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유세(孫維世) 녀, 1921년 생.본명은 손광영(孫光英). 다른 이름은 리림(李琳). 사천남계사람. 1936년에 천일영화공사배우로 들어갔다. <<왕선생기협전>> 등 영화에서 배역으로 나왔다. 1937년 련화영업공사에서 영화 <<도금한 성>>의 주역을 맡았었다. 후에 연안에 갔는데 거기서 항일군정대학과 마레주의학원에서 학습했다. 1938년에 공산당에 가입. 이듬해인 1939년에 쏘련에 가서 선후하여 모쓰크바 동방대학, 모쓰크바희극학원을 다녔다. 1946년에 조국에 돌아와 섬서, 산서등지에 가서 토지개혁에 참가했다. 해방전쟁시기에 선전사업을 했다. 건국후 모택동을 따라 쏘련을 방문하면서 번역조조장을 맡았었다. 1950년 후에 중국청년예술원연출 겸 부원장이 되었고 중앙희극학원연출간부훈련반주임, 중앙실험화극원총연출, 부원장을 지내면서 중국극협제1기상무리사, 제2기리사. 제2기부터 4기까지 전국정협위원을 지냈다. 그가 연출을 맡은 화극으로 <<빠웰 꼴챠낀>>, <<만니아 외삼촌>>, <<서쪽에서 장안을 바라본다>> 등이 있다. 1954년에 동화편 <<흰토끼>>연출을 맡았었다. 창작한 극본으로 <<처음뜨는 태양>>이 있고 번역작품으로는 <<한 노복에 두 주인>> 등이 있다. “문화대혁명”때 박해를 받다가 1968년에 감옥에서 참혹하게 죽었다.
손유세의 아버지 손병문(孫炳文)은 주은래의 전우인데 1927년 대혁 때 희생되였다. 그때 손유세는 5살밖에 되지 않았는데 형제넷은 어머니의 슬하에서 어렵게 자라났다. 항일전쟁이 일어나자 손유세는 무한에 있는 팔로군 판사처를 찾아가 연안에 가려했으나 아는 사람이 없어서 받아주지 않았다. 하여 그는 문앞에 앉아 슬피 울기만 했다. 그때 그의 나이가 16살이였는데 외출했던 주은래가 마침 돌라와 알아보고 받아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를 양딸로 삼았다. 후에 주은래는 그를 데리고 연안에 갔다. 1939년에 주은래는 팔을 상하여 쏘련에 가 치료하게 되었는데 그 걸음에 양딸을 데리고 갔다. 주은래가 상을 치료하고 돌아왔지만 손유세는 쏘련에 남아 그냥 공부했다. 전쟁년대여서 조건이 아주 어려웠지만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모쓰크바동방대학과 모쓰크바예술학원을 졸업했다. 타고난 아릿다운 용모와 함께 총명하고 정직활달한 성품으로 하여 그는 “홍색공주”로 불리웠다. 라서경대장(羅瑞卿大將)은 그의 출중한 예술적 재능을 알아보고서 감탄하여 일찍이 “손유세는 우리 당이 길러낸 희극전문가일뿐만 아니라 홍색전문가다”라고 평가한 적이 있다.
리립삼과 림표지간에 원한을 맺게 된 것은 손유세와 관계된다. 1946년 10월이였다. 리립삼의 처 리싸(李莎ㅡ로씨아족)가 모쓰크바에서 중국으로 올때 손유세를 데리고 리립삼이 있는 할빈으로 와서 우선 한집에 있었다. 리립삼은 그해의 1월에 먼저 쏘련에서 조국으로 돌아와 군조부동북삼인조(軍調部東北三人組)의 성원이자 수석대표로서 미국에 의지하여 내전을 일으키려고 음모를 꾸미는 장개석과 날카롭게 맛서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한데 알고보니 제 처가 데리고 온 20살 나이에 용모가 삐여지게 아름다운 손유세는 아직 시집을 가지 않은 몸이거니와 림표가 눈독을 들이여 그 가정이 편안하지 않은것이였다. 형세가 그닥지 않음을 보아낸 리립삼은 그때 동북에 와있는 림표몰래 비행기를 얻어 손유세를 주은래가 있는 연안으로 보낸것이다. 그가 그렇게 하게 된 것은 손유세가 바로 주은래의 양딸이기 때문이다. 리립삼은 그를 그렇게 보내버렸으니 시름놓으면서 이제는 아무일도 없으리라고 여겼다. 그런데 일이 이것으로 끊나지 않을 줄이야 어찌알았으랴. 1949년도 봄, 중앙기관이 북경에 들어온 후 한번은 리립삼이 북경호텔에서 머리를 깎는데 마침 주은래도 그리로 왔던 것이다. 오래간만에 만나 얘기를 하던 중 주은래가 문득 다른 화제를 내놓았다. “립삼, 당신은 쓸데없는 일에 참견하기 좋아하네.” 리립삼은 그가 무슨 일을 놓고 말하는 지 몰라 물었다. “은래, 내가 무슨 일을 삐치기 좋아하던가?” 주은래가 말했다. “할빈에 있을적에 손세유의 일이지, 뭐. 내한테 전보까지 칠건 뭐요, 걔가 그래 다시 할빈에 가서는 안된단말이요?” 이 말에 리립삼은 제꺽 변명쪼로 말했다. “전보라니! 난 종래로 전보라곤 친적이 없는데!” 주은래는 의연히 마뜩잖아 하면서 나무랐다. “왜 없다구? 내가 당신네의 전보를 받았는데두! 승인하지 않다니?” 리립삼은 주은래가 성까지 내는지라 더 말하지 않았다. 후에 조사해보았더니 전보는 림표의 녀편네 엽군이 친 것이였다. 그녀는 손유세가 가까이에 있으면 림표가 변심하여 자기를 차버릴 것 같아 리싸의 이름으로 “우리 집은 너를 환영하지 않으니 할빈에 오지 말라”는 전보를 손유세에게 쳤던 것이다. 리립삼은 그따위 시끄러운 일 때문에 머리를 앓고싶지 않아 주은래를 다시찾아 해석조차 하지 않은 것이다.
