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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영원한 기념비》
1945년 11월 심양의 조선의용군 군인대회에서는 조선의용군 제5지대를 편성해 동만지역으로 파견했다. 동만은 장백산을 중심으로한 중국과 조선 국경지역을 말한다. 대체적으로 장백산 북쪽기슭의 두만강으로부터 길림시주변까지, 장백산 남쪽기슭의 압록강 상류로부터 길림시주변까지의 지역이 포괄된다. 청조말기부터 일제 강점시기까지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온 조선인들은 대부분 동만에 정착했기 때문에 이 지역 조선인수는 백여만명에 달했다. 이들을 쟁취하여 혁명에로 이끌기 위해 중국내에 남은 조선독립동맹의 가장 중요한 간부와 조선의용군 정예부대로 제5지대를 편성했던것이다.
제5지대 지대장에 리익성이고 박일우가 직접 정위를 맡았다. 그리고 전우가 5지대 참모장을 맡고 주혁이 정치부 주임을 맡았다.
9개 중대 900여명 규모인 조선의용군 제5지대는 심양을 떠나 도보로 동만을 향해 진격했다. 중국관내에서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간고한 항일전쟁을 겪어왔던 이들은 모두가 드높은 사상각성과 풍부한 혁명경력을 가진 우수한 혁명간부이면서 또한 훌륭한 전사였다. 심양에서 출발한 이들은 드높은 혁명열의로 조선족마을을 거칠때마다 혁명선전을 진행하면서 훌륭한 청년들을 받아들여 대오를 장대시켰다. 뿐만 아니라 우수한 간부를 남겨 현지의 혁명사업을 돕게 했다.
원 조선의용군 제5지대 무전대에 있었던 김응삼 로인은 당시의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조선의용군 각 지대중 오직 5지대에만 무전기가 있었다고했다.
“박일우 그분이 지대 정치위원이고 부사령원인데 내가 원래 무전대에 있었는데 무전대는 리홍광지대도 없고 북만에도 없고 딱 박일우에게만 있었습니다. 그분은 공산당에서 가장 신임을 받는 사람이였습니다.”
조선의용군 제5지대의 무전대 전사였던 김응삼 로인(길림성 반석에 거주)
중국의 광활한 대지를 누비며 씩씩하게 전진하는 조선의용군은 도처에서 조선인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김응삼 로인의 회억에 따르면 제5지대는 도보로 료녕성 청원에 이르렀을때 흰 조선옷을 입은 마을사람들이 몰려와 조선독립 만세를 부르며 조선의용군은 맞아주었다. 그리고 친인을 만난듯이 즐거워했고 좋은 음식을 대접했다. 조선의용군 제5지대 간부들은 마을사람들을 모아놓고 의용군의 투쟁사를 이야기했고 조선의용군 행진곡을 배워주기도했다. 하지만 마을사람들은 조선의용군이 곧 떠난다고하니 “우리 조선인의 군대가 조선사람을 보호하지 않고 어디로 가는가?”하면서 서운해했다. 그러자 리익성 지대장은 마을사람들을 모아놓고 남만지역은 조선의용군 제1지대가 책임졌으니 그분들이 곧 올것이며 제5지대는 명령에 따라 계속 동만으로 가야한다고 설명해주었다. 지대장의 설명을 듣고서야 마을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제5지대 용사들을 바래주었다고한다.
조선의용군 제5지대 용사들은 청원에서 기차를 리용해 길림시 부근의 반석역에 도착한후 수요에 따라 10여명 간부를 반석에 남겨 투쟁을 지도하게 했다. 그리고 반석을 거쳐 길림시에 도착하였다. 길림보안대 제3총대 제7대대는 모두가 조선청년으로 구성된 부대라는것을 안 박일우 정위는 부분적인 간부를 남겨 제7대대의 사업을 지도하게 했다.
제5지대 간부들은 화전에 가서 제7대대 전원과 회합했으며 길림시부근의 쌍하진, 강밀봉, 구전, 오리하, 서양, 차로하, 화피창 등지에서 더 많은 조선청년들을 규합해 12월말 조선의용군 제7지대를 정식 편성했다. 항일전쟁시기 연안에서 활동했던 오랜 혁명가인 박훈일이 새로 편성된 조선의용군 제7지대의 지대장과 정위를 맡았다. 그리고 최명이 부지대장 겸 부정위를 맡고 김극이 참모장, 최중렬이 부참모장을 맡았다. 그러나 사람은 많았지만 무기가 많이 부족했다.
