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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李箱과 그 사랑의 궤적 - 금홍, 연심, 변동림..."레몬 향기 맡고 싶소..."
2016년 01월 07일 00시 55분  조회:7572  추천:0  작성자: 죽림
시인 이상, 화가 김환기, 그리고 변동림과 김향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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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이상과 화가 김환기의 아내였던 수필가 김향안(본명 변동림) 여사가 2004년 2월 29일 88세로 뉴욕 자택에서 눈을 감았다. 장례식은 지난 3일 아들 김화영씨등 친지 3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고, 김여사의 유해는 뉴욕 근교 김환기화백의 묘소옆에 묻혔다.

경기고녀와 이화여전 영문과 출신인 김여사는 1936년 18세 문학소녀시절에 오빠인 화가 구본웅(1906~1953)의 친구였던 천재시인 이상(1910~1937)을 만나 짧은 결혼생활을 거쳐 다음해 사별했다.

 

구본웅은 김향안의 오빠가 아니라,

김향안(본명 변동림)의 이복언니 변동숙의 의붓아들이다

수화 김환기(1913~1974)와는 1944년 결혼후 56년 파리를 거쳐 60년대 이후 말년까지 뉴욕에 체류했다. 그는 파리 체류시절 미술 평론을 공부했으며, 김화백의 20주기인 94년 김환기전기‘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다’를 펴냈고, 95년엔 수필집 ‘카페와 참종이’를 출간했다.

임종을 지켰던 첫 남편 이상에 대해 김여사는 86년 ‘문학사상’에‘재능있는 시인과 문학소녀의 만남’이었다며

, ‘그는 가장 천재적인 황홀한 일생을 마쳤다. 그가 살다간 27년은 천재가 완성되어 소멸되는 충분한 시간이다… 천재는 또 미완성이다’라고 밝힌 바 있다.

한편 일본 시인의 소개로 처음 만난 김화백은 당시 서울대 미대, 홍익대 미대교수였으며, 결혼후 두사람은 파리와 뉴욕에서 줄곧 이국생활을 했다. 74년 김화백이 뉴욕서 임종한 뒤에도 김여사는 그와 살던 뉴욕 아파트에 30년간 거주하며 1년에 한 두차례 서울을 찾았다.

김화백 사후 그의 유작과 유품을 관리해온 김여사는 지난 92년 11월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환기미술관을 건립, 기획전및 출판 세미나등의 사업을 펼쳐왔다. 90년대 환기미술관 관장직을 맡았던 미술평론가 오광수씨는 “고인은 남편인 수화의 작품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기리기 위한 집념과 일념이 남달랐다”며 회고했다. 환기미술관은 유화 300여점과 데생 500여점을 소장하고 있으며, 최근 ‘1965~68, 산월과 문자그림전’을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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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김환기의 뮤즈 김향안.

김향안-변동림-과 이상, 김환기의 이야기를 작품으로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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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기와 김향안의 결혼식

 

  김향안과 조르주 상드 / 맹난자

 

 

   나는 수필가 김향안을 수화(樹話) 김환기 화백의 아내요, 파리에서 미술을 공부하며 주로 파리를 소재로 글을 쓴 수필가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이상(李箱)의 아내였던 변동림이라니.
   두번째 각혈을 하게 된 이상은 1936년 여름, 변동림과 돈암동 흥천사에서 혼인했다. 생활은 궁핍했고 몸은 극도로 허약해진 상태에서 그는 도약을 위한 탈출로 일본행을 결심했다. 
   궂은 비가 축축히 내리는 플랫폼에서 결혼한 지 반년도 못된 어린 신부와 동생,그리고 몇 사람의 친구가 지켜보는 가운데 
헙수룩한 가방을 들고 그는 기차에 올랐다. 6개월 뒤,이상은 고국 땅 미아리 공동묘지로 와서 묻혔다. 그의 아내가 일본에 달려가 임종을 지켜보았다.
   화장된 남편의 유해를 안고 돌아온 변동림을 나는 남달리 기억하고 있었다. 그 뒤 필명 김향안으로 수필을 계속 써왔고
8년 뒤인 1944년 김환기와 결혼했다. 소르본느대학 및 에콜 드 루브르에서 미술사와 미술평론을 공부했고 김환기 그림의 지평을 전 세계로 넓힌 ‘김환기 미술’의 완성자이기도 했다. 천재 시인의 어린 아내로,그리고 천재 화가의 반려자로서 예술적 영감을 그들에게 전해 준 우리 예술계의 뮤즈였다. 


   이에 또 한 사람의 *뮤즈*가 떠오른다. 시인 알프레드 뮈세와 음악가 쇼팽을 사랑한 조르주 상드. 일찍이 자유 연애를 구가하며 문필가로 이름을 날린 이 남장 여인, 조르주 상드는 연하의 이 두 남성을 극진히 사랑하고 돌보았다. 상드와 사랑에 빠진 동안 쇼팽의 창작의 샘은 넘쳐흘렀다. 
   뮈세도 의욕적으로 글을 썼다. 하건만 그녀에게 버림받은 뒤 쇼팽의 건강은 급격히 나빠졌고 음악의 샘도 말라 버렸다. 
뮈세도 상드와의 어긋난 사랑으로 무절제한 퇴폐에 빠져 비참한 생애를 마감했다.
   몇 해 전, 공교롭게도 나는 뮈세와 쇼팽의 동상이 마주 바라다 보이는 페르 라셰즈 무덤 안에 서 있었다. 쇼팽의 죽은 나이는 39세. 뮈세는 44세였다. 상드와의 파국은 이 천재 예술가들의 심신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김향안 여사는 1992년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환기미술관을 건립하면서 마루 한쪽 한쪽에까지 환기 그림의 느낌과 결을 맞추느라고 애썼다는 일화는 우리를 감동스럽게 하고 있다. 88세의 천수를 누리다가 3월 3일 뉴욕 근교에 있는 김환기 화백의 무덤 옆으로 돌아간 김향안 여사. 30여년 만에 만난 수화와 다시는 이별 없는 ‘수향(樹鄕)산방’에서 영생의 복을 누리시기를 빈다.


    _ 맹난자 / 수필가,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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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화 김환기(樹話 金煥基 1913. 2. 27 ~ 1974. 7 25) 

'어디서 무엇이 되어다시 만나랴' 1970, 136x172, Oil on cotton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 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리


 

김광섭(이산 怡山 金光燮 1905.9.22 ~1977)  <저녁에> * 출전 : 겨울날(197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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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향안 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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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부터  이상, 박태원, 김소운)

 
 




 

내가 그다지 사랑하는 그대여

내 한평생 차마 그대를 잊을 수 없소이다.

내 차례에 못 옷 사랑인 줄 알면서도

나 혼자 꾸준히 생각하리라.

자 , 그러면 내내 어여쁘소서.

 

-李箱 '이런시' 중, 금홍에게 보낸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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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李箱)의 삶을 찾아서 
 큰아버지 집에서 양자 생활 
이상은 한일합방이 되던 해 가을 서울 사직동에서 이발소를 경영하던 아버지와 일자무학의 고아 출신인 어머니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김해경. 생가의 위치에 대하여는 알려진 바 없으나 궁내부 활판소에 근무하다 활판 기계에 손가락을 잘린 뒤 차렸다는 아버지의 이발소는 운영이 신통치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상은 두 살 때부터 부모와 떨어져 살아야 했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 데다가 큰아버지에게 대이을 아들이 없어 통인동 154번지의 큰아버지 집으로 옮겨 살았던 것이다. 총독부의 기술 관리였던 큰아버지 집에서의 생활은 윤택했지만 고종 때 증조부가 정3품 벼슬을 지낸 강릉 김씨 문중의 증손이 된 사실은 이상에게 적잖은 갈등을 안겨 준 듯하다. "나는왜드디어나와나의아버지와나의아버지의아버지와나의아버지와아버지의아버지노릇을한꺼번에하면서살아야하는것이냐"(<오감도> 제2호) 이상이 스물세 살 때까지 살았던 통인동 본가는 그가 <종생기>에서 "10대조의 고성"이라고 한 것처럼 꽤나 큰 한옥이었던 모양이다. 본채에 행랑채와 사랑채까지 딸린 300여 평의 넓은 집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집의 옛모습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광화문에서 사직터널 쪽으로 꺾어 300미터쯤 가다 보면 길 왼편에 상업은행 지점이 있다. 은행 왼편 골목길로 20미터쯤 들어간 곳의 오른편이 바로 이상이 이십일 년 간 살았던 통인동 154번지다. 이 집은 현재 십여 개의 필지로 분할되어 여러 채의 한옥들이 들어서 있고 길가 쪽으로는 인쇄소, 책 대여방, 열쇠 가게 등이 영업중이다. 이들 가게는 물론이고 골목안 복덕방에서도 이 일대가 일세를 풍미했던 천재 시인 이상의 옛 집터였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제비' 다방 : <날개>의 무대 
각혈을 할 정도로 병세가 악화된 이상은 총독부 기사직을 그만두고 황해도 백천 온천으로 요양을 떠난다. 그러나 이 곳 술집에서 기생 금홍을 만난 이상은 청진동 조선광무소 1층을 사글세로 얻어 '제비' 다방을 차리고 금홍을 마담으로 앉혔다. 다방 뒷골목에 금홍과 살림까지 차려 훗날 그의 대표작이 된 <날개>의 무대를 만들었다. 1934년 조선중앙일보에 발표한 <오감도>는 이상을 일약 스타로 만들었다. '미친 수작' '정신병자의 잡문' 등의 혹평과 비난 때문에 연재는 중단되었지만 열화 같은 찬반 양론이 일었고 '구인회' 가입 후에도 꾸준히 작품을 발표했다. 하지만 '제비' 다방은 경영난으로 폐업하여야 했고 인사동의 카페 '쓰루(학)' 광교다리 근처의 다방 '69'와 명동의 '무기(맥)'를 잇달아 개업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그런 와중에도 이상은 1936년 이화여전 출신인 여류문인 변동림(이상이 죽은 뒤 수화 김환기의 부인이 된 김향안 여사)과 결혼, 새로운 인생을 맞는 듯했으나 건강 악화와 어려운 경제적 여건 등 국내에서의 암담한 현실을 뒤로 하고 혼자 동경으로 떠난다. 이듬해 2월 죽음 직전의 혼곤한 상태에서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일경에 체포된 이상은 신병 악화로 한 달여 만에 석방되어 동경제대 부속병원에서 부인 변동림과 마지막 해후를 했다. 1937년 4월 17일 "레몬 향기를 맡고 싶소."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유골은 서울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보다 한 이십 일 정도 먼저 타계한 소설가 김유정과 함께 합동 영결식이 치러지고 미아리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 만 이십육 년 칠 개월의 삶이었다. "날개를 펴지 못한 천재 시인" 이상을 기념하는 문학비가 송파구 방이동 보성고 교정에 세워져 있다.

보성고 동문들과 부인 변동림 여사가 1990년 5월 건립한 이 문학비는 이상의 천재성과 파격성을 강조하기 위해 추상 조각으로 만들었으며 문학비 앞에 이상의 얼굴 그림과 연보, 대표시 <오감도>를 새긴 시비를 따로 마련했다.    

 


 

[ 2016년 01월 05일 10시 48분 ]

 

 

스리랑카에서 지금까지 발견된 블루스타 사파이어(蓝星宝石) 가운데 세계 최대인 1404.49캐럿의 블루스타 사파이어가 발견, 이 사파이어는 최소 1억 달러(1188억원) 이상의 가치가 있는 것으로 추정, 익명의 소유주는 이 사파이어가 경매에 붙여질 경우 최고 1억7500만 달러(약 2079억원)에 낙찰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 이 보석을 블루스타 사파이어라고 부르게 된것은 중심부에 나타나는 독특한 문양 때문, '보석의 도시'로 불리는 스리랑카 남부 라트나푸라에서 채굴, 이 사파이어에는 '아담의 별'(The Star of Adam)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아담이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후 스리랑카에 도착해 '아담의 정상'(Adam's Peak)에서 살았다는 무슬림들의 믿음에 따른것.



- ‘천재 시인’ 이상(李箱)에 빠지다 

1954년 3학년을 마치고 경제사정으로 더 이상 학교를 다닐 수 없게 되자, 특히 고시공부를 해서 판검사가 되겠다는 꿈이 좌절되자 그는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깊은 절망에 빠지게 됐다. 흔히 이런 절망적 상황에서 안식처로 찾는 곳이 문학이다. 하기야 중학시절의 꿈이 문학가이기도 했었다. 사실 그가 판검사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피난길에 목격한 젊은 죽음들에 대한 분노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즉 그의 성정 본바탕에서 판검사를 지향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성정 자체가 그런 인물이 못된다. 생전에 그가 그런 점을 글로 고백한 바도 있다. 

