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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1960년대 이후 시: 곽재구 - 새벽 편지
2015년 12월 24일 23시 30분  조회:3779  추천:0  작성자: 죽림
 

[현대시

곽재구

     「새벽 편지

 

 

■ 감상의 맥

  

   이 시에서 화자는 고통과 슬픔의 세상 속에서 그 고통과 슬픔의 세상을 직시하면서 새벽에 일어나 가슴속에 담긴 뜨거운 사랑(순수하고 진정한 삶)의 마음을 편지에 담아내고 있다. 따라서 화자에게 밝아오는 ‘새벽’은 이 험한 세상에 새로운 희망을 기대하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 작품 읽기

 

새벽에 깨어나

가슴 속에 뜨거움과 만나는 시간 사랑과 희망의 샘이 출렁이는 시간

반짝이는 별을 보고 있으면

삶에 대한 사랑과 희망

이 세상 깊은 어디에 마르지 않는

현실에는 찾기 힘들지만 반드시 있는

사랑의 샘 하나 출렁이고 있을 것만 같다

세상을 사랑으로 채우는 샘

▲ 1~4행 삶에 대한 새로운 희망과 기대

 

 

 

㉡ 고통과 쓰라림과 목마름의 정령들은 잠들고

  ↑현실의 괴로움

눈시울이 붉어진 인간의 혼들만 깜박이는

아무도 모르는 고요한 그 시각

                       새벽

아름다움은 새벽의 창을 열고

우리들 가슴의 깊숙한 뜨거움과 만난다

           새벽 별을 보고 있으면 가슴속에 열정이 생김

다시 고통하는 법을 익히기 시작해야겠다

사랑하는 사람이나 꿈꾸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고통을 참고 견디겠다는 뜻

  화자의 의지가 드러남

                화자가 생각하는 긍정적 세계

이제 밝아 올 아침의 자유로운 새소리를 듣기 위하여

                              화자가 추구하는 가치를 담고 있는 소재

화자가 생각하는 긍정적 세계

따스한 햇살과 바람과 라일락 꽃향기를 맡기 위하여

▲ 5~12행 새해 아침의 마음 자세

 

 

 

 ↗반복을 통한 진실성(강조)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를 사랑한다는 한마디

새벽 편지를 쓰기 위하여

 ↑진실된 마음으로 쓰는 사랑과 희망의 편지

『 새벽에 깨어나

반짝이는 별을 보고 있으면

이 세상 깊은 어디에 마르지 않는

희망의 샘 하나 출렁이고 있을 것만 같다. 』 『 』-수미상관 주제 강조

화자가 추구하는 소중한 가치

▲ 13~17행 삶에 대한 새로운 희망과 기대

곽재구새벽 편지-

 

 ■ 핵심 정리

 

   ▶ 화자 새벽에 깨어나 별을 바라보며 희망을 생각하는 사람

   ▶ 시적 상황 새벽에 일어나서 별을 바라보고 있음

   ▶ 정서와 태도 희망적낭만적인 태도

   ▶ 주제 새벽 별을 보며 느낀 새로운 미래에 대한 희망

   ▶ 특징

     ① 수미상관식 구조로 시상을 전개함.

     ② 비유법을 사용하여 화자의 정서를 형상화함.

     ③ 시간적 배경이 상징성을 지님.
\\\

 

곽재구 『우리가 사랑한 1초들』

지상의 두렵고 쓸쓸한 영혼들에게 바치는 현자의 노래

 

 

 

2009년 7월, 시인 곽재구는 순천대학교 문예창작과에서의 시 강의를 잠시 멈추고 타고르의 고향인 산티니케탄으로 떠난다. 그리고 2010년 12월 28일까지 540일 동안, 그는 산티니케탄에 체류하며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고 여행을 한다.

 

2000년대 최고 베스트셀러 중 하나였던 『포구기행』이후 시인은 여러 작가들이 참여하는 앤솔로지에 한 편씩 글을 발표하기도 하고, 동화를 쓰거나 신문 칼럼을 연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에 발표하는 신작 산문집 『우리가 사랑한 1초들』은 어느 지면에도 발표한 적이 없는 ‘전작’이며, 사실 책의 출간에 대한 의식도 없이 ‘필연적으로 쓰여진’ 글들을 묶은 것이다.

 

이 산문집의 배경은 비슈와바라티 대학교가 자리한 한적인 시골 마을인 산티니케탄이지만, 그것은 여느 여행기나 인도에 관한 잠언집들과는 출발점부터 차이가 있다. 시인에게 그것은 “오래 묵힌 마음의 여행”이었다.

 

“하루 24시간 86,400초를 다 기억하고 싶었던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스무 살 때였지요. 1970년대 중반이었고 삶의 현실을 척박했습니다. 정치적 피폐함이 극에 이른 시간 속에서, 내가 좋아하는 타고르의 시편들을 읽는 순간들은 작은 천국이었지요.

