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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영원한 기념비》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 렬사릉원에는 장춘쟁탈전에서 희생된 박락권 퇀장, 고생호 부퇀장을 비롯해 수많은 렬사들이 고이 잠들고있다.
연변의 사학자 리송덕 선생은 렬사릉원을 찾은 연변의 방송애청자들에게 장춘쟁탈전의 과정을 설명해주었다.
“1946년도 4월 16일부터 18일까지 3일동안 장춘에서 우리 연변경비 1퇀이 장춘공격부대의 동남종대에 편입되여 싸웠습니다. 동남종대는 세개 퇀으로 구성되였는데 연변경비 1퇀은 동땅 조선족입니다. 퇀장 박락권이구 부퇀장이 고생호구 정치부 주임이 최동광입니다. 최동광이 해방후 자치주인대 주임을 했던 태항산 간부입니다. 이래서 장춘으로 약 천여명이 한개 퇀이 들어갔습니다. 이래서 장춘전투를 사흘했는데 우리 조선족퇀이 아주 큰 공헌을 했습니다. 예. 이래서 마지막 중앙은행청사까지 들어가면서 약 280명이 희생되였습니다. 그 가운데 급이 가장 높은 분이 박락권 퇀장입니다.”
연길렬사릉원의 박락권 퇀장과 고생호 부퇀장 묘비
조선퇀 6련 지도원이였던 김응삼 로인은 아직까지도 소중한 사진 한장을 간직하고있다. 장춘을 점령한후 통신원 김영호와 다른 한 련급간부와 전선에서 남긴 기념사진이였다. 사진은 색이 바랬지만 씩씩하고 름름한 당시 우리 용사들의 모습을 찾아볼수있었다. 사진 뒷면에는 “신경을 바라고”라는 글이 씌여있었다.
장춘쟁탈전이 있은후의 기념사진(왼쪽 첫 사람 김응삼 지도원, 오른쪽 첫 사람 경위원 김영호)
장춘으로 행군하는 조선퇀 장병들(김응삼 수장)
김응삼 로인이 소개한데 의하면 당시 장춘은 신경으로 불리웠고 조선퇀은 연변의 토비숙청을 마치고 장춘으로 향했다. 그리고 장춘, 길림지역, 연변 등지에는 아직까지도 수백명에 달하는 장춘쟁탈전 참전 용사들의 이름이 남아있다. 더우기 장춘쟁탈전에 참전했던 수많은 조선족 로전사분들이 우리 신변에 계신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년로한 탓으로 일부 로인들은 세상 떳지만 많은 분들이 생존해 계신다. 우리는 그들의 건강하고 행복한 만년을 관심하고 그들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한다고 생각된다.
장춘쟁탈전은 동북민주련군의 첫 중대한 승리로서 사평전투에 믿음직한 후방기지를 제공했고 국민당군의 북진을 지연시켰다. 이로써 동만근거지를 더욱 공고히하고 북만근거지를 건설하기 위한 시간과 조건을 마련해주게 되였다. 뿐만아니라 장춘쟁탈전을 통해 우리군은 대도시를 공격하는 소중한 작전경험을 쌓았다.
한편 1946년 4월, 중국공산당 동북국의 지시에 따라 북만의 민주련군 359려단과 송강군구, 목단강군구, 합강군구의 각 부대도 할빈을 포위하고 쏘련군의 철수를 기다리고있었다. 당시 할빈에는 국민당 접수관원과 그들이 끄러모은 경비부대가 있었다.
북만의 최대도시 할빈을 장악해 공고한 근거지를 만들려는 공산당의 전략적 의도에 따라 조선의용군 제3지대도 할빈포위전투에 참가했다. 그들은 할빈교외의 사마툰에 전선지휘소를 설치하고 주덕해 정위의 지휘하에 할빈을 공격할 태세를 취하고있었다.