“한많은 피난살이 속에서 그런 울분과 충격도 낡은 앨범처럼 퇴색해 가고, ‘땃벌떼’다 정치파동이다 휴전회담이다로 어수선한 세월이 흘렀다. 폐허에서 하루의 삶에 쫓기던 나는 판․검사가 돼서 떵떵거리고 살아야겠다는 엉뚱한 꿈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내 판검사의 꿈은 민․형법 총론․각론 8권을 송두리째 암기하자마자 파김치가 되고 말았다. 지칠 대로 지쳐서 나는 시집과 소설책을 들었고, 세기말적 절망감 속에서 이상(李箱)의 작품과 친해졌다. 중학시절의 꿈이 하기야 문학자였으니까, 오랜 방황 끝에 ‘탕자(蕩子) 돌아오다’가 된 셈이었다” 
-- (‘제2의 매국, 반민법 폐기’, <문예중앙>, 1987년 봄호) 

이상(李箱)과 그는 여러 가지 면에서 흡사한 점이 많다. 대중과 잘 어울리는 성격이라기보다는 상대적으로 ‘나홀로형’에 가까운 점이 그렇고, 예술가적 기질 또한 그렇다. 건축기사 출신으로 선전(鮮展)에도 여러 번 입상한 적이 있는 이상은 미술학도였고, 종국은 방송사 주최 기타연주대회에서 2등상을 받을 정도로 음악에 출중한 소질이 있었다. 
 

경성고공 시절의 이상

또 두 사람의 천재적 기질, 비 인문계 출신(이상은 경성고공(高工) 건축과, 종국은 경성농고 수의축산과)도 그렇거니와 두 사람의 ‘사랑 역정’도 비슷했다면 비슷했다고 할 수 있다. 심지어 암울했던 시대상황까지도 한 몫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이상에 쉽게 빠져들었고, 또 이상 연구에 큰 족적을 남겼다. 그 무엇인가에 빠져서, 그 대상이 사람이든 아니면 연구가 됐든, 나름의 성과를 냈다면 그건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고 또 높이 평가돼야할 것이다. 이상에 빠져든 과정을 그의 기록으로 직접 보자. 


“퇴폐와 절망의 심연에서 허위적 거리고 있을 때 눈에 띈 것이 ‘이상 선집(李箱選集)’이었다. 그런데 읽어보니 그게 어쩌면 그렇게 내 처지와 심정을 그대로 옮겨 놓았는지, 나는 그만 홀딱 반해버리고 말았다. “박제(剝製)가 되어 버린 천재를 아시오?” 이상의 작품 ‘날개’에 나오는 첫 구절이다. 민법총칙 5백 페이지를 한 달 이내에 외어버린 천재(?)가 밥과 잠자리 걱정 때문에 꼼짝을 못하고 있으니, 나야말로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가 아닌가? 이상의 사후 20년이 되어 가던 그 때까지 그에 대해서는 본격 연구가 없었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 이상을 발굴해서 ‘날개’를 달아준다? 스스로 천재라고 믿었던 나 자신 하나도 살리지 못해 고시를 포기한 녀석이 남의 천재를 살려낼 생각을 했던 것이다” 
-- (‘술과 바꾼 법률책’ 중에서)

그가 ‘이상 연구’에서 남긴 족적은 뒤에 다시 거론키로 하고 당시 그의 집안사정을 잠시 살펴보자. <이상 전집(李箱全集)>(전 3권)을 만들 당시 그는 도봉리 집에서 작업을 하고 있었다. 여유로운 상황에서의 ‘글쓰기’가 아니라 돈이 없어 대학등록을 할 수 없는 처지에서 일종의 ‘도피적 글쓰기’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 시기가 그로선 심적, 물적 가장 고통스런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차라리 농고를 다닐 때는 그만두거나 아니면 대학갈 때 만회할 기회가 있었다. 

경성사범을 그만둘 때는 하고 싶은 음악을 할 수 있다는 대안이 있었다. 또 경찰관 생활은 본가와 큰집 모두에서 갈등을 겪고 있을 때 일시적 피난처로는 그만한 데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20대 후반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직장도, 사랑도, 결혼도 해야될 나이에 그는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늘어난 건 짜증과 괴팍한 성격의 폭발이었다. 그 못지않게 가족들도 그 때문에 힘이 들었다. 그리고 만만한 건 여동생들이었다. 

“천재는 광인(狂人)에 가깝다는 말처럼 오빠는 광인에 가까웠다.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일에도 불같이 화를 내곤 했다. 학교를 휴학하고 도봉동 집으로 내려와 ‘이상전집’을 쓸 무렵에 그랬다. 오빠의 글 쓰는 스타일은 참으로 그때로선 이해하기 힘들었다. 식구들이 잠을 자는 밤이면 글을 썼는데 시끄럽다고 해서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 잠자다가 화장실에 가려면 그 문소리조차 내지 못하도록 했다. 그리고는 남들이 깨어나 생활하는 낮 시간이면 잠을 잤다. 밥먹을 때 나는 숟가락 소리조차 시끄럽다며 소리를 질러댔다. 당시 군대에서 만들어준 집이 넓기는 했으나 칸막이가 따로 없는 한 공간에서 살다보니 우리 자매들과 어머니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봄부터 가을까지 우리 식구들은 밭에 나가 일을 했는데 오빠는 코앞에 있는 재떨이나 성냥도 순화야! 순화야! 소리를 지르며 갖다 달라고 해서 멀리 갈 수도 없었다. 그 때 우리 땅에 주둔해 있던 군인들이 부르는 오빠의 별명은 ‘네로’, ‘왕초’였다. 어쩌다 오빠가 출판사에 볼일이 있어 서울을 가는 날이면 우리들에겐 해방의 날이었다” (순화 증언) 
 

둘째여동생 순화

막내 경화도 유사한 증언을 했다. 

“예술가 기질이 있었던 오빠는 다른 오빠들에 비해 불규칙적인 생활을 많이 했다. 어머니가 공부하라면 되레 만화를 보면서 어머니 속을 썪이기도 했다. 그리고는 만화 보는 것도 공부라고 둘러댔다. 그 때 어머니는 오빠 별명을 ‘털팩이’라고 했는데 불만투성이의 거친 행동을 두고 하는 말이다. 오빠는 물그릇이란 물그릇은 전부 걷어차고 다녔다. 젊은 시절 무슨 불만이 그리도 많았는지 모르겠다” 

이런 불만의 세월 속에서도 그는 이상 연구의 금자탑이랄 수 있는 <이상전집> 세 권을 내놓았다. “원고를 탈고했다는 것은 쓴 것이 아니라 낳은 것이며, 그것도 임신중독증이 극심한 난산이었다”는 순화의 표현은 조금도 과장이 아니다. 정식으로 평단(評壇)에 등단한 신분도 아닌, 27세의 대학생이 거의 황무지나 다름없던 분야를 개척한 것은 우리 문학사에서 평가받아 마땅한 일이다. 

그 무렵부터 그와 교류가 있었던 시인 고은(1933년생, 73세)은 <이상전집> 발간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그 당시 ‘이상전집’이라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이상을 생각하는 거 하고 전혀 다릅니다. 이거는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낸 것이죠. 자료를 다 뒤져서 만들었습니다. 식민지 36년 동안 그 작가가 어느 작가였든 간에 그것은(자료 등) 망실돼 있는 상태였는데 그걸 임 선생님께서 만들어서 이상전집으로 내신 것입니다” (<민족사랑>, 민족문제연구소, 2006 3월호) 

- ‘무’에서 ‘유’를 창조한 <이상전집> 

그에 이어 <이상연구> <이상소설연구> 등을 출간한 문학평론가 김윤식(1936년생, 70세, 전 서울대 국문과 교수) 교수는 더 각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8월초 전화인터뷰에서 김 교수는 “임 선생의 문학분야 업적을 들라면 <친일문학론>을 펴낸 것도 중요하지만 <이상전집> 세 권을 묶어낸 것도 절대 과소평가돼선 안 된다. 그 당시 그런 작업을 할 여건이 전혀 돼 있지 않았다. 그런데 임 선생께서 곳곳을 다니며 자료를 모으고, 심지어 이상이 일본서 보낸 편지까지 유가족들에게 입수해 전집으로 묶어낸 것은 대단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임 선생은 이상 연구의 기초를 다진 분으로, 이상 연구의 첫 자리에 앉을 자격이 있는 분이다” 라고 말했다. 

시인이자, 언론인 출신으로 생전에 종국과 친교가 두터웠던 인태성(1933년생, <문예중앙> 주간 역임, 경기도 수원 거주)은 “이상은 요절했다. (* 1910년에 태어나 1937년에 만 27세로 사망했으니 요절이라면 요절이다) 짧은 생애에 많은 작품을 남겼지만 그의 사후 이를 제대로 챙기는 사람이 없어 작품들이 이곳저곳에 산재해 있었다. 작품 수나 장르별로 어떤 것이 있었는지도 전혀 집계돼 있지 않았다. 물론 그 때까지 이상 개인문집이 나온 것도 없었다. 기껏해야 해방 후 김기림이 펴낸, 200쪽 분량의 <이상 선집(李箱選集)>(백양당, 1949)이 고작이었다. 그러던 것을 임 선생이 도시락 싸서 전국의 도서관을 돌면서 이상 작품을 발굴해 엮어낸 것이 <이상전집(李箱全集)> 세 권이다. 임 선생이 청춘을 바친 역작이다” (* 참고로 <이상선집>에는 이상의 문학작품 가운데 소설 3편, 시 22편, 수필 6편이 실려 있다) 

이미 그 당시만 해도 김기림의 <이상‘선’집>은 절판이 돼 입수하기가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종국에게 이 책을 구해준 사람이 바로 인태성이었다. 인태성은 그가 <이상전집>을 엮을 때 도움을 주기도 했다고 시인 박희진은 증언했다. 이에 대해 인태성은 “도서관에 따라가서 이상의 시 몇 편을 베껴준 게 전부”라고 겸손해 했다. 

<이상전집> 편찬 과정이 어땠는지 당사자인 종국 본인의 얘기를 들어보자. 그는 “대학시절에 나는 <이상전집>을 3권으로 엮어서 펴낸 일이 있다. ‘이상론’을 쓰려고 작품을 모으다 보니 웬만큼 수집이 된 것 같아서 전집으로 엮었던 것인데, 그건 좀 어렵다면 어려운 과정이었다. 작품연보 하나가 안 갖춰진 상태에서의 수집은 별 수 없이 신문, 잡지를 하나하나 뒤지는 일로부터 시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서관에서 20년 전의 간행물들을 뽑아내면, 책 위에는 먼지가 석 자는 몰라도 1밀리미터는 충분히 쌓여 있었다. 그런 출판물을 한 장 한 장 뒤지는 지어(紙魚, 좀벌레) 생활 1년에 <이상전집>은 햇빛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시시했던 날의 시시한 이야기’, <출판과 교육에 바친 열정>, 우촌이종익추모문집간행위원회 편, 1992)고 회상했다. 
 

종국이 펴낸 <이상전집>(전3권) 초판본

그럼 여기서 그동안 ‘이상 연구’의 성과에 대해 잠시 알아보고 넘어 가자. 아래 내용은 지난 1995년 문학사상사에서 네 권으로 펴낸 <이상문학전집> 가운데 제4권 ‘연구논문 모음집’의 서문에서 김윤식 교수가 ‘<이상논집>을 엮으면서’라는 제목으로 쓴 것을 요약한 것임을 미리 밝혀둔다. 

우리 문학사에서 이상 문학만큼 난해한 것은 별로 없다. 1930년대의 김기림의 작품평에서부터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약 2백여 편의 연구논문이 씌어졌고, 앞으로 씌어질 것임에 틀림없거니와, 그렇다고 이상 문학의 해석이 끝나는 것은 아닐 터이다. 이상 문학에 관한 본격적인 논의는 그가 이국땅에서 숨져간 1937년을 전후로 시작되었다. 이상추도회(1937. 5. 15)에서 행한 평론가 최재서의 <고 이상의 예술>은 그의 유명한 <날개와 천변 풍경에 관하여>와 더불어 이 방면의 고전으로 군림하고 있다. 이후 나온 논문들을 연대별로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1930년대엔 추도문을 포함해 13편이 나왔다. 1940년대, 이른 바 해방공간에서는 단 3편만 보인다. 6.25 이후 한동안 씌어진 논문은 모두 24편이었다. 앞 세대에 비해 놀랄만한 증가세를 보였다. 6.25 전쟁의 포화 속에서 젊은 평론가들이 발견한 것은 다름아닌 이상 문학이었다. 서울대에서는 이어령이 <문리대학보>에 ‘이상론’을, 고려대에서는 임종국이 <고대문화>에 ‘이상 연구’를 선보였다. 또 임시수도 부산에서는 고석규가 역설로서의 이상론을 펼쳤다. 절망을 체험한 세대에게 이상은 친형과 흡사한 존재였다. 

