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백찬(翦伯贊), 1898년 호남 도원현에서 출생, 위그르족. 그는 중국의 저명한 맑스주의사학가이자 맑스주의사학창시자의 한 사람이다. 1926년에 북벌전쟁에 참가했고 1837년 5월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으며 사업을 적극적으로 하여 신중국건설에서 돌출한 성적을 거두었다. 건국후 전백찬은 북경대학력사계교수 겸 계주임을 지냈다.
전백찬의 가장 큰 공헌은 사학방면에 있다. 일찌기 항전전에 그는 맑스주의자료를 통수로 하여 중국에서 맑스주의사학진지를 건설했거니와 유물주의사관을 연구하고 전파하는데 필생의 정력을 다해 탁월한 공적을 세운 것이다. 해방전에 출판한 <<력사철학교정>>은 물론 해방후에 세상에 나온 <<중국사론집>>, <<력사문제론총>>, <<중국사강요>>(주편) 등 저작은 모두가 중국사학계에 적극적이고도 심원한 영향을 끼친 것이다. 중공중앙문헌연구실에서 편찬한 <<모택동전(1949~1976)>>에는 다음과 같이 기재되였다.
“1961년, 학술계에서 일부 력사조건을 떠나는 착오적인 경향이 있었지만 전백찬은 일관적으로 력사주의관점을 주장한 것이다. 그는 력사연구는 계급관점을 중시해야하거니와 따라서 력사주의적 연구방법에도 주의해야한다고 했다. 그는 편면적으로 ‘리론으로 력사를 대체’하는것을 반대했거니와 협애하게 력사는 정치에 복무해야한다는 제기법도 반대하면서 력사실제로부터 출발하여 대량의 사료를 장악한 기초상에서 맑스주의에 부합되는 결론을 얻어내야한다고 주장했다.” 이상 3단의 문자로부터 당시의 정황을 대체적으로 료해할 수 있는 것이다. 전백찬은 정확한 맑스주의사학관을 지켜내기 위해 당시 “리론권위”라던 강생, 진백달과 맛섯다. 그는 날이 갈수록 자기가 인정하는 정확한 관점을 견결히 주장하면서 착오적인 관점을 첨예하게 규탄한것이다. 하여 그는 강생과 장춘교 등의 증오를 자아냈으니 그것이 결국은 큰 화를 묻어놓은 셈이였다. 그때로부터 어떤 사람들은 암암리에 그의 “검은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한 것이다. 1965년 말, 폭우가 내리려니 바람이 루에 그득차듯이 온 나라의 정치형세는 온정하지 않고 음침했다. 맑았다 흐렸다 변화가 무쌍한 분위기속에서 모택동은 “문화대혁명”을 발동하자고 결심을 내린 것이다.
요문원의 <<신편력사극 <해서의 파직>을 평함>>이 발표된 이틑날인 11월 11일에 <<문회보>>기자가 전백찬을 채방하러 왔다. 전백찬은 요문원을 “조폭하다”고 했다. “몽둥이”를 휘두르면서 “오함동지에게 정치모자를 씌운다”고 기탄없이 본질을 까밝히면서 엄격히 비평했다.
“오함은 내 친구여서 나는 그를 잘 알고있다. 오함이 그래 변천하기를 바라는 사람이란말인가? 사상비평을 개인의 력사와 련계하려면 우선먼저 그가 대체 어떤 사람인가를 알아봐야 한다. 오함은 일찍이 항일시기부터 민주혁명에 참가한 사람이다. 오함을 괴롭히면 진보적인 지식분자들은 다가 마음이 얼어들게 될 것이다.” <<신편력사극 <해서의 파직>을 평함>>은 “문화대혁명”의 도화선으로 되었다. 모택동은 그것을 돌파구로 하여 자기가 불만스러워하는 적막한 국면을 타파하려고 한 것이다. 얼마지나지 않아서 <<광명일보>>가 편집인쇄한 두기의 <<정황간편>>이 모택동의 주의를 일으켰다. 한기에는 <<오함이 요문원이 쓴 <해서의 파직>을 비판한 문장을 보고서 반영>>이라는 것이였는데 거기에 말하기를 “그(오함)의 표시였다 ‘답변문장을 준비하지 않았다. 시위에 보고를 써서 집적 팽진동지한테 갖다주겠다.” 그는 또 말했다. “나는 요문원이 이렇게 비판하는것이 무섭지 않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이모양으로 아무런 상관없는 일까지 억지로 끌어다 붙이어 비평하고 모자를 씌우는건 매우 나쁜 풍기인 것이다. 이러면야 누가 또 감히 글을 쓰며 누가 감히 력사를 쓰려하겠는가?”
