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카테고리 : 프로필
◉ 수필 태극기와 나의 할아버지
김송죽
태극기가 내 가슴속 깊게 자리잡은지도 오랜 세월이 흘렀다. 지금도 가끔 텔레비전이나 간행물에서 태극기를 볼때마다 나는 늘 각별하고 애틋한 감회를 느끼곤 한다. 이는 숨길 수 없는 내 마음이다. 나는 태극기를 사랑한다.
태극기는 본래 조선의 국기였다. 흰바탕가운데에 태극을 붉은빛과 남빛으로 표시하고 네귀에 검정으로 팔괘를 그려 넣은 태극기는 이조 말기 1833년에 대한제국의 국기로 선포되고 1년뒤에 처음으로 제작되었는데 그때 그것을 주이태극기라 불렀다.
내가 처음 본 태극기
내가 태극기를 알게 되고 처음보았던 것은 1945년 해방을 맞기전이었다. 그당시에 우리는 가목사(佳木斯)에서 살았고 할아버지는 우리와 좀 떨어진 시골에 계셨는데 할아버지가 태극기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할아버지 김석길은 의기있는 조선독립운동가였다. 1919년 3.1운동에 직접참가했던 할아버지는 일제의 탄압과 지명수배에 견뎌낼 수 없어 제자들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중국땅으로 오셨다 한다.
만주로 오신 후로도 할아버지는 계속 독립운동에 참여하셨으며 후에는 화남, 의란 등지에서 네개의 사립학교를 세웠고 민족 계몽 사업에 몸을 잠그시였다. 그런 할아버지에게 조선에서 갖고 온 태극기가 오래도록 보존돼 있었던 것이다.
할아버지는 생전에 삼대독자인 나를 무척 사랑하고 귀여워해 주셨다.
《얘야, 익혀 두거라. <가갸거겨고교> 이 말이 우리네 한글이다.》
할아버지께 놀러갈 때면 한글을 배워주시던 일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때는 일제가 일본어 사용을 강요하고 창씨개명을 강요하여 조선사람들은 제 이름자마저도 조선말로 부르지 못하고 일본말로 불러야만했던 암흑시대였건만 할아버지는 그처럼 나에게 조용히 한글을 가르쳐 주셨던 것이다.
어느날, 철부지였던 나는 조용한 방안에서 할아버지가 홀로 앉아 흰천(그림이 그려진 그때는 그렇게 보였다)을 무릎에 놓고 깊은 상념에 빠져 있는 모습을 보았다.
《할아버지 그건 뭐예요? 》
내가 묻는 말에 놀란 할아버지께서는 나를 끌어 옆에다 앉히고 나서 조용히 알려주셨다.
《이건 우리 조선나라 국기인데 이름은 태극기란다. 너 이거있다는 거 누구에게도 말 말아라, 알아들었냐? 남이 알면 너도 죽고 나도 죽고 네 에미와 애비도 다 죽는다. 알아들었냐? 이놈!》
그때 할아버지께서 어찌나 절실하고 엄하게 말씀하시던지 나는 찍소리 한마디 못하고 할아버지 말씀을 들었다.
일제가 패망하자 가목사시내의 한 가정집 정문 위에 커다란 태극기가 나부꼈고, 우리 또래 몇몇은 <<태극기만세>>를 외치면서 무리지어 다니다가 사람들이 널따란 강당안에 빼곡이 앉아 한창 무슨 강의를 듣는 모습을 보았다. 그러나 나는 도무지 그 내용을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날이 <<고려학교>> 첫 개학이였던 것이다.
그후 토비(土匪)가 갑자기 끓었다. 놈들은 북만주에 사는 조선사람을 로일령을 넘기지 않고 몽땅 죽여버린다고 했다. 아버지가 총을 메고 토비숙청을 나가자 어머님을 따라 할아버지댁에 간 나는 그때서야 할아버지께서 근 30여년간 간수해두었다던 그 태극기를 꺼내어 맘놓고 보며 만져도보았다. 그때 할아버지는 나에게 《이제 우리는 이 태극기를 가지고 고향에 가 살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우리집도 여느 집과 마찬가지로 조선으로 나가기는 커녕 토비들한테 쫓겨 피난을 다니다 보니 죽을 고생만 했다. 그러는 동안에 어떻게하다 태극기를 그만 잃어버리고 말았다. 아, 그때 얼마나 애석했던가!
