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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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지에 묻힌 비밀(40)
2011년 03월 29일 00시 36분  조회:3133  추천:15  작성자: 김송죽
  •       음지에묻힌비밀(40)                                                                                                             나의 아버지는 박해받아 죽었다
         (원교육부장의 딸 문화혁명회억) 

    주영흠(周榮鑫.1917ㅡ1976), 원명은 주문화, 산동 봉래현(지금의 봉래시) 성리서관사람, 교육가. 그전에 국무원비서장을 지내다가 교육부장이 되였다. 1975년, 주은래가 주영흠을 국가교육부부장으로 임명한 것이다. 그는 교육부장이 된 후 강청반혁명집단의 방해와 파괴에 맛서 견결히 투쟁하다가 1976년 4월 13일에 박해를 받아 죽었는데 그때 나이가 59살.  중공중앙은 주영흠을 1977년에 평판하여 억울한 죄를 깨끗이 씻었다. 
    이 문장은 그의 딸 주소화(周少華)의 회억록인데 주영흠이 “문혁”후기 정치폭풍우중 운명이 어떠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1).아버지는 당시 가장젊은 부장이였다
      

    1961년에 나의 아버지는 교육부에 조동하여 부부장을 지내다가 1962년에 국무원에 조동하여 대리비서장이 되었으며 1963년에 인대회의 비준을 거쳐 비서장이 된 것이다. 

    1963년에 두가지 일로하여 아버지는 나와 이야기가 있었는데 깊은 인상을 남기였다. 
       
    첫째번의 일은 내가 공청단에 가입했을 때였다. 아버지는 류우석의 시를 읊어 축하를 표시하고는 “우리 집의 ‘소백정’이 끝내 모자를 벗었구나, 장차 입당을 쟁취하기위해 노력해야지!” 했던 것이다. 

       
    둘째번의 일은 내가 대학시험을 치르게되였을 때다. 아버지는 나와 이야기를 오래하여 나를 끝내 경제학전업을 배우게끔 한 것이다. 그 년대에는 다수가 철학, 력사, 문학과 외국어전업을 선호했지 경제학은 그리좋아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15년이 지나서는 내가 배운것이 내 인생의 길을 닦는데 아주중요한 결정성적인 작용을 한 것이다. 하기에 나는 아버지의 원경에 탐복하면서 다시한번 감사를 드리게 되는 것이다. 

       
    주은래총리는 국무원비서장을 고르면서 정치에 믿음성이 있는 외에 4가지 조건을 갖춘 사람을 물색했던 것이다. 
       
    첫째는 자기 손으로 국무원의 선언과 문건을 쓸줄을 아는, 즉 일정한 문자능력이 있는 사람이여야 하고 
       
    둘째는 각개방면의 관계를 잘 처리할줄을 아는, 즉 다시말해서 붙임성이 좋고 성격기질이 좋은 사람이여야 했다.
    그때 국무원에는 부총리가 16명되는데다 부장이 몇십명이였고 근 10여개의 국무원직속판공실이 있었던 것이다. 그 외에도 비서장은 반드시 총리를 협조하여 각 성, 시, 자치구와 각 군구, 군병종지간의 사업문제와 관계를 처리할 줄을 알아야했다. 
       
    셋째는 비서장이 되려면 젊고 신체가 좋아야 하며 총리의 사업절주를 제때에 맞추고 따라갈줄을 알아야 했다. 
       
    넷째는 급별이 낮지 말아야 했다. 월급사용하면 오랜 동지들이 의견이 있게되는 것이다.
        
    박일파큰아버지께서 나의 아버지에 대한 료해가 깊고 신임하였기에 주총리에게 나의 부친을 추천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의 부친은 국무원의 비서로 임명이 된 것인데 그때 40을 갖넘긴 나이였으니 부장치고는 제일어리였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아버지는 성정이 허심하고 로간부들을 몹시 존경하였기에 여러방면에서 신임을 얻었다. 

    아버지가 상임하자 우리는 한가지 유감이 생기였다. 그것은 바로 그가 명령해서 정협례당에서 돌리던 영화를 다시는 돌리지 못하게 한 그것이였다. 전에는 중앙간부가속이 매주토요일마다 영화관람을 하는 만회를 했던 것이다. 국내나 국외에서 갖찍은 영화들을 먼저보군했는데 일반백성들은 반년이나 혹은 일이년이 지나가야 그런 영화들을 구경 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자식들이 부모덕에 우월감을 가지는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러다가는 너희들을 망쳐먹겠구나. 우리가 이같이 특수화를 부리는 걸 백성이 알면 그래 당에 불만이 생기지 않을리 있겠니.”         
       
    그는 이같이 말하더니 그 행사를 지워버린 것이다. 


       주총리의 주장에 의하여 국무원에서 대두적으로 개인이 공가의 차와 집을 차지하는 페단을 고치였는데 지어는 회의때 마시는 차물까지도 개인이 돈을 내게끔 제도를 세운 것이다. 나의 아버지는 이런 제도를 엄격히 준수했다. 나의 작은 녀동생이 그때 매일 병원에 가 병을 보면서도 아버지의 차를 타지 않았다. 하여 아버지는 생각끝에 차를 타지 않고 작은 녀동생을 데리고 매일 도보로 북해를 에돌아서 중남해의 북문으로 들어가 출근했던 것이다. 하여 그것이 습관이 되었다가 “문화대혁명”이 일어나 혼란해지니 부득불 습관을 고친것이다. 

     
      아버지는 성격이 좋아 사람을 평등하게 대하였는바 이 점은 국무원에서 누구나 다 보아서 잘 알고있었다. 아버지의 차를 모는 운전수건 취사원이건 수도, 전기수리공이건 일이 끝나면 어머니는 객실에 앉아 쉬게 하면서 언제나 차물을 부어 대접했던 것이다. 어머니가 57간부학교에 로동하러 가기전의 일이다. 국무원기관의 공인이 외투를 사입게 돈을 먼저 빌려달라니 어머니와 녀동생들은 그 자리에에서 현금을 모아 주고는 후에 돌려주는것도 사절하고 절대받지 않은 것이다. 
       
