울리자 회양군 란곡면 현리의 농민 박재근은 담가원호대에 들었다.
어느날 밤, 박재근과 그들의 담가대는 지원군 부상병들을 담가에 메고 산둔덕으로 올라갔다가 산아래로 내려갔다.
그들이 산기슭에 담가를 내려놓고 잠시 땀을 들일 때였다.
갑자기 적기가 앵- 하고 날아왔다. 박재근은 황급히 담가를 나무 아래에 내려놓고 숨었다. 적기는 그들의 꼭대기에 날아와 폭탄을 떨어뜨렸다. 박재근은 바삐 자기 몸으로 지원군 부상병의 몸 우에 엎드렸다.
꽝!
굉음과 함께 폭탄이 공중에서 작렬하였다.
파편이 날아와 박재근의 잔등에 박혔다.
“억!’
외마디소리와 함께 박재근은 입귀로 피를 흘리며 일어나지 못했다.
“재근이!”
“재근이!”
담가대 사람들이 애타게 불렀다.
그러나 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주먹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그를 전선병원에 업어갔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박재근은 눈을 가늘게 뜨더니 피기없는 입술을 파르르 떨면서 띠염띠염 물었다.
“그 지원군, 부, 부상병은 어떻게, 돼, 됐나?”
“근심 말아요. 안전히 병원에 왔어요.”
“음.”
그제야 그는 가쁜 숨을 후- 몰아쉬더니 천천히 눈을 감았다.
지원군 부상병도 담가대원들도 모두 애절하게 통곡하였다.
상감령전투의 총포소리 속에서 당지 당정기관과 지원군부대 대표들은 흐르는 피눈물과 함께 박재근렬사를 상감령 산기슭에 묻었다.
조선전쟁이 끝나자 지원군 이 군단부대에서는 군단 경위2련의 전사들을 파견하여 박재근렬사의 기와집을 현리촌 도려옆에 지어주었다. 집문 우에는 빨간 바탕에 금색테두리칠을 하고 “불멸의 국제주의전사 박재근렬사의 집”이란 글을 새긴 커다란 편액을 걸어놓았다.
황금나락이 설레이는 가을의 어느날 점심에 박재근렬사의 안해 리옥선과 딸 박숙금은 3년 동안이나 살아온 방공굴 같은 헌 집에서 새 벽돌기와집에 들었다. 그날 새집들이의식에는 박재근렬사가 생전에 몸바쳐 구한 부상병 소속 지원군 군단 정치부 주임 범춘양이 부대대표들을 이끌고 당지 조선 당정지도자들과 함께 참가하였다.
후에 명절이면 군단의 수장들은 사람을 파견하여 위문편지와 명절선물을 가지고 박재근렬사의 가족을 찾아가 보았다. 1956년 한해 봄에만 해도 지원군 이 군단에서는 박재근렬사네 집에 량식 1,800근을 보내주어 보리고개를 근심걱정없이 넘게 하였다.
지원군 군단에서 상감령 전초에서 떠나기 전에 군장 범영 소장 일행은 박재근렬사의 안해 리옥선과 작별인사하러 갔다.
군 수장들이 탄 차가 박재근렬사의 집 앞에 이르렀을 때였다. 회양군 당정지도자들과 인민군 대표들, 그리고 박재근렬사의 안해 리옥선과 마을사람들 수백명이 진작 동구 밖에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부대의 수장과 동지들을 보자 리옥선 아주머니는 5년 동안이나 지원군부대에서 살뜰히 보살펴준 일을 생각하고 범군장의 손을 두 손으로 꼭 잡았다. 눈물이 줄 끊어진 구슬처럼 두 볼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는데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석별의 정으로 차넘치는 작별의식은 환락으로 차넘치는 군악소리 속에서 시작됐다.
범염 군장이 군단 전체 장병들을 대표하여 위대한 국제주의전사 박재근렬사의 안해 리옥선 아주머니에게 “위대한 국제주의전사 박재근동지는 영생불멸하리라.”는 글발이 새겨진 거폭의 편액을 드렸고 당장에서 그 편액을 새 벽돌기와집에 걸어주었다. 그리고 빨간 꽃댕기를 목에 건 백마 한필, 굴암돼지 한마리와 새끼돼지 두마리를 선물로 드렸다.
