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한 기자의 일기
여우도 추워서 눈물을 흘리는 맵짠 엄동설한이였다. 하늘도 땅도 천지 만물도 몽땅 꽁꽁 얼어붙어 입을 꼭 다물고 까딱 움직이지 않는다.
종수는 일요일에 취재가방을 메고 바닥에 내려가 신을 신었다.
“또 어디로 가요? 쉬는 날이면 좀 구들이랑 닦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려평이 또 잔소리를 늘여놓는다.
“삼도만에 갔다와야겠소.”
“그 두메산골엔 왜 가?”
“토비숙청 력사자료를 취재해야겠소.”
“아이고, 지금 우리 집과 삼도만토비 무슨 관계 있나요? 왜 쓸데없는데 관심이 그리 많은가요? 가정은 내버려두고 그런 거 취재해 뭐 해요?”
“지금 취재해두지 않으면 우리 조선족들이 피를 흘려 중국혁명에 한 공훈이 사라지게 되오.”
류려평은 혀를 끌끌 찼다.
“우리 집에 명기자가 나타나겠군요. 어쩜, 쯧쯧쯧.”
어머니가 보다못해 한마디 핀잔을 주었다.
“길 떠나는 사람한테 무슨 말이 그리 많소?”
“어머닌 왜 아들편만 듭니까? 저 나그네 장판 한번 닦 은적이 있습니까?”
“내 닦을게.”
어머니가 걸레를 찾아들고 나섰다.
“어머니를 닦으랍니까? 저 나그네를 시켰는데.”
또 시작이다. 종수는 려평의 잔소리가 딱 질색이다. 그는 아무 말대꾸도 하지 않고 바깥으로 훌 나갔다.
뒤에서는 려평의 잔소리를 반주해 딸애 영희의 목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아빠, 돌아올 때 맛있는 과자 사주세요.”
“오- 그래.”
종수는 고중 밖에 다니지 못한 려평이 자기 사업을 리해하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안타까웠다.
그는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맨 소식보도나 인물통신이나 쓰기보다 중국혁명력사에 한 조선민족의 력사적공훈을 보여줄수 있는 력사자료와 조선족이민사들을 발굴하고 취재하는게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먼저 정부 서류국에 가서 문사자료를 찾아본 뒤 삼도만으로 취재하러 떠났다.
가는 길에서 우연히 성호를 만났다.
“이 추운데 어디로 가니?”
“삼도만으로 취재하러 가.”
“오- 그래? 내 아버지도 삼도만토비숙청전투에 참가했어.”
종수는 반색했다.
“잘 됐어. 너 무슨 다른 일 없으면 함께 너네 집으로 가자.”
“아니. 우리 아버진 지금 중풍에 걸려서 말도 온전히 못해.”
“뭐라구? 그럼 병문안이라도 가야지.”
“그만둬라.”
성호는 종수를 말리면서 좋은 생각을 내놓았다.
“이전에 아버지한테서 삼도만토비숙청전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정리해둔게 있다. 언제 가져다 줄게.”
“좋다.”
종수는 기자의 직업병처럼 성호 팔소매를 잡고 이것저것 꼬치꼬치 캐물었다.
“광고회사에 잘 갔어. 돈 많이 벌었지?’
성호는 “뭐 별로 번게 없어.” 하고 떠나려고 했다.
“은영을 찾아가 보았어?”
“걔가 어디 있어?”
성호는 오토바이를 길 옆에 세워놓았다.
“소식이 령통하지? 걘 지금 시검찰원에 왔어.”
“그래? 정신이 괜찮더냐?”
“응. 고의로 정신이 나간 척한 거 같아. 복수하려는 일념에서 연극을 논게지.”
성호는 머리를 끄덕였다.
“걘 시검찰원에 전근했더라.”
성호는 종수의 말에 희죽이 웃었다.
“그래? 잘 됐구나.”
“건데 이름을 고쳤더라.”
성호는 어안이 벙벙했다.
“최혜영.”
“오- 최혜영검사! 참 그럴듯하구나.”
종수는 허구픈 웃음을 짓더니 흩날리는 눈발 속으로 오토바이를 타고 질풍같이 사라지는 성호의 뒤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하늘에서는 밀가루 같은 눈가루가 푸실푸실 흩날렸다.
(요만한 눈에야 뻐스가 통하겠지.)
종수는 전쟁년대 종군기자나 된 듯한 기분에 휩싸여 찌뿌둥한 날씨도 무릅쓰고 취재길에 나섰다.
(우리 민족의 력사자료를 정리하는 건 우리 기자들의 신성한 사명이야.)
뻐스정류소에 가보니 다행히 삼도만으로 뻐스가 통했다. 하루에 오전과 오후 두번 통했다.
그는 뻐스를 타고 굽이굽이 산골짜기를 따라 덜커덩거리면서 150여리를 달려 점심이 다 돼서야 삼도만에 난생처음 도착했다.
점심을 먹을 새도 없이 삼도만향인민정부에 들어가 기자증을 보이고 취재의향을 말했다.
향정부 책임자는 문화소에 데리고 가서 소개해주고나서 취재를 협조해주라고 분부했다.
문화소의 한족책임자는 종수를 데리고 삼도만향 소재지에 있는 한 마구간에 찾아가서 작두로 말먹이를 썰고 있는 한 한족로인을 소개해주었다.
그는 종수를 가리키면서 “이분은 신문사 기자네. 삼도만토비숙청전투에 대해 좀 자세히 얘기해주게나.” 하고 분부했다.
한족로인은 개털모자까지 벗어쥐고 “예, 예. 제가 아는만큼 얘기하죠.”라고 공손히 대답하면서 종수를 흘끔 쳐다보았다.
로인의 이마에서는 어찌나 땀이 뻘뻘 흘렀는지 김이 실실이 피여올랐다.
문화소 책임자가 가자 종수는 무릎을 꿇고 작두로 말먹이를 써는 한족로인한테 물었다.
“먼저 토비정황에 대해 말해주겠습니까?”
“토비? 누가 토비란 말이오?”
로인은 귀찮은듯이 입에 빗장을 지르고 한손으로 작두를 누르고 한손으로 벼짚을 먹이면서 말먹이만 썩썩 썰었다.
(일이 바빠 죽겠는데 무슨 놈의 취재야? 이거 아닌가?)
종수는 취재할 때 취재대상을 봐가지고 취재예술을 발휘해야 한다던 김택수 주임의 가르침이 문뜩 떠올랐다.
그는 좀 특수한 취재대상을 만난 것을 보고 필기장과 원주필을 호주머니에 넣었다. 그는 손에 침을 뱉어 썩썩 비비더니 작두를 꾹꾹 딛여 말먹이를 썩썩 썰어주었다.
한식경이나 일해도 로인은 벼짚을 작두날 밑에 먹이면서도 좀처럼 입을 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도와주면서 감동시키면 언젠가는 입을 열겠지.)
종수도 온 오전 로인을 도와 말먹이만 썰었다. 작두 옆에 썰어놓은 말먹이가 너무 많이 쌓이자 그는 두말 없이 말먹이를 안아다 말먹이창고에 날라들여갔다.
점심 때가 지난 후에야 로인은 땀을 뻘뻘 흘리는 종수를 보고 끝내 입에 찔렀던 빗장을 뽑았다.
“여보게, 기자선생, 말먹이만 썰고 돌아갈순 없잖는가. 점심 때도 다 됐으니까. 간단히 말해주지.”
종수는 가죽모자를 벗어쥐고 땀을 쓱 닦고나서 “감사합니다.”라고 하며 먼지가 가득 들어간 호주머니에서 필기장과 원주필을 꺼냈다.
로인은 그를 데리고 사양실에 들어가 앉았다.
“기실 그때 대부분 토비들은 국민당 놈들의 반공선전과 민족리간질에 미혹된 일부 한족백성들이였네. 그래서 우리 마을 일부 한족들은 ‘토비’라는 말만 하면 좋아하지 않네.”