    자기 몸을 사업속에 묻은 아버지는 시간이 모자라 쩔쩔 매면서 늘 문건을 집에까지 가지고 와서 보군했다. 어머니도 나도 녀동생들도 그 문건들을 다쳐서는 절대안된다는 것을 잘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날 아버지방에 들어갔던 나는 눈길이 은연중 문건에 쏠리여 가만히보니 라서경(羅瑞卿)을 비판투쟁하는 것이라 깜짝 놀라 심장이 멋을것만 같았다.  라서경큰아버지는 우리가 늘 존경해온 오랜간부인데 어쨌다고 그러는가? 
       
    객실로 돌아온 나는 아버지께 물어보고싶었으나 아버지는 사려깊은 어두운 낯색으로 담배만 태우길래 입을 열지 못했다. 그때 라서경큰아버지에 대한 비판투쟁이 곧바로 “문혁”의 전주곡이였음을 내가 어찌알았으랴?      
                    

    (2)그자들은 끝내 아버지한테도 손을 댔다
      
                                                                        
     
    10년 “문화대혁명”을 동란이였다고 말하는건 일호반점도 틀리지 않는다. 각 파 정치력량의 격렬한 겨룸, 사회동란, 불안정한 시국에 그 어느 집 어느 사람이면 충격을 받지 않았으랴. 지어는 국가의 특수보호를 받기로 된 사람과 가정식솔과 친척친구마저도 이 험악한 세월속에서 충격을 벗어나기 어려웠던 것이다.    
    “문화대혁명”에 우리 집도 비참하고 침통한 변을 겪었다. 우리는 가장 사랑하는 제 부모를 잃었다. 그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프기 그지없다. 

       
    “문혁”초기에 아버지는 늘 주총리의 명령을 받고 학생들을 접견했고 그들에 대한 사업을 하면서 학교를 찾아가 투쟁받는 로간부들을 빼내오군했던 것이다. 
       
    모택동은 10차례나 전국의 홍위병들을 접견하면서 번번이 부장들은 모두 자기를 배동하여 천안문에 오르게 했다. 그러지를 않는 사람은 타도되여 형편없는 모욕과 투쟁을 받게되는 판이였다. 그래서 주은래는 매번 대회전에 아버지를 보내여 부장들의 처지를 알게했고 투쟁받으면 빼내오게한 것이다.
    한번은 기계학원학생들에게 붇잡혀간 제1기계부부장 단군의(段君毅)를 찾아냈는데 홍위병들이 그에게 경극배우가 입는 붉은 치포를 입혀 무대에 올려놓고 투쟁하는 것이였다! 너무나 억이 막혀 웃지도 울지도 못했다. 아버지는 주총리의 지시라면서 그를 빼내왔다. 그 후에도 이런일이 많았다. 그러니 “중앙문혁”은 노기가 끓어올라 아버지를 “불끄는 대장”이라했다. 그러더니 그자들은 끝내 아버지한테도 손을 댄 것이다. 

      
    1966년12월 16일 오후, 강청은 6만명이 참가한 군중대회에서 주총리가 전혀모르게 돌연습격하는 방법으로 아버지의 이름을 찍어 “주영흠은 서성규찰대의 뒷심이니 군중이 보게 앞으로 끌어내라.”고 호령했던 것이다. 여지껏 착오를 범한 당원에 대해서는 비평과 자아비평의 방법을 쓰는 것이 전통이였건만 이제와서는 일개 주석의 녀편네가 6만명군중앞에 중앙의 한 부장을 제 마음대로 끌어내여 투쟁하라고 호통치면서 당의 전통적인 작풍을  멸시하고 간부의 인격을 모욕하니 이것이 그래 봉건가정이 천하를 쥐락펴락하는 전형이 아니고 뭔가. 더구나 우리 아버지는 아무런 착오도 없고 비서장으로서 총리가 맡겨준 임무를 충실히 집행했을 뿐인데. 
       
    본심이 다른데 있은 강청은 고의로 주총리를 놀라게 경고했던 것이다.
     
       
    우리는 평상시 아버지를 만날 수 없었다. 그는 매일 일찍나가고 늦게야 돌아오군했는데 그날은 오후 4시가 좀 지나서 집으로 돌아와서는 침실에 들어가더니 침대에 훌렁 눕는것이였다. 나는 감각이 이상스러워 들어나 무슨일이 생겼는가고 재우쳐 물었다. 그랬더니 아버지가 강청이 아버지의 이름을 찍었다는 것이였다!
        
    나는 주총리를 찾아갔고 주총리는 림표를 찾아갔다. 그 년대에 우리는 권세가 대단한 강청이 이름을 찍었다는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한다는것을 알고있었다. 아버지둘레에 모여 앉은 우리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말이면 아버지한테 위로가 되겠는가. 우리는 주총리는 가만있지 않으리란것을 알고있었다. 

       
    강청이 아버지의 이름을 찍었으니 집을 수색하는 학생들이 나타날 것이다. 주총리는 아버지보고 문건을 수습하여 갖고 중남해에 들어오라 그러면 보호를 받을 것이라 했다. 어머니와 나 그리고 동생들도 집을 비우고 각기 몸을 숨기였다. 나와 둘째는 사천 성도에 가서 어느 한 중학교에 들어갓다. 하지만 거기에 가 잇으니 부모님들이 시름놓이지 않아 북경소식을 알아내느라 매일 사천성위에 가서 거기 문앞의 대자보판에 붙은 대자보와 신문들을 살피군했다. 
       
    그러다가 하루는 내가 마침내 한 대자보에서 강청이 내뱉은 모진 말 한마디를 발견했다.
        
