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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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지에 묻힌 비밀(58)
2011년 04월 01일 22시 05분  조회:4153  추천:21  작성자: 김송죽
          음지에 묻힌 비밀(58)               

                (1) 모택동과 류소기의 분기시말 
              
                (2) 류소기의 죽음과 주은래의 작용
     

                
모택동과 류소기의 분기시말    

7천명대회는 건국이래 12년간, 특히는 1958년이래 4년간의 성적과 경험교훈을 총결지었는데 그것은 전당이 충분히 토론한 기초상에서 인식을 같게 한 것이였다. 하지만 그 회의는 모택동과 류소기사이에 분기를 남긴 것이다. 
   
민주개혁시기에 모택동과 류소기 한 사람은 근거지에서 한 사람은 백색구역에서 10여년을 고생스레 싸우면서 각기 효과적인 혁명리론과 경험을 찾아냄으로 하여 혁명에 중대한 공헌을 했다. 두 령역의 대표인물로 된 그 두 사람은 마침내 진주가 한데 꿰이고 옥이 한데 모이듯 합치여 서로 흠상하면서 손잡게 되었던 것이다.
    
새중국이 성립된 후, 사회주의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과제가 제기되였는데 모택동이나 류소기나를 물론하고 그것은 전당을 놓고 보면 다가 생생한 것이였다. 하기는 쏘련의 경험이나 방법이 있기는 하지만 민주혁명시기의 경험을 봐서도 그대로 따라한다는것은 절대되지 않는 것이였다. 그러니 자기나라의 실정에 맞는 길을 찾아내는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매우 간고한 임무였다. 
   
경험을 놓고 담화하다보면 자연히 타국의 경험을 거들게 되는데 실현키 어려운 탐구과정에 두 사람은 자연히 의견이 맞지 않아 마찰이 생기군 했다. 그것은 불과피면적이고 실상은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맨먼저는 산서농업합작화문제였고 그 다음에는 신민주주의질서문제였으며 거기에 이어서는 사회주의사회의 주요모순 등등이였는데 여기서 일일이 진술하지 않겠다. 상술한 부동한 의견들을 보면 다가 사업이 순리로울 때 생긴 것이였기에 그것이 개인의 책임에 걸려드는건 아니였거니와 그어떤 다른 기분도 아니였다. 모두가 다 새중국의 번영과 발전과 부강을 위해서였으니 의견이 맞지 않기는 해도 그것이 원한으로까지는 되지 않았던 것이다. 하여 그들 사이 서로 크게 영향을 주지 않으면서 신임과 우의를 계속유지했던 것이다.

1956년, 중공8대에서 모택동은 류소기를 제1선의 지도자로 올리밀었다. 그리고는 1959년도에 이르러서는 모택동이 주동적으로 국가주석자리를 내놓아 류소기가 이어받게 하였다. 당과 국가의 사업은 부서에 따라 서 진행되였던것이다. 

한데 7천명대회에서 “대약진“과 인민공사화운동을 총결지으면서 정황은 달라진것이다. “대약진”과 인민공사화운동이 원래의 생각대로 실현되지 않았거니와 그와는 반대로 원래부터 취약하던 국민경제가 커다란 좌절을 당해 전국의 경제가 온통 생기를 잃어 쓸쓸하게 되었거니와 수천만이나 굶어죽은것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보아야 하고 어떻게 총결지어야 하는가? 전당, 나아가서 전국인민에게 어떻게 교대해야 하는가? 이는 중앙의 지도자, 더욱히는 모택동과 류소기 두 사람앞에 놓인 큰 난제였던 것이다.    
“대약진”을 창시한 사람은 모택동으로서 그는 “반모진(反冒進)”을 반대하는 기초에서 그런것을 생각해 내여 발동한 것이였다. 초기에 주은래, 진운이 모험적인 전진을 반대(反冒進)했다가 모택동한테 엄한 비평을 받았다. 류소기는 모택동에게 이름이 찍히지 않았지만 역시 그의 눈에는 말하지 못하는 “허물”로 되고말았던 것이다. 한것은 그가 일찍이 “반모진”결책을 내리는 회의를 열고 장악했기 때문이다. 본래 비교적 랭정적이던 류소기였건만 “대약진”기간에 들끓는 기분에 감염되여 처음은 머리가 달아올랐던 것이다. 1958년 9월, 류소기는 강소 상숙(常熟)에 시찰을 갔다가 한 공사당위서기가 무당에 1만근을 생산할 수 있다고 보고하니 그 말을 곧이듣고 좀 더 높일 수는 없는가고 물었던 것이다. 인민“공사”라는 명칭에 대해서도 좋다고 절찬하면서 주은래, 륙정일, 등력군 등과 함께 남행하는 렬차안에서 한바탕 불어대다가 정주에 이르러는 하남성위제1서기 오지포(吳芝圃)에게 그것을 추천하기까지 한 것이다. 그러루한 사례가 많다. 더만할 것 없이 류소기도 처음에는 “대약진”을 촉진시킨 작용을 논 것이다. 
   