조선의용군과 독립동맹은 일찍부터 지하간부들을 할빈에 남겨 할빈의 조선족 가운데서 활동했다. 조선독립동맹 지하일군들인 리현준, 리장춘, 김인환 등은 적정을 탐지하고 옷과 약품, 돈을 모아 의용군에 보냈으며 조선인 로동자들을 동원해 자본가들과 투쟁했다. 그리하여 조선인 로동자 400~500명을 조직동원하여 내응 할 준비를 했다. 이 정황을 안 조선의용군 제3지대에서는 조선족 항일간부 류동호를 할빈에 잠입시켰다. 류동호는 리영택, 마창근, 한탁치 등 3명 중대장과 함께 할빈으로 가서 조선인 로동자 500명을 접수해 조선의용군 제3지대 제3대대에 편입시키고 할빈으로 들어오는 아군을 영접하기 위해 준비했다. 이때 할빈 한국민회에 소속되였던 150명 조선인 경비부대도 무장을 가지고 조선의용군에 의거해 넘어왔다. 이는 할빈에 잠복했던 우리 지하일군들의 간고한 노력으로 이룩한 성과였다. 류동호는 이들을 제3대대에 편입시켰다.
1946년 4월 28일, 쏘련군의 철수와 더불어 민주련군은 할빈으로 진격했다. 할빈접수는 상상외로 순조로웠다. 이때는 장춘이 해방된뒤라 저항해봤자 아무런 희망도 없음을 간파했기 때문에 할빈시내의 국민당군은 총 한방쏘지 않고 도주해버렸다.
할빈시가 해방된후 조선의용군 제3지대는 공산당에서 가장 믿어주는 부대로서 동북국과 민주련군 주요 지도자들의 경비임무와 할빈시 위수임무를 맡았다. 조선의용군 제3지대는 남강의 원 일본령사관자리에 지대부를 설치하였다. 3지대 제1대대는 지대부와 함께 있으면서 도리구와 도외구를 책임졌고 2대대는 길 건너편의 원 흥농합작사 자리에 주둔하면서 태평교구와 삼과수일대를 책임졌으며 3대대는 남강, 향방구 일대를 분담했다.
중국인민해방군 군사학원 정문
력사상황을 설명하는 군사학원의 리화 소좌
군사과학원 군사력사분회의 리화 소좌(소령)는 장춘, 할빈, 치치할을 점령한 의의에 대해 이야기했다.
“항일전쟁이 끝난후 국민당 장개석은 아미산에서 내려와 승리의 과실을 독점하려했습니다. 관내에서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에 수차의 무장충돌이 발생하고있을때 국민당은 동북은 주권문제만 존재하기 때문에 쏘련으로부터 동북을 접수하면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동북의 내정문제를 승인하지 않았던것입니다. 1946년 봄, 국공량당이 사평에서 치렬한 쟁탈을 진행하고있을때 우리당은 부분적인 무장력량을 조직해 국민당의 수중으로부터 치치할, 장춘, 할빈을 빼앗았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장춘을 차지한후 장개석의 외교문제는 내정문제로 바뀌게 되였습니다. 때문에 장춘의 해방과 더불어 동북문제 담판에서 공산당은 유리한 위치에 놓이게 되였습니다. 그리고 이는 사평보위전과 국민당과의 동북쟁탈에 확고한 후방기지를 마련해주었습니다.”
중경담판이 있은후 국공량당은 1946년 1월 10일 “국내 군사충돌을 중지할데 관한 명령”, “충돌을 중지하고 교통을 회복할데 관한 국공 쌍방의 명령과 성명”을 비롯한 4개 문건을 정식 조인하였다. 하지만 국공량당의 정화성명은 동북을 포함하지 않았기 때문에 동북에서의 포성은 끊기지 않았다. 1946년 3월에 쏘련군이 심양으로부터 점차 철군함에 따라 충돌은 더욱 심각해졌다. 국민당군은 미국제 무기로 무장한 정예군을 휘몰아 두길로 나누어 남만의 본계와 사평을 공격했다.
1946년 4월말에 이르러 장춘, 할빈, 치치할 세 도시가 아군에게 장악되였다. 민주련군이 피어린 혈전을 거쳐 장춘을 해방하고 이어 할빈, 치치할까지 해방하자 대노한 장개석은 모든 대가를 아끼지말고 사평을 공격할것을 명령했다.