    “서성규찰대의 뒷심을 붙잡아 총살해야 한다” 는 것이였다.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기절해 넘어질번했던 나는 돌아오자 통곡하면서 꼭 북경에 돌아가 아버지를 보리라고 마음을 도슬려 먹었다. 
           
    일체불구하고 북경에 와보니 집은 언녕 홍위병들이 란장판으로 만들어놓앗는데 벽과 나무에는 온통 “주영흠을 타도하자!”는 구호들이 붙어있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중남해에 안전하게 있으니 우리는 시름놓았다.     

                         
       (3). 중남해의 “불끄는 대장”         

    “문화대혁명”이 일어난 후 중남해에서 많은 집들이 3일내에 쫓겨나다싶히 떠나갔는데 북구에는 주총리와 리선념부총리집밖에 남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거기가 어느덧 비판투쟁받는 부장들이 밥을 먹고 잠자고 휴식하는 안신처로 변해버렸다. 주총리는 적지 않은 부장들을 이곳에 이사를 시키기도했다. 
       
    그러니 담이 커진 홍위병들은 여기까지 달려들어 사람을 붙잡아다가 비판투쟁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이 비바람막이 대피소의 련락원질을 해야했던 것이다. 잡혀나가 투쟁받는 사람은 그 누구나 다 우리 아버지에게 부탁했던 것이다.
       
     “로주, 내가 만약 돌아오지 않으면 천만잊지 말고 총리께 알려서 나를 구하게 해주오!”  
       
    그야말로 눈물이 나는 부탁이였다. 
       
    아버지는 부탁을 잊지 않고 잡혀갔던 사람이 돌아와야 시름을 놓았다. 아버지는 이제는 이렇게 중남해의 “불끄는 대장”이 되었던 것이다. 
       
    그때 하룡(賀龍)과 우란부(烏蘭夫)큰아버지가 비판투쟁을 제일심하게 받았는데 아버지는 주총리가 시키는대로 그들을 서산의 어느 한 은밀한 방아다 숨겨 보호했던 것이다.
     
       
    그러나 형세는 점점 더 악화되기만해서 중남해란 이 바람막이 대피소도 더는 안전지대가 되지 못했다. 하여 적지 않은 부장들은 부득불 중남해를 떠나 다시금 군중속에서 풍운이 끓어번지는 험악한 세월에 제 운명을 되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이때는 중남해의 북구에 주총리와 리선념큰아버지네 집을 내놓고 곡목(谷牧), 여추리(余秋里)와 아버지 이렇게 세사람밖에 더 남지 않았는데 어떤때는 진의(陳毅)큰아버지도 피신하느라 와있기도 했다. 솔직히 말해 곡목과 여추리큰아버지는 사업을 하지 않고 회의에 참가하는데 그치였던 것이다. 했기에 그때 여추리큰아버지의 이름은 언제나 마지막에 놓였는데 신문보도에 보면 “회의에 참가한 이로 또 여추리가 있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우스개로 여추리큰아버지를 “또있다”로 부른 것이다. 


    아버지와 여추리, 곡목은 중남해에서 근 2년을 함께지냈다. 가장 험악하고 어려웠던 그 세월에 그 세분은 락천적으로 나날을 보냈다. 오늘은 뭣을 먹을가 무슨 술을 마실까해서는 집에 전화를 하여 가져가게 했던 것이다. 세분은 모태주(한병에 4원각수였다.)를 즐기였는데 우리 세집에서 륜번으로 술과 고기와 차를 날라갔다. 그때 우리 집이 제일가깝다보니  자연히 좀더 날라가게 되였다. 중남해북문으로 물건을 들여보내는것이 우리 형제들이 제일 즐겨하는 일거리였다. 아버지를 볼수 았었으니까. 
       
    어떤때는 세분이 다 나와서 날라가는 음식을 받군했다. 
      
     “꼬마새기, 오늘은 무슨 맛있는걸 가져왔냐?”
        
    그들은 늘 웃으면서 받았다. 

       
    후에 모택동은 간부는 “57간부학교”로 가고 학생들은 하향하라고 했다. 전국은 부득불 그의 호소에 따라야 했으니 수없이 많은 집들에서 친인을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은 것이다. 부처가 갈라지고 부모자식이 헤여지는 비극은 붉은기와 구호소리에 가리워지고말았다. 우리집의 식솔 7명은 다섯곳에 갈라졌다. 아버지는 둘째녀동생과 14살인 남동생을 데리고 녕하의 평라(平羅)에 있는 국무원57간부학교(그곳이 본래는 로개농장이였다)에 갔고 어머니는 하남에, 작은 녀동생은 섬서 연장현(延長縣)에, 셋째녀동생은  산서의 대동(大同), 나는 천진의 정해(靜海)에 갔던 것이다. 단란하던 한가족이 이같이 천리넘는 사처에 흩어지고 만 것이다. 하여 성격이 그같이 활달하던 어머니였건만 자식들 생각과 걱정에 거의 정신병에 걸릴 지경이 되고만 것이다.
     
       
    1970년좌우라고 생각된다. 아버지는 녕하에서 심장병에 걸리였다. 심근경경색이였다. 이 일을 주총리가 알고 지시했다. 
       
    “주에게 알린다. 안심하고 정양하여 온정되면 북경에 돌아와 치료하기 바람.” 
       

    주총리의 지시는 아버지가 병을 전승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정신지주였다. 아버지는 57간부학교에 있는 북경분들의 관심과 보살핌으로 무사히 북경으로 돌아와 부외병원(阜外醫院)에 입원했다. 아버지가 그 병원에서 치료받고 병이 나아 집에 돌아와 휴양하는 기간에는 사업을 하지 않았으니 그것이 일생에서 처자와 제일 즐겁게 보낸 나날이였을 것이다. 

