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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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나의 정신세계 고백서》

2-1. 내 사상의 계보학적 흐름
2012년 11월 26일 16시 28분  조회:5517  추천:26  작성자: 김문학

김문학《나의 정신세계 고백서》

제2장
내 사상의 계보












1. 내 사상의 계보학적 흐름

0.
세상의 모든 사물에는 제각기 고유의 “생일”이 있는 법이다. 이 탄생에 이르는 고유의 궤적, 흐름 적 “과정”을 되돌아보는 문맥을 통해서 만이 그것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 “과정”을 망각하고 있었다. 물론 나 자신의 “사상”이 태어난 “생일”의 “과정”에 대한 망각이었다.
만약 나에게 “思想”이 존재한다고 하면, 그것은 나의 글쓰기에서 표현 됐거나, 또는 내 내면의 의식 속에서 있다고 가정하는 세계, 사회, 인생에 관한 나름대로 의식 내용일 것이다.
기실 “思想”이란 것은 만질 수도 볼 수도 없는 의식세계로서, 그 자체를 말과 글로 표현, 표달하기는 그리 용이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 편의적으로 표현 해보는 시도는 그래도 있다. 나는 내면의식 세계로서의 사상을 독서를 통한 나의 계보학(系譜學)적 흐름으로 짚어보는 것으로 표명해 보기로 하겠다.

1.
1989년 5월 하순. 만 26살의 나는 북경에 있었다. 세계를 진감한 “6ㆍ4 천안문 사건” 전야였다.
나는 북경 모 출판사의 요청으로 그때 내가 집필한 책과 일본책 번역 교정일로 십여일 간 잠깐 휴강을 하고 북경에서 체류했다. 천안문과 인근 거리에 있는 출판사 근처의 여관에서 묵고 있었다.
나는 하루 작업을 끝내고 나면 매일 천안문광장에 가서 산보하는 것이 일과였다.
5월 하순에서 말에 접어들자 북경시내의 여러 대학교 학생들의 데모가 점차 더 큰 규모로 백열전에 달했다.
민주와 자유주의를 정부에 호소하는 충천 하는 대학생들의 열의는 그때 대학 강사로 있던 젊은 나의 가슴에도 와 닿았다. 5월 31일 나는 일을 마치고 곧 심양으로 돌아와 출근을 했다. 그런데 저녁에 학교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다가 나는 허리를 다쳤다. 그리하여 이내 집에서 쉬면서 조선족 종교에 관한 논문을 쓰고 있었다.
그때 학생운동의 열기는 전국으로 파급되었는데, 심양의 수많은 대학생들도 민주화 데모를 하고 있었다. 대학생뿐이 아니라 대학의 젊은 교사, 교수들 그리고 일반인 청년들도 데모에 가담하여 온 시내의 교통이 마비되다시피 했다.
전화를 걸어오는 한족 지식인, 작가 친구들이 많았다. “너는 왜 청년지식인으로서 잠자코 있냐? 이런 민주화 운동의 대열에 뛰어 들자!” 라고 상대방들은 열변을 토한다.
그러나 나는 데모에 나가지 않았다. 두문불출 글쓰기를 했다. 왜냐하면 나의 사상에는 “데모”를 형태로 하는 “주의, 이데올로기”의 행동이란 “프로그램”이 결여 했던 것이다.
지식인의 “사회참여”는 어디까지나 글쓰기를 통한 행동이다라고 생각했던 나였다.
노신의 후기의 이데올로기에 편향했던 것과 달리 호적의 “주의를 담론 아니 하고 정치를 불문 하는” 학문주의, 인문주의적 사상에 공감을 했다.
그리고 나는 중국에서 태어난 마이너리티(소수민족) 지식인으로서, 문화적으로는 아무래도 아웃사이더 인만큼, 정치에다 자신의 정력을 소모하기 보다는 학문, 문학으로 불태우겠다는 인문주의적(?)사상이 근저에 있었다.
사르트르의 말대로 “언어를 총탄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글 쓰는 발화행위가 바로 표적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데모를 하는 것도 그 자신의 자유요, 안하는 것도 내 자신의 자유로 생각하고 나는 글쓰기로 인생에서 승부하는 자신이라고 결의를 더욱 굳힌 것도 그때인 것 같다.
적성적으로 따지면 나는 정치인적인 기질이 거의 제로에 가까웠으며, 오히려 이념에 속박되지 않는 자유주의 지식인, 연구와 글쓰기 쪽이 내 기질, 성격에 맞다 는 것을 일찍 알았기 때문이다.