모택동은 그 글을 보고나서 몇글자 비어(批語)를 적었다.
“이미 읽어보았는데 온밤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다른 하나의 문장은 <<요문원이 <해서의 파직>을 평한데 관한 반응속문>>이라는 것이였다. 그 문장에 “전백찬은 현재 학술계에서 고려하는 것이 해소되지 않은데다 요문원이 닥치는대로 건드리니 백가쟁명에 불리하다고 지적했다.” 고 밝히였다.
모택동은 보고나서 옆에다 동그라미를 세 개쳤다.
12월 21일, 모택동은 항주에서 진백달, 호승, 전가영, 애사기, 관봉 등을 불러 맑스주의리론학습과 철학문제, 교육문제를 담론하면서 말했다.
“어떤 지식분자는 그 무슨 오함이요 전백찬이요 하는데 점점 안된다. 척본우의 문장이 괜찮아서 나는 세 번이나 읽어봤다. 그런데 결점이 있다. 이름을 찍지 않은 것이다.”
1966년 3월 17일부터 20일까지, 모택동은 정주에서 열린 중앙정치국위원확대회의에서 말했던 것이다.
“나의 의견은 전백찬이요 후외로요 등등을 더 때리는 것이 좋겠다는거다. 이런 사람들은 다가 자산계급이고 제왕장상인 것이다.”
정치형세가 이러했으니 전백찬이 처한 형편이 어떠했는가를 알수있는 것이다. “학술토론”은 재빨리 정치적인 대비판으로 변하고말았다. 그들은 전백찬에게 “반동권위”, “반공수완가”란 모자를 씌웠고 그의 관점은 “중간관점”이고 봉건지주계급에 대한 “양보정책”이라고 무함했던 것이다.
등광명의 솔직 한 말
1966년 여름, 북경대학은 찌는듯한 무더위속에서 전국의 초점으로 부각되고 있었다. 5월 25일 오후, 강생(康生)등의 지시에 따라 섭원재(聶元梓) 등 7명은 “전국제1의 마레주의대자보”를 만들어냈다. 그것이 나붙자 뜨거운 물결이 신속하고도 맹렬한 기세로 전국에서 일기 시작했다.
그 대자보의 제목은 <<송석(宋碩), 륙평(陸平), 팽패운(彭佩云)은 문화혁명에 구경 무엇을 하는가?>>로서 창끝을 직접 부경시위대학부의 송석, 북경대학당위와 교장, 당위서기 륙평 그리고 당위부서기 팽패운에게 돌리였던 것이다.
강생의 의도는 “북경대학부터 시작하여 우로 올라가며 적발하자”였다.
이때 바로 항주에 가있은 모택동은 6월 1일에 <<광명일보>>총편실합편으로 나온 <<문화혁명간보>> 제13기에 난 그 대자보를 보고 인차 강청, 진백달에게 비준지시를 내렸던것이다.
“본문은 신화사에서 전문을 방송하고 전국 각 신문들에 발표할 필요가 있다. 북경대학 이 반동보루는 지금부터 가히 때려부실 수 있다.”
이리하여 섭원재등의 대자보가 북경대학의 허다한 사생의 비판과 반박을 받고 중앙의 적잖은 동지들이 제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절대권위였던 모택동의 지지를 받아 <<인민일보>>는 전문을 실었거니와 왕력(王力), 관봉(關鋒), 조일구(曹軼歐) 등이 집필한 평론원문장 <<북대의 대자보를 환호한다>>는 글까지 곁들어 냈던 것이다. 이같이 모택동이 바라는대로 6월 1일 후부터 “문화혁명”이 시작되여 몰아치기 시작한 것이다.
