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강청, 림표를 욕해 아버지와 함께 목숨을... “문화혁명”때 19살난 한 고중생이 1967년 11월부터 1968년 4월중순까지 근 반년사이에 모두 40여만자에 달하는 정론문장 두편을 써서 당시 들끓어번지는 “문화대혁명”을 부정하는 자기의 판단을 내렸던 것이다. 그는 아직은 부러진 창이 아니여서 모래에 묻히지 않은 림표와 자칫 손을 델만큼이나 권세가 대단한 강청일당을 감히 무정하게 폭로하고 실랄하게 편달했거니와 류소기에게 천고의 억울한 루명을 씌운데 대해 기탄없이 불평을 토로했던 것이다. 문장의 초고는 우리 나라의 정치, 경제, 군사, 문화예술, 의식형태의 각개령역을 널리 언급했는데 내용이 충실하고 문맥이 류창하였다. 더욱히 뒷부분은 결구가 째이고 필끝이 예리하고 론증을 함에 론리적인 사유가 성숙한 것이 일반청년으로는 따를 수 없는 수평이다. 그가 바로 “문혁”에 재화를 입은 중학생ㅡ 오효비(吳曉飛)였다! (1), 왜서 “삼가촌”을 토벌하는지 의문이 되여
오효비는 1949년 봄에 한 혁명간부의 가정에서 태여났다. 가정배경이 그러하였기에 그는 같은 또래의 애들보다 혁명선렬들에 대해서 알게되는 것이 좀더 많아 자연히 애증이 분명한 성격을 갖추게되였던 것이다. 오효비는 복주 제5중학에서 초중을 다녔다. 그때 벌써 선생들은 이 학생은 성격이 다른애들보다 강직하고 부지런히 머리를 쓰는 학생이라는 것을 알았거니와 따라서 그의 재간을 인정하게 되였던 것이다.
1965년 말, 여러 신문들에서 오함의이 쓴 <<해서의 파직>>을 비판하고는 이어서 “삼가촌“과 <<연산야화>>를 비판했다. ”삼가촌“을 비판한 것이 지금와보면 창끝을 직접 중공북경시위에 돌린게 분명했지만 그 당시에 이같은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는 간단치 않은 일이였다. 하지만 그때 오효비의 속마음은 밝았던 것이다. 그는 의혹을 가지고 <<삼가촌찰기>>와 <<연산야화>>를 구하여 거기에 있는 매편의 문장들을 자세히 읽어보았다. 특별란의 문장들은 지식성이 강하고 생동하거니와 시국의 페단을 훈계하면서 높은지표, 맹탕지휘, 불어대기바람을 비평하였기에 광범한 독자들이 애독하고 사랑했던 것이다. 그런건데 왜서 그같이 좋은것을 갑작스레 “당의 백화제방, 백가쟁명을 외곡”한 것이라면서 “자산계급사상이 범람”하고 “봉건사회제도를 전면적으로 미화하며” “옛것을 빌어 자산계급혼을 부르고” “자산계급의 락후한 인생철학을 선양”한 것이라 한단말인가? 더욱히는 그것이 “악독하게 총로선을 공격하고 대약진을 공격했다”, “<<해서가 황제를 욕하다>>와 <<해서의 파직>>과 일맥상통하여 당을 반대하고 인민을 반대하며 사회주의를 반대한 검은선” 이라는데 그렇단말인가. 그것이 그래 “모택동동지를 수반으로 한 당중앙을 공격하고 모욕한 것이며 ‘파직’당한 우경기회주의분자를 극력 지지하고 번안하고 당의 총로선을 창궐하게 진공한 것”이란 말인가? 정말 그렇단말인가? 오효비의 가슴속에는 의문이 가득찼다.