1960년대엔 55편이 나왔다. 전 대에 비해 거의 두 배로 늘어난 셈이다. 이 세대의 특징은 김구용의 <레몽에 도달한 길>과 김현의 <이상 문학에서의 만남의 문제>로 대표시킬 수 있다. 1950년대와는 달리 1960년대는 어느 정도 거리감을 두고 이상 문학을 바라볼 수 있었다고 하겠다. 1970년대에는 1960년대의 두 배에 육박하는 103편의 논문이 발표됐다. 이 시대의 특징은 오생근의 <동물의 이미지를 통한 이상의 상상적 세계>, 김용운의 <이상 문학에 있어서의 수학>, 오광수의 <화가로서의 이상> 등으로 대표된다. 이는 이상의 문학이 미시적 분석을 통해 수학, 미술, 건축, 그리고 정신분석 등으로 확산되었음을 웅변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1980년대 들어서는 그동안 나온 이상 문학 연구물 전체에 대한 반성이 시작됐다. 즉 새로운 범주를 개척하기 보다는 그동안 논의된 영역을 한층 더 심화시키는 형태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조두영의 <이상의 인간사와 정신 분석>, 김윤식의 <수심을 몰랐던 나비>, 이승훈의 <오감도 시 제1호 분석>, 한상규의 <1930년대 모더니즘 문학의 미적 자의식> 등으로, 이는 각 분야별의 심화연구라고 할 수 있다. 김윤식의 글에는 1990년대는 다루지 않았다. 이 책이 95년에 나온 것이고 보면 아직 마무리할 때가 되지 못한 것이다. 

그러던 차에 나는 다행스럽게도 1990년대 이상 연구의 성과를 잘 정리한 논문을 한 편 발견했다. 필자는 김주현 경북대 국문과 교수. 김주현은 <안동어문학> 제6집(안동어문학회, 2001. 11)에 ‘1990년대 이상 연구의 성과와 그 한계’라는 제목의 논문을 실었는데 빈 공간을 메우기에는 안성맞춤의 논문인 셈이다. 이 글은 앞서 김윤식의 글과는 또 조금의 차이가 있다. 김윤식의 글이 연대별 특징에 주안점을 뒀다면 김주현의 논문에는 시기별 대표적 연구자들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 나로선 고마운 점이다. 아래 내용은 김주현의 논문 가운데 일부를 요약, 발췌했음을 밝혀둔다. 

이상에 대한 연구물은 한국의 근대 문인 그 누구보다도 많다. 193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의 이상 연구는 짧은 단평에서부터 학위논문까지 포함해 1,000편에 이르고 있다. 그 가운데서 3분의 1이 넘는 340여 편이 1990년대에 나왔다. 학위논문 만으로만 보면 1990년대까지 전체 220여 편 가운데 절반에 해당하는 100편이 1990년대에 나온 셈이다. 

1990년대에 나온 논문 중 이상 단독 논문은 석사논문이 48편, 박사논문이 9편이다. 김주현은 1990년대 들어 이상 연구가 넘쳐난 원인을 두고 ‘연구자 양산’을 들고 있다. 1980년대 초 대학입학 증원이 늘자 이것이 대학원 증원으로 이어졌고, 뒤이어 80년대 중반부터 석사학위 논문으로, 다시 90년대엔 박사학위 논문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일단 외적 상황이 좋아졌다는 얘기다. 


- 뒤이은 ‘이상 연구’의 성과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연구자들이 이상 연구로 몰려들었을까?

김주현의 분석은 이렇다. 우리 근대문학사가 겨우 1세기 정도로 일천한 데다 생존 작가들에 대해서는 연구 자체가 금기시 되다보니 아무래도 ‘죽은 자’를 찾게 되었다는 것. ‘주례 비평’ 무성한 한국적 풍토를 감안하면 설득력이 있는 분석이라고 본다. 

특히 이상은 시, 소설, 심지어 수필까지 다양한 장르에서 작품을 남겨 건축, 회화 분야의 연구자들까지도 가세하게 됐고. 그러면 이상의 매력은 과연 이것 뿐인가? 김주현은 다시 자문자답한다. 더 있단다. 시대적, 사회적 요인도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이상은 본격적인 근대문학 연구가 진행될 때마다 중요한 소재로 부각돼 왔다. 

한편 이상 문학의 본격적인 연구는 1950년대 중반부터 시작되는데, 당시 들어온 실존주의 개념이나 정신분석학적 잣대들이 그의 문학을 해석하거나 재단하는데 중요한 도구가 된다. 여기에 임종국의 <이상전집> 발간이 이상 연구의 기폭제로 작용하기도 했다. 자료의 희귀성보다는 일반성이 연구를 추동케 하는 힘이 되기 때문이다. (* 임종국이 펴낸 <친일문학론>도 마찬가지 경우다. 그 책에 등장한 희귀한 자료-사실은 모두 일제시대 신문, 잡지 등에 실려 있는 것들이지만-보다는 그런 자료들이 일반에 알려지고 후속 연구를 추동해 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이상 연구자로 1950년대에는 임종국 이어령 고석규, 1960년대에는 송기숙 송민호 여영택 이보영 정명환, 1970년대에는 고은 구연식 김용운 원명수 정귀영, 1980년대에는 김윤식 이승훈 등을 꼽을 수 있다. 

1990년대 이상 연구의 성과를 진단하는 건 그리 간단치가 않다. 다양하고도 다원적인 접근이 이뤄진 때문이다. 1950~80년대의 이상 문학 연구의 특징은 실존주의 및 형식주의의 세례를 받았다면 1990년대의 연구는 이전 연구의 보완 및 확대, 그리고 새로운 방법론의 개척이라는 데 의미가 있다. 다시 말해 정신분석학적 연구도 프로이트에서 벗어나 크리스테바, 라캉, 들뢰즈나 가타리의 논의들이 집중 수용되었다. 

그리고 작품의 기법이나 내적 형식의 탐구도 모더니즘 또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본질적인 문제들과 관련하여 논의되었다. 그러나 보니 물량적으로도 급속히 늘어나 1990년대 이상에 관한 비평, 학술논문, 저서 등이 무려 240여 편에 이르고 있다. 말하자면 대부분의 현대문학 연구자들이 이상을 한 번씩은 손대고 지나갔다는 얘기인 셈이다. 심지어 개별 작품에 대한 석사학위 논문만도 14편이나 된다. ‘날개’(7편), ‘오감도’(4편), 그리고 ‘주자회시’ ‘12월 12일’, ‘종생기’ 각 1편씩이다. 

하나 부기해 둘 것은, 김주현은 금년 2월 네 번째의 ‘이상문학전집’(전3권)을 펴낸 바 있다. 맨 처음 임종국의 ‘이상전집’(태성사, 1956), 두 번째 이어령의 ‘이상전집’(갑인출판사, 1977~78), 세 번째 문학사상사판(이승훈, 김윤식) ‘이상문학전집’(문학사상사, 1989~93), 그리고 이번에 김주현이 펴낸 것이 네 번째다. 그는 6년여의 작업 끝에 이를 묶어냈는데 그간 나온 연구 성과 가운데 오류 등을 모두 교정했다고 한다. 

한 예로 이상의 유서처럼 읽히는 대표작 ‘종생기(終生記)’에서 이상 연구자들을 곤혹스럽게 했던 마지막 대목 “만이십육세와 삼십개월을 맞이하는 이상선생님이여! 허수아비여!”의 ‘삼십개월’이 ‘삼개월’의 오식이며, 그래야만 이상의 나이와 작품 탈고 시기가 맞아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는 “원전 확정이 먼저 이뤼진 뒤 전집이 발간돼야 함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는 그 반대로 이뤄져 전집의 오류가 연구의 오류로 이어졌다”며 “이번 작업은 그 악순환을 바로잡기 위한 시도”라고 말했다. (<한국일보> 2006. 2. 8 기사 참조) 
 

인으로 활동하던 당시의 이상

- 이상을 닮은 임종국의 자화상 

이상(李箱), 불과 27세에 생을 마감한 천재시인 이상. 종국은 과연 그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 봤을까? 앞에서 김윤식은 1950년대 절망을 경험한 세대에게 이상은 ‘친형과 흡사한 존재’라고 했다. 인태성은 종국이 “처음엔 (이상이) 자기의 취향에 맞다며 관심을 보이더니 어느 순간 푹 빠져 들더라”고 기억했다. 종국 자신이 쓴 글을 보면, 김기림의 ‘이상선집’을 읽고서 “(고시공부에) 지칠 대로 지쳐서 나는 시집과 소설책을 들었고, 세기말적 절망감 속에서 이상(李箱)의 작품과 친해졌다”(‘제2의 매국, 반민법 폐기’) “그게(이상선집) 어쩌면 그렇게 내 처지와 심정을 그대로 옮겨 놓았는지 나는 그만 홀딱 반해버리고 말았다”(‘술과 바꾼 법률책’)고 자백(?)한 바 있다. 

앞에서 이상이 종국과 흡사한 점이 여럿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괴팍한 성격, 예술적 재능, 천재 끼 등등. 종국은 어쩌면 이상을 통해 자신의 자화상을 봤는지도 모른다. 그가 쓴 ‘인간 이상’론(論)을 몇 살펴보자. 

종국은 1955년 12월 <고대문화> 제1집에 처음으로 ‘이상론-근대적 자아의 절망과 항거’를 선보였다. (* 그와는 친구였던 시인 인태성은 <고대신문>에 실린 그의 ‘이상시론’이라는 짤막한 평론을 보고 문과생도 아닌데 글을 잘 썼다는 생각을 하고는 그를 찾아가서 만났다고 했다. 혹 그가 <고대문화>에 실린 ‘이상론’을 착각한 것인지, 아니면 별도로 <고대신문>에 ‘이상시론’이라는 것을 실었는지는 정확치 않다. 한편 위의 ‘이상론’은 다시 별도의 독립된 형식으로 수정, 개작돼 <이상전집> 제3권에 ‘이상 연구’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그리고 다시 1989년 문학사상사에서 펴낸 <이상문학전집> 4권(김윤식 편저)에도 그대로 재록됐다) 초창기 평론이어서 그런지 ‘이상론’은 거칠고 감정이 너무 노골적이다. 과도한 찬사도 더러 눈에 거슬린다. 이는 어쩌면 당시 불행했던 자신의 모습을 투영시켜 위로받고자 함이었는지도 모른다. 

특히 이상이 도쿄에서 사망 4개월 전, 1937년 정월에 보낸 ‘마지막 편지’ 전문을 인용하고는 ‘듸폴도 상징도 아무 것도 없다. 이 얼마나 비장한 고백의 서한문이냐!’며 감탄조를 남발하는 형국이다. 글 첫 부분에서 이상의 도쿄행을 다루면서 언급한 이상의 인상비평이 눈길을 끈다. (* ‘이상론-근대적 자아의 절망과 항거’는 1962년에 출간된 <사색하는 사람들>(안동림 편, 동서출판사)이라는 단행본에 ‘고독한 반항아 이상’이라는 제목으로 개제돼 실린 바 있다) 

“총독부 회계과로 또 건축과로, 고공(高工, 경성고공)을 졸업하고 얻은 관청 지위를 바로 팽개치고 시와 음악과 그림을 샀다는 서툴은 흥정꾼 이상(李箱). 혹 ‘이형!’ 하고 부르는 사람이 있으면 파안대소 하면서 ‘네, 좋습니다. 이상은 이형(李兄)과 통할 수 있습니다. 이상은 괴상하고도 통하니까요’ 하더라는 김해경(金海卿)이라는 으젓한 본명의 소유자, 유화(油畵)도 하고 도안도 만들고 ‘하계(河戒)’라는 화명(畵名)으로 삽화도 그려보았다는 사나이, ‘69’-씩스․나인이라는 그런 온당(穩當)치 못한 문구를 시침 뚝 따고 다방 옥호(屋號)로 사용하던 장난꾸럭이, ‘제비’와 카페 ‘つる’(쓰루, 鶴)와 ‘69’에 실패하고도 여전히 굴(屈)치 않고 명치정(明治町)에다 다방 ‘むぎ’(무기, 맥)를 내더라는 불굴의 ‘야인(野人)’-동해(童骸)-이런 이상(李箱)…” 

그러나 이런 인상비평은 후술하는 본문과 견주면 호사스럽게 느껴진다. 종국은 이상의 도쿄행이 비극의 씨앗이 된, 즉 이상이 도쿄로 건너간(1936년 가을) 뒤 불과 7~8개월 만에 사망(1937. 4. 17)한 것을 두고 못내 한탄했다. 특히 이상이 도쿄에서 희망은커녕 실망과 절망에 빠진 나머지 깊은 ‘회한’을 한 것을 못내 안타까워했다. 이상 자신이 그런 회한을 ‘마지막 편지’에서 언급하고 있다. 