먼저는 북경 각 대학교학생과 전국각지의 학생들이 바싹따라 대지를 덮어버릴듯한 기세로 “수정주의를 반란”한다는 대자보를 썼는데 창끝을 학교의 령도간부와 선생들에게 들이댔다. 그리하여 학교의 당지부들은 인차 탈환상태에 빠져버렸고 제 마음대로 비판하고 투쟁하며 때리고 욕하고 조사하고 수색하는 등 위법란기현상이 곳곳에서 일제히 출현 한 것이다.
북경대학에서 전백찬은 모택동이 친히 이름을 찍은 사람이였기에 “대우”가 높아 륙평, 팽패운 두 령도다음자리에 놓여 엄한 비판을 받았다.
7월 25일, 강생은 북경대학에 가서 강의할적에 목청을 잔뜩 높혀 부르짖었다.
“오늘 무엇을 할것인가? 어떻게 할 것인가? 검은무리 륙평, 팽패운을 어떻게 투쟁해야하는가? 그리고 또 있다. 전백찬, 풍정일 따위들은 어떻게 투쟁해야 하는가? 어떻게 비평해야 하는가?..... ”
이 정치운동에 수많은 무지한 사람들이 어떻게 리용되여 악당과 한패가 되었는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정치운동에 어떤 사람들은 핍박에 못이겨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따라했다는 것도 알수있다. 등광명(鄧廣銘)선생은 용감히 력사와 자기를 대하는 사람이였다. 그는 공개적으로 일깨워줬던 것이다.
“북경대학력사계의 선생들은 전백찬의 장악하에서 <<중국통사>>교재편찬임무를 완성한 것이다.”
전백찬은 주편을 맡았거니와 확실히 그 직책을 다했던 것이다.
“이 책이(후에 출판된 <<中國史綱要>>)본보기로 된다는것은 리론을 력사실제와 련계시켰거니와 좋은 학풍과 문풍을 수립했기 때문이다. 맑스가 어떻게 말했고 레닌이 어떻게 말한 그 몇마디를 가지고 테를 드는것이 아니였다. 절대 그렇게 한것이 아니라 맑스주의를 지도사상으로 관통시킨데있는 것이다. 우리 이 집필자들이 당연히 전백찬의 요구대로 해내지 못한것이다. 그런데 ‘문화대혁명’이 일어나니 이 책을 대독초라면서 신문에 공개비판했다. 편집에 참가했던 소유의 사람들은 따라서 비판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죄’를 전백찬로인한테다 다 밀었던 것이다. 애써생각해 낸 리유라는 것이 전로인이 맑스, 엘겔스, 레닌, 쓰딸린, 모택동이 말한것을 써넣지 말라는 것이였다. 이렇게 말한적이 있는가없는가? 있는것이다. 그러나 전백찬은 맑스, 엘겔스, 레닌이 어떻게 어떻게 말했다고 쓰지 말고 력사를 론술함에 맑스주의정신을 관통하면 된다고 했다. 확실히 그렇게 말한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대자보에다 이것을 전백찬의 ‘죄상’의 하나로 치부한것이다.”
이같이 날조된 “죄상”을 보고서야 전백찬이 어찌 마음상에 심한 손상을 입지 않겠는가? 그는 그야말로 참기 어려운 고통속에서 나날을 보냈을 것이다.
“류소기와 관련되는 일인데 내 마음대로 망탕쓸 수 없다”
1968년 10월 13일, 모택동의 장악하에 중공8기12중확대회의를 열었다. 이것은 1966년 8월 중공8기10중전회에서 “문화대혁명”을 발동하여 2년만에 열리는 한차례의 중앙회의였는데 이때는 이미 52. 7%의 8기중앙위원이 “반역자”, “특무”, “반당분자”, “외국과 내통하는 분자” 등 죄를 뒤집어쓰고 타도되여 심사를 받거나 옆으로 물러난 처지였다.
모택동은 개막식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번의 무산계급분화대혁명은 무산계급전정을 공고히 하고 자본주의복벽을 방지하며 사회주의건설을 함에 완전히 필요하거니와 매우 적시적인 것이다!”
그는 끝말을 다음과 같이 마치였다.