2.
아마 내가 기억하건데, 나의 사상의 탄생의 시발점에는 중국에서 아동기 때부터 받아온 “맑스주의”, “모택동사상”으로 칭해지는 이른바 공산주의, 사회주의 “혁명사상”일 것이다. 물론 막연하고 어렴풋한 폭력, 투쟁, 계급 등 키워드로 연결된 미완의 “사상”이었다.
그리고 특별히 반시류, 반골정신이 있었던 내게서 매일 같은 계급투쟁의 사상주입에 대해 거부감, 기피 감을 느낀 것도 있었다.
대학에 들어가서 일본의 서적을 통해 나는 이 세상에서는 맑스주의, 모택동사상 외에도 너무나 풍부하고 다양한 사상이 존재함을 알고 경탄하며, 그 사상의 이해와 수용에 탐닉했다.
마르크스는 “인간은 자유롭게 생각한다고 하지만 실은 계급적으로 사고하고 있다” 라고 갈파했다. 모택동은 “정권은 총구멍에서 나오며, 인간은 계급투쟁을 멈추지 말아야 된다는 독재적 폭력투쟁사상을 고안해 냈다. 프로이트는 인간은 기실” 자신이 어떻게 사고하는가를 모르고 사고하고 있다고 갈파했다.
마르크스, 프로이트와 동시대의 사상가, 철학가 니체는 인간은 “자신이 外在적 규범의 노예에 지나지 않으며, 자신이 누구인지 조차도 모른다” 라고 단언한다.
고전문선학자로 출발한 니체는 “계보학”적 사고를 원용하여 “자신을 모르는 인간은 어떻게 이렇게 바보로 되었나?”를 관통시켜 “인간은 누구인가?”에 대해서 언설을 펼치고 있다.
내가 니체의 사상에서 좋아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과거의 어떤 시기에 있어서 사회적 감수성이나 신체감각 같은 것은 현재를 기준으로 파악할 수 없다. 과거나 타자(이방)의 경험을 내면에서 살리기 위해서는 치밀하고 철저한 자료적 기반과 대담한 상상력과의 유연한 지성이 필요하다” 라고 한 사고이다.
이 사고는 “계보학적” 사고로 명명한 현대 프랑스의 역사학자, 철학자 푸코에 의해 전승, 발전되는 듯하다.

3.
1980년대의 세계적(서양적) 포스트모터니즘 사상 격랑의 여파가 아직도 강렬하게 동아시아에서 불고 있던 1991년 초, 나는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물론 그 한 해 전에는 독일, 덴마크, 노르웨이, 프랑스 등 유럽 나라를 일주하게 되는 행운도 차지하였다.
내가 일본에서 발견한 세계는, 100년 전 중국 지식인 노신이나 주작인의 언설에서 노정되고 있는 “일본에서 발견 되는 중국 당풍(唐風)문화”가 아니었다. 일본은 전통의 일본이란 고층(古層)외에 중후하게 전개하고 있는 것은 세계문화, 사상의 “도가니”, 즉 지적도가니라는 것이었다.
서양의 근대, 포스트모터니즘의 일체 사상, 지적 조류가 여기서 회합하고 집결하여 강열한 소용돌이를 이루고 있었다는 점에 나는 경이로 왔고 내심 쾌재를 불렀다.
일본문화와 조우는 나에게서는 일본문화인 동시에 일본에서 층층으로 파문같이 크고 작은 원을 형성하고 있는 역동적인 서양문명, 근대의 사상이었다.
“국제화”로 칭해진 일본의 글로벌화 진척은 나의 사상과 지견을 변용시키는 거대한 용광로가 되었다.
나는 중국에서 대학생 때 읽기 시작했던 일본어 서적(번역서)을 통해 사상을 읽었다. 근대 및 포스트근대의 사상을 하나하나씩 접촉, 반추, 수용, 배제의 여과장치를 거쳐 내 넋 속의 사상으로 층층의 동심원을 이르며 자리 잡기 시작했다.
기술의 편의를 위해 시대별로 나의 이 “층층의 동심원(同心圓)”에 대해서 계보적, 궤적으로 그려 보기로 하겠다.

