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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담 내가 시를 쓰는 만공백공여덟가지 리유 한설
<내가 시를 쓰는 만공백공여덟가지 리유>
는 그 만공백공여덟가지 리유 자체도 한수의 시가 되는 까닭이다
라는 시를 쓴적이 있다. 그것이 시에 대한 나의 사랑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낸다고 자부하는 터이거니와 나는 여직 시 아니면 세상과의 대화를 할줄 모르는, 말하자면 자신의 생각을 조리정연하게 설명할줄 모르는, 사회에서는 말단이요, 생활에서는 최하층이며, 문학에서는 영원한 초보자이다. 그러나 문학에 대한 미친 사랑은 나더러 시를 쓰게 하였고 꺾은 구십인 지금도 시를 쓴답시고 새벽 두시에 일어나서 눈을 부비며 이렇게 키보드를 두드린다. 혹시 지금 시를 갓 배우고저 시집들을 외우며 다니거나 문학의 문고리를 쥐고 서성거리는 후배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수 있지 않을가 싶어 그야말로 엎어지며 뒹굴며 걸어왔던 내 문학의 길을 쑥스럽게 털어놓고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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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학교때부터 나는 모범생이였다. 아홉살에 당신의 아버지를 여의고 가문의 장자로서 한 가정을 이끌어갈 막중한 책임을 어쩔수없이 짊어져야 했던 아버지는 할머니의 권고대로 자신이 즐기던 예술의 꿈을 접고 의학공부를 시작하셨다고 한다. 일찍 안도현업여문공단에서 악기면 악기, 노래면 노래, 배우면 배우로 활약하시던 아버지는 황봉룡선생의 <랭상모>에서 지주부농분자의 역을 훌륭히 소화해내리만치 예술에는 끼가 계셨다고 한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소외된 사람들이였고 광대와도 같은 존재로 세상사람들에게 각인되여있던 터라 할머니는 맏아들의 소행이 정 마음에 들지 않으셨던지 <너는 맏이로서 맨날 띤따라만 해서 어찌 쓰겠냐>해서 아버지는 비로소 <결심을 내리고> 의학공부에 도전하셨다. 안도현에서는 알아주는 유명한 중의인 고선생의 제자(고선생은 평생 당신의 자제분인 둘째아들과 우리 아버지까지 해서 제자 둘만 두셨다고 한다)로 된 아버지는 악보와 대사를 외우던 머리로 계피, 백반, 당귀, 감초 등 중약재들을 외우고 수백개의 혈위와 경락들을 외우며 그야말로 죽기내기로 공부를 하셨다고 한다. 누나(나보다 세살 이상)는 태여난후 꼬박 백날동안 새벽이면 울었다. 공부를 하는데 애가 빽빽거리니 어머니는 우는 누나를 둘러업고 텅 빈 거리를 바장이셨다. 후에 장춘중의학원까지 나오시고 현병원에 취직을 하시면서 할머니의 소원대로 반듯한 직업인 의사노릇을 하신 아버지는 후에도 우리 삼남매를 보고 공부가 왜 그리 어려우냐며 <이죽거리시기도> 하셨다. 아버지는 자식들에 대한 요구가 각별했었다. 공부도 학급에서의 1등이 아닌 전교 1등을 바라셨고 현의 1등, 주의 1등을 바라셨다. 그랬기에 나는 남들처럼 산에 올라가 놀거나 물가에 가서 장난질치는 동년보다는 책만 보는 동년을 즐겨야(?) 했었다. 우리집은 저녁밥만 먹으면 각자 숙제를 하거나 책을 보는것이 일과였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의학책 아니면 소설책을 읽으셨고 우리는 우리대로 숙제를 하고 과외독서를 하군 하였다. 그러나 나는 작문을 잘 짓는 아이는 아니였다. 작문숙제만 나오면 나는 곧 울상이 되군 하였다. 그래서 어머니를 졸라 작문숙제의 도움을 청하군 하였다. 고급소학교를 졸업했던 어머니는 누나때부터 작문숙제를 곧잘 도와주셨다. 내 기억에 그때 누나는 벌써 그런 어머니의 도움으로 <비림비공-림표와 공구(공자)를 비판하자>는 대자보를 써서 학교에 가져가기도 하는 등 꽤 활약적이였다. 