북평에서 신장치료를 받고있던 두률명은 장개석의 명령이 떨어지자 급급히 심양에 와서 부대를 재정비하고 사평을 공격했다. 그리하여 4월 18일, 장춘이 해방될때 국민당 신1군과 71군은 사평을 반월형으로 포위하고 공격을 시작했고 민주련군은 첫 대규모적인 도시방어전을 진행했다. 전투는 처음부터 백열화되였다.
적아쌍방은 한치의 땅을 두고 피와 목숨으로 박투했다.
4월 18일부터 26일까지 동북민주련군은 국민당 신1군의 공격을 막아냈지만 쌍방 모두가 허다한 희생을 냈다. 4월 27일 국민당군 동북총사령인 두률명은 공격중점을 본계에 두고 본계수비군이 사평쪽으로 이동한 틈을 타서 본계를 점령했다. 이어 국민당군은 10개 정예사단을 모아 사평을 공격했다. 5월 18일까지 피를 말리는 공방전은 치렬하게 진행되였고 국민당군은 탑자산진지를 공략하였다. 탑자산 진지를 잃음으로하여 전반 방어선에 구멍이 생기게 되였고 사평을 사수하던 동북민주련군 주력이 적의 포위권에 들 위험에 놓이게 되였다. 게다가 이때 동북민주련군은 적 만여명을 소멸했지만 8천여명 이상의 희생을 낸 상황이였다. 더는 지체할수없다고 판단한 동북민주련군 총사령인 림표는 곧바로 동북국과 중앙에 상황보고를 한뒤 부대를 이끌고 사평에서 철수하였다.
전보를 접한 중앙에서는 우선 한달간의 피어린 혈전으로 사평을 사수한 동북민주련군의 영웅적 행동을 충분히 긍정하고나서 상황에 따라 주동적으로 철수하는것을 동의하였다. 그러면서도 국공량당의 담판을 고려해 사평이북의 공주령이나 장춘에 새로운 방어진을 구축할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사평에서 철수한 동북민주련군 주력은 허다한 희생을 냈을뿐만 아니라 장병들은 지칠때로 지쳤고 조직체계마저 흩어질 위험이 있었기에 도저히 효과적인 방어진을 칠수없었다.
림표는 장춘까지 내주고 송황강을 경계로 적군과 대치할것을 주장했지만 동북민주련군 내부에는 중앙의 지시대로 장춘을 끝까지 수비하자는 주장도 있었다. 두가지 인식이 엇갈리고있을때 동북민주련군 정위인 라영환이 나서서 림표의 주장을 따랐다. 그는, 대도시인 장춘과 길림을 지켜내려면 대량의 병력이 수요되지만 아군은 그럴만한 병력이 없을뿐더러 장병들이 모두 극도로 지쳤기때문에 지켜낼수없을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리고 적이 매하구로부터 길림시로 진격한다면 장춘을 수비하는 아군 주력이 전부 포위될 위험이 있다고 지적하면서 장춘으로부터 철군해 송화강이북에 방어진을 쳐야한다고 주장했다.
드디어 동북국은 림표와 라영환의 주장을 받아들여 할빈을 중심으로한 송화강이북으로 철군하기로 결정했다.
한편 사평을 점령한 국민당군은 동북민주련군 주력을 추격해 공주령, 장춘, 길림을 련속 차지하였다. 그러나 이때 전선이 길어지고 병력이 분산되였기때문에 국민당군도 기동부대가 크게 부족함을 느꼈다. 그리하여 6월 7일 국공량당 대표는 동북에서 15일간의 휴전협의를 달성했다.
장백산에서 발원한 송화강은 서북쪽으로 흘러 길림을 지나 송원시에 이른다음 큰 굽이를 돌아 다시 동북방향으로 흘러 할빈을 지나 흑룡강과 합쳐 바다로 들어간다. 국민당군과 동북민주련군은 바로 송화강을 사이두고 대치단계에 진입하였던것이다.
장춘, 길림을 차지한 국민당군은 북진하려했지만 덕혜까지 점령하고는 송화강에 막혀버렸고 연변을 중심으로하는 동만을 공격하려던 동진길은 로야령의 험한 산세에 막혀버렸다. 이로써 대치단계의 더욱 간고하고 치렬한 접전은 송화호 동부의 산지와 장춘-할빈사이의 송화강을 사이두고 진행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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