기실은 손유세가 조국으로 돌아오기 5년전, 림표가 쏘련에서 병치료를 하면서 손유세의 총명과 미모에 반해 짝사랑을 했던 것이다. 1938년 3월 2일이였다. 그때 산서에 있었던 림표는 제편사람의 보초병이 일본병으로 잘못보고 총을 놓는 바람에 상을 입었다. 그래서 쏘련으로 치료를 떠난건데 “섬북의 꽃”이라 소문난 처 장매(張梅)를 데리고 갔던 것이다. 그때는 당중앙에서 많은 혁명렬사와 간부의 자녀들을 쏘련에 보내여 공부시켰다. 구추백의 딸 구독윤, 손병문의 딸 손유세, 채화삼의 아들 채박. 모택동의 아들 모안영과 모안청, 주덕의 딸 주민 등등. 젊은 그들은 평형관대첩으로 하여 “장승장군”이라 이름떨친 림표를 몹시 숭배하면서 전투이야기를 들으러 가군했다. 그 속에 손유세도 끼였는데 그의 자색에 림표는 마음이 싱숭생숭 동했던 것이다. 어느날 오후, 림표는 처 장매가 친구집에 놀러가니 손유세를 단독으로 료양원에 오게해놓고는 그한테 애모의 정을 내비치였다. 그는 자기와 장매지간은 “고통스러운 애정”이라면서 이제 당장 갈라지고 손유세와 결혼하겠다는 것이였다. 사상준비가 조금도 없었던 손유세는 어떻게 했으면 좋을 지 몰라했다. 1942년 1월, 중국으로 곧 돌아가게 된 림표는 떠나기 직전에 자기보다 나이가 13살이나 어린 손유세를 데리고 모스크바강변을 거닐었다. 림표는 손유세에게 자기는 이미 장매와 갈라졌다고 알려주면서 이제 며칠지나 조국으로 돌아갈것이니 자기를 따라 함께 가자고 했다. 손유세는 완곡히 거절했다. “참 안됐어요. 난 같이 갈 수 없어요. 난 지금 연출계를 다니고있는데 졸업도 하지 못했어요.” 림표는 강박하지 않았다. “그럼 내가 먼저가지. 난 꼭 기다리겠어.” 손유세는 급히 말했다. “아니, 절 제발 기다리지 말아요. 난 아직도 4년은 더 배워야 해요!” 림표가 말했다. “4년이 뭐야, 더 길어도 난 기다릴 수 있어. 난 널 꼭 내 각시로 만들말테야.” 림표는 조국에 돌아와서는 제 낙언을 지키지 않았다. 얼마지나지 않아서 엽군과 결혼하였거니와 1945년에 아들 림립과(林立果)를 보았던것이다.
1949년 10월, 손유세는 리싸, 림리를 따라 할빈에 오자 림표를 존경하는데서 례절성적인 방문을 했다. 손유세가 왔다는 말을 들은 림표는 친히 나서서 열정적으로 맞이했거니와 연회를 크게 차리기까지 했다. 그때는 림표가 동북국에서는 둘도 없는 인물로서 한손으로 하늘을 가리우는 태상황(太上皇)이나답지 않아 신심만만하여 어떻게 하면 손유세를 제 품에 넣을건가고 생각하는 판인데 리립삼이 그를 자기모르게 연안에 보내버려 미몽은 그만 깨지고 만 것이다. 하여 림표는 리립삼을 뼈에 사무치도록 미워하게 된 것이다.
1967년 9월, 강청은 진백달과 함께 북경의 대전원교(大專院校)들의 홍위병을 접견할적에 이구동성으로 중국인민대학의 부교장 손앙(孫泱ㅡ손유세의 오빠)은 나쁜사람이다, 그는 일본특무고 쏘련수정주의특무고 국민당특무라고 했다. 그야말로 험악한 날조,무함이였다. 며칠 후 손앙은 인민대학의 지하실에서 참혹하게 살해되였다. 비분이 끓어오른 손유세는 주은래한테 고소하는 편지를 썼고 강청에게도 편지를 써서 중앙에서 사람을 파견하여 조사해보라했고 했다.