“도저히 ‘커피’ 한잔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과거를 돌아보니 회한(悔恨) 뿐입니다. 저는 제 자신을 속여 왔나 봅니다. 정직하게 살아 왓거니-하던 제 생활이 지금 와보니 비겁한 회피의 생활이었나 봅니다. 정직하게 살겠습니다. 고독과 싸우면서 오직 그것만을 생각하며 있습니다. 오늘은 음력으로 제야(除夜)입니다…” 

‘반성’을 넘어 ‘자학’으로까지 비쳐지는 그런 이상의 상황을 지켜보는 종국의 평가, 또는 해석은 이렇다. 

“과연 <도저히 ‘커피’ 한잔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이런 문제들이 풀렸다면, 상(箱)의 예술은 그 혼돈과 무질서를 지양하고 그가 실험한 수법과 더불어 완성적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새로운 시대를 창조하던 혹은 창조한 작가로써 우리 앞에 커다랗게 ‘크로우즈 엎’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요절(夭折)하였다. 본명 김해경 이외에 이상이라는 이상한 이름이 있고, 공교롭게도 책상 위에는 몇 권 재미없는 책이 있었고, 그리고 일기에 적힌 볓 줄의 소위 불온하다는 글귀로 해서 침략에 눈이 뒤집힌 일제의 주구에게 혐의를 입고 서신전(西神田)경찰서 유치장 신세를 지게 된 것입니다…” 

특히 그는 이 글에서 이상을 두고 ‘조난(遭難)한 세대의 혈서를 써놓은 시인’ ‘20세기의 김삿갓’ ‘인간의 무지와 불성실이 빚어낸 절망과 비극을 초극하려던 예지와 성실의 사도(使徒)’ 등 극찬에 가까운 박수를 아끼지 않는다. 또 이상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달, 까마귀, 자두, 십자가 등의 ‘비화(悲話)’를 언급하면서 이상 해석의 극치를 달린다. 

이를테면, ‘오감도(烏瞰圖) 시(詩) 제7호’에 등장하는 달(月)을 두고 ‘달은 자신의 그림자조차 가지지 못한 지상 최대의 고독자’라며 은근히 이상을 연상시키는가 하면, ‘오감도(烏瞰圖)’에 등장하는 까마귀는 ‘암흑을 상징하는 시커먼 몸둥아리’라며 ‘상(箱)은 울어주는 이조차 없던 세기의 종말을 향하여 안타까이 몸부림 치며 피를 토하던 한 마리의 처참한 까마귀였을 지도 모른다’고 했다. 

특히 글 말미에서는 이들(달 까마귀 십자가, 심지어 이상까지)은 ‘확실히 모두 건강하달 수 없다’고 전제하고는 그러나 이들의 존재가치를 역설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는 대미에서 “확실히 상(箱)의 예술은 불행한 세대가 올 때마다 그를 위안하고 자극하고 그럼으로써 인류와 더불어 길이 남을 것”이라고 끝을 맺었다. 

반면 지난 79년에 <신동아>에서 펴낸 단행본 <한국근대인물백인선>에 기고한 글은 내용이나 문투가 판이하게 다르다. 이상의 일대기 식으로 쓰여진 이글에서는 감정적 표현이 철저히 자제되었다. 물론 평론 형식이 아니라 사전식 글쓰기라는 점도 있겠지만 ‘이상론’을 처음 발표(1955년)한지 14년이란 세월이 흘러 이상에 대한 감정이 다소 진정된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눈에 띄는 대목은 “(이상의) 작품들은 모두 생전에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이상의 작품이 비교적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사후 20년이 지난 1956년경 부터다. 주로 신인층에 의해서 활기 있게 논의되기 시작한 그의 작품은 그동안 참 많은 화제를 일으켰고, 앞으로도 많은 화제를 이어갈 것처럼 보인다”고 쓴 부분이다. 자신의 이상연구에 대해 자화자찬 격이긴 하나 사실과 다른 내용은 없다. ‘1956년’, ‘신인층’ 등은 모두 자신 등(이어령 등 포함)을 지칭한 것이다. 어쩌면 종국은 이 글을 쓰고 처음으로 ‘기쁨의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른다. 

- '이상 연구'와 스승 조지훈의 격려 

이제 그러면 그가 ‘난산’ 끝에 낳은 옥동자 <이상전집>을 살펴볼 차례다. 총 3권으로 구성돼 있다. 제1권은 창작집, 제2권은 시집, 제3권은 수필집. 각 권 소책자(4×6판) 크기이며, 정가는 900원(제2권은 800원), 모두 300쪽 안팎의 분량이다. (* 나는 이 평전을 준비하면서 혹시나 싶어 인터넷 고서점을 뒤졌더니 운좋게 마침 소장하고 있는 곳을 찾아 9만원에 세 권을 손에 넣었다) 

각 권 모두 두 장씩 이상과 관련 사진과 필적이 실려 있는데, 대개는 이상의 자당 박세창(朴世昌)씨로부터 입수한 것이다. 다만 이상이 일본으로 건너가기 직전 서울 흥천사(興天寺)에서 찍은, 웃는 얼굴사진은 친구 윤태영(尹泰榮)씨로부터 입수한 것이다. 

제1권에는 이상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날개’ ‘종생기’ 등 10편이 실려 있다. 말미에 부록으로 ‘사신록(私信錄)’이 첨부돼 있다. ‘사신록’에는 모두 아홉 통의 편지가 실려 있다. 이 가운데 ‘ K형(兄)’ 앞으로 보낸 것이 7통, ‘K대형(大兄)’이 1통, ‘H형(兄)’이 1통,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아우 김운경에게 보낸 것이 1통이다. 1937년 2월 8일자로 아우에게 보낸 편지(엽서)는 아우의 취직소식을 듣고 기뻐하면서 늙으신 부모님을 잘 봉양해 달라는 부탁을 담은 내용이다. 이 편지는 결국 그가 고국에 보낸 마지막 편지가 되고 말았다. 

이밖에도 제1권에는 조용만의 ‘서(序)’, 즉 서문과 편자인 종국이 간행사 격으로 쓴 ‘<이상전집> 간행에 제(際)하여’가 실려 있다. 간행사는 이상의 19주기에 맞춰 1956년 4월 17일자로 돼 있는데, 모두 9개 항목으로 정리해 실었다. 전문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 이 전집에 수록된 작품들은 출판을 목적으로 수집된 것은 아니다. 오직 학구(學究)를 위한 연구자료이었을 뿐이다. 할 생각이다. 
―, 출판 준비는 제(諸)작품이 최초로 발표되었던 지면(誌面)을 그 원전으로 하고, 후일 다시 전재된 것은 간혹 참고하였다. 
―, 작품 배열은 주로 연보를 표준하였다. 그러나 반드시 그에 의존한 것은 아니다. 
―, 철자법과 띄어쓰기는 원작자의 개성을 훼상(毁傷)치 않는 한도 내에서 현행의 그것으로 수정하였다. 
―, 원전에 있어서 인쇄상의 오식(誤植)임이 명백한 곳은 세심한 고증 밑에서 정정하였다. 그렇게 인정할 수 없는 것은 오자를 오자로서 살려야 했다. 
―, 종래의 전재된 작품-<선집> 등 기타-에서 허다한 미스가 발견될 때 편자는 극히 불쾌하였다. 이 점 ‘미스의 전무(全無)’를 위하여 주의를 특히 거듭했으니 대과(大過)는 없으리라 자부하겠다. 
―, 독자 제현의 참고를 위하여 권말에 ‘이상 약력’, ‘작품연보’, ‘관계문헌일람’, ‘이상 연구’ 등을 수록했다. 
―, 누락된 작품, 미발표 유고 등이 발견되면 적절한 방법으로 증보하겠다. 이 점 독자 제현의 교시(敎示)와 협조를 재삼 간청한다. 
―, 끝으로, 본서의 출판을 위하여 많이 수고하여 주신 조용만(趙容萬), 조지훈(趙芝薰), 양(兩) 선생님, 유정(柳呈)씨, 동인(同人) 인태성(印泰星), 이황(李榥) 양형(兩兄), 그리고 김규동(金奎東)씨, 윤호중(尹鎬重)씨의 여러분들에게 삼가 고마움을 인사드린다. 

<이상전집>을 엮어낸 목적, 편찬과정, 교열사항, 참고내용 등 세세한 부분까지 상세한 설명을 곁들이고 있어 더 이상의 첨언은 사족이 될 지경이다. 여기 수록된 작품들은 출판 목적이 아니라 ‘오직 학구(學究)를 위한 연구자료’ 목적으로 수집했으며, ‘인세는 유족과 상의하여 적의(適宜) 선용(善用)할 생각’이라는 대목에서 그의 순수성을 엿볼 수 있다. 당시 그는 경제적으로 대단히 어려워 돈 한 푼이 아쉬운 시절이었다. 말미에 거명된 인물 가운데 ‘유정(柳呈)씨’는 2권에 따르면, 일문(日文) 시 번역을 도와준 것으로 나와 있다. 

<이상전집> 출간은 조지훈(1920~1968)의 조언과 격려가 큰 힘이 됐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종국은 조지훈이 정치학과 교수는 아니었지만 그를 따르고 존경했었다. 그의 말년 5년여를 곁에서 시봉(侍奉)한 김대기(1955년생, 51세, 경북 포항 거주)는 “이상 연구는 조지훈 선생의 권유로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으며, 임 선생님은 생전에 조지훈 선생을 거의 유일한 스승으로 모셨다”고 증언했다. 

그런데 의아스러운 것은 그런데 이 책의 ‘서문’을 조지훈이 아닌, 조용만이 썼다는 점이다. 당시 조지훈은 고려대 국문과, 조용만은 영문과 교수였다. 통상 남이 써주는 책 서문은 저자나 편자 등 그 책을 펴낸 사람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조용만의 서문은 <이상전집> 출간의 의의 같은 것 대신 이상에게 집중 초점을 맞추고 있다. 특히 이상의 괴팍하고 몰상식적인 행동에 대해서도 아주 호의적이고, 또 이해하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서문 가운데 그런 내용의 일부를 옮겨보면, 

“그의 시나 소설이 모든 재래의 법칙과 규구(規矩)를 무시한 것은 이같은 법칙과 규구가 준수하기에는 너무나 우습고 용열하기 때문이다. 우습고 용열하다기 보다는, 그같은 법칙과 규구를 준수하는 것은 그의 현란복잡하고, 고도로 선회(旋回)하는 뇌수(腦髓)의 일부만을 움지기게 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의 예지와 감수성과 상상력을, 그의 뇌수에 충만되어 있는 극한의 모든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기 위하여서는, 부득이 또는 저절로 그의 작품은 그같은 형식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 위에서 서문을 조지훈이 아닌, 조용만이 쓴 것을 두고 의아하다고 했는데 여기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우선 조용만은 이상, 김기림, 이태준, 정지용 등과 함께 ‘구인회(九人會)’ 동인이어서 이상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깊었다. 종국의 후배 박노준은 “이상 연구는 조지훈보다는 조용만의 영향이 더 클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두 사람 역시 사제간처럼 지냈다고 박노준은 덧붙였다. 그러나 종국은 후일 <친일문학론>에서 조용만은 물론 대학에서 직접 강의를 들었던 ‘은사’ 유진오 총장마저도 가차없이 한 장(章)씩 잡아 비판의 칼날을 들이댔다. 그 당시 종국과 조용만과의 사이에 있었던 일화 한 토막은 ‘친일문학론’ 편에서 다시 쓰기로 하고 여기선 언급만 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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內科

 

━━自家用福音書━━

━━惑은 엘리엘리 라마싸박다니━━

 

하이얀天使(이鬚髥난天使는규핏드의祖父님이시다. 鬚髥이全然(?)나지않은天使하고흔히結婚하기도한다.)