종수는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
“국민당들이 뭐라고 반공선전과 민족리간질을 했습니까?”
로인은 담배물주리를 입에 물더니 뻑뻑 빨며 회상에 잠기더니 천천히 뒤말을 이었다.
“그게 그러니깐. 일제가 항복한 후 우리 여기 삼도만에 국민당 전소흥이란 소교가 기여들었네. 그 자는 우리 한족백성들을 보고 이렇게 선동했지. ‘지금 팔도와 연길, 명월구에 중공이 령도하는 조선족빨갱이군대가 욱실거리고 있네. 그들은 우리 한족들을 쳐죽이려고 군사훈련을 하고 있어. 우리 한족들도 총을 들고 우리 한족마을을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이 산골 한족백성들은 그 놈의 반공선전과 민족리간질에 속혀서 모두 마을을 지키려고 도망치는 일본 삼림경찰들을 도끼나 작두로 찍어죽이고 총을 빼앗아 무장했지. 우린 그때 저도 몰래 국민당 토비로 전락됐네.”
“오- 그랬구만요. 그때 로인도 토비에 가담했댔습니까?”
로인은 담배물주리를 길게 빨아 연기와 한숨을 땅이 꺼지게 후- 내뿜었다.
“그랬지. 난 전소교의 문서질을 했네. 지금 보면 비서나 다름없었지.”
종수는 그제야 로인이 인차 입을 열지 못한 원인을 알 것 같았다.
“당시 토비는 얼마나 됐습니까?”
“처음에는 이 삼도만에 한 150여명 있었네. 그런데 전소흥 소교는 팔도에서 중공군이 쳐들어올 기미를 보이자 우리를 데리고 평강촌으로 도망쳤댔지.”
“평강촌?”
로인은 머리를 끄덕였다.
“여기서 얼마나 먼가요?”
“한 30여리 되네.”
“거기서 토비숙청전투가 벌어졌습니까?”
“제1차 토비숙청전투는 평강촌에서 벌어졌댔구. 제2차 전투는 여기 삼도만에서 벌어졌네.”
“그때 전투상황을 좀 얘기해줍소.”
로인은 깊은 회상에 잠기더니 천천히 얘기했다.
“그때 명월구에서 김 지도원이 이끈 민주련군 담판단이 자동차에 앉아 령길을 넘어 우리 평강촌에 찾아왔네. 김지도원은 한개 반 전사들을 데리고 왔댔지. 그런데 담판단은 대문 안에 들어서자마자 무장부터 해제당했네. 김지도원은 기 꺾이지 않고 전소교한테 투항하라고 권고했네. ‘지금 팔도와 연길, 명월구에 2천명도 넘는 우리 민주련군이 있다. 이제 민주련군이 삼도만을 쳐들어올 거야. 100여명 밖에 안되는 네놈들이 어찌 2000명도 넘는 우리 민주련군을 당할 수 있겠는가? 무기를 놓고 투항하는 것만이 살길이다.’ 전소교는 김 지도원과 다른 전사 둘을 평강촌 뒤 길 옆에 생매장했네. 김 지도원은 생매장당하면서도 전소교를 질책하면서 투항하라고 했고 ‘공산당 만세!’를 높이 웨쳤네. 나중에 전소교는 그와 두 전사의 목을 쳐 땅에 묻어버렸네.”
종수는 필기장에 적으면서 원주필이 떨려 바로 적지 못하고 비뚤비뚤 적었다.
“그후 어떻게 됐습니까?”
로인은 담배물주리 담배재를 툭툭 털어버리더니 뒤이야기를 계속 했다.
“지독한 전소교는 두 전사만 내놓고 한개 반 전사들을 몽땅 총살했네. 살아남은 두 전사의 옷을 몽땅 벗긴 후 ‘민주련군에 돌아가 우린 절대 투항하지 않는다는 걸 알려라.’고 했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두 전사는 실 한오리 걸치지 못한 채 엄동설한에 동상을 입으면서 눈덮인 산을 넘어 명월구에 돌아가 그대로 정황을 회보했지. 그 후 약 천명이나 되는 민주련군이 령길을 넘어 쳐들어왔지. 그런데 평강촌에 돌아가면서 세길도 넘는 통나무바자를 세우고 그 밑에 전호를 그물처럼 파놓아서 민주련군에게 대단히 불리했지. 토비들은 울바자밑 전호에 은페해 산에서 내려오는 민주련군을 향해 맹사격을 가했네. 민주련군은 숱한 사상자를 내고 철퇴했네.”
로인은 입을 열자 줄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사기난 전보흥 소교는 토비들을 데리고 삼도만으로 되나갔지. 그때 돈화에서 민주련군에 쫓긴 마대포네 토비무리까지 삼도만에 찾아와 합세하다나니 토비는 200여명으로 불어났지. 그후 민주련군은 명월구와 팔도에서 량쪽으로 삼도만 토비들을 협공했어. 삼도만 강판에는 민주련군 전사들의 피로 뻘겋게 물들었네. 그러나 민주련군은 땅크까지 앞세우고 쳐들어왔어. 산골 안에서 그런 거물을 본적이 없는 토비들은 질겁했네. 아무리 총을 쏴도 땅크는 끄떡하지 않고 쳐들와 그 커다란 통나무대문을 꽝 깔아뭉갰지. 설상가상으로 산등성이에서 네대의 중기관총이 몰사격을 하는 바람에 토비들은 개인집으로 도망치지 않으면 뒤문을 빠져나와 평강촌을 바라고 도망쳤네. 그런데 공교롭게도 땅크가 그만 대문을 받쳐놓았던 통나무를 가로타고 올라가 오도 가도 못하고 빈 무한궤도만 돌아갔네. 그때 웃뚜껑이 열리면서 땅크 운전수가 나왔네. 토비들은 욱 몰려가 도끼로 땅크 운전수를 찍어 죽였지.
전소교는 마대포랑 20여명 토비를 데리고 평강촌에 도망쳤지. 그런데 만삭이 된 일본 안해를 보자 야수보다 더 지독한 전소교는 군도로 안해의 만삭이 된 배를 쩍 가르고 애를 꺼내 찔러죽인 후 안해마저 란도질해 죽여버렸네. 그후 그는 토비 잔여세력을 데리고 장춘으로 도망쳤던 거야.”
종수는 로인의 신변이 궁금해 물었다.
로인은 한참 궁리하다가 뒤말을 이었다.
“난 전소교를 따라 돈화하구 길림을 거쳐 장춘으로 도망쳤댔네. 후에 장춘이 해방되면서 우리는 심양 쪽으로 도망쳤지. 그런데 심양도 함락되자 전소교는 우리를 데리고 국민당 패잔군을 따라 영구로 도망쳤네. 그들은 영구에서 군함을 타고 대만으로 도망치자고 했네. 난 삼도만에 부모를 두고 대만으로 도망칠 수 없어 삼도만으로 돌아와 자수했네.”
종수는 머리를 끄덕이면서 개털모자 털 밑에 밭고랑 같은 주름이 잡인 그 토비출신 로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넨 로실하고 참 좋은 사람이야. 기자지만 틀이 없고 딱 농사군 같애. 그러찮으면 난 말하지 않았을 거야.”
“맞습니다. 난 농민의 아들입니다.”
“기자선생이 숱한 말먹이를 썰어주었는데 말해주지 않으면 량심에 걸릴 거 같더라구.”
종수는 그 로인과 갈라져 삼도만 초대소에 돌아가 점심을 먹었다.
이튿날 아침 하늘에서는 눈가루가 푸실푸실 흩날렸다. 그러나 평강촌에 김지도원이 묻힌 지점도 가보지도 않고 가렬처절했던 토비숙청전투를 쓴다는 것은 혁명선렬들한테 미안한 감이 들었다.
때마침 뻐스가 오는지라 종수는 무작정 삼도만에서 평강촌으로 가는 뻐스에 올라탔다.