내가 누나한테 작문숙제를 도와달라고 할라치면 누나는 시간이 없다거나 그것도 못하냐는 식으로 기껏 나를 조롱하고서야 내가 울기 일보직전이면 대충 이러이러하게 쓰면 된다고 <알려주군> 하였다. 그렇게 간신히 작문숙제를 하던 중 작은고모께서 우리집에 오시게 되였다. 현진수학교에서 영어공부를 시작하셨는데 향진에서 중학교 조선어문을 가르치셨던 고모는 그 무렵 학교마다 외국어과목을 설치하는 바람에 팔자에도 없던 영어공부를 하게 되셨던것이다. 어느날 내가 또 그 망할놈의 작문숙제때문에 골머리를 앓는것을 본 고모께서는 어디 보자 하시더니 마치 외우기라도 한듯 즉흥으로 작문을 불러주셨다. 나는 고모가 부르는대로 받아쓰고. 학생들이 농민들의 모내기를 도와주는 의무로동을 하는 장면을 쓴것인데 지금도 기억에 나는것은 <모야 모, 줄이야 줄> 하고 신나게 팔을 휘두르며 작문을 불러주시던 작은 고모의 모습이다. 그 작문은 당연히 범문으로 되여 학급에서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읽어주시기까지 하셨다. 그것이 빌미로 되여 나는 일약 작문을 잘 쓰는 애로 정평이 나게 되였고 그뒤부터 작문숙제는 내게 더욱 큰 골치거리를 만들어주었다. 작문을 잘 쓴다고 소문났는데 나절로는 도무지 잘 쓸 엄두가 나지 않았던 까닭이다. 그때 작은고모께서 반년이던가 일년이던가 우리 집에 계시면서 내 작문숙제에 적잖은 도움을 주셨고 나는 작은고모한테서 작문을 잘 짓는 <비법>을 더러 전수받을수 있었다. 그리고 같은 시내에 계셨던 아버지의 이모사촌동생인 나의 오촌숙부(파출소 민경이셨는데 문학열성자셨다)께서 드문드문 우리집에 오셨는데 오촌숙부께서는 술을 마시다가도 나의 시랑송지도도 해주시고 작문숙제도 검사해주셨다. 내 머리에는 그분들의 좋은 말씀만 기억되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중학교에 진학해서는 학년적으로도 작문을 잘 짓는 애로 불리게 되였고 나 역시 은근히 작문만큼은 누가 나를 따를소냐 자부심이 굉장했었다. 그런 내 코대가 납작해지던 사건이 있었다. 초중 3학년때였는데 우리 조선어문을 가르치시던 백창수선생님께서 어느 한번의 작문숙제를 검사하시고 내게 준 점수가 80점이였다. 나는 어머니의 도움으로, 누나의 도움으로, 작은 고모나 오촌숙부의 도움으로 결코 작문에서만큼은 95점 아래를 맞아본 기억이 없었는데 80점이라니… 뭔가 잘못된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선생님의 리유인즉 간단했다. 너무 <우수한> 작문이기에 80점이란다. 오똑한 코마루, 앵두같은 입, 버들눈섭… 등등 초상묘사가 판에 박은듯한 작문은 우수한 작문(물론 진학시험같은 경우 괜찮은 점수가 나오는)일지는 몰라도 결코 좋은 작문으로는 될수 없다는것이였다. 그때로부터 나는 비뚜로 나가기 시작했다. 작문이 더이상 내게 매력으로 다가와주지 않았다. 게다가 나는 그 무렵 어쭙잖게도 짝사랑이라는것을 하며 정신을 딴데 팔고있었다. 고중에 진학했다. 웃겼던것은 나는 내가 중학교시절 썼던 작문도 무슨 보물인듯이 다 정리해서 묶어두었고 그래서 내 작문숙제책은 부피가 항상 두터웠다. 그 작문책은 그때 전교를 돌며 학생들에게 작문에 대한 중시도를 불러일으키는 <도구>로 사용되였다. 그러나 백선생님 말씀대로 나는 우수한 작문은 지을수 있었는지 몰라도 좋은 작문은 쓸줄 몰랐던 모양이다. 학생시절의 내게 유감으로 남은것이 있다면 그 흔한 중학생작문선같은데 나는 작문을 단 한줄도 발표하지 못했다는것이다. 내 동창들가운데 김익봉이는 벌써 소학교시절에 동시를 연변일보에 발표하여 원고료로 책 한묶음을 받았었고, 내가 그 잊혀지지 않는 80점짜리 작문을 쓸 때 김영복이는 <중학생작문선>에 작문을 발표하였으며, 내가 시를 쓴답시고 날뛸 때인 고중시절 조도일은 한어로 시를 써서 중문잡지에 발표를 해서 원고료도 적지 않게 받았었다. 고3때 우리의 조선어문을 가르치셨던 장경국(부교장직을 겸하셨음)선생님은 어느날 이제 대학시험을 칠 때까지 1반의 한영남이와 4반의 리봉우(현재 연변대학 교수, 조선족 첫 신문학 박사. 