나의骨片은2떠-즈(ㄴ). 그하나하나에노크하여본다. 그속에서는海綿에젖은더운물이끓고있다.하이얀天使의펜네임은聖피-타-라고. 고무의電線(똑똑똑똑버글버글)열쇠구멍으로盜聽.

(發信) 유다야사람의임금님 주무시나요?

(返信) 찌-따찌-따따찌-찌-(1) 찌-따찌-따따찌-찌-(2)

찌-따찌-따따찌-찌-(3)

흰뺑끼로칠한十字架에서내가점점키가커진다.聖피-타-군이나에게세번式이나아알지못한다고그런다. 瞬間닭이활개를친다······

어엌 크 더운물을 엎질러서야 큰일날노릇━━

 

내과內科

 

 

이 시의 제목이 ‘내과內科’인 이유는 13인의 보통 아해들의 육신에 무엇이 들어있는가를 알아보자는 의도다. 비록 자아를 깨닫지 못한 채, 세상을 살아가는 그들-우리와 동일하게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육신 안에는 과연 무엇이 있을 것인가?

 

 

눈치가 빠른 독자라면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신성神性, 누구나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으면 신이 될 수 있는 가능성, 그 신성이 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자가용복음서━━

━━혹은 엘리엘리 라마싸박다니━━’

 

 

이 두 줄은 기독교의 성경을 희롱하는 부분이다. ‘자가용복음서’라는 말은 기독교도들이 신주단지처럼 여기는 성경이란 것이 픽션, 그들의 입맛에 맞게 마음대로 꾸며진 복음서라는 것이다. 이 구절은 주로 신약성경의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부분을 말하고 있는데, 전술한대로 오감도烏瞰圖의 ‘흥행물천사興行物天使’에 나온 것이며 이미 졸저 ⌜에코우⌟에서 해설한 바 있다.

 

 

‘혹은 엘리엘리 라마싸박다니’

 

 

잘 알다시피 ‘엘리엘리 라마싸박다니’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 로마 병사의 창에 옆구리를 찔려 죽을 때 마지막으로 남긴 말로 성경에 기록된 것인데, 그 의미는 대략 ‘주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의미로 기록되어있다.

 

 

하지만 보통의 인간인 그가 보기에는 이것은 참으로 웃음을 참기 어려운 말이라며 희롱하고 있는 부분인데, ‘혹은’이라는 시어가 그것을 말하고 있다. 윗줄에 나오는 ‘자가용복음서’와 같은 뜻이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왜 그는 이런 표현을 하였을까?

 

 

그것은 이미 그가 죽음을 목표로 한 단식斷食을 ‘남모르게’ 실행實行하는 중이었다는 반증反證으로, 지극히 평범한 인간인 그도 자아수행의 일환으로 개체유지본능인 육신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남모르게’ 단식을 행하는 중인데, 신으로 추앙 받는 예수가 하잘 것 없는 육신의 죽음에 이르러 그토록 나약한 말을 성경이란 책에 활자화 시켜, 보란듯이 온 세상에 드러내어 널리 홍보하는 자체가 참으로 어이없다는 것이니, ‘흥행물천사興行物天使’에서 보듯이 ‘참새와같이수척한’한 모습의 예수가 참으로 가소롭다는 의미가 담겨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신으로 추앙되는 기독교의 예수는 보통 사람인 그를 따라오려면 아직 멀었다는 자신감이 담겨있는 부분으로, 보통 인간인 그보다 못한 주제에 신神이라 칭하며 교언영색巧言令色으로 13인의 아해들을 현혹하여 사기 치는 기독교의 신 예수... 그리하여 사람들에게서 깨달음을 얻기 위한 자아수행의 유일한 기회인 그들의 시간마저 철저히 빼앗아버리는 기독교... 그것은 종교가 아닌 사기집단詐欺集團이라는 의미로, 이것이 바로 그가 기독교라는 종교를 그토록 혐오하는 이유인 것이다.

 

 

순수한 정신을 가진 아가씨가 기독교의 유혹誘惑에 빠져 자아를 깨달을 수 있는 아까운 인생을 고스란히 낭비하고 동물적인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에코우⌟에서 해설한 ‘흥행물천사興行物天使’의 줄거리이며, 그러한 밑바닥 인생의 여자가 다행스럽게도 그를 만나 귀중한 자아를 찾는데 성공한다는 줄거리가 바로 ‘광녀狂女의고백告白’인 것이다.

 

 

‘하이얀천사(이수염난천사는규핏드의조부님이시다. 수염이전연(?)나지않은천사하고흔히결혼하기도한다.)’

 

 

텍스트에는 괄호 부분이 ‘하이얀천사’ 바로 옆 같은 행行에 괄호 없이 작은 글씨로 석줄로 기록되어 있다. 나의 컴퓨터 실력이 부족하여 괄호로 대신하였음을 이해하시기 바란다.

 

 

‘하이얀천사’는 기독교의 신 여호와를 의미하는데, 그는 ‘수염난천사’로 규정하고 있다. 무슨 뜻인가?

 

 

여호와는 신神이 아니라 육신의 사람이란 뜻으로 기독교는 거짓이라는 것이다. ‘규핏드’, 알다시피 하얀 날개를 가진 오동통한 귀여운 아이의 형상으로 사람들에게 사랑에 눈멀게 하는 신... 사람들로 하여금 종족보존의 의무를 충실하게 수행하도록 꼬드기는 신神... 그리고 ‘조부님’은 할아버님 즉, 그 ‘규핏드’를 만들어 내고 할아버지가 손자를 데리고 놀듯이 마음대로 ‘규핏드’를 조종하는 사람이다.

 

 

‘수염이전연(?)나지않은천사’는 여성女性으로 여기서는 성모 마리아를 의미하며, ‘결혼하기도한다.’는 ‘필요하면 결혼한다.’, 혹은 ‘성욕이 생기면 여자와 관계를 가진다.’는 뉴앙스가 짙은 부분인데, 성경에 성모 마리아가 성령으로 예수를 잉태하였다는 내용을 희롱하는 부분이며, 이 부분은 기독교의 신인 여호와마저도, 그는 이미 버려버린 종족유지본능인 섹스에 대한 욕심도 채 버리지 못한 한심한 존재로 여기는 부분이다.

 

 

‘흔히’라는 시어로 보아 ‘아담’이라는 남자를 낳았을 때에도 그랬을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아마 그는 이렇게 중얼거렸을 것이다.

 

 

‘풋... 보통 사람인 나보다 못한 찌질한 존재들을 신이라 여기다니, 한심하기는, 쯧쯧...’

 

 

이 부분에서도 그는 기독교를 신랄하게 비하시키고 있는데, ‘전연(?)’의 물음표 부분이 그것이다. 이 물음표의 의미는 성경에 예수가 동정녀 성모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고 쓰여 있는데, 마리아가 동정녀였다는 기록 자체를 의심하는 것이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나 천주교에서 이 대목을 읽는다면 심히 놀랄만한 일이나, 공학도였던 그는 처녀생식에 의한 잉태 자체를 인정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오늘날에 있어서는 극히 상식적인 사실이며 종교적인 사람이라 하더라도 충분히 의심해볼만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오히려 의심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이 부분은 개체유지본능에 미련을 채 버리지 못한 예수와 종족유지본능을 아직 버리지 못한 여호와를 예로 들어 기독교의 사기성과 유치함을 드러내고 있는 부분에 다름 아닌 것이다.

 

 

‘나의골편은2떠-즈(ㄴ).’

 

 

짐작하다시피 이 구절은 성경의 창조설을 간단하게 부인하는 것으로,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은 애초부터 픽션, 거짓이라는 뜻이다. 여호와가 아담의 짝 이브를 창조할 때 아담이 잠든 사이 갈비뼈 하나를 빼내어 만들었다는 내용을 희롱하는 부분인데, 하나를 뺐다면 2떠-즌(ㄴ)-1이 되어야 할 것이나 그렇지 않고 2떠-즌(ㄴ)이니 확실하고도 틀림없는 거짓말이란 뜻이다.

 

 

‘그하나하나에노크하여본다.’

 

 

21세기인 지금도 폐에 물이 찼는지의 여부는 갈비뼈를 두드려보면 알 수 있어, 갈비뼈에 대한 ‘노크’는 내과內科 의사들이 자주 사용하는 방법으로 알고 있다. ‘시제4호詩第四號’의 책임의사인 그도 자신의 갈비뼈에 노크를 한다.

 

 

무슨 까닭으로 하나하나에 노크를 한 것인가?

 

 

기독교의 신이라는 예수도 못한 일-모든 것을 스스로 포기한 채 굶어 죽는 것을 목표로 하는 단식을 하는-을 하고 있는 그의 육신의 내부는 과연 어떤 특별한 것이 있는 것인가를 검증하기 위한 것으로, 자아를 모르는 보통의 13인의 아해들과는 다른 특별한 내부 구조나 장기臟器가 혹여 자신의 몸 안에 있기 때문인가를 알아보기 위함이다.

 

 

‘그속에서는해면에젖은더운물이끓고있다.’

 

 

‘해면’은 구멍이 숭숭 뚫린 뼈, 보통 사람들의 육신을 의미하며 ‘더운물’은 피, 그러므로 ‘해면에젖은더운물’은 뼈에 흐르는 피, 육신에 흐르는 피, 그러므로 이 행은 ‘특별한 것이 속에 있는 줄 알았더니, 그런 것은 없고 깨달음을 얻어 기독교의 신보다 월등한 존재가 된 그도 그저 보통의 13인의 아해들과 똑같은 사람이더라...’라는 내용이다.

 

 

달리 말하면 보통 사람인 나도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으면 기독교의 신神인 예수보다 나아지는데, 그러한 가능성을 지닌 13인의 아해들에게서 기독교는 후안무치하게 혹세무민惑世誣民하여 그들의 고귀한 기회를 빼앗지 말아다오... 라는 뜻이 담겨있다. 바로 ‘시제5호詩第五號’에 나오는 ‘익은불서翼殷不逝 목불대도目不大道’와 한 자, 한 획도 틀림없이 동일한 부분이다.

 

 

이 부분을 달리 해석할 수도 있는데, ‘해면海綿’을 자아로, ‘더운 물’을 육신으로 볼 수도 있다. ‘더운 물’에 젖은 해면은 살아있는 육신에 스민 자아이며, 더운 물이 빠져나가면 육신에서 해방된 자아로 보아, 보통 사람들의 육신에는 그들이 느끼지 못하더라도 자아가 스며들어 숨 쉬고 있다는 표현으로 볼 수도 있다.

 

 

‘하이얀천사의펜네임은성피-타-라고.’

 

 

‘하이얀천사’는 이미 말한 대로 기독교의 신 여호와이며, ‘펜네임’은 스스로를 감추고 세상에 내세우는 자신의 아바타... 그런데 왜 하필이면 성 聖베드로가 여호와의 아바타인가? 그 이유는 다음에 밝혀진다.

 

 

‘고무의전선(똑똑똑똑버글버글)열쇠구멍으로도청.

(발신) 유다야사람의임금님 주무시나요?

(반신) 찌-따찌-따따찌-찌-(1) 찌-따찌-따따찌-찌-(2)

찌-따찌-따따찌-찌-(3)’

 

 

‘고무의전선(똑똑똑똑버글버글)’의 표현은 누구든 고무호스를 귀에 대보면 알 것이다. 평소에는 느끼지 못하던 소리들이 들려오는 것이다. 세상의 소리들이 소음騷音으로 확대되어 ‘똑똑똑똑버글버글’ 들리는 것인데, 이 구절은 기도교가 13인의 아해들이 사는 세상에 널리 확산되었음을 나타내는 부분으로 기독교는 세상을 시끄럽게 만드는 집단이란 뜻이 숨겨져 있다.

 

 

앞에서 말한 ‘흥행물천사興行物天使’에서 여호와의 직업이 거리의 음악사였던 것과 일맥상통하고 있는데, 기독교가 세상을 시끄럽게 만든다는 대목도 관련된 사람들에게는 심히 언짢아할 수 있는 대목이나, 많은 희생자를 냈던 십자군 전쟁이나 우스꽝스럽기만 한 마녀사냥을 생각하면 마음 놓고 반박하기도 어려운 일로 보인다.