 

시가 있어서 행복했고 타고르가 있어서 지상 위의 어떤 길이건 끝없이 걸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매일 아침 눈을 떠 처음 쓴 시의 한 줄을 타고르에게 보여주고 싶었지요.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이 그의 빛나는 눈빛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쓴 허름한 시들은 그의 형형한 눈빛의 체에 걸러져 단 한 줄도 지상에 남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요. 그렇지만 언젠가는 그의 성긴 체에도 걸러지지 않고 남을 시를 꼭 써서 보여주고 싶은 마음은 깊었습니다. 이봐요, 타고르… 지금 얼른 내게 와요. 내 시 좀 봐줘요…”

 

시인이 인도의 유명한 성지도 장엄한 풍광이 사람을 압도하는 여행지도 아닌 산티니케탄으로 떠난 것은 바로 40년 동안 꿈꿔왔던 ‘만남’을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평화의 마을’이라는 뜻을 가진 산티니케탄은 타고르가 작가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기 전까지는 평범한 농촌 마을이었다.

 

타고르는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당대 최고의 교육을 받은 엘리트였지만, 계급과 빈부 격차를 타파하기 위한 혁명적 이상을 품고 가문의 본향인 산티니케탄에 ‘아마르 꾸띠르(나의 오두막집)’라는 농촌 공동체를 세운다.

오늘날까지도 이러한 흔적은 남아 있지만, 산티니케탄에서 타고르의 영향은 물질적인 것이라기보다 내면적인 것, 사람들의 삶 속에 깊이 파고들어 전해지는 ‘정신’에 가깝다.

타고르에 대한 애정과 열망에서 출발한 시인의 산티니케탄 체류는 가장 소박하지만 가장 완벽한 삶의 방식을 간직한 산티 사람들과 교류하고 공감하면서 스스로를 사랑하고 이해하는 열반의 순간들을 선사한다.

그것은 지금 우리 곁을 스쳐 가는 1초 1초들을 사랑하는 지혜를 터득함으로써 앞으로 맞이하고픈 행복하고 귀한 1초를 불러들이는 제의와 같은 시간들이다.

 

1. 우리가 별과 별 사이를 여행할 때| 사람이 하나의 별이라면

 

시인이 묘사하는 산티니케탄은 우리나라의 1960년대 농촌과 비슷한 풍경이다. 초가집들, 뙤약볕 아래 논에서 일하는 농부들, 우물 긷는 아낙네, 흙먼지 이는 시골길 위로 자전거 타고 가는 아가씨, 소와 개와 염소들, 맨발로 뛰어다니는 아이들, 저녁마다 전깃불이 나가면 크리스마스트리처럼 반짝이는 반딧불들…

신을 섬기며 농사짓고 아이를 기르고 정을 나누며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산티 사람들은 욕심도 경쟁도 고통도 절망도 알지 못한다. 시인은 이들을 ‘별’이라 일컫는다. 1부에서는 그 별과 같은 사람들과 얽힌 ‘인연’에 관한 이야기들이 나온다.

 

시인은 벼룩시장에서 어린 소녀에게 10루피를 주고 종이배를 산다. 10루피는 한화로 250원 정도지만 인도에서는 한 끼 식사를 배불리 할 수 있는 돈이다. 따라서 아이가 만든 종이배를 10루피를 주고 사는 것은 누가 봐도 실없는 짓이다.

그런데 시인은 소녀의 종이배를 보며 타고르의 시「종이배」를 떠올리고 소녀를 타고르 시인이 보낸 선물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종이배를 사 가지고 와서 마을 사람들에게 자랑을 하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한 아가씨가 시인에게 말을 건넨다. 생명의 물이라는 뜻의 암리타라는 이름의 아가씨는 시인이 타고르를 사랑하여 산티니케탄에 왔다는 얘기에 감동한다. 그리고 타고르의 시 중에 가장 아름다운 「황금빛 배」라는 시를 꼭 읽어보라며 가르쳐준다. 소녀의 종이배가 이어준 또 하나의 인연이다. (「종이배를 파는 아이가 있었네 1, 2」)

 

어느 날은 짜이 가게 앞을 지나는데 한 인도 아가씨가 그를 보고 미소 지으며 안으로 들어오라 하더니 차를 대접한다. 영문을 모르고 차를 얻어 마신 날 밤, 옥상에 올라가 별을 보며 누워 있다가 시인은 벌떡 일어난다.

시인은 8년 전에도 산티니케탄에 며칠 머문 적이 있었다. 당시 그는 맨발의 어린 소녀에게 신발값을 주었다. 신발을 사주고 싶었지만, 그 신발이 해지면 다시 신발을 사 신을 수 없는 아이의 처지를 생각해 돈으로 주었던 것이다.

