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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나의 정신세계 고백서》
1910년 “한국병합” 선후의 100여년전의 평가를 보면, 제 3자의 시각에서 한국, 한국인 및 그 국민성, 사회상황에 대해 이해하는 좋은 소재로 된다. 또한 억울한 “한국병합” 역시 우리 민족자신의 결함에서도 찾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 해 주기도 한다.
당시 서양인 관찰자들은 일본을 “떠오르는 태양의 나라”로서 서양문명을 수용하여 충전하는 기세를 보여주었다고 하는 반면, 한국은 고요한 아침의 나라(Land of the Moming Clam)로 아직은 전 근대의 잠자는 나라로 보았다. 일본에 비해 한국은 대체로 “부패와 착취로 점철된 사회”이며 “애국심이 결핍하며 더럽고 무례하고 게으른”표상이 주되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일본과 한국을 방문한 이자벨라 버드숍(1831~1904), 조지 커즌(1859~1925), 헐리어(초대 서울 주재 영국 총영사), 웨브 부인, 구빈스, 존 조든(주한영국 공사) 등 여러 서양인들 눈에 비쳐진 한국은 대체로 우리의 상상을 넘어 부정적 이미지가 많았다. 필자도 그들의 한국기록을 읽으면서 경악함과 충격을 금치 못했다. 일본에 대한 긍정과 한국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언제나 그들에게 있어서도 대조적 구도를 이루었던 것이다.
1876년 헐리어는 서양인이 처음 한국 땅을 밟았을 때 “근대 중국”에서 갑자기 “근세 중국”으로 옮겨 온 곳으로 착각 할 만큼 “빈곳이 편재하고 게으름이 국민적 특성인 나라”로 모사했다고 말한다. 중국과도 비교해도 한국은 후진의 나라란 것을 그들은 발견한다. 그러므로 한국은 “문명퇴화”의 모델이었다. 1911년 한국에 왔던 웨브 부부는 “무지하고 미개한”, “더럽고 무식하고 미개한 사람들이”, “진흙과 짚풀의 오두막에서 살면서”, “문명개화가 안 된 농부의 나라”가 문학예술에서는 높은 수준을 창조했다고 경탄한다.
1893년 한국을 방문한 영국 정치가 커즌은 “이 작은 나라는 독립을 유지하기엔 너무 부패했고, 독립을 통해 이득을 얻어내기엔 너무나 쇄약했다” 라고 판단하며 “한국은 가장 잘 못 통치되고 있는 나라”로 한국 정치의 부패와 무능을 지적한다.
1905년 을사조약 후 주한 총영사로 부임한 헨리 코번은 고종을 비판하면서 성격적으로 우왕좌왕하는 약점이 있으며 많은 영국인들은 한국이 한마디로 기회를 스스로 놓쳐 버렸고 자력 할 수도 개척 할 수도 없다면 외부로부터라도 개척해야 된다고 결론 내린다. 영국인 매크리비 브라운은 당시 저명한 애국자 관료 민영환에게도 공공정신이 결여하며 일본 지도자들과의 헌신적 희생과 대표적이라고 한다. 전봉준이 동학 농민 전쟁에서 체포된 다음 심문 받는 당시 중앙 정부의 탐관오리로 민영준과 함께 민영환을 꼽았다. 일제 침략에 목숨을 바쳐 반항한 애국자에게도 이런 숨겨진 ‘악’이 있었던 것은 충격적이다.
동경 주재 영국 영사 구빈스도 1902년 서울에 있는 적 이 있는데 그는 한국을 “완전 붕괴상태에 있는 동양 국가”로 묘사 하였으며, 동아시아 정세에 투철한 관찰가 새토우는 “한국을 에워싼 국제적 모순은 한국 정부의 허약함과 부패, 당쟁 싸움에 의해 조장되었다” 라고 지탄하면서 “터키가 유럽의 환자”라면 한국은 “동양의 환자”라고 표현한다.
