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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장편《반도의 혈》
20.
8월의 일본. 추밀원.
장장 네시간 지속된 담화가 마침내 끝나고 천황은 돌아갔다.
산들 바람이 불어와 화초잎들을 가볍게 춤추게 할 뿐 추밀원 뜨락은 매미울음소리 하나 없이 한적했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피로해진 머리를 쉬우느라 뒷짐을 짓고 홀로 뜨락을 거닐었다. 무아경에 빠져 자연을 즐길 수 있는 휴식이 그는 그리웠다.
하지만 그가 바라는 리상적인 휴식은 잠시간일 뿐 뒤미쳐 다른 생각이 가볍게 머리를 쳐들어 발동이 꺼져버린 머리를 재다시 가동시키고 있었다.
《내가 어느때까지 뒤를 받들어 줘야 하는가.》
그는 인선수완이 그리 밝지 못한 천황을 머리속에 다시떠올리면서 혼자소리로 중얼거렸다.
올해 46세인 천황은 본명이 무쯔히또였지 메이지가 아니다. 1868년에 밝은정치를 한다면서 년호를 메이지(明治)라 봉하였고 유신(維新)이 일어나 메이지정부가 서게 되니 그도 메이지천황이라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천황의 최고고문회의인 추밀원의 의장이 되고보니 지위가 놀라운 것 만큼 할 일도 적잖고 중요해서 결코 총리대신으로 있기만 편한것은 아니였다.
오늘 그와 주요한 문제 세가지를 놓고 구체적인 연구가 있었는데 하나는 이또오 히로부미가 출마하여 조선정부와 경부선부설 특허를 받아내는것이고 하나는 목전의 경제공황을 여하히 이겨내는가 하는 문제고 다른 또 다른하나는 야마가따 아리또모를 다시 수상자리에 올려놓는 문제였다. 야마가따 아리또모는 이미 한차례(1889ㅡ1891) 수상을 담임한 경력이 있는 사람이다. 한데 일본 실업계는 메이지 15년(1882)에도 메이지 23년(1890)에도 또 재작년그러께인 메이지 30년(1897)에도 경제공황이 생겨서 심한 곤난을 겪고있는데 따져보면 여기에는 그의 책임도 적지 않은 것이다.
대일본황군(大日本皇軍) 창시자의 한 사람이며 일본의 군사와 외교를 유기적으로 결합시킨 "일본특유의 군사외교" 창시자인 그는 1890년 12월, 제1기 제국회의 때 수상으로 취임한 이래 처음으로 "시정방침연설"을 했었는데 그는 그 연설에서 국가의 독립자위를 덮어줄수 있는 길은 두가지인바 하나는 주권수위선(主權守衛線)이고 다른 하나는 리익보호선(利益保護線)이였다, 주권수위선이 곧 국가를 강성하게 하는것이고 리익보호선이 곧 주권선의 안위(安危)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구역을 장악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국가의 독립을 보호함에 근근히 주권을 보호하는데만 그쳐셔야 되겠는가 리익선도 보호해야한다고 강조했던 것이다.
갑오중일전쟁당시 대본영감군 겸 륙군대신이였던 그는 "리익선확대"를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나온 사람이다. 하여 전쟁준비에 박차를 가하게 된건데 일본은 군비를 너무 확장하다보니 경제적 위기를 조성시켜 지금 이꼴로 헤여나기 어려운 궁지에 몰려든 것이다.
네가 책임지고 일쿼세워보라, 오늘 이또오 히로부미와 천황은 이렇게 의사가 모여져 년말쯤에 가서 천황이 조서를 내려 그를 수상자리에 올려놓기로 둘사이에 내정(內定)이 된 것이다.
이노우에 가오루가 추밀원에 왔다. 공무가 아닐때도 가끔 오군하는 사람이다.
《들어갑시다, 반가운 친구!》
이또오 히로부미는 차라리 그와 한담이나 나누는 것이 더 좋은 휴식이라 이럴 때 찾아온 것이 무척 반가왔다.
《방금 오다가 볼라니 젊은 각시 하나가 돌다리건너 저편으로 가는 것이 어쩌면....》
이노우에 가오루는 뒷말을 채 잇지 못하고 사려버린다.