4.
중국에서 대학공부를 할 때, 마르크스와 레닌주의, 모택동사상을 혁명사, 중공당사, 철학과를 통해 배웠지만, 근대 특히 1980년으로부터의 모더니즘에 대해서는 완전히 교양과목에 결락 된 공백의 세계였다.
다행히도 나는 일본에서 펜팔들이 (일본의 대학 교수, 작가 및 대학원생) 우송해 주는 책으로 공백을 어느 정도 메울수 있었다.
일본에 와서 나는 1980년대 격량을 일으킨 포스트모던 사상을 “근대 계몽사상의 종식”을 선고 하는 식으로 접했다. 포스트모터니즘의 선열한 사상을 나에게도 충격적이었다.
특히 프랑스 사상가 프랑소와, 리오타르(1924-98)의 영향은 지대했다. 1977년 출간된 그의 <<포스트모더니즘의 조건>>에서 저가는 근대적 “장대한 이야기”가 종식됐다는 시대로서 포스터모던을 정의 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근대(모던)란 인간주체의 해방, 자본축적의 이론, 정신의 변증법등 “장대한 서사”가 지배한 시대였는바, 현대는 그 같은 “대서사”에 향해 불신감이 팽창된 시대이다. 따라서 이 시대가 바로 근대를 넘어선 포스트모던의 시대라는 것이다.
사르트르(1905-80) 같은 반체제 지식인이 언설로써 시대의 정치체제와 맞서 싸워 대중의 크나큰 호응을 얻었으나, 포스트모던 시기에는 이런 지식인의 역할은 끝났다고 단언한다.
사르트르적 반체제지식인의 실존주의를 좋아했던 나에게는 충격이었다. 리오타르의 지적대로, 나는 그의 이론이 열린 다양성의 사상, 창출을 꾀했다는 면은 좋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장대한 이야기”가 끝났다고는 찬동할 수 없었다. 왜냐면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소련 공산주의 사회의 붕괴, 등 대사건이 그의 이론을 정면에서 부정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던을 정면에서 반론을 든 독일의 유명한 사회철학자 하버마스 (1929-)와. 그는 커뮤니케이션적인 행동이론 (1981) 노작을 출간하기에 앞서 <근대, 미완의 프로젝트>라는 글 (강연)에서 근대계몽사상은 아직 유효하며 그 정면 적 유산을 수정하면서 계승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아까 위에서 잠깐 언급했던 미셸ㆍ푸코는 1984년생을 마감하지만, 오늘날까지 하머마스를 초월하는 영향력을 과시한 사상가ㆍ역사학자이다. 내가 푸코를 존경하는 이유는 푸코의 니체이래 “계보학”적 방법으로 학문연구를 역사적 팩터로 복합적으로 행한 공적이다.
《감옥의 탄생 (감시와 형벌)》, 《광기의 역사》, 《知의 고고학》등 저작을 통해 역사적, 사회적 넷트웍으로 관찰 한 점이 보인다. 그는 인간의 신체도 사회의 의미에 의해 엮여진 “사회제도”라고 갈파한다. 그래서 국가가 신체를 조작한다는 원리를 발견하는바, 그것에 그치지 않는다. 푸코는 휴머니즘(인간주의)을 “지금, 여기, 나”라는 주의로 설정하여 인간주의적 진보사관을 부정하며 역사는 직선적으로 추행하는 것이 아니라고 갈파한다.
푸코는 역사를 거슬러 올라 관찰하는 것으로 인간이 안고 있는 여러 “상식”을 깨부수고 있다. 그가 “상식깨기”에서 인간의 정신질환에서 “정상과 이상”의 경계란 개념을 깨고 狂氣(광기)에 대해 새로운 조명을 하고 있다.
그가 말년에 쓴 대작 《성의 역사》는 “인간을 왜 성에 대해 이처럼 정열을 몰부어 담론하는가?”에 답을 주는 저작이었다. “성을 억압된 문법으로 담론하려하는 우리들의 정열의 안(眼)이 지탱해준다” 라고 그는 답을 찾았다.
많은 충격을 받으면서 읽은 푸코의 저작들은 이 지구위의 인문, 사회과학 연구자의 필독 문헌으로서, 지대한 영향을 행사하고 있다.
“회의”로부터 출발한 방대한 푸코의 지적 言說은 회의의 사상을, 그리고 계보학적 지의 사상을 나에게 심어준 스승이기도 하다.