학생은 선생을 제일 신뢰하는 것이다. 오효비는 <<영산야화>>를 그같이 포위토벌하는 리유를 좀 더 밝혀보려고 어느날 밤에 반주임 엄선생을 찾아가 그한테 자기의 의혹을 털어놓았다. 자기는 여차여차하여 등척, 오함, 료말사의 문장을 좋아했는데 여러 신문에 갑작스레 비판문장들이 쏟아져 나오니 대체 무슨일인가고 하면서 자기의 관점을 피력했던 것이다. 이는 그들이 고의로 사단을 일으키는게 아닌가, 혼란한 국면을 만들어 북경시위를 무너뜨리자는게 아닌가?..... 오효비는 이러면서 옹근3시간이나 선생과 애기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개 보통선생이 어떻게 학생의 질문에 원만한 해답을 수 있겠는가. 오효비의 의문은 점점 더 커가기만했다.
(2). “반란에 도리있다”는데 무엇이 “도리”란 말인가?
1966년 8월에 오효비는 아버지가 남창철로국국장으로 조동되자 부모들을 따라 전학하여 남창제1중학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이때에 중공8기11중전회가 열려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였음을 선포했던 것이다. 8월 18일, 천안문광장에서 “무산계급문화대혁명경축대회”를 열었는데 모택동은 군복을 입고 백만홍위병을 검열했다. 림표가 회의에서 강화했는데 홍위병들에게 호소하기를 “일체 착취계급의 낡은사상, 낡은문화, 낡은풍속, 낡은습관을 타파하며” “반혁명수정주의분자, 자산계급우파분자, 자산계급반동권위를 철저히 타도하고 무너뜨리며 그들의 위풍을 꺾어버려 영원히 일어나지 못하게 하여야 한다” “일체 해인충을 쓸어버리고 일체 걸림돌을 걷어내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혁명은 곧 반란이다”, “반란에는 도리가 있다”는 웨침의 지지하에 “8.18”의 혜택을 받은 홍위병들은 형형색색의 “혁명적인 반란행동”을 감행하기 시작했다. “이름고치기”운동부터 시작하여 입는 옷, 신, 머리를 혁명화 한다면서 봉건적이고 자본주의적이며 수정주의적인 것을 없앤다고 했고 “요물잡귀신”의 집을 들추었고 개인의 물건들을 제마음대로 파괴하였다. 그러고는 그것이 한걸음 더 발전하여 사람을 마음대로 때리고 지어는 죽이는 정도에 이르렀던 것이다. 일순간에 일어난 때리고 부수고 빼앗고 들추는 막된 짓이 “혁명”이라는 그럴듯한 미명을 달고 마치도 온역마냥 신속히 전국에 만연되였다. 이른바 “퍼쓰쥬”는 중국의 력사사상 가장 우매하고도 야만적인 미증유의 문화파괴활동으로 되여버린 것이다. 오효비는 이런 괴상한 현상을 보면서 자기의 생각을 한 것이다. 도대체 무엇때문에 책을 태우고 고적들을 훼손하는가? 이것이 그래 력사를 없애자고드는게 아니고 뭔가? 중국은그같이 유구한 력사에 무수한 재부를 창조해 왔는데 오늘 우리가 제 손으로 그것들을 파괴하고 훼손하면 그게 그래 조상에게 미안한 일이 아닌가? 중국은 5천년의 력사를 가진 문명한 나라라고 했다. 그런데 왜서 학생들이 선생을 비판투쟁하고 욕하고 때리게 만드는가? 이것이 그래 중화민족의 전통에 맞단말인다? 남의 집을 마음대로 수색하고 사람을 때리는건 법에 맞지 않은건데 왜 이리도 가볍게 여기는가? 지어는 사람을 때려죽여도 책임을 묻지 않으니 이건 또 왜서인가?