민족애를 일깨워 주셨던 할아버지
내가 할아버지를 맨 마지막으로 뵌 것은 벌리에서 중학을 졸업하던 1957년도 봄이였다. 그때 홀홀단신으로 방황하시던 할아버지께서는 이미 74세 고령에 화남의 어느 한족(漢族)마을에서 천수답을 수전(水田)으로 개답하느라 물도랑을 파는 공정을 맡아 지도하고 계셨다.
할아버지는 참으로 나의 의식을 깨우쳐 준 첫 계몽스승이었다. 그때 할아버지는 나에게 의병장 홍범도와 김좌진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특히 3.1운동때 만주로 들어와 북로군정서를 조직하고 총사령이 되었던 김좌진이 청산리에서 일본군과 싸워 크게 승전한 이야기와 조선혁명당군 총사령이며 독립투사였던 양세봉이 독립군전원과 함께 장렬하게 최후를 맞은 이야기 그리고 의렬단 용사들이 헌신분투한 처절한 이야기들은 나에게 지워버릴 수 없는 깊은 인상을 남겼다.
《얘들은 소련으로 건너간 후 한번 소식이 있곤 감감이구나. 지금 어떻게들 지내고있는지…》
할아버지는 그때까지도 독립군에 들어가 소련으로 건너간 제자들을 잊지 못하고 항상 그리워하곤 하셨다.
《얘야, 크거들랑 독립투사들의 이야기를 꼭 쓰거라. 그들의 업적이 청사에 길이남아서 사람들이 알게 해야 한다.》
하시며 할아버지께서는 일부러 소설자료수집을 하러 간 나에게 간곡히 당부하셨다. 나는 후에 맘먹은 대로 토비숙청에 관한 소설은 써냈지만 혈전만리에서 피흘린 우국충정의 애국지사와 독립투사들에 관한 글은 지금까지 한편도 써내지 못했다. 애석하게도 그때 힘들게 수집한 역사자료들은 <<문화혁명>>때 반란파의 손에 빼앗겼기 때문이다. 어쩌면 앞으로도 계속 써내기 어려울 것 같다. 내가 할아버지와 맺은 언약이 이렇게 무너지고 말았으니 참으로 창피한 일이다.
태극기를 잃어버린 지 오래고 할아버지도 돌아가신 지 오래다.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것은 오로지 할아버지를 비롯한 애국투사들이 피로 되찾은 고국이 처참하게 분단되어 있는 꼴이니 가슴아프다. 일제의 노예로 36년간, 그리고 통한의 민족분단 45년, 그동안 우리가 해결한 것이 무엇이더냐? 국토는 여전히 양단된 채 겨레의 가슴에 상처만 깊이 남기고 있다.
남들은 친척이 있어 북조선으로 남조선으로 간다마는 친척 하나 없는 삼대독자인 나는 어디를 찾아가야 하나… .
통일이여 제발 빨리 오라. 그때면 나도 고국만세를 목청껏 외치며 살아 생전에 한번이라도 내 맘속에 그리던 고국 강토를 한번 밟아보리라.
◉ 이 글의 원제목이 <<태극기와 나의 할아버지>>였다. 그때 미술편집였던 큰아들은 아예 태극기까지 그려넣었다. 그런것을 흑룡강신문사에서는 태극기를 빼버렸거니와 제목도 <<할아버지의 잃어버린 유물>>이라 고쳐서 1991년 1월 5일자 신문에 내주었다. 아무튼 감사한 일이였다. 헌데 솔직히 말해 썩 개운하지는 않았다. 당시 나라의 정세(政勢)가 기나긴 동한(冬寒)을 벗어나 해빙기(解氷期)를 보내는 때라 문학역시 앞길이 트이긴했어도 아직은 조심스레 저겨디뎌야 할 얼음장이 있다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KBS에 보냈던니 그곳에서는 작자의 요구대로 원제목을 달아 그해 <<고국소식>> 3월호 특간에 이 글을 다시 실어준것이다. 과연 고마운일이였다. 이 점 밝혀둔다.
전체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