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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근대 재발견·100년전 한중일》
1910년 일본에 《거인 아라오 세이(荒尾精)》란 전기가 출판되며 독서계의 주목을 받는다. 이 “거인”으로 불린 아라오는 누구일가? 아라오(1859~1896)는 일본 19세기말의 “아시아주의”자로서 “지나와 우리 나라는 순치상이, 보차상보의 관계”로 인식하며 “동양의 대사는 일중량국이 일심협력하여 경영해야 한다”고 주장한 인물이다.
그는 청말시기 중국인식, 중국리해를 목표로 삼고 스스로 위험을 무릅쓰고 중국에 건너온 “동방지사중 태산북두”(《동아선각자지사 렬전》)로 평가받는 거물이였다.
그러나 중국측으로 보면 그는 스파이였으며 근대 일본첩보의 리드적역할을 한 인물이였다. 그가 저서 《흥아책》 등에서 제창한 아시아주의는 일중량국 “흥아”주의의 고전저작으로 되였으며 량계초의 공명을 일으키기도 했다. 1886년 륙군참모부의 지시로 중국에 온 그는 중국정보 수집분석의 스파이활동에 적극 투신한다. 일본의 한학의 거물인 기시다 긴코(岸田吟香)(1833~1905)가 당시 상해에서 악선당(樂善堂)서점을 경영하면서 눈약을 판매했는데 기시다는 장지동과도 친분이 깊었으며 역시 근대 일본의 저널리즘의 거두이기도 했다. 기시다의 협력으로 아라오는 한구에다 “악선당”지점을 세우고 전국에 종횡으로 뻗은 첩보망을 만든다. 뿐만아니라 상해에다 “일청무역연구소(日淸貿易硏究所)”라는 간판으로 스파이양성학교를 설립하여 간첩을 다수 양성했는데 청일갑오전쟁에서 이들 첩보활동이 크게 일본군을 위해 기여한다.
아라오가 편집출간한 《대청의견》(1894), 《대청변망》(1895), 《청국통상총람)》(1895) 등 저서는 그들이 중국에서 수집한 정보 및 그 분석으로서 그 섭렵한 범위, 치밀성, 심각성은 세인의 찬탄을 자아냈다. 1889년 아라오는 “악선당”설립이래의 정보를 분류, 집성한 보고서 《복명서(復命書》를 륙군참모본부에 제출한다. 그 보고에서 아라오는 청국은 이미 말기상태에 들어서 부패가 만연하여있기에 일본이 선제전을 일으킴으로써 중국을 서양과 대항시키는데 활용할수 있다고 주장한다.
아라오의 후배인 네츠치(根津一) 등이 편집정리한 《청국통상총람》은 2천여페지에 달하는 보고서로서 그 내용은 청국의 사회, 경제, 정치, 교육, 산업, 지리, 민속, 풍습, 문화, 국민성 등 제반분야에까지 이르며 당시 일본의 중국정보파악의 지남서로 지목당할만큼 대환영을 받았다. 그리고 그것은 일본의 대륙침략의 지(知)적 정보로 활용되였던것이다.
1859년에 태여난 아라오는 1896년 37세의 나이에 병으로 사망한다. 그는 림종때 “아, 동양이…”라는 말만 남기고 끝을 못맺었다고 한다.
부패한 청조가 일본에 의해 일청전쟁후 붕괴됨으로써 중국대륙에 새로운 개명인사들이 이끄는 신중국이 나타나며 억압받는 민중이 해방되리라고 《대청의견》에서 말한 그는 최후로 무엇을 말하려했을가?
필자가 근대 중일한의 력사사료를 섭렵하면서 늘 느끼는 점은 100년전의 일본인들은 중국에 대해 여러가지 방법수단을 동원하여 인식, 리해하고 그 정보를 파악, 분석함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만큼 철저했고 치밀했다는것이다.
아라오보다 5년 후배인 1864년생의 일본인 무나카타 고타로오(宗方小太郞)(1864~1923)란 인물이 존재한다. 그는 당대 “지나통 제일인자(支那通第一人者)”로 일본사회에서 불려질만큼 중국정보수집에 철저한 스파이의 전형적인물이다. 《동아선당지사기전》, 《대지회고록》 등에 의하면 중국에서 한생을 보낸 무나카타는 일본에서 미야자키를 통해 손문과도 교우(交友)관계가 있는 인물이가도 하다.
1884년 청불전쟁시기 중국에 건너온 무나카타는 1890년부터 해군사령부의 위탁으로 중국정보를 제공하는 간첩으로 활동한다. 일청갑오전쟁시 해군의 방침은 그가 제공한 청국정보를 토대로 제정한것이 많으며 특히 위해위 요새(要塞)의 치밀한 정보와 북양함대의 소재를 밝힌것은 일본의 승전으로 이끈 지대한 요인이라고 한다. 하여 무나카타는 전쟁후 명치천황의 알견을 받기도 한다.
한문소양이 깊고 한어를 잘한 무나카타는 치밀하고 섬세한 성격으로서 술 한방울을 입에 안댔다고 한다. 그는 중국이름을 “宗大亮(종대량)”으로 하고 청국식변발을 늘어뜨리고 중국옷차림으로 “완벽한 지나인”으로 중국 각지에 잠복하여 수차례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정보 수집분석에 종사했다.
그는 생애를 중국의 중부, 남부 특히 상해에서 지냈으며 아라오의 수하에서 수년 같이 활동했는데 만년에는 상해에서 동방통신사({1方通信社)를 설립하였다. 그 수집정보는 남방이 많으며 동북지역은 많지 않다. 그는 또 《민보)》, 《한보)》 등 신문도 경영하였으며 1923년 사망한다.
필자가 소장한 《무나카타 고타로오 문서》는 그의 부인이 소장했던 자료를 전후 정리편집한 저서로서 무려 1,500페지의 상하 두권으로 돼있는 방대한 저작물이다. 그가 해군성에 정기적으로 보낸 이 보고서는 내용으로 보면 중국의 당시의 정치, 군사, 경제, 지리, 사상, 민중운동, 풍속, 문화, 민족성 등 전 분야에 걸쳤는데 그가 파악한 군항, 포대의 위치, 총분포의 지도 그리고 기본적군사 조사는 너무나 치밀하고 상세하였다.
그뒤 후기에 그는 중국의 정치형세나 민중사정에 대한 보고가 증폭되는데 이를테면 청조내부 관료의 모순, 궁정깊이의 광서황제와 서태후와의 옥신각신사정, 광서황제의 유페암살내막, 원세개의 사망원인 등 공개되지 않은 극비정보가 많이 들어있어 경악케 한다.
특기해야 할것은 그가 당시 청조말기상태의 전국의 부패사정을 파악하고 예언한것은 실로 엄청난 분석이였다. 그는 당시 “년도재정수입이 9,074만냥 은에 523석 쌀로 분석하며 청국의 상황으로 보아 이는 매우 비정상적이며”, “수뢰, 부패로 극을 치닫고있다”고 분석한다. 또한 당시 청국이 혁신으로 궐기하며 세계 최대 강국으로 거듭날 가능성이 크다고 많은 사람들이 보고있었으나 무나카타는 그것을 부정한다. “인심부패”, “치국의 법은 있으나 치국지사가 결핍한것”, “천하관인이 전부 부패한것” 등 키워드로 부패를 구조적으로 파악하면서 10년내지 30년안으로 청국이 “지리파쇄(支離破碎)”하는 대변화가 일어난다고 예언한다. 그것은 결과 적중하여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국의 멸망을 선고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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