《친구, 아직두 미찌꼬를 잊지 못해서 그럽니까, 이젠 딴세상 사람이 된걸 갖구서.》
이또오 히로부미는 친구의 목청이 명랑치 못한 것을 발견하고 안색을 살피였다.
《하긴 잊어야겠는데 고운 녀자만 보면 그 애의 몰골이 자꾸 눈에 삼삼히 밟혀오니 원!...》
이노우에 가오루는 오늘도 이러면서 양딸 미찌꼬를 환국(還國) 할 때 데리고왔더라면 이국타향에서 쓸쓸하게 민비시해사건에 말려들지도 자결하지도 않았을텐데 하면서 뒤늦은 후회를 몹시했다. 그는 고이자래운 양딸을 잃은건 자기탓이라 자책한지 오랜데 아직도 그 자책이 사라지지 않는 모양이다.
《의장님이 잡지를 보고있었구려. 어떤가, 이 잡지에 실리는 글들이?》
이노우에 가오루가 상우에서 "太陽"잡지를 손에 들고 장을 번지면서 묻는 말이였다.
《다는 보지 않았는데 <贊日本主義>가 맘에 드는구만. 친구도 한번 보시지, 색정소설책만 들지 말고. 정치가는 정치에 유관한 글을 더 관심해야지요. 안그렇습니까?》
가벼운 충고였다.
정치를 하는 사람이, 그것도 국가정부의 거물급인물이 황색소설에 취미를 붙이거나 정부(情婦)를 두고있다면 다른 나라같으면 그것이 패덕적인 행위로 여겨져 십중팔구는 웃음이나 비난을 사겠지만 일본은 그렇지 않았다. 일본 고대의 녀류작가 세이쇼 나공이 쓴 <<침초자(枕草子)>> 라는 책을 보면 거기 제61절에는 한쌍의 남녀가 여름과 겨울철에 만나 서로 어울리는 장면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었다.
여름에 사랑하는 이와의 만남은 특별한 재미가 있었다. 쥐꼬리만한 밤이 너무나 빨리 지나가서 눈을 붙여 볼 새도 없었다. 그리고 추운 겨울밤 사랑하는 이의 품속에 파고 들어 똑딱거리는 시계소리를 듣노라면 그것이 아래서 나는 소리와 절주를 맞춰주는 것만같아서 과연 재미있다." 그야말로 적라라하게 묘사한 성교장면이다. 일본은 무사도(武士道)시대부터 중국 유가의 강상론리리념(綱常論理理念)을 받아들였지만 개방된 성문화의 전통만은 여전히 보전하고 있는 것이다. 막부시대의 학자들은 일본의 리론도덕에서의 근본이 성(誠)이지 경(敬)이 아니라면서 내심발로를 억제하지 않는 것이 바로 성(誠)인바 이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행동을 진실하게 취하는것이라 했다. 이것은 중국의 "천리(天理)는 존재하고 인욕(人欲)은 멸한다."는 리론과는 아주 상반되는 것이다. 일본 정토진종(?土眞宗)의 창시자는 공개적으로 승려가 각시를 얻어 장가 갈 수 있다면서 그 자신이 시범을 보였는바 일생에 선후 두차례 결혼하고 아들 넷에 딸 셋을 보았고 다른 한 승려는 장가를 다섯 번이나 가서 자식을 27을 본 것이다. 한즉 《불식인간연화(不食人間煙火)》라는 불교마저도 일본에 들어와서는 개량되여 세속적이고도 인정미가 있는 종교로 변해버리는 것이다.
그러니 이또오도 여자를 희롱하기 좋아하는 색마라고 소문이 난건 자연스러운 일이요 그의 그따위 충고가 실은 가치가 없는 것이였다.
