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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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魯迅과 李光洙
2013년 06월 17일 16시 16분  조회:5578  추천:20  작성자: 김문학

4. 魯迅과 李光洙

노신과 동일문맥에서 비견되는 조선의 인물은 조선근대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春園 李光洙이다. 일본 유학 경험, 자국국민성 비판과 개조사상, 그리고 세계적인 월경의 시야 등 측면에서 노신보다 11세 연하인 이광수는 매우 유사한 相似性을 띄고 있다.

단지 死後 최고의 위대한 文學家의 표상으로 낙인 된 노신에 비해, 이광수는 근대문학의 최고봉인 반면 민족의 반역자의 대명사인 “친일문학의 거두”라는 치욕스런 렛텔이 붙여있는 것은 지극히 대조적이다. 식민지로 전략된 조선의 비극 자체가 李光洙의 표상에 투영된 것으로 인식할 때 중국은 겨우 일제의 식민지전략까지는 면했지만 노신 또한 자진해서 반식민지 구역인 상해 일본인조계에 진입하여 문필활동을 한 것에도 이광수와 유사한 “친일적” 형적을 남기고 있는 사실을 안고 있다. 그 점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노신은 1920년 梁白畢,柳樹人및 申彦後, 李陸史등 文人에 의해 속속 조선에 소개되면서 이광수에게 수용된다. 그는 1936년 일본의 「개조」잡지에 “조선의 阿鬼 ”를 주인공으로 한 단편소설 「萬爺의 死」를 집필하는데 「아Q정전」의 영향을 받았다. 훗날 이광수는 친하게 지낸 후배 문인 金素雲에게 “나는 아Q와 같이 바보다”고 고백, 자신을 “아Q형 지식인”이라고 자평하기도 한다. 일제식민지속에서 적응과 저항의 구도에서 자신들을 두고 향해진 쓸쓸한 야유였을 것으로 추찰된다.

노신보다도 월등 다층다각의 얼굴을 보인 이광수는 안일하게 “친일반역적문인”으로서 일축하기엔 무리한 인물이다. 사실 지금껏 한국이나 우리 민족이 이광수를 재는 척도는 “민족”이란 바러미터 밖에 없었다. 1940년 이후의 이광수의 “부일협력”의 언행은 그의 모든 평가를 집약시킨 “표상”으로 고정시켰다. 이 표상 역시 시각을 달리하여 보면 많이 일그러진 것임을 발견하게 된다.

필자의 주장은 이문화의 경계를 살아간 이광수의 “월경적 삶”을 하나의 척도로 제단하면 그 표상은 오히려 다른 양상으로 부상된다는 것이다.

서울대의 유명한 문학비평가 김윤식교수는 1400매의 상하권 이광수 평전 <<이광수와 그의 시대>>(1999 도서출판 솔)에서 이광수의 일찍 부모를 상실하는 삶을 “내면 풍경의 발견”으로서 “고아의식”으로 규정짓고 있다. 그래서 여윈 아비를 일본제국주의에서 찾아 헤맸다는 “표상”을 제작해낸다.

그런데 필자는 그의 “표상”에 “완전동감”하지 못하는 요소를 발견하게 된다. 즉 여기에 결여된 것은 이광수를 이광수이게끔 한 그의 이 문화체험, 간단없는 월경하는 방랑에서 생성되는 경계의 지(知)적 思想을 평가의 잣대에서 빼버린 것이다.

이광수 자신이 일그러진 것이 아니라 이광수를 바라보는 우리의 프리즘, 시각이 언제나 “민족” “민족의 반역”이란 고정 틀에 맞춰 넣고 평가의 기준으로 삼고, 그것으로 이광수의 “표상”을 재생산 하는 것이다. 오늘도 한국지식인의 이런 재생산은 정치적 이용자(노무현 정부 친일파 청산정책)들에 영합하여 자기성찰과 반추도 없이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친일파”의 생산 공장은 “친일파”인물, 죽은 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오늘의 후세 정치가와 그 수하의 체제적 지식인이 아닐까? 물론 소수의 반역자는 어느 나라든지 다 존재하지만 말이다. 그런 반역자 말고 문제는 후세들이 자진해서 “친일파”를 재생산해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이광수의 경계를 넘은 삶을 다시 바라보자. 그의 삶을 이끄는 큰 테제의 하나는 월경과 그에 따른 방랑이다. 11살에 고아가 된 그는 1906년 13세에 일본 유학자의 길에 오른다. 철학자 지명관 선생은 “그의 조선적인 유교영향이 적었다”고 지적한다. 그 반면 그는 다감한 소년시절 일본의 명치중학에서 일본의 근대 문명개화에 일찍 개안한다. 1910년 한일합병의 해 귀국하여 오산중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다시 1916년 와세대대학에 유학하여 일본의 소설가 나츠메소세키(夏目瀨石)와 영국의 바이런 등에 심취하기도 한다.