5.
신자유주의 사상은 또 나에게 영향을 준 사상이었다. 1980년대 “네오리벨라즘”이라 칭해진 사상의 고안자인 하이예크 (1897-1992)는 그의 경제사상을 이렇게 전개했다.
“북구형 복지국가를 포괄한 중앙집권적 경제가 인간예속이라 하고, 개인의 자유를 토대로 한 시장경제로 의해서만이 사회 번영이 가능해진다” 라는 독특한 학설을 주장했다.
영국의 사처수상이 1980년대 실시한 “신자유주의 정책”은 기실 하이예크의 사상이었다. 90년대 중국 사상계, 지식계에서도 이 “新自由主義” 사상이 급속히 전파되면서 신자유주의 지식인을 많이 생성시켰다.
1990년 이후 세계적 규모로 전파된 “글러벌 산지유주의”는 미국에서 다시 생긴다.
그중에도 나는 킴릿카(1962-)가 제시한 “多文化的市民” 사상, 마이너리티와 개인의 자율성과 평행을 이룬 국민국가론에 공감이 갔다. 그리고 찰스테일러 (1931-)의 “국내에서 다양한 문화를 승인하는 多文化主義사상을 나는 읽으면서 찬성하는 면이 많았다.
1990년에서 현재까지 인류역사는 리오타르가 “대서사의 종식”이 아닌 오히려 그 반대쪽으로 “대사건”이 빈발하는 쪽으로 흘렀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 소련연방의 해체, 이라크 전쟁, 그리고 냉전체제의 해체, 9ㆍ11 사건...
잇따라 미국의 일본계 미국인 3세인 푸랜시스ㆍ후쿠야마(1952-)의 공산주의 종식과 자유주의 이념의 승리를 선고한 《역사의 종말》이 등장했다. 그리고 사뮈엘헌팅턴(1927-2008)의 유명한《모명의 충돌》, 그는 세계문명을 8개의 문명권으로 구분시켜, 문화권에 의해 문명의 저항관계를 주축으로 국제질서를 해독했다.
흥미로운 이론의 제시였으나, 문명지간의 상호융합조화라는 원리를 배제시킨 편견이 있어 문화, 문명의 상호학습, 영향에 대한 주지를 노정시켰다.
증오를 선정적으로 확장시키려는 의도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공감하는 부분이 있었고, 한편 그의 치명적 결합에는 많이 실망했다.
그때 상쾌하게 등장한 것이 “반헌팅턴 구상”이라는 부제로 나온 하랄트 뮐러(1949-)의《문명의 공존》이었다. 독일 프랑크트대학의 국제관계학 교수인 뮐러는 1998년에 출간한 이책에서 “충돌”을 전면에서 비판하고 “충돌”보다 매력적인 “공론”이 미완의 근대 속에서 가능하며 또 그런 전망은 밝다고 지적한다.
그럼에도 이 책에서 주장한 이론에는 서구 중심적 가정(假定)에 입각하여 논리를 전개한 약점을 지니고 있었다.
1999년 토머스 프리드먼(1953-)의《렉서스와 올리브 나무》가 출간된다.
《뉴욕타임스》의 중동전문가로 출발한 칼럼니스트인 그는 세계 각국을 여행하면서 경험한 것을 통해 세계화(글러벌) 至上主義자의 바이불로 꼽히는 이 책을 집필했다.
나는 2001년 12월《장백산》에서 주최한《김문학작품 연구심퍼지엄》에 참석하러 가는 비행기 안에서 이 책 (한국어판)을 읽었다. 책 제목 “렉서스와 올리브나무”가 가치관의 충돌을 의미한다. 렉서스는 일본 토요타의 고급 자동차브랜드, 즉 세계화를 상징하고, 반면 올리브나무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와 전통을 상징 한다 즉 지방적인 것을 상징한다. 그는 세계화 (글러벌)와 지역의 모순을 이야기 하면서 세계화의 큰길을 달리는데 올리브 나무가 걸림돌이 되기에 세계는 불안하다. 혼란스러울 것이라고 전망한다.
글러벌리즘과 로컬리즘을 사고하는데 좋은 텍스트였다. 이 양자에 대한 사고 역시 내가 줄곧 사고하고 있는 일종 사상적 테제이기도 하여, 이 영역에 대해서는 졸문의 뒤 부분에서 재의하기를 하겠다.

6.
마르크스의 《자본론》이래 가장 거시적이고 총체적인 “제국론”을 통해 자본주의세계의 작동메카니즘의 역사를 전 지구적 차원에서 설명한 거작이었다. 바로 네오마르크스주의자 지식인 안토니오네그릿(1933-)이다 이탈리아 좌파 지식인인 그는 1979년 테러유도 협의로 수감되기도 했다. 200년 미국 듀크대학 모학 쇼수 파이클 하트 (1960-)의 공저로 된 <<제국>>을 출판한다. “끊임없이 달 중심화 하는 권력의 넷트웍으로서의 제국”으로 세계를 통권 하는 주권력을 해석하면서 제국의 탈근대적 양상을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제국적 권력에 직적 대항하여 전 지구적 주장하며 대중의 절대적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분발해야 한다고 주장을 펼친다.
그러면서 코스모폴리타니즘을 가능할 수 있으며, 이 가능성을 최선봉으로 통일유럽이라고 직언하고 있다.
그의 주장에는 확실히 마르크스주의가 실행했던 인터내셔널운동을 계승하는 의미가 엿보인다.
마르크스주의, 사상, 헤겔의 진보사관 등에 대해서는 생략하지만, 일본에도 기실은 근대사를 펼치면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로 지칭된 사상가들 일테면 요시노사쿠조(吉野造作 1878-1933)가 헤겔의 영향을 받은 프로티스탄이 실재했다.
그리고 야마가와 (山川均)ㆍ카와카미 하지메(河上肇)등 마르크스주의 지식인에게 정도 부동한 영향을 끼친다. 그리고 그들은 일본에 바로 유학했던 진독수, 이대소, 주은래의 마르크스사상 육성에 큰 영향을 행사한 것으로 실제로 중국 마르크스주의, 공산주의 운동은 공화혁명을 일으킨 손문과 같이, 역시 일본의 영향 하에서 전개되는 사실(史實)을 인식해야 한다.
화제가 약간 옆으로 샜다. 근대성에 대해 즉 모더니즘에 대해 서양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후 슈펭글러(1880-1936)가 명저 《서양의 몰락》등의 영향 있는 문명비평론의, 그리고 유명한 하이데거(1889-1976)의 근대비란이 등장한다.
그 뒤 아드르노가 계몽의 변증법기를 출간하여 “비판적 이성”을 제의하면서 근대 계몽을 재고하였다.
한나 아렌트(1906-1975)의 “전체주의의 기원”은 인간 사고의 결락으로서의 악(惡)으로 나치스적 전체주의를 통렬하게 비판하였다. 그녀의 사상은 전체주의의 악을 비판하는데 있어서 근원적 사고결여, “자신과 다른 타자에 대한 사고의 결여”로서 이를 읽으면서 나는 현재 존재하는 중국의 티벳에 대한, 위글 족에 대한 소수민족 탄압이 나 인민의 생명을 경시하는 북한의 전체주의에 대해 새롭게 재고하게 되기도 했다.

