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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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바자(외7수)/김철호
2019년 03월 16일 10시 17분  조회:890  추천:0  작성자: 김철호
바자(7)

김철호

 
키 낮은 바자라 하여도
슬쩍 건너갈 수 있는 바자라 하여도
바자 앞에서는 걸음을 멈춘다
더는 못간다, 아니 안간다
 
앵두나무에 열꽃이 다닥다닥 피여있었다
빨간 빛들이 향기로 풍겨왔다
 
그냥 다리를 높이 들어 바자를 건넜다
두 손에 가득 담긴 붉은 이슬은
터져 피가 되여 손가락 새로 줄줄 흐른다
 
키 낮은 바자라 하여도
바자 앞에서 걸음을 멈추면
바자는 관념의 경계가 된다
 
다리가 가위되여 테이프를 베이니
앵두나무는 수천수만개의 하트를 바친다 
 
 
단풍.1
 
붉은 물을 밟으면서 걷고 있다
튕겨오르는 붉은 빛 슬프게 울고 있다
바람이 숨어 꾸미는 음모는
이 물결을 쓸어버리는 것이다
소슬한 어둠이 기여오고
먼 승냥이의 허파소리 죽어있다
 
누군들 입가에 피 묻히고 울던 날 없었으랴!
누군들 하늘 찢고 태양 훔친 적 없었으랴!
 
드디여 바람이 불어친다
락엽들의 울음소리 아름답다
빛들이 숨어버린 어둠 속 어데선가
반짝이는 흐느낌 향기롭다
날 밝으면 하얀 도화지 우로
붓 되여 걸어오는 사람 있을 것이다
 
이제 더욱 찬란한 슬픔이 되여
바스락 댈 저 붉은 숨, 지금
계절은 피를 밟으며 걷고 있다
 
 
단풍.2
 
왜 이리되었는가 물으니
부끄러워서라고 한다
봄이 지난지 오라고
뜨겁던 여름도 보냈는데
문득 작은 욕망 하나 생긴 것이
못내 부끄러워서라고 한다
 
한발작만 더 내디디면 계절의 끝인데,
이젠 하얀 백지를 바쳐야 할터인데,
아직도 눌러 아픈 혈 있다는 일
참으로 가슴 꿈틀하게 놀랍단다
 
그러면 저 하늘은…
 
해종일 태양 하나만을 감싸고 놀면서
가질 건 다 가지더니 마지막 손마저 놓아주지 않는다
당기거니 늦추거니 실랑이다가
떨어져 날아간 붉은 이파리 하나 서녘 하늘 되였다
 
적신(赤身), 숨이 큰 나의 생리!
 
 
 
선인장꽃                                                                         
 
노란 숨 한 모금
소리없이 눈 뜨더니
어느새 또 감는다
 
오래 둘 수 없는 향기이기에
벌써 저만치에 가
없는 듯 사라진다
 
눈에 뿌리한
그녀의 숨비소리
계절 끝까지 품고가리
 
 
()

어느 여름날 지구에 별이 날아들어 부딪쳤다
지구는 하나의 불덩이로 되였다
지구의 모든 생명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모든 생명이...

어느 여름날 떨어진 별 때문에
그렇게 란리법석이던 핵문제도 더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대통령선거도 더는 필요하지 않게 되였다
환경도 없어졌다

어느 여름날 괴성은 간사하고 음험하고 욕심쟁이의 뇌를 소멸해버렸다

타버리는데 억년
식는데 억년

텅 빈 땅은 아무런 문제도 없이, 말썽도 없이
이웃 별에 피신간 생명의 눈동자에 파란 별로 반짝이고있었다
 
 
영정사진

1

저승의 창문으로 이승을 내다보고있다
누가 왔나 하나하나 체크한다
누가 오지 않았나 하나하나 찾는다

나 왔네, 하고 저승의 창문 저쪽에 있는 눈길을 바라보며
문상객들은 신고한다

아마 가기가 싫었던 모양이다
창문 이쪽으로 흘러오는 눈빛이 슬프다
이승을 기웃거리는 눈길이 안타깝다

2

눈동자만 있고 그외의 것은 다 사라졌다

허공에 동그랗게 떠있는 두개의 작은 구(球)
돌돌 굴려지는 구속에 비끼여있는 이승의 얼굴들
동그란 구가 동동 떠서 움직인다
동그란 구가 가까이 왔다 멀어졌다 한다

그외의 것은 다 없고 동동 떠다는 구만 있다
 
 
바다에게
 
바다, 네가 물일 수 없다. 천만갈래 강 다 품어주고 때론 뭍에 넘쳐나는 누런 홍수도 지체없이 받아주는 네가 어찌 물이랴!
 
마도로스의 슬픈 노래를 파도의 갈기마다에 새겼고 적아가 하나의 색갈로 흐르는 명랑 앞바다의 피빛 노을까지도 꺼안은 너를 그냥 물이라 하면 안되지!
 
타이타닉호의 현악4중주와 함께 갈앉은 1514개의 심장은 어쩌고, 아직 피지 못한 꽃들과 함께 잠긴 진도바다의 혼들은 어쩌고, 칼레, 살라미스, 오카나와, 솔로몬, 트라팔가, 유틀란드… 그 많은 해전으로 감춰버린 수천수만의 눈빛은 또 어쩌고, 너를 막 물이라고 할 수 있겠니!
 
너에게서 만들어진 이야기만 건져 올려도 하늘같을텐데, 너의 품에 잠긴 사연만 모아놓아도 태산보다 더 높을텐데, 너를 어떻게 그냥 물이라고 하랴!
 
그러나 이 세상은 물 아니고서는 이뤄질 수 없나니, 8천8백 고도의 쵸몰랑마봉도 물 다 걸러내면 먼지로 흩어지고 엠파이어스테이빌딩도 100% 건조시키면 폴싹 물앉을거고, 무액(無液)으로는 하루밤 정사도 성사시킬 수 없겠거늘, 물ㅡ너는 뭐니?
 
물은 바다다! 아무리 작은 물이래도 물은 바다다! 바다는 물이다! 아무리 큰 바다래도 바다는 물이다!
 
그러니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이 선 바다, 너를 어찌 물이라 하지 않을 수 있으랴! 바다, 너는 물이다!
 
 
폭염
ㅡ오규원의 <현대시작법> 들고 더위 피하다
 
멀리서 음악소리가 들려온다
음악소리도 땀을 뚝뚝 떨구는가, 헐떡거린다
거기에 풀벌레소리가 양념이 되여 맛을 낸다
구름은 부글부글 괴고 있겠지만
풀잎과 나뭇가지 사이로 랭기가 싹 빠진 바람이 눈치껏 힐끔거린다
불 붙은 꺼먼 왕파리 두 마리가 쫓고 쫓긴다
쫓는 쪽은 사내고 쫓기는 쪽은 늘 계집이였는데…
오규원이 무릎 위에서 시적표현의 리해를 열심히 력설한다
손톱으로 제자의 손바닥에 마지막으로 남겼다는 글귀가 폴싹폴싹 뜀질한다
 
한적한 오후다
불타는 오후다
더는 잃을 것이 없는 오후다
나는 나무 속에서 자본다
 
지금 딱 그만큼한 때이다, 한적한 오후다
파란 순을 가득 단 물푸레나무가 반짝반짝 바라본다
침엽수들은 바늘을 다 거둬들였다
참말로 더는 잃을 것 없는 오후다
 
 
“도라지” 2019년 제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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