한참 산골짜기에 난 길을 따라 구불구불 달리니 평강촌이 나타났다.
종수는 눈덮인 평강촌의 주위를 무심히 둘러볼 수 없었다.
(김지도원이 어데 묻혔을가?)
그는 길 옆에서 한담하는 마을 한족사람들한테로 다가가면서 물었다.
“난 신문사 기자인데 옛날 토비들이 김지도원을 생매장한 곳을 알려줄 수 없습니까?”
마을의 한족들은 아주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면서 아예 말도 건네지 않았다.
종수는 대뜸 삼도만 말먹이를 하던 토비출신 로인이 이 곳 일부 사람들은 토비 말을 하면 좋아하지 않는다던 말이 떠올랐다.
마을을 돌아다니다가 마을 뒤쪽 길 옆에 김지도원을 생매장했다던 그 말먹이를 하던 토비로인의 말이 피뜩 떠올랐다.
그는 마을 뒤쪽으로 가서 제일 마지막 집 앞에 있는 한족로인한테 용기를 내서 물었다.
“옛날 민주련군 담판단 김지도원을 생매장한 일을 기억합니까?”
로인은 밭고랑처럼 패인 주름살에 내린 눈가루를 털면서 종수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뒤쪽을 가리켰다.
“저기 길 옆에 자그마한 골짜기가 있네. 그 어귀에 파묻었네.”
“지금도 시체가 그 곳에 있습니까?”
“아니, 민주련군이 파갔네.”
종수는 머리를 끄덕이면서 그 로인을 따라 경건한 마음을 안고 북쪽으로 걸어갔다.
진짜 얼마 가지 않아 서쪽으로 뻗은 자그마한 골짜기 어귀에 평평한 곳이 있었다.
그 로인의 말대로라면 이 곳에서 김 지도원과 두 전사가 생매장당했다고 했다.
종수는 이 산골짜기 어귀를 무심히 보고 지나칠 수 없었다. 순간 그는 코마루가 찡해났다. 그는 그 곳에 풀썩 무릎을 꿇고 큰 절을 세번 올렸다.
“김지도원님, 렬사님들, 우리는 영원히 중국혁명을 위해 희생된 렬사님들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제야 그는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고 삼도만으로 돌아가는 길에 들어섰다. 그런데 점심 때가 퍽 지났지만 밥 얻어먹을 곳이 없었다. 두메산골에는 음식점도 상점도 보이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이것 저것 마을을 돌면서 보충취재하느라고 오전에 돌아가는 뻐스마저 놓쳐버렸다.
하늘에서는 거위털 같은 눈이 펑펑 쏟아졌다. 그 함박눈 때문에 점심 때가 퍽 지났지만 오후뻐스가 통하지 않았다. 통나무실이를 하는 목재운송자동차도 보이지 않았다.
종수는 핍박에 의해 량산에 오르듯이 30여리 떨어진 삼도만으로 걸어서 돌아가기로 했다.
“옛날 민주련군은 백여근씩 되는 무장과 쌀, 이불짐을 메고서도 행군하고 전투를 했어. 빈 몸에 30리를 걷지 못하겠는가.”
그는 비장한 결심을 내리고 삼도만을 바라고 무인지경 원시림 속 눈길을 걷기 시작했다.
흐린 하늘이 무너지기라도 하듯이 거위털 같은 함박눈이 펑펑 쏟아졌다.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산골짜기 눈길을 걷기란 여간만 힘들지 않았다. 게다가 점심을 먹지 못해 시장기가 들어 입에서 겨뿔내가 나고 왼쪽 배가 쌀살해나기까지 했다. 부득불 길 옆의 눈을 한웅큼 한웅큼 입에 쥐여넣고 씹고 녹여 먹으면서 걷고 또 걸었다.
걷고 또 걸어도 무인지경인 산골짜기에는 삼도만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젠 해도 져서 사위가 칠흑같이 어두워졌다. 여기저기 눈덮인 원시림에서 불티가 왔다갔다 하더니 승냥이 울음소리가 울렸다.
(불시에 승냥이무리 뛰쳐나오면 어쩌지? 범에게 물려도 정신만 올똘히 챙기면 살아남을 수 있어.)
종수는 눈길 옆의 벼랑에서 주먹만큼한 돌멩이를 둬개 주어들고 혼자 마음 속으로 부르짖었다.
(승냥이 덮쳐들면 생사결판을 내야지. 여기 쓰러지면 승냥이 밥이 되지 않으면 얼어 죽을 거야. 배고프고 힘들어도 절대 물앉지 말자. 서지 말고 이를 악물고 계속 한 걸음한 걸음 걸어나가야 해.)
그는 한참 걷다가도 또 속으로 부르짖었다.
(옛날 삼도만토비숙청전투 때 민주련군 선렬들은 총탄이 우박처럼 쏟아지는 전쟁터에서도 돌격해나갔다. 지금 그래도 총탄은 날아오지 않잖는가.)
인적이 없는 무인지경의 원시림 속의 산골짜기 길을 걸으면서 몇번이고 속으로 되뇌였다.
(꼭 살아서 삼도만에 가야 해. 삼도만토비숙청전투 력사자료를 정리해내야 해.)
그는 이를 악물고 걷고 또 걸었다.
밤중에야 산골짜기 저 멀리 전등불빛이 보였다.
“살았어. 난 끝내 삼도만에 돌아왔어.”
종수는 얼마나 기뻤는지 몰랐다. 살았다는 순간 긴장이 풀리면서 시장기가 들었다. 그러나 그는 이를 악물고 계속 도정신해 걸었다.
삼도만 초대소에 도착한 그는 터벅터벅 자기 방에 힘겹게 걸어갔다.
복무원이 문을 두드리더니 들어와 “저녁을 들지 못하잖았습니까? 뭘 가져오랍니까?” 하고 물었다.
산골의 인심이 훈훈했다.
종수는 구들마루에 걸터앉아 간신히 신을 벗어버리면서 “뭘 했는지 둬 그릇 주십시오.”라고 했다.
“칼면을 해서 가져오랍니까?”
“예. 감사합니다.”
종수는 구들에 올라가자 이불 우에 쿵 쓰러졌다.
한참 후에 복무원이 문을 두드리더니 칼면을 두 사발이나 들여왔다. 장국도 한사발 들여오고.
“잡숫고 곤하겠는데 그릇을 이대로 두고 쉬십시오.”
“감사합니다.”
종수는 복무원이 나가자 칼면을 몇 저가락에 후루룩후루룩 게눈 감추듯 했다.
배고픈 김에 너무 급하게 칼면 두 사발에 장국 한사발을 훌딱 다 먹어버렸다. 그 바람에 음식에 취해 그는 밥상을 한쪽으로 밀어버리고는 내복을 입은채 이불 우에 푹 꼬꾸라지고 말았다.
51. 련꽃의 눈물
거위털 같은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던 을씨년스럽던 엄동설한도 봄아가씨가 사뿐사뿐 다가오는 것을 막지 못했다. 비단결같이 부드러운 봄바람이 산들산들 불어오자 기승을 부리던 눈보라도 천천히 물러가고 만물이 소생하는 화창한 봄날이 서서히 찾아왔다.
성호가 사무실에서 나가려 할 때다.
따르릉, 따르릉.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예? 누굴 찾아요? 예.”
진희가 전화기를 들고 성호를 바라보았다.
“리선생을 찾습니다.”
성호는 누굴가고 황급히 다가가 전화기를 들었다.
“전화 바꿨습니다.”
“안녕하세요? 전 연화입니다. 오래동안 찾아뵙지 못해 미안합니다.”
“뭐? 연화?”
성호는 입귀를 비쭉하는 진희를 외면하면서 물었다.
“지금 어데 있소?”
“백화상점에서 공중전화를 치는데요.”
“오, 알았소. 그럼 거기서 기다리요.”