7.
근대, 포스트 근대, 문화적 근대성, 이것들은 내가 근 10여년간 항상 관심을 안고 사고 해온 거시적 제들이다. 미국이나 프랑스, 일본과 같이 근대의 민주주의, 자유주의를 구가하는 시회가 있는가 하면, 또한 북한이나 중국 같이 여전히 근대민주주의, 자유주의 원리를 배제한 전 근대적 요소를 다분히 내표한 사회도 존재하고 있다.
어떤 근대, 어떤 근대성이 더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가는 묻지 않아도 自明한 문제이다.
특히 근대성, 문화적 근대성을 다시 재고하면서 읽었던 마셜ㆍ버멘의 <<견고한 것은 모두 공중에 용해된다>>는 저작을 근대성의 모호함과 애매성에 흥미로운 접근을 하고 있었다.
저자는 이 근대성을 남성이나 여성에 공통된 경험, 즉 시공적 경험, 자기와 타자의 경험, 생명가능성과 위험성의 경험, 등 양식이라는 것이고 규정하며, 이 일련의 경험을 즉 “근대성”이라 한다.
“근대적이라는 것은, 인간의 자신과 세계 대해 모험, 힘 ,기쁨, 성장, 변신을 약속함과 동시에 인간이 갖고 있는 것, 아는 것, 인간의 모든 것을 파괴하는 위험이 있는 환경의 몸을 두고 있다고 한다. 근대적 환경 경험이란 지리, 민족적 경계선, 국적, 계급의 경계선, 종교나 이데올로기의 경계선을 모두 뚫고 지난다. 이런 의미에서 근대성은 모든 인간을 통일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逆設적 통일, 不統의 통일이며, 인간전체를 영구한 파괴와 재생, 투쟁과 대립, 애매함과 고통의 거대한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하는 것이다. 즉, 근대적이라는 것은 마르크스가 말한 것처럼 “견고한 모든 것을 공중에 용해시키는” 우주에 속한다.
물론 앤드슨과 같은 지식인은 “견고한 것은 모두 용해 된다” 라는 중심사상을 “발전”이라 포착하기도 한다. 근대란 자본주의 경제와 과학기술의 발전의 과정을 내포하지만, 버멘은 “자기발전”이기도 하며 근대적 경험이기도 하다고 직언한다.
버멘의 근대성을 거론하면서 존ㆍ톰 린슨이란 영국의 비평이론 연구자는 1991년에 쓴《문화제국주의》에서 서양적 발전관을 재고해야 한다고 力說한다. 현재의 근대 자본주의 발전은 목적을 잃어버린 문화가 세계에 획일적으로 침투하고 있는바, 이를 글러벌리제이션이라고 칭한다. 글로벌의 근대적 확산이 매스미디어를 통해 획일성을 띠면서 확산시키는 문화 그 자체가 무목적성이 있다고 제기한다. 문화가 어디로 가야하냐는 문제에 대해 많은 심사숙려를 자아내는 책이었다.

