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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장편《반도의 혈》
28.
이틑날. 서울역전 동춘루에서 하루밤을 보낸 함경도내기 열혈의 젊은이들은 아침을 먹고나서 인츰 려관을 나와 곧바로 종로에 가 거기 어딘가 약속해 놓은 지점에서 신채호를 다시만났다. 피차 의기상투(意氣相投)해서 환난을 같이하자 맘먹으니 자연히 할 말이 많아 이같이 다시보게 된 그들이였다.
국문체의 자그마한 신문에 실린 문장 두편이 2천만을 크게 울려놓을줄이야 뉘알았으랴!
《황성신문(皇城新聞)이 온 겨례를 깨우쳤으니 후세에 전할만한 공을 세웠다해도 과언이 아릴거야. 한데 위험불구하고 필봉을 휘둘렀다가 일경에 잡혀간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되였는가?》
서일은 신채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아직 구속중입니다. 요즘 대한매일신보에 그에 대한 보도가 나갔는데 서선생은 그걸 못본모양이구만.》
《못봤소. 여기로 바삐오다보니....》
이에 신채호가 알려주었다.
《23일날이였습니다. 구속당한 경무청의 일본인 경찰고문이 장지연선생보고 너는 어째서 검열을 받지 않고 신문을 발행하여 치안을 방해케 하느냐고 물었지요. 그래서 장선생이 소위 치안방해는 오소불지(吾所不知)라. 대저국(大抵國)이 유(有)한 연후에 치안여부가 유할것이니 전즉무국의(全卽無國矣)라 치안은 하론(何論)가. 오(吾)가 병필(秉筆) 7, 8년에 세상의 공론을 주장하다가 금일 국가가 없어지게 된 관계사실을 있는 그대로 알려서 국민이 깨닫게한것인데 내가 쓴 구절구절 그 어디가 사실과 맞지 않은 곳이 있는가. 소위 치안방해는 일본치안의 방해가 유(有)하다 함이냐 하고 항변하니 일인 고문도 대답을 못하더랍니다.》
그는 황성신문(皇城新聞)이 무기정간되자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가 적극 나서서 한국언론의 입장을 옹호하고있는 반면에 서울에 있는 일인경영의 신문 또는 한인 경영의 친일지(親日紙), 례를 들면 대한일보(大韓日報)같은 것은 오히려 황성신문(皇城新聞)을 공박하고 있다면서 격분하는것이였다. 그러면서 신채호는 이제 황성신문(皇城新聞)이 속히 복간되지 않으면 자기는 다른 신문사에 들어가서라도 장지연선생을 본받아 그이처럼 필봉을 휘두르리라 결심을 내리기까지 했다.
서일은 그가 정직 개결하고 패기있는 젊은이여서 무척 맘들었다.
이날은 전날모양으로 깨여진 기와장을 뿌리거나 총을 쏘는 정도의 과격한 마찰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도끼메고 상소를 올라오는 사람의 행렬은 끊지 않았다. 종로에는 날마다 시민이 군데군데 많이 모여들었다. 그러자 총검으로 전신을 무장한 경찰과 헌병이 나서서 모인 군중들을 흩어지게 하느라 땀을 뺐다. 폭동이라도 일어날까봐 취하는 방비책이였던 것이다.
그들은 함께 경희궁(慶熙宮)이 있는 서쪽방향으로 가다가 십자로에 이르러 북으로 꺾어 세종로에 들어섰다. 그런데 거기 경복궁쪽은 아예 통행금지라 경계가 삼엄하여 몇발짝 못가서 제지당했다. 그들은 하는 수 없이 몸을 돌려 남대문쪽을 향해서 걸음을 놓기시작했다.
덕수궁(德壽宮)앞을 지나면서 볼라니 그사이 흰옷을 입은 유생, 양반들과 경찰지간에 밀거니 당기거니 몸싸움을 벌리고 있었다. 보아하니 이쪽에서 상소를 올리려는 것을 경찰들이 완력으로 금지시키다나니 그런 장면이 출현된것 같았다.
제땅에서 제나라 황제께 상소도 맘대로 못올리니 이런 놈의 일이 어디있는가?....국가의 치욕과 민족의 치욕이 이 지경에 이르른걸 생각하면 너무도 통탄하여 복장이 터질것만같았다.
