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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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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남만에서의 조선의용군 1지대
2016년 03월 20일 00시 31분  조회:2577  추천:0  작성자: 김성룡
팔로군 주덕 총사령의 제6호명령에 따라 동북으로 진출해 심양에 모인 조선혁명가들은 군인대회를 열고 중국내의 조선족을 보호하고 중국인민의 해방투쟁에 참여할 방침을 확정지었다. 군인대회의 포치에 따라 조선의용군 제1지대, 제3지대, 제5지대가 신속히 조직되였으며 제1지대가 2지대를 확건, 조직하고 3지대가 4지대를, 5지대가 6지대를 확건, 조직하기로 결정했기에 잠시 2지대, 4지대, 6지대를 설치하지 않았다.
분공에 따라 왕신호(王信虎)와 방호산(方虎山)이 제1지대를 책임지고 남만에서 활동하며 주덕해가 제3지대를 조직할 임무를 맡고 19명 간부를 거느리고 북만으로 갔다. 그리고 박일우와 리익성이 거느린 제5지대는 연변을 중심으로한 동만근거지를 창설하기 위해 동만으로 떠났다.

심양 군인대회의 결정에 따라 남만에서 활동하게 될 조선의용군 제1지대가 편성되였다. 지대장에 왕신호이고 정치위원에 방호산이였으며 참모장에 안빈, 정치처 주임에 주연이였다. 1지대는 2,000여명 대원을 9개 보병중대와 기포중대, 경위중대로 편성했다.

왕신호의 본명은 김웅(金雄)이다. 1914년 조선 경상북도에서 태여난 그의 경력은 한청과 비슷하다. 그는 1930년대에 중국에 이주했다가 1933년 9월에 남경중앙군관학교 제10기 보병반에서 학습했다. 당시 일본인의 간섭으로하여 조선학생은 신분을 밝힐수없었기때문에 중국이름인 왕신호라는 가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1937년 김웅은 연안 항일군정대학에서 공부하다가 1940년 군사교원의 신분으로 팔로군 2종대와 함께 신사군 활동지역인 강소성북부에 가 신사군 제3사 적공과(敌工科)에서 사업했다. 그는 신사군을 도와 포로를 심사하고 적의 전문을 번역하며 정찰임무를 수행하면서 신속히 퇀급간부로 성장했으며 수차의 근거지 보위전투에 참가했다. 1944년 1월에 그는 100여명 조선청년을 모아 조선의용군 화중지대를 조직하기도했다.

   조선의용군 1지대에서의 방호산

 

방호산의 경력은 잘 밝혀지지 않고있다. 그는 일찍부터 혁명에 참가했고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으며 당의 파견을 받고 주덕해(朱德海), 리권무(李权武), 김일(金一) 등과 함께 모스크바 동방로동대학에서 학습하다가 연안에 오게 된다. 그는 연안에서 항일군정대학 간부훈련대 동북간부훈련반에서 공부하다가 1945년 연안 조선의용군 본부와 조선혁명군정학교 사생과 함께 동북으로 왔다.

군인대회가 있은후 새로 편성된 조선의용군 제1지대는 무순을 거쳐 12월에 통화로 갔고 한청은 의용군 선견종대를 전부 제1지대에 넘기고 새로 독립대대를 조직해 료동으로 나갔다. 독립대대 1중대는 차균섭 중대장의 인솔하에 천일농장과 조광농장에서, 제2중대는 김귀현 중대장의 인솔하에 영구시에서, 제3중대는 리풍 중대장의 인솔하에 영흥농장에서 확군하기로 했다. 이때 영구에는 조선인이 많았다.

료녕성 영구, 지금도 이곳에는 일부 조선족이 살고있지만 대부분 논은 한족이 가꾸고있었다. 발해만연안의 이 논들은 모두 일제의 강제이주로하여 온 조선인이 바다를 막고 개척해 놓은 유서깊은 땅이라 할수있다.

 

조선의용군 제1지대 정찰병이였던 최학만 로인은 이렇게 설명했다.

“그때 영구가 조선사람이 많이 있게 되였는데 그 원인은 일본이 제정때 남조선(한국)으로 농민을 모집해 거기다가 1구로부터 12구까지 바다를 막아 농사를 지었다. 땅을 만들어 벼를 심어야했기에 조선사람이 많다. 조선의용군은 거기 가서 확군했다. 150명이 참가했다.”

 

  조선의용군 제1지대의 정찰병이였던 최학만 로인(심양)

한청이 거느린 조선의용군 독립대대 직속중대는 김응팔이 중대장을 맡고있었다. 그는 대원들을 이끌고 구방자진(沟帮子镇)의 일본중심농간국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그때까지 농간국의 일본군경들은 투항하지 않고있었다. 김응팔은 30여명 결사대를 거느리고 적의 구령을 알아낸후 일본말을 잘하는 사람을 앞세워 보초선을 통과한뒤 갑자기 공격해 적을 전부 투항시켰다. 그들은 일본인의 무기와 탄약을 로획해 무장했다. 그리하여 독립대대는 영구에서 600여명으로 확대되였다.