고중시절에 벌써 소설을 끄적거리던 친구)는 작문훈련을 더 하지 않아도 된다고 선포를 하셔서 내 삐딱한 자존심을 적잖게 만족시켜주셨다. 결국 대학시험에서는 작문을 쓰라는 자리에 시를 적어서 형편없는 점수를 얻으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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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중때 우리 학교에 조선어문교원으로 오신 림금산(시인)선생님께서 작문써클에 바친 내 글에 감정기초가 좋으니 시도 써보시오라는 평어 한마디를 적어주셔서 당장 시인이라도 된것처럼 시를 쓴답시고 야단 좀 떨었다. 매일 열수고 스무수고 쓰고 또 썼다. 그게 무슨 글이였을가마는 림선생님은 훈시같은것은 아예 없이 잘 쓴다 계속 쓰라 노력하라 등 부추겨주는 말씀만 하셨다. 때론 김소월의 시를 읽어주시며(선생님은 많은 시들을 외워두고 계셨다) 같이 공부하자고 하시기도 했다. 아름다운 시어, 리듬적인 시어는 아무래도 그때 너무 인상이 깊었던 모양으로 나는 지금도 시를 쓰게 되면 시어에 각별한 애정을 쏟군 한다. 그러다가 고3에는 기어이 <연변문학>(당시 <천지>)에 시 한수를 발표하고말았다. 리상각선생님과 김동호선생님을 무던히도 애를 먹였었다. 일주일이 멀다하게 원고뭉테기를 보냈으니 글같지도 않은 원고들을 보시느라 오죽 고달팠으랴. 그러나 그분들은 초학자라고 학생이라고 무시하지 않으시고 답장까지 적어주시며 고무해주셨다. 나중에 리상각선생님께서 시 한수를 발표시켜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마당에 아직은 학생이기에 먼저 공부에 노력하여 대학공부도 하고 시는 나중에 써도 된다고 준절히 타이르셨다. 그러나 내 고집은 이만저만한것이 아니여서 나는 기어이 대학시험에 미역국을 먹고말았다. 물론 고중졸업을 앞두고 시를 발표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나뿐이 아닌 내 주변 사람들을 흥분시키기에 족한 사변이였다. 그때는 그것으로 나도 문단 데뷔가 되고 나도 시인이 된줄 알았다. 그러나 그러고 계속 투고해도 내 시는 발표될줄을 몰랐다. 나는 글을 많이 쓰는 축에 속한다고 해야 할것이다. 그 무렵의 나는 하루에 2, 30수씩 써갈겼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시가 아니라 내 발설이였음을 나는 썩 후에야 깨달았다. 그뒤 1989년도에 두번째 시가 발표되였다. 역시 첫 시와 같은 제목의 <소원>이였다. 첫 시가 시인이 되고싶다는 소원을 말한것이라면 두번째 소원은 좀 괜찮은 시인이 되는것이였다고나 할가. 웃겨도 한참 웃겼었다. 1989년에 하늘같은 아버지를 잃고 삼년뒤 바다같은 어머니를 여위였다. 내게 항상 힘이 되여주시던 작은 할아버지, 작은 할머니마저 여위였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친할아버지는 내가 뵐수도 없었던 1945년에 사망하셨고 할머니는 1976년에 사망하셨으니 내게는 그 작은 할아버지와 작은 할머니가 곧 하늘이였고 세상이였다. 나는 세상이 오직 나한테만 불공정하다고 잔뜩 이 세상과의 싸움을 도전하고 나섰다. 그 무렵에 썼던 시들은 거의 일색으로 아픔과, 고통과, 일그러짐과, 빈정거림이였다. 다행히 나는 좋은 사람들을 만날수 있었다. 김창희형을 만났던것이다. 첫 만남을 잊을수가 없다. 그때 나는 김소월, 조기천, 마야꼽스끼만 알고있었다. 처음 형을 만났을 때 내가 쓴 시들을 보던 형이 한마디 툭 던졌다. 나도 이런 시를 좋아했었는데 너무 아우성치다보니 이제 목이 갈려서 더는 소리를 치지 못한다고. 내 머리가 한번 툭 소리나며 깨지는 순간이였다. 우리는 그때 김현순이 어디서 구해온 한국명시와 세계명시들이 담긴 록음테프들을 매일마다 듣군 했다. 너무 좋았다. 처음으로 내가 시의 개변을 가져온것이 그때 썼던 <풀을 사랑했습니다>이다. 물론 그 시는 지금 봐도 괜찮은데 아직도 나는 그 시의 발표를 꺼려하고있다. 