“이번의 문하대혁명을 끝까지 해야한다. 끝까지란 무엇인가? 3년으로 잡았는데 명년여름이면 비슷할 것 같다. 결국은 대비판을 하고 계급대오를 정리하며 기구를 간소화하고 불합리한 규장제도를 개혁하자는 것이다.”
모택동은 또 지식분자문제에 대해서도 말했다. 그는 지식분자가 본래 이번 “혁명”에서 하나의 대상에 속한다면서 자기의 설법을 내놓았다.
“지식분자는 점토(黏土)인 것이다. 굳어서 공기가 통하지 않아 곡식이 자라지 않으니 지식분자가 많은데서는 해내기 어려운 것이다. 말끝마다 더러운 지식분자라 하지 말라, 좀 더러워도 되는 것이다. 지식분자를 요구하지 않는것이 아니다. 꼬리를 하늘로 쳐들게 하지 말아야 한다. 군사원교를 1백 11개 꾸렸길래 111이라 부르는데 거기에 확실히 요괴가 있는것이다."
이 회의에서 모택동은 특히 전백찬을 찍어 말하기를 “자산계급학술권위”한테도 “출로를 주어야 한다”. 북경대학의 전백찬, 풍우란에게 출로를 주어야 한다. 전백찬의 생활을 돌보고 공작을 안배해야 한다고 했다.
이런 최고지시가 있어서 전백찬부부는 마침내 햇볕을 다시보게되였고 생활을 개선하게 되었으며 주택도 변했던것이다. 그들은 북경대학교원내에 있는 풍경이 아름다운 연남원(燕南園) 64호 주택에 이사를 했고 생활비도 30원이던 것이 120원으로 올랐거니와 퇴직공인 두전(杜銓)을 보내여 두늙은이의 생활을 돌보게 까지 했다.
전백찬은 감지덕지하여 밤을 새가면서 모택동에게 감사신을 썼다. 듣는 말에 의하면 모택동은 그 편지를 받아보고 “편지를 잘썼다”고 전백찬을 칭찬했다고 한다.
그러하니 전백찬은 의례 아무런 우려없이 베개를 높이 베고 지내야 할 것이다. 늙은 부부는 앞가슴에다 모택동의 기념장을 달고 손에 모택동의 어록책을 들고 정책을 락실하는 대회에 참가하여 위대한 령수 모주석이 참으로 감사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천만뜻밖에도 70고령에 오른 전백찬이 숨을 미처 돌려 쉴 사이도 없이 더 큰 재난이 떨어졌던 것이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류소기, 왕광미전안조”의 부조장이 살기등등하여 북경대학력사계에 오더니만 신속히 력사계의 몇몇 반란파로 “전백찬전안조”를 조직했다. 그리고는 긴박하게 여론을 일으킬 목적에서 전백찬을 심문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전백찬의 입에서 소위 “류소기는 변절행위가 있었다”는 죄증(罪證)을 얻어내자는 것이였다. 그자들은 전백찬이 아무 때 국공담판시에 류소기가 국민당과 결탁하여 혁명을 배반한 “음모” 가 있었다고 증명하게끔 하려고 시도한 것이다.
그때는 류소기가 이미 타도되여 <<변절자, 내부간첩, 공적 류소기의 죄행 심사보고에 관하여>>가 이미 중공8기12중전회에서 비준(<<심사보고>>를 비준한것은 자연히 잘못되 것이였다.)하여 류소기전안조는 이미결속을 본 것이다. 한데도 전안조가 또 문장을 만든단말인가? 왜서?..... 전백찬은 지난날의 일들을 자세히 회억했다. 국공담판이 있었던 그때는 그가 아직 류소기를 알이 못했다. 그는 1949년초에 해방구에서 처음으로 류소기를 만나본것이다. 새빨간 날조를 하라니 그게 그래 인간이 할 짓인가? 전백찬은 실사구시적으로 정황을 명백히 말해야지 절대 가짜증명은 서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다.
한편 그럴수록 전안조는 그의 말은 들으려 하지 않았거니와 지어는 사나운 몰골로 손가락질까지 해가면서 우격다짐으로 증명을 서라고 협박하기도 하고 위협하기도 했다....
하지만 전백찬은 추호의 동요는 태도로 나왔다.
“이건 류소기와 관련되는 일이기에 내 맘대로 망탕쓸수 없다.”