 

(최학만 로인) “……영구시내에 있는데 국민당이 3시쯤 되여 기차를 타고 시내로 들어와 불질을 하다나니까, 그때 우리 손에 한사람 탄알 두알 세알 다섯, 열사람에 수류탄 하나밖에 없는데 그놈들은 전부 자동무긴데 해볼수있소? 그래 쫓기워서 리석재로 쫓겨왔지요. 리석재에 오니 또 들어와서 또 쫓겨쫓겨 안동까지 갔습니다…국민당에게 쫓겨가면서 환인으로해서 관전. 그리해서 가는데 장백산을 목표로 가는데 지방지방마다 공산당이 들어오면 뭐나 다 뺏앗아 간다. 붙들어간다. 이래가지고 자본가 지주들이 악선전을 하는 말을 듣고 우리를 겁내 한다. ‘어이? 들어와서 하는걸 보니 물도 긷고 마당도 쓸지 인민에 대한 태도라든가 국민당과 전혀 달랐다. 마을에 들어오면 젊은 녀성을 겁탈하고하는데 그런것도 없이 좋은 군대거든.’ 그래서 백성들이 일어나 대자본가와 지주가 어느어느 골짜기에 숨어있다고 알려주었지요. 우리 말하면 토비지요. 그래 그 정보를 듣고 잡으러 가지요. 그놈들도 감시하면서 다 총을 가지고 도망하구. 몇사람 잡기는 했는데 관전과 환인에서 활동을 하다가 점점 무송까지 들어갔습니다…”

 

조선의용군 제1지대는 가는 곳마다 “우리의 군대”라고 조선사람들의 환영을 받았다. 조선청년들은 다투어 자기부대인 조선의용군에 참군하였다. 그리하여 철령에서 조직된 500명 규모의 조선의용퇀이 있게 되고 산동의 조선의용군 채국번이 뱃길로 동북에 와서 확군한 압록강지대도 있게 되였다. 이 부대는 모두 통화로 이동해 제1지대 본부와 합병했다.

통계에 따르면 광복초기 료녕성 각지에서 만여명 조선청년이 참군하였다. 조선족이 많이 모여사는 류하현에서는 1500여명이 참군하고 환인현에서는 2100여명이 참군했다. 이들은 조선의용군에 입대했을뿐만 아니라 동북민주련군 야전부대인 제3종대에도 많이 참군하였다.

해룡현대대 대부가 있었던 곳을 가르키는 매하구의 리병길 로인(1지대 륙군중학교 출신)

 

길림성 매하구 린근의 조선청년들은 해룡에 모여 다투어 입대하였다. 이들은 해룡현대대에 편입되였고 그중 우수한 청년은 야전군 주력부대인 제3종대에 편입되였다.

 

장춘에서 만난 82세 고령인 권상준 로인, 그는 동북민주련군 제3종대 9사 포병으로서 산성진에서 입대한 분이다.

“산성진에 있었는데 일본놈이 투항했다고했어요. 부근에 조선족이 많았고 조선소학교도 있었는데 하루는 해룡에서 군대를 모집한다고했습니다. 많은 조선청년이 갔지요. 그래 나도 갈려고 생각했어요. 가보니 해룡현에 이미 많은 조선족 청년이 모여있었는데 늦었다고했지요. 먼저 가면 반장, 패장 이렇게 한다고했거든요. 그건 대수롭지 않고 부대에 왔으니 됐다고 생각했는데 얼마후 주력부대인 제3종대로 뽑혀가게 되였습니다. 우리 중대가 전부 갔지요. 가보니 3종대에 우리 조선족이 많았습니다. 다 우리처럼 이 부대에 참가했지요.”

 

해룡현대대에서 1지대로 다시 동북민주련군 제3종대 포병에 입대한 권상준 로인(장춘)

 

조선의용군 제1지대는 심양에서 조선독립동맹 남만공작위원회를 설립하여 각지 대중사업을 책임지게 하였다. 위원회의 적극적인 노력으로하여 남만 각지에서 무려 만여명 조선청년이 참군하여 조선의용군 제1지대와 동북인민자치군 제3종대에 편입되였다. 환인현(桓仁县)만 보더라도 조선족 3000여가구에 2100명이 참군했다. 위원회는 또 각지에 조선족중학교를 세우고 소학교를 회복하였다. 제1지대는 교원양성반을 꾸려 470명 교원을 양성해 각지 조선족학교에 보냈고 대량의 간부를 양성해 각지 정권건설을 지원했다.

 남만 근거지가 공고히 되기전에 국민당 정예군이 공격해왔다. 상대적으로 력량이 약한 동북인민자치군은 전략적 요새만 수비하고 대부분 철수하였다. 그리하여 제1지대도 통화에 집결하게 되였으며 이때 병력은 무려 5000여명으로 확대되였다. 조선의용군 제1지대는 통화를 중심으로 각지의 토비를 숙청하면서 공산당 민주정권을 보위하는 남만의 주요한 지방력량으로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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