무엇 때문에 림표는 모택동사상을 종교신앙을 하듯이 떠받들게 하는가? 모주석을 “위대한 도사, 위대한 령수, 위대한 키잡이, 위대한 통수”라고 하면서 “만수무강”을 선양하는데 이것이 그래 유심주의가 아니고 뭔가? 그가 그렇게 하는건 돕는게 아니라 진짜 망하게 하자는게 아닌가? 오효비의 머릿속에는 “무엇 때문에?”라는 의문부호가 자꾸떠올랐다. 그러노라니 마침내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겼난 수많은 의문보호들이 당을 우려하고 나라를 우려하는 높이에로 승화하였던 것이다. 그가 말했다. “반란에 도리가 있다는데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오효비가 이같이 “무엇 때문에?”란 의문부호를 많이 가지고 머리를 썩히고있을 때인 1966년 9월 5일, 중공중앙, 국무원에서 <<외지의 고등학교혁명학생, 중등전문학교혁명학생대표와 혁명교직공대표가 북경에 와서 문화대혁명을 참관할데관한 통지>>를 내린것이다. 9월 5일부터 전국의 대학과 중학교학생들이 전국적인 범위에서 대련계를 짓기 시작했는데 그들은 이것이 “혁명의 불씨”를 뿌리는 것이라 했다. 그 목적은 서로 련게하는 형식으로 “문화대혁명”운동전투경험을 교류하고 전투성과를 선전하자는 것이였다. 문제를 밝히고 의문점을 풀려는 욕망에 오효비는 대련계에 말려들어 27개의 크고 작은 성시와 숱한 농촌을 다니였다. 하지만 그는 다른 홍위병들처럼 그모양으로 열광적이 아니였다. 그는 이 정치풍운을 다른 안광으로 랭정하게 관찰한 것이다. 오효비는 다니면서 많은 “내부자료”를 구입했고 대량의 삐라(傳單)들을 수집했다. 자기가 친히 보고 듣은 사회의 온갖 현상들로부터 오효비는 홍위병들의 모든 행동이 기실은 림표, 강청과 그 측근들의 고무와 고동을 받고있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사회는 혼란스러운 동란에 말려들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이것은 그들의 다른 어떤 심보라고 여겼던 것이다.
(3). 필을 날려 “문혁”을 꾸짖었다 1967년 10월,중공중앙에서 전국대련계를 중지하라고 통지를 내리니 오효비는 남창으로 돌아왔다. 그는 필을 들어 단번에 20만자에 달하는 <<문화대혁명>>이라는 초고를 써냈는데 서언과 총강 등 모두 4개장절이였다. 그는 서두에 주지를 명백히 밝히였다. “모두가 다 아는 바와같이 1966년 6월이후 중국이라는 이 사회주의국가에는 한가지 반상적인 정치사건이 발생했다.” 오효비는 문장에서 제출했다.
“림표는 무엇 때문에 재우쳐 모주석의 권위를 크게 수립하고 특별하게 수립하는가? 내가 보기에는 그가 권리를 찬탈하기 위해 여론준비를 하는 것이다.”하지만 “그 어떤 절대적인 미신이든 다가 사람을 기편하는 졸렬한 짓에 불과한 것이다.” “절대미신론의 허울은 아무때든 다 벗겨지고 말 것이다.” 오효비는 문장에서 이같이 쓰기도 했다. “강청은 모택동과 당중앙의 특사신분으로 문화대혁명을 간여하며” “특히는 모택동의 부인이라는 신분으로 나쁜짓을 하고도 전혀 개의치 않고 수치조차 모르는 것이다. 그녀는 스스로 자기를 당의 화신으로 여기면서 도처에서 제자랑을 한다.” “입만 벌리면 자기는 모주석이 파견한 것이라고 한다. 모주석의 위신을 빌어 ‘좌’파를 선동하고 있다.” “문화혁명에 무정부주의를 범람시킨 근원이 기실은 강청인 것이다.”