뒤이어 범염 군장 일행은 박재근렬사의 묘소 앞으로 가서 당지 조선풍속에 따라 제사를 지냈다. 범군장과 조선 당지 당정군 책임자들이 애절한 군악소리 속에서 꽃다발을 렬사묘지에 드렸다.
뒤이어 범군장은 렬사묘지에 제주를 부어드리고 중국 풍속대로 향불을 피우고 절을 세번 하였다.
범군장은 축축한 눈길로 렬사의 묘지를 바라보며 호주머니에서 추도문을 꺼내 비통하게 읊었따.
“…우리는 귀국한 후에도 영원히 박재근 렬사가 몸바쳐 우리 지원군 전사를 구한 국제주의정신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박재근렬사는 우리 마음 속에 영원히 살아 있을 것입니다. 박재근렬사여, 고이 잠드시라.”
범군장은 머리 숙여 경례하였다.
뒤이어 렬사의 가속과 함께 렬사의 묘지에 가토하고 푸른 애솔을 묘지 앞에 심었다.
리옥선 아주머니는 범군장의 손을 잡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흐느껴 울었다.
범군장은 “안녕히 계십시오.” 하고 그녀의 손을 굳게 잡아 흔들었다.
범군장 일행은 갈라지기 아쉬운 석별의 정을 안고 차에 앉아 천천히 저 멀리 떠나갔다.
리옥선 아주머니는 딸을 데리고 마을 사람들과 함께 락조가 깔린 묘지 앞에 오도카니 서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차가 저 멀리 까만 점으로 아물거리다가 산굽인돌이를 에돌아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아, 조선 전쟁터에서 피로써 맺어진 중조 인민들의 친선의 정은 세월이 흘러도 영원하리라.
 
 
         안녕히! 조선이여!
        4월의 상감령에는 봄볕이 완연하였다. 상감령 아래 산꼴짜기에는 개울물이 촐랑촐랑 노래하며 흘렀다. 상감령에는 영웅들의 선혈을 머금고 피여난 연분홍 진달래가 부드러운 봄바람에 나풀나풀 춤추고 있었다.
리해식 소속 지원군 군단은 전우들의 피로 물든 아아한 상감령, 구소운영웅고지 등 40킬로메터나 되는 전연진지를 조선인민군에 넘겨주고 조국으로 돌아가게 되였다.
모두들 조국에 돌아갈 날이 돌아온 것으로 하여 기뻐 야단이였다. 그러나 비밀을 지킬데 관한 규정에 따라 누구든지 중국 국내에서 온 편지를 받아볼 수 있을뿐 국내에 편지를 써서 부치지 못하였다.
리해식 등 대적공작처 간부들은 창문과 문을 뜯어 개울가에 메고 가서 겨우내 다닥다닥 붙어 있은 종이를 강물에 퍼지워 새끼줄로 닦아 말끔히 벗긴 후 되달아놓았다. 그리고 사무실도 말끔히 청소하여놓았다.
조선인민군 군단 수장들 선견대가 밤중 어둠을 빌어 비밀리에 38선 부근 지원군 군단 군영에 들어왔다. 두 나라 군단의 수장들은 회담을 가지고 진지교환문제를 토론하였다. 그들은 군사작전, 정치사업, 후근, 무기창고 등 각 부문별로 동시에 회담을 가지고 해당 인계사항을 토론하였다.
리해식은 군단 정치사업인계부문 회담에 참가하였다. 그때 군단 대적공작처 처장 왕진강이 병치료를 하려고 귀국하였기에 정치부 수장의 지시에 따라 리해식이 대적공작처를 대표하여 대적공작처의 사업을 인계하게 되였다. 조선족인 리해식이 정치사업부문 회의를 주최해 인계하였기에 통역원이 없어도 되였다.
회담 후 중조부대 군단의 련합명령에는 목표를 폭로하지 않기 위해 일선부대와 비군사무장지대 민경부대의 인계사업은 밤에 하기로 하였으며 넘겨주는 지원군측에서는 인계받는 조선인민군측에서 온 후 한 주야 함께 당직을 서도록 하였고 이튿날 밤에 가만히 진지에서 철수하기로 하였다.