1967년 12월에 강청은 또 “특무혐의”라는 죄명으로 손유세의 남편 김산(金山)을 감옥에다 집어넣었다. 그러고나서는 “죄증”을 찾는다는 리유를 달고 홍위병들을 시켜 집을 수색하게 해서는 손유세가 모아둔 많은 편지와 사진들을 걷어갔다. 강청은 거기서 손유세가 주은래와 모택동에게 쓴 편지를 골라냈다. 일찍이 지독한 보복적인 야심을 품어온 강청은 그 편지들을 보고는 분이 치밀어 펄펄 뛰다가 휑하니 주은래를 찾아가 행악질을 했다. 그녀는 주은래가 제 양딸을 시켜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을 반대한다면서 그의 뺨을 쳤다. 주은래는 이같이 큰 모욕에도 아무말없이 묵묵히 손유세를 체포한다는 종이장에다 제 이름 석자를 써넣고말았다. 그러는 수 밖에 없었다. 중앙전안조가 비교적 특별한 범인을 체포 할 때면 주은래의 서명을 받았는데 그 가운데는 주은래의 친동생 주은수(周恩壽), 왕광미의 오빠 왕광기(王光琦)도 들어 있다. 이리하여 손유세는 강청이 지어낸 “쏘련수정주의특무”라는 죄명으로 체포되였다. 1968년 3월 1일이였다. 잔인한 악한들은 그의 손목에다 쇠고랑을 채워 북경시공안국감옥에다 집어넣고는 실한오리 없는 알몸으로 만들어 만신창이 되도록 뚜드려팼다. 그자들은 손유세가 때려서는 숨이 지지 않을것 같으니 1968년 10월 14일에 머리에다 대못을 박아 죽이였다. 그때 그의 나이 47살이였다.
2.불행을 심은 모쓰크바행 1949년 봄, 북평(북경)이 평화적으로 해방되자 손유세는 다른 문예공작자들과 함께 양걸대를 이끌고 북평성으로 들어왔다. 7월, 세계청년련합회는 웽그리아의 수도 부다페스트에서 제2기세계청년련환절을 열었는데 손세유가 문예계의 청년대표로 입선되여 중국대표단성원이 되었다. 구라파에 머물러있는 기간에 그는 세계“청련”조직을 따라서 동구라파의 국가들을 참관했다. 당년에 히틀러가 자살한 지하실에서 그는 반파시스기념품으로 돌 한쪼각을 주어왔다. 세계청년련환절활동은 근 반년만에야 결속지었던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그는 뜻밖에 모쓰크바에 주재한 중국대사관에 들리라는 장문천의 전보를 받았다. 후에 연유를 알게 된 것인데 그더러 사철(師哲) 등과 함께 쓰딸린을 회견하는 모택동의 통역을 서라는 것이였다.
그해의 12월 21일은 쓰딸린의 70탄신이다. 모택동은 진백달, 사철 등 여러명으로 구성된 대표단을 거느리고 기차편으로 할빈, 만주리를 거쳐 세계각국 공산당수령들이 쓰딸린의 만수무강을 축수하느라 모이는 모쓰므바로 갔다. 모택동과 쓰딸린은 서로 전보로만 통했지 만난적은 없었다. 쓰딸린은 자기를 만나러 온 모택동을 보고 이번에 쏘련을 방문하는 목적이 무엇인가고 물었다. 그러니 모택동은 유모아적으로 내가 이번에 쏘련에 온건 주요하게는 비평을 들어보고 경험을 학습하자는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나서는 덧붙이기를 굳이 요구를 말하라 하면 “첫째는 먹기 좋은것, 둘째는 보기 좋은것, 셋째는 내싸는것”이라했다. 그의 이같은 유머를 쓰딸린이 알아들을리가 만무였다. 그는 이마쌀을 찌프리면서 그건 대체 무슨말이냐, 그래 모택동이 대체 무슨요구가있는가고 재차물었다. 모택동의 통역을 맡은 사철도 어떻게 통역했으면좋을지 몰라서 땀을 빼다가 모택동에게 물어서야 알려주었다. “‘먹기좋은것’이란 음식을 놓고 말한게 아니다. 새중국이 갖 생겨나서 내버려두었던 많은 일들이 손보기를 기다리는데 중국이 빨리 부유해지자면 어떤 새 건설항목들은 쏘련형님의 원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보기좋은 것’과 ‘내싸는 것’이란 새중국이 성립되니 미국을 위수로 한 서방의 집단들이 정치상에서 중국을 고립시키고 경제상서는 무역을 금지시키고 군사상에서는 포위하고 봉쇄하는 정책을 쓰고있지 않는가, 이런 상황에서 모택동의 희망은 생존과 평화적인 건설공간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쏘련의 도움이 필요하니 동맹호조조약을 맺자는 것이다.” 