《저 빌어먹을 쪽발이들을 언제면 다 쫓아낼가.》
서일은 격분하고 피곤했다. 광채를 잃은 그의 눈에서는 피발이 일어섯다.
《아, 나라 땅은 오랑캐의 발에 짓밟히고 흑운은 하늘을 덮었도다!》
그는 그쪽을 아느새 바라보다가 한마디 탄식을 뽑았다.
《우리는 어쩌다나니 이 지경에 이르렀나?》
기호역시 비감을 토해냈다.
그러는것을 보고 신채호가 제 생각을 피력했다.
《원인이 다른데있는게 아니야. 여지껏 글만 숭상하고 상무를 홀시한데 있지. 굶주린 승냥이떼 문을 긁으며 울어댔건만 그 소리를 못들은체 무관하고 독경만 했으니 변을 당할 수밖에. 안그렇소?》
《신선생의 그 말씀 과연 옳은 것 같소! 이게 다 문약(文弱)이 가져온 결과가 아니고 뭐요. 국민 모두가 량반이 된들 대체 무슨 소용이 있겠소. 글을 잘 읽으면 똑똑해진다면서 그것만을 지고지상인줄로 알고 무예를 닦을 념은 전혀 하지도 않았으니 한심한 바보짓을 했지. 그통에 국력은 약할대로 약해진게 아니겠소. 울바자가 든든치 못하면 이웃집의 개가 업수히 여기고 제멋대로 드나들기 마련이야. 그렇다는걸 몰랐던가? 우리는 승양이를 때려 잡을 힘도 없다보니 이 지경에 이르었단말이요. 과연 한심하지. 일본은 어떠했는가. 그자들은 배속에 온통 침략성만 키우면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려왔단말이요.》
성묵이 하는 말이였다.
《바로 그러했지!》
서일은 동감하면서 그가하려는 말을 이어했다.
《몽매했던 일본은 옛적부터 한 해협을 사이두고있는 조선을 리상국으로 여기고 공경하면서 음식도 의복도 지어는 궁실의 제도며 천문이며 의학이며 유교와 불교에 이르기까지 다 받아들여 배우고 본따지 않았는가. 그러면서도 략탈을 천직으로 삼는 고약한 버릇은 고치지 않고 잔뜩 자래우면서 배짱이 커져 오늘에 이르러서는 그것을 국성(國性)으로 까지 키웠으니 우환이 아니겠소.》
《그 말이 맞아. 일본의 침략성은 그 민족자체는 물론 세상의 우환거리지.》
신채호의 말이였다.
《임진란을 겪고 그것을 깨달았음에도 우리는 여적지 어떻게 해왔던가?....왜는 본성이 잔인해서 살인략탈을 도락으로 삼는다는것을 번연히 알면서....그를 대처해서 정신을 차렸더라면, 국민이 각성하여 문약한 습성을 버렸더라면, 그리고 그 기초에서 상무의 기풍을 수립하였더라면 오늘에 이르러 이같이 참혹한 지경에 까지는 이르지 않았을거요. 안그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가를 보란말이야. 종족이 서로 기시하고 국가와 국가지간에 대립하는 국면이 이루어져 그것이 극에 달하면 그저 전쟁으로 해결책을 찾자고 드는판인데. 안그렇소? 승자는 무조건 주인이 되고 패자는 무조건 노예로 되어버리는 판인데. 안그렇소? 우리 민족은 그저....》
성묵이 하는 말이였다.
《우리 민족은 그저 문약하기만했던가? 그런건 아니였지.》
서일은 그의 말을 시정했다.
後漢書에:
<<高句麗人 性凶急有氣力 習戰鬪>>
新唐書에:
<<高句麗 衢側悉?嚴屋 號?堂 子弟未婚者曹處 誦經習射.>>
高麗史에:
<<顯宗二年 四品以上 年六十未滿者 每暇日習射 各州鎭 每月6次 合官民習射>>
이상의 력사기재만 봐도 조선민족은 결코 지금같이 무맥하지는 않았다. 고구려때는 국법에 의하여 조직적으로 무예를 련습시켜 온 것이다. 지어 고구려때의 군제는 농병(農兵)일치로서 농민이 농사일을 하다가도 손에 무장만 들면 나가 싸울 수 있도록 돼있은것이다. 상무(尙武)의 기백이 농후하지 않았는가!
서일은 이어서 제 속맘을 피력했다.