1880년대 초에 일본을 방문한 적 있는 비숍여사는 한국인의 특성의 하나로 “시간관념이 박약하여 매사에 서두르는 법이 없다” 라고 지적한다. 한국은 쇠락하고 죽어가는 나라이며, 황궁에서 최하층 빈민에 이르기까지 개혁에 집요하게 저항하는 보수주의 나라라고 꼬집는다. 그리고 그녀가 관찰한 한국의 모습은 서양문명의 “청결”이 결여된 “더러움”이었다.
북경을 보기 전 까지 서울이 이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도시라고 비숍은 고백했다. 서양인들은 “서울은 눈과 코가 다 괴로운 장소”라고 했으며 반면 일본은 “거지도 더러움도 없는 근대성을 나타낸 곳”이라고 예찬했다. 따라서 “일본인은 몸과 옷이 다 청결하고, 한국인은 옷은 청결하나 몸에는 관심 없는데 중국인은 둘 다 청결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서양인이 본 동아시아 3국 청결 문명 비교론은 흥미로운 지적을 하고 있다.
영국인들은 한국을 “3천마리의 소를 기르면서도 30년 동안 한 번도 외양간을 청소한 적이 없다는 그리스 신화 속의 ‘아우게이아스담의 마구간’”에 빗대며, 이것을 “청소 할 수 있는 자는 일본인뿐”이라고 판단했다.
서양인이 바라본 한국인의 국민성을 대체로 “간교하고 진실하지 못하며”, “고집이 세고 도덕심이 부족하며”, “남녀가 다 더럽고 씻기를 싫어하고 단정치 못하며”, “누워서 빈둥거리며 생각에 잠기기를 좋아하는 사색을 즐기는 민족”이며, 공통적 특성은 “게으름”이라고 지적한다. 백년전 민족의 성격이 지금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표상과는 너무나 괴리된 모습들이다.
비숍은 만약 한국인의 정직한 정부에 의해 산업이 흥하고 생계를 보호 받을 수만 있다면 진정한 의미의 ‘시민’으로 성장 할 것이라고 판단하면서 국내 정치의 부패와 착취가 원인이라고 한다.
<데일리 메일 Daily Mail>의 특파원으로 한국에 주재한 언론인 매켄지도 한국인의 사랑스러운 면을 발견하면서 동정적이고 일본의 진면목을 알자 반일태도를 갖게 된다.
하지만 영국인에 비친 한국인은 “세상의 채찍 아래서 침묵의 무관심을 고집하는, 건강하지만 무관심한 양들의 나라”로 비유한다. 따라서 특기할 것을 일본인들의 지대한 애국심에 비해 동시의 한국인에게 민족감정이 없고 국가나 집에 대해 자부심이 없다고 판단한다.
그리하여 영국인 관찰자들은 “한국이 어차피 독립국 자질을 가지지 않았다” 라는 결론을 내린다.
백년전 우리에게 발견되는 모습은 우리가 언제나 특별히 강조할 만큼 민족심이 의외로 결여했다는 사실이다. “민족”이란 말이 백년 내지 80년전에 만들어진 단어이듯이 한국민족주의도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과정을 체험하면서 형성, 보급된 것으로 이제 다시 봐야할 것이다.
“한국병합”에 대해 결론은 “왕의 무능과 부패, 일반 국민의 무지와 무관심에 일관해있기에 자립이 어려우며 따라서 외부로부터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1910년 영국의 여론은 일본 식민지 지배에 대해 비판하면서도 일본이 계몽의 스승으로 한국을 지도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여전히 높았다.
1928년 한국 경성제국대학에 와서 영어교수로 있던 영국 소설가 드레이크의 발언을 보자.
“어떤 민족이 강압적 통치를 받았다면 그것은 그들 내부에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멸망한 민족은 스스로에게 책임을 져야만 한다. 조선이 악의 무고한 희생양들이라고 심약하게 동정해서는 안 된다.”
서양인의 평가, 지적은 귀 아픈 소리이지만, 또한 “한국평화”의 오리엔탈리즘 시각에서 자유롭지 못한 부분도 혼재 되어있으나, 100여년전의 국민성, 사회실정, 정치, 경제 등을 종합적으로 보아 매우 지대한 의미를 지닌 지적이다. 남의 탓, 비판도 필요하지만, 우리 스스로의 자기 성찰은 그 이상으로 더 중대한 의미를 갖고 있음을 우리는 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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