성호는 전화기를 절컥 놓고 황급히 사무실에서 나가 오토바이를 타고 백화상점으로 달려갔다.
(에이, 단위 일에 아버지 병간호에 바빠 죽겠는데. 또 무슨 일이 생겼는가?)
한달반 동안 실습할 때 녀학생이지만동정심이 많은 성호는 만나지 않을 수 없었다.
성호가 백화상점 대문어귀에 이르자 연화가 반갑게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리선생님.”
“대학은 졸업했겠지?”
“예, 시내 중학교에 배치받았어요.”
“오, 잘 됐소. 이게 몇년만이오? ”
성호는 연화의 손을 살짝 잡았다가 놓으면서 연화의 아래우를 쭉 훑었다. 연화는 진짜 이름처럼 련못의 아름다운 한떨기의 련꽃 같았다.
짧은 미색스카트치마를 입은 그녀의 우유빛얼굴이 퍽 매력적이였다. 그녀의 좀 수척해보이는 보름달얼굴에 쌍까풀눈만은 예전한데 어딘가 어두운 그림자가 흐르는 것 같았다. 짤막한 말똥떼쌍태머리는 온데간데 없고 시체를 따라 살짝 짧은 머리에 파마를 강굴강굴하게 지지지 않았겠는가. 요즘 파마를 지지고 다니는 것이 류행이였다. 시집간 색시인지 처녀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판이다.
“가기오.”
성호는 연화를 데리고 조용한 다방으로 갔다.
희미한 전등불빛 아래 은은한 음악이 침묵 속에서 부드럽게 흐르는 다방에서 연화는 성호를 어색하게 마주 바라보았다.
“선생님, 전 어쩜 좋아요?”
성호는 어두운 그림자가 쏜살같이 흘러가는 연화를 찬찬히 뜯어보면서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소?”
연화는 단통 성호한테 와락 안기면서
“실련했어요. 막 죽을 거 같아요.” 하고 고통을 호소했다.
성호는 연화의 첫마디를 듣는 순간부터 괴로워났다.
그는 연화의 잔등을 다독여주면서
“쳇, 실련 때문에 죽으라면 이 세상에 살아남을 사람이 몇이오. 바보 같은 소릴 작작 하오. 억세게 살아나가야지.” 하고 위로했다.
연화는 파마머리를 숙이고 가녀린 어깨를 들먹이기 시작했다.
“감정문제가 어디 그리 쉬운가요? 사랑하던 련인에게서 버림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가요? 막 죽고 싶어요.”
연화는 보름달 같은 얼굴에 줄 끊어진 구슬처럼 눈물을 줄줄 흘렸다.
“어떤 남자기에?”
연화는 들가방에서 사진 한장을 꺼내 보였다.
“진짜 서양놈처럼 생긴 놈이구만.”
우멍눈과 메부리코, 두툼한 입술, 진짜 양키 같았다.
“아주 잘 생겼죠? 키도 훤칠하고.”
“잘 생기기만 하면 다요? 사람이 수양이 있어야지. 그래 이 남잔 대학생이오?”
“네. 한 학급 동창생인데요.”
“그래? 왜 우리 귀여운 연화를 버려?”
“다른 녀자한테 반해버렸죠.”
“누군데?”
“한 학급의 동창생이죠. 우린 아주 친한 친구 사이였죠.”
성호는 듣고보니 한심한 판.
“그래 그 녀자친구가 우리 연화만 더 잘났는가?”
연화는 핸드빽에서 또 사진 한장을 꺼냈다.
연화와 함께 사진이였는데 꽤나 해말쑥하게 생긴 처녀였다. 어디를 보아도 연화보다 더 예쁜 걸 모를 처녀다.
“우리 연화 더 예쁘구만.”
연화는 손수 건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말했다.
“남자들이란 다 개 같단 말입니다. 그 놈은 나와 3년이나 사귀면서 지내볼만큼 다 지내보고서 날 버릴줄을 누가 알았겠어요.”
“그래 어떤 정황이오?”
연화는 성호를 피끗 바라보더니 머리를 숙이였다.
“지난해 초겨울에 그는 저의 집에 왔댔어요. 말로는 부모 허락을 받겠다고 했지요. 지금 보면 저를 가지려고 꾸민 음모죠. 그런줄도 모르고 승냥이 같은 그 놈을 우리 집에 끌어들여 모든 걸 주었어요. 아니, 마음마저 빼앗기고 짓밟히고 말았어요. 어쩜 좋아요? 으흐흐흑, 흑흑흑.”
“나쁜 놈새끼. 그 놈새끼 어데 있소?”
연화는 어깨를 세차게 들먹이면서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아니예요. 연구생에 합격돼 대학교에 남아 공부하는데요.”
“그래? 진짜 감정사기군이구나. 난 세상에서 허위적이고 사기를 치는 놈들을 제일 미워해.”
성호는 중얼거리면서 어떻게 하면 연화를 위안할가 궁리했다.
“그래, 그때까지도 눈치채지 못했단 말이오?”
“예, 녀자친구를 믿고 나와 그 놈의 일을 다 꼬치꼬치 주어바쳤죠.”
성호는 연화를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물었다.
“녀자친구는 연화가 그 놈새끼와 함께 집에까지 왔다간 걸 알겠구만.”
“예, 알죠. 제가 그런 말까지 멍청하게 다 했으니까요. 그 년은 나한테서 련애정보를 손금보듯 장악한 후 기회를 엿보다가 그 놈을 얼려넘겼지요.”
“그 녀자앤 지금 어디 있소?”
“함께 대학에 남아서 연구생공부를 해요.”
“오~”
성호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는 이제야 그 남자의 타산을 알 것 같았다. 연화는 본과생으로 끝났지만 함께 연구생공부를 하게 된 그 녀자가 더 매력적이고 전도를 개 척하는데도 도움이 될 길동무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한심하구나. 인물을 보면 연화가 낫지만 연구생이라고 미쳤을가? 어찌3년이나 동거한 련인을 헌신짝 차버리듯 할 수 있단 말인가?)
“개놈새끼군, 우리 시내에 있었으면 가만놔두지 않을텐데.”
성호는 연화를 어떻게 위안했으면 좋을지 몰랐다.
“연화, 너무 실망하지 마오. 이제 그 놈새끼보다 더 멋진 미남자를 소개해줄게.”
“싫어요. 이젠 시집가지 않을래요. 남자들은 다 개 같애요.”
그러나 성호의 말은 더 걸작이였다.
“처녀 시집가지 않겠다는 건 다 거짓말이라는 걸 세상 삼척동자도 다 아오.”
“아니예요. 진짜 시집가지 않겠어요. 이젠 두번이나 실련당했어요.”
성호는 연화 손을 잡고 진심어린 충고를 해주었다. 그는 절망의 심연에서 허우적거리는 연화를 구하려고 마음심처에 묻어버렸던 상처를 헤쳐보이지 않으면 안되였다.
“나도 이전에 실련한 적이 있었소. 그러나 지금 더 예쁘고 현숙한 처녀하구 결혼해 딸 낳고 행복하게 살고 있지 않소?”
“예? 선생님도 실련한 적이 있어요?”
연화는 너무 울어 팅팅 부어오른 쌍까풀눈이 데꾼해졌다.
성호는 머리를 가볍게 끄덕이고 나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도 아래학급 녀동창생을 짝사랑했던거요. 우리는 겨울이면 학교 빙장에서 숱한 동창생들의 부러움의 눈길을 한 몸에 받으면서 빙장에서 쌍은제비처럼 쌍무를 추었고 눈덮인 산기슭 스키장에 가서 스키도 씽씽 탔지. 그런데 그녀는 우리 학급의 내 딱친구를 암암리에 사랑했어. 나는 그녀한테 사랑의 츄피터화살을 날렸지. 그러나 그녀는 장난이나 치듯이 사랑의 화살을 살짝 피해 내 딱친구한테 포로롱 날아가버렸어. 난 한동안 고민의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렸어.”