 

 

또한 이 구절을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국天國’을 나타내는 것으로도 볼 수 있는데, 기독교의 天國천국은 온갖 소음으로 가득 찬, 지극히 시끄러운 곳이란 뜻이니, 두 가지 모두 가능한 해석이나, ‘베드로’나 ‘열쇠’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면 후자의 해석이 나아 보인다.

 

 

‘열쇠구멍으로도청.’의 ‘열쇠’는 성 베드로를 여호와의 아바타로 내세운 것을 감안하여 성 베드로가 가졌다는 천국의 열쇠로 보아야 하겠다. ‘열쇠구멍’은 현실에서 기독교가 감추고 싶어 하는 은밀한 부분-‘흥행물천사興行物天使’에서 이미 상세하게 살펴본 그들의 사기성詐欺性-을 드러내는 것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 열쇠 구멍에 고무호스를 꽂고 그가 도청을 하는 것이다. 그랬더니 아래와 같은 내용이 들리더라는 것이다.

 

 

‘ (발신) 유다야사람의임금님 주무시나요?

(반신) 찌-따찌-따따찌-찌-(1) 찌-따찌-따따찌-찌-(2)

찌-따찌-따따찌-찌-(3)’

 

 

발신發信은 누가 보낸 것이라고 해도 관계가 없다. 여호와는 어떤 존재인지 궁금한 사람이면 누구나 가능한 질문이나, 잠을 자느냐고 물어보는 것은 여호와가 잠이 필요 없는 신이 아니라, 육신을 가진 사람인가를 묻는 것이므로, 이것 역시 기독교도들이 들으면 마음이 심히 언짢아질 질문이다.

 

 

이 질문은 지극히 기독교를 증오하는 그가 발신했다고 생각하자. 그랬더니 답신이 되돌아온다.

 

 

‘찌-따찌-따따찌-찌-’ 세 번의 동일한 답신이다. 무슨 뜻일까? 궁금해서 인터넷을 뒤져 모르스 부호를 알아봤다. 그것을 여기에 싣지는 않겠다. 궁금하신 분들은 ‘체조’를 배우는 마음으로 스스로 알아보시기 바란다. ‘찌-’는 모르스 부호의 ‘-’를, ‘따’는 ‘•’로 생각하면 된다.

 

 

‘찌-따찌-따따찌-찌-(1) 찌-따찌-따따찌-찌-(2) 찌-따찌-따따찌-찌-(3)’를 풀어보면 ‘(1)얌(2)얌(3)얌’이라는 뜻이다. 무슨 뜻인가? 두 말할 필요 없이 무엇인가를 먹는 소리다. 여호와는 신이 아니라 육신의 인간이라는 의미인데, 1, 2, 3 세 번을 반복한 것은 그가 보기에 여호와는 항상 무엇인가를 먹고 있는, 지극히 탐욕스러운 존재라는 것이다.

 

 

‘흰뺑끼로칠한십자가에서내가점점키가커진다.성피-타-군이나에게세번식이나아알지못한다고그런다. 순간닭이활개를친다······’

 

 

이 부분은 그의 기독교에 대한 희롱이 극에 달하는 부분이다. 그가 살던 1920, 30년대에는 교회의 십자가를 하얀 페인트로 칠했던 모양이다. 이미 ⌜에코우⌟에서 해설한 오감도烏瞰圖의 ‘이인二人···1···’, ‘이인二人···2···’에서 보았듯이, 그의 생각에 기독교는 마피아의 대명사인 알 카포네가 운영하는 사업체라는 것인데, 문제는 ‘뺑끼’라는 시어로 이것은 ‘페인트’의 속어俗語로 볼 수 있으니, 한마디로 말해 십자가는 속물이란 뜻이다.

 

 

‘내가점점키가커진다.’는 그의 존재가 십자가보다 더 커진다는 것으로, 그가 기독교의 신인 여호와보다 한 수 위라는 것을 뜻한다.

 

 

‘성피-타-군이나에게세번식이나아알지못한다고그런다. 순간닭이활개를친다······’

 

 

이 부분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신약 성경에 나오는 예수가 체포되는 장면을 가져와 그의 자존심을 한껏 드높이고 있다.

 

 

‘성피-타-군’의 ‘군’이라니... 기독교도들의 눈에서 번쩍하고 불꽃이 튈법한 대목이나, 무교인 나는 웬일인지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참을 수 없다. 김군, 이군, 최군... ‘성피-타-군’, ‘성피-타-군’이라... 기독교를 아예 납죽 깔아뭉개는 장면이다.

 

 

이 부분은 재미있는 삼단논법三段論法을 포함하고 있는 부분으로, 이미 앞에서 성 베드로를 여호와의 분신인 아바타라 말하였고, 베드로는 예수를 신, 주(主)라 부르므로, 베드로가 그를 부인하였다는 것은 적어도 그는 기독교의 신인 여호와가 신, 주(主)로 부를 수 있는 위치에 도달해 있다는 사실을 숨겨놓은 부분이라 하겠다. 참으로 대단한 자부심이 아닐 수 없다.

 

 

‘ 어엌 크 더운물을 엎질러서야 큰일날노릇━━’

 

 

마지막까지도 예수를 비웃고 있는 대목이다. ‘더운물’이 상징하는 것은 피, 그러므로 ‘더운물을 엎질러서야’는 ‘피를 흘려서야’라는 뜻으로,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을 때, 로마 병사가 옆구리를 창으로 찔러 피를 흘렸다는 대목을 가져온 것이다.

 

 

‘큰일날노릇━━’은 예수의 죽음을 예로 들어 기독교를 희롱하는 부분인데, ‘엘리엘리 라마싸박다니’ 즉, 죽음에 임박하여 ‘주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말을 하는 것은 신神으로 추앙받는 존재가 하기에는 참으로 ‘큰일’날 정도로 창피한 것이라는 의미다. 육신의 죽음을 두려워하는 신神이라니... 예수가 만약 진정한 신이었다면 그런 말을 해서는 참으로 큰일 날 노릇 아니겠는가.

 

 

이미 보았듯이 그는 이 ‘내과內科’에서 기독교는 사기詐欺, 속임수라고 말한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神인 여호와나 예수라는 존재는 보통 사람들과 다름없는 인간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을 신격화시켜, 오감도烏瞰圖의 ‘시제5호詩第五號’, ‘이인二人···1···’, ‘이인二人···2···’, ‘흥행물천사興行物天使’에서 해설하였듯이, 사람들을 현혹시키며 대代를 이어 사람들에게 기생寄生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그의 많은 작품에서 기독교를 파멸시키고, 그 자신을 기독교의 신보다 월등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번 언급하였지만, 양식 있는 기독교도라면, 그의 주장이 100% 틀리다는 반박은 하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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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필·기타
    • 혈서삼태(血書三態)(신여성, 1934. 6)
    • 산책의 가을(신동아, 1934. 10)
    • 문학을 버리고 문화를 상상할 수 없다(조선중앙일보, 1935. 1. 5)
    • 배의 역사(신아동, 1935. 2)
    • 산촌여정(山村餘情)(매일신보, 1935. 9. 27~10. 11)
    • 나의 애송시(중앙, 1936. 1)
    • 서망율도(西望栗島)(조광, 1936. 3)
    • 편집후기(시와 소설, 1936. 3)
    • 조춘점묘(早春點描)(매일신보, 1936. 3. 3~26)
    • 여상4제(女像四題)(여성, 1936. 4)
    • 내가 좋아하는 화초와 내 집의 화초(조광, 1936. 5)
    • 약수(藥水)(중앙, 1936. 7)
    • EPIGRAM(여성, 1936. 8)
    • 동생 옥희 보아라(중앙, 1936. 9)
    • 아름다운 조선말(중앙, 1936. 9)
    • 행복(여성, 1936. 10)
    • 가을 탐승처(探勝處)(조광, 1936. 10)
    • 추등잡필(秋燈雜筆)(매일신보, 1936. 10. 14~28)
    • 19세기식(34문학, 1937. 4)
    • 권태(조선일보, 1937. 5. 4~11)
    • 슬픈 이야기(조광, 1937. 6)
    • 오감도 작자의 말(조광, 1937. 6)
    • 문학과 정치(사해공론, 1938. 7)
    • 병상 이후(청색지, 1939. 5)
    • 동경(東京)(문장, 1939. 5)
    • 서신(2~10)(이상전집, 1956)
    • 얼마 안 되는 변해(현대문학, 1960. 11)
    • 무제(1)(현대문학, 1960. 11)
    • 이 아이들에게 장남감을 주라(현대문학, 1960. 12)
    • 모색(현대문학, 1960. 12)
    • 무제(2)(현대문학, 1960. 12)
    • 어리석은 석반(현대문학, 1961. 1)
    • 첫번째 방랑(문학사상, 1976. 7)
    • 공포의 기록(문학사상, 1986. 10)
    • 공포의 성채(문학사상, 1986. 10)
    • 야색(문학사상, 1986. 10)
 