그 무렵 「매일신문」에 「동경잡신」을 발표하는데 일본의 선진성 근대화에 대해 선망의 정을 토로하고 있다. 후쿠자와 유카치의 무덤을 찾아 “경모와 감개”를 표하기도 하는 그는 소년기에 일본의 근대화된 표상을 한국이 추구해야 할 모델로 인식하고 있다.

소년시기 모든 조선인보다 일찍 문명개화에 開眼한 그는 자신만만한 확신을 갖고 있는 패기로 넘친 청년지식인으로 변용한다. 그가 최남선, 홍명희와 함께 “조선의 3대 天才”라 불린데 는 그 이유가 있다. 그 명석한 두뇌와 탁월한 재능과 지견과 사상이 있은 까닭이다.

국민적 시인 서정주가 그의 시에서 “나를 키운 것은 8할이 바람”이라고 했듯, 이광수의 삶의 8할의 경계를 넘는 “월경”이다. 노신은 절강-남경-동경-센타이-동경-절강-북경-광주-상해로 인생의 월경을 거듭하지만 이광수의 월경은 초원을 찾는 양과 같이 시공 적으로 일본의 츠시마-러시아 바이칼호-상해-만주해삼위로 地珠적인 월경이다.

월경의 문인, 사상가로서 이광수, 그는 비평가들이 흑백논리와 선입견의 고정관념에 포로가 되어 무조건 친일 문인 반역자로 왜곡 중상하는 것을 허용치 않는 존재이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그의 대표작인「민족개조론」을 위시한 고백 작품「나의 고백」「나의 자서전」등 주요 저작을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오 이광수, 친일한 작가”하고 안일하게 일축하려 든다.

「민족개조론」(1992년「개벽」)은 세계인, 월경하는 코스모폴던적인 시각에서 러시아 유랑시절에 태어난 아이디어이다. 정신적 아버지인 안창호의 영향으로 생긴 것으로, “일제 총독부의 사촉”으로 집필됐다는 망언은 무근무실하다.

필자가 10여년전, 그리고 최근 또 정독한「민족개조론」은 조선민족의 결함을 시리어스하게 비판하고 새 시대에 맞게 개조함으로써 재생을 기하자는 위대한 사상이 담긴 명문이었다. 오늘날 재독해도 여전히 그에 관통된 사상은 유효하며 그를 산출한 저자야 말로 우리 민족의 탁월한 사상가. 지성인이라는데 탄복할만한 걸작이다.

저자가 서문인 “변언”에서 밝히다시피 “이글의 내용인 민족개조의 사상과 계획은 재외동포 중에서 발생한 것으로서 내 것과 일치하며 마침내 내 일생의 목적을 이루게 된 것이외다. 나는 조선 내에서 이 사상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을 무상의 영광으로 알며 이 귀한 사상을 선각한 위대한 두뇌와 구명한 여러 선배 동지에게 이 기회에 또 한 번 존경과 감사를 드립니다.”

보다시피 이 사상은 해외동포 월경하는 민족 지성의 사상임이 엄연하다.

이광수는 조선민족의 근본적 성격은 “박애, 예의, 염결, 자존, 무용, 쾌할”이며, 반면 결함으로 “허식, 나태, 비사회성, 경제성 쇠약, 과학의 부진”등을 열거한다.

그리고 그는 민족성 개조의 비전을 8항목의 구체적 내용으로 제시한다. 우리 민족이 이광수의 개조사상 비전을 진지하게 성찰, 수용했으면 오늘 우리 민족의 양상은 많이 좋아졌을 것이다.

일본에 후쿠자와 유키치의「학문의 권장」이 있다면 조선에는 이광수의「민족개조론」이 있다.

춘원 이광수의 경계성에서 생성된 민족사상은 아이러니하게 그 민족 억압의 피식민지화 앞에서 “굴절된 지혜”로 나타난다. 한국 단국대 김원모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춘원은 항일 운동을 벌인 독립운동의 지도자인 만큼 표면적으로만 거짓으로 친일 행동을 했을 뿐, 그의 심저(心底)에는 독립정신이 살아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춘원은 그 자신의 친일 행위를 민족정신 보존운동으로 역이용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부일협력을 자발적으로 실천함으로써 “친일을 위장한 민족보존운동”은 바로 그의 작품 활동에서 여실히 입증되고 있기 때문에 설득력이 있다. (「춘원의 친일과 민족 보존론」)

춘원은「나의 고백」에서 한마디로 “민족보존을 위해 친일했다”고 주장한다.

그의 풍부한 월경으로서 경계를 넘는 실천 속에서 걸러낸 “사상”을 몰이해하고 단순하게 “민족반역자”로 규탄하는 것은 자신의 “우(愚)”이다.

춘원에 대한 고정적 표상은 상당히 일그러진 면을 노정하고 있다. 이 같이 죽어서도 지탄 받는 그의 비극은 사실 식민지를 체험한 우리 민족 모두의 “비극”그 자체인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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