짜이 가게의 처녀는 바로 8년 전의 맨발의 아이였다. 시인은 잊었는데, 론디니라는 이름의 그 소녀는 아직도 그를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인연」)

 

아버지가 타고르 시인의 주방장이었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찻집 주인 ‘깔루다’ 이야기, 인도로 유학 온 세계 각국의 젊은이들과의 교류, 비슈와바라티 대학 영어 강사이자 타고르 문학을 영역(英譯)하여 책으로 펴낸 브라만 계급 처녀인 투툴 등등, 신분과 나이와 빈부와 국적을 초월한 어울림의 시간들을 시인은 ‘별과 별 사이의 여행’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부겐빌레아」라는 시 속에서 이러한 사람과 사람의 만남, 소중하고 따뜻한 1초 1초가 쌓여 이루어지는 우리의 삶은 별들이 모여 은하수를 이루는 시간이 된다. (「우리가 별과 별 사이를 여행할 때」)

 

2.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릭샤 스탠드| 행복을 찾는 가장 빠른 길

 

산티니케탄에 체류하는 동안 시인의 일상을 늘 함께한 사람들이 있다. 바로 ‘릭샤’라 불리는 자전거 택시를 모는 ‘릭샤왈라’들이다. 시인은 산티니케탄의 모든 릭샤왈라들의 이름을 한 번씩 다 불러보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처음 보는 릭샤왈라에겐 꼭 이름을 묻는다. 그의 이런 버릇은 산티의 릭샤왈라들 사이에 금세 소문이 퍼졌고, 어느 순간 먼저 다가와 자기 이름을 얘기하는 릭샤왈라들이 생겨난다.

 

오십대인 수보르는 릭샤도 새것이고 늘 하얀 양말에 깨끗한 구두를 신고 핸드폰도 들고 다닌다. 못생기고 허름한 릭샤를 일부러 골라 타는 시인과는 친해질 일이 없는 릭샤왈라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시인에게 다가와 “내 이름은 수보르야”라고 말했고 시인은 그런 그가 마음에 들었다. 수보르는 릭샤를 몰면서 마주치는 사람들, 개들, 풀들, 꽃들 모두에게 “안녕 친구!”라고 인사한다.

시인에게 산티의 수많은 꽃이름들을 벵골어로 가르쳐준 것도 바로 수보르다. 꽃을 사랑하는 시인에게 수보르는 ‘꽃 선생님’이자 시인보다 더 시인의 영혼을 가진 릭샤왈라다. (「수보르, 나의 시 선생님」)

 

다보스는 릭샤왈라이자 ‘노래하는 집시’인 바울이기도 하다. 시인은 다보스에게 한 차례 반소리(피리) 레슨을 받았다. 소리를 제대로 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그 후로 시인은 다보스를 만나면 언제나 깍듯하게 “자이구루!(너의 스승에게 경배를!)”라고 인사한다.

어느 날 시인은 산티니케탄에서도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삼바티 마을에 들렀다가 우연히 다보스를 만난다. 다보스는 시인을 릭샤에 태우더니 동네 안의 아주 좁은 골목길로 데려간다. 영문을 몰랐지만 시인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릭샤왈라가 이끄는 대로 따른다.

동네 안쪽엔 뜻밖에도 연꽃이 만발한 연못이 있다. 다보스는 시인에게 그 연꽃 호수를 보여주려 했던 것이다.

 

시인은 산티니케탄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생각할지 먼저 결정하지 않는다. 그저 마음을 열고 사람들과 만나고 그들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다 보면, 어떤 이방인도 보지 못하는 진짜 삶의 모습과 마주치게 된다.

거기서 시인은 생의 가장 행복하고 빛나는 순간을 체험하고 시를 발견하는 것이다. (「연꽃 만발한 삼바티 마을에 가다」)

 

3. 마시 이야기| 일상 속 소중한 1초들

 

마시는 ‘가정부’를 뜻하는 벵골어다. 인도의 중산층 이상의 가정에선 마시를 고용한다. 밥 하는 마시와 청소하는 마시가 따로 있고 정원사와 운전수가 따로 있다. 마시의 존재는 인도가 계급사회이자 빈부격차가 극심한 나라임을 실감하게 하는 대목이다.

 

인도에 정착한 시인은 집을 구하면서 그 집에서 일하던 마시까지 물려받게 된다. 그 마시들을 고용하지 않으면 그들은 다른 집에 일자리를 구해야 했기에 시인은 졸지에 2명의 마시를 부려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마시 월급은 한 달에 2만원. 두 명을 쓰더라도 경제적인 부담은 없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다른 곳에서 생긴다. 마시들과 인간적으로 소통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정해진 일만 제대로 한다면 출퇴근 시간은 자유롭게 하라’고 배려했더니 그다음 날부터 마시들이 너무 늦게 나와 너무 일찍 돌아가고, 거짓말을 일삼고, 가끔은 아예 안 나오기도 한다.

의사소통이 자유롭지 못한 시인은 혼자 고민하고 실망하고 의심하고 속을 끓이다가 이웃 유학생들에게 상담을 청하기에 이른다.

 

산티에서의 일상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마시 이야기」에는 이러한 풍경들이 세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만만한 주인’과 ‘만만치 않은 마시들’의 줄다리기는 때론 우스꽝스럽고 때론 가슴 졸이게 하고 때론 안타깝거나 화가 나기도 하지만 결국은 감동적인 소통에 이른다.