당연히 “대약진”과 인민공사화운동의 착오를 일찍이 규정한 것은 모택동이였다. 1958년말부터 시작해서 “좌”를 규정하면서 모택동과 류소기는  높은 지표, 높은 증구, 공급제실행, 공공식당, 공산풍, 맹탕지휘, 종합평형에 주의하지 않고 조급히 해내려는 등등의 착오를 범했다는 것을 승인했다. 구체적인 조정방법으로써 정치상에 다가 실사구시적인 경제계획을 내올것을 주장했고 성진인구(城鎭人口)를 대량적으로 정간하고 “농업60조”를 제정하며 “공업70조”와 각행각업이 자기의 조례를 제정하는 등 그리고 또한 농촌에서 적당히 집시무역을 개방하고 사원에게 적당한 자류지를 주며 사원이 가정부업을 하는 것을 허락하고 정치상 반우경착오를 범했다고 한 동지들을 평판하며 착오적인 구호들을 깨끗이 정리하면서 중앙에서 인민앞에 자아비평을 하는 등등이였다. 
   
그러나 “좌”를 규정함에 있어서 측면으로부터 심입하여 범한 착오가 경제에 엄중한 곤난을 가져온 원인을 깊이 파고들면서 지난때의 모든 사업을 평가하고 판단하면서 금후의 방향을 조정하게 되었을 때 그들사이에는 차츰 분기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례를 들면 착오원인을 규명할 때 류소기는 “인화(人禍)”라 했다. 1961년5월 30일, 류소기는 중앙공작회의에서 말했던 것이다. 
   
“지난 몇해동안에 발생한 문제들이 도대체 천재(天災)였는가 아니면 우리들의 사업에 결점과 착오가 있어서인가? 호남농민들이 말했는데 그들은 ‘3이 천재고 7이 인화(人禍)’ 라 했다. 나는 몇 개성의 간부들과도 물어보았다. 내가 도로가(陶魯茄)동지와 물어봤더니 그가 하는 말이 사업중의 결점과 착오가 목전의 곤난을 조성한 주요원인이라 했다. 하북, 산동, 하남의 동지들은 어떻게 말하겠는가. 다른 성들은 물어보지 않았다. 
   
모두어 보면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는가. ‘전국을 놓고 말할 것 같으면 어떤 지방은 천재가 중요한 원인이 되지만 그것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건 아닌 것이다. 대다수지방이 우리가 결함과 착오를 범한데 주요원인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총로선을 집행하면서, 인민공사를 조직하면서, 대약진을 조직하면서 사업상 허다한 결점과 착오를 범한 것이다. 심지어는 아주 엄중한 것이다. 최근에는 농업이 감산했을 뿐만아니라 공업생산도 떨어진 것이다. 만약 문제가 엄중하지 않다면야 어찌 이같이 감산하겠는가? 왜서 후퇴하겠는가? 그래 이런것도 하나님탓이란말인가?
    
우리가 지금와서 경험을 총결짖고있는데 좋은 것은 지금이라도 돌아설 수 있는 것이고 경험을 총결할 수 있는 것이며 고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직은 로선착오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돌아서지 않고 그냥 고집부린다면 그때는 로선착오가 아니던 것이 아예 진짜로선착오로 되고마는 것이다.” 

미묘한 건 이 회의에서도 모택동이 범한 착오의 원인을 말한것이다. 
   
“당신이 그것을 위반하면(경제규률) 꼭 징벌을 받을것이며 우리는 그 벌을 입는 것이다. 최근 3년간 큰 징벌을 당했다. ‘사회주의는 누구든 해보지 않아서..... 쏘련의 경험은 쏘련의 경험이고 그들이 못에 채운건 그네이 못을 만났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기절로 또 맛다들 것이다.”
    
여기서 찾아볼 수 있는바 류소기의 강화와 비해 모택동은 결함과 착오를 경험이 모자라기때문이라고 미는 것이다. 사회주의건설규률에 대한 인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 두 사람의 지간의 차이가 너무도 커  실로 사람을 놀리는 것이다.   
   
7천명대회전에는 사업을 집중적이고 계통적으로 총결하지 않았기에 모택동과 류소기지간의 분기가 그렇게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7천명 대회때는 전혀 달랐다. 중앙에서 이같이 전국 각 현위서기이상의 간부가 다 모인데서 계통적인 총결을 지어야했던 것이다. 그러자면 반드시 꼭 경제곤난이 생기게 된 원인에 대하여 착오를 범하게 된 원인에 대하여 지나간 몇 년의 사업계획 즉 형세판단을 포함하여 “세폭의 붉은기”에 대한 평가 등 일련의 문제들에 대해서 대답할 수 있어야했던 것이다. 어떻게 해석하고 어느정도로 해석해야 하는가를 놓고 7천명대회에서 모택동과 류소기의 분기가 자연히 돌출하게 된 것이다.  물론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그것을 감촉하지 못했다. 
  
 5년후인 1967년 2월, 모택동은 알바니아대표단 단장 아루쿠와 한토막 이야기를 나눈 바가 있는데 사람들의 눈길은 곧바로 7천명대회에 돌리게 된다. 모택동이 그하고 말한 것이다. 
   
