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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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131세의 사상가 안중근을 만나다(하)
2013년 05월 27일 14시 09분  조회:5380  추천:15  작성자: 김문학
제4장 민족ㆍ국가의 신화를 넘어서

1. 131세의 사상가 안중근을 만나다(하)


8.
이토를 암살한 “테러리스트”란 죄명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우리의 영웅 안중근에 대해서 일본인들이 특히 그 주위에 안중근을 잘 알고 있는 일본인이 안중근을 숭경하고 감동을 느끼고 공명하며 감회될 수 있는 사실은 안중근의 인격과 함께 그의 견식, 사상이 일본의 원훈보다 보편적인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유감스럽게도 우리 동포들은 그 점을 너무나 모르고 있다.

여기서 잘 알려지지 않은 일본인의 안중근숭모의 미담을 소개하기로 한다. 앞에서 러시아검사의 증언에도 등장하는 타나카 세이지로의 에피소드는 일본에서 아주 유명하다. 남만철도주식회사의 이사로 있던 그는 안중근이 이토 저격당시 이토곁에 있다가 총탄에 부상을 입은 인물이다. 그 뒤 안중근이란 인물을 알게 되면 될수록 타나카는 그 위대한 성품과 견식에 빨려들어 팬이 되어버린다.

어느 날 기자가 그에게 이렇게 물었다. “당신이 지금껏 만난 인물 중에서 일본인을 포함한 세계인물가운데서 누가 제일 위대한 인물이라고 생각합니까?

“유감스럽지만 그건 안중근입니다.” 하고 타나카는 즉석에서 대답했다. 자신을 총탄으로 쏘아 부상까지 입힌 철천지원수를 감히, 솔직히 위대한 인물의 제일인자로 칭송하는 그 담력 뒤에는 역시 안중근의사의 감화력의 파워가 있기 때문이란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다.

또 하나의 감격적인 미담을 소개하자.

당시 여순감옥에서 헌병상등병으로 안중근의 감방 간수 역을 맡았던 치바토시치(千葉十七)라는 젊은이 역시 안중근의 극렬 팬 이었다. 직책상관계로 안중근과 일상적 접촉이 잦았던 치바는 당시 25세. 안중근보다 6살 연하였다. 그는 안중근을 처음에는 명치의 원훈 지도자를 암살한 극악무도한 죄인으로 여기고 경계했지만 차츰 접촉이 깊어지면서 안중근의 깊은 교양과 고고한 인격적 포용력, 활달하고 효자다운 효도성, 그리고 일당백의 당당한 태도에 점차 감복되고 나중에는 그에게 감화 당하게 된다. 치바의 친척이 되는 변호사 가노씨의 저술에 의하면 어느 날 치바가 안중근에게 “왜 꼭 이토공을 저격해야만 했습니까? 라고 질문했다고 한다.

이에 안중근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한국독립은 물론 일본과 청국(중국)을 포함한 동양의 평화를 바랬습니다. 그래서 이토공이 추진하고 있는 병합정책을 용서할 수가 없었어요.

이토공의 정책은 동양평화를 가로막는 행위였기 때문이지요. 나는 자신을 조국에 바치는 몸이라 죽을 각오를 다하고 있었습니다. 내 행동이 내 뒤를 이을 우국지사들이 궐기를 환기하기 위함이라고 굳게 믿었어요. 그러니 나는 이토공에 대한 개인적 원한 같은 것은 조금도 없습니다. 한일 두 나라의 관계가 이처럼 불행한 쪽으로 흐르는 것도 이토공 한 인물의 책임은 아닐지도 모르지요.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역사란 어느 한 인물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게 아니니까요. 내 거사가 장차 우리 동포들의 독립심과 애국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만을 기대해마지 않습니다. 그러니 내 자신의 행위에 대한 보편판단은 후세 역사의 심판에 맡기고 나는 소중히 목숨을 하나님께 맡기고 조국을 위해 이슬로 사라질 것을 결의했던 겁니다. 하나님이 준 이 목숨은 죽으면 다시 하늘로 돌아가게 돼 있고 인연이 되면 다시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건 하나님께 맡기고 유구한 한국역사에 하나의 조약돌로 될 수 있다면 나는 만족합니다.”