당시의 형세발전과 그 자신의 체험이 제한된 관계로 하여 오효비는 4장까지 쓰고는 더 쓰지 못했다. 이 문장을 다시읽어보고는 그 자신도 만족해 하지 않았다. 더욱히는 “문화대혁명”에서 가장중대한 사건의 하나인 “류소기에 대해서 수단을 가리지 않고 도리가 없는 박해를 가한데 대한 부분이였다.” 문장의 초고는 문제를 언급하기는 했어도 계통적이 못되거니와 리론이 깊지 못한 것이다. 하여 그는 일단 페부로느껴져 내심충동을 받으면 다시쓰기로 하고 사작을 새로 구상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1966년 8월부터 시작하여 류소기가 비판받으면서 타도되였다. 중화인민공화국의 당당한 주석이자 중국에서 두 번째 인물인 그가 아무러한 시비도 가림이 없이 아무러한 법적인 보호도 받지 못하고 “당내반혁명수정주의집단두목”, “전국에서 가장 큰 자본주의길로 나아가는 집권파”로 몰렸으니 그것은 그야말로 세인을 놀래우는 공화국의 가장 큰 억울한 안건으로 되였던 것이다. 1968년 초, 오효비는 전문 류소기를 변호하여 그의 일생의 공과 시비를 론술한 책을 쓰려고 맘먹었다. 모두14장 50개절로 구상했다. 그는 그 책을 빨리 써내려고 방을 하나 잡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써내려갔다. 그렇게 몇 달을 악전고투한 끝에 마침내 20여만자에 달하는 저작의 초고가 완성됐는데 그것은 그가 쓰려는 전부의 제1장으로서 15개의 특정한 제목으로 되어 있었다. “류소기의 민족혁명운동사상”, “백구투쟁”, “이른바 백구파”, “토지혁명”, “민주주의에 대한 류소기의 태도”, “수양론” 등 작은 제목들이 있었다. 문장은 류소기를 모욕중상하는 림표, 강청일당을 겨누고 반박하면서 정곡을 찔렀다. 오효비는 옹근 한 개절 약 3만7천자에 달아는 글에서 전문 류소기의 <<공산당원의 수양을 론함>>을 론술하였고 <<공산당원의 수양>>을 높이 평가하면서 그의 그 두 “수양론”은 한부의 절묘한 작품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그 두가지를 “당내투쟁에 관한 류소기의 가장 걸출한 대표작이거니와 중국공산당조직공작의 출중한 리론저작”으로서 “매우높은 성망을 갖고있는 것이다.”고 했다. 오효비는 독립적인 견해를 견지하였다. 그는 립표, 강청일당이 만들어낸 << <수양>의 요해처는 무산계급전정을 배반한 것이다.>>라는 문장에서 제출한 “이러한 ‘수양’은 일본제국주의의 털끝하나도 건드리지 못한다”는 말을 풍자하는 어투로 반박해버렸다. “본래 이러한 ‘수양’은 당원들의 령혼을 촉동하자는 것이지 제국주의와 그 앞잡이 개들의 ‘털끝’을 건드리자는 것은 아니였다. 그들의 ‘털끝’을 ‘수양’으로 건드려서 되는게 아니나. 이만한 상식조차 모르다니! ” 오효비는 자기가 써놓은 원고뭉치를 보면서 일면 눈발날리듯 방안에 그득한 삐라들을 보면서 이 자료들이면 글을 훌륭하게 쓸수 있겠다는 신심을 가져보기도 했다. 이럴 때 학생들은 농촌에 단련을 내려가라는 지시가 내렸다. 그는 적당히 휴식도 하면서 농촌에 내려가 아래의 13장 44개의 특정한 제목의 집필을 마저완성하리라 맘먹었다.