“나는 7천명대회때 벌써 문제를 봐냈는데 수정주의가 우리를 뒤짚자고 하는 것이다.”
    
뚜렸한바, 그가 말한 소위 수정주의라 하는건 류소기를 가리킨 것이다.
    
한데 필자는 모택동의 이 말은 간단하게 가공해 낸 것임을 발견했다. 하다면 그가 대체 무엇이라 말했는가? 모택동이 아루쿠투와 담화한 기록고를 보면 이러하다. 
  
 “‘1962년 1월, 우리는 7천명 현위이상간부가 참가한 대회를 열었는데 나는 그때 강화 한편을 했다. 내가 말했다. 수정주의가 우리를 뒤집자고 한다. 만약시 우리가 지금 중의하지 않는다면, 투쟁을 하지 않는다면, 적어서 몇 년 몇 십년, 많아서 몇십년 중국사회는 파시쓰전정으로 변할 것이다.’ 이 강화는 공개적으로 발표하지 않고 내부에서 발표했다. ....문제를 보아낼 수 있는 것이다.”
    
그래 모택동의 이 바람은 리유없이 생긴걸가? 그럴 수는 없다!
.....모택동은 왜서 7천명대회를 돌이켜 사색했을가? 1967년 4월 12일, 강청이 부지불식간에 내던진 말이 그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단서로되는 것이다.
강청이 말했던 것이다. 
   
“모주석은 7천명대회때 분을 겨우참았다.”

이것은 류소기가 7천명대회때 확실히 모태동을 기쁘게 하지 않았음을 말하는 것이다. 하다면 모택동의 그 “분(憤) ”이란건 어떤것이였겠는가? 
7천명대회 전후의 정황을 분석해 보면 아래의 몇가지 문제를 도출해내게 되는 것이다. 
   
우선 류소기가 장악하여 작성된 초고를 보면 여기에는 모택동과 류소기사이 교류가 잘 되지 않았음이 알리는 것이다. 당시의 형세를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했다. 모택동은 이에 대해서 특별히 중시한 것이다. 1961년 9월, 모택동은 로산회의때 형세가 이미 믿바닥까지 내려갔댔지만 지금은 날마다 올라간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류소기는 형세를 보는 견해가 달랐기에 모택동의 이 취지를 자기 연설의 초고에 넣지도 안았다. 하여 모택동은 그에게 불만을 품은 것이다. 
   
류소기의 보고초고에 보면 성적과 착오를 말할 때 “대약진”이래의 성적에 대해서는 돌출하게 단독적으로 말하지 않았거니와 상반대로 결점과 착오는 모두가 “대약진”에서 온 것이라 했다. 물론 이것은 사실과 부합되는 것이였다. 하지만 모택동은 그러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는 초고를 가져다 “대약진”의 성적을 12가지로 만들고 결점은 4가지로 만들었다. 
   
“세폭의 붉은기”에 대한 평가도 그렇다. 모택동의 생각대로 해석하지 않았던 것이다. 모택동은 류소기의 장악하에 작성되는 보고에서 “대약진”을 충분히 긍정할 것을 바랐다. 물론 류소기도 긍정은 하지만 모택동이 보기에는 긍정이 불충분하거니와 기세가 높지 않아 지어는 온통 새까만 감정을 안겨주기까지 했던 것이다. 이는 “대약진”에 대한 두 사람의 관점이 같지 않음을 설명하는 것이다. 모택동은 류소기가 쓴 초고에 의견이 많던 차 1월 27일 대회에서 구두보고를 할 때는 류소기가 모택동의 마음을 더 불쾌하게 하는 말을 한 것이다.
   
 “어떤 지방에서는 감산한 주요원인이 천재가 들었기 때문이지만 어떤 지방은 천재가 아니라 사업중에 결점과 착오가 있기 때문이였다. 지난때 우리는 늘 결점, 착오와 성적을 말할 때면 손가락 한 개와 9개관계로 비유했는데 지금은 아마 그따위의 비유를 쓸것 같지 않다. .....아마 3개손가락에 7개 손가락비유가 합당할 것이다. 결함과 성적비교가 아니다. 내가 호남에 가보았는데 농민들이 말하기를 ‘3푼천재, 7푼인화’라면서 네가 승인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불복할 것이라 했다.”
    
“대약진”의 실패가 전국성적인 착오임에 분명한데 “세폭의 붉은기”는 왜 그냥 추켜든단말인가? 뭘 하느라고? 이 문제는 복잡한 것이였다. 전당의 인식문제로서 역시 모택동의 문제였다.   
   
