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류소기의 죽음은 누가 책임져야 하는가?
(2) 모택동의 대자보 “사령부를 포격하자”
(3) 세차게 일어난 “류소기타도”기세
(4) 류소기 최후의 세월
(1) 류소기의 죽음은 누가 책임져야 하는가?
이런 말이 있다. “왕자가 법을 위반해도 서민의 죄와 같이 취급한다”. 말하자면 법앞에서는 사람마다 평등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이 지난날 중국에서, 특히 “문화대혁명”때는 소용없는 빈말이 되고 말았다. 왕자가 법을 무시하여 당당한 나라의 주석마저도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처참하게 죽게했으니 더 말할게 있는가? 온 국민의 가슴을 아프게 한 이 사건은 중화인민공화국력사에 가장 험한 원안(怨案)으로 기록 된 것이다.
개혁개방초기였던 1980년 5월에 북경에서 류소기의 추도식을 성대히 거행하였다. 류소기가 원한을 품고 죽은지 12년만이다. 마침내 그의 골회는 북경으로 돌아왔고 그날 전국은 반기를 드리웠다.
추도회는 화국봉이 장악했고 등소평이 추도사를 올리였다. 류소기는 당당한 국가주석이였건만 그 어떤 합법적인 수속도 밟지 않은 정황에서 체포되나 다름없이 연금생활을 하면서 모욕적인 비판투쟁을 받다가 우선 1968년에 중공의 한차례회의에서 당적을 취소당하고는 주석의 직무를 잃었으며 나중에는 심한 타격에 병들어 군인들의 손에 비밀리에 개봉군인병원에 압송되였으며 거기서 제대로 치료도 받지 못하고 1969년 10월 12일, 그 어떤 친인도 모르게 처참히 죽은것이다. 당시 한 해방군전사가 시체를 가만히 카메라에 담았기에 다행히 사망때의 모습이 한 장 남았다. 알고 보니 그렇지 71살의 늙은이가 된데다 앓아서 피골이 상접한 그는 거의 제몰골이 아니다. 그젯날 그 풍도있는 흰 치머리에 름름했던 국가주석은 어디로 갔는가!? ....
1980년 5월, 중공중앙은 류소기를 평판하여 그의 명예를 회복시켰을뿐만아니라 미망인 왕광미가 손수 남편의 골회를 북경에 가져오게 하여 추도식을 성대히 거행고 추도식이 끝나서는 골회를 바다에 뿌렸다. 그것은 사자가 생전이였던 1956년에 자기가 죽으면 골회를 남기지 말고 바다에 뿌려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어서였다.
류소기는 박해를 받아 죽었다. 이는 “문혁”이 저지른 가장 큰 비극의 하나인 것이다. 나라주석마저도 법률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죽었으니 보통관원이나 백성이야 더 말할게 있는가? 그의 죽음은 전적으로 모택동이 책임져야 한다. 류소기가 어떻게 투쟁 받았고 어떻게 개봉에 압송되였으며 어떻게 죽어간다는 것을 그래 모택동이 몰랐단말인가? 그를 죽음에로 몰아간 흉수는 대체 누구였는가?
모택동은 그가 죽었다는 보고를 받고는 “자작지얼(自作之孼)”이라 했다. 자기가 저지른 일로 말미암아 재앙을 입는다는 말이다. 과연 누가 재앙입을 짓을 한건가, 그래 류소기란말인가?
(2) 모택동의 대자보 “사령부를 포격하자”
7월 18일, 장강에서 헤염을 친 모택동은 마침내 무한으로부터 북경에 돌아왔다. 당날 강청 등으로부터 공작조에 관한 회보를 들었는데 일부학교에서 공작조를 반대한 자료도 있었다.
19일ㅡ 23일, “문혁”정황을 회보하는 회의에서 모택동은 공작조가 “학생운동을 진압했다”고 질책했다.
24일, 모택동은 중앙상위회의와 중앙문혁소조성원회의를 소집하여 류소기와 등소평을 비평하고는 공작조를 철소하기로 결정했다.