그리고나서 보충하여 중장철로주권과 그때까지 쏘련이 의연히 조차하고있는 대련과 려순항의 기한문제에 대한 내용을 말했다. 쌍방이 경제기술원조에 대해 토론할 때 쓰딸린이 모택동을 향해 물었던것이다. "중국은 목전에 경제건설계획이 어떤가? 국방, 중공업, 농업, 수리, 전력, 교통, 채광, 준비에는 어떠한 항목들이 있는가? 어느방면의 기술자가 필요한가? 수요하는 자금은 얼마인가? 기계설비수요는?" 한데 이럴변이라구야! 모택동이 언제 그런것들을 생각이나했으랴?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전쟁문제와 권력장악대계만 꽉 차있다보니 쓰딸린이 제출한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거니와 속수무책이였던것이다. 쓰딸린은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모택동동지가 우수한 군사가이고 정치가라는것을 알고있소. 이제방금 정권을 취득했으니 경제사무에 대해서는 미처 숙실할 새 없을거요. 그러나 대표단에 아무튼 경제전문가야 있겠지?" 모택동은 머리를 가로젓고나서 말했다. "나는 몇명 당내의 철학가를 데려왔습니다. 말하자면 내옆의 이 진백달동지와 같은 . 나는 맑스주의철학을 놓고 토론해볼가합니다." 쓰딸린은 의아해하면서 그래 너는 철학문제를 토론하러온건가, 그렇다면 주은래를 보내라, 그가 오면 경제원조문제를 다시금 상의해보리라고했다. 그러면서 쓰딸린은 중국에는 류소기, 주은래가 경제를 알고 국가관리를 알고 국가건설을 안다고 미꼬양이 자기한테 알려주더라고 하면서 주은래는 그야말로 얻기힘든 총리고 인재라했다. 모택동은 대방을 다시보았다. 쓰딸린은 자기는 둬봐야 소용없다면서 모택동에게 문건을 하나 주었다. 모택동은 그것을 받아 사철더러 중문으로 번역하라했다. 모택동은 그래서 그것을 보고는 적이 놀래여 내부에 반역자가 있다고 노발대발했다. 그 문건은 쏘련에서 동북인민정부의 철도부분에 파견한 고급전문가인 거와료브가 쓰딸린에게 보낸 회보신이였는데 중공중앙의 지도자들을 일일이 평가, 분석한 것이였다. 그중에 "류소기, 주은래, 주덕, 류백승, 진의, 등소평, 리부춘, 섭영진, 엽검영, 리유한 등은 다가 정도부동하게 서양문화를 접수하고 교육을 받은것이다. 어떤 사람은 또한 영국, 불란서, 독일에 류학했으니 금후 가능하게 서방경향이 나타날것이다."라고했다. 모택동은 사철보고 이 일을 절대 발설하지 말라고했다.
쓰딸린은 주은래가 오기를기다릴 뿐 모택동을 다시만나주지 않았다. 이때 모택동은 모쓰크바교외에 있는 자매하별장에 있었던것이다. 그는 쓰딸린이 보낸 엥겔스의 <<정치경제학수고>>는 흥취가 없어서 보지 않고 왕가상대사가 보낸 중문으로 번역된 알렉싼드르대제, 뾰또르대제, 안나까레니나 등 로씨야의 력사서적과 소설, 1차세계대전, 2차세계대전을 쓴 전쟁사들만을 왕성한 의력을 갖고 보았다. 그는 또 2차세계대전에 관한 영화들도 많이봤다. 그 별장의 자그마한 영화관은 쓰딸린이 사용하던것이였다. 모택동은 책을 보고 영화를 보면서도 병을 치료하느라 쏘련에 와있는 임필시는 가볼 념도 하지 않았다. 하여 진백달이 일깨워서야 그는 위사장 왕동흥을 시켜 한번 대신가보게했다. 모택동은 자기와 환난을 함께했고 중앙서기처 5명서기중의 한사람인 그를 그만 머리속에 가맣게 잊고있은것이다. 한편 대사로 와있는 왕가상은 감기를 앓는다는 핑게를 대고 모택동을 자주들여다보지 않았다.
쏘련측에서는 모택동을 생각하여 크리믈리궁의 젊고 아름다운 호사 둘을 보내여 전문 그를 살틀히 보살피게 했다. 1945년 "7대"후부터 모택동은 매일 기침때면 위사장의 부축을 받아 침대에서 일어났다. 위사장은 그를 안마해주고 몸을 씻어주고 옷을 입혀주고 양말을 신겨주었다... 모택동은 옛날의 황제모양으로 그같이 특별한 대우를 받는데 이미 습관이 되였던것이다. 어느날 모택동은 이번 쏘련에 온 대표단단원들을 찾아와서 너희들은 듣거라, 쏘련녀자들은 중국대표에 대해서 각별히 열정적이고 개방적이니 일을 치지 않게끔 조심하라했다. 그때 대표단에는 림시당지부가 조직되였는데 외려 그같이 말하는 모택동이 전염병에 걸릴가봐 더 근심했다.