우리가 사랑해야 할 것에는 행복과 기쁨은 물론이고 갈등과 반목을 극복해나가는 과정 또한 포함된다는 평범한 지혜를 엿볼 수 있는 글편들이다.

 

4. 가난한 신과 행복한 사진 찍기| 지상이 극락인 시간이 여기에

 

벵골어를 공부하여 타고르의 시들을 한국어로 옮기는 것이 시인이 1년 6개월 산티니케탄 체류의 중심 과제였지만, 산티 사람들과 지내다 보니 작가로서 그곳의 사정을 기록하고 싶은 욕심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처음 산티니케탄에 들어오던 날이 생각나는군요. 공항에서 차를 타고 오는데 아스팔트 도로가 녹아 타는 듯, 유리 징인 듯 보였습니다. 이곳은 2월 말이면 이미 40도가 넘습니다. 연일 48도를 넘나드는 초열지옥입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덥지만, 그래서 꼭 한 가지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해 떠오르기 직전부터 낮 12시까지는 글 쓰는 재미로 지내는 거지요.”

 

4부에서는 이 정주의 기간 동안 터득하게 된 삶의 지혜들에 관한 글이 주를 이룬다.

 

시인은 매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산티의 노천카페 거리인 ‘라딴빨리’에 나간다. 반얀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그늘 아래 앉아 짜이를 마시며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다.

그가 이 나무 아래 앉아 있는 데는 까닭이 있다. 맞은편에 ‘달빛의 냄새’가 난다는 ‘조전건다’ 나무가 서 있기 때문이다. 어린 소녀에게 종이배를 산 날 말을 걸어온 암리타라는 아가씨가 알려준 꽃나무였다.

그는 1년 동안 조전건다 나무를 지켜보며 꽃이 피기를 기다리고, 2010년 5월, 마침내 찬란한 빛의 축제와도 같은 광경을 목도한다. (「조전건다 꽃이 필 때」 1, 2)

 

한편, 인도에 체류하면서 시인은 처음으로 만년필 대신 노트북을 사용하여 글을 쓰게 된다. 그런데 키보드 자판 하나가 고장 나서 글을 쓸 수 없게 되자 그것을 고치기 위해 산티에서 차로 4시간 거리인 콜카타까지 두 번을 왕복하게 된다.

처음에는 컴퓨터 수리를 맡기기 위해, 그다음은 수리된 컴퓨터를 찾기 위해서. 기차를 타고 택시를 타고 걷고 뛰며 콜카타의 교통지옥을 뚫고 밤 열차에 몸을 싣고 산티로 돌아오는 험난한 여정을 시인은 담담하게 ‘소풍’이라고 말한다. 느리게 사는 지혜를 터득한 현자의 성찰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고장 난 노트북과 콜카타로 소풍 가기」)

 

또한 시인은 인도에서 10루피로 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을 헤아리다가 10루피가 “세상에서 가장 착하고 아름다운 돈”임을 깨닫고, 시간 약속에 대한 개념이 없는 인도인 가족과 영화를 보러 간 날의 속 터지는 이야기를 적으면서 “생이 이러한 초대의 연속이라면 싶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마음의 넓이를 얻는다.

 

『우리가 사랑한 1초들』은 시인 곽재구가 “산티니케탄에서 만난 시간의 향기에 관한 이야기”이자, 그가 평생 꿈꿔왔던 “별과 별 사이의 여행”의 기록이다. 시인이 산티에서 만난 범박한 생들은 때로는 아름답고 때로는 힘겹고 아프지만 그 모두가 경이롭다. 한 생이 살아온 시간의 흔적과 고단의 자취는 시인의 눈을 통해 별다른 수사나 꾸밈이 없이도 한 편의 긴 서정시가 된다.

 

“대저 시가 무엇인지요? 그 또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 아니겠는지요. 우리 곁으로 다가오는 생의 1초들을 사랑하는 일 아니겠는지요. 이기적이고 모순된 삶 속에서 우리들이 꿈꾼 가장 어질고 빛나는 이미지들을 우리들의 시간 속에 반짝 펼쳐 보이는 것 아니겠는지요.” _책머리에 중에서

 

∵책 속에서

 

크와이의 벼룩시장에서 만난 어린 소녀는 색색의 그림이 그려진 일곱 개의 종이배를 팔았습니다. 우리의 유년 시절이 종이배를 접었고 다시 태어날 세대들도 종이배를 접어 시냇물에 띄울 겁니다. 허름한 영혼이지만 우리 모두 작은 종이배가 되어 인생의 강물 속으로 흘러들어가겠지요. (19쪽)

 

운이 좋은 날에는 한 줄기 바람이 지나가는 때도 있어서 나무 의자에 앉아 별을 보노라면 폭염의 공포에서 잠시 벗어날 수도 있습니다. 반딧불이들이 반짝반짝 날아가는 것을 바라보며 어둠 속에 펼쳐진 모든 풍경들에 연민이 이는 것을 느낍니다. 길, 나무, 집, 숲의 새들과 원숭이들, 오늘도 다들 열심히 제 몫의 삶을 살아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 위대한 일이 아닐는지요. (37쪽)

 