《한교(韓嶠)의 습련지남(習練指南)을 봐도 알수 있는바 무적능력(無敵能力)의 예비는 국민 전체가 군사를 일과로 또는 천직으로 삼은데 있은것이였소. 이조시대에 들어와서도 한때는 그랬지. 선조때 훈련도감을 설치하고 한교가 육기를 가르쳤던거요. 인조때는 무예청을 설치하고 나라에서 무예전문가를 양성하구.... 오늘 와 보면 그건 다 잘한 일이였지. 안그런가?.... 옛날 고구려는 어찌하여 졸본의 한 부락에서 무장을 일으켜 여러 나라를 정복하고 700여년간이나 동방에 웅거하여 혁혁한 패업을 유지할수 있었는가?... 그게 다 상무의 결과가 아닐가!》
《바로 그러하지!》
신채호가 서일의 견해를 긍정하면서 뒤를 이었다.
《그런데 후세에 이르러서는 문치를 숭상하고 무예는 너무나 소홀히 하였단말이요. 무반은 사대부축에 들지도 못했다니 웃기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불공평해도 한심하게 불공평했지. 사대부들은 날마타 태평가나 부르면서 임금에게 아첨하고 권세로 백성을 학대할줄이나 알았지 그 이상 더 안게 무엇이였나말입니다. 소위 국민의 사표라는 상층인물들이 주자학에 빠져 무예를 비천한 재주라 비난하면서 사림(士林)의 언론마저 탄압해왔으니 국방이 어떤 꼴로 되었는가?!》
그도 정부의 지난 처사를 생각하고는 한심하여 한숨쉬였다.
돌아다녀봣자 다리맥만 풀릴것이였다. 려관에 가 앉아서 이야기함만 좋을 것 같지 않았다. 서일이 제의하자 친구들은 그러자면서 신채호를 데리고 주숙을 정해놓은 동춘루(東春樓)를 향해 걸음을 놓았다.
역전광장에도 사람이 많았다.
그들이 역전광장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볼라니 어디로 떠나가는지 괴나리보짐을 한손에 달랑 든 젊은 아낙네가 여러 객들의 앞에서 어제 자기가 친히 목격한바를 얘기하고 있었다. 그녀가 하는 얘기의 내용인즉 대개 이러한것이였다.
군부대신 이근택이 이번조약에 솔선 승낙해놓고는 집에 돌아가서는 제 식솔들 앞에서 자랑삼아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오조약체결이 성공하게 되었으니 이제는 부귀영화를 누리게 됐다.》
그 소리를 이근택 며느리의 교전비로 따라 온 소녀종이 듣고서 큰소리로 꾸짖었던 것이다.
《이 만번 죽어도 아깝잖은 역전놈아, 그것도 자랑이라고 말하는거냐? 내가 너같이 더러운 놈의 집에서 종노릇을 해온게 부끄럽다.》
그러자 이근택은 소녀종이 무엄스레 군다고 란폭하게 구타하려들었다.
《이 매국놈이 바른말을 한다고 나를 죽이려해요!》
소녀종은 밖으로 달려나오며 소리질렀다.
그러자 이근택의 아들이 뒤쫓아 나와 그 소녀종을 때려 빈사의 지경에 이르게 만들어놓은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서야 분노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있으랴.
《역적놈들을 죽여치워야 한다, 역적놈들을!》
누군가는 치를 떨면서 웨치였다.
누군들 증오하지 않겠는가. 을사5적(乙巳五賊)에게 죽음을 주자는 자가 그 한사람뿐이 아니였다. 한데 누가 나서서 감히 먼저 손을 쓸건가?....
조선에 용사가 없는 것이 아니였다. 선지선각자들은 벌써부터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바로 세워보려고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었으니 라철(羅喆)역시 그러한 우국지사(憂國志士)중의 한 사람이였다!
라철이란 그의 자(字)요 초명(初名)은 인영(寅永)이며 호는 홍암(弘巖)이다. 그는 1863년 12월 2일생으로서 고향은 전남 낙안군 남성면 금곡촌. 그는 한학자(漢學者) 용집(龍集)의 아들로 태여났다.
라철이 태여나던 해면 바로 이씨조선의 마지막 임금이며 운명의 황제인 대원군의 둘째아들이 겨우 12세로 왕위에 등극하던 해이기도 하였다. 라철이 점차 자라나서 29세의 나이에 문과(文科)에 급제할 때 까지의 기간중에도 병인양요, 임오군변, 갑신정변 등 내우외환(內憂外患)이 겹쳐진 소용돌이가 멎지 않았다.
