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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1000권 읽기 95
2015년 02월 11일 17시 11분  조회:1911  추천:0  작성자: 죽림

941□오래 기억나지 않는 겨울을 위하여□강제윤, 문비시선 9, 문학과비평사, 1989

  시가 어떤 내용을 싣고 있든 시가 드러내는 방법상의 일관성이 시인의 능력을 평가하는 잣대가 될 것이다. 1980년대라는 격정의 시대를 거쳐오면서 대부분 직설에 의한 발언의 시들이 주조를 이루던 시대에 이렇게 우회하여 그런 격한 감정을 싣고 있다는 것이 경이롭다. 직접 말하기보다는 보여주기를 통하여 어디로 가야 하는가 하는 것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 제시만으로는 갑갑한지 감정이 겉으로 불거지는 경우가 곳곳에서 보이지만, 그래도 이 정도의 거리를 두고서 그런 감정을 처리했다는 것은 시인의 능력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4337. 12. 4.]

 

942□집에 돌아와 불을 켜다□김신중, 새로운 감성의 시 4, 크리에이티브 여민, 1995

  이미지와 언어가 거의 분리되지 않는 깔끔한 묘사가 눈에 들어온다. 이것은 시인의 언어감각에서 연유하는 것인데, 웬만한 수련 가지고는 잘 안 되는 경계에 있다. 그런데 그런 이미지들의 삶의 어느 결과 감성의 일치를 보아야 하는지 분명하지 않으면 때로 그 깔끔한 이미지에도 모호한 정서를 이루게 되는 경우가 있다. 시집의 뒷부분으로 가면서 그런 단점이 나타나기도 한다. 결국 이 부분은 일상 속의 깨어있는 의식으로 해결해야 할 수 있는 부분인데, 그렇다면 어떤 긴장이 필요하다는 얘기다.[4337. 12. 4.]

 

943□사람들이 새가 되고 싶은 까닭을 안다□이근배, 문학세계사, 2004

  정신이 앞서나간다고나 할까? 시에서 담아야 할 단련된 정신이 시의 밑에 분명하게 고여있다. 문제는 그것을 얼마나 자유롭게 풀어내느냐 하는 것인데, 대체로 소재에 주제와 상상력이 많이 붙잡혀 있어서 답답한 느낌을 준다. 정신의 단련은 종교의 몫이지만, 그것을 풀어내는 것은 상상력이다. 상상력이 종교나 사상의 어떤 덫에 걸리면 시가 나쁘지는 않지만 통쾌한 맛을 주지 못한다. 정신이 깊어질수록 상상력은 좀 더 가벼워져야 할 필요가 있다. 시가 주제 쪽으로 기울어지면 자칫 넋두리로 전락할 염려가 있다. 그리고 설명투가 많다는 것은 그 뒤에 거느린 주제에 대한 부담이 크다는 얘기도 된다.★★☆☆☆[4337. 12. 4.]

 

944□길 위에서 묻는 길□김민형, 시작시인선 29, 천년의시작, 2003

  시는 보통 상상력에 의존해서 그것을 부풀리는 방향을 쓴다. 그런데 이 시집 속의 상상력은 부푸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졸아든다. 그것은 시인이 시의 군살을 끊임없이 깎아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가 짧고 아주 단단해진다. 그리고 시가 지닌 비유의 체계보다는 시상을 따라 전개되어 나가는 생각의 질서가 긴장을 이끌어가는 주요 열쇠가 된다. 당연히 발랄한 상상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절제된 긴장이 시의 맛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런 시는 시인이 뼈를 깎는 고통으로 쓰지 않으면 긴장을 잃게 된다. 시집 한 권에서 그런 긴장을 유지하려면 시인의 고통은 말할 수 없을 만큼 처절하다. 이 시집에는 그런 처절함이 곳곳에 배어있다. 따라서 이런 긴장으로 살기 어렵기 때문에 무언가 다른 돌파구를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긴장의 문제이기보다는 방법의 문제이다.[4337. 12. 4.]

 

945□눈 덮인 하늘에서 넘어지다□위선환, 현대시신작시집, 한국문연, 2003

  묘사가 아주 꼼꼼한데, 울림이 그 만큼 따라주지 못한다. 그 원인은 상상력이 떨리도록 현을 만들어 주지 못하는 데 있다. 내가 읽은 풍경이 아무리 참신하고 신선하더라도, 독자가 그것을 그렇게 보도록 해서 울림을 주는 것은 의미이다. 따라서 풍경 제시만으로는 어딘가 부족한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다. 이 부분을 조금 더 보강해야만 깊은 울림이 따를 것이다. 글로 써놓고서 그 안에 내가 넣고자 하는 것이 들어있다는 <느낌>만으로는 울림을 만들지 못한다. 내가 분명한 느낌과 뜻을 얻은 다음에 그것을 얼마만큼 드러낼 것이냐 하는 것을 결정하는 것과 그런 결정이 아직 안 된 상태에서 드러내놓는 것은 무언가 좀 더 시원한 맛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결정타로 작용하기 마련이다. 종종 깨달음이 깊이 들어가지 못했는데도 그런 것처럼 묘사된 것들도 있다. 그쪽을 강화하거나 표현의 방법을 좀 더 활달하게 변환시킬 필요가 있다.★★☆☆☆[4337. 12. 5.]