“선생님도 그렇게 마음아픈 경과가 있었구만요. 그래 지금 사모님은 뭘 하는 분인가요?”
연화는 무척 성호의 안해에 대해 관심이 가 물었다.
“녀동창생이야. 지금 교원이야. 그녀는 대학교 교수의 귀공주 같은 무남독녀였어.”
“오~ 정희선생님 아닌가요??”
“그래.”
“정말 로맨틱한 이야기군요.”
성호는 머리를 끄덕였다.
“나는 첫사랑이나 다름없는 련인한테서 실련의 고배를 마신 후 보라구. 시간이 지나니 멀쩡하게 살아있지 않아? 원래 련인보다 더 예쁘고 사랑스런 녀동창생 정희한테 장가가서 귀여운 딸애를 보았어. 이젠 소학교를 다니면서 파랑새처럼 짹짹거려. 얼마나 귀여운지 몰라.”
성호는 연화의 손을 힘주어 잡아주면서 삶의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연화, 힘내오. 그까짓 배신자를 깡그리 잊으라고. 이제 그 놈새끼보다 더 멋진 백마왕자가 찾아올 거요.”
“정조를 잃은 녀자인데요. 누가 데려가겠어요. 두번이나 실련당했어요. 이젠 남자들만 봐도 싫어요. 마음씨 착한 선생님만은 믿음이 가서 마지막으로 찾아와 실련의 고통을 털어놓고 싶었어요.”
“고맙소. 새파란 나이에 두번이나 실련당했으니 얼마나 고통스럽겠소?”
연화는 무겁게 머리를 끄덕였다.
“대학에 가기 전에 있은 일인데요. 걔는 중학교 때 우리 웃학년 선배였죠. 말하자면 길어요.”
연화는 뼈 속같이 아픈 이왕지사를 쭉 이야기했다. 그녀의 두볼에는 쓰라린 눈물이 줄 끊어진 구슬처럼 하염없이 줄줄 흘러내렸다. 순간 눈물어린 눈 앞에는 처녀의 마음을 독차지했던 첫사랑, 그 멋진 스타일의 대학생청년이 우련하게 떠올라 마음을 아프게 했다. 성호는 그녀의 쓰라린 과거사를 들으면 들을 수록 연화한테 동정이 갔다…
꿈 많은 중학교시절에 연화는 실습교원인 성호의 지도를 받아 문장도 잘 썼고 꽤나 예쁜데다 춤을 잘 추고 달리기도 잘해 뭇 남학생들의 눈길을 한 몸에 받아안을만큼 인기가 많았다. 그리하여 진짜 그녀, 소녀 가슴을 설레게 했다. 그러나 그 설레는 소녀의 가슴에 멍이 들게 할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하루는 그녀가 하학해 집에 들어서니 아버지가 대뜸 화를 내면서 웬 편지를 척 내는 것이였다.
“봐라! 어떤 놈이 련애편지를 써보냈어. 암캐가 꼬리를 치지 않고서야 수캐들이 달려들겠냐? 이년아,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아새끼들과 작작 싸돌아다녀라.”
연화는 청천벽력 같은 그 말에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아버지, 난 련애한적이 없어요.”
“개소릴 작작 쳐라! 내 이 편지를 담임선생님한테 바쳐야겠어!”
아버지는 농민의 울뚝밸을 쓰면서 연화의 귀뺨을 찰싹 갈겼다. 그녀의 눈 앞에서는 무수한 별찌가 반짝였다.
연화는 얼얼한 얼굴을 만지며 눈물을 흘리면서도 그 편지를 가지고 나가는 아버지 팔을 붙잡고 애원했다.
“아버지! 제발 담임선생님한테 바치지 마세요. 그러는 날엔 머리를 들고 학교로 다니지 못합니다. 제발, 아버지! 엉~엉~”
그 말에 딸을 그렇게 예뻐하던 아버지는 문설주를 짚고서서 그녀를 되돌아보았다. 이윽고 아버지는 라이타를 찰칵 켜더니 편지에 가져다댔다.
그녀가 보지도 못한 편지, 웬 놈이 보낸 연애편지가 불길 속에 사라져갔다. 순간 그녀는 시한폭탄이나 제거한듯이 한숨을 호~ 길게 내쉬였다.
연화는 그날 밤에 책을 들었으나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어느 놈이 저런 편지를 써보내 애먹일가 남자애들을 쭉 더듬어보았다. 허나 비슷한 애가 떠오르지 않았다.
며칠 후 하학해 집으로 돌아가는 골목길에 들어섰는데 뜻밖에 연화의 웃학년을 다니는 학생회 체육부장이란 애가 그녀 앞에 나타났다. 그 애는 한메터 팔십도 넘는 훤칠한 키에 어글어글한 눈이 퍽 매력적이였다.
“얘, 좀 보자.”
희죽이 웃는 그를 보자 때뜸 뭔가 짐작이 갔다.
“무슨 일이냐?”
“글쎄 저쪽에 가서 얘기하자.”
연화는 그 애가 그렇게 두럽지도 않았고 밉지도 않았다. 그녀는 동창생들의 눈을 피해 그를 따라 조용한 골목길에 굽어들어섰다.
“난 2학년 3반의 장철이야. 우리 서로 알고 사귀면 어때?”
“안돼.”
장철은 담대하게도 연화의 손을 덥썩 잡았다. 연화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황급히 손을 빼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본 애들이 없었다.
장철은 뒤덜미를 긁적거리면서 물었다.
“전번에 보낸 편지를 읽어봤니?”
“무슨 편지?”
“너를 좋아한다고 써보냈는데.”
“싹 걷어치워. 우린 고중생이야. 전번에 그 놈의 편지 때문에 아버지께 들키워 혼줄났어. 다신 날 건드리지 말아라.”
연화는 인차 그 신물나는 자리를 떴다. 굽인돌이를 돌면서 피뜩 돌아보니 장철은 그때까지도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들이 마주 서있는 것을 창수가 보았을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그 바람에 그들은 엉망진창이 되게 곤경을 치렀다.
남자애들은 연화가 지나가면 “련애대장”이라는지 “아무개 각시”라는지 별의별 입에 담지 못할 소리로 놀려댔다.
장철은 다행히 키도 크고 힘도 세서 앞에서 놀리는 애들은 없었지만 벽에 그 애를 놀리는 락서와 만화가 어지럽게 그려졌다.
장철은 예전처럼 학교 운동대회 때 사자머리를 흩날리면서 준마처럼 쏜살같이 달렸다. 그 장한 모습을 보고 영웅처럼 돋보였다. 연화의 마음 속은 폭설을 맞은 파 속처럼 새파랗게 되살아났다.
웬 일일가?
그번 운동대회가 끝난 후 장철은 온다간다는 말도 없이 학교에서 가뭇없이 사라졌다. 연화는 큰 짐을 부리운듯 마음이 홀가분한 반면에 이상야릇하게도 저도 몰래 허전해졌다.
썩 후에 연화는 현고중 마당에서 우연히 그를 만났다.
그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버릇처럼 뒤더수기를 긁적걱렸다.
“따라와!”
이전과 달리 연화는 궁금했던 그 애가 꿈과도 같이 불쑥 나타나자 이상할만치 부끄러운줄도 모르고 그 애를 따라 조용한 골목길에 들어섰다.
그는 또 버릇처럼 뒤더수기를 긁적거렸다.
“이전에 안됐어. 나때문에 네가 곤경을 당하게 해서.”
“아니야, 지나간 일인데 괜찮아. 편지를 쓸게 있니? 할 말이 있으면 메일을 보내거나 만나서 말해도 실컷 될 건데.”
연화는 불쑥 나간 자기 말에 황급히 손으로 입을 가렸다.
연화는 커피잔을 들어 홀짝 마시더니 뒤말을 이었다.