7월 28일, 북경시위는 <<각 대학교와 전업학교의 공작조를 철수할데 대한 결정에 관하여>>를 내놓았고 29일에는 인민대회당에서 전 시 대학과 중학의 “문화혁명”조직의 적극분자대회를 열고 그들에게 이 결정을 선포했다. 회의에서 류소기는 자기도 역시 “문화대혁명”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고 승인했고 등소평도 로혁명이 새 문제에 맞다들었다고 승인했다.
당날 한 홍위병이 모택동에게 편지를 했는데 “반란에 도리가 있다”는 것이였다. 모택동은 동의했다.
8월 1일, 중국공산당은 제8기중앙위원회 제11차전체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모택동은 홍위병을 지지했고 중앙에서 공작조를 파견한 것을 재차 질책했다. “그것은 진압이고 공포였는데 그 공포는 중앙에서 온 것이다”고 하면서 그는 “명명백백 한 바 공작조는 자산계급켠에 서서 무산계급을 대하는 것이다”, “요물잡귀신은 이 자리에 있다”고 했다. 회의는 원래 8월 5일에 결속짓기로 했지만 그날 모택동은 연필로 신문지여백에다 <<사령부를 포격하자ㅡ 나의 한 장의 대자보>>라고 써놓더니만 중앙에 다른 한 “자산계급사령부”가 있다면서 회의일정을 연장했고 내용도 재빨리 류소기와 등소평을 비판하는데로 돌려놓았던 것이다. 모택동은 “대자보”의 원고를 수정한 후에 표제를 달아주면서 당날로 찍어 회의에 널어놓게 했다. 그 대자보의 내용은 이러했다.
“50일동안 중앙에서 지방에 이르기 까지 어떤 동지는 반동적인 립장에 서서 자산계급전정을 실시하면서 들끓는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을 꺾어버리려 했다. 시비를 전도하고 흑백을 뒤섞었으며 혁명파를 토벌하고 부동한 의견을 압제했으며 백색공포를 실시하고 득의연하여 자산계급위풍으로 무산계급을 멸하고자 자산계급기개를 떨치려 했으니 이 아니 독한가!”
비록 이름을 찍지는 않았어도 창끝이 50일동안 집정한 류소기를 향한것이 분명했다.
모택동은 한주일간 대련에 가 있으면서 회의에 빠진 림표를 북경에 불러다가 그가 8월 8일날 회의에서 류소기를 향해 어투가 과격한 비평을 하게했다. 그리고는 8월 18일 회의때는 팽진, 륙정일, 라서경, 양상곤 등의 “착오”적인 언론을 함께 찍어서 회의에 널어놓게 했다.
8월 8일, 중공중앙 8기 11중전회에서 <<무산계급문화대혁명에 관한 결정>>을 발표함으로써 “문화대혁명”은 정식으로 시작된 것이다. 이번 운동의 목적은 “자본주의길로 나아가는 집권파를 꺾꾸러뜨리고 자산계급의 반동학술권위를 비판하며 자산계급과 모든 착취계급의 의식형태를 비판하고 교육을 개혁하며 문예를 개혁하고 사회주의경제기초에 맞지 않는 모든 상층건축을 개혁함으로써 사회제도를 공고히 하고 발전시키는데 리롭게 하자는 것이다.” 회의는 따라서 과감히 하는 것을 앞세우고 손을 놓아 군중을 발동하며 군중이 운동중에서 자신이 자신을 교육하게 하며 말로 해야지 무단적으로 해서는 안된다는 등의 규정도 내온 것이다.
8월 12일, 회의는 모택동, 림표, 주은래, 도주, 진백달, 등소평, 강생, 류소기, 주덕, 리부춘, 진운 등 11명을 정치국상위로 선거했다. 그중 새로 선거된 사람으로는 도주, 진백달, 강생, 리부춘이였다.
림표는 댓바람에 2호인물로 부각되였다. 얼마지나지 않아서 그는 유일한 중공중앙부주석의 신분으로 출현하여 형식상의 게승자로 나타났고 자력(資歷)이 훨씬 높은 주은래, 류소기, 주덕, 진운 등 부주석들은 올리추지 못했다. 회의는 정식으로 팽진, 륙정일, 라서경, 양상곤 등 네사람을 철직시키기로 결정하였거니와 그들보다 급이 더 높은 류소기, 등소평 등은 지명비판하기로 했다.