 

946□알타미라 벽화□정진경, 현대시 시인선2, 현대시, 2003

  거침없는 상상력이 일상의 이미지들을 휘적이며 뛰어다니는 모습이 아주 활발하다. 그리고 이것은 점차 삶을 구속하는 힘으로 작용하는 디지털 세계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시도라 할 만하다. 그런데 이미지들이 너무 과장된 데다가 관념 속으로 붕 떠있다. 자칫하면 현실의 어느 부분에 뿌리박고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 의아스러울 정도이다. 그리고 이것은 표현에 집착한 결과이기도 하다. 작은 것이라도 좀 더 크게 확대하려는 의도가 이런 결과를 낳는다. 따라서 이쯤에서 무엇을 전달할 것인가 하는 것을 좀 더 정확히 잡아서 그것을 잘 전달할 수 있는 상관물만을 정교하게 불러낼 필요가 있다. 시라는 것이 워낙 과장의 몸짓을 하고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도를 넘어서면 황당해지기 쉽다. 과장을 하는 데도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4337. 12. 5.]

 

947□기념사진□김재석, 현대시 시인선3, 현대시, 2003

  자신이 딛고 있는 자리가 어디인가를 물어야 할 시집이다. 시에 빈번히 등장하는 절의 이미지와 그와 관련 있는 비약의 상상력이 어쩐지 장난스러움으로 끝나고 마는 것은, 비단 기교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의 문제일 성싶다. 그 일탈이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어떤 충동에서 온 것이라고 할지라도 언제든지 말장난으로 떨어질 방향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논리의 비약과 이미지가 서로 어울리기 어려운 경우가 종종 있음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애써 익힌 재주가 꽃을 피우려면 정신은 물론이거니와 기교에서도 신중한 맛이 있어야 할 듯하다. 한자는 더욱 신중할 일이다.★★☆☆☆[4337. 12. 5.]

 

948□이른 아침 사과는 발작을 일으킨다□이은유, 경계시선 30, 문학과경계사, 2004

  너무 설명하려고 들어서 시가 지루해진 경우이다. 시 한 행에 매달리지 말고, 시 전체가 전하고자 하는 이미지와 주제에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 그래서 시를 읽고 났을 때 한 가지 주제와 한 가지 이미지가 머릿속에 남도록 생각의 방향과 이미지의 흐름을 조종해야 한다. 그것이 잘 안 되는 바람에 초점을 잃은 채 이미지가 붕 떠서 흘러간 시들이 많다. 아깝다고 여기지 말고 주제와 관련이 없는 것들은 과감히 잘라내어 좀 더 팽팽한 긴장을 요구할 필요가 있다. 자신에게든 시에게든.★☆☆☆☆[4337. 12. 5.]

 

949□겨울 수선화□서규정, 열린시학 시인선 10, 고요아침, 2004

  시집의 앞부분 절반이 바다 체험으로 이루어졌다. 소재가 원양어업에 관여한 배꾼의 그것이니 아주 독특한 시집이다. 그리고 이야기의 호흡이 길다는 것이 눈에 띈다. 그런데 바다를 무엇을 말할 것인가 하는 큰 주제가 부각되지를 못하고 고기잡이배에 승선한 한 사람의 고뇌 쪽에 집중되어서 그것이 그대로 한계로 작용한다. 시는 개인의 특수성을 다루지만, 그 특수성 속에는 보편성이 숨어 있는 법이다. 그 점에 대한 인식이 다소 부족한 감이 있다. 그리고 뒷부분은 너무 밋밋한 것이 흠이다. 표현이 많이 등장하지만 신선하지 못하고 또 이야기의 줄거리 속에 파묻혀 있다. 그러다 보니 시의 긴장이 많이 풀린 형국이다. 한자 역시 긴장을 유발하기에는 너무 낡은 문자이다.★★☆☆☆[4337. 12. 6.]

 

950□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안도현, 창비시선 239, 창비, 2004

  재주가 아깝다. 할 말이 없을 때 시에서 어떤 징조가 일어나는가 하는 것을 아주 잘 보여주는 시집이다. 주제가 없으면 시는 인식을 통해 그 긴장을 드러내는데, 앞부분의 몇 편에서 그것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시의 긴장은 낱말의 조합으로 이루지는 것이 아닐뿐더러 내용을 상실한 인식은 오래 유지되기 힘들다. 이루어진 조합들의 배경이 낱말들 사이에 실리콘처럼 박혀있을 때 팽팽한 긴장이 생긴다. 쓰기 위해서 쓴 시들이 갖는 함정은 아무리 정교하게 다듬어도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장난이 매우 심한 시집이다. 독자들이 이런 시의 세계에 오래 매달려있을 만큼 어리석지 않다는 것을 깊이 생각할 일이다.★☆☆☆☆[4337. 1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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