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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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백년의 눈물
2013년 06월 05일 14시 31분  조회:6811  추천:10  작성자: 김문학

2. 백년의 눈물

(중략)

나는 조선족을 한해 얘기 한다면, 적이나 라이벌로 간주한 사람은 한명도 없다. 그러나 나를 적으로 보고 경계하는 라이벌로 삼는 자는 숱하다. 그들에게 내가 “적”, “라이벌”로 위구심을 느끼게 한 것은, 그만큼 내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을 하고 있는 나에게 실제적으로 별 일을 하지 않고, 나만 폄훼, 왜곡, 중상하는 그들에게서 덕이나 지(知)적 수준에서 정색해서 대꾸할 만큼의 필요나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10여 년 동안 나는 한 번도 정면에서 정색하여 반론하지 않았다. 요즘 두 번 글을 쓴 것은 그냥 그들을 익살로 조롱(嘲弄)하는 장난끼에서 생긴 글이다. 웃고 지나면 그만이다. 나는 아직 소년 같은 장난끼, 유치한 면이 많은 천진난만한 인간이다. 그래서 나를 잘 아는 주위 사람이나 여성 팬들로부터 “글쓰기와는 달리 어린아이 같은 치기가 있어서 귀엽다”고 칭찬인지 핀잔인지 모를 평을 곧잘 듣곤 한다.

그러니 항상 안티파들을 나는 사랑으로 품어주고 싶다. “敬天愛人”의 사상으로 그들을 대해 왔으며, 또한 앞으로도 그렇게 대할 것이다.

김소월의 시에 “사노라면 잊을 날이”하고 읊었는데, “그러노라면 이해할 날이”라고 읊고 싶다. 이해 받지 못하면 말고, 구태여 이해 해 달라고 무리한 주문 역시 안하리다.

그래서 나는 이해보다 더 좋은 약은 “용인(容忍)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일은 이해 할 수 없는 사물이 많지만 용인 할 수는 있어야 한다. 이해도 못하면서 용인도 못한다면 자신을 괴롭힐 뿐이라 생각한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노신, 호적 두 분다 좋아하지만 “갱골두(硬骨頭)”의 노신선생보다도 “和派”의 호적선생을 더 좋아한다. 죽을때까지 “一個都不能寬怒”라고 외운 노신에 비해, 호적은 “容忍比自由 更重要”라고 강조했다. 실생활에서도 신변에 적이 많았던 노신에 비해 호적은 적보다 벗이 더 많았다. 노신의 후반인생은 거의 잡문이 문필생활의 주요 아이템인바, 그 잡문은 또 거의 적, 라이벌에 대한 공격이 주종을 이룬다. 대조적으로 호적은 유연한 의식과 관용, 용인의 아량으로 주위가 모든 “적”이나 라이벌을 품어서 “자유”를 선물했으며, 그 자신도 유유자적 자유를 즐기면서 일을 했다. 임어당 역시 동일 유형의 문인으로서 “용인”이 아닌 “유모아”란 깃발을 내걸었으며 언어학, 문학 및 인생철학에서 실천하면서 일을 한 문호이다. 이렇듯 근대중국의 대문호들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 “3대 국제파 문호”중에서 인생후반의 실적이나 해놓은 일에서 보아도, 노신은 “인신공격”의 잡문으로 점철 돼 있는바, 점수를 매기면 가장 하위점수를 주고 싶다. 적을 너무 많이 만든 그는 “갱골두” 체질성격에 의한 적을 공격하는 일에 혼신을 다하다 보니 지신이 피로했던 것이다.

그런 노신을 나는 본받지 못하겠다. 차라리 “푸접좋은 ” 호적의 “용인”정신과 임어당의 “유머아” 지혜로 인생을 살고 글을 쓰고 싶다.

안티파 지식인 중에 이 시각에도 나는 “반공, 반화....”라고 아주 대단한 硬骨頭型 반역의 투사처럼 분에 넘친 모자를 씌우는 양반이 있다.

사실 이런 양반들은 나를 너무 올려 추키고 있다. 너무 과분한 “영예”다. 기실 나는 그렇게 한시도 간단없이 땅땅하게 서 있는 남자는 아니다. 평시에는 말랑말랑 유연하며, 꼭 필요할 때만 땅땅하게 선다. 찰떡처럼 말랑말랑 하다가도 무쇠 亞鈴처럼 땅땅하게 말이다.

솔직히 고백해, 나는 “반공”도 “반화”도 아니다. 또한 “반체제”지식인도 아니고, 나는 노신형의 반체제 지식인이기 보다는 호적형의 자유주의 지식인이고 싶다.

“문제를 많이 연구하되, 주의(主義)를 작작 담론하자” “대담하게 가설을 제기하되, 소심하게 실증을 하자” “실천은 진리를 경험하는 유일한 표준이다.” 는 호적의 많은 이론, 주장에서 나는 심대한 공감을 하고 있다.