《이또오의장께서는 몰리해를 하는구먼. 소설은 정치가 없나? 자네가 류학갈 때 배우에서 <다섯호색녀인>을 단숨에 다 읽구서는 나보구 뭐라했던가. 소설이 염세적이긴 해두 정치는 있다구하지를 않았는가. 그러던 분이...난 요즘 <구름>을 읽었네. 젊은 작가가 쓴 장편인데 정부의 하급관리노릇을 하는 주인공이 부지런히 일하면서 량심적으로 살려구 애썼건만 남한테 사랑하는 녀잘 빼앗기구 관직마저 떼우는 생활비극을 그렸소. 사실주의지. 읽고나니 우리가 이 사회를 더 책임져야겠다는 생각이 들데. 》
《난 이젠 환갑을 넘긴 외무대신 어른이 애정소설만 뒤지다가는 그에 머리가 어지럽혀져 국사를 못해낼까봐 그러는거우다.》
《일깨워줘서 감사하외다.》
이노우에 가오루는 친구의 무람없는 충고를 웃음으로 받아주면서 눈길을 잡지에다 다시박았다.
《다까야마 씀 <일본주의를 찬미한다>라.... 제목이 직감적이군!》
일본에서는 갑오전쟁직후부터 정교사성원들의 주장이 갈라지고 있었다. 국수주의(國粹主義)사조가 점점 력사무대에서 퇴출하면서 다까야마를 대표로 하는 일본주의가 대두하기 시작한 것이다. 다까야마는 지난해에 잡지에가 이 글을 발표함과 동시에 대일본협회(大日本協會)라는 정치단체를 조직하여 자체의 기관지로"일본주의"라는 간물까지 발행하고 있었다. 다까야마 등은 정교사가 숭양미외(崇洋媚外)를 반성하는 태도면에서는 공헌이 있다고 볼수 있지만 국수(國粹), 국민성(國民性) 등 개념상에서는 의연히 이른바 개국신화(開國神話)니 건국정신(建國精神)이니 국가지상(國家至上)이니 군민일가(君民一家)이니 하는 낡은 곡조에 매달려있으면서 자기들의 일본주의는 국수를 우경으로 만들지 않는다고 했다. 다까야마외에도 이노우에 데찌지로오, 기무라 오오다로 등이 적극적인 활약분자였다.
《침주측반천범과(?舟側畔千帆過), 병수전두만목춘(病樹前頭萬木春)》
이노우에 가오루가 중국성구 하나를 뇌이였다.
그를 번역하면
《가라앉은 배 옆으로 천척의 배가 지나고 병든 나무앞머리에서 만그루의 나무가 봄을 알리누나》라는 뜻이다.
《우리가 아직은 가라앉은 배가 아니지요, 병들어 쓰러진 고목도 아니구. 국가는 우리를 수요하고 아직 해야 할 일들이 많습니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예나 다름없이 패기있는 소리를 했다.
이노우에 가오루는 신구(新舊)의 교체는 필연이라면서 그것이 되도록 화평적인 교체로 되여준다면 좋으련만 그렇지 않고 거의가 폭력에 의하니 력사에 기록되는 장면들이 참혹하다면서 혁명대상이 되는 자의 인생은 다가 끝은 비극이 아닌가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메이지유신을 보라했다.
메이지유신 역시 일본에서는 한차례 폭력에 의한 불철저한 자산계급혁명이였다.
메이지유신 이전의 봉건적인 일본 통치계급은 장군, 다이묘, 사무라이 및 천황, 황족공경들로 구성됐었는데 천황은 명색뿐 아무런 권리도 없고 실권은 모두 장군 도꾸가와 게이끼에게 장악되여 있었다. 행정기구는 에도(오늘의 도오꾜오)에 설치되였으며 바꾸후라 불렀다. 통치계급들은 농민은 참깨와 같아《짤수록 기름이 더 나온다》고 공공연히 언명하였다. 바꾸후는 또 마을마다《5인조》를 편성하고는 그중 한사람이라도 공물을 바치지 못하거나 죄를 범하면 그 조직의 사람들이 모두 련루되게 하는 수단으로 농민들에 대한 통치를 강화하려 시도했다. 가혹간 봉건착취며 통치였다!
착취와 압박이 심하니 반항이 있기마련이라 1865~1869년 이 5년기간에만도 400여차의 폭동과 기의가 발생하였다. 1866년에 쌀가격이 폭등함에 따라 도시시민들은 파괴적폭동을 일으켰다. 폭동은 효고로부터 시작하여 니시노마야를 지나 오사까에 까지 확대되였고 얼마후에는 깅끼와 도까이 각지를 휩쓸었으며 지어 바꾸후의 소재지인 에도에 까지 파급되였다.
