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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근대 재발견·100년전 한중일》
근 10년동안 필자가 일본에서 과외로 안중근의 사상연구에 착수하면서 섭렵한 수많은 자료, 문헌중 조우하게 된것의 하나가 “이토 히로부미 암살 2중저격설”이였다. 즉 할빈역에서 이토를 저격한 인물은 안중근의사외에 또다른 제3자가 존재했다는 언설이다.
물론 필자가 소학교시절에 자칭 만주마적단에서 활동했다는 90여세의 중국인 로인에게서 “이등박문을 암살한 사람은 안중근 말고 또 있었다”는 얘기를 들은적 있으나 어른들끼리 취중에 한 말이라 어린 필자는 별관심이 없었다. 30여년후인 지금 필자가 그 중국인 로인의 이야기를 다시 먼 기억에서 회생시킨것은 일본의 “2중저격설”과 조우하면서 그 이미지가 오버랩(互搭)됐기때문이리라.
하다면 일본사회의 이토2중저격설의 책원지는 어디에 있는가? 필자의 연구에 따르면 최초로 “2중저격설”을 제기한것은 이토의 측근이였던 관료, 실업가인 무로다 요시아야(室田義文)란 인물이다. 1938년 그가 생전에 구술한 책 《무로다 요시아야옹담(翁譚)》이 출간된다. 무로다는 1909년 10월 26일 이토가 암살되는 날까지 이토의 신변에 있었던 인물로서 그의 구술로 된 회상기가 일본사회에 “2중저격설”을 전파하는 산파의 구실을 한다. 필자가 그 책을 읽어보았는데 “이토 2중저격설”의 주제는 “안티안중근저격설”이였다.
무로다는 이렇게 말한다. “진실로 이토를 쏜 인물은 이 키작은 남자가 아니였다. 역사(驛舍) 2층식당에서 아래로 경사지게 향한 불란서기병총으로 쏜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토암살의 진범인이다.” 무로다가 증언하는 이토의 피탄은 (1) 프랑스카빙총(기마총)에 의한 저격 (2) 사입(射入)각도가 오른편 우에서 경사지게 아래방향으로 된것 (3) 이토의 총상은 3발이 모두 다 기병총탄환이였다는것. “또한 3발 다 2층에서 발사한 총상이며 단연코 로씨야병의 고간에서 권총을 빼들고 쏜것이 아니며 특히 키작은 남자(안중근)는 권총을 소지했는데 이토의 암살은 프랑스기병총으로 저격한것이다”고 우긴다. 무로다는 이 주장을 평생 꺾지 않았다고 하며 자기의 손녀딸에게도 노상 이 이야기를 외웠다고 한다.
무로다는 1909년 11월 20일, 시모노세끼구재판소의 검사 타무라(田村光榮)의 청취에 대해 그가 내놓은 안의사의 사진을 가리키면서 “이 남자가 로씨야군대사이에서 한발자국 나서서 단총을 들고 자신(무라다)에 겨냥하고 발사했다는것을 인정한다”고 진술하며 “이토공작을 저격한 자는 사진의 사람(안중근)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고 주장한다.
당시 수행의원이였던 주치의 코야마가 법정에 제출한 심문조서에는 이토의 총상은 무로다설과 일치하지만 무로다의 사입각도가 경사진 하향(下向)인데 반해 코야마는 수평선을 주장한다.
무로다의 증언은 그뒤 일로관계악화와 범인확정의 장기화, 복잡화를 리유로 야마모토(山本權兵衛) 해군대장(그후 1913~14 수상)에게 입막음을 당하게 되며 흐지부지 무력화해진다.
그뒤 1960년 야마구치현립의대의 법의학연구자들인 키무리(木村孝子), 스에모토(增本寬)가 야마구치현립박물관에 소장된 이토가 피탄당시 입었던 속내의의 피탄흔적, 혈액 등을 분석한 론문이 발표되는데 제1, 제2탄의 저격자와 제3탄의 저격자가 서로 다르지 않음을 암시하는 결론을 내리지만 역시 유력한 증거는? 하는 질문에 정면 확답을 제시하지 못하고있다.