가히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이다. 모택동은 7천명대회기간에 확실히 류소기에 대해서 불만이 생긴것이다. 이 불만은 주요하게 류소기가 결점과 착오를 “크게”말하고 “인화”를 말하면서 지난 몇해동안의 성적은 말하지 않고 사업한 것이 온통 검게 먹칠했으며 “세폭의 붉은기”를 적극적으로 보호하지 않은 데 있는 것이였다. 바꾸어 말할 것 같으면 류소기는 모택동의 지도를 적극적으로 보호해 주지 않거니와 지어는 “압력”을 가하는 듯한 느낌이 생기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모택동과 류소기지간의 분기가 7천명대회때 공개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자극은 심각했다. 모택동이 이 기간에 분이 생기면서도 참아야 했던 원인은 “대약진”과 인민공사화운동이 실패한 원인이 확실히 자기에게 있거니와 책임을 넘길수도 회피 할 수도 없는 일이였으니 묵묵히 참는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당시 국민경제가 그야말로 암흑할 지경이였던 것만은 사실이다. 어떤 문제는 실천으로 검험하는 것이니 모택동은 분이 끓어올랐지만 겉에 들어낼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류소기는 어떻했는가, 대회민주기분에 고무되여 일종의 강렬한 사명감을 갖고 제가 맡은 사업을 더 대담히 억척스레 해나갔던것이다. 그의 사상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개방적이 되여갔고 강화들은 점점 더 힘있고 첨예해쟀던 것이다. 
   
7천명대회페막후 류소기가 자기의 구두회보를 정리할 적에 격동된 정서로 말했던 것이다. 
   
“대약진의 착오는 매우 엄중하다. 이번에 경험교을 훈총결하는 건 첫 번째의 것이다. 일후에는 해마다 한번씩 돌이켜보고 총결짓군해야 겠다. 한번 총결짓고 한번 수개하고 해서 10년에 실제와 결합해서 총결해 진짜 교훈을 섭취해서 다시는 ‘대약진’과 같은 착오를 범하지 않게 해야한다." 
   
그는 또 말했다.
   
"력사를 보면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을 지경에 이르게 되면 '죄'가 구성되기에 형을 받는 것이다. 내가 주석이 되어 이런 일을 저질렀으니! "
   
류소기가 이같이 입에서 나오는대로 웨쳐 듣는 사람은 모두 놀랬다.    

【가 첨 글】

(1)  류소기의 배짱    
1966년 8월 13일, 류소기는 한차례의 회의에서 모택동과 맞다들어 해냈다. 내리떨군대도 두렵지 않다, 철직시킨대도 두렵지 않다, 감옥에 집어넣는대도 두렵지 않다, 리혼해도 두렵지 않다, 머리가 날아나도 두렵지 않다. 
    
이에 모택동은 끓어오르는 분을 참지 못해 온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8월 15일에 열린 8기 11중전회에서는 중앙상위에 두 번째 자리에 있었던 류소기는 8번째 자리로 내려가고 말았다. 실제상 그는 모든 직을 다 떼우고 만 것이다. 그 뒤를 이은 것이 비판과 투쟁이였고 발길과 주먹질이였다. 그는 1969년년에 개봉에서 참혹하게 죽고말았다. 
   
류소기와 림표는 다가 모택동을 없애치우려했다. 류소기가 쓰려한 것은 당내의 민주주의 방법이였다. 이 방법이 시작때는 효과가 있었다. 중국은 “대약진”에 3천만이 굶어죽은게 사실이다. 이러한 력사적인 책임을 누가 져야 하는가? 더 말할 것 없이 모택동이 져야 한다. 그것은 모택동이 책임자였으니까. 로산회의에서 모택동이 비록 팽덕회를 이기기는 했지만 력사에서 그의 위신은 이미 밑바닥까지 내려갔던 것이다. “문화대혁명”과 비하면 그야말로 하늘과 땅차이였다. 그가 이때는 추앙은 받아도 속으로는 배척되여 이미 실권을 잃은 처지였다. 어떤 사람이 류소의 짝패인 등소평과 어떤 일을 모택동에게 회보해야하느냐 하지 말아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등소평은 내쳐두고 관계치말라했다. 이 말이 후에는 등소평의 죄상으로 되었다. 
   
모택동은 이때부터 시작해서 시세를 살피면서 어떻게 하면 권력을 되앗아내겠는가를 궁리하게 된 것이다. 모택동은 총명한 사람이여서 “대약진”의 책임으로 하여 위신이 떨어진 자기가 이제 더는 로간부들 중에는 제 시장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지난 십몇년간 신문과 방송을 비롯한 선전매체들이 불어댄 통에 위대한 형상으로 부각되였기에 의연히 숭배하니 세상물정을 잘 모르는 젊은이들을 속이기는 좋은 것이였다. 그것이 자기에게는 가장 큰 우세라는 것을 그는 알았다. 하여 그는 자기의 기초를 어린 학생과 젊은이들에게 잡고는 그들을 추겨 반란을 일으키게한것이다. “문화대혁명”이 발생한 전부의 원인이 바로 이런것이다.
    
모택동은 이 운동을 리용하여 류소기와 그의 수많은 지지자들을 전부꺾구러뜨리고 마침내 권력을 되잡았다. 그 수단은 무자비하고 잔혹했다.
    
림표는 이번의 권력투쟁을 친히 잘 목격했다. 그는 이른바 당내민주란 근본 소용도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부드러워서는 되지 않았다. 오로지 단단해야만 한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던 것이다. 
   