투쟁의 물결은 점점 더 세차게 파도쳤다. 1867년 10월 락엽이 지는 때였다. 나고야로부터 《이세대신궁의 상공에서 신부(神符)가 날아내려 세계에는 곧 거대한 변화가 일어나게 될 것이다.》라는 신비한 전설이 전해졌다. 그리하여 남녀로소가 모두 거리에 몰려 나가 거문고를 타고 북과 꽹가리를 울리며 이러한 민가를 불렀다.
신세대가 변했노라!
불경기가 호경기로 되었노라!
.......... 좋구나! 좋구나!
사람들은 가지각색의 옷들을 차려입고 주야불문 떼지어 거리로 나갔다. 화산같이 폭발한 분노를 누르기 힘들었다. 그들은 평소에 민중을 억압하던 부자집을 만나기만 하면 몰려들어가 모조리 박살냈다.
반바꾸후 비밀조직이 생겨났고 이 조직은 천황으로부터 바꾸후를 토벌하라는 비밀조서를 받았다.
1868년 1월 3일에 무력적바꾸후타도파가 궁전정변을 일으키고 무쯔히또가 출면하여 왕정복고를 선포하였으며 새 메이지정권은 바꾸후의 모든 권리를 박탈함과 동시에 도꾸가와 게이끼에게 령지와 재산을 내놓으라고 명령했다. 이 소식을 들은 바꾸후측에서는 최후발악을 하였다. 6일 밤중에 도꾸가와 게이끼는 교또에서 남몰래 빠져나와 오사까로 도망하여 그곳에서 병력을 집결한 다음 역습할 준비를 하였다. 이리하여 공개적인 내전이 폭발하였던 것이고 1년좌우의 피흘리는 치렬한 대결끝에 마침내 바꾸후파들을 섬멸하고 메이지정권은 공고하게 된 것이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폭력은 정권을 잡기 위해서도 정권을 보호하기 위해서도 필요하겠지만 정권을 이미 잡은 후에는 그래도 폭력보다 무마책을 우선으로 놓는 것이 통치자의 명지한 수완이 아니겠는가했다.
《하긴 그래야지만 친구도 알다싶이 어디 그렇게 돼줘야... 안그렇소?》
이노우에 가오루의 말이다.
《내가 조선정부를 구슬려 경부선부설권을 얻고자 이제 곧 현해탄을 건너가게 되는데 친구생각에는 이번 걸음에 과연 뜻을 이룬다면 우리의 그 <용감한 삼걸>이 또 무엇이라 주장을 들고나올 것 같습니까?》
이또오 히로부미가 물는 말이였다.
《거야 불보듯 빤하지. <빨리 철길을 놓아라, 그리구 빨리 경의선경영권까지 앗아내라, 그것까지 내것이 되면 우리 일본군은 하루빨리 만주까지 진군을 하리라!>고 웨치겠지. 다른 무슨 소리를 할가, 안그렇소?》
《맞습니다. 바로 그럴겁니다. 이제 그네들의 광용(狂勇)을 맟추노라면 기진맥진해 쓰러질겁니다. 물론 나역시 바라는것이긴 하지만.》
이또오 히로부미가 지적한 용감한 삼걸(三杰)이란 단행론(斷行論)의 주창자들인 가쯔라 다로오, 야마가따 아리또모, 데라우찌 마사다께 이 세 군벌을 말한다. 이 셋은 지금도 계속 서둘러 한국을 병합해야 한다고 견결히 주장하고 있거니와 무력으로 동양패권을 빨리잡아보려고 조급증을 발로하고 있었다. 물론 이또오 히로부미도 그걸 꿈꾸지만 그것은 숨가뿐 일이였다.