3. 세차게 일어난 “류소기타도” 기세
1966년 12월 18일 오후, 장춘교는 중남해의 서문에서 중앙문혁소조 조장신분으로 청화대학의 반란파두목 괴대부를 불러서 만나 그한테 “류소기를 타도”할 행동을 말했다. 괴대부는 장춘교한테서 이미 류소기를 타도한다는 소리를 들었기에 12월 25일에 “류소기를 타도하자!”는 대규모적인 행동을 개시한 것이다. 그는 수천명을 이끌고 천안문광장에서 “선서대회”를 했다. 12월 27일, 북경의 고등학교반란파는 공인체육장에서 “류, 등의 자산계급반동로선을 철저히 비판하자”는 대회의를 열었다. 그리하여 온 사회에는 류소기를 타도하는 광란적인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와동시에 강청일당은 온갖방면에서 류소기를 타도해야 한다는 여론을 퍼뜨렸다. 12월 30일에 강청, 왕력, 관봉, 요문원은 청화대학에 가서 괴대부(蒯大富)에게 “견결히 지지한다.”고 태도표시를 했다. 12월 31일, 강청은 단독으로 류소기의 딸을 만나 그를 일어나 아버지를 반란하라고 꼬드겼다. 1월 6일, 청화대학의 반란파는 왕광미를 “지혜로 나포”하여 청화대학에 묶어가고는 이 일을 자랑거리로 사회에 크게 선전했다. 1월 9일, 사부치는 북경에서 전국공검법계통(全國公檢法系統)의 대표들을 접견하고는 “전국정법전선은 즉시 일떠나 흐루쇼브식인물 류소기, 등소평을 향해 불을 지르라.”고 호소했다. 강청의 책동으로 말미암아 1966년 말과 1967년초에 “타도”활동이 전국에 만연되여 갈수록 렬렬해지면서 “류소기를 타도”하는 여론환경을 형성한 것이다.
4. 류소기의 최후의 세월
劉少奇(1898ㅡ1969)는 중국의 무산계급혁명가며 당과 국가의 탁월한 지도자였다. 1919년에 북경과 보정에서 “54운동”에 참가했고 1920년에 장사에서 중국사회주의청년단에 참가했으며 1921년에 쏘련 모쓰크바동방대학에서 학습할적에 중국공산당에 들었다. 1949년 9월에 중화인민공화국정부부주석으로 당선되였다. 제2기(1959)와 제3기(1965).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중화인민공화국주석 겸 국방위원회주석으로 당선되여 그는 죽을 때 까지 그 직무에 있은 것이다.
1967년 9월 13일, 류소기의 아들딸들이 핍박에 의하여 가정을 떠난 그날에 류소기의 부인 왕광미도 집사람모르게 “미국특무”라는 죄명으로 북경 진성감옥에 들어간 것이다. 너무나 돌연적인 일이여서 류소기는 처음에는 이 일을 미처몰랐다. 그는 투쟁받을 때 다친 허리를 구부정하고 한쪽 다리를 끌면서 복도를 더듬어 창가에 이르러 밖을 내다보았다. 부모곁에 있지 못하고 갈라진 자식들을 생각하면서 제 부인이 오기를 기다렸다..... 사위를 둘러봐야 그 혼자뿐 정막은 숨막힐 듯 했다.
전사 몇이 명령을 받았는지 류소기의 방을 수색했고 류소기보고 허리띄를 풀라했다. 류소기는 갈린 목소리로 항의했가. 그러니 그자들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달려들어 류소기를 주저앉히고는 강제로 허리띄를 풀어냈다. 류소기는 너무 격분하여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아느새 일어나지도 못했다. 류소기는 완전한 수범같았다! 아니, 수범보다도 더 못했다.
며칠후에 지군(遲群)이 와서 “중앙”을 대표하여 말한다면서 류소기의 경위전사들을 향해 훈시했다.
“너희들 경위를 맡고있는 ×중대에는 검은무리가 많이 나왔다. 여기에 류소기가 있다. 너희들은 많이 중독되였으니 그 중독을 숙청해야 한다. 지금은 너희들의 임무가 근본적으로 변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경위를 하는게 아니다. 류소기를 지키고 관리하는 하는 것이다.”