이런 이론은 오늘도 내일도 유효하다. 호적은 1917년 미국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던 차, 일본의 요코하마에서 장훈 복벽의 뉴스를 접한다. 그때 그는 감개무량하여 한탄했다.

“중국의 근본적 문제는 제도적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소질(素質)의 문제이다. 즉 문화 관념의 문제이다.” 라고

이렇게 그는 귀국한 뒤 20년 동안 정치를 불문하고 문예로 국민의 넋을 개조하는 것만 담론하기로 결심했다. 방향은 노신과 비슷했으나, 그가 택한 방법은 노신과 다른 유용한 관용, 주의를 넘은 길이었다. 호적은 반체제가 아니라, 체제 안에서 국민당 장개석을 비판, 수용하면서 언설활동을 벌인다.

유연한 그의 실적은 국민당체제개혁에도 유익한 일을 한 것이다. 나는 어쩌면 급진파 지식인 보다 유연파 지식인, 자유지식인이 되었다.

체제 안에 있을 때도 밖에 있을 때도 나는 종시일관 “자유파”였다. 나의 안티파 지식인들처럼 체제에 무조건 곡학아세 하고 뭔가 학계, 문단에서 관리직함을 쟁취하자고 옥신각신 하는 그런 인물이 애초부터 아니었다. 나는 중국에 있을 때도 일체 정치적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으며, 또 정치적 出世欲따위는 더구나 기피했다.

지금 역시 해외에서 살면서 활발한 문필, 연구 활동을 벌이지만, 일체 정치에는 무관하다. 안티파들은 “우익”이니 “매국노”이니 상투적으로 왜곡하기를 즐기는데 그런 中世紀적 사고를 갖고 혁명의 정치적 투쟁심이 가미된 자들은 “우익”이 그렇게 좋고 “매국노”가 그렇게 좋은가?

2009년 북경 정부기구의 초청으로 동아시아 이해에 관한 강연을 했을 때, 많은 당간부와 고위급 지식인들도 나의 중일한 문화, 역사의 담론에 대해 공감을 표했다.

2010년 8월에도 북경대, 인민대 및 국가 일류급 출판사의 간부, 학자, 언론인들과 수차례 환담을 하면서 느낀 곳은 많이 “변한” 그들의 수준과 사고 양식이었다. 그들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유연한 사고를 갖고 있었다.

(중략)

등소평이 유소기의 유지를 이어서 “개혁, 개방”의 국책으로, 모택동시대의 “階級仇ㆍ民族恨”의 내홍투쟁을 종식시키고 경제, 산업의 근대화에 성공시켰으며 정치적 환경 역시 관용과 자유로 크게 변해가고 있다.

나 개인적으로도 등소평의 개혁개방선의 수혜자로서, 등소평 할아버지의 은혜를 잊지 않고 있다. 등할아버지처럼 키가 작은 것도 나 역시 긍지감을 느낀다.

등할아버지, 강택민 큰아버지도 그리고 호금도 작은아버지도 나를 귀여워 하셔서 한 번도 나를 “반공” “매국노”라 말씀하신 적이 없으시다.

중공 및 위정자는 현재는 지식 엘리트로 구성되었으며 정치체제개혁의 절박성, 필요성을 의식하고 있는듯하다. 온화한 온가보 큰아버지도 최근에 항상 “정치체제 개혁의 보장이 없이 현대화건설의 목표 실현을 불가능하다” 라고 하시며 “사상해방 대담 탐색하여 정체함 없이 뒤로 후퇴해서는 더구나 아니 된다” 라고 거듭 강조하신다.

얼마나 이치에 맞는 말씀을 하셨는가! 과연 이 말씀대로 정작 안 해서 그렇지 실현만 되면 참 미국을 능가한 인민의 “제국”이 탄생할 것이다.

“제국”이란 말이 나온 김에 좀 부언하자면, 냉전체제 붕괴 후 미국 같은 포스트근대의 거대한 제국은 글러벌속에서 “국민국가”의 질이 변하고 있다. 즉 국가가 통치대상 국민에 대해 마크로(거시적)적이 아닌 미크로(미시적)적으로 포착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아주 섬세한 정책 수단을 구사해, 국민을 감시하고 관리하고 격리시킨 개인으로 분해시키고 있는 것으로 노정된다.

고전적(전통적)제국 모델은 그 원리가 황제가 천자라고 해 절대적 권리를 행사하며 중앙 집중 형으로 인민을 통치 해왔다.

현재 중국의“제국”으로 거듭나고 있는 것은 경제적 성장이 그것을 입증하고 있다.

중국을 빈번히 방문할 때 마다 나는 그 일사천리의 급속한 변화, 대도시의 숲 풀 같이 일어서는 빌딩에서 보아가며 압도적인 근대성의 역량을 실감하곤 한다.