이 학교는 지상에서 네 번째 아름다운 학교입니다. 이곳이 지금까지 내가 지상에서 본 가장 아름다운 학교지만 이보다 더 아름다운 학교가 이 세상 어딘가에 세 개쯤은 더 있어도 좋겠습니다. 아름다운 학교에서 자란 아이들이 만든 세상 또한 아름다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47쪽)

 

꽃을 꺾어가지고 놀던 아이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 꽃을 그냥 버리기도 했습니다. 나는 그 꽃을 주워 들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한 아름 연꽃을 안고 릭샤를 탑니다.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이 다 손을 흔들어줍니다. 나는 그들에게 연꽃 송이들을 흔들어줍니다. 연꽃 한 아름을 들었을 뿐인데 사람들이 다들 행복해하는군요. (135쪽)

 

당신과 우리 모두 기다리며 한세상을 살아왔지요. 기다림이 없는 시간이 바로 절망의 시간 아닌지요. 우리 모두 부지런히 살아요. 몸 안의 강변길에 늘어선 꽃나무들이 달빛의 냄새를 흩뿌릴 때까지. (278쪽)

===============================

 

우전 해수욕장의 곽재구 시비

 

 

 

 

 

 

새벽 편지                                         

 

새벽에 깨어나

반짝이는 별을 보고 있으면

이 세상 깊은 어디에 마르지 않는

사랑의 샘 하나 출렁이고 있을 것만 같다

고통과 쓰라림과 목마름의 정령들은 잠들고

눈시울이 붉어진 인간의 혼들만 깜박이는

아무도 모르는 고요한 그 시각에

아름다움은 새벽의 창을 열고

우리들 가슴의 깊숙한 뜨거움과 만난다

다시 고통하는 법을 익히기 시작해야겠다

이제 밝아올 아침의 자유로운 새소리를 듣기 위하여

따스한 햇살과 바람의 라일락 꽃향기를 맡기 위하여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를 사랑한다는 한마디

새벽편지를 쓰기 위하여

새벽에 깨어나

반짝이는 별을 보고 있으면

이 세상 깊은 어디에 마르지 않는

희망의 샘 하나 출렁이고 있을 것만 같다

 

 

 

 

사평역(沙平驛)에서                             

-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히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 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바람이 좋은 저녁                                         

 

내가 책을 읽는 동안
새들은 하늘을 날아다니고
바람은 내 어깨 위에
자그만 그물침대 하나를 매답니다

마침
내 곁을 지나가는 시간들이라면
누구든지 그 침대에서
푹 쉬어갈 수 있지요

그 중에 어린 시간 하나는
나와 함께 책을 읽다가
성급한 마음에 나보다도 먼저
책장을 넘기기도 하지요.

그럴 때 나는
잠시 허공을 바라보다
바람이 좋은 저녁이군, 라고 말합니다
어떤 어린 시간 하나가
내 어깨 위에서
깔깔대고 웃다가 눈물 한 방울
툭 떨구는 줄도 모르고

 

 

 

소나기                                         

 

저물 무렵 소나기를 만난 사람들은 알지

누군가를 고즈넉이 그리워하며 
미루나무 아래 앉아 다리쉼을 하다가

그때 쏟아지는 소나기를 바라본 사람들은 알지

 

자신을 속인다는 것이

얼마나 참기 힘든 격정이라는 것을

사랑하는 이를 속인다는 것이

얼마나 참기 힘든 분노라는 것을 

그 소나기에 가슴을 적신 사람이라면 알지

자신을 속이고 사랑하는 이를 속이는 것이

또한 얼마나 쓸쓸한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마음                                         

 

아침 저녁
방을 닦습니다


강바람이 쌏인 구석구석이며
흙 냄새가 솔솔 풍기는 벽도 닦습니다


그러나 매일 가장 열심히 닦는 곳은
꼭 한군데입니다


작은 창 틈 사이로 아침 햇살이 떨어지는 그곳


그곳에서 나는 움켜진 걸레 위에
내 가장 순결한 언어의 숨결들을 쏟아 붓습니다


언젠가 당신이 찾아와 앉을 그 자리


언제나 비어 있지만
언제나 꽉차 있는 빛나는 자리입니다.

 

 

 

희망을 위하여                                         

 

너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굳게 껴안은 두 팔을 놓지 않으리 

너를 향하는 뜨거운 마음이 

두터운 네 등 위에 내려앉는 

겨울날의 송이눈처럼 너를 포근하게 

감싸 껴안을 수 있다면 

너를 생각하는 마음이 더욱 깊어져 

네 곁에 누울 수 없는 내 마음조차도 더욱 

편안하여 어머니의 무릎잠처럼 

고요하게 나를 누울 수 있다면 

그러나 결코 잠들지 않으리 

두 눈을 뜨고 어둠 속을 걸어오는 

한 세상의 슬픔을 보리 

네게로 가는 마음의 길이 굽어져 

오늘은 그 끝이 보이지 않더라도 

네게로 가는 불빛 잃은 발걸음들이 

어두워진 들판을 이리의 목소리로 울부짖을지라도 

너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굳게 껴안은 두 손을 풀지 않으리. 