그는 사납게 한마디 더 보탰다.
“잘 지켜봐야 한다, 사정을 보지 말고.”
이때는 류소기신변에서 사업했던 사람들을 언녕부터 “철두철미한 보황파”라 욕하면서 총과 증건들을 걷어갔던 것이다. 그리고 들은은 류소기와 계선을 가른다면서 “해위동혁명반동대”라는 것을 조직했다. 그야말로 온 사회가 미쳐나는 판이였다! 그러니 기실은 류소기를 “간수”하는 전사마저 이제는 층층이 감시하고 감시받으면서 그 누가 류소기를 전처럼 인정스레 대하기만 하면 즉시 끌어내다가 투쟁하고는 농촌의 집으로 쫓아버렸던 것이다. 류소기는 이같이 비참해진 환경속에서 외롭고 쓸쓸하게 보냈다. 그는 어떻게 하나 살려고 애썼다, 승리하는 그날까지.....
하지만 자식들과 처 왕광미가 핍박에 의하여 한데있지 못하고 갈라졌다는 것을 알면서부터 류소기는 정신상에 큰 타격을 받아 정신은 붕괴 되기 시작한것이다. 계다가 모택동의 뜯에 따라 의사가 먹는데 습관되여 온 수면제마저 주지 않아 잠도 제대로 못자니 그의 생활규률은 억망진창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의 한쪽 팔은 전쟁 때 상한건데 지금 다시 발작해서 심하게 떨렸기에 옷을 입기조차 어려웠다. 침실에서 식당까기 불과 30m밖에 안되건만 밥먹으러 가자면 한시간 넘어걸려야했다. 지금은 직책이 “간수”로 변해진 경위원들은 안타깝게 보기만해야지 누구던 감히 그를 부축해 줄 수 없었다. 정 안되니 경위원이 아닌 사업인원이 식당에 가 밥과 채를 가져다 주었다. 그러는 것도 한두번 뿐, “보황파”라고 욕하니 감히 더 그러지 못했다. 류소기는 좋던 치야가 거진 다 빠지고 일곱대밖에 남지 않았다. 그런 형편에 강냉이가루로 지은 굳은 워궈톨아니면 거치른 잡곡밥을 억지로 라도 먹어야 했으니 소화가 되지 않아 위병에 걸리고 말았다. 본래 탕뇨병이 있어서 약을 그냥 복용는데 이제부터는 수면제를 못먹게 된 것 처럼 의사가 약도 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나마 손이 떨려 음식도 제대로 먹지도 못하니.... 이제는 완전히 잔페로 돼버린 몸이였다.
류소기의 몸은 날이 갈수록 급속히 허약해졌고 병이 심해졋다. 일단 생긴 병은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해 심해가기만했다. 의사와 호사들은 그의 병을 잘 봐주지 않았다. 잘 봐 줄 수 없었다. 매번 병을 보기전에 먼저 그를 한바탕 투쟁했다. 의사는 병을 진찰하는 한편 욕지걸이를 했다.
“중국의 흐루쇼브!”
호사는 주사를 놓을적이면 주사침을 일부러 콱 들이밖았다. 그러니 류소기는 병을 보이는 것 마저도 형벌을 받는거나답지 않았다.
한번은 류매괴(劉梅魁)가 통지를 받고 옷과 일용품을 가져가게 되었는데 만나지 못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절대비밀”로 했다. 또 하루는 류매괴가 쪽지와 서적이름을 적은종이장을 받았다. 그것은 팽덕회의 글씨였다. 그는 자기 애인과 같이 종이에 쓴 책들을 한묶음사서 반도체라지오와 함께 팽덕회에게 부쳐보냈다. 한데 생각밖에 접대실에서 받았다고 알리는 싸인을 받았다. 6월말에 반도체라지오가 되돌아왔는데 거기에 탱덕회의 쪽지가 들어 있었다.
“매괴야, 량표를 돌려보낸다. 반도체라지오도 역시 돌려보내니.... 앞으로는 아무것도 내한테 보내지 말거라.”
이런 돌연적인 변화를 보니 저쪽에서 팽덕회도 역시 처지가 매우 어려워진게 분명했다.
