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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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령(최명란)
2008년 09월 26일 14시 07분  조회:1559  추천:15  작성자: 김철호
가령 내게 암내가 난다면 넌 내 겨드랑이에 코를 박아 자반고등어처럼 몸을 포개고 나붓이 누울 수 있겠니
가령, 두 길 사이 양다리를 턱 걸치고 서 있는 육중한 육교가 갑자기 바람에 휙 날아간다면 너도 육교를 따라 바람처럼 날아갈 수 있겠니
가령 뚱뚱한 몸으로 비좁은 두 이빨 사이에 몸을 걸치고 이 곳 저 곳 자리를 옮겨가며 쑤셔대는 이쑤시개를 반려로 맞으라면 넌 그럴 수 있겠니
가령 날마다 바람으로 내통하는 앞 베란다와 뒤 베란다의 내막을 뻔히 아는 거실인 네가 아버지라면 베란다를 며느리 삼을 수 있겠니
가령 비오는 날 주점에서 미니스커트 미끈한 다리의 만취한 아가씨가 우산꽂이에 거꾸로 박혔다면 오감이 흩어진 사내인 네가 온전히 바로 세워줄 수 있겠니
가령 할머니에게도 올라타고 엄마에게도 올라타고 딸에게도 올라타는 수탉의 내막을 뻔히 아는 부화장인 네가 그런 수탉을 사위 삼을 수 있겠니
가령 차가 밀리는 곳은 관세청 사거리만이 아니라 햇살이 쫑알 쫑알 차들의 정수리를 쪼아대는 곳이라면 다 밀리는 줄 아는 네가 알을 깨고 나오기만 하면 다른 암탉들이 쪼아 죽이는 닭장으로 광화문의 뻑적지근한 어깨들을 불러들일 수 있겠니
가령 31일을 넘어본 적이 없는 달력을 붙들고 32일에 만나자는 사람과 약속하라면 넌 그럴 수 있겠니
가령 물난리 난 곳에 가장 필요한 건 물이며 불난리난 곳에 가장 필요한 건 불이라며 물난리에 물을 퍼 붓고 불난리에 불을 지르는 사람이 간장 종지의 소금 사리라면 넌 그를 부처로 모실 수 있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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