헌법에 근거하면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아직은 류소기의 직무를 철소하지도 않았는데 그를 체포하고 투쟁하여 죽게했으니 그것은 철두철미한 위법이고 범죄행위였던 것이다!                
   

(2).  민주제와 군주제의 구별  

“손가락 9개와 1개의 문제로 사고한다”거나 “주류와 지류를 가른다”거나 “3,7로 나눈다”는 등의 론단은 모두가 주역에서 온 것이다. 력사는 파도식이다..... 중국의 성어(成語)가운데 있는 “조삼모사(朝三暮四)”라거나
“칠상팔하(七上八下)”라거나 “피장이 셋이 모이면 제갈량을 당한다”는 것은 다가 중국사람들이 즐기는 수자비김사유의 구체적인 표현으로서 한 개민족의 사유형식인데 3천만에 달하는 국민이 굶어죽었는데도 그 무슨 형세는 대단히 좋고 문제가 적지 않다느니 성적이 9개손가락이고 착오가 1개손가락이니 하고 허튼소리를 쳤다. 3천만의 생명이 잃어진것도 그래 손가락 하나문제란 말인가?....    

미국에서 평생 병든 집승을 치료해오다가 늘그막에 귀국한 맹수의(孟獸醫)가 중국은 “대약진”때 3천만이 굶어죽었다는 소리를 듣고는 짐승이 굶어 그같이 떼죽음을 당했다면 리유가 서겠지만 “사람의 인소가 제일”이라면서 생명을 중히 여긴다는 국가가 아무렴 사람을 그같이 많이 굶어죽일 수가 있는가 하면서 롱담절반 진담절반 이야기를 했다.
    “미국은 29년간의 경제위가 영향이 40년을 미쳐서 사람이 근 1천만이나 굶어죽었던 거요. ”    
“금원제국”이라 자랑해온 미국에도 아사(餓死)가 있은건 분명하다. 그러나 들어보니 그 리유와 환경은 완전히 달랐던 것이다. 하여 나는 다시금 사색을 모으게 된다.
   

 (一) . 서양의 경제위기가 생기게 된 원인은 산품과잉에 있었다. 당시 미국의 대자본가들은 높은 리윤을 유지하면서 시장을 롱단하기 위해 경쟁하면서 많은 우유와 량식을 바다에 처넣은 것이다..... 그러나 중국은 “대약진”때 산품이 결핍하였고 량식이 긴장했다!
    
(二) . 미국은 당시 이주자유가 있었다. 그러나 모택동시대는 어떠했는가? 출국이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공사를 떠나 방원몇십리를 가자해도 공사무장부의 증건과 량표가 있어야 했다. 그야말로 촌보난행(寸步難行)이였다! 모택동시대의 호적제도와 인구류동공제는 유사이래 가장 가혹했던 것이다! 그러했으니 인구증감통계만은 상대적으로 준확했던 것이다!
    
(三) . 미국은 그때 몇천만이 굶어죽기는 고사하고 한해에 1만명만 굶어죽어도 총통은 탄핵을 받아 나떨어지거니와 “반인류죄”로 기소되여 옥살이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모택동은? 허튼소리로 맹탕지휘한건 잠시 말하지 말고 59년도에 굶어죽은 시체가 널려 팽덕회가 충언으로 상서를 올렸음에도 트집잡아 파면시키고 투쟁한 것이다. 일발의 재해를 제때에 수습하지 않아 3년사이에 3천만이나 굶어죽었다. 하건만 형세는 대단히 좋다고 허튼 소리를 치면서 문제가 적지 않다, 아홉손가락 성적에 한손가락 착오라고 했다. 생생하던 3천만의 생명이 잃어진것도 손가락 하나문제였단말인가! 그는 그것을 죄로 느끼지 않았기에 7천명대회에서 하는 수 없이 중앙에서 착오를 범한데는 나의책임도 있다고 한마디 승인하고는 다였다! 이것이 바로 민주제와 군주제의 구별인 것이다!  
   
(四) . 미국은 언론자유와 신문자유가 있다. 만먁 미국에서 1천만이 굶어죽거나 1만이 굶어죽는다면 아마 3일내에 전 세계가 다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모택동시대에는? 외국의 방송을 가만히 들어도 적의 방송을 들은 죄로 판결했다. 모택동이 그같이 사상령역에 전정을 실시했으니 사람이 굶어죽는 일을 어찌 감히 입밖에 번지고 전달한단말인가? 매체들은 오로지 만세만 불러야 하고 “대약진”의 공을 말해야 했다! 
                
그것이 도리였던가?                   
   

류소기는 회의에서 내놓고 “대약진”에 출현된 문제들을 밝히였다. “대약진”이 몰아온 재난에 대해서 비교적 절실하게 예측하고 총결지었던 것이다. 원 수전부부부장(水電部副部長)이였던 류란파(劉瀾波)가 모택동을 겨누고 그의 “자아비평”에 대해서 자기의 견해를 말한적이 있다.
    