       
    잊지 못할것은 손님이 없는 날 밤이면 집식구가 한데 모여 함께 모주석의 시사거나 아니면 고문시사를 읊은 것이였다. 우리는 또한 함께 노래를 부르거나 경극노래를 불렀는데 아버지와 어머니는 다 곧잘 불렀던 것이다. 우리가 제일 즐겨부른것은 “우리는 태항산우에서” 등 옛혁명노래였다. 아버지는 나에게 경극의 <<打漁殺家>>를 배워주기도 했다. 

       
    그때 우리집에 오는 손님이 아주많았는데 왕진(王震)큰아버지는 늘오는 상객이였다. 한번은 그가 아버지에게 자기는 옛동지들을 자주가서 보려해도 국무원기관사물관리국에서 매달 기름값을 몇십원씩 떼내니 차타기가 힘들거니와 생활이 곤난해져 박해받는 치구들과 그 친척들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였노라 하소했다. 아버지는 그 말씀을 듣더니 총리판공실의 오경동(吳慶彤)아저씨께 전화를 쳐 왕전동지는 모주석과 총리를 위해서 사업하는 것이니만큼 차기름값을 다시는 받지 말라고 했다. 

       
    왕전큰아버지는 우리 집에 올적마다 편지를 갖고왔는데 그것은 다가 박해를 받고있는 동지들과 그의 친척들이 총리에게 구원을 바라는 것이였다. 왕전큰아버지는 그것을 아버지에게 줘서 총리께 전달하게 했다. 이러다보니 왕전큰아버지와 아버지는 어느덧 로간부와 총리사이의 “민간련락원”이 되어 허다한 어려운 점을 해결해주었던 것이다. 

       
    주은래총리의 보호하에 우리 집 식솔은 북경에서 이사를 하지 않고 식솔이 다시모였거니와 아버지의 월급도 깎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충격을 받은 허다한 집 자식들, 지어는 외지성위의 아이들까지 북경에 왔다가는 우리 집에서 먹고 자고했다. 우리 집살림을 관리하는 보모가 대략계산한것만도 외지사람이 와 식사를 한 이가 매월 100여차, 어느 한달은 207명이였다고 한다. 


                (4). 노파심에서 거듭충고했다 
          
    1972년에 모택동은 네사람을 이름찍어 검사서를 쓰게 했다. 호요방(胡耀邦), 림호가(林乎加), 소진화(蘇振華)와 우리 아버지였는데 검사에 통과되면 사업을 맡긴다는 것이였다. 그때의 습관대로 말하면 “해방”하리라는 것이였다. 그런데 이런 분들은 다가 오랬동안 사업을 리탈하다보니 상류사회에 새로생겨나 류행되고있는 어휘를 모르기에 우리 몇집 자녀들이 능력을 발휘야했던 것이다.  
       
    아버지와 호요방큰아버지 그리고 나와 호덕평(胡德平)은 함께 검사서를 어떻게 쓸것인가고 상의했다. 호요방큰아버지는 골기있는 분이여서 견결히 “자본주의”착오를 범했다고 승인하지 않으리라했다. 그러면서 아버지보고 서성규찰대안건을 뒤엎어버리라 했다. 아버지와 나는 재삼숙고한  끝에 이것은 주총리와 련관되는 일이니만큼 책임을 절대 그에게 밀지 말고 아버지가 혼자 끌어안기로 했던 것이다.
     
       
    모두들 검사서를 올리바치였는데 듣자니 아버지의 검사가 모택동과 총리의 긍정을 받았다고 한다. 중앙에서는 검사서를 찍어 각지에 매려보내여 해방시킬 사람들이 보고 본보기로 삼게 하려했다. 기실은 로동지들을 해방시켜 차츰 공작을 회복하게 하자는 준비였던 것이다. 

      
    1973년, 오경동삼촌이 아버지를 찾아와 총리의 배치인데 판공실까지 준비했노라고 알이였다. 아버지는 국무원에 다시금 출근하기가 소원이였건만 이때 과학원원장 곽말약이 아버지를 끌어당겼던 것이다. 이름을 딱 찍어 요구하니 주총리는 안면을 봐서라도 거절할 수 없었다. 하여 아버지는 사업자리를 과학원으로 옮겨간 것이다.
     
       
    그는 과학원에 가자마자 고능소건설 등 새 사업과 맏다들이였는데 양진녕(楊振寧)과 리정도(李政道)의 건설방안이 달랐다. 아버지는 이왕년과 같이 정신을 집중하여 전문가들의 토론에 참가하고 결책에 참가했다. 그는 늘 가속기, 격광, 핵물리 참고자료들을 집에 갖고와서 나의 애인더러 자세히 보라고 했다. 아버지는 료해가 깊어진 후에야 파악이 있게 과학원의 당핵심소조와 중앙의 전위회에 참가했다. 

       
    진운(陳云)의 부인 우약목(于若木)역시 과학원에서 사업했다. 우아주머니는 “문혁”초기에 강청의 대자보를 써서 그의 사치하고 부패함을 폭로했다. 그랬다하여 반란파는 그를 붙잡고 놓지 않았거니와 당적까지 지워버리고는 식물원에 하방시켜 일을 하게 하면서 집에 돌려보내지도 않았던 것이다. 
       
    이 일은 알게 된 아버지는 반란파를 찾아가 우약목동지는 아주 정직한 사람이다, 그가 대자보를 쓴 것은 그 어떤 요언을 조작하자고 그런것도 아니것만큼 응당 당적을 회복하고 사업을 하게해야 한다고 내심하게 타일렀다. 그렇게 몇 번 설복한 끝에 우아주머니는 마침내 당적을 회복하고 사업을 다시시작하면서 집에도 가게되였던 것이다. 
       아버지는 진운큰아버지를 찾아가 친히 이일을 알려주었다.    진운큰아버지는 심리상 큰 안위가 되었지만 캐듯이 물었던 것이다.    
    “그가 그래 이제는 집에 올 수 있단말이지? 당적을 회복했단말이지? 이제는 당내문건을 볼수도 있단말이지?”
        