 

 

 

복종                                         

 

밥을 먹다가

바로 앞 당신 생각으로

밥알 몇 개를 흘렸답니다

왜 흘려요?

당신이 내게 물었지요

난 속으로 가만히 대답했답니다

당신이 주워 먹으라 하신다면 얼른

주워 먹으려구요

 

 


 

그리운 폭우                                         

 

어젠 참 많은 비가 왔습니다
강물이 불어 강폭이 두 배로 더 넓어졌답니다

내 낡은 나룻배는 금세라도 줄이 끊길 듯 흔들렸지요
그런데도 난 나룻배에 올라탔답니다
내 낡은 나룻배는 흙탕물 속으로 달렸습니다
아, 참 한 가지 빠트린 게 있습니다
내 나룻배의 뱃머리는 지금 온통 칡꽃으로 뒤덮여 있습니다
폭우 속에서 나는 종일 꽃장식을 했답니다
날이 새면 내 낡은 나룻배는 어딘가에 닿아 있겠지요
당신을 향한 내 그리움의 지름길은 얼마나 멀고 또
험한지........
사랑하는 이여.
어느 河上엔가 칡꽃으로 뒤덮인 한 나룻배가 얹혀 있거든
한 그리움의 폭우가 이 지상 어딘가에 있었노라
가만히 눈감아줘요.

 

 

 

 

또다른 사랑                                         

 

보다
자유스러워지기 
위하여
꽃이피고

보다 
자유스러워지기 
위하여
밥을 먹는다

함께 살아갈 사람들
세상 가득한데
또 다른 무슨 사랑이 필요있으리
문득 별 하나 뽑아 하늘에 던지면
쨍 하고 가을이 운다

 

 

기다림                                         

 

이른 새벽
강으로 나가는 내 발걸음에는
아직도 달콤한 잠의 향기가 묻어 있습니다

그럴 때면 나는
산자락을 타고 내려온 바람 중
눈빛 초롱하고 허리통 굵은 몇 올을 끌어다
눈에 생채기가 날 만큼 부벼댑니다

지난밤,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 낡은 나룻배는 강둑에 매인 채 출렁이고
작은 물새 두 마리가 해 뜨는 쪽을 향하여
힘차게 날아갑니다

사랑하는 이여
설령 당신이 이 나루터를 
영원히 찾아오지 않는다 해도
내 기다림은 끝나지 않습니다

설레이는 물살처럼 내 마음 
설레이고 또 설레입니다. 

 

 

 

가거도 편지                                         

 

한 바다가 있었네 
햇살은 한없이 맑고 투명하여 
천길 바다의 속살을 드리우고 
달디단 바람 삼백예순 날 불어 
나무들의 춤은 더없이 포근했네 

그 바다 한가운데 
삶이 그리운 사람들 모여 살았네 
더러는 후박나무 숲그늘 새 
순금빛 새 울음소리를 엮기도 하고 
더러는 먼 바다에 나가 
멸치잡이 노래로 한세상 시름을 달래기도 하다가 
밤이 되면 사랑하는 사람들 한 몸 되어 
눈부신 바다의 아이를 낳았네 

수평선 멀리 반짝이는 
네온사인 불빛 같은 건 몰라 
누가 국회의원이 되고 
누가 골프장 주인이 되고 
누가 벤츠 자동차를 타고 
그런 신기루 같은 이야기는 정녕 몰라 

지아비는 지어미의 
물질 휘파람소리에 가슴이 더워지고 
지어미는 지아비의 
고기그물 끌어올리는 튼튼한 근육을 
일곱물 달빛 하나하나에 
새길 수 있다네 

길 떠난 세상의 새들 
한 번은 머물러 새끼를 치고 싶은 곳 
자유보다 소중한 사랑을 꿈꾸는 곳 
그곳에서 사람들이 살아간다네 
수수 천년 옛이야기처럼 철썩철썩 살아간다네.

 

 

 

 

따뜻한 편지                                         

 

당신이 보낸 편지는
언제나 따뜻합니다
물푸레나무가 그려진
10전짜리 우표 한 장도 붙어 있지 않고
보낸 이와 받는 이도 없는
그래서 밤 새워 답장을 쓸 필요도 없는
그 편지가 날마다 내게 옵니다

겉봉을 여는 순간
잇꽃으로 물들인
지상의 시간이 우수수 쏟아집니다
그럴 때면 내게 남은
모국어의 추억들이 얼마나 흉칙한지요

 

눈이 오고
꽃이 피고
당신의 편지는 끊일 날 없는 데 
버리지 못한 지상의 꿈들로
세상 밖을 떠도는 한 사내의
퀭한 눈빛 하나 있습니다

 

 

 

첫눈 오는 날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하늘의 별을 
몇 섬이고 따올 수 있지

노래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새들이 꾸는 겨울 꿈 같은 건
신비하지도 않아

첫눈 오는 날
당산 전철역 오르는 계단 위에서 서서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들
가슴속에 촛불 하나씩 켜들고
허공 속으로 지친 발걸음 옮기는 사람들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다닥다닥 뒤엉긴 이웃들의 슬픔 새로
순금 빛 강물 하나 흐른다네