8.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예나 지금이나 서로의 문화를 이해하고 융합, 조화를 이루는 “세계인”의 사상, 즉 코스모폴리타니즘에 지대한 관심을 안고 있다.
“관심”이란 낱말을 월등히 넘어서, 나 자신의 일본유학 이후에는 1990년해 형성, 훈육된 코스모포리더니즘 사상은 김문학 사상, 주의의 社와 같은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칸트의 《영원한 평화를 위하여》(1795)《인륜의 形而上學》(1797)등에서 창안한 세계시민법 사상에서 나는 감명을 받았다. 칸트의 동시대인 프랑스에서는 “자유, 평등, 우애”의 이념으로 인권선언이 시작된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다.
독일의 피히테(1762-1814)는 《독일 국민에게 고(告)함》에서 “교양 있는 국민”사상을 전개하면서 “저항력 내셔널리즘”을 창도하기에 이른다. 나폴레옹의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피히테의 애국주의 민족주의는 그 뒤 미국 윌슨 대통령(1856-1924)과 소련에 의해 “민족自決” 이 1910년(조선 일본식민지 시작되는 해)에 승인되며, 제2차 세계대전 후 민족독립운동의 사상적 지침으로 고착된다.
이승만, 김구, 여운형, 등 우리 민족의 사상가, 독립운동가 들도 역시 “민족자결” 사상의 영향으로 자주적인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물론 그 운동이 자력에 의해 일본 식민자를 제거하지 못한 채 미국과 중국 국제세력으로 일본이 항복하는 것으로 시원치 않은 민족독립으로 결실을 보게 된다.
근대 일본의 자유주의적 내셔널리스트 사상가는 후쿠자와 유카치로 시작되는, 최근의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1914-1996)의 계보로 이어진다.
20세기가 이념 사상의 대결구도로, 이데올로기의 세기라는 것은 민족자결의 독립해방, 그리고 냉전체제로 이어진 것으로 보아 인류 최대의 이념의 세기였다.
또한 이런 의미에서 인류이념의 가장 큰 실험장, 도가니로서 20세기의 세계를 규정지어도 과언은 아니리라.
1990년 이래 최근까지, 세계를 나는 이념보다도 이념을 초월한 “문화의 시대”라고 생각한다. 이념에 의해 가리워진 문화, 민족, 종교의 팩터가 일거에 노출되면서 문화의 요소가 인류를 이끄는, 인류쟁점 충돌의 제일 요인으로 부상되었기 때문이다.
“문화이해”가 사상이상으로 중요한 시대라고 나는 믿는다. 비교문화를 하는 역할 역시, 인류의 오늘과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는 역할이 현현된다고 나는 확신한다.

9.
나는 인류의 문명의 미래는 일원적이 아닌 “多元文化, 文明의 變化”라는 史觀사상으로 “비판적 대화”, “比較論적 해석학” 및 文明論사상으로 共生ㆍ共存의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20세기 까지 지어 오늘 21세기 10년이 되는 이날까지 세계는 행인지 불행인지 서양 中心적 진보사관에서 이탈하지 못한 채로 있다.
서양 중심의 근대적 사상에 대해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나 개인 역시 서양의 근대 사상 포스트근대 문화에 물젖었고 영향 받은 지식인이다.
그러나 현재 서양의 중심, 단일적 진보사관 사상을 여전히 많은 한계를 안고 있는 것을 감안 할 때, 이를 해탈하여 좀 더 넓은 시야에서 대안을 찾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 해왔다.
나는 비교문화를 근간으로 문화인류학적 이론을 전공으로 했기 때문에 문화인류학자로 부터의 문제의식에서 사고의 실 머리를 찾고자 한다.
20세기 후반 세계적 문화인류학자이며 구조주의 인류학의 비조인 레버스트로스의 사상은 나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1960년대 구조인류학을 창안한 그는 《야생의 사고》등 저작으로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사상을 분쇄시켰다. 방대한 필드워크의 실증을 기반으로 그는 “미개인의 사고”:와 “문명인의 사고”의 차이는 발전단계의 차이가 아니라 원래부터 “다른 사고”이며, 비교하여 우열을 논하는 자체가 무의마하다고 지적한다.
인간은 모두 자신이 보고 있는 세계만이 “객관적 리얼한 세계”라 여기며, 他人이 보고 있는 세계는 “주관적으로 일그러진 세계”라고 착각하며 他者를 경멸한다. 자신이야말로 우월한 “문명인”이며 세계에 대해 “객관적”이라고 생각하는 인간 일수록 이 착오를 범하기 쉽다.
그래서 그는 유럽을 문명지역이고 다른 지역은 후진의 미개지역으로 보는 편전에 대해 준열한 비판을 가한다.
2005년 11월 파리의 유네스코헌장 채택 60돐 기념식전에서 98세의 고령인 스트로스는 강연을 한다. 그는 서구의 인문주의의 지대한 오유를 세계에 실존하는 문화의 다양성을 무시하고 자신을 우월성으로 특권화 시키는데 있다고 지적한다. 생물의 다양성처럼 문화의 다양성을 존중해야 하며 그 속에서 사는 인간, 민족을 존중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발했다.《문명은 무지개의 대하이다》(핫토리 에이지ㆍ 2009년)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스트로스는 근대의 단선적 진보사관을 비판함과 동시에 미래의 전망이 결여된 비관적 문화상대주의를 넘어서는 방도로서 18세기 이탈리아의 인문학자 비고(1686-1744)의 “螺旋狀적인 발전사관”을 원용하였다. 서양 중심의 문화관 역사관을 넘어서야 한다고 거듭 지적한다.
스트로스와 같이 20세기를 대표하는 위대한 문화인류학자 기어츠 역시 서양 중심주의적 학지(學知)를 비판하며 래디컬한 언설을 발한 학자였다. 그는 선배격인 크랙 폰의 학문을 비판하면서 서양 중심주의를 해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인간은 자신이 쳐 놓은 의미적 그물에 걸려있다”로 포착하여 그 “그물”을 문화로 보고 있는 문화관을 지니고 있다.
그물로서의 문화의 열기설기 복잡한 다양성, 문맥성 의미를 섬세히 이해, 해석하고 “두껍게 기술(記述)”하는 것이 인류학자의 일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해석인류학” 및 “상징인류학”의 방법이론으로 문화를 분석 이해하는 방법을 제안했다.
그는 서양의 “보편주의” 사고에 대항하는 것으로 “로컬 나렛지”라는 콘셉트를 구사하였다. 그는 보편적 학지는 공허한 것으로서, 의례히 언제어디서의 바라보는 방법을 제기했다.
다양한 문화를 해석학적으로 두껍게 기술하는 것을 통해 “인간의 대화적세계(유니버스)의 확대”를 꾀하는 것을 창도했다. “문화상대주의”의 함정에서 탈출하여 글러벌 수준에서 상호간의 대회적 이해를 통해 서양 중심의 문명진보사관을 탈피한 것을 호소했다. 사실 “탈 서양 진보주의 사관”의 루트는 유명한 막스 베버(1864-1920)에 있다. 베버는 명작 <<르초테스판티즘의 이론과 자본주의의 정신>>(1904)등에서 근대적 계몽주의를 관통해온 “진보사관”을 인정하지 않는다.
여기서 상세하게 살펴볼 여유가 없어서 간략하지만, 베버는 아무튼 비유럽의 유고, 도교, 및 이슬람, 힌두교등의 가치 자유적으로 이해하려 애썼다. 물론 동기도 좋지만, 빈약한 자료를 근거로 유교등을 인식하려 했기 때문에, 대만 출신의 유명한 사상사가, 역사학자인 余英時(1930-)에 의해 그 오류를 지적당했다.