    아버지는 일일이 그렇다고 긍정적으로 대답했다. 그러니 진운큰아버지는 마침내 마음놓여 하하 웃었던 것이다.   

        (5).그는 비판투쟁을 받다가 쓸어졌다       

    1974년에 아버지는 국무원에다 당산에 가능하게 큰 지진이 일어날것이라고 보고를 올리였다. 

       
    그 전해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녀동생들은 다가 외지에 가 병사질을 하다보니 집에는 나와 애인이 남아 아버지를 돌보면서 가정을 유지했던 것이다. 

       
    그때는 지진국이 과학원의 관할내에 들었기에 아버지의 지도를 받았던 것이다. 1974년도 하반년부터 우리 집 벽에는 지진형세도 두장이 걸렸는데 아버지는 돌아오면 늘 지진국의 자료를 연구하였다. 형태지진과 발해지진이 있은 후 대다수의 전문가들이 료남(遼南)은 50년내에는 큰지진이 없으리라 여겻고 어떤 사람은 5ㅡ6급지진은 있으리라 했다.  이럴 때 유독 북경지진대의 경경국(耿慶國)만은 1ㅡ2년내에 료남에서 7급이상지진이 일어난다고 주장한 것이다. 

       
    경경국은 중국과학기술대학지구물리계지진전업의 졸업생이다. 주총리는 1970년 춘절에 경경국과 다른 두명의 쏘련류학생과 밤을 새가면서 그들이 투신하여 연구하고있는 지질예측사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사업을 잘해줄것을 부탁한 바 있다. 
       
    경경국은 우리 나라가 서주이래의 간조(干早)와 지진에 관계되는 력사기재를 보고 조진리론(早震理論)을 제출했던 것이다. 그는 1972년 화북과 발해지구에서 백년동안에 대한(大旱)을 만나적이 없으니 8급지진이 아니면 7급지진이 일어날 배경이 구성된다고 하면서 1974년 5월 31일에  7급이상지진의 중기에 이르렀음을 예측했다고 보고서를 써 올렸던 것이다. 

       
    아버지는 경경국으로부터 하북남부와 산서접경지대에 있는 한재가 특히 심한 지구에서 이미 발생한 형태지진정황을 료해하고나서 재차 강진이 일어날지 어쩔지를 단정하려던 바로 그때에 국무원에서는 그가 써올린 보고에서 이 위험구와 료남과 당산지구에서 가능하게 발생할 강진중기예보에 따라 “경진당장(京,津,唐,張)협작조와 발해협작조를 설립하고 따라서 이 두 개 위험지구의 단임감측(短臨監測)을 가강히 해야한다”는 구절을 지워버렸던 것이다. 

       
    아버지는 6월 15일에 과학원에서 국무원에 써올리는 보고서를 서명하여 발송하였는데 거기에는 지진전문가 세사람이 제출한 의견을 소개했다. 
       
    “지진이 있다여기고 경각성을 높이여 6급이상지진의 돌연습격을 예방하며 몇 개 위험지구의 공작을 꼭 가강히 해야한다”
     
       
    그는 그리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국무원의 일상사업을 책임지고있는 리선념을 찾아가 구두로 회보하고 설명했던 것이다. 
       
    국무원은 1974년 6월 29일에 과학원의 보고를 비준하여 “國發〔1974〕69號文件”으로 만들어 각 성과 구에 내려보냈다. 
       문건에는 다음과 같이 알려주었다.    
     “보고에는 일부지방에서 금년과 명년내에 가능하게 강진이 발생한다고 했다. 이건은 짐작인바 가능하게 발생할 수도 발생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발생한다여기고 우환이 없도록 준비해야 한다.”
     
       
    발해지구협작조는 주요하게 심양지진대대와 료녕지진판공실에서 단임감측(短臨監測)을 시작했는데 아버지는 발해지진이 일어나기 하루전에 지질국장 류영용(劉英勇)을 현장에 보내여 단임감측예보를 발포하고 군중들을 조직하여 지진을 피하도록 했던 것이다. 그때는 춥고 땅이 얼었기에   군중들이 집으로 돌아올가봐 근심이 되고 겁도 나서 기층방영대를 동원하여 야외에서 영화를 돌려 군중들이 집으로 돌아가지 않게 유도했던거다. 
       
    아니나다를가, 1975년 2월 4일 해성(海城)에서 과연 7.3바르지진이 일어났다. 진재에 많은 집이 무너졌다. 하지만 인원상망은 크지 않았다. 지어 지진구역의 어떤 공사는 한사람도 죽지 않은 것이다.
     
      
     해성지구대지진 후, 각지는 매일 정황을 보고로 올리였다. 당산 화학비료공장에서는 지광(地光)이 났고 통현은 우물물이 라돈(radon, Rnㅡ 鐳射氣)량의 변화를 일으키는 등 현상이 나타났다고 했다. 아버지는 매일 이런 보고를 자세히 듣고 보고하면서 연구했다. 

       
    아버지는 1975년 1월에 교육부에 상임했다. 하지만 과학원의 사업을 일시 넘겨주지 못했다. 그는 과학원의 임직을 떠나는 시각까지도 침실벽에다 의연히 지진도를 걸어놓고 있으면서 매일 지진정황간보를 명심해서 여겨보았던 것이다. 
       
    아버지는 과학원을 떠나기전에 친히 서명한 보고서를 올리였는데 경진당장에서 1ㅡ2년내에 가능하게 재차 6바르이상의 파괴성적인 지진이 일어나리라고 했다. 
       한데 가석하게도 “반우경번안풍”운동에 지진국의 반란파는 경진당장협작조는 아버지가 만든 “전정”기구라면서 협작조를 탈환에 빠지게 만들었거니와 경경국이 7월중순에 5항의 기상지표에 따라 세운 단임감측마저도  압제했던 것이다. 
       