(4). 최후의 전투
그런데 1968년 5월 6일, 오효비의 아버지 원 남창철로국국장 오아웅(吳亞雄)이 “주자파”라는 죄명으로 “군중전정”을 받으면서 집을 수색당했다. 바로 오효비가 “전국의 가장 큰 주자파(자본주의길로 나아가는 집권파)”인 류소기의 억울함을 호소할적에 그의 아버지가 류소기의 “대리인”이 되어 타도를 맞는 “주자파”가 된 것이다. 오효비는 자기의 예측으로부터 림표, 강청일당의 행동은 심보가 다른 반혁명역류라는것을 판정했어도 자기 아버지의 운명을 예측하지 못했고 더욱히는 자기의 운명조차도 예측하지 못한것이다. 한무리의 폭군들이 오효비의 집에 뛰여들어 “전정”을 실시한다면서 오효비가 심혈을 쏟아부어 써놓은 초고전문을 몽땅 빼앗아갔다. 폭도들은 원고를 보고 그만 깜짝놀랬다. 그들은 이 정황을 이틑날 강서성혁명위원회에 반영했다. 춘추필법(春秋筆法)을 앞에 놓고 경악해진 혁명위원회성원들은 모두 살기가 올라 오효비를 저주하면서 이것은 “전성치고 보기드믄 특대의 반혁명안건”이라했다. 그들은 5월 7일 오후에 그 어떠한 법률적인 수속도 없이 한창 농업을 지원하고있는 오효비를 비밀리에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었다. 그리고는 기세가 올라 방대한 전안조를 만들어 밤낮이어가면서 오효비를 조르고 협박하면서 죄행을 더 대라고 족치였다. 자기에게 자백을 강요하는 그같은 무리한 협박앞에 19살의 학생 오효비는 굽어들기는 커녕 더더욱 완강하게 자기의 신념을 지키면서 맞섯다. “너는 무엇 때문에 강청과 림표동지를 반대하는가?” “림표와 강청은 역행하고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심뽀가 다른것이다. 그들은 진정한 반혁명역류인 것이다!” “입다물라! 림부주석은 모주석의 학생이고 모주석을 바싹따르는데 네가 그를 반대하는건 모주석을 반대하는 것이다!” “나는 모주석을 몹시 존경하고 열애하지만 림표가 모주석을 신으로 만드는건 다른 심뽀가 있는 것이다!” 강서혁명위원회는 다른 문제를 찾아내지 못하게 되자 이번에는 창끝을 돌려 오효비의 아버지를 비판투쟁하면서 족치였다. 머리가 반백이 된 오효비의 아버지는 핍박에 견디지 못해 이틑날 자살하고말았다. 혁명위원회는 짧디짧은 며칠사이에 오효비네 다섯사람을 다 가두고 심문했다. 뿐만아니라 오효비와 가깝게 지내였던 학생 20여명을 붙잡은 것이다. 오효비는 옥에 갇혀있은 21개월사이에 비인간적인 시달림을 받았지만 시종 실사구시적으로 이 일은 자기가 혼자 한 것이지 다른 사람은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잡아떼여 그 자들이 “집단을 파내자”던 음모를 달성하지 못하게 했다. 그리하여 오효비사건에 련류되였던 동학들은 하나 둘 다 풀려나갔지만 오효비는 끝내 1970년 2월 27일에 살해되고만 것이다. “문화대혁명”은 끝내 부정되였고 오효비의 원안도 마침내 평판되여 억울한 죄명을 씻어버리게 되었다. 1980년 7월 12일, 남창철로국은 중공강서성위의 결의에 따라 오효비평판대회를 열고 그를 중국공산주의청년단 단원으로 추임했다. 그러면서 억울함을 푸는 평판대회에서 강서성고급인민법원은 “오효비동지의 무죄판결서에 관하여”를 선독했다. 남창철로국당위의 책임자는 중공강서성위의 오효비억울함을 푸는 평판규정을 선독하였거니와 오효비가 당을 우려하고 국가를 우려하며 깊이 사고하고 과감히 바른말을 하며 용감히 진리를 탐구하는 보귀한 혁명전신을 높이높이 찬양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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