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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내리는 날
김승희[한국]
오늘은 내가 조용히 견디려고 하는데
비가 내리고 있어.
주룩주룩 유리창으로 쏟아져 내리는 빗물을 좀 봐.
빗물마다 손이 있어.
손마다 귀신이 있어.
유리창을 마구 문지르며 손은 유리를 부여잡으려고 해.
나팔꽃, 칡꽃, 넝쿨 장미,
위로 위로 올라 가려는 세상의 모든 손들이 떠올라.
그런데 유리창은 그 손을 미끄러뜨리려고 해.
그리고 비가 오고 있어.
아무것도 붙잡지 못한 빗물의 손들은
하염없이 유리창에 손을 비비며
무언가를 호소해. 그 손들이 모두 송이 송이 혀로 보여.
오늘은 내가 조용히 견디려고 하는데
빗줄기마다 수천수만 송이 귀신의 혀가 피어나고 있어.
빗줄기마다 흐린 혀의 꽃다발이야.
시냇물 같은 혀의 꽃송이들이 유리창에 죽죽 흘러.
오늘은 내가 견디려고 하는데
유리창 속 얼굴 속으로
빗물이 번개를 그으며 급류처럼 흘러가.
번개의 급류에 맞아 내 얼굴이 쪼개진 석류가 되었어.
쪼개진 석류 이빨 사이로
소용돌이치듯 뜨거운 피가 흘러.
그러나
비는 또 오고
유리창엔 수천수만의 꽃송이가 지고
구름 같은 귀면이 흐르고
유리창은 야간열차처럼 검은 거울이 되고
거울 속에는 얼굴이 있고
그녀의 얼굴은 비바람에 부딪쳐 파열하는 석류가 돼.
핏물 흐르는 파열된 석류가 점점 부어오르고 있어.
점 점 점 점 석류는 커져서 드디어
이 방보다도 커진 석류,
지평선보다 더 부어오른 석류의 쪼개진 두개골이 하염없이
비바람을 맞고 있는 거야.
흐린 나무들은 미친 듯이 머리를 풀고 회오리치고
푸른 곰팡이 먹은 얼굴의 오필리아가 몇 번이고 다시 또 다시
부풀어오른 늪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그런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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