“그때 무슨 용기가 나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그 애는 ‘누가 또 볼가봐 겁나는구나. 후에 보자.’ 하더니 부랴부랴 자리를 떠났어요. 떠나가는 그 애의 넓죽한 잔등을 보면서 피씩 웃어버렸어요. 그 애도 이전에 혼줄나긴 났던 모양이죠.”
성호는 쓰디쓴 커피를 후후 불어 마시면서 연화의 과거사를 한마디도 빼놓을세라 들어주었다.
그후 연화와 장철은 애들의 눈을 피해 버드나무가 우거진 해란강둑이거나 검은 철교부근에 가서 시간이 가는줄도 모르고 밝은 달을 바라보면서 이야기꽃을 피웠고 대학의 꿈도 무르익혔다. 그들의 첫사랑은 처음부터 시련 속에서 엄동설한의 피 속처럼 새파랗게 싹트기 시작했다.
눈섭 끝에서 화가 떨어진다고 항상 곤드레만드레 취해 다니던 연화의 아버지가 글쎄 교통사고로 반신불수로 될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치료비를 마련하느라고 어머니는 집까지 팔아 들이대야 했고 남동생은 이모네 집에 가서 얹혀 살아야 했다. 연화는 학비를 댈 돈마저 없는 판에 무슨 돈이 있어 계속 단독으로 세집을 맡고 공부할 수 있단 말인가.
연화는 어머니를 도와 아버지 병간호를 하면서 아버지 불쌍하고 자기 앞길이 막막해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어느 하루, 하늘에서 떨어진듯이 장철이 병원에 찾아와 800원을 연화의 손에 억지로 쥐워주었다. 후에 알고보니 그 돈은 장철이 역에 나가 먼지를 새뽀얗게 들쓰면서 세멘트랑 부리우면서 번 돈, 학비를 내려던 돈이 아니겠는가.
장철은 연화가 돈을 되밀어주자 둘러댔다.
“얘, 넌 나보다 공부를 잘하니까 꼭 대학에 가야 해. 이 돈은 우리 부모가 준 돈이야.”
연화는 그 선의적인 거짓말에 넘어가 그 피땀이 슴밴 돈을 고맙게 받았다.
“이담 꼭 갚을게.”
그의 뜨거운 손길에 끌려 연화는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그러나 연화의 세집값도 장철의 학교 숙사비를 내자고 하니 엄청 모자랐다. 나중에 장철의 제의를 받아들여 핍박에 의해 량산에 오르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날부터 그들은 손바닥만한 세집에 합숙하기로 하였다. 드디여 장철이 이불짐을 지고 연화가 들었던 세집에 들어왔다.
비좁은 세집에서 한 밥상의 밥을 먹고 머리를 맞대고 공부할 때는 괜찮았다. 그러나 사춘기를 갓 넘어선 그들은 동쪽벽과 서쪽벽에 갈라져 누웠지만 이리궁싯 저리궁싯 하면서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어떤 때에는 장철이 가마목쪽으로 물을 먹으러 가는 척하다가 다가와 구들이 따뜻한가 보자면서 이불 밑에 손을 쑥 들이밀어넣고 연화의 몸을 여기저기 더듬었다. 그런데 연화는 그만 그의 손을 쳐내지 못하고 말았다…
꼬리가 길면 밟히기 마련이였다. 그들이 한 세집에 든 일이 서너달 후에 담임교원한테 탄로날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연화가 여기까지 말하는데 불시에 왁짝 떠드는 소리로 다방이 떠나갈듯이 복잡해졌다. 바깥에서 별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승호와 선희의 목소리인 것 같았다.
성호는 계속 연화의 말을 들었다.
“언제 있은 일이요?”
“부끄러운 말인데요. 선생님 실습을 마치고 간 썩 후의 일인데요.”
연화는 부끄러워 머리를 들지 못한채 뒤말을 이었다.
세집 주인할머니는 서너달 집세를 받지 못하자 연화의 담임교원을 찾아가 집세를 받아달라고 부탁했다.
(오누이라니?)
담임교원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연화한텐 오빠 없는데.)
담임교원은 너무나도 이상하여 주인할머니를 따라 곧추 세집을 찾아갔다.
담임교원은 청년교원인데 아주 개명한 분이였다. 그는 대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를 눈치채고 먼저 자기 호주머니를 들춰 집세를 준 후 연화를 조용한 곳으로 불러갔다.
“학교에서 알면 무조건 퇴학이요. 오래잖아 대학입학시험을 치겠는데 이게 뭐요? 그러나 전도를 고려해서 비밀에 붙이겠소. 절대 더 동거하지 마오. 학생은 학생기률을 지켜야지. 참, 답답하구만.”
연화는 창피해서 머리도 들지 못하고 발끝으로 땅바닥을 허비였다.
장철은 하는 수 없이 세집에서 나갔다.
그해에 장철은 간고하게 세방살이를 하면서도 끝내 중점대학에 입학하였다. 이듬해에 연화도 장철을 따라 그 시내 일반대학에 입학하였다. 그런데 연화는 장기환자인 아버지 치료 때문에 학비가 문제로 됐다. 장철과 함께 세집에 동거해 주숙은 해결됐지만 학비만은 담보가 없었다. 장철도 엄청난 학비로 해 골머리를 앓는데야.
연화는 대학에 가서까지 더는 장철의 신세에 공부할 수 없었다. 그녀는 궁리 끝에 학비를 몇푼이라도 보태려고 해볕이 쨍쨍 내리쬐는 땡볕을 무릅쓰고 레이저광장 서쪽끝에 “가정교사”라는 패쪽을 발치에 놓고 서성거렸다. 련 이틀 얼굴이 그을도록 서 있어도 가정교사를 쓰자는 사람은 그림자도 얼신 하지 않았다.
해질 무렵에 패쪽을 주어들고 자리를 떠나려고 할 때였다. 양복을 척 입은 신사 한분이 오더니 연화의 얼굴부터 몸까지 참빗질하더니 그녀가 손에 쥔 패쪽에 눈길을 멈췄다.
“영어를 가르치오?”
“예.”
“수학도 가르칠만 하오?”
“예.”
“그럼 우리 애를 좀 가르쳐주오.”
신사는 애 정황을 자세히 말해주겠다면서 연화를 데리고 랭면집에 가더니 랭면과 채 서너접시에 맥주까지 시켰다. 그는 연화한테 맥주를 권하더니 애정황을 죽 얘기하고나서 잘 가르치면 가정교사비는 푼푼히 주겠다고 장담까지 했다.
“난 시내에서 한다하는 서일철 경리란 말이요.”
그는 명함장까지 척 꺼내 주었다.
이튿날 연화는 처음 서경리네 집에 들어섰다가 눈부시게 황홀한 궁전 같은 집 안을 둘러보고 깜짝 놀랐다.
(세상에, 우린 온전한 단칸방도 없는데. 세상은 너무나도 불공평해!)
서경리네 뚱뚱한 도련님은 놀고 먹는데는 악돌이고 공부는 빼돌이여서 가르치기 여간 힘들지 않았다.
연화의 끈질긴 노력으로 해 몇달 공부를 가르쳤더니 학습에 열중하기 시작하였고 성적이 점차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서경리는 기뻐 어쩔줄 모르면서 그달 가정교사비 200원을 주고나서 한턱 내겠다고 했다.
서경리는 연화가 극구 사양하는 것도 마다하고 도요다표자가용에 연화를 싣고 근사한 음식점으로 달려갔다.
그는 한상 푸짐히 차려놓고 맥주를 한컵씩 따라 마주치고나서 쭉 들이켜더니 웃호주머니에서 두툼한 봉투를 꺼내 연화의 손에 쥐워주었다.
“자, 받소. 600원이요.”
“이 건 뭔가요?”
“수고비요. 그간 애썼소.”
연화는 돈봉투를 되밀어주면서 “200원이면 족해요.”
황송해하는 연화를 보고 서경리는 가녀린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고 다독였다.