“모택동동지는 자아비평정신이 부족하다. 모택동동지는 경상적으로 자아비평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는 모택동이 자아비평을 하는 것을 매우적게 보았거니와 자기를 비평하는 사람은 극력 압제하고 타격보복을 하는것이다. 7천명대회때 한편으로 민주집중제를 크게 말하면서 한편으로는 ‘전국에 인구가 몇억이나 되는데 한 사람이 한가지씩 의견을 말해서야 어디되겠는가?’했다.”
    
허심한 군주라면 이렇게는  말하지 많았을 것이다.
  

(3).
연구과제       

“문혁”중에 빚어진 원안과 가짜안건과 틀린 안건을 연구하는 것은 문혁의 력사를 연구함에 한낮 중요한 부분으로서 그 특정을 3가지 류형으로 나눌 수 있는 것이다. 첫째는 력사문제. 즉, “반역자”, “특무”, “내부간첩”, “력사반혁명” 문제다. 전형적인 례로는 “61명 반역집단안건”, 내몽고의 “신내인당안건” 등. 둘째는 정치견해분기. 즉, “모주석을 반대”하여 “당권을 찬탈하려 한 문제”로서 이른바 “팽진, 라서경, 륙정일, 양상곤안건”, “류소기안건” 등이다. 셋째는 “문혁”의 충돌. 즉 “문혁”운동에 대한 정치태도문제와 “무산계급사령부”의 의견이 맞지 않는 문제였다. 그 전형적인 안건으로는 “도주타도안건”, “양상곤, 여추리, 박일파사건” 등이다.  
    
첫종류는 낡은 력사장부를 뒤지는 것인데 성질이 엄중한바 적아모순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다. 둘째종류는 결국 당내로선투쟁성질을 띈 것이다. 셋째종류는 군중이 자신을 교육하는 사상인식범주에 속하는 것이다.         
               
            
                 류소기죽음과 주은래의 작용


1922년 9월, 류소기는 공산당 상담구위와 모택동의 지시에 따라 안원탄광공인들을 혁명에로 이끄는 길에 올랐다. 1931년 1월, 중앙정치국후보위원으로 되었다. 류소기는 서금(瑞金)에 있을 때부터 모택동의 관점과 접근하게 된 것이다. 특히 그 전에 그의 공산당중앙직공부부장직무를 철소한 것은 잘못된 것이였다. 하여 그는 모쓰크바의 어떤 관점에 대해서는 의문을 품은 것이다. 1934년 4월, 그는 복건성위서기로 조동되였다. 그사이 그는 모택동의 주장이 중국공산당의 실제와 맞는다고 느낀 것이다. 
   
중앙홍군이 근거지를 옮길 당시에 주은래는 실제상 당정군의 첫책임자였지만 전략전인 전이과정에 모택동이 점차적으로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던 것이다. 모택동과 장국도의 회억을 보면 다가 중앙홍군과 4방면군의 장정때를 인생중 가장 암흑했던 시기로 인정하고 있다. 이로 보아서 모택동과 장국도의 모순이 얼마나 컸는가를 알 수 있다. 하여  중앙홍군과 당중앙이 연안에 도착 한 후에 모택동 등 당정군령도는 장국도에 대한 포위공격을 발동한 것인데 류소기가 제일먼저 장국도는 “당을 분렬했다”고 지적한것이다. 그런데 력사는 류소기역시 홍4방면군을 거의 소멸될 지경에 몰아넣었거니와 장국도를 도망치게끔 핍박한 공신이였다고 말하고있다. 주은래도 당연히 그렇게 했던 것이다. 당중앙의 허다한 사람이 그에 참여했다. 그리하였기에 장국도와 홍사방면군은 과연 하마터면 영 소멸될번 한 것이다. 
  

1937년 5월 17일에 열린 쏘베트구역당대표대회에서 류소기는 <<백구의 당군공작에 관하여>>보고를 했다. 이는 류소기가 이미 백구에서의 중앙중앙의 합법적인 정확한 대표라는 것을 표명하는 것이였다. 백구의 다른 한 수령은 주은래였다. 항전초기에 쏘련은 왕명을 중앙령도로 파겼하였다. 한데 왕명과 모택동사이에 정치투쟁이 벌어졌다. 주은래는 쏘련과 왕명켠에 서서 모택동을 지지하는 류소기파의 계통과 견결히 맛섯던 것이다. 그야말로 수화상극이였다. 하였기에 력사를 보면 쏘련은 주은래를 흠상한 것이다. 결국 모택동이 왕명을 이겼다. 1943년 3월 16일~3월 20일, 왕명과 장국도는 다가 모택동에게 당권을 빼앗긴 중요한 날이였다! 
   
류소기는 모택동의 제의에 의하여 두 번째 자리인 군위부주석이 되었다. 모택동은 중공당내에서 명실상부하는 1호인물이 된 것이다.
    
그런 후 연안정풍을 시작했는데 이 기회에 왕명로선의 사람들을 정리하면서 류소기파계의 사람들은 주은래에 대해 잔혹한 투쟁을 한 것이다. 팽진은 지어 주은래의 당적을 취소하자고까지 건의했던 것이다. 주은래는 여러번이나 검토를 했건만 고비를 넘기지 못했다. 7대선거에서 주은래의 득표률은 22번째였으니 정치국에 들어갈 자격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모택동이 그를 정치국에 끌어 넣었다. 본래 백구에서의 공헌을 따지면 주은래가 류소기를 훨씬 릉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상술한 원인으로 하여 류소기가 백구의 유일정확한 로선의 대표로 되었고 주은래는 착오로선의 대표로 되었던 것이다. 이 단락의 력사를 주은래는 뼈속에 새기고 잊지 않는 것이다. 
   