그리고 그때 나는 김룡운선생님을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김선생님은 가르치지 않는다. 좋다 안된다로 명확하게 지적해줄뿐이였다. 괜히 신경질이 났다. 내딴에는 괜찮은 시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을 나쁘다, 안된다고 직방배기로 말씀하시니 말이다. 그런 김선생님을 믿고 따랐던것은 나를 알아주었기때문이다. 첫 만남의 장소였다. 그때 우리는 안도에서 <초생달문학사>라는것을 만들고있었다. 거기서 만나 각자 자기가 써온 글들을 읽고 합평회형식으로 주고받던 시절이였는데 그 장소에서는 아무 말씀도 없으셨던 김선생님이 나중 내가 없는 자리에서 김창희형과 김현순을 앞에 두고 저 영남이란 애가 크게 될것 같다고 하셨다고 했다. 그 한마디에 나는 무작정 김선생님을 스승으로 모시기로 했다. 알아주셨다기보다 보아주셨기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김선생님과 함께 연변 각 신문사, 잡지사, 출판사를 다니며 인사를 한적이 있다. 례의 내가 즐기는 검은색 중절모를 쓴채. 동무 한영남이요라고 하시던 리상각선생님의 존안을 그때 처음 뵈였었다. 문학을 다시 생각해보게 되는 계기였다. 꼬박 5년을 집에서 백수로 살다가 연길로 자리를 옮겼다. 많은 문인들을 만났고 많은 조언을 들었고 많은 책을 보았다. 소설가 김혁형을 만났다. 김혁형네 집에 빈대를 붙이기도 했다. 형네 집에 있는 책을 읽어볼수 있었던 시간이였다. 그러다가 1997년 운좋게도 연변일보 제일제당상을 수상하게 되였다. 그 자리에서 정판룡선생님께서 오늘로 우리 문단에 새식구가 둘(소설가 량영철이 해란강문학상을 수상, 그해가 한국이 IMF로 곤난했으므로 수상자가 단 둘뿐이였음) 더 불었음을 축하한다고 하셔서 이게 진짜 데뷔구나 했다. 문학이라는걸 해서 꼬박 14년만의 일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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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예술>잡지사(근 1년 여를 김룡운선생님한테 가서 업여편집을 했음), <류학과 생활>신문사, 연변인민출판사 <별나라>편집부, <흑룡강신문사>, 흑룡강조선민족 출판사 등 신문사, 잡지사, 출판사들을 전전하며 글에 대한 많은것을 배웠다. 그러다보니 글도 조금 나아진것 같고 더러 수상도 했다. 수상할 때마다 새롭게 거듭나야지 하지만 결코 뜻대로는 되여주지 않는다. 하긴 수상이 문학을 재는 척도는 아니겠지만 말이다. 박장길시인한테서 좋은 말 하나 들은게 생각난다. 글이라는건 가장 기막히는 사연을 아닌보살하고 써버려야 좋은 글이 된다고. 나 역시 동감이다. 사람만치나 소박하기 이를데 없는 박형은 멋있는 말을 할줄 모르는데 그 말 한마디는 너무 멋지게 한것 같다. 정호원수필가한테서 힘을 빌리곤 했다. 정형은 어느날 내가 쓴 시가 좋아서 자꾸 혼자 랑송해보았다고 했다. <가을을 다치지 마오/가을은 나의것이요/> 뭐 그런 시였던것 같다. 그 한마디는 지금도 글을 쓸 때 내게 힘이 되여주군 한다. 동갑내기인 조광명시인은 한영남이는 길게 쓰는 재간은 누구보다 뛰여나다고 한마디 해서 그것도 나름대로 받아들였다. 내가 또래시인중에 탄복하는 시인이 조광명이니깐. 내가 쓴 글을 보고 남들이 좋다고 하면 그 말을 액면그대로 받아들인다. 남들이 나쁘다고 해도 그렇게 받아들인다. 글은 남이 써주는게 아니고 남이 시키는대로 써서 되는것도 아니라는것을 시를 쓰기 시작해서 거의 20년이 흘러서야 깨달았다. 늦깎이라도 한참 늦깎이이다. 그러나 지금도 내가 시를 쓰는 리유를 대라고 하면 오래전에 썼던 시를 조금 수개해서 다시 적고싶다.
내가 시를 쓰는 만공백공여덟번째 리유
는 그 만공백공여덟번째 리유가 시로 되지 않아도 나는 시를 버리지 못하는 까닭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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