이러던차 바로 손유세가 온 것이다. 모택동은 그를 보자 포옹했다. "쑈유유, 너를 모쓰크바에서 만날줄은 몰랐지! 반가운 손님이다, 반가운 손님이야!"
사철은 손유세를 보자 로어를 잘하니 오게끔한것이라면서 그사이의 일들을 알려주었다. 한편 대표단당지부는 모택동이 쏘련아가씨들과 육체접촉을 하여 전염병이라도 옮으면 조국에 돌아가 교대할 말이 없다고 여겨 강청을 불러오느냐 어쩌냐 하다가 나중에는 손유세더러 그동안 모택동의 로어공부를 책임지는 겸 그를 돌보는게 하는게 좋겠다고했다. 이에 손유세는 일후에 시시한 의론이 없게 한다면 쏘련측에서 약과 청결만 책임지고 모택동을 보살피는 일은 자기가 맡으리라 대답했다. 일이 결정되였다. 매일 자매별장으로 가군하던 손유세는 며칠지나지 않아 아예 잠자리를 그쪽으로 옮기고말았다.
손유세는 매일 책보고 영화만보지 말고 타국에 온김에 유람을 하라고 모택동을 설복했다. 그래서 쏘련측의 접대원은 모택동일행을 데리고 레닌그라드에 가서 짜리황제의 옛궁전과 동궁을 포격한 아브로라호순양함부터 시작해서 쏘련의 이름있는 명승들을 많이 구경시켰다. 한데 시일을 오래보내면서도 실제적인 문제를 내놓고 그와 접촉하지 않았다. 하여 미국을 비롯한 자본주의국가들에서 지어 쏘련은 모택동을 연금했다는 요언을 펏뜨릴지경에 이르었던것이다.
드디여 주은래일행이 모쓰크바에 와 쓰딸린을 만나서 량국간에 중쏘우호조약을 맺았다. 한편 주은래는 양딸이 잠자리까지 옮겨가 모택동의 시중을 든다는것을 알고는 몹시 언잖아 그를 불러 되게 꾸짖었다. "넌 나이 스믈아홉이야, 아직도 철이 들지 않았느냐, 그래?" 아니나다를가, 손유세는 그번의 모쓰크바행에 화근을 심은것이다.
중앙의 지도자들을 따라서 귀국한 손유세는 북경역전에서 마중나온 강청을 보았는데 강청은 손유세의 손을 잡기도 하고 허리를 만지기도 하면서 이 말 저 말 매우 뜨겁게 대해주었다. 강청은 손유세를 조용히 불러 단독으로 만나서는 속심의 말이라면서 소곤댔다. “너는 총리의 양딸이고 나는 주석의 부인이 아니냐, 그러니 우리 둘은 잘 단합해야하는거야.” 손유세는 그녀가 극친하게 구는건 진심인게 아니라 속뽑이를 해서 그지간의 방문비밀을 알아내자는 수작임을 알아채고는 입을 조심했다. 그래야했다. 손유세는 모택동과 주은래의 로어번역이였다. 자기가 문자번역을 하든 구두통역을 하든 그것은 다가 국가기밀에 속하는 것임을 그는 똑똑히 알고있는 것이다. 강청이 대체 뭔데? 모택동의 부인이면 그래 국가의 기밀도 뭐나다 알 권리가 있단말인가? 손유세의 눈에는 그녀가 일개 가정주부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한편 강청은 그 후에도 만나면 아무리 각근히 굴어도 손유세가 자기 앞에서는 입에 자물쇠를 놓고 경계하는지라 언잖아하면서 겉으로는 반가운양해도 속으로는 밉게보기 시작한것이다. 그녀는 실로 총명이 과인할 지경 요사하고 보복심강한 녀인이였다. 손유세의 젋고 생생한 미모에 그녀는 질투했다. 그러니 지어 이런 저런 억측을 해가면서 분노하기까지 했다.