이런 고결한 생각을 품은 안중근이였기에 사형선고를 받고도 상급법원에 상소를 포기하고 그 대신 법원 원장에게 사형기일을 한 달 미루어 자기가 지향한 동양평화의 원대한 구상을 저술하기로 작심했던 것이다.

그 뒤 치바 청년은 안중근을 대할 때마다, “이 사람이 더 살수만 있다면 기필코 한국을 어깨에 짊어질 수 있는 거물이 되기에 틀림없겠구나. 이런 인물이 사형당하여 한 점의 찬이슬로 돌아가게 되니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9.
1910년 3월 26일. 작년 10얼 26일 할빈역에서 이토를 저격한 거사 날부터 옹근 다섯 달 되는 날이다. 아침부터 찬비가 내렸다. 안중근은 아침 일찍 일어나 세수를 하고 어머니가 지으신 결백한 명주 한복정장을 차려입고 기도를 하면서 태연하게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형장으로 나아갈 시간이 임박하고 있었다. 이때 안중근은 감방 옆에 서 있는 치바를 불렀다.
“치바상, 전번에 부탁받은 글을 써드리겠습니다.”
“아, 그래요. ”하면서 치바는 부랴부랴 흰 비단 천과 필묵을 갖고 왔다.
안중근은 자세를 바르게 취하고 단숨에 붓을 날렸다.
“나라를 위해 헌신함은 군인의 본분이로다”
그리고는 숨을 죽여 약지가 절단된 왼손에 먹을 듬뿍 묻혀 이름석자 밑에 힘 있게 찍었다. 치바는 “감사합니다”하고 깍듯이 대례를 올렸다.

안중근의 최후의 사형장면은 어떤 모습 이였을까?

10시 정각. 미조부치검찰관, 구리하라전옥. 그리고 소노기 통역이 여순감옥 형장감시실에 착석했다.

“사형을 집행한다. 남길 유언은 없는가?” 라는 구리하라전옥의 질문에 안중근은 조용히 대답한다. “나로서는 아무 말도 없습니다. 단지 동양평화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동양평화 만세’ 3창을 부르고자 합니다.

결국 “동양평화 만세”가 안중근의 유언으로 되었다.
오전 10시 20분. 교수형으로 안의사는 숨을 거둔다.

그날 소노기 통역은 외무성에 보낸 보고서에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오늘 안중근은 어제 밤 고향에서 보내온 명주 조선복(웃옷은 백색, 바지는 검은색)을 입고 가슴엔 성화를 품고 있었는데 그 태도는 너무나 침착하여 안색, 언어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이상 없이 태연자약하게, 떳떳하게 죽음을 맞았다.

이것이 장한 우리 영웅의 최후의 순간이었다.
그는 방금 전 자신이 휘호한 “위국헌신 군인본분”이란 말을 행동으로 실천했다.

계속하여 치바의 이야기를 마저 하자. 그 뒤 치바는 제대되어 고향 미야기(똫냘)에 있는 시골로 귀향하였다. 그는 54세로 죽는 날까지 안중근의사의 유묵을 불단에 정중히 모셔놓고 고인의 명복을 빌고 한일양국의 영원한 평화친선을 빌었다고 한다. 치바씨가 사망된 뒤에도 부인은 97세의 고령으로 세상 뜨기까지 남편의 뜻을 이어 안중근과 치바를 같이 기렸다고 한다.

1979년 안중근의 탄신 100돐 기념에 치바씨의 후손들이 동경국제한국연구원 최서면선생을 통해 서울안중근기념관에 유묵을 기증했다.