지대부에서는 항일련군 1로군 1사가 남겨놓은 무기를 찾아낼 임무를 5중대 중대장을 맡았던 송무섭에게 맡겼다. 명령을 받은 송무섭은 전사들을 거느리고 화전과 몽강 접경지의 산속을 찾아다니다가 드디어 50여자루의 3.8식보총을 찾아내 무장하게 되였다. 무기는 좋지 않았지만 일제와 간고한 투쟁을 진행했던 항일련군이 남긴것이라고 생각하니 전사들은 더없이 기뻐했다. 드디어 조선의용군 제7지대는 1,500여명 규모에 6개 중대로 나뉜 전투부대로 되였으며 화전을 중심으로 서란, 횡도하자, 상산툰, 화수림자, 팔도하자 등지를 전전하면서 피어린 항쟁을 견지하였다. 이들은 후에 화전보안퇀으로 되였다가 길림지역 조선족부대인 72퇀으로 확대 편성되였다.
조선의용군 제5지대는 길림에서 기차를 리용해 연길로 가려했지만 지대 전원이 탑승할수없게 되자 참모장 전우가 2개 중대를 거느리고 선발대로 먼저 가게 되였다. 조선의용군 제5지대 선발대를 실은 기차는 흰 연기를 토하며 첩첩한 산곡을 지나 연길로 향했다. 기차는 룡담산, 강밀봉, 교하를 거쳐 험산준령을 뚫고 돈화역에 도착했다. 부유한 두만강기슭과 길림-장춘지역을 이어주는 길목에 위치한 돈화는 지리적으로 자못 중요하였다. 그리고 돈화는 괴뢰만주국시기 일본 관동군 제1방면군의 주요한 거점이였기에 일제의 패망과 함께 대량의 무기가 남겨졌고 민간에 흩어졌다.
돈화시 당사판공실의 사학자 양명곡 선생은 당시 돈화의 상황을 이렇게 소개했다.
“쏘련군은 8월 19일에 돈화에 왔습니다. 그때 돈화는 일본군의 중요한 기지였기때문에 대량의 무기가 남아있었고 일본 패잔병들이 산속에 숨어 자주 마을을 습격해 량식을 빼앗군했습니다. 십여년간 일제의 억압을 받던 돈화부근의 마을사람들은 다투어 무기를 들고 마을을 지켜싸웠습니다. 그러다가 11월에 항일련군 간부 류건평, 박영선, 심봉산 등이 왔고 또 연안으로부터 양상규, 양상곤 등이 왔습니다. …조선족은 박영선이였는데 박영선은 쏘련에서 왔고 류건평의 안해였습니다. 돈화에 온 이들은 돈화현사업위원회를 설립하고 영길현의 령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돈화보안 사령부를 설립했습니다. …양상곤은 백퇀대전때의 팔로군 퇀장이였는데 성격이 불같아 누구말도 잘 듣지 않았습니다. 친형인 양상규만이 그를 단속할수있다고하여 두 형제가 함께 돈화에 와서 부대를 책임지게 되였습니다. 하지만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총을 든 사람들은 선량한 백성이였지만 이들을 거느린 두목은 대부분 괴뢰만주국시기의 현장, 보장, 경찰, 군관을 하던자들이여서 암암리에 국민당의 위임장을 받았던 탓으로 매우 불순했습니다. ”
당시 돈화부근에는 지금의 향이나 진 규모인 촌이 10개가 있었는데 촌마다 모두 자체의 무장이 있었다. 항일련군 간부들은 돈화에 온후 이들을 8개 대대의 돈화보안부대로 편성하였다. 그리고 류화일이 현장으로 되였다. 원래 괴뢰만주국 군의로있던 류화일은 일제가 패망하자 곧바로 신분을 바꾸어 돈화현의 돈 있는 사람들의 추대를 받고 치안유지회 회장이 되였으며 영문을 모르는 쏘련군의 지지를 받아 돈화현 현장까지 했던것이다. 암암리에 국민당의 위임장을 받은 류화일은 백방으로 공산당과 항일련군 간부들의 활동을 방애하였다. 그는 국민당의 위임장을 들고다니며 돈화보안대의 대대장, 중대장을 임명하면서 부대를 장악하고 국민당정부와 쏘련정부가 체결한 이른바 “중쏘친선조약”을 턱대고 쏘련군을 찾아가 공산당이 설립한 민주정권을 승인하지 말아야한다고 주장하였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쏘련군은 더는 보호할수없으니 빨리 돈화에서 철수할것을 돈화현 사업위원회에 통보했다.
류건평과 양상규, 양산곤 등 공산당 간부들은 할수없이 전향하지 않은 보안대의 조선족대대를 거느리고 남황니허쪽으로 철수하였다.
류화일은 도처에서 공산당 간부들을 체포하고 살해했으며 팔로군을 습격하였다. 뿐만아니라 연길로 문서를 가져가는 주보중의 안해 왕일지와 강신태의 안해 장경숙까지도 억류하고있었다. 그리고 돈화에 도착한 조선의용군 제5지대 선발대를 일본패잔병이라고 쏘련군에 거짓보고를 하여 무장해제를 하게했던것이다.