“사양말고 받소. 돈이 바쁠 땐 말하오. 제같이 예쁜 대학생아가씨에게 돈을 쓰는게 아깝지 않소. 아니, 아주 즐겁소.”
연화는 당장 집세와 동생 학비가 딸리는지라 별 수 없이 받아넣었다.
“감사합니다. 자제분을 잘 가르쳐드리겠어요.”
“허허허. 그래, 진작 받아야지.”
그날 서경리는 얼근히 취해 연화를 데리고 노래방에까지 가서 노래를 부르고 춤추면서 놀고서야 택시에 앉혀 보내주었다.
연화는 세집에 돌아와 그때까지 자기를 기다리면서 텔레비죤을 보고 있는 장철을 보고서야 제 정신이 펄쩍 들었다.
(왜 서경리를 따라 노래방에까지 갔지? 못난 년.)
그녀는 장철을 보기 미안해 옷을 활활 벗어버리고 살갑게 장철의 품 속에 안겼다. 장철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저 연화를 빼앗기기라도 할가봐 꼭 끌어안았다.
그후 서경리는 연화에게 핸드폰까지 사주면서 아들의 가정교사라는 걸 떠나서 자기가 저녁에 부르면 술동무나 해주면 돈 백원 내지 200원을 주겠다고 했다. 처음에 연화는 가기 싫었지만 당장 다음 학기 학비가 딸리는 형편에서 돈의 유혹에 빠져 핸드폰이 울리기만 하면 세집에서 빠져나가 서경리 승용차에 탔다.
“얘, 밤중마다 어디로 자꾸 나가니?”
장철은 못 마땅한 눈길로 연화를 바라보았다.
“잠간 나갔다 올게. 근심하지 말라. 절대 나쁜 짓 하고 돌아다니지 않으니까.”
“얘, 우린 아무리 살기 힘들어도 절대 더러운 돈은 벌지 말아야 해.”
“왜 그렇게 생각하니? 난 술동무를 할뿐 몸을 팔진 않아. 남을 억울하게 굴지 말라.”
“내 뭘 하던? 남의 돈을 받으면 입이 물러진다고 받지 말라는데도. 서경리한테 코 꿰여 다니는게 아니고 뭐야?”
“범에게 물려도 정신만 올똘히 차리면 살아남아. 근심하지 마.”
연화는 첫사랑 장철에게 미안해 그의 얼굴에 살짝 키스까지 해주고 문 밖으로 나섰다.
벌써 저쪽 가르등 밑에 서경리의 도요다표 승용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서경리는 연화를 싣고 한 산기슭의 닭곰집에 갔다. 별장 같은 그 집 안에는 복도로 죽 들어가면서 단칸방이 줄느런히 늘어서 있었다. 단칸방에 들어가 미닫이를 꼭 닫으니 아주 조용하고 아늑하였다.
서경리는 닭곰 한단지나 청하고 여러가지 료리를 푸짐히 차려놓고 연화를 보고 마음놓고 먹으라고 했다. 닭곰에 맥주를 들면서 연화는 어쩐지 저도 몰래 가정교사인지 아가씨인지 가리기 아리숭해지는 것이 우스웠다.
술이 서너잔 들어가자 서경리는 자기 인생철학을 횡설수설 늘여놓기 시작했다.
“지금은 개방세월이기에 대학생들이 너무 가감승제에 네모꼴만 들여다봐선 시세를 따르지 못하오. 사람이 한뉘 행복하게 살면 다지. 뭐 아글타글 할게 있소?”
연화는 어떻게 하나 촌에서 벗어나려고 아득바득 애쓰고 있지 않는가.
“너넨 새 세기 대학생들이야. 연애, 혼인, 가정 관념이 시대에 앞섰어. 그렇찮고서야 어찌 결혼도 하지 않고 세집 잡고 동거까지 할 수 있어?”
서경리는 연화가 못 마땅한 눈치를 보내자 인차 말끝을 얼버무렸다. 그는 기름기 도는 노란 닭다리를 집어 연화 접시에 놓아주었다.
연화는 맥주를 마신 바람에 자주 화장실로 나갔다. 그런데 제자리에 돌아와 서경리가 권하는 마지막 맥주잔을 마신 후 일이 생겼다. 당금 눈까풀이 무거워지더니 눈 앞이 빙글빙글 돌아갔다.
그녀가 화장실에 간 후 맥주잔에 수면제를 타놓았다.
연화는 서경리가 자기를 안아 눕히면서 희죽이 웃는 것이 희미하게 보였다. 그러나 사지가 나른해 반항할 수 없었다…
한참 후 잠을 깨고보니 서경리의 팔을 베고 누워있지 않겠는가.
그녀는 와뜰 놀라 와닥닥 일어났다. 창 밖을 내다보니 문발 새로 아침해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연화는 옷매무새가 흐트러진 것을 발견하고 모든 것을 짐작했다. 허나 모든 것은 쥐도 새도 모르게 끝난 뒤였다.
연화는 서경리 뺨을 찰싹 갈기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우며 서럽게 대성통곡쳤다.
서경리는 시물시물 웃으면서 연화의 어깨를 다독이면서 어린애를 얼리듯이 어루쓸었다.
“울긴 왜 울어? 숫처녀도 아니더구만. 인생이 길면 얼마나 길겠소? 가난한 선비 장철을 따라다녀서야 세방살이에 고생문 밖에 있어? 내 비록 마흔이 넘었지만 연화를 평생 행복하게 해줄 수 있소.”
“듣기도 싫어!”
연화는 문을 박차고 한 많은 닭곰집에서 나가버렸다.
서경리는 따라나와서 비틀거리는 연화를 승용차에 억지로 밀어넣고 시동을 걸었다.
뒤이어 승용차가 닭곰집 울 안에서 서서히 미끄러져나갔다.
“나도 가정을 깨고 싶지 않아. 너도 장씨와 갈라질 필요없어. 남녀관계는 가정 울타리 안에서 끝나는게 아니지.”
서경리는 차를 쏜살같이 몰면서도 계속 지껄였다.
“가정울타리, 그 행복하면서도 자유를 구속하는 정신쇠사슬로 얽힌 감옥에서 해탈되면 얼마나 즐거워? 우리 계속 이렇게 재미나게 보내면 어때? 항상 장씨와 비좁은 세집에만 갇혀있지 말고? 으하하하, 장씨 품 속에서 드문드문 벗어나면 얼마나 즐거워? 자유만세!”
“싹 걷어치워. 남의 첫사랑을 짓밟고서도 무슨 행복? 관둬!”
연화는 더러운 서경리의 인생철학에 침을 뱉었다.
“차를 세워라.”
“아직 먼데?”
“구역질이 나서 더 앉아 있지 못하겠다.”
서경리는 뚱뚱한 배를 씨근거리며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욕정의 불찌가 뚝뚝 떨어지는 눈길로 연화를 노려보면서 차를 세웠다.
(더러운 놈, 개구리가 고니 고기를 먹으려고? 더러운 놈의 심보! 나보고 네 놈의 첩이나 되라는게 아니고 뭔가?)
연화는 승용차문을 쾅 닫고 길바닥에 나섰다. 서경리는 승용차를 몰고 씽 달아났다.
차 밖에 나오니 차디찬 산공기가 그렇게도 청신하였다.
그러나 택시를 갈아타고 세집에 이른 연화는 마음 속으로부터 장철을 보기 미안했다. 비록 내가 원해서 그렇게 된것은 아니였 건만 첫사랑 장철한테 너무너무 미안했다.
그녀는 세집에 들어가자 화장실에 들어가서 샤와를 하면서 더러워진 몸을 씻고 닦고 또 씻었다.