1967년 7월, 강청과 진백달 등은 군대내의 “한줌도 못되는 자”를 뽑아낸다고 기세를 부리였다. 강생, 진백달과 척본우는 북경항공학원의 한애정(韓愛晶)을 접견했을적에 팽덕회에게 있지도 않는 죄를 많이 들씌웠다. 한애정은 그때 “중앙문혁”의 대표신분으로 팽덕회를 찾아가 심문한바있다. 팽덕회는 그의 물음에 경멸적인 대답을 했다.
“나는 쓸것은 다 썼다.”
“뭘 다 썼다구, 수치심을 모르고 자기의 공로를 떠벌리는 사람! 일어서서 말해! 외국과 내통하고 반당매국을 한 죄를 교대하란말이다!”
팽덕회는 발연대로했다.
“너희들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내한테 그따위 죄를 씌우는 건 대채 무슨심뽀냐!”
“대표”는 그의 옷깃을 당겨 벽구석쪽으로 몰아넣고는 주먹으로 치고 발로 찼다. 하지만 팽덕회는 굴복하지 않았다.
척본우가 여러번이나 출면하여 “팽덕회련락참을 비판”하는 우두머리들을 용기를 내라고 부추기였던것이다.
“팽덕회 이 거대한 물건은 꼬마맹장들 앞에서는 어쩌지 못한다.”, “그래도 솔직하지 못하면 광대한 군중이 일떠나 다스려야 한다!” 면서 그는 “팽덕회는 꼬마맹장들이 비판교육해야 한다.”고 “지시”를 내렸던 것이다.
척본우는 친히 팽덕회를 비판투쟁 할 일을 포치했는데 그것을 “백퇀대전”이라 불렀다. 그 내용인즉 “중점보루를 돌파”해야 한다는 것이였는데 제 령혼을 팔아버린 “로간부”들을 훈련시켜 그들을 “강철채찍”으로 만들고 무지한 청년들을 리용하여 팽덕회에게 새롭게 더 심한 박해를 가하는 것이였다.....
한편 이쪽에서는 류소기가 투쟁받는 사이 자녀들도 따라 심한 박해를 받고있다. 장녀 류애금(劉愛琴)은 “소외양간”에 갇히여 매를 맞았고 둘째아들 류윤약(劉允若)은 감옥에서 척추결핵에 걸려 죽다살아났다. 19살이였던 류평평(劉平平)은 단독감방에 갇혀 있었다. 방금 감옥에서 풀려나온 17살 난 류원원(劉源源)은 안북(雁北)의 모래바람속에서 헤매였고 나이가 제일어린 류정정(劉亭亭)이 혼자서 크낙한 정치압력속에서 고생고생 살아가면서 남한테 고통스러운 기시와 모욕을 받고 있었다.
류소기의 “죄증자료”를 만들기 위해 전안조는 일체 대가를 가리지 않았다. 그들은 있지도 않은 죄를 만드느라 64명에 달하는 무고한 사람을 감옥에 가두고는 강박하여 가짜공술을 하게했다. 장기간 집사람과 격리키면서 잠을 재우지 않고 심문하고 투쟁했다. 의지가 박약한 어떤 사람은 고압수단에 배겨내지 못해 투항하고 말았다. 전안조는 그들에게서 받아낸 공술로 가짜증건을 만들어 류소기에게 죄를 씌워 투쟁했다. 이같이 억울함을 당하는 당과 국가의 간부가 어찌 그 한 사람뿐이랴!
모택동은 왜서 제 녀편네를 내세워 강생, 사부치 등과 짜고서 자기와 오랫동안 함께 손잡고 혁명해왔던 로혁명가와 간부들을 전부 타도하게 하려는가? 이게 그래 쓰딸린과 뭐가 다른가? “문화대혁명” 이는 분명 자기의 신복을 기르고 조대를 바꾸는려고 일으킨 일장의 무자비한 권력쟁탈투쟁이였다! 이 허무하고 잔혹한 투쟁으로 하여 온 나라 온 국민이 혹심한 재난에 빠지고있는 것이였다. 이를 명백히 깨닫게 된 류소기는 자신의 무력함에 원통하여 10월 5일 하루에만도 두 번이나 통곡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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