(3). 원혼이 된 손유세
모택동이 손유세를 강간한 비밀은 손유세의 존카인, 친오빠 손앙(孫泱)의 딸 손빙(孫冰)의 필끝에 의하여 폭로됐다. 전에 주덕의 비서로 있다가 중국인민대학의 부교장으로 임명되여 교육사업을 하고 있었던 손앙은 “문화대혁명”에 박해를 받아 제 녀동생 손유세먼저 죽었다. 그의 딸 손빙은 1993년에 남편을 따라 브라질의 상파울로시에 정착하자 그곳에서 발행하는 <<미주화보(美洲華報)>>에다 <<나의 고모 손유세>>라는 문장을 하나 발표했다. 그 문장에 쓰기를 1949년 12월에 모택동이 중공대표단을 이끌고 쓰딸린을 보러 모쓰크바를 향해 떠났는데 모택동은 강청이 남편을 따라 자기도 가겠다는것을 불허하고는 손유세를 자기의 로어번역원으로 데리고 떠났던 것이다. 녀성으로는 그녀 하나뿐이였다....모택동은 로어를 배운다면서 그와 오래도록 자기와 강청사이가 여차여차 버성겨 불화목해졌다는 것을 말하면서 “감정교류”를 했다. 그한테 유린당한 손유세는 동행한 양아버지 주은래를앞에서 울면서 모택동이 자기를 망쳤다고 고발했다. 주은래는「그를 끌어안고 계속 달래였다. ‘우리는 대국을 고려해야 한다, 대국을 고려해야 한다, 대국을......'」. 모택동은 강청을 버리고 손유세와 결혼하겠노라 태도표시를 했다. 주은래는 그것만은 절대안된다고 막아버리고는 양딸을 유명한 영화배우자 연출인 김산(金山)과 결혼시켰다. (김산은 그때 이미 처 장서방과 리혼했는데 그는 전에 강청과도 침대놀음을 한적이 있는 풍류였다). 손빙은 자기의 문장에 주은래는 손유세를 특수한 감정을 갖고 사랑하고 아끼였는데 그야말로 친부모와 같았다고 썼다. 하건만 “문혁”기간에 폭위를 함부로 휘두르는 강청을 당해내지 못하고 손유세를 체포하는 령장에다 서명하여 그를 감옥에서 참혹하게 죽게만들었다. 그는 왜서 제 살붙이같이 아끼고 사랑하는 양딸조차 구해내지 못했던가? 주은래와 손유세사이의 관계가 어떠했던지간에, 감정이 어떠했던지간에 기형적인 정치가 살판치는 기형적인 년대였으니 손유세는 불행을 면할 수 없었던것이다. 강청은 주은래를 앞에 놓고 딸을 추겨 당을 반대하고 “문화대혁명”을 반대한다고 훈계하고 호통치면서 지어는 뺨까지 쳤지만 묵묵히 받아주었다. 왜서 그랬는가? 강청은 모택동이 길러낸 한 마리 개였다. “나는 주석의 개다. 주석이 누구를 물라고 하면 나는 누구를 물었다.” 이것은 강청이 토로한 말이다. 그녀는 총리몸에다 손까지 대니 그야말로 발호(跋扈)가 극에 이르렀던 것이다. 주은래는 자기의 처지가 어떠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자기가 아무리 애써봐야 양딸을 구할 수 없는 것이다. 그가 살아 아무 때건 제 몸을 망친 사실을 토로하는 날이면 억만 국민이 하나님으로 떠받드는 붉은태양은 무슨꼴이 되겠는가? 국가는? .... 차라리 그 한 몸이 없어지는 편이 낳겠다고 생각했을런지도 모른다, “우리는 대국을 고려해야 한다, 대국을 고려해야 한다, 대국을..... ”!!!
(4). 모택동과 그의 녀인들
모택동이 구경 여자가 얼마나 되는지 똑똑히 알아내기는 어려우나 정식결혼하여 부처관계로 된 여인은 4명이다. 라아가씨, 양개혜, 하자진과 강청이고 그 외에 “동지관계”를 초월한 녀인으로서 비교적 이름있는 것만도 10여 명 좌우된다. 모(毛)가 공작의 편리를 돌보아 속살을 섞고 물들인 여자는 대체 얼마나 되는지 고증하기 어렵다.
1. 라아가씨(羅小姐)
모택동이 14살 때 부모들이 6살난 여자애와 결혼시켰다. 이때의 그들은 아직은 감정을 운운할 정도가 아니였다. 하기에 모택동은 기자와 말한적이 있다. “나는 그 단락의 혼인에 대해서는 정말 말하고싶지 않다. 나는 종래로 그하고 동거한 적이 없다.”라아가씨에 대해서 기록하지 않았으니 자료가 없다. 그녀는 모씨가족에 들어와 3년만에 병으로 죽고말았다. 2. 도사영(陶斯咏)
모택동이 소산을 나온 후 맨처음만난 련인이다. 도사영아가씨는 호남 상담의 사람이였는데 명문규슈로서 온순하고 선량했다. 그녀도 호남의 장사사범학교를 다녔는데 모택동과 동창이자 한고향이였다. 1919년ㅡ1920년 기간에 모택동과 도사영은 장사에서 같이 “문화서점”을 꾸리면서 열렬한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1920년 여름에 모택동의 격렬한 발란과 폭력주장에 참아내지 못하던 차 그녀는 양개혜가 출현하여 모택동의 사랑감정이 그쪽으로 쏠리니 분연히 장사를 떠나 단독으로 “立達書院”을 꾸렸다. 그녀는 1932년에 죽었다. 그때 나이가 30살이였다.
3. 양개혜(楊開慧).