10.
서양 중심의 편견사상을 통일하게 비판한 에드워드 사이드(1935-과007)교수의 <<오리엔탈리즘>>을 비롯한 당대 세계의 최고의 문명비평가의 책은 나의 생과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시작ㆍ의도와 방법>>(1975)<<오리엔탈리즘(1978)>>, <<세계ㆍ텍스트 비평가(1983)>> <<피해자를 원망하기(1987)>><<문화와 제국주의(1993)>>, <<펜과 칼(1994)>> 등 많은 저작을 통해 사이드는 서양인 중심의 동양에 대한 우월성, 편견, 무지를 비판하면서 동서양 문명의 충돌을 화해로 연결하는 사상을 전개시킨다.
내가 사이더에게서 공명을 환기시킬 수 있는 까닭은, 한국의 비평가가 지적하다시피 “아웃사이더와 경계를 넘는 글쓰기”에서 유사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하나의 문화에만 속하지 않는 두 세계에 다 속한 아웃사이더”라고 자칭한 사이더의 고백을 같은 처지의 나를 동화시키는 역량은 불언지명(不言之明)의 파워가 있었다고 해야 좋겠다.
<<오리엔탈리즘>>도 그러하거니와, 그의 <<문화와 제국주의>>는 오리엔탈리즘에서 보다 훨씬 다양한 주제 이론, 대안을 제시해 주고 있는 것이 좋다.
그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궁극적 목표로 “나의 주요 목표는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연결시키는 것이다. 나는 철학적, 방법론적 이유로 문화라는 것은 혼종, 혼합이며 순수하지 않다는 그리고 문화적 분석이 현실에 맞추어 재현해야 할 시기가 왔다는 점에 관심을 모아왔다”고 고백한다.
“문화와 제국주의”에서는 오리엔탈리즘에서 노정했던 푸코적인 담론 결정론적 자세에서 해탈되어 식민과 탈식민의 이분법을 광정하고 다원적이고 역동적으로 어프러치 해 간다.
요컨대 사이드는 1990년대의 세계정세를 “新自由주의적 자본주의”로 규정하고 세계화 시대로 특정 짓는다. 따라서 이에 적응한 대안, 이젠더를 제시하고 있다.
그리하여 최종 결론으로 그는 유색인종들의 저항적 감수성, 탈식민지론을 통하여 계급 결정론, 경제결정론 및 정치학을 초월하는 유연하고 관용한 이주와 월경의 새로운 타입의 地域文化 창출을 주장한다. 그의 주장에는 추상적인 면들도 있으나 많은 면에서 나는 많은 것을 배우게 되고 섭취하였다.