初習江南岸 更飛漢北雲 珠樓千萬戶 未得一樑春
이것은 약관시절 청운에 뜻을 두고 서울에 머물면서 과업(科業)에 힘쓸 즈음 세상인품이 랭박(冷薄)함을 풍자하여 지은 시구인데 운양 김윤식대감의 심금을 울린바 되어 마침내 그와 망년지교(忘年之交)를 맺게되였던 것이다.
라철은 그후 문과에 급제함으로써 당국의 발탁(拔擢)으로 벼슬길에 올라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 징세서장(徵稅署長), 훈련원(訓練院) 권지부정자직(權知副正字職)을 맡아 봉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그는 이번 을사조약(乙巳條約)이 늑결(勒結)되려 하자 끓어오르는 분을 참을 수 없어 천추(千秋)의 한을 품고 강도적인 일본과 사투(死鬪)하려고 관직마저 버리고 나선 것이다.
쓰찌마해엽에서 발찍함대마저 일군에 격파됨으로 하여 로일전쟁은 승패가 이미 결정되여가고있던 어느날이였다. 라철은 자기보다 두 살아래요 같은 량반출신이며 주사(主事)인 친구 오기호(吳基鎬)와 함께 서울의 중서비파동74통6호 사택을 찾아가 문에다 노크를 했다. 그 사택에 이기(李沂)가 살고있었던 것이다. 주사량지위원(主事量地委員)이였던 이기(李沂)가 지금은 사범학교교관으로 사업하고 있었다. 그는 라철보다 15세 손우로서 서로 면목을 아는 사이였다. 몇 년을 함께 지내는 과정에 라철은 그가 우국충정(憂國衷情)을 지닌 사람임을 보아냈고 지기(知己)로 사귈만하다고 여겨져 이렇게 찾아온거다.
《한가지 중요사를 선생님과 상의하고자합니다.》
라철이 국궁재배하고나서 입을 열어 직방 찾아온 리유를 말했다.
강기있고 정수(精粹)한 중년친구의 살결적은 얼굴빛이 자못 단엄하고 진지해 보이는지라 이기선생은 히슥히슥해진 머리를 기웃거리며 얼굴에 웃음을 지었다.
《어서 말해보오. 무슨일인데?....》
《선생님께서도 보시다십히 동양의 제국가중에 앞서서 선진문물을 흡수하고 그것을 소화한 일본은 서양문명의 장점을 취한 반면에 현대판인 약육강식의 제국주의의 침략적인 근성마저 따라배워 내우외환으로 허덕이고 있는 우리 한국의 약점에 편승하여 잠식지책을 써온게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로일전쟁이 다 끝나가고있습니다. 일본은 이제 전승하고 나면 낙언을 버리고 제 야심을 드러낼것입니다. 그러한즉 멍청히 앉아서 방관시 할 일이 아닌가 봅니다. 대책을 세워야 할게 아니겠습니까?》
라철은 이렇게 오기호(吳基浩)와 함께 이 기(李 沂), 정훈모(鄭薰模). 김인식(金寅植) 등 동지를 얻었다. 그러고는 미국에서 일본수상 가쯔라와 미륙군장관 타이프사이에 맺어질 이른바 가쯔라ㅡ타이프밀약과 포츠마쓰강화조약 체결 직전에 그 밀약과 조약에서 한국문제가 불리하게 처리될 것을 예견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조야(朝野)에 한국의 입장과 일본의 야망을 호소하는 민간외교를 전개하고자했다. 한데 외부(外部)에 려권을 신청했더니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께의 방해로 인하여 그만 좌절되고말았다.
국내에서의 대일항쟁보다 미국에 건너가 일제의 한국침략문제를 미국으로 하여금 막아보게 하려던 그의 첫 시도는 이렇게 실패하고말았던것이다.
하지만 그렇다하여 주저앉고 말 라철이 아니였다.
(저놈들이 아라사와 싸우기 위해 뭐라구 선전포고를 했더냐? <대한제국의 완전독립을 위하여 싸운다>고 부르짖지를 않았는가. 일본이 양언(揚言)한바를 변경못하게 해야한다, 변경못하게 해야하구말구! 그 어떠한 구실이든 대지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는 이렇게 다짐했다.