호남 장사제1사범을 다닐 때 모택동의 선생이자 청나라말, 민국초의 유명한 학자 양창제(楊昌濟)선생의 딸이다. 양창제는 일본과 영국을 류학했다. 그는 1913년에 조국에 돌아와 호남의 장사제1사범에 임직한 것이다. 그후 1918년에 북경대학론리학교수로 초빙되였는데 모택동은 5년간 그의 딸 양계혜와 서로알고지냈다. 당시 그들 둘은 련정이 있은건 아니다. 양개혜가 모택동을 맘에 들어하지 않은 것이다. 1920년 1월 17일, 양창제선생이 사망하자 양개혜는 어머니를 따라 장사로 되돌아가 그곳에서 미국사람이 꾸리는 상복녀중(湘福女中)을 다녔다. 그사이 모택동은 양개혜가 맘에 들어 그의 집을 다니면서 도사영을 차버린 것이다. 그들은 1920년에 결혼했다. 양개혜는 1922년과 1926년에 모안영과 모안룡을 낳았다. 모안룡이 태여난지 얼마되지 않아서 모택동은 새것이 좋고 낡은것은 싫어 리립삼의 처와 섞이였다. 이일을 양개혜가 알고 남편과 대판싸움을 했다. 1927년가을에 모택동은 추수폭동을 일으켰다가 국민혁명군에 격패되니 강서의 정강산(井崗山)으로 들어간 것이다.
4. 허자진(許子珍).
양개혜가 국민당에 체포되여 고생할적에 정감이 많은 모택동은 강서에서 허자진과 결합했다. 허자진은 그때 17살의 소녀였는데 모택동은 호남의 처자를 내쳐두고 다른사람이 반대하는데도 불구하고 고집스레 허자진과 동거했다. 얼마후 양개혜가 처결되니 그 둘은 부부로 되었다. 허자진이 모택동과 함께 각지를 편력하고 아이를 여럿이나 나줬건만도 모(毛)는 의연히 녀색을 즐겨 한 녀 번역원과 래왕했다. 허자진은 당연히 접수 할 수 없어서 모(毛)와 다툼질을 끊지 않았다. 얼마 후 중공은 그녀가 “정신병”이 있다면서 모쓰크바에 보내여 치료하게 했다. 허자진은 1946년에 친구의 도움을 받아 중국으로 돌아왔으나 강청이 이미 정실로 들어앉았기에 허자진은 모택동을 만나기조차 어려웠다.
5. 오광혜(吳廣惠).
오광혜는 모택동을 제정신이 아니게 만들었던 그 번역원이다. 그녀는 북경대학을 졸업했는데 아름답게 생겼거니와 현대적으로 단장했다. 영어를 잘해서 번역원으로 파견되여 왔기에 모택동은 늘 그녀와 접촉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허자진이 그 둘의 밀회의 재미를 깨뜨려버렸다. 대판싸움을 했다. 그때는 중공이 아직 든든히 자리잡지 않아 영향이 클것 같아서 허자진을 “정신병”에 거렸다고 모쓰크바에 보내고 오광혜도 연안에서 내보낸 것이다. 북경대학은 인재를 배출하는 곳이였다. 오광혜, 장령보, 장국도도 역시 거기를 나온 것이다.
6. 사말태래(史沫太萊).
황혼무렵이면 모택동은 경위원을 데리고 자주 사말태래가 있는 요동에 가서 술잔을 들거나 차를 마시면서 시를 읊거나 천하의 일을 론했다. 모(毛)는 그녀와 나이가 비슷했는데 서양의 애정생활에 흥취가 생겨 늘 서양문학작품에 나오고 묘사되는 남녀간애정의 진실성을 묻군했다. 한번은 허자진에게 발각되였는데 허자진은 치를 떨면서 제 경위원을 보내서 이 두 화냥년을 죽여버리겠다고 야단쳤다.(사말태래와 오광혜) 모택동은 종래로 자기의 잘못을 승인하지 않고 하자진보고 사죄하라고 하다가 되지 않으니 연안에서 내보낸 것이다. 그때 연안에는 이런 말이 떠돌았다. “천하를 얻자고 목숨내건 사나인데 여자를 보는게 뭐 대단해서”. 7.강청(江靑).
35년간 세월이니 모택동과 제일 오래 산 여자다. 강청이 어떻게 모택동의 품에 안기게 되였는가. 모택동이 강청을 만났을 때는 나이가 49살이였다. 강청의 원 이름은 리운학이고 예명은 란평이다. 남편을 셋이나 얻었다가 리혼한 이 녀인은(동거한 남자는 4명) 상해의 배우로서 자기의 매력으로 풍류남아였던 모택동의 마음을 어렵지 않게 샀다. 모택동은 강청을 알게 되자 그녀를 불러 밥을 같이 먹고 잠자리를 같이하기 시작했다. 중공중앙정치국은 그때 모택동이 하자진과 정식리혼을 하지 않은 상황이거니와 강청이 어지러운 녀자라는 것을 알았기에 모택동을 결합하지 말라 권고하다 듣지 않으니 그녀와 간단한 규정을 약속 한바 있다. 그것은 강청이 그저 일개 가정주부에 지나지 않는 사무조리신분으로 모택동의 생활과 건강을 돌보아야지 당내기관에서 그 어떤 직무도 맡아서는 안되고 정치에 간섭해서도 안된다는 것이였다. 하지만 전세기 60년대부터 그녀는 모택동의 권세를 믿고 중앙정치국과 맺었던 옛 규정을 찢어버면서 모택동의 정치놀음에 들어 중요한 바둑알이 되고말았다. 그녀는 “4인방”의 우두머리로 되어 모택동이 일으킨 “문화대혁명”을 최악의 상태로 몰고가 국가와 국민에게 혜아릴 수없는 막대한 재난과 손실을 입힌 것이다. 그녀는 모택동과 살아서 딸 리눌을 낳았다.