    1976년 7월 28일에 당산에서 7.8바르지진이 일어났고 같은 날 란현(灤縣)에서도 7.1바르지진이 일어나 상망이 참중했다. 
          
    한데 아버지는 그해의 4월에 “사인방”의 박해를 받아 사망하였기에 당산대지진을 보지 못했다. 나는 당산지구청룡현위서기가 스스로 “國發〔1974〕69號文件”을 집행하였기에 지진에 집들이 대량으로 허물어지면서도 사람은 하나도 죽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것은 아마 아버지에 대한 가장 좋은 애도일 것이다.  


      (6). 교육부장은 속죄양이였는가? 
          
    아버지는 성질이 좋은 분이였다. 그러면서 과감히 원칙을 견지하고 진리를 견지했으며 남을 노엽히는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는바 원칙적인 큰문제에 들어가서는 그야말로 굴강한 성질이였던 것이다. 전국제4기인민대표대회를 준비하면서 정부인원명단을 초잡을 때 주은래총리가 제기하여 아버지는 교육부부장으로 된 것이다. 주총리가 주영흠을 교육부부장으로 임명한것도 정당한 명분이 있어서였다. 교육부부장의 인선을 놓고 정치국에서는 30여차나 회의에서 쟁론이 있다가 모택동이 머리를 끄덕여서야 비로서 정해졌다. 

       
    나는 제4기전국인민대표대회를 페막하기전날의 일이 아직도 기억난다. 나와 아버지는 집에서 쏘파에 앉아 방송에서 정부사업인원명단을 선포하는 것을 듣고 있었다. 아버지가 교육부부장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내가 아버지보고 말했던 것이다. 
      
     “난 아버지가 이 사업을 하리라고 점쳤어요! 그런데 조심해요. 쏘련에서는 농업부장이 중국에서는 교육부장이 다가 속죄양이 된대요!”
        
    아버지가 말했다.
        
    “그래도 할테다. 꼭 잘해볼테다”
            
    화국봉이 아버지보고 주총리가 추천했다고 알려주더라는 거다. 
           
    등소평동지의 지도로 각항사업들은 빨리 정돈되였다. 

       
    아버지는 등소평의 지시를 견결히 관철집행했다. 아버지는 교육전선을 향해 대성질호하면서 직방 “사인방”의 독서무용론을 비판하였고 사회주의건설정황에 근거하여 실제와 부합되는 조정을 하면서 지식분자를 자산계급이라 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지금 대부분지식분자가 모두 사회주의건설을 위해 신근하게 일하고 있는데 어쩌면 자본주의란 말인가. 
           
    그는 말했던 것이다. 
      
     “지난때는 문화를 말했지만 지금은 문화를 말하지 않는다. 네개현대화를 한다면서 문화가 없어도 된다니 그게 어디 될 말인가?” “요 몇 년간에 있은 가장 큰 위기는 우리의 교육부문에서 공부를 하지 않은것이였다. 교육전선의 형이상은 너무나도 창궐했다.”
     
       
    아버지는 친히 상해 복단대학에 가서 좌담회를 열고 모주석과 주총리가 기초연구를 가강히하라는 지시를 관철하면서 대학에서는 시험을 쳐 학생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모원신(毛遠新)은 장철생(張鐵生)이 백지시험지를 바친일을 가지고 “조농경험”이라는 것을 만들어냈다. 즉 대학생은 “사에서 와 사로 돌아가는” 제도를 내와 졸업하면 반드시 농촌으로 돌아가게해야한다고 했던 것이다.
        
    아버지는 집에 돌아오자 모원신이 “사에서 왔으면 사로 돌아가야한다”는 건 진짜 바지벗고 방귀를 뀌는 격이다! 그래 농민자식은 시내로 들어올 수 없단말인가? 대학졸업생은 어디에서 수요하면 어디로 가야한다고 했다.
     
       
    아버지는 더많은 농민자식들이 대학을 다니게 하기 위해서 중소학10년제기초상에서 2년 더 배워 대학기초과정을 닦게끔 하는 방법을 구상했던 것이다. 그는 또 대채의 곽봉련(郭鳳蓮)을 만나 산서석양현에다 10년제에 2년을 더 배우는 대학의 시점을 꾸려볼 의향도 내비친적이 있는 것이다.
     
      
    지군(遲郡) 등 몇은 교육부에 배치된 나의 아버지의 언론들을 모두 적고 수집하여 두터운 주영흠 “黑話集”을 만들어냈다. 단장취의(斷章取義)라 문장의 일부분을 끊어 그 본인의 본의와는 다르게 제멋대로 꾸며 “죄”를 만들어서는 모택동에게 고발하면서 이제 두고보자고 했다. 

       
    좀지나 “사인방”은 반공을 들이대면서 결산하려고 들었다. 그자들은 “우경번안풍”을 꺾어버린다고 했다. 호요방, 주영흠, 만리, 장애평은 다가 “우경번안풍의 검은 용장”이고 등소평은 이 기풍의 근원이라 했다.  
      

    (7). 총리가 병이 중하니 “사인방”은 정식으로 군대를 일으켜 상대편의 죄를 묻다. 
       
      
    “사인방”과 견결히 맛서 싸우면서 아버지는 다시한번 주총리의 따뜻한 보살핌과 지지를 받았다. 그때는 주총리가 병이 중해 병원에 입원했기에 오래동안 보기 힘들어 종종 외우군했다. 
       
    한번은 아버지가 퇴근하여 집에 오자 나에게 알려주는것이였다. 
       
    “래일 주총리가 련합국교과문총간사(聯合國敎科文悤幹事)를 만나게 되는 데 나를 배동하라면서 한시간앞당겨 북경호텔에 가 기다리라는구나. 총리가 먼저 나를 보겠단다.”
       