다섯달전이던 6월의 어느날 이기선생의 자택에 동지들이 다시금 모이였다. 라철, 이기, 오기호, 김인식.... 그들은 모두 폭풍우전야에 밀어닥친 저기압속에서마냥 갑갑함을 느끼고 있었다.
《우리의 도미계획은 수포로 되고말았습니다. 전차 말했듯이 일제는 미국과 그 어떠한 비밀협정을 맺을것이고 그렇게 되면 필경은 한국문제가 불리하게 처리될건 불보듯 빤한것입니다. 흉한의 마수가 목첩에 이르고 있는 이때를 당하여 마땅히 조속한 대책이 요긴하다고 봅니다.》
라철은 여러 사람앞에서 급히 모이게 된 연유를 말했다.
《옳은 말씀이오. 우리는 비상수단을 취해야하오.》
오기호의 말이였다.
《하다면 어떻게 말이요?.... 》
《미국에 못가는바 방향을 돌려 일본으로 가봄이 어떨가?》
오기호가 다시 입을 열고 말했다.
《아마 그것이 상책인것 같습니다. 세분선생님께서 도일하시여 일본정부의 각 대신과 정부요로를 역방해보시죠. 그들에게 우리의 의사를 알리고 여론을 환기시키도록 하셔요. 저의 의견인즉 민간적인 차원에서 계속 외교를 해보자 그겁니다.》
이제 나이 32세, 모인 사람중 제일 어린 김인식(金寅植)의 발언이였다.
《일리가 있는 소리요. 안그렇소, 라선생! 일본 정계의 거물급 인물들을 우리가 직접만나서 그자들의 한국침략을 막아보도록하기요.》
김인식의 제의에 이기선생은 적극찬동이였다.
사실 라철도 언녕 그럴 맘을 먹고있으면서 달리 더좋은 수는 없겠는가 해서 토론에 붙인건데 의견이 하나로 모여지는지라 그렇게 하기로 결정을 지었다. 그들은 이제 일본에 가서 취할 행동에 대해서 진지하게 담론했다. 그러고나서 라철은 오기호, 이기와 함께 이튼날 곧 서울을 떠나 부산에 가 거기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밀항을 했다. 들키면 억류될 수 있으니까.
그들 일행이 일본에 간 다음 방문할 사람은 실제상 대륙침략을 추진한 정계요인인 이또오 히로부미와 오호꾸마 시게노부 그리고 다른 한 사람 모찌스 유다로 였다.
오기호는 일본이 초행이지만 라철이나 이기선생은 일본이 초행길이 아니였거니와 일어도 어느정도 알고있었기에 그리 막막하지 않았다. 여러날만에야 마침내 도꾜오에 이른 그들은 거기 江戶川區 櫻田本鄕町13番地 淸光?에 숙소를 정하고 행장을 풀었다.
이제 로독을 풀고는 일본정부 요로(要路)와 교섭하고 담판을 해야한다.
이틑날 세 사람은 추밀원을 찾아가 거기서 이또오 히로부미를 만났다.
생각밖에 접대가 좋았다. 중등키의 체구가 마른 로인이였다. 백발머리에 염소수염을 자래운 이또오 히로부미는 살결적은 얼굴에 시종 웃음을 바르면서 자기는 애국심을 품고 민간외교에 솔선나선 세 조선정객의 의례적인 방문을 고맙게 여긴다고 태도를 표시했다.
《각하! 일본은 로씨아에 대해 선전포고시 <대한제국의 완전독립을 위하여 싸운다>고 양언한바 있습니다. 전쟁은 대일본제국의 휘황한 승리로 끝나가고있습니다. 저희들은 전승을 진심으로 축하하면서 희망컨대 일본은 그때의 약속을 변경하지 말기를 간곡히 바라는바입니다. 각하께서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우리는....》
라철은 주장을 강력히 피력했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말은 없고 고개만 끄덕이면서 만면에 웃음을 그믈그믈 피여올렸다. 숱많은 흰 눈섶이 가끔 일어서군한다. 대방의 말을 곰곰히 새겨들으면서 받아주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보니 오늘따라 그가 별로 성품이 너그럽고 인자해보이기까지 했다. 그렇다! 로련한 이 정객의 잔인한 속맘을 성실한 그들이 어떻게 보아내랴?.... 사실은 이 시각 이또오 히로부미는 잊지 못할 제 스승 요시다 노리가다의 교시를 감미롭게 상기하고있었던 것이다. 요시다 노리가다(1830ㅡ1859)는 일본 에도시대 말기의 사상가이자 교육가였는데 27세때에 마쯔시다의숙(松下義塾)을 열어 이또오 히로부미 등 여러 제자를 양성하였다. 그 제자들이 후에 메이지유신의 중견인물이 된것이다. 요시다 노리가다는 그때 벌써 남으로 필리핀을 점령하고 북으로는 만주까지 공략하는 목표를 정한바가 있다. 그리하여 일본에는 만한경영(滿韓經營)의 분투목표가 나온것인데 제1보의 필리핀점령은 이미 끝났고 제2보의 조선경영이 지금 실현되고있으며 만주경영도 그리 멀지 않은 장래의 일처럼 내다보였던 것이다.