진지를 인계하기로 된 날 밤에 조선인민군 제1집단군 모 사단 사단장 김철만 소장과 정치부사단장 리길남 상좌를 비롯한 조선인민군 전우들이 38선 전연진지로 가만히 들어왔다.
어깨겯고 싸우던 지원군 장병들과 조선인민군 장병들은 서로 포옹하며 환희에 잠겼다.
조선인민군 한 정찰소대장은 시퍼런 비수를 뽑아 지원군 퇀 정찰참모 유자여에게 기념으로 주었다.
“이 비수는 전쟁년대에 정찰임무를 수행할 때 미군 놈을 넷이나 찔러죽인 비수요.”
그러자 유자여 참모는 자기가 결혼할 때 안해가 준 베개를 그 정찰소대장에게 기념으로 주었다.
조선인민군 한 부련대장은 든든하게 수건한 갱도와 교통호, 또치까를 인계받은 후 만족한 웃음을 지으면서 지원군 모 퇀 수장에게 말하였다.
“참 훌륭한 진진데요. 당금 싸운다 해도 난 이 진지에서 전투를 지휘할 수 있겠어요. 지원군동지들 안심하십시오. 우린 꼭 38선을 잘 지킬 것입니다.”
지원군 군단 정치부에서는 군지휘부의 강당과 문예, 체육기재 같은 것을 조선인민군에 인계하게 되였다. 그런데 무대에 친 천막은 얼마전에 군단 문화처에서 만원이나 들여 국내에 가서 새로 사다 친 것이였다.
문화처의 한 동무는 천막을 두고 가기 아까와 손으로 매만지면서 “이걸 떼가고 원래 걸 쳐놓으면 어떨가요?” 하고 물었다.
그때 일손을 거들던 정치부 수장이 듣고 도리머리질하였다.
“그대로 몽땅 놔두오.”
그리하여 리해식 등은 강당의 우아한 장식을 그대로 남겨두고 청소까지 말끔히 해놓았다.
깨끗하고 장식이 우아한 강당을 인계받은 조선인민군의 해당 책임자는 매우 기뻐하였다.
“무대장식이 대단히 멋집니다.”
38선 비무장지대의 대적공작을 인계할 때였다. 지원군 사단 대적공작과 과장은 리해식 등과 함께 직접 조선인민군 모 사단 대적공작지도원 등을 지원군 순라일군들로 가장시켜 데리고 직접 군사분계선의 철조망을 따라 거닐면서 적과 접촉하는 지점, 그리고 적측 민경들의 활동법칙, 순라로선, 관찰소의 위치 및 우리 대적공작조의 활동범위와 민경분대의 배합 등 정황을 일일이 소개해주고 모든 대적공작을 인계하였다.
며칠 후 인계회의에서 사단 대적공작과 과장은 몇년래 대적선전공작의 기본정황과 경험교훈을 소개하였다. 중국인민해방군 총정치부 대적공작부 부장 장재정 소장과 지원군 총정치부 대적공작부 부장 장락정중좌가 군단의 대적공작과 적정종합자료 등 사업서류 수십부를 리해식 등과 함께 일일이 심사한 후 조선인민군 정치부 대적사업 지도원 고실성 등 해당 책임자들에게 인계하였다.
조선인민군 고길성 지도원은 정밀한 자료를 받아보고 감탄하였다.
“실로 이런 자료는 얻기 힘든데요. 이건 지원군 동지들이 피땀으로 바꿔온 1선자료지요. 우리 대적공작에 매우 큰 도움을 줄 것입니다.”
리해식은 개성에서부터 간직해온 모주석마크 두개를 고길성과 문창록에게 달아주었다. 그들 둘은 아주 기뻐하면서 포탄깍지 밑굽으로 만든 담배재떨이를 리해식에게 주었다. 기념품교환을 마치자 그들은 사무실 앞마당에 나가서 전체 대적사업일군들과 함께 합영을 촬영하였다.