  • [1] 자두의 옛말.
  • [2] 아들을 낳지 못해서 남편에게 구박받으며 지내던 스트레스를 이상에게 플었고 이상을 입양한지 얼마 안되어 자신에게도 아들이 태어나자 이상을 대놓고 무시하는 경향을 보였다고 한다. 이 때부터 이상은 여성을 혐오하는 경향이 생겼다고 한다. 그가 기누코, 금홍, 변동림과 권순옥 등 수많은 여성과 염문을 뿌렸을 뿐 아니라, '꾀꼬리동산'이라는 유사 스와핑을 통해 선구자적 모습을 보였던 것도 이때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을 듯 하다.
  • [3] 이상이 죽기 직전 연거푸 남긴 3편의 문학작품 중에는 '산호 채찍을 잃어버렸다'란 구절이 있는데, 총독부 소속 건축기사로 일단 출세한 후에는 맥이 풀린 듯 모든 것을 놓아버렸다는 그의 인생을 반영한 표현인 듯하다.
  • [4] 말년에 이상이 도쿄에서 김기림에게 쓴 편지에 "암만해도 나는 19세기와 20세기 틈바구니에 끼여 졸도하려 드는 무뢰한인 모양이요. 완전히 20세기 사람이 되기에는 내 혈관에는 너무도 많은 19세기의 엄숙한 도덕성의 피가 위협하듯이 흐르고 있소그려" 라고 쓰기도 하였다."
  • [5] 새로 부임한 일본인 상사와의 마찰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는데 폐결핵 증상이 나타나자 곧바로 회사를 그만 두었다고 한다.
  • [6] 금홍과의 만남과 헤어짐을 이야기 한 '봉별기(逢別記)'라는 단편을 적기도 했다. 이 단편이 마음에 들거든 인디밴드 '가을방학'의 '속아도 꿈결'이라는 노래를 한 번 들어보도록 하자.
  • [7] 보면 알겠지만 다른 지방에서 기생으로 일하는 금홍의 필연적인 NTR(...)을 안타까워하는 내용이다. 결국 서울에 다방을 차리고 금홍을 불러 마담자리에 앉혔지만 현실은...
  • [8] 나중에 김유정이 병사할때 유언으로 닭이 먹고싶다고 하자 이상은 사방으로 닭을 구하려 다녔지만 돈이 없어서 사질 못했다.(...) 그리고 김유정이 죽은뒤 18일후, 이상도 죽게 된다.
  • [9] 그런데 69다방에 있어서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간판까지 걸고 개업날까지 받아놨는데 아는 사람들은 킬킬대면서, 혹은 민망해하면서 지나가다가 그 중 한 사람이 경찰에 신고를 때려서 영업허가가 취소됐는데, 이상은"에라이 볍진들아 그걸 누가 말해줘야 알았냨ㅋㅋㅋㅋㅋ"하고 고소해했다는 이야기.
  • [10] 이미 전에 동경에 가본적이 있던 변동림과 구본웅은 이상의 동경행을 결사반대했기 때문에 새벽열차를 타고 몰래 동경으로 갔다고 한다.
  • [11] 이게 별다른 혐의가 있던 것도 아니고 그냥 산발하고 꾀죄죄한 폐인의 모습으로 다녀서 그랬다고 한다 참고로 이상은 곱슬머리에다가 서양인 처럼 수염이 목까지 자라는 체질이었다.
  • [12] 당시 이상을 담당했던 일본인 의사가 "어쩌면 젊은 사람을 이렇게까지 되도록 버려두었을까? 폐가 형체도 없으니..." 라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다 참고로 이상은 엄청난 골초였다. 하루에 담배를 50개피 피는것을 자신의 일과라고 표현했을 정도
  • [13] 실물은 국립현대미술관 소장이며 이따금 근현대미술과 관련한 전시에서 볼 수 있다. 그리 크지 않은 그림이지만 당시의 다른 그림들과는 다르게 음울하면서 묘한 색기가 보는 이의 발걸음을 멈추게한다. 일각에서는 이 그림을 두고 이상과 구본웅의 동성애적 관계를 암시한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 [14]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인게 이상은 정상적인 소설도 썼던 사람이다. 아무 계산 없이 썼다고 볼 수 없다. 아무 의미없이 휘갈겨 썼다기엔 그의 소설과 시가 서로 맞닿아 내통하는 부분은 언제나 차분했던 것이다.
  • [15] 이상이 살던 일제 강점기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이 대부분 서양의 가치관을 배우기도 급급한 상황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그의 천재성을 엿볼 수 있다. 다들 "근대성"을 배우는 걸음마 단계에 그것에 대한 통찰을 끝내고 포스트모더니즘 단계에 들어간 것이니...
  • [16] 해석이 가능한지 불가능한지 자체가 대학원급 떡밥
  • [17] 2003년도 수능이었다.
  • [18] 사실 당황하지 말고 침착하게 잘 읽어보면 풀만한 문제다. 보기가 뻔하기 때문.
  • [19] 답은 1번 보기 '이 시가 당시 현대시의 주된 흐름을 반영하고 있다는 비평 자료를 찾아볼 필요가 있겠어' 이다. 사실 보기로 제시된 이상의 시는 볼 필요도 없다(...) 1~5번 보기에서 적절하지 않은 것을 고르라고 했으니 그 중 가장 튀는 것(다른 지문과 비교하였을 때 오류가 있는 것)을 찾는 편법으로 풀 수 있다. 특히 3번 보기에선 독자들이 시인을 '미쳤다'고 표현했다 하였고, 5번 보기에선 편집진의 압력으로 연재가 중단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2번 보기에선 기존의 언어체계를 불신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아주 상식선에서 생각했을 때 이 보기중 적어도 2개가 맞다면(5지선다형 문제니까 답은 1개이니 다른 4개는 맞는 설명이라는 소리가 아닌가?) 이 시가 그 당시 현대시의 주류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은가? 굳이 헷갈린다면 3번 보기와 헷갈릴 수도 있는데(베베꼬고 의미불명의 표현법을 사용한 작품이 보통 당대에 인기가 있고 주류가 되었던 경우는 파블로 피카소정도를 제외하면 거의 없지만 '그럴 수도 있다는 가정' 하에서) 그 때 이 시를 보면 된다. 이런 내용도 없어뵈는 이상한 시가 나왔을 때 일반 독자들에게 '미쳤다'는 평가를 받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하다.적어도 학생들은 '이런 문제가 나오다니 미쳤다!' 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 [20] 홀수형은 43번 문제로 출제되었지만 짝수형에서는 일찌감치 나왔다.
  • [21] 심지어는 작가를 때려죽이겠다는 투고까지 있었다고 한다.
  • [22] 1934년 9월 1일 창간된 순문예 동인지. 회원 중에 황순원도 있었다. 모더니즘과 초현실주의를 추구했던 동인. 창간멤버(신백수·이시우·정현웅·조풍연) 인 조풍연, 정현웅을 제외하면 모더니즘과 초현실주의를 추구했다고 한다. 참고로 시인들의 동인지였기 때문에 시인으로 문단에 데뷔했던 황순원 도 여기에서는 시를 썼다. 말하자면 황순원의 아들 황동규가 시인이라고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다. 하긴 황순원이 본격적으로 소설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것은 37년 이후부터였으니... 참고로 삼사문학파 동인들이 대부분 어린 시절부터 신식 문물을 접하며 거기에 익숙해져 있던 것과 달리 이상은 백부로부터 유학과 한문교육을 받으며 성장했기 때문에 문학에 관심이 있다는 공통점 이외에는 서로 기본적인 사고의 방식부터 맞지 않았고 이에 대해 답답해하던 이상은 서구의 사상을 완전히 이해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져 도쿄행을 하게 된다. 이상의 시에 나타나는 분열적인 분위기가 서구화, 현대화된 사상과 생활을 염원하였으나 이를 100%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신의 유교적, 전통적인 가치관의 충돌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 [23] 그런데 국문학자들과 심지어 수학계통 교수들까지 연구에 참여하여(..) 대부분의 시는 해석된 상태다
  • [24] 원래 이상이 처음 시를 발표했을 시기에는 일본어로 시를 썼었고 일본어는 띄어쓰기 자체가 없기에 일본어 원문을 한글로 번역하여 발표할 때도 띄어쓰기를 하지 않았다는 추측이 있다. 이상이 쓴 일어시들은 띄어쓰기를 안하는 표현법 자체보다는 수학기호나 외국어 등을 사용하여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표현한 시가 대부분이기도 하고
  • [25] 일제치하의 지식인이 가지는 고뇌를 표현했다는 해석도 있다.
  • [26] 이와 관련된 대표적인 작품으론 且8氏의出發이 있다. 학자들은 처음엔 이 시를 且8의 모양만 보고 성적 시라고 생각했으나, 알고보니 且8이란 且八로 具(구)의 파자였다. 이 시는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화가 구본웅의 성공을 기리기 위한 시였다.
  • [27] 물론 '비교적.' 전혀 없지는 않다
  • [28] 여러 작품들에 나타나는 경제적 무능력에 대한 한탄이 그에 대한 반증이라고 본다.
  • [29] 이상의 대다수 시를 성적인 의미가 담겨진 시라고 해석하였다.
  • [30] 작품 뿐 아니라 그 자신의 생애마저 이상을 따라한다. 결국 이상이 죽은 병원에서 독약을 마시고 사망
  • [31] 이전에는 이상이 조선일보에 연재한 오감도(烏瞰圖)와 같은 제목이라고 알려졌었지만, 연구를 통해 조감도(鳥瞰圖)가 맞다고 확인됐다. 제목만으로는 사실상 오감도의 전신.
  • [32] 연작시로 조감도라는 표제로 두 편의 시가 발표되었다.
  • [33] 이것도 연작시다.
  • [34] 이것도 연작시인데, 건축무한육면각체의 항목에도 나와있는 것처럼, 보통 「AU MAGASIN DE NOUVEAUTES」이 건축무한육면각체라는 제목으로 불린다.
  • [35] 이상이 발표한 최초의 한글시. 이전에 발표한 시들은 모두 일본어로 씌어진 시이다. 가톨닉靑年
  • [36] 원래는 「一九三三, 六, 一」이다.
  • [37] 연작시다.
  • [38] 여기서부터 사후 발표된 시들
  • [39] 생전에 제목을 붙이지 않은 유고시다.
  • [40] 위와 마찬가지로 생전에 제목을 붙이지 않았다.
  • [41] 연작시다.
  • [42] 이상의 유일한 장편소설.
  • [43] 혹자는 동해, 날개, 봉별기를 순서대로 금홍과의 동거 이전, 동거 당시, 동거 이후를 그려낸 결혼 3부작이라 칭한다.
  • [44] 이상이 쓴 유일한 동화. 김해경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했다. 그런데 이야기가 너무 토속적이라 김해경이라는 동명이인의 작품이 이상의 작품으로 둔갑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리고 완벽한 창작이 아닌 일본 작품 패러디라는 주장도 있다.
  • [45] 이상이 1937년 4월 17일 사망하였으므로, 여기서부터 이상 사후에 발표된 작품들이다.
  • [46] 이전까지 이 문서에선 종생기가 이상 생

 

1. 이름에 대한 유래 

본명은 김해경(金海卿). 시인이자 소설가이자 건축가. 한때는 찻집 운영 등도 했다. 191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보성고보를 거쳐 경성고등공업학교(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의 전신 중 하나) 건축과를 졸업 후 조선총독부에서 건축기수가 되었다. '이상' 이라는 필명은 건축기사로 활동하던 당시 한 인부가 김해경을 '긴상(김씨)'라고 불러야 할 것을 김 씨와 이 씨를 헷갈려 실수로 '이상'이라고 불렀던 것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널리 퍼져 있지만, 친구 구본웅이 선물로 준 오얏[1]나무(李: 오얏나무 리)로 만들어진 화구상자(箱: 상자 상)를 받고 친구의 호의에 보답하기 위해서 이상이라는 필명을 정하게 되었다는 설도 나와 있다. 전자는 이상의 여동생과, 아내였던 변동림이 했던 증언이지만 후자는 보성고보 시절 직접 디자인한 졸업 앨범에 이상이라고 서명한 것이 발견되어 아무래도 후자가 맞는 듯 하다.

 

2. 생애 

 

2.1. 유년 시절 

그림에 재주가 있어서 어렸을 때는 길바닥에 버려져있던 목단 열 끗을 똑같이 그려내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도 하고, 자 없이도 직선을 긋는 재주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어려운 집안 사정으로 거의 태어나자 마자 몰락한 양반인 백부의 집으로 입양되어 유교적인 가치관과 한문교육을 받으며 생활했는데 그 때 그의 계모 때문에 상당히 무서운 시절을 보냈다.[2] 계모 뿐만 아니라, 백부 또한 어린 김해경을 친아들로 대하지 않고 영특한 머리로 가문을 일으킬 인재로만 생각하여 항상 엄격한 모습으로만 대했기 때문에 이상은 백부의 지나친 기대에 멍들 대로 멍든 채 자라야만 했다.[3]

이러한 성장배경 탓에 이상은 현대화된 도시인의 삶을 살았지만 남존여비, 가부장적인 관념 등 보수적인 가치관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4] 아래에 다시 서술하겠지만 도쿄로 유학을 간 것도 서구화된 도쿄의 지식과 사상을 머리에 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도쿄에 온 직후 도쿄에 실망하여 김기림에게 보낸 편지에서 "어디를 가도 구미가 당기는 것이 없소그려! 꼴사납게도 표피적인 서구적 악습의 말하자면 그나마도 그저 분자식이 겨우 수입되어서 진짜 행세를 하는 꼴이란 참 구역질이 날 일이요 나는 참 동경이 이따위 비속 그것과 같은 물건인 줄은 몰랐소. 그래도 뭣이 있겠거니 했더니 과연 속 빈 강정 그것이요." 도쿄를 비판하였다.

 

2.2. 문학가 이상 

1931년 7월 '이상(異狀)한 가역반응' 이라는 첫 시집을 냈다. '이상한 가역반응', '파편의 경치', 'BOITEUX·BOITEUSE', '공복' 등을 냈으며 그 후 8월 일어로 쓴 시인 '조감도(鳥瞰圖)' 와 '삼차각설계도'를 조선과 건축에 발표했다. 이 해에 서양화가 구본웅과 교제하기 시작했으며, 백부가 죽고 이상은 친가로 돌아오게 된다. 친부는 사고로 손가락을 잃은 가난한 전직 이발사였는데 양반이라는 자존심이 강했던 백부의 집에서 자란 이상은 가난하고 배운 것 없는 친부가족에게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였다. 이상은 이 당시 자신의 모습을 <슬픈 이야기>라는 수필에서 묘사하고 있다. 

다음해 '비구(比久)'라는 가명으로 소설 '지도의 암실', 시 '건축무한 육면각체'를 내고 그 다음해인 1933년에 심한 각혈증세로 건축기사 일을 그만둔다.[5]

 

2.3. 금홍이 

요양 갔던 온천에서 기생 '금홍'과 알게 되어 동거하기 시작한다. 이상의 소설 '날개'는 금홍과의 동거 생활에서 얻은 체험들을 바탕으로 쓴 소설로,[6] 주인공(이상 자신)은 자신의 방에만 틀어박혀 아내(금홍을 뜻한다. 중간에 나오는 '연심이'는 금홍의 실제 이름이라고 한다. 또한 소설과 같이 실제로도 금홍에게 맞고 지냈다고 한다...)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무능력하게 늘어져 있는 사람으로 묘사된다.