8. 풍풍명(馮風鳴).
풍풍명은 남양귀국화교였는데 젊은 미모에 연극을 좋아했다. 그녀는 연안에 가자 먼저 로신예술학원에 들어갔고 후에는 평극원의 배우로 되었다. 하루는 “농촌곡”을 보고나서 풍풍명과 강청, 채창은 같이 조원(棗園)에 가서 모택동과 함께 밤참을 먹었다. 다 흩어진 후에 모택동은 풍풍명을 남겨 “문예사업을 론의”하다가 그녀를 강간했다. 몸을 망친 풍풍명은 분노하여 연안을 떠나 종적을 영 감추고말았다.
9. 손유세(孫維世).
1949년 12월, 쏘련을 방문 할 때 모택동에게 유린당한 손유세는 그가 강청과의 생활을 그만두고 결혼하자는 것을 뿌리치고 양아버지 주은래의 뜻대로 영와배우 김산에게 시집갔다. 김산은 강청과도 잠자리를 같이한적이 있는 난봉군이였다. 그는 조선전쟁이 일어나자 상급의 지시에 따라 창작조를 이끌고 <<환난을 함께>>라는 영화를 찍으려 조선에 나갔다가 거기서 번역원 겸 길잡이를 서주는 김일성의 녀비서와 공공연히 속살을 섞었다. 김일성은 화김에 비서를 총살했고 김산은 팽덕회에 의하여 중국에 압송되여 “로동개조”를 했다. “이번이 마지막일거얘요”, “간단한 두 글자는 ‘리혼’. 하지만 난 그렇게는 못하겠어요.” 심리상 고통이 심했건만 그는 “나쁜분자”와 갈라지라는 권유를 물리치고 제 남편을 의연히 사랑했고 적극힘써 그가 “만기”되자 당적을 회복시켰거니와 그를 다시 예술의 길에서 일떠서게 했다. 1968년 10월 14일은 그들이 결혼한지 18년이 되는 기념날이다. 악당은 그날에 머리에 대못을 박아 손유세를 죽였다. 그것은 강청이 택한 날자였다.
10. 관운주(官云珠).
1962년 7000명대회 후, 모택동은 상해에 가서 서교호텔1호원에 들었다. 상해시위서기 가경시는 영화배우 관운주가 모택동과 밀회를 하기로 배치했다. 이듬해에 모택동이 또 상해로 갔는데 그녀와 다시만났다. 그녀는 여러날을 함께 보냈다. 1965년에 모택동은 심지어 그녀는 중남해에 데려다 공개적으로 동거했다. 모택동은 그러고나서 그녀를 특별렬차게 태워 상해로 돌려보냈다. 그후에는 다시만나지 않았다. 1966년도 가을, 강청이 그를 체포하게 하여 그녀는 감옥에서 죽었다.
11. 장옥봉(張玉鳳).
모택동이 말년에 곁에 오래두고있으었던 “붉은녀인”이다. 그 누구던 모택동을 만나자면 반드시 그녀를 거쳐야 했다. 그녀가 모택동과 면목을 알게 된 것은 모택동의 전용 특별렬차의 복무원질을 하게 된 18살나던 해였다. 그때 모택동은 이미 72살이였다. 장옥봉은 흑룡강 목단강시의 여성으로서 딸이 둘이다. 렬차에서 그녀에게 눈독을 들인 모택동은 장옥봉을 자기의 기요비서로 정해 그녀가 일상의 크고 작은 사무를 관계하게끔 했다. 그녀는 절대 만만히 볼 인물이 아니였다. 모택동은 지어 그녀에게 문건을 비준하는 일까지 돕게 하였는데 강청마저도 제 남편을 만나보자면 그녀의 허락을 받아야 했던 것이다. 모택동이 죽은 후에 강청이 제 남편의 문건을 하나 가져가려다가 그녀에게 제자당하고 쫓기였다. 항간에 떠도는 말은 그녀가 아이를 낳았는데 모택동의 것이라 한다. 정말인지 그건 그녀만이 알 일이다. 12. 맹금운(孟錦云).
맹금운역시 모택동이 만년에 곁에 두고 함께 지낸 여인이다. 두 여인은 매일 한발도 떨어지지 않고 모택동을 돌보았다. 맹금운이 본래는 가무단의 무도연원이였는데 선발되여 중남해에서 춤을 췄다. 그러다가 후에 모택동을 돌보게 된 것이다. 그와 장옥봉은 모택동이 제일 신임한 여성이였거니와 그의 인생종극을 보아준 관객인 것이다. 그 외에도 소문이 난 녀인으로 왕해용(王海容), 장함지(章含芝)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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