노래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이 세상 모든 고통의 알몸들이
사과꽃 향기를 날린다네

 

 

 

 

바닥에서도 아름답게                                         

 

사람이 사람을 
사랑할 날은 올 수 있을까
미워하지도 슬퍼하지도 않은 채
그리워진 서로의 마음 위에
물먹은 풀 꽃 한 송이
방싯 꽂아 줄 수 있을까
칡꽃이 지는 섬진강 어디거나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한강변 어디거나
흩어져 사는 사람들의 모래알이 아름다워
뜨거워진 마음으로 이 땅 위에
사랑의 입술을 찍을 날들은
햇살을 햇살이라고 말하며
희망을 희망이라고 속삭이며
마음의 정겨움도 무시로 나누어
다시 사랑의 언어로 서로의 가슴에 뜬 
무지개 꽃무지를 볼 수 있을까
미장이 토수 배관공 약장수
간호원 선생님 회사원 박사 안내양
술꾼 의사 또끼 나팔꽃 지명수배자의 아내
창녀 포졸 대통령이 함께 뽀뽀를 하며
서로 삿대질을 하며
야 임마 너 너무 아름다워
너 너무 사랑스러워 박치기를 하며
한 송이의 꽃으로 무지개로 종소리로
우리 눈 뜨고 보는 하늘에 피어날 수 있을까

 

 

 

 

두 사람                                         

 

자전거 두 대가 나란히 꽃길을 지나갑니다
바퀴살에 걸린 꽃향기들이 길 위에
떨어져 반짝입니다

나 그들을 가만히 불러 세웠습니다
내가 아는 하늘의 길 하나
그들에게 일러주고 싶었습니다

여보시오 여보시오
불러놓고 그들의 눈빛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습니다

내가 아는 길보다 더 아름다운 길을 
그들이 알고 있을 것만 같아서
불러서 세워놓고 아무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천 일이 지나면                                         

 

  오늘 내가 한 편의 시를 쓰고 
  내일 두 편 모레 세 편 쓴다면 
  천 일 후엔 천 편의 시를 쓸 수 있을까 
  그때 나는 말하리라 
  이 아름다운 땅에 태어나 
  시간이 흐른다고 써야 할 시들을 쓰지 못한다면 
  사랑하는 사람들 또한 시간이 흐른다고 
  사랑한다 말하지 못하잖겠는가 
  써야 할 시들은 많은데 
  바람들은 맑은 햇살을 뿌리며 
  응달의 강기슭을 돌아가는데 
  울먹인 가슴 녹이며 
  이제는 고요하게 지켜보아야 할 
  두려움 모를 그리움만 들판 가득 쌓였는데 
  천 일이 지나면 혹시 몰라 
  이 아름다운 나라에 태어나 
  내가 하루 천 편의 시를 쓰지 못해 쓰러질 때 
  그때 말 못할 그리움은 밀려와서 
  내 대신 쓰지 못한 그리움의 시들 
  가을바람으로나 흔들려 
  내 사랑하는 사람들 귓속에 
  불어넣어주고 있을지. 

 

 

 

겨울의 춤                                         

 

첫눈이 오기 전에
추억의 창문을 손질해야겠다
지난 계절 쌓인 허무와 슬픔
먼지처럼 훌훌 털어내고
삐걱이는 창틀 가장자리에
기다림의 새 못을 쳐야겠다
무의미하게 드리워진 낡은 커텐을 걷어내고
영하의 칼바람에도 스러지지 않는
작은 호롱불 하나 밝혀두어야겠다
그리고 춤을 익혀야겠다
바람에 들판의 갈대들이 서걱이듯
새들의 목소리가 숲속에 흩날리듯
차갑고도 빛나는 겨울의 춤을 익혀야겠다 
바라보면 세상은 아름다운 곳
뜨거운 사랑과 노동과 혁명과 감동이
함께 어울려 새 세상의 진보를 꿈꾸는 곳
끌어 안으면 겨울은 오히려 따뜻한 것
한 칸 구들의 온기와 희망으로
식구들의 긴 겨울잠을 덥힐 수 있는 것
그러므로 채찍처럼 달려드는
겨울의 추억은 소중한 것
쓰리고 아프고 멍들고 얼얼한
겨울의 기다림은 아름다운 것
첫눈이 내리기 전에
추억의 창문을 열어 젖혀야겠다
죽은 새소리 뒹구는 벌판에서
새봄을 기다리는
초록빛 춤을 추어야겠다

 

 

 

나무                                         

 

숲속에는 
내가 잘아는 
나무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 나무들 만나러 
날마다 숲속으로 들어갑니다 
제일 키 큰 나무와 
제일 키 작은 나무에게 
나는 차례로 인사를 합니다. 
먼 훗날 당신도 
이 숲길로 오겠지요 
내가 동무 삼은 나무들을 보며 
그때 당신은 말할 겁니다 
이렇게 등이 굽지 않은 
言語(언어)들은 처음 보겠구나 
이렇게 사납지 않은 
마음의 길들은 처음 보겠구나