동만으로 통하는 길목인 돈화기차역
조선의용군 제5지대 선발대가 탑승한 기차가 돈화에 도착한후 뜻하지 않게 쏘련군의 저지를 받게 되였다. 전우는 전체 대원들에게 맹동하지 말고 사태를 주시할것을 명령하고 쏘련군과 협상하려했다. 하지만 쏘련군은 상급의 지시라고 하면서 무조건 무장해제를 한다고했다.
사태확대를 막고 쏘련군과 충돌하지 않기 위해 전우는 대항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쏘련군의 태도는 자못 단호하였기에 협상이 잘 되지 않고있을때 강신태가 나타났다. 그는 주보중의 부인 왕일지와 안해 장경숙이 억류되였다는 소식을 듣고 급급히 돈화에 왔던것이다. 그때 왕일지와 장경숙은 쏘련군의 도움으로 이미 풀려났었다.
전우를 만난 강신태는 쏘련군을 찾아가 이들은 조선의용군이며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항일대오라고 극구 설명해서야 오해가 풀렸고 선발대는 다시 무기를 찾게 되였다.
한편 전우가 거느린 선발대가 돈화에서 무장해제를 당했다는 소식을 접한 제5지대 본부는 박일우의 지휘하에 급급히 돈화로 진군하였다. 이들은 눈길을 헤치며 급행군하여 화전의 상산툰을 거쳐 교하로부터 진군하다가 돈화에서 철수한 양상곤과 돈화현 보안대 조선족대대를 만났다.
돈화의 사학자 양명곡
돈화의 사학자 양명곡 선생은 당시 보안대의 조선족대대는 국민당에 투항하지 않고 끝까지 돈화현사업위원회의 공산당 간부들을 보위하면서 싸웠다고 이야기했다.
“보안대의 나머지 한개 대대는 현위를 보위하여 남황니허에 갔습니다. 조선족대대입니다. 이 조선족대대는 국민당과 결탁하지 않고 중국공산당을 긴밀히 보호하여 철수하였습니다. 1945년도 년말일것입니다. 현위는 18도구에 갔는데 거기서 회의를 열고 출로를 토의하였습니다. …이때 조선의용군 5지대가 도착했습니다. 태항산 5지대라고했는데 영의 규모였습니다. 이들은 길림, 교화쪽으로부터 돈화에 왔습니다. 돈화에서 이들은 양상곤과 만났는데 서로 잘 아는 사이였습니다. 이들은 함께 현성을 탈취하자고 했습니다.”
조선의용군 제5지대와 정기두(郑基斗)가 거느린 돈화보안대 조선족대대를 합쳐 천여명의 병력이 돈화부근에 집결되였다. 이들은 우선 비행장을 지키는 반란군의 무장을 해제한후 돈화현성의 경찰대대를 공격했다. 치렬한 접전을 거쳐 류화일을 생포하고 돈화에 새로운 인민민주정권을 세웠다.
돈화의 질서를 회복한후 조선의용군 제5지대는 36명 간부를 남겨 돈화의 조선족대대를 훈련시키게 하고 연길로 떠났다. 돈화조선족대대는 공산당의 령도하에 돈화부근에서 계속 토비들과 싸웠으며 후에는 길동군구 독립 6퇀의 기간력량으로 되였다.
1945년 12월 8일 문정일이 인솔한 조선의용군 간부 30여명이 연길에 도착해 조선의용군 판사처를 설립하였고 년말에 드디어 조선의용군 제5지대가 연길에 도착하였다.
동만으로 향한 조선의용군 제5지대,1945년 말에 연변에 도착
연길에 도착한 조선의용군은 항일련군과 합쳐 력량을 크게 확대했을뿐만 아니라 민주대동맹을 토대로 동만의 당원 발전사업에서도 큰 성과를 가져왔다. 연변은 항일전쟁시기 반일유격대가 비교적 활발히 활동했던곳이고 조선족 군중속에 공산당조직이 계속 존재했기 때문에 군중토대가 아주 좋았다. 일제가 패망한후 연변의 조선족 가운데서 공산당조직은 신속히 확대되였는데 1947년의 통계를 보면 연변의 2,057명 당원 중 조선족 당원수가 반을 넘는 1,120명이였고 1948년에는 연변당원총수 3,175명 가운데 조선족 당원수가 2,579명으로서 근 80%를 점했다.
이와 같은 훌륭한 군중조직과 당조직이 있었기 때문에 연변에 도착한 조선의용군 제5지대는 신속히 확대되였으며 강신태가 거느린 3개 경비퇀과 훈춘보안퇀을 합쳐 조선의용군 제15퇀, 제16퇀, 제17퇀, 포병퇀으로 확대편성되였다. 연변의 무장은 초기부터 당의 직접적인 령도하에서 발전되였기때문에 공산당의 가장 믿음직하고 전투력이 강한 무장으로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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