중앙홍군이 장정을 하기 전에 항영(項英)이 와서 남방 8개성의 유격전쟁을 지휘하기로 했다. 하기에 항전시기 모택동을 위수로 한 당중앙은 신사군을 철저히 장악할 수 없었거니와 도리여 남방공산당에 끼치는 영향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모택동 등 중앙령도는 신사군에 대한 정돈개선을 했다. 모택동, 류소기, 주은래 모두가 자기 시람을 신사군에 들여보내여 황영과 정치투쟁을 벌리였는데 서로간에 모순이 생기였던 것이다. 례를 들면 주은래의 친신인 진의가 모택동과 류소기의 친신과 격렬한 충돌이 발생한 그것이였다. 력사는 군대를 누가 장악하는 가에 따라서, 군대에서의 영향이 어느만큼 큰가에 따라서 당정(黨政)지위가 결정되는 것이라 알려주고있다. 하기에 투쟁은 잔혹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1941년 1월, 환남사변(皖南事變)이 발생하여 항영은 목숨을 잃었다. 신사군은 모택동에게 장악되었다. 1월 20일, 류소기는 신사군정위, 군위신사군분회서기, 중앙화중국(합병후의 중원국, 동남국)서기로 임명되여 남중국에서의 모택동의 유일한 대표인물로 되었고 지위도 처음으로 일찍 6기1중전회이전에 지도층에 오른 주은래를 초과한 것이다. 이때 주은래의 심정은 어떠했겠는가를 짐작하게 되는 것이다. 
   
1945년 4월 20일, 중앙은 <<약간의 력사문제에 관한 결의>>를 통과함으로써 모택동과 그의 친밀한 전우 류소기의 공적을 긍정했다. 따라서 4월 23일에 열린 7대에서 류소기는 <<당장수개에 관한 보고>>를 하였는데 모택동사상을 당장에 넣었다. 당내에서 모택동사상을 제일먼저 제기한 사람은 등척이였다. 그러나 그것을 리론적으로 계통화하여 선전한 것은 류소기였던 것이다. 하길래 모택동은 그의 공적을 긍정하는 것이다.
    
건국후에 모택동과 류소기는 첫고험을 격게 되였다. 고강과 요수석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본래는 주은래를 대체하여 고강을 총리로 시키자는 것이였는데 모택동과 고강은 투쟁을 확대화하였길래 창끝이 직접 류소기한테로 돌아졌던 것이다. 그통에 결국 모택동의 계획은 실패했고 고강은 자살하고 만 것이다. 이 력사 이 사실로부터 중공지도자들에게 도처에서 남의 미움을 살 일은 하지 말라고 가르친 것이다. 그 결과 류소기와 주은래는 꼭같은 압력을 받은 것이고 다같이 단결해야만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다시금깨달은 것이다. 류소기와 주은래의 권력은 더 커갔고 세력도 커갔으며 영향도 커갔다. 그리하여 모택동은 류소기와 주은래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더 많아지게 된 것이다. 
   
주은래는 국무원을 통해 각부위와 중앙직속사업계통을 건립했는가 하면 류소기는 당계통조직의 령도를 통하여 지방령도권을 공제하였다. 두 개계통은 기본상에 교차되고 중첩되는 것이였다. 하길래 권력모순은 불가피면적으로 정치투쟁을 야기시키켰던 것이다. 
   
모택동과 류소기사이에 정치투쟁이 생기였을 때인데 한번은 회의에서 류소기와 등효병(鄧曉甁)이 모택동의 친신인 림표에게 엄격한 비평을 제출했는데 주은래역시 끼여들어 림표를 비판했다. 림표는 하는 수 없이 자기비판을 했다. 다른사람이 보기에는 주은래가 류소기의 편에 선것만 같았다. 공개된 사료를 보면 “문혁”을 발동하기 전에 모택동은 적수동(滴水洞)뒤에 은거해 있으면서 주은래가 매일 보내는 바깥의 정보들을 보았다. 그러니 모택동은 바깥일을 손금보듯한 것이다. 모택동은 먼저 라서경을 내리떨구고는 팽덕회를 3선에다 파견하여 류소기가 군대와 련계할 수 있는 길을 끊어버린 것이다. 한편 주은래는 북경대학에 가 연설하면서 류소기의 군심(軍心)을 동요시켰다. 류소기가 공작조를 파견하여 그것이 치명적인 허점으로 되었을 때 모택동은 주은래의 건의에 따라 “나의 한 장의 대자보”로 류소기에게 일격을 가한 것이다. 이로하여 모택동은 주동권을 쥐었으니 주은래의 공을 몰라볼 수는 없는 것이였다. 
   