《의장은 무마책으로 달래볼가구 궁리하는거요?.... 조선민족을 그저 다 순진하게만 보면야 그건 료해부족한 자의 안목일거구 무력적폭력을 조급히 쓰자고 든다면 그건 또 분별없는 자의 미친 짓일거요. 안그렇소? 지금 조선에서 서방세력이 강해지고있는 사실을 념두에 둘 때 머리를 잘 써야지. 나는 일본에서 이제 또 제 조급증을 진정못하고 솟구치는 밸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제 목숨을 끊는 두번째 사이고오가 출현하는걸 원치않소.》
사이고오 다까모리는 일본의 정치가이며 군인이고 메이지유신때의 공신이다. 그는 1873년 대원군의 강경한 배일, 쇄국정책에 감정이 좋지 않아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하였다. 그랬다가 내치우선파(內治優先派)에 좌절되여 밀리게 되니 관직을 버리고 고향 가고시마에 돌아가 반란을 일으켰고 그것이 패하니 자결하고말았던 것이다. 사이고는 죽었지만 그의 주장은 지어 일본국민들 속에서까지 널리 퍼져 점점 더 성행하고있는 판이다.
이또오 히로부미나 이노우에 가오루는 지금 침착하게 시기를 찾고있다. 마치 구렁이같이길다란 제 몸뚱이에 감긴 먹이가 숨지기를 기다리듯이.
이틑날. 도오꾜오 외무부 관저.
이또오 히로부미는 널찍한 외무대신의 방에다 발을 들여놓았다.
방안에는 벌써 그먼저 다른사람 둘이 와있었다. 그들은 벽에 걸려있는 지도를 마주하고 열심히 들여다보고있다보니 사람이 온것도 모르고 있었다.
이 관저의 주인이며 외무대신인 이노우에 가오루는 기다리는 중이라면서 어제 너무늦도록 잡담을 해서 피곤하지 않는가고 했다.
《피곤하다는게 뭡니까. 그걸 푸는 제일 좋은 방법이 그래도 친구와 같이 한담으로 지내는것인걸요.》
《오, 그렇소! 기실 나도 휴식을 하누라 거기루 간거였네.》
둘은 말해놓고 웃었다.
지도에 정신팔렸던 두 사람은 그제야 몸을 돌린다. 한 사람은 야마가따 아리또모고 다른 한 사람은 면목이 그리 익숙치 않은 50대의 소장군장이였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그가 누군지 아리숭했지만 그는 그를 인츰알아보고 공경과 숭배심이 가득한 태도로 경례하면서 자기를 소개했다.
《의장각하! 저는 하세가와 요시미찌 소장입니다. 지난해 대일본황군절기념일 때 영광스럽게 각하의 접견을 받은바있습니다.》
《오, 그렇지!》
《스므살 때 오사까병료를 취학했네. 실력있는 장군일세.》
야마가따 아리또모가 덛붙여 그를 소개했다. 큰산을 업었다. 잘 아는걸 보니 그의 등을 타고 발탁하는 모양이다.
그에게 던져주는 첫인상이 좋았다. 건장하고 단단하고 박식해보이는 그가 맘에 들었다. 하여 이또오 히로부미는 몇마디 좋은 말로 소장의 장래를 축복해주었다.
그들 넷은 벽에 걸어놓은 커다란 지도앞으로 갔다. 그것은 방금 새로 그린 조선의 교통지도였는데 공력을 들여 세밀하게 만드노라했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그 지도를 보니 외무대신이 된 이래 사업실적을 현저하게 올리고있는 옛친구를 당장 이 자리에서 표양하고싶은 충동까지 일었다.
한데 그는 자기가 이제 조선땅에 오르기 위해서는 건너야만 할 파도사나운 현해탄을 다시보니 가슴이 섬찍해나면서 기분이 가라앉았다.
현해탄은 과연 징조가 좋지 못한 바다였다.
일본렬도를 놓고 보면 천연적인 자연경물이 사람을 기쁘게 하면서 복잡한 지세가 또한 감추지 못할 우
려를 던져주고있는 것이다. 지리학상 세계적인 존재로 인정하고있는 네가지 종류의 형식을 다 구비하고있는 것이 일본이였다. 무엇보다 태평양을 두르는 단렬대(斷裂帶) 즉 지대구조선(地帶構造線)이 일본을 가르면서 이 국토로 하여금 지리적인 류동성을 갖게 하고있는 것이다. 이 지대구조선(地帶構造線)은 매우 온정되지 않아 열흔(裂痕)은 지금도 약간씩 움직이는 상태였다. 총적으로 말해 일본땅은 한측이 일본해에 가라앉으면서 태평양쪽으로 천천히 옮겨지고 있었다. 일본은 아무때건 완전 침몰되고야 말 것인바 형상적으로 묘사할 것 같으면 천천히 가라앉고있는 하나의 거대한 함선과 같은 것이다. 과연 무서운 일이 아닐수 없다!