변하는 중국에 대한 나의 견해도 변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다 외견상의 硬件(하드)이라면, 내가 또 실감을 느끼는 것은 이에 상응되지 않은 모습이다 곧 軟件(소프트) 국민성, 인간의 소질, 정치체제의 개혁 면에서는 여전히 답보하고 있거나 오히려 경제적 수준, 하이데크적 첨단기술의 재생으로 더욱 세속화, 공리화, 실리화를 추구해온 중국인의 實利志向의 근성을 추구 가능하게끔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이러니다. 나는 <<混의 중국인>>(2008)이란 책에서 중국국민성을 실리추구, 공리성 “民以食爲天”의 “食”만 해결 되면 기타 사회문제, 정신성에 대한 추구는 게을리 한 “실리민족”의 양상에서 규정지었다. 문화인류학적 이론을 구사하여 걸러낸 “신중국이론”이어서 이 책을 조선족 독자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노신이 지적 비판했던 것과 같이, 또한 호적이 앞서 말한 “제도문제가 아닌 인간 소질, 물화관념의 문제”에서 나는 중국인을 오늘 21세기의 문에 들어서서 역시 답보하고 있다고 지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중국정부의 통치는 고전적 전통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는 면이 많은 것은 그 자체의 특질이기도 하며 역시 약점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통치수단의 “독재”는 전통에서 탈피하지 못했으나, 또한 미국 등 선진제국의 하이테크적 첨단기술을 구사하며 전통적 통치를 일층 공고시킨 양상으로 노정되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특기해야 할 것은, 이미 중공은 ‘경직된 독재’가 아니다. ‘유연한 독재’로 변해가고 있다.

그리고 역시 여기서 유추해 나오는 테제이지만, 유연한 독재, 중국에 있어서 방법이 아닌 방법이다는 것이다. 이 말에 나를 지탄하는 지식인도 있을 법 하지만 나는 다만 객관적으로 체제와의 자유자로서 관찰을 할 뿐이다. 중국시민의 지적 수준, 계몽에는 내가 아는 만큼 글쓰기로 힘을 보태고 싶다.

“유연한 독재”, 이는 나의 신조어인바, 이 뜻을 해석하면 아래와 같다.

강압적인 탄압적인 독재가 아닌 국민 공제를 하면서, 체제에 대한 비판도 허용하고 언론, 출판, 데모의 자유도 주면서 대중의 소질이 향상되기를 기다림과 동시에 체제내부 자신들의 의식도 변혁시키는 것이다.

 

 

(중략)

국민국가에서 근대국민은 단합성과 근대적 기준에 맞먹는 문화소질이 구비되어야 하며 거국일치하게 근대화, 그리고 민주화로 진척 할 수 있으나 중국은 그 부분이 결여돼 있다. 그래서 매일 핏대 세우고 “애국심”을 외친다.

중국이 100년전 일본과 동일 스타트지점에서 근대화를 바라고 달렸으나 겨우 백년이 지난 21세기에 근대화 국가로 성장되었거나 (내륙부분은 아직 거리가 있다) 성장 돼가고 있는 과정에 있다.

민주화 역시 백년전에 외친 스타트지점에 되돌아와 다시 담론해야하는 현실이니 참 답답하다. 민주화를 지탱해주는 튼튼한 기반은 그 나라 국민의 근대적 소질이다. 현재 중국 농민을 위시로 한 국민의 대다수가 민주화를 지탱해 주기엔 아직 역부족이다. 이 점은 인국 한국과 일본과의 비교에서도 역역히 드러내고 있는 사정이다.

광범한 중국 대중은 이직도 “먹고사는데 걱정해야 할” 눈앞의 “식민성 (食民性)”에서 탈피하지 못 한 것이 귀 아프게 들릴지 모르지만 현실이며, 또한 실리성이 대단히 강한 중국인이 이 모든 것을 해결했다 해도, 고차의 정신추구는 방치하고 향수, 향락으로 편향하는 성향을 보이고 있다.

현재 중국 연해도시의 일부 벼락부자들이 이런 인간의 전형이다. 이런 자들이 해외 관광에 나오면 위생, 질서 등 면에서 많은 트러블을 일으키고 있다. “돈 있는 바보”들의 행진곡을 펼친다.

그러나 나는 완전히 失望하지는 않는다. 왜냐면 국민성, 소질역시 환경의 변함에 따라 변하고 향상 하는 시대적 특징도 있기 때문이다. 이 변함을 기다리기에는 시간이 좀 너무 걸릴 것 같고 그렇다고 속수무책이나 수수방관 할 수도 없다.

그래서 비판적, 도전적 지식인의 “계몽”은 아직도 필요하며 유효 적이다.

 

(중략)

(중략-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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