아마 이같이 벗티였길래 전백찬은 살길이 막혀버린 모양이다. 전백찬은 고험을 겪어낸 로혁명가였고 력사학가였으다. 그러니 기복을 이루는 이같은 정치운동에서 잔인한 투쟁과 학대를 받더라도 마음을 널리먹고 자살 할 생각까지는 하지 않으련만 그는 자살하고 만 것이다.
그는 이런 말까지 한적이 있다.
“나를 반당반사회주의라는데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겠다.” “나는 기다리고 기다릴테다, 나를 비판하는 마지막문장 한편이 나올 때 까지.”
허나 지금 중앙전안조가 땅땅 으름장까지 놓는것이였다.
“모주석이 돌봐준다고 죄없다고 생각하는모양이지. 아니야! 솔직하지 않았다가는 마찬가지로 가둔다는 걸 알아야 해.”
전백찬은 그가 내뱉는 어투를 보고 뒷심을 서주고있는 큰인물이 기실은 누구라는것을 알아챘다. 그는 자기가 정치원칙에서의 시비문제에 맛다들었으니 더는 타협할 수도 해결할 수도 벗어날 수도 없다는 것을 알고는 차라리 죽어버리는게 더 났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과연 써내지 못하겠다
12월 18일이니 따져보면 연남원에 이사온지 짧디짧은 한달밖에 되지 않는 기간인데 전백찬은 심문받은것이 8차, 재촉에 못이겨 자료를 “교대”한 것이 2차, 외부조사를 접수한 것이 15차..... 전안조는 어떻게 해서든 저들의 목적을 이뤄보려고 쉬지 않고 위협도 하고 공갈도 했으며 나중에는 인신모욕까지 해댔다. 전백찬부인은 정신이 흐리멍텅해졌다. 전백찬은날따라 기력이 쇠약해져 몇 번이나 정신잃고 쓰러지기까지 했다. 갈수록 그통스러워 죽고싶은 생각만 더해갔다.
그는 그들 부부를 돌보기로 하고 들어온 관리원을 보고 잠을 자지 못하겠다면서 여러번이나 수면제를 구해달라고 사정했다.
12월 18일, 전백찬은 만연필을 꺼내여 종이에 글을 썼다. 한데 몇자 쓰지 않아서 잉크가 말라 계속 써내려갈 수 없었다. 전백찬은 필을 놓으면서 탄식했다.
“필이 마르는걸 보니 나도 끝장이구나.”
그날밤에 전백찬부부는 인생을 떠나고말았다. 자기들을 돌보는 두전이가 의심하지 않게 하느라 밤 10시경에 전백찬은 돈과 량표(糧票)를 그한테 주면서 래일아침에는 유자궈(油炸果)를 먹겠노라했다.
밤12시넘어 전백찬부부는 침대에서 일어나 정중히 옷을 갈아입고 양말도 바꿔신었다.
두전이가 사실은 그들 부부를 책임지고 돌보는 외에 그들 부부의 동향을 감시할 임무를 맡고있은것이다. 자살과 같은 이외의 변고가 발생할까봐 늘 경각성을 높이여 왔던 그였지만 이날만은 그 경각성을 읺고말았다. 전백찬이 밤중에 일어나니 그도 벌떡 일어났다.
전백찬이 말했다.
“일어나지 말라구. 내 우유 좀 마실려구그래.”
부인도 말했다.
“그분이 배가 고푸대요. 내가 데워드리지. 난로에 아직 불이 있을거야. 우리절로 할테니 수고하지 말아요.”
좀지나 전백찬부인의 말소리가 또 났다.
“좀 마셨으면 됐어요. 빨리 자기나하자요.”
두전은 그리고는 다른 소리를 더 듣지 못했다.
이튼날아침에 두전이가 방문을 열고 들어가봐서야 그들이 수면제를 먹고 자살했다는 것을 알았다. 전백찬이 입고있는 중산복호주머니에는 석줄로 간단히 쓴 유서가 들어 있었다
“나는 과연 써내지 못하겠기에 이 길을 걷는다. 두전이는 전혀모르는 것이다.”
다른 한 종이에는 이런 글이 있었다.
“모주석만세 모주석만세 모주석만세 만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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