자고로 일본사람은 이같이 복잡한 환경속에서 살아왔고 살아가야하는 민족이였다. 그들은 천부적인 자연의 혜택(경치)을 입으면서 한면으로는 또 화산, 지진, 화재, 산사태와 폭풍의 습격도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일본 사람들은 두가지의 복잡한 즉 자연을 숭배하고 자연을 두려워하는 모순되는 감정을 소유하고있는 것이다. 자연재해를 막자고 보니 렬도에 살고있는 모든 대화민족(大和民族)은 정신적 단합이 필요하고 이로부터 자연히 살아도 죽어도 함께라는 생명일체감(生命一體感)을 갖게되는 것이다.
《자 보게나, 이게 우리 쓰찌마이고 그 바로 마즌켠이 곧바로 부산이 아닌가. 그 북쪽것이 대구, 거기서 서북쪽으로 가면서 금천, 대전.... 서울까지 철로선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놓이게 되느냐는 다음의 일이지만 먼저는 내가 이쯤으로 초도를 잡아놓은건데 의장께서 잘 보고서.... 》
이노우에 가오루는 이쯤 설명을 마치였다.
《우리가 경부선을 놓은 다음에는.... 존경하는 의장각하! 제가 한마디 말씀드려도 될가요. 저는 각하께서 출마하시기만 하면 성공못할 일이 없는줄로 압니다. 저의 생각은 경부선이 다 부설된 다음에 우리는 제 2보로 저기 압록강이나 두만강까지 뻗는 철로도를....》
하세가와 요시미찌가 이또오 히로부미를 향해 조심스레 말을 꺼내놓고 잊지 못했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그를 다시금 누박아 볼 뿐 말이 없었다. 무엄스레 덥벼친다고 힐난하는 빛이 아니였다. 웃음기 그믈그믈 피여오르는걸 보면
《당연하지 그 철도마저 우리의 장악하에 들어오도록 해야하구말구 서울부터 저 북쪽 압록강까지의 철로를 말이야. 그건 경의선이지. 이제 그 경이선끝머리의 압록강에다 철교를 가로 놓아서 만주의 철로를 이어놓는다면 명맥이 쭉 상통하게 된단말이야.》하고 있었다.
드디여 일본의 국책으로 정식 상정한 이것은 오래전부터 침략야심과 함께 그의 배속에 잉태하였던 것였다.
《우리의 계획이 실현될 날은 올것이다! 만리파도를 헤가르고 나라의 위력을 사방에 떨치게 하자!》
야마가따 아리또모는 기분이 도도하여 명치정부가 건립될 때 절규했던 구호를 이 자리에서 한번다시 불렀다. 환갑이 된 그의 희슥희슥한 머리를 어찌나 알심들여 다듬었는지 반들반들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전체 일본땅이 정말 바다밑에 가라앉는 날이면 너의 후손도 나의 후손도 아니 전 야마도민족이 나라없는 슬픈 민족으로 되고말것이다. 그야말로 참혹한 비운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마땅이 후대를 위하는 장원한 타산에서 일본의 둘째고향을 마련해야 하고 보호지를 구해두어야 할 것이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그 누구든 일본은 가라앉는 함선과 같다는 말을 입밖에 내는걸 허용치 않으면서 자신있게 한마디 부르짖었다.
《우리는 부산으로부터 시작해서 멀지 않은 장래에 만주까지 뻗어 들어갈 것이다. 그때면 철도가 바로 대일본제국을 살찌우는 공급선이 되어서 복무를 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조선과 만주를 짜면 짤수록 기름이 나오는 참깨로 만들고야말것이다.》
그는 전에 자기가 그처럼 증오해온 바꾸후가 자국민을 착취할 때 처럼 조선과 만주의 백성들을 착취할 설계를 착실하게 해놓고있었던 것이다.
그의 이러한 말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흥심을 대단히 돋구게 했다.
야마가따 아리또모와 하세가와 요시미찌가 돌아가자 방안에는 두친구만 남았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그들의 래방의도가 무엇이였는가를 알고싶었지만 그것을 이노우에 가오루와 묻지 않았다. 아무리 친구간이라도 직권을 벗어난 간섭은 삼가해야하는 것이다.