1966년 일본 《공학원대학연구론총》 5호에 히자가와(平川紀一)교수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둘러싸고”라는 론고가 발표되는데 기본상 무로다의 의견으로 경사진 결론을 내리고있다. 이 론고 역시 무로다의 증언을 증명하기 위한 언설을 펼치지만 유력한 증거물은 제시하지 못한채 끝나고만다.
최근 2000년이후 륙속 공표되는 “이토와 안중근”관련 연구는 “누가 진범인가”하는 테마를 둘러싸고 진행되온것이 특징적이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저작 4종을 소개하기로 한다.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의 교수 가미가이(上垣外憲一)의 《암살. 이토 히로부미》(2000년) , 넌픽션작가의 대하실기 《이토 히로부미암살사건ㅡ어둠속에 사라진 진범인》(2003년)과 일한관계사 연구자인 윤노(海野福壽)교수의 《이토 히로부미와 한국병합》(2004년), 교또대학 교수 이토 유키오(伊藤之雄)의 《근대 일본을 만든 사나이 이토 히로부미》(2009년).
최근 2000년이후 륙속 공표되는 “이토와 안중근”관련 연구는 “누가 진범인가”하는 테마를 둘러싸고 진행되온것이 특징적이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저작 4종을 소개하기로 한다.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의 교수 가미가이(上垣外憲一)의 《암살. 이토 히로부미》(2000년) , 넌픽션작가의 대하실기 《이토 히로부미암살사건ㅡ어둠속에 사라진 진범인》(2003년)과 일한관계사 연구자인 윤노(海野福壽)교수의 《이토 히로부미와 한국병합》(2004년), 교또대학 교수 이토 유키오(伊藤之雄)의 《근대 일본을 만든 사나이 이토 히로부미》(2009년).
이토 저격의 진범인설을 이들은 아래와 같은 추측으로 펼치고있다.
(1) 일본국내 군부와 우익세력설
조선식민지정책로선에서점진파인 이토와 대립한 야마가다(山縣有朋), 가츠라(桂), 테라우치(寺內), 고토(后藤) 등이 막후에서 조종하여 일본군부경찰을 동원하여할빈역 2층식당에서 저격했다는 설.
(2) 일본군부와 우익랑인(浪人)의 사촉하에 연해주 및 만주의 조선인 항일유지가 조선인별동대를 결성하여 집단으로 실행했다는 설.
(3) 안중근은 그 조선별동대의 한 성원이였을 가능성이 크며 실제로 할빈역플랫폼에 저격자로 현장에 있었기에 여전히 그의 범행설은 성립된다는것.
특히 “안중근+그 동지설” 또는 “별동대설”은 이토 암살범인 추정으로서 꽤 흥미로운 가설을 제시하고있다. 즉 “진흉범은 안중근의 성공과 함께 도망했다”는 당시 소네아라스케 한국통감이 카프라수상에게 송전한 전보문은 범인복수설 냄새가 농후하단것을 시사해주고있다. 당시 25명의 항일혁명가가 체포블랙리스트에 오르는데 이토암살을 안의사 단독행위가 아닌 복수성원의 계획적인 행동이였다고 일본정부에서도 간주했던것이다. 이는 최근 연변의 조선족 저널리스트 리광인씨의 “안중근연구의 빈구석”에서 제기한 “안중근 동지설”과 합치되기도 한다.
안의사가 현장에서 체포된 뒤 려순옥중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할 때까지 5개월동안 당당하게 이토를 비판하고 자신의 저격을 정의로운 행동으로 주장한 그 대의가 일본인들을 감복시킨다.
동경국제한국연구원장 최서면선생은 한마디로 “무로다설은 근거없는 날조”로 일축하지만 필자는 력사의 진실은 무조건 단순히 부정할만큼 단순하지 않은 경우가 왕왕 있다는 생각을 하고싶다.
필자는 2중설의 “수수께끼”가 우리에게 사색의 공간을 제공했다는것에 의미가 있다고 인식한다. 왜냐면 홀로 그 추운 할빈역두에 섰던 안의사의 배후에는 항일투사의 동지들의 협력이 있었다는, 기뻐해야 할 민족의 힘이 있었음을 확신하기때문이다. 그리고 일본인내부에도 조선지배를 에워싸고 지대한 모순갈등이 실재했다는 력사의 일면을 발견할수 있는것도 수확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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