     나도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마음이 흥분되면서 그를 보고싶었다. 
     그날 우리 집 식솔들은 아버지와 밤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총리의 병을 념려하여 아버지보고 서의를 보이지 말고 이제는 중의를 보이는게 났겠다고 했다. 중국의 중의들은 그의 병을 치료해낼 방법을 댈것같았던 것이다. 나는 아버지에게 그이를 만나면 나의 문안을 전달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이틑날 아버지는 오후 2시에 나갓다가 5시에 돌아왔다.  나는 아버지가 객실에 들어서기바쁘게 주총리를 만난경과를 얘기해달라고 했다.  
       
    아버지는 조용히 알려주었다. 그가 북경호텔에 간지 얼마되지 않아서 총리의 운전수가 와서 그를 맞아주엇던 것이다. 숙친한 사람지간의 만남이니 유달리 친절했다. 그는 총리의 붉은기승용차에 앉아 총리가 있는데로 갔다. 병실에 들어서자 총리는 사뭇 기쁜음성으로  말했다.
        
    “큰누나 보오, 누가왔는가구?”
        
    등어머니랑 다른 모든 사람들이 욱 다가왔다. 비서, 위사장, 호사..... 위문을 온 숙친한 이들이 오래간만이라 너 한마디 나 한마디 친절하고 뜨거운 인사말들을 했다. 아버지얼굴에는 감미로운 행복감이 흘렀다. 
      
     “전 어쩜 오래간만에 제 집에 온것만 같습니다.”
       

    친절한 인사말이 지난 후 주총리가 손짓하여 아버지만 남고 모두 방에서 나갔다. 총리는 아버지의 사업정황을 물었다. 아버지는 총리에게 과학원과 교육부의 사업에 대해서 회보했고 지군등이 방해하고 파괴한다는 것을 회보했으며 자기의 작법에 대해서 회보했다. 자기를 제일 잘 료해하고 제일관심하는 총리앞에서 그가 어찌 자기의 심경을 다 털어놓지 않으랴?

    또 한차례의 첨예하고도 복잡한 투쟁을 앞에 놓고 어찌 총리의 리해와 지지를 바라지 않으랴? 총리는 다 듣고나서 아버지의 관점에 동의하는 태도를 보이면서 명확하게 말했던 것이다.    
    “거기서 과학원과 교육부에서 한 사업들은 모두 옳은거요. 처리를 잘했구만. 그렇게 해야지!”
        
    주총리는 지군등 사람들과의 관계에 주의하고 조심하라고 부탁했다.
        
    아버지가 말했다.
        
    “제보겐 총리께선 정신이 좋으신데 너무축해졌습니다. 저는 총리께서 중의를 보이고 초약을 드시면 더 좋겠습니다. 그래도 중의가 더 방법이 있을것 같기에 권고하는 바입니다.” 
       
    주총리는 손을 저어 이대로 그냥 치료하게 내쳐두라했다. 

    북경에서 사업하고있는 어떤 오랜 동지가 아버지에게 지군 등 사람들이 아버지의 검은자료를 작성하여 모택동에게 올리였으니 그런줄을 알고 조심하라고 일깨워주었다. 
       
    1975년 10월이였다. 아버지가 중국정부대표단을 이끌고 자이르와 모리타니아를 방문하고 북경에 돌아온 그날 아침에 신문잡지에 사론으로 나간 <<교육혁명의 방향을 고치게 할 수는 없다>>를 방송했고 “사인방”은 정식으로 병력을 풀어 주영흠의 “죄”를 묻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날 저녁에 아버지를 마중하느라 비행장에 나간 나는 아버지에게  
       
    “오늘 량보일간에서 아버지께 ‘환영사’를 드렸어요.”
        
    하고 일러바쳤다.
        
    아버지는 말이 없다가 집에 돌아와 심중한 기색을 지으면서 그들은 변죽을 울리느라 포를 쏜것이라 말했다. 
                   

      (8).하늘땅을 뒤덥는 대자보로 공격         

    그때부터 아버지는 또 다시 투쟁받는 어려운 생로를 걷기 시작했다. 청화대학과 북경대학 기타 여러곳에서 주영흠을 비판하는 대자보가 수없이 나붙었다. 그 누가 말했건간에 “사인방”의 의사와 맞지 않은 것이면 다 주영흠탓이라면서 끌어 모아서 그의 “죄”에다 붙이는 판이였다. 

       
    그때 모택동이 말을 하지 않았으니 “사인방”은 등소평을 다른 눈으로 보면서도 감히 건드리지도 내놓고 공격하지도 못했다. 그러니 그저 교육부부장인 아버지가 자연히 주요공격목표로 되였던 것이다. 

       
    아버지는 심장병이 심해졌다. 그럼에도 핍박에 못이겨 청화대학에 가 자기를 비판한 대자보를 봐야했다. 온통 욕지거리와 모욕으로 가득찬 화약내풍기는 공격을 받아야 했다. 

      
     “사인방”은 대자보로 포위공격을 했지만 이겨낼것 같지 않으니 전술을 고치였다. 장춘교가 아버지를 찾아 담화하는 방식으로 착오를 승인하고 문제를 교대하라는 것이였다. 장춘교는 아버지보고 우와의 관계만 제대로 밝힌다면 너는 해탈할 것이라고 명확히 내놓고 말했던 것이다. 그 뜻이야 너무나도 빤한게 아닌가! 그들은 창끝을 주총리와 등소평에게 돌리자는 것이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언녕 자기가 모든 책임을 끌어안고 끝장을 볼 지언정 화를 절대 다른사람에게 미치지 않게 하리라 굳게 다짐했다.  
       
    두시간을 지속한 담화가 끝났다. 아버지는 그를 맛대서 얼굴을 붉히였고 장춘교는 아무런 수확도 없이 뒷걸음을 놓고말았다. 
       