《미쯔바시 곤지로, 이께다 겐지로, 야마다 도모기찌, 시무라 도끼찌라... 이건 웬 명단입니까?》
이또오 히로부미는 외무대신의 탁상우에 버린 듯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종이장을 쥐여 거기에 적혀진 이름들을 일별하고나서 물었다.
《재작년 조선서 의병폭동사건때 똑같은 하루 시각에 실종된 원산전신공부의 명단일세.》
이노우에 가오루는 알려주면서 얼굴에 자못 불쾌한 기색을 지었다.
《이런걸 왜서 외무부까지 올려보낸답니까?》
《그러게말이지. 행방불명이 된지 이태가 된다네. 그런걸 가족들에서 찾아내라는 신소를 올리니 원, 귀찮아서.》
《밥통들! 거기 경찰기구는 뭘하고 령사는 뭘하게?》
《찾느라구했지. 안찾을리있소. 구워먹어버렸는지 찾아도 없으니까 맥을 놓은 꼴인데 기어히 찾아달라니 내 이 외무대신인들.... 》
《난화지맹(難化之氓)이야, 아무렴 그렇다구 이런 것 까지 올리바치다니 원! 우리가 민주를 너무줬군! 어느 존전이라구 감히.... 상소를 하라 부추겨준 자가 있을건데 당장 잡아서 처리하는게 좋겠습니다.》
《이 일은 경무청에 넘겨야지. 그리구 자네의 안전을 위한 보위조치는 잘되여있다니 마음을 놔도 될것같네.》
이또오 히로부미는 국내외의 여러 신문에 공포한 일자지만 로선을 바꾸어 요꼬하마에서 배편으로 떠나 인천에 상륙하여 서울로 들어갔다. 조선에서 아직도 로씨야의 세력이 득세하고 미국이나 프랑스, 영국같은 나라들도 한몫보자고드니 한쪽으로 그들의 저애에 응부하면서 조선정부를 설득해낼만한 사람을 찾다보니 여기로 오는 일이 결국 또다시 이또오 히로부미의 몫이 된 것이다. 조선에 대해서 누구보다 제일 밝은 사람은 그였으니까.
조선은 지금 로씨야와 프랑스의 부당한 요구로 인하여 백성들이 온통 끓고있었다. 로씨야는 외부대신 조병직을 설득하여 목포(木浦)와 진남포(鎭南浦)의 사방 10리안에 있는 섬을 모조리 사려했고 프랑스는 평양에 있는 한 곳과 또 다른 두곳(지명미상)의 채굴권을 프랑스인 경영의 경의철도회사에 허가해 주라했다. 이 내막을 여러 조선 신문들에서 알고는 폭로 규탄하면서 여론을 크게 일으킨 것이다.
철로부설이 우선 표면상 그것처럼 로골적인 략탈이 아니거니와 조선사람들께 교통편리를 도모하는것이기에 민중의 반대를 크게 불러일으키지 않으리라 여겨졌다. 문제는 로씨야가 간섭해나설때의 대책이였다.
서울 천연정 청수관.
고종 8년(1871)이였다. 하나부사 요시따가 공사관서기생으로 조선에 와 해군의장대의 호위를 받으면서 임금을 배견하고는 신임장을 봉정한 그때로부터 조선주재 일본공사관으로 정해져 일본국기가 조선상공에 휘날리기 시작한 청수관은 도오꾜오에서 획책된, 조선을 통제하고 장악하기 위한 일련의 책략과 지령을 집행하는 작전지휘부요 주요거점이며 보루였던 것이다.
고무라 주따로오공사가 우선 조선의 현황에 대해서 상세하게 회보했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이미 장악하고있는 조선의 친로파요인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정황을 물었다. 고무라 주따로오는 이범진이 제일 완고하고 리완용은 끌어당길수 있다고 보고했다.
지금으로부터 박차를 가해서 친일파를 적극 길러야 한다. 첫작업을 미우라가 완성했으니 둘째작업은 고무라 네가 완성해야한다고 단단히 일러놓고나서 이또오 히로부미는 조선정부를 구슬려 경부선부설권을 얻어내고야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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