력사자료에 기재된 것을 보면 군중들이 류소기와 왕광미를 투쟁할적에 주은래는 공개적으로 류소기부부를 보호해준 것이다. 사실이 그러했다. 하지만 류소기는 참혹하게 죽었고 왕광미는 시달림을 몹시 받은것이다. “문혁”때 주은래는 몇몇 총리와 연구한 끝에 국무원 각부부장들을 엇바꾸어가면서 얼마간씩 중남해에 들어와 있게 함으로써 숨을 돌리면서 군중투쟁을 모면케 한 것이다. 하지만 그가 보호해준 간부명단에 보면 당내 류소기, 팽진, 박일파 등 북방국계통의 사람은 없는 것이다. 그러했기에 그계통의 사람들은 동산재기하자 주은래에 대한 노기가 대단하여 시종 그를 용서하지 않은 것이다. 자기들이 혼쌀먹은데는 주은래의 흔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력사는 독자들에게 류소기전안조의 조장은 주은래였고 그가 류소기가 체포된 후에 반변한 증거를 찾았다고 알려주고있다. 공개된 사료에 기재된 것을 보면 주은래가 류소기를 총살하자고 요구했으나 모택동이 동의하지 않고 당적만 취소하자고 했다. 1967년에 주은래가 류소기의 자료를 올려보내자 모택동은 아래와 같이 친필지시를 내린것이다.
    
“병이 있으면 치료하여 9대때의 산과녁으로 만들라”
    
림표의 지시는 이러했다.
    
“류소기는 죄악이 큰것이다. 혁명을 배반하고 당을 배반했으니 죽이지 않고는 민분을 풀지 못한다.”
    
주은래도 지시를 내렸다.
    
“견결히 주석과 림부주석의 지시대로해야 한다. 혁명군중이 비판투쟁하게 함으로써 교육과녁이 되게해야 한다.”  

1969년 11월 12일 류소기가 병으로 죽자 모택동은 구두지시를 했다.    
“자작지얼이니 살 수 없다”
    
림표의 지시는 이러했다.
    
“극악한자는 사후에도 그 오명이 지워지지 않는다. 태워버리라.”
    
주은래의 지시는
    “
림부주석의 지시래로 불에 태워버릴 것”.
    

그러나 지금의 중공당사와 중국력사기재에 보면 국가주석 류소기는 림표, 사인방의 박해를 받아서 죽었다고 쓰고있다. 그러나 림표반당집단과 사인방반당집단을 공개심판 할 때는 림표의 아랫사람들은 누구하나도 그에 유관되는 확실한 자료를 내놓지 않았다. 사인방을 심사할 때 강청이 그것은 당중앙의 결의였다고 말할 뿐 
   
첫째, 모택동이 한 일이라고 승인하지 않았고 
   
둘째, 주은래가 작용한 것이라 하지 않았고
    
셋째, 류소기를 죽도록 몰아댄 기타령도의 이름을 찍지 않았다.
    
강청은 역은 녀인이였다. 일단 위대한 령수 모주석과 전국인민이 애대하는 주총리를 말했다가는 곧 자기의 반당증거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류소기를 박해한 중앙령도가 누구였다는 것을 말하면 지금도 의연히 올라앉아 권리를 잡고있는 사람한테 미움을 받게 되는 것이다. 례를 들면 엽검영은 등효병(鄧曉甁)이 류소기를 평판하자고하니 반대하면서 평판대회에 참가하기를 거절한 것이다. 그러한즉 류소기를 박해하여 죽게했다는 질책에 그녀는 그저 창백한 대답만을 할 뿐이였다.
    
“내가 아니다.”
    

청화대학에서 왕광미를 “지혜로 나포”한 연극이 벌어졌을 때 주은래는 소식을 듣자 그밤으로 비서를 보내여 교섭해서 왕광미를 돌려보내게 했다. 그리고는 밤중에 친히 왕광미에게 전화를 한 것이다.
    
“광미야, 고험을 이겨내야 한다.” 
   
왕광미는 간단히 한마디했다.
“총리는 참 좋아요.”
    

하지만 20세기 80년대에 왕광미가 정치국에 적발편지 한 장을 써 바치였는데 그 내용인즉 모택동이 처음에는 류소기와 련합해서 주은래를 투쟁하자고 했다가 류소기한테 거절당하니 결과 모택동은 주은래와 련합해서 류소기를 타도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의 공개된 사건을 보면 주은래가 죽은 후 그를 기념하는 장소에 왕광미도 갔다가 그를 구가한 글을 보고는 발연대로하여 돌아서고 말았다. 다른 한 글을 보면 그렇지 않다. 왕광미는 몸이 좋지 않아서 돌아왔다는 것이다. 왕광미는 그저 주은래를 의심만하였을 뿐 아무런 증거는 쥐지 못한 것이다.....    
       

쏘련이 당장 쳐들어오리라는 공포속에 고급지도자들은 쏘련의 번개식 진공을 피하느라 급히 수산한 것이다. 투쟁을 받고있던 류소기도 그래서 북경을 떠난건데 개봉에서 처참히 죽어 천고의 수수께기를 남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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