리해식은 몇십년이 지난 오늘까지 그 담배재떨이를 건사해두었다. 매번 그 재떨이를 볼 때마다 그때 그 인계사업을 할 때 정경이 떠오르군 하였다.
전연진지의 인계사업이 끝난 후 영웅진지 상감령고지 등 비무장지대 민경부대의 인계사업이 시작되였다.
지원군 민경들은 대낮에는 조선인민군 민경들을 안내하여 흰구름 감도는 망원초소에 올라가 지형을 익숙하게 알려주고 적정을 일일이 소개해주었다. 그들의 눈앞에는 적특무를 잡던 구소운진지 산기슭이며 영웅 황계광렬사가 희생된 상감령 고지며 상감령지구를 들썽케 한 “리목리암살사건” 현지 산둔덕이며 몽땅 손금 보듯이 눈 앞에 확 안겨왔다.
중조 부대 민경들은 하루 낮에 밤을 이어 어깨겯고 웅위로운 삼강령 주봉진지 우에 서서 총가목을 잡고 격강성 높이 38군사분계선 철조망 남쪽의 적정을 주시하며 살폈다.
지원군 민경들이 진지를 떠날 시간이 되자 두 나라 전우들은 언어가 통하지 않는 형편에서 서로 굳게 포옹하는 것으로 천마디 만마디 말과 석별의 정을 주고 받았다.
참말리해식 등 지원군 대적공작과 간부들과 민경들은 몇년 동안 피를 흘리며 싸우면서 지켜온 38선을 떠나기 아쉬웠다. 특히 영용히 희생된 전우들을 38선 부근 산에 묻어두고 조선을 38선을 영영 떠나려고 하니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흐르는 눈물을 팔소매로 닦고 38선에 영영 고이 잠든 전우들, 영웅들의 혼과 떨어져 조국에로 돌아와야 했다.
영웅 황계광의 동생 황계서도 형제부대와 함께 38선 부근 상감령 진지에 와서 구소운렬사와 형님 황계광렬사와 작별하였다.
그는 형님 황계광이 희생된 곳에 묵묵히 머리를 숙여 애도를 표시하고 그 곳에 푸른 소나무 두 그루를 심었다.
그는 주먹을 불끈 들고 맹세하였다.
“형님, 마음놓소. 나는 꼭 구소운 렬사와 형님의 자아희생정신을 따라배워 피로 바꿔온 승리열매를 굳게 지켜내겠소!”
밤중에 전연진지를 떠난 지원군 장병들의 대오는 이튿날 아침에 38선 부근 군영을 떠나게 되였다. 그들이 상감령에서 까마아득히 멀어져 점점이 흑점처럼 아물거리다가 사라질 때까지 조선인민군 장병들과 인민들은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손을 젖고 또 저었다.
1958년 4월 15일, 리해식은 지원군 군단 기관과 직속대 간부들과 함께 기차를 타고 38선에서 제일 가까운 역, 남쪽에서 북으로 달리는 시발역, 조선 강원도 평강군 소재지에 있는 복계역에 이르렀다.
역광장에 한복을 입은 조선인민들과 군복을 입은 조선인민군 장병들 환영의 꽃물결이 설레였다.
오전 8시 47분, 렬차가 고동을 울리더니 천천히 앞으로 미끌어져 나갔다.
영원히 갈라지지 않음을 상징하는 숱한 색종이줄이 렬차 우의 지원군 장병들의 손과 렬차 아래 조선인민들의 손을 이은 채 주르르 길게 뻗어져나갔다.
수천명 조선 인민군 장병들과 인민들은 눈물을 휘뿌리면서 꽃묶음과 채색기를 흔들며 환호하였다.
“잘 다녀가세요!”
“다시 만나요!”
목메인 목소리를 저 멀리 뒤로 하면서 무정한 렬차는 북으로, 북으로 달렸다.
렬차는 어느덧 평강평원을 벗어나 나무숲이 우거진 선포산골에 들어섰다.
리해식은 사면을 꽉 밀봉한 짐차바곤에 들어 바깥의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그는 이불짐을 풀어놓고 털썩 드러누워 잠을 청하였다. 그러나 정작 조선을 떠나게 되자 잠이 잘 오지 않았다.