    아버지는 그와 쟁론할적에 사회주의각오가 있고 문화가 있는 로동자를 배양해야한다는 모택동의 교육방침을 내들었고 장춘교는 자기의 “명언”인 “나는 사회주의풀을 가질지언정 자산계급의 싹은 가지지 않는다!”는 주장을 세웠다. 그는 마지막에는 성까지 냈던것이다. 
      
     “원 사람이 고집이 세기란, 소 아홉마리로 끌어도 못돌려세우겠네!”
        
    빤한 일이다. 그후부터 아버지의 처지는 더 험악해진 것이다. 

      
    정치적압력이 커지면서 친구들도 감히 찾아오지 못했다. 이때가 아버지에게는 곁사람의 지지가 절실했건만....  

    하루는 저녁켠에 아버지가 나와 둘째녀동생보고 왕진(王震)동지를 가보고오라면서 말했다.   
     “그한테 물어보거라,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구?”
        
    그날밤 나와 녀동생은 자전거를 타고 왕진큰아버지를 보러갔다.
        
    왕전큰아버지는 우리가 왔다는 소리를 듣더니만 높은 목소리로 들어오라면서 친히 객실로 나와 우리를 맞아주었다. 

    우리 형제가 들어서니 그는 한손에 하나씩 손잡아 끌면서 쏘파에 앉혀놓고는 집사람에게 차를 풀어오라 시키는 한편 재우쳐 묻는 것이였다.    “너의 아버지 어떠하냐? 가서 말하거라, 당은 너의 아버지를 료해하고 믿는다고!  시름놓으라고 해라!”    
    하지만 내가 그한테 아버지는 그래 검사서를 써야하는가 쓰지 말아야 하는가고 묻자 그는 머리를 짚고 깊이깊이 생각하고나서 입을 열었다.
        
    “모주석의 비평의견에 대해서는 그래도 검사해야지.”
        
    그리고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제할 수 없어서 그자들이 나라를 전부 망태기로 만들었다고 욕했다. 왕진큰아버지는 격분하여 부르짖었다.
       
    “내가 천만문에가 분신자살해서 항의할 테다!” 

       
    내가 집에 돌아와 왕진큰아버지가 한 말을 외웠더니 아버지는 눈확이 붉어지면서 말했다.
        
    “검사서를 써도 내 문제만 쓰지 책임을 절대 우에다 밀진 않을테다!”
                 
    다른분들도 여러 가지 방방법으로 우리에 대한 관심을 표달했다. 나는 동소붕(童小鵬)아저씨가 우리 아버지가 어떠냐고 묻던 일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내가 그한테 알려주었던 것이다. 
       
    “이번이는 여러분이 종자를 뿌린것이 우리 집에서 꽃이 폈어요.”
        
    소유의 로간부들의 지지를 받아서 등소평이 공작로선과 방침을 정돈했으니 이는 모두가 새종자를 뿌리게 된 것이요 “사인방”이 호요방, 주영흠, 만리, 장애평을 중점으로 혼내우는데 아버지가 교육전선의 충격대상이 되어 남먼저 북경대학과 청화대학에서 써붙이는 대자보에 포위되여 공격을 받으니 우리 집에 먼저 꽃이 핀 것으로 형용이 되는 것이다. 
       
    그들의 목표는 등소평을 때리고 병상에 누워있는 주은래총리를 자극하자는게 분명했던 것이다.         
          
       
    (9). 투쟁회장에서 쓸어져 4시간이나 혼미상태에 있었건만 
     1976년 4월 5일 청명절. 인민군중은 천안문광장에서 자발적으로 총리를 추도하면서 “사인방”에 대한 증오와 분노의 불길을 토해냈다. 그러나 인민군중의 반항과 분노의 불길이 “사인방”을 수그러들게하지는 못했다. 교육부는 지군 따위의 장악하에 아버지를 점점 더 험하게 투쟁했다. 그들은 아버지가 심장병이 있다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10여일이나 련속 비판투쟁대회를 열고 앞에 내세웠다. 매일 오전, 오후, 밤 세 번씩이였는데 크고 작은 비판대회가 련이어졌다. 그들은 그야말로 아버지를 죽여버려야 통쾌할 심창이였던 것이다. 
       
    4월 12일 오전, 아버지는 투쟁받다가 돌연히 혼미하여 쓰러진것이 깨나지를 못했다. 당시의 위생부장이였던 류상(劉湘)은 아버지를 병원에 입원하지 못하게 하면서 그 무슨 “북경병원은 자본주의길로 가는 자의 대피소인가!”하는 따위의 소리를 죄쳤던 것이다. 정신이 혼미한채 쓰러진 아버지는 구급을 받지 못하고 4시간이나 그 자리에 있었다. 마지막에는 그래도 오경동(吳慶彤)이 기등규(紀登奎)를 찾아가 비준받고 화국봉(華國鋒)도 비준해서 전력적인 구급을 시작했고 병원에도 들어가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미늦었다! 손쓸 틈이 없었다! 아버지는 박해를 받다가 세상을 뜨고만 것이다. 한마디 류언도 남기지 못하고 눈을 감은채 저 세상으로 간 것이다. 59년밖에 살지 못했다. 그의 비서, 운전수, 경위원, 취사원이 함께 눈물을 흘리였다. 비서 허영약(許永躍)은 그의 손을 꼭 잡은채 태평실까지 바래였다. 비장했던 그 순간을 영원히 잊을 수 없다. 

       
    아버지의 골회함은 1년넘어 집에 두었다. 이듬해인 1977년 8월 28일에야 비로서 평판하고 추도회를 륭중하게 열었다. 경애하는 등소평큰아버지, 진운큰아버지, 리선념큰아버지 등 1천여명이 넘게 추도회에 참가하여 견정불굴한, 꺾어질지언정 굽어들지 않은, 목숨을 국가의 사업에 바친, “사인방”의 박해를 받아 죽은 공산당원에게 최후의 경의를 표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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