 

 

 

 

깡통                                         

 

아이슬랜드에 가면
일주일에 한 번
TV가 나오지 않는 날 있단다
매주 목요일에는
국민들이 독서와 음악과
야외 생활을 즐길 수 있도록
국영 TV가 앞장을 서
세심한 문화 정책을 편단다
하루의 노동을 끝내고 돌아와 앉은
우리나라 TV에는
이제 갓 열여덟 소녀 가수가
선정적 율동으로 오늘밤을 노래하는데
스포츠 강국 선발 중진국 포스트모더니즘 
끝없이 황홀하게 이어지는데
재벌 2세와 유학 나온 패션 디자이너의
사랑 이야기가 펼쳐지는
주말 연속극에 넋 팔고 있으면
아아 언젠가 우리는
깡통이 될지도 몰라
함부로 짓밟히고 발길에 채여도
아무 말 못 하고 허공으로 날아가는
주민증 번호와 제조 일자가 나란히 적힌
찌그러진 깡통이 될지도 몰라 
살아야 할 시간들 아직 멀리 남았는데
밤하늘 별들 아름답게 빛나는데. 

 


 

받들어 꽃                                         


국군의 날 행사가 끝나고
아이들이 아파트 입구에 모여
전쟁놀이를 한다
장난감 비행기 전차 항공모함
아이들은 저희들 나이보다 많은 수의
장난감 무기들을 횡대로 늘어 놓고
에잇 기관총 받아라 수류탄 받아라
미사일 받아라 끝내는 좋다 원자폭탄 받아라
무서운 줄 모르고
서로가 침략자가 되어 전쟁놀이를 한다
한참 그렇게 바라보고 서 있으니
아뿔싸 힘이 센 304호실 아이가
303호실 아이의 탱크를 짓누르고
짓눌린 303호실 아이가 기관총을 들고
부동자세로 받들어 총을 한다
아이들 전쟁의 클라이막스가
받들어 총에 있음을 우리가 알지 못했듯이
아버지의 슬픔의 클라이막스가
받들어 총에 있음을 아이들은 알지 못한다
떠들면서 따라오는 아이들에게
아이스크림과 학용품 안 아름을 골라 주며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 앞에서
나는 얘기했다
아름답고 힘 있는 것은 총이 아니란다
아름답고 소중한 것은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과 별과
나무와 바람과 새 그리고
우리들 사이에서 늘 피어나는
한 송이 꽃과 같은 것이란다
아파트 화단에 피어난 과꽃
한 송이를 꺾어 들며 나는 조용히 얘기했다
그리고는 그 꽃을 향하여
낮고 튼튼한 목소리로
받들어 꽃
하고 경례를 했다
받들어 꽃 받들어 꽃 받들어 꽃
시키지도 않은 아이들의 경례 소리가
과꽃이 지는 아파트 단지를 쩌렁쩌렁 흔들었다

 

 


 

 

 
 
불어오는 바람 한 줄기,
흔들리는 나뭇잎,
가로등의 어슴푸레한 불빛,
사랑하는 사람의 전화 목소리조차
마음의 물살 위에 파문을 일으킨다.
 
외로움이 깊어질 때 사람들은
그 외로움을 표현하는 자신만의 방식이 있다.
어떤 사람은 밤새워 술을 마시고
어떤 사람은 빈 술병을 보며 운다.
 
지나간 시절의 유행가를
몽땅 끄집어 내 부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래전에 연락이 끊긴 이의 집에 전화를 걸어
혼곤히 잠든 그의 꿈을 흔들어 놓기도 한다.
 
아예 길가의 전신주를 동무 삼아 밤새워 씨름하다
새벽녘에 한움큼의 오물덩이를 남기고
어디론가 떠나는 이도 있다.
 
나는 인생이 아름다운 것은
우리들 삶의 골목골목에 예정도 없이 찾아오는
외로움이 있기 때문이라고 믿는 사람이다.
 
외로울 때가 좋은 것이다.
물론 외로움이 찾아올 때
그것을 충분히 견뎌내며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다들 아파하고 방황한다.
이 점 사랑이 찾아올 때와는 확연히 다르다.
 
사랑이 찾아올 때......
그 순간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행복해진다.
길을 걷다 까닭 없이 웃고,
하늘을 보면 한없이 푸른빛에 가슴 설레고,
엘리베이터 안에서 만난 모르는 이에게도
'안녕' 하고 따뜻한 인사를 한다.
 
사랑이 찾아올 때,
사람들은 호젓이 기뻐하며
자신에게 찾아온 삶의 시간들을
충분히 의미 깊은 것으로 받아들인다.
 
외로움이 찾아올 때,
사실은 그 순간이 인생에 있어
사랑이 찾아올 때보다 귀한 시간이다.
 
쓴 외로움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따라
한 인간의 삶의 깊이,
삶의 우아한 형상들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 곽재구의 포구기행 中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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