몸에 때는 씻어졌지만 마음 속의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장철한테 미안하고 죄송스러운 죄책감에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차라리 장철이 호되게 때렸으면 죄책감이 좀 줄어들고 마음이 조금 내려갈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를 무섭게 쏘아보는 장철한테 속사정을 얘기할 수도 없었다. 장철의 머리 속에서는 착잡한 추측과 상념이 뭉게뭉게 타래치며 피여오르는 구름처럼 복잡하게 뒤엉켜 요동치고 있었다. 그는 구태여 묻기도 무서웠다. 그럴 수록 연화는 가책되고 미안하고 죄송스럽고 가슴이 미여질듯이 아팠다.
며칠 후 남동생이 찾아와 학비와 숙사비가 딸린다면서 연화한테 손을 내밀었다. 막다른 골목에 이른 연화는 장철한테 미안한 마음이 색바래지고 돈을 벌어 동생의 학잡비를 대려는 일념이 미안하던 마음의 구석구석을 꽉 채우면서 머리를 쳐들었다. 그녀는 이번만, 이번만 하며 마음이 조금조금 열려 서경리가 준 핸드폰을 꺼내 다시 켜놓고 전화벨이 울리기를 기다렸다.
장철도 어쩌겠는가!
그의 어머니도 신염으로 앓아누워 자기 학비도 내기 어려워 연화가 집세마저 낸 형편이였으니. 연화를 흘겨본들 어쩌겠는가!
그날 밤, 때마침 서경리가 준 핸드폰 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연화는 한숨을 호~ 내쉬면서 일어섰다.
장철이 앞을 딱 막아나섰다.
“또 밤을 샐 예산이야? 못 간다, 못 가! 내 아버지께 말해 방법을 대보자.”
“내 어찌 내내 너네 집 신세만 지겠니? 날 믿어라. 깨끗한 몸으로 돌아올게.”
연화는 깜짝 놀랐다.
(내 입에서 그런 거짓말이 나오다니?)
당장 돈을 척 내놓지 못하는 장철은 주먹으로 벽을 꽝꽝 치며 안타까운 눈물을 찔끔찔끔 짰다. 아무리 키 서발막대만큼 크고 힘이 세도 돈이 없으니 자기 첫사랑마저 지키지 못하는 자기 신세 가련했던 것이다.
그러는 장철을 두고 문 밖에 나서는 연화의 마음인들 오죽하랴. 대학마저 다니기 싫었다. 대학을 다니자니 첫사랑마저 지키기 어렵고 첫사랑을 지키자니 대학공부를 포기해야 할 판이였다. 그녀는 대학도 다니고 첫사랑도 지키는 길은 오직 몸 건사를 잘하면서 서경리한테서 돈을 얼려내는 길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한편 자기가 원해서 하는 일이 아니기에 첫사랑 장철을 배반한것이 아니라고 생각됐다.
그녀는 모진 마음을 먹고 가로등 밑에 가서 서경리의 도요다표 승용차 문을 열고 들어갔다.
뜻밖에 장철이 세집에서 불쑥 뛰쳐나오더니 돌멩이를 주어 승용차에 뿌리면서 뭐라고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승용차는 그런 장철을 뒤에 떨궈놓고 쏜살같이 도망쳤다. 헤드라이트는 밤길을 누비면서 어느덧 사내를 벗어나 산골에 자리잡은 서양식 별장에 이르렀다.
서경리는 미리 전화로 술상을 예약해놓고 술도 별로 마시지 않고 연화를 노려보면서 치근거렸다. 그때라고 생각한 연화는 동생이 학비 때문에 찾아왔는데 바쁜 목을 열어줄 수 없는가고 통사정을 들이댔다.
서경리는 그런 말을 기다렸다는듯이 헤벌쭉거리면서 두툼한 돈봉투를 내밀었다.
“자, 받소. 나는 연화가 수요되고 연화는 돈이 수요되지. 서로 돕는 셈 치고 합작을 잘 해보기오. 어, 허허허.”
연화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서경리는 또 열장을 쑥 뽑아주었다.
“자, 천원이오.”
그제야 연화는 서슴없이 그 돈마저 챙겨넣었다.
(네놈이 탐오하지 않고 회뢰하지 않고서야 이 많은 돈이 어데서 오겠니? 네놈의 불의지재를 얼려내 우리 오누이 대학공부를 하는 정의로운 사업에 쓸 판이야.)
서경리는 돈을 챙겨넣고 치마자락을 내리는 연화한테 와락 덮쳐들었다. 연화는 각오하지 못한 건 아니였지만 반사적으로 콱 밀치며 발악했다.
“왜 이래? 돈을 받았으면 순종해야지.”
“술동무 하러 왔지. 몸 팔러 오진 않았어요. 난 가정교사지 아가씨 아닌데요.”
서경리는 서글픈 웃음을 웃더니 손삿대질을 하면서 빈정거렸다.
“야, 요년이 사기치잖아? 네깐 년이 아가씨가 아니면 뭐냐? 청백한 척하지 말라. 전번에 벌써 넌 나한테 당했어. 황하에 뛰여들어도 그 더러운 때를 씻지 못해. 알만해? 하하하.”
뒤이어 서경리는 연화를 와락 끌어안아 쓰러뜨렸다.
“이 걸 놔요. 놓지 않으면 소리치겠어요.”
“소리치겠으면 한바탕 고함쳐봐라! 처녀인 네가 더 부끄럽지 내 부끄러울 것 같아?”
서경리는 연화의 적삼을 벗기는 손을 더 빨리 놀렸다.
“이 걸 놔요. 못 놓겠어요? 강간죄로 공안국에 신고하겠어요.”
“고발해. 네 매음죄마저 고발해.”
그 색마가 부래지어를 올리는 순간 연화는 발버둥질치다가 술상의 맥주병을 쥐여 색마의 뒤통수를 탕 쳤다.
“앗!”
비명과 함께 색마는 보리주머니처럼 맥없이 한옆으로 쓰러졌다. 뒤이어 뒤통수에서 뻘건 선지피가 줄줄 흘러내려 연화의 얼굴과 가슴에까지 떨어졌다.
연화는 색마를 콱 밀어버리고 부랴부랴 그 자리를 떠났다.
며칠 후 서경리는 핸드폰으로 연화를 세상 더러운 년이라고 욕지거리를 하고는 다시 더 찾지 않았다.
그러나 장철은 그날 밤부터 세집에서 나간 후 다시는 머리도 내밀지 않았다…
“저는 경제난을 해결하려다가 첫사랑마저 잃고 말았지요. 간혹 그가 다니는 대학교에 가볼가고도 생각했지만요.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죠. 그런 일이 있는줄도 모르고 한 학급의 동창생이 나를 따랐지요. 그런데 녀자친구한테 장철과 서경리 말까지 다하는 바람에 결국 나는 두번째 사랑도 잃고 말았어요. 으흐흐흐, 흑흑흑…”
건너방에서 확실히 승호와 선희가 희희닥닥거리는 잡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성호는 그런데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그는 연화의 쓰라린 소설 같은 인생사를 듣고 마음이 쓰라렸다. 성호는 연화를 어떻게 위로하면 좋을가 한참 궁리하면서 착잡한 생각에 잠겼다.
동정심이 많고 마음씨 착해 그런가? 어째 성호한테는 맨 마음 아픈 일만 찾아올가?
(아, 어쩜 생기 넘치던 연화한테 저런 고통을 안겨줄 수 있단 말인가? 서경리, 짐승 같은 놈, 용서할 수 없어. 세상은 왜 이다지도 험악한가? 그래 가난이 죄란 말인가? 고난에 시달리는 연화 오누이를 노리던 색마한테 예술학원 무용수의 전도를 망치게 하다니? 이런 끔찍한 일도 세상에 다 있단 말인가?)
그는 영화에서나 드라마에서나 볼수 있는 비극이 자기 주변에서 일어난 것이 섬찍했다.
“서경리, 승호, 모두 색마야, 악마야.”
성호 앞에는 또 무섭게 무거운 일거리가 생겼다.
(어떻게 하면 연화를 구할 수 있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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