렬차는 선후하여 강원도 고성역, 원산역을 지나 드디여 조선의 수도 평양에 이르렀다.
3년 전쟁기간에 미제 침략자들은 40여만 인구를 가진 이 아름다운 도시 평양에 42만 8천 700여개 폭탄을 떨구었다. 이는 평양시 시민마다 폭탄 1개를 맞은 셈이였다. 정전 후 평양시는 재먼지가 푸실푸실 흩날리고 그을음내가 코를 찔렀다.
그러나 리해식 등이 렬차에 앉아 평양시에로 달려왔을 때는 판판 다른 모습이였다. 영웅적인 조선인민들은 조선인민의 위대한 수령 김일성 주석과 조선로동당의 영명한 령도 아래 전쟁의 상처를 말끔히 가시고 재더미 우에 아름다운 평양시를 건설해 시내 모습을 일신시켰다.
웅위로운 평양역 대청, 그 둘레에 높이 솟은 층집들, 우중중하게 솟은 공장 건물과 꿀뚝들, 새 학교와 구락부 건축물들… 실로 평양은 공원 속의 도시여서 아름답기로 그지없었다.
평양역에서 조선정부의 당정 책임자들과 시민들이 노래부르고 춤추면서 지원군 장병들을 열렬히 환송하였다.
리해식 등이 탄 렬차는 이튿날 오후 1시에 조선의 제일 마지막 역인 신의주역에 이르렀다.
(이제 몇발자국만 더 가면 압록강다리다. 압록강다리를 넘어서면 오매에도 그리던 위대한 조국의 땅이다.)
리해식은 조국으로 돌아간다는 기쁜 심정과 더불어 8년 동안이나 청춘을 바쳐 싸워오면서 정을 붙인 조선 땅을 정작 떠나게 되는 아쉬운 감정이 한데 뒤엉키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석별의 정을 안고 신의주역 홈에 내려섰다.
실로 그가 1950년 11월 밤중에 조선 땅에 들어설 때 신의주가 아니였다. 그때에는 미제 공중날강도의 폭격에 신의주는 불바다로 되여 짙은 연기가 뭉게뭉게 피여오르는 도시였다. 미제 공중날강도들이 내리드린 폭탄파편이 죽음의 노래를 부르면서 쌩- 쌩- 날아다니고 백성들이 폭탄을 피해 살구멍을 찾아 달아다니던 도시가 아니였던가.
그러나 8년 후 그들을 맞아주는 것은 즐비하게 선 고층건물과 하늘을 떠이고 솟은 공장굴뚝이였다.
따뜻한 봄볕 아래 안겨오는 신의주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는 순간 리해식은 8년 동안 조선에서 청춘을 바쳐 헛되게 싸우지 않았다는 긑없는 긍지감을 느꼈다.
환호소리가 우뢰같이 울렸다. 진작 홈에 나와 기다리던 조선 평안북도 당정군 지도자들이 마주 나와 지원군 범군장 등 수장들과 굳게 악수하고 포옹하며 작별하였다. 청년학생들과 인민군 전사들은 조선 땅에서의 제일 마지막 꽃묶음을 지원군 장병들에게 안겨주었다.
우뢰 같은 환호소리 속에서 지원군 장병들은 렬차에 올라탔다.
뿡- 뿡-
렬차는 드높은 고동소리를 길게 울렸다.
렬차는 중조 두 나라 인민들의 깊고 깊은 친선의 정과 석별의 정을 안고 압록강다리 쪽으로 서서히 미끄러져나갔다.
리해식 등 지원군 장병들은 저마다 금빛 눈부시는 군공메달과 항미원조기념메달, 조선조국해방전쟁기념메달, 중조친선기념메달을 한 가슴 가득 달고 목에는 붉은 넥타이를 휘날리며 신의주 인민들이 안겨준 꽃묶음을 흔들었다.
눈물을 휘뿌리면서 꽃묶음을 흔드는 조선인민들의 환송의 꽃물결이 점점 멀어져갔다.
지원군 장병들은 목메여 드높이 웨쳤다.
“잘 있으라! 영웅적인 조선 인민들이여!”
“안녕히! 조선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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