(존경하는 선생님! 제자 이또오는 거룩한 선생님의 위대한 교시를 받들어 그것을 현실로 되게 노력을 다하고있습니다. 구천에서 웃어주십시오.)
이또오 히로부미는 속으로 렇게 부르짖고있었던 것이다.
하건만도 라철일행은 그의 그러한 속내를 알아보지 못한채 그저 좋은면으로만 생각을 굴리면서 떠날 때 준비해갖고 온 <<동양의 영구한 평화를 위하여 한, 청, 일 3국이 호상친선동맹을 맺고 또 한국에 대하여는 선린(善隣)의 우의로 부조(扶助)하라>>는 요지의 의견서를 일본정부의 각 대신과 오호구마와 방게쯔 류다로를 비롯한 정계요로에게 전달하면서 여론을 환기시키려 했다.
라철일행은 도오꾜오에 그냥 체류하면서 희망이 부풀어 오르는 심정으로 일본정계의 추이와 그들의 반응을 밀탐했다.
이러고있던 중 11월 초순이 지난 어느날, 일본 도오꾜오의 각 신문에
<<일본특파전권대표 이또오 히로부미 한국으로 특파되여 제2차 한일협약을 체결하리라.>>는 것이 보도되였던 것이다.
자기들의 외교활동이 어느정도 효과가 있으리라 믿고 있었던 라철일행은 이외의 보도에 그만 대경실색했다. 라철은 제1차 조처로서 자기와 가깝게 지내온 본국의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에게 먼저 급전을 쳤다.
<<목이 잘리더라도 협약에 동의하지 말라.>>
그리고는 한국에 특파된 이또오 히로부미에게는 항의서한을 발송했다.
<<이또오 히로부미가 도한(渡韓)하여 제2차 한일협약으로 한국을 멸망케 한 것에 탄식한다.>>
이런 전제로 그의 간계를 폭로한 다음, 일제의 무모한 침략성을 예견하여 무익한 행위를 지양하고 진심으로 한,일량국의 평화를 위하여 노력할 것을 충고하였다.
그들은 황급히 도오꾜오를 출발하여 이듬해 1월 24일 오후 11시에 서울 서대문역에 도착하였다.
라철이 서대문역에서 세종로방향으로 몇걸음 걸어갈 즈음 한 로인이 삭풍에 백발을 휘날리면서 급히 걸어오다가 문득 발길을 멈추고 물어왔다.
《그대가 라인영이 아닌가?》
라철은 이상쩍어 하면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나의 본명은 백전(伯佺)이요. 호는 두암(頭岩)이며 나이는 90인데 백두산에 계신 백봉신형의 명을 받고 라공에게 이것을 전하러 왔노라.》
하면서 로인은 백지에 싼 것을 주고는 서대문쪽으로 총총히 가버렸다.
로상에서 백두옹으로부터 물건을 받은 라철은 집에 돌아오자 즉시 펴보았다. <<31神誥>>와 <<神事記>> 각 한권이였다. 그러나 당시 서산락일같이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돌이키기 위해 희생을 각오한 라철에게 그것은 관심사가 아닌지라 무심하게 한구석에 방치하고말았다.
한데 어찌 알았으랴, 바람같이 지나간 그 일이 훗날 라철의 로상봉교가 되여 마침내 700여년이나 닫혔던 대교(大敎)의 교문을 다시열고 천신대도(天神大道)를 밝히는 중광(重光)의 동기가 될줄을!
그것은 오로지 한배님밖에 모를일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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