11.
이상에서 나는 자신의 독서, 사고의 기나긴 “과정”을 진술함으로써, 내가 지니고 있는 “사상”(사상이라 하기 보다는 내면의 의식, 학지)의 모태로 된 부분에 대해서 써왔다.
사실 인간의 의식이나 사상은 지층에서 용솟는 샘물같이 절로 나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생성되는데는 절대다수가 생활의 경험이 아니면 독서, 타자로부터의 영향을 통해서만 이룩되는 것이다. 마치 인간이 문화를 습득하는데 “문화화” 과정과 같이 “사상화” 과정을 겪어서 서서히 또는 급격히 육성, 발전 변화돼간다.
“당신은 무슨 사상을 갖고 있냐?” 라고 질문하면 나는 서슴없이 답을 제시할 자신이 없다. 왜냐하면 사상은 보다 복잡하고 또는 정체불명의 의식 세계로서 자기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삶, 지적 삶속에서 괴어 오른 것, 그리고 자신이 의식적으로 갖추기를 원한 것들이 혼합적으로 혼효하여 있기 때문이다.
인간을 프랑스의 철학자 리크루의 해석에 따르면 “모종의 기호에 따라 매개(媒介)된 文化的, 歷史的 존재자로 간주”하며, 그 기호를 해석 하는 것이 영위를 통해서만이 진정한 “自己一他者一世界”를 이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세계를 “자신에게는 이질된 타자”로서, 타자와의 대화를 통해서 새로운 자신과 세계를 발견으로 직결 된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리크루가 테마로 삼은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이해”와 “미래의 투입”, 이외에 여러 가지 역사적, 문화적 문맥에서 살고 있는 인간의 “자기-타자-세계”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다고 여긴다.
사상은 세계이해의 지침이지만, 이는 세계 이해의 대화중에서 생기는 “계란과 병아리”의 변증법적 관계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중국의 노장사상, 유교, 및 禪에 관한 사상을 밑거름으로 해왔다고 자신을 간주한다. 물론 책을 읽은 경험을 통해서 섭취한 것뿐이다.
이것을 서양에서 발설하는 사상, 철학, 역사, 인류학 등 저작 읽기를 통해, 동서양의 共時的구조를 비교 석출 할 수 있다고 나는 비교문화학자의 시각으로 직감해왔다.
나는 비교사상가나 사상학자가 아니므로 사상체계에 대해서는 전공부분야가 아니다.
그 방대한 작업은 그 전문 학자들에게 맡기기로 할 수 밖에 없으며, 나는 단 이 글에서 나의 “사상”의식 계보를 정리 해 본데 지나지 않는다.
동양의 사상은 서양에서 발하는 근대, 포스트모던의 사상, 철학같이 시선을 혼동케 하는 현람함은 결해도 일상에, 가슴속에 항상 숨결과 같이 살아있는 영구의 공시성을 갖고 있다.
나는 서양사상가들이 말하는 “지평의 융합”으로서, 동서양의 학지(學知)가 늘 “지평의 융합”으로 융합된 “사상”의 소유자가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한다.
굳이 나의 “사상”을 형태로 포획하라면, 나는 지극히 평명하고도 단순한 말로 나열해 보겠다.

○ 나는 코스모폴리탄 사상을 지니고 있는 지식인이다. 조국도 고향도 복수의 디아스포라의 사상, “세계인”사상을 지니고 있다.
○ 나는 월경의 사상을 지니고 있는 지식인이다. 국경만 아니라, 학계, 문화의 경계, 사고의 경계, 모든 틀의 경계를 “월경”하는 “월경”의 사상이다.
○ 나는 세계의식을 위한 타자와의 대화사상을 지니고 있는 지식인이다. 自他와 話를 통해 항상 문화의 경상(鏡像)을 만들고 세계를 보는 동시에 자신의 모습도 점검한다.
○ 나는 인류의 평화사상을 숭앙하는 지식인이다. 평화를 위한 상호의 이해 문화의 인식이 앞서야 하며 “상대주의”의 절대적 함정을 피해, 자타를 이해하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고 사료한다.
○ 나는 多元주의 사상을 지닌 지식인이다. 일원적 절대 가치관을 넘어서 많은 타자들과 共存 共生의 대안이 인류의 미래를 구하는 방도이다.
○ 나는 自然 숭배주의 사상을 지닌 지식인이다. 자연과의 공생, 자연을 경외하는 동양사상의 체현이야 말로 자연의 파괴에서 인류의 파멸을 구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나는 자유주의와 이성주의를 결합시킨 사상을 지닌 지식인이다. 자유주의에 이성주의를 합친 방향이야 말로 인간 사회가 지향해야 할 방향이다.
○ 나는 진보주의사상보다 변화주의 사상에 공감하는 지식인이다. 인간의 문명이 직선적이 아닌 나선 상태로 변화하는 복잡한 문명의 메카니즘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 나는 변(變),진(眞),파(破)사상을 지닌 지식인이다. 3者를 통해 세상을 인식하고 자신의 學 知를 行으로 실천하는 글쓰기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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