안중근과 치바부부의 한일우호를 상징하는 미거를 표창하기 위해 1981년 치바의 유골이 잠든 대림사(大林寺)에 안중근, 치바 기념비를 세웠다. 그리고 지금도 대림사주지와 함께 일한 인사들이 한일평화를 기리는 합동추도법사가 진행된다고 한다. 이야말로 안중근과 이토의 원한구도를 넘어선 한일양국의 경하할만한 생동한 평화도가 아닌가!

10.
시다라씨네와 작별을 고하고 나니 벌써 저녁 무렵이었다. JR전차에 몸을 실은 나는 귀로에 올랐다. 그리고 깊은 상념에 잠겼다.

오늘은 내 생에서 그야말로 뜻 깊은 하루가 된다. 안중근의 친필유묵. 그것은 내게 있어선 안중근 본인이었다.
이제 돌아오는 3월 26일은 안중근의사의 순국 100돌 기념일이 된다. 이를 계기로 우리는 안중근에 대한 의미를 다시금 숙고하고 반성해야 하겠다고 느꼈다.

독립--동양평화--투사 - 문인 - 천주교도 - 사상가…이런 이미지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머릿속에 떠오른다. 어둠이 잠기기 시작한 차창에는 붉은 노을이 비낀다. 창가에 문득 안중근의 얼굴이 나타났다. 31세의 청년이 아닌 131세의 백발이 성성한 노숙한 성자의 모습이었다. 나는 이 성자와 대화를 나누었다.

“오늘 자네가 내 유묵을 보았다니 반갑네. 이렇게 우리 후예들이 일본에도 마음대로 유학하고 거주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구만. 허허…”

“반갑습니다. 안 할아버지는 금년 벌써 131세지요. 할아버지의 유지는 우리 세대가 이어가고 있습니다. ”하고 나는 깍듯이 대답했다.

“며칠전 하늘나라에서 말이지. 글쎄 이토와 만났구나. 여전히 옛날 모습이여서 놀랐지만 우리는 화해를 했단다. 그래야 우리가 쌓았던 원념들이 담벼락이 돼서 자네 세대가 동양평화와 동아시아공동체를 뭇는데 지장이 아니되니까.”

“역시 안 할아버지의 탁견이십니다.”

“뭐. 그런 건 아니고 하루 빨리 EU보다 앞선 동아시아공동체를 뭇기를 바란다네. 허허허…”

성자 안중근공은 가뭇없이 사라졌다. “안공〜”내가 다급히 불렀으나, 안의사는 벌써 하늘나라로 행적을 감춘 뒤였다. 참으로 기이한 만남이었다. 꿈인지 생신지 나는 알 길이 없었다. 아무튼 뜻하지 않게 안공의 혼백과 만나 경희하기만 했다.

나는 생각한다. 안중근의 세계적 공명을 불러일으킨 평화사상, 공동체관에 대해 깊은 연구와 넓은 공감대의 확신이 요망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안중근의 평화사상, 그 사상적 깊이에 대해 심도 있게 연구한 인물연구서가 아직 한권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 안공의 기념활동도 좋지만 형식차원을 능가한 실천적, 건설적 차원으로 그의 사상을 활용하고 실현해야 한다.

천부적 인권론, 개화사상, 기독교사상, 유교, 불교 등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형성된 안공의 사상체계는 21세기형이다. 그러므로 이제 안중근은 단순히 우리 민족 한국인만의 안중근이 아니다. 그는 아시아 나아가서 세계적 안중근이다. 그의 세계적 보편가치성을 갖고 있는 사상체계가 그것을 확보해준다.

131세의 사상가 안중근은 우리보다 100년 앞을 달리는 열차에 탄 유일무이의 사상가이다. 이제 동양평화 실현에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이 사상가 안중근이 우리 모두에게 남겨준 크나큰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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