그럼에도 금홍을 퍽 사랑했는지 '이런시'에서 금홍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런시 - 이상
역사를하노라고 땅을파다가 커다란돌을하나 끄집어내어놓고보니 도무지어디서인가 본듯한생각이들게 모양이생겼는데 목도들이 그것을메고나가더니 어디다갖다버리고온모양이길래 쫓아나가보니 위험하기짝이없는큰길가더라.
그날밤 한소나기하였으니 필시그돌이깨끗이씻겼을터인데 그이튿날가보니까 변괴로다 간데온데없더라. 어떤돌이와서 그돌을업어갔을까 나는참이런처량한생각에서 아래와같은작문을지었도다.
'내가 그다지 사랑하던 그대여 내한평생에 차마 그대를 잊을수없소이다. 내차례에 못올사랑인줄은 알면서도 나혼자는 꾸준히생각하리다. 자그러면 내내어여쁘소서.'
어떤돌이 내얼굴을 물끄러미 치어다보는것만같아서 이런시는 그만찢어버리고싶더라. [7]

1934년 구인회에 들어 명사들과 교제하기 시작했으며 박태원의 신문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 '하융(河戎)' 이라는 가명으로 삽화를 그리기도 한다. 구인회에서 같은 병을 앓고있던 소설가 김유정과 특히 친하게 지냈으며, 동반자살을 권유하기도 했다.[8] 1933년부터는 차례로 종로1가에 다방 <제비>, 인사동에 카페 <학>, 종로 1가에 다방 <69>을 개업하여 돈을 벌려 했으나 대차게 말아먹게 된다.[9] 경영에 있어서는 천재가 아니었던 듯. 오죽했으면 어떻게 해야 돈을 벌 수 있냐고 하소연했을 정도. 결국 그 사이 금홍은 도망가고 가족들은 빈민촌으로 이사가게 된다. 1936년 전부터 알고 지내던 변동림과 결혼한다.(변동림 역시 이상의 소설에 '임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2.4. 일본 유학과 사망에 이르기 까지 

1937년 도쿄의 서구화된 문물에 익숙해지기 위해, 힘을 내기 위해 무작정 도쿄로 여행을 떠났으나, (이상이 도쿄로 떠나기 직전 도쿄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있었던 김기림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문학은 그만 두겠지요 라고 적기도 하였다.) [10] 이내 도쿄에 실망하고 서울로 돌아가려 한다. 하지만 서울로 가는 여비도 떨어지고 폐결핵의 악화와 새 출발의 발판기점으로 삼으려고 했던 동경에 대한 환멸감으로 인한 자괴감에 우울증이 걸린 이상은 햇빛도 들지않는 싸구려 방을 얻어 홀로 은거해버리고 그 직후 동경에서 불령선인(사상불온혐의)으로 체포되었다.[11] 그러나 심한 병(폐병) 때문에 병보석으로 한달만에 석방된 후 동경제국대학 부속병원에서 사망했다.[12] 이상의 부고를 듣고 급히 도쿄로 온 변동림이 그의 유해를 화장, 미아리 공동묘지에 묻었으나 돌보는 이가 없다가 한국전쟁 후 미아리 공동묘지가 사라지며 유실되었다. 

 

3. 이상의 사람들 

이상의 아내 변동림은 이상 사후 '김향안' 이라는 가명으로 서양화가 김환기와 결혼했으며, 활발한 문학활동을 했다. 김환기 사후에는 사비로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환기미술관을 설립했는데, 사설 기념관으로는 국내 최초이다. 이상의 자취를 정리하는 데에도 많은 도움이 됐었다. 변동림은 2004년 사망했다.

이상의 대표작으로는 흔히 '건축무한육면각체' 라고 알려진 시로, 이 시를 주제로 소설, 영화도 나왔다. 사실 건축무한육면각체는 시집의 제목이며 해당 시의 진짜 제목은 'AU MAGASIN DE NOUVEAUTES('새로운 가게에서', 프랑스어다)'

 

3.1. 구본웅과의 우정 

사족으로,그 당시 화가 구본웅과 같이 다니는 것을 그린 만평에서는 옷 잘입는 멋쟁이 '스타일리스트'로 평가했다. 지금봐도 옷 맵시나 헤어스타일도 꽤 멋있는 편이다.
다만 당시 사람들이 창백한 피부의 퀭한 남자가 꼽추와 함께 다니는 모습을 보고 서커스단이 들어왔나 착각한 적도 있다...

구본웅은 '친구의 초상'이란 제목으로 이상의 초상화를 그렸다. 

친구의 초상, 캔버스에 유채 65 x 53cm, 1935년[13]
민음사에서 출간한 이상 단편소설 전집의 표지가 이 그림이다.

그의 임종시 유언은 "레몬 향기가 맡고 싶소"라고 알려져 있었으나, 후일 이상의 아내였던 변동림이 "멜론이 먹고 싶다"였다고 술회하였다. 다음은 이상의 마지막 모습을 회고한 변동림의 글이다. 

“나는 철없이 천필옥에 멜론을 사러 나갔다. 안 나갔으면 상은 몇 마디 더 낱말을 중얼거렸을지도 모르는데. 멜론을 들고 와 깎아서 대접했지만 상은 받아넘기지 못했다. 향취가 좋다고 미소 짓는 듯 표정이 한 번 더 움직였을 뿐 눈은 감겨진 채로. 나는 다시 손을 잡고 가끔 눈을 크게 뜨는 것을 지켜보고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김향안 에세이 ‘월하의 마음’ 중)

그의 생가는 종로구 통인동에 있다. 현재는 보통의 가게로 쓰이고 있으며, 근처 골목에 이상 생가가 있음을 알리는 작은 비가 하나 있다.

뱀발로 대표 시들이 너무 해괴한지라 "그냥 이거 아무 의미없이 휘갈겨 쓰고 사람들이 고민하는 모습을 즐기는 변태인 것이 아니냐?"라는 소리도 있는데... 진실은 저 너머에[14]. 이 말이 맞다면 이상은 김춘수보다 먼저 무의미시를 썼다는 말이 된다. 흠좀무. 혹자는 거울처럼 앞과 뒤가 구조적이든 의미로든 상통하거나 대비되는 경향이 있다고 하는데 알아서들 생각하자.

 

4. 예술적 재능 

건축과 출신이라 그런지 자신이 경영한 다방을 직접 디자인했다고 한다. 심지어 당시 월간 잡지였던 '조선과 건축' 표지 공모전에선 1등과 3등을 동시에 차지했다.
반대로 이과를 전공했으면서도 고대 물리학 등 계산적이고 자연 파괴적인 서양의 가치관[15]들에 대해서 상당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데, 아래의 시가 이를 잘 보여준다.

林檎一個ガ墜チタ。地球ハ壞レル程迄痛ンダ。
最後。
最早如何ナル精神モ發芽シナイ。
능금 한 알이 추락하였다. 지구는 부서질 정도만큼 상했다.
최후.
이미 여하한 정신도 발아하지 아니한다.
- 이상, <최후> 
 
아무튼 요약하자면 굴곡있는 인생의 요절한 시인으로 국문과목에 한해 난해시를 써서 학자들에게는 과중한 업무와, 학생들은 난해한 문제와 씨름하게 만든 장본인 중 하나(이른바 국어천왕).

이 사람의 난해한 글과, 자전적인 소설을 읽어보면 자칭 천재가 아니냐는 소리가 나오고, 그가 남긴 글을 보면 스스로 천재라는데 상당한 집착을 가졌음을 알 수 있기에 자칭 천재다.

하지만 일반적인 개그 캐릭터와 달리 이상이 남긴 글과 디자인들은 진정한 천재의 유물이다. 딱히 못 믿겠거든 차라리 그가 1년동안 담당한 '조선과 건축' 표지 디자인을 봐라. 지금 봐도 현대적인 디자인을 볼 수 있다. 다만 이상 본인은 자신이 다방면에서 천재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대중과 전문가들 다 인정하는 것은 건축 디자인 재능이다. 

 

5. 한국문학사 최종보스 수능출제 되다 


수능시험으로 인해 다급한 고3들의 입장에서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 사람의 작품은 거의 무시해도 상관없다는 게 정설. 예외적으로 소설인 날개(이미 한번 나왔다)와 수필 '권태', 시 중에서는 거울정도가 그나마 이해할만한 레벨이고, 오감도나 건축무한육면각체같은 물건이 진지하게 수능에 나오기라도 하는 날에는 그 후폭풍이 어마어마하기 때문에 절대로 이 사람의 작품은 수능에는 못 나올 것이다. 아니 일단 상당수의 시가 해석이 무의미하기 때문에 낼 수가 없다….[16]

…라고 모두들 안심하고 있던 21세기의 어느 겨울날[17]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심지어 숫자가 좌우반전이라서 이미지로 인용할 수 밖에 없다.)

2003년 수능 언어영역에서 만점달성을 가로막는 최종보스로서 등장한 것! [18][19] 자신의 수능날, 입술이 바짝 마르도록 긴장한 채 1교시 언어영역을 달리고 있는데 듣기평가 끝나자마자 이런 문제가 갑툭튀[20]했다고 상상해보자. 이건 미친 짓이야, 난 여기서 나가겠어. 참고로 문제에서 말하는 '윗글'은 '예술의 본질은 무엇인가' 하는 내용이다(…).

이후 2006년 수능에 수필 '조춘점묘'가 등장했지만그나마 상식적인 글이라 문제가 쉬웠고, 2009년 7월 교육청 모의고사에서는 오감도 4호가 다시 한 번 등장했다! 다만 듣기평가 문항이었기에 해설을 들려줄 수 있었고 그 해설을 토대로 문제를 냈다고. 천잰데?

그리고 2014년 수능 국어영역에서 A,B형 공통문항으로 수필 '권태'가 마지막 지문으로 출제되었다.

 

6. 평가 

 

6.1. 문학적 평가 

그의 대표작인 '오감도'가 신문에 게재되었을 때, 독자들이 반발이 매우 거셌다고 하는데[21], 반면에 문학계에서는 커다란 이슈로 떠오른 듯하다. 이후 이상의 문체를 따라하는 학파가 생겼는데, 그것이 바로 삼사문학파[22]. 그러나 삼사문학파는 이상의 신드롬을 이어가지 못하고 이상의 부록 현상으로 끝나버렸다.

의지를 완전히 무시한 자동기술법, 전문용어와 외국어, 그리고 숫자 및 기호의 남발, 전혀 말이 통하지 않는 이상한 문장,[23] 기존의 언어체계를 무시하는 기법 등, 모더니즘에 입각한 아방가르드 문학의 대표적인 인물로, 이상의 시는 아직까지도 '최신식' 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다만 그는 기존의 문법을 파괴하기 위해 시에서 띄어쓰기를 전혀하지 않는 ‘다다’ 기법을 사용했으나, 알파벳, 불어, 독어와 달리 음절단위의 문장으로 구성된 한글은 다다이즘 기법에 한계가 있었으므로 실험단계에서 그치고 말았다.[24]

다만 이상은 짧은 시간동안 2000여편이 넘는 작품을 남겼기 때문에 자동기술법을 사용하기에는 작업시간이 너무나 짧았다는 주장도 있다. 밝혀지지 않은 모종의 제작 '공식'이 있다고 추정되기도 한다.

 

6.2. 엇갈리는 찬반양론 

이상이 쓴 시에 대해서는 찬반양론이 거세지만 그가 쓴 수필을 보면 이상이 가진 글에 대한 재능을 엿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산촌여정>과 <권태>라는 직품에는 현대화되고 서구화된 일상에 익숙해진 도시인이 서구의 문물이 들어오기전의 전통적인 자국의 모습을 간직한 시골에서의 일상에 적응을 못하고 권태에 빠진 모습을 뛰어나게 묘사하였고 수능에도 나온 <조춘점묘>는 쉴 틈 없이 꽉막힌 답답한 현대인의 일상을 콘크리트로 사방이 둘러쌓여 어디로 가든 같은 모습을 한 빌딩에 비유하면서 그 빌딩의 소유자는 보험회사라는 거대한 집단이라는 점을 들어 개인이 무엇인가를 소유하는 주체가 되지 못하는 부조리한 현대인의 삶을 비판하였다.[25] 이상의 수필들은 작가에 대하여 모른채 단순히 글 자체로만 감상하면 마치 '산업화가 한참 진행되었던 60년대말이나 70년대 작가가 쓴 글로 보인다. 그래서 글의 지은이가 이상이라는 사실을 알자 깜놀하는 사람들도 많다. 특히 국문학 전공자들이 더 그렇다고 한다. 다만 이는 이상의 한계로 보이기도 한다. 일본이 '민족문화말살정책'이라는 극악한 정책을 펼치자 문인들은 일제의 한글 금지법 등의 정책에 항의하기 위하여 절필을 했거나 글에 몰래 일제를 규탄하는 내용을 집어넣었던 시기에 이상은 다른 문인들에 비해 식민지의 지식인이라는 것에 크나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는 해석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특히 이상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박정희의 유신독재 시절에 가장 극에 달했다. 고은의 이상평전이 대표적인 예 

그의 글에 대한 해석이 지금도 계속 시도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항을 겪고 있는 부분이 많다는 것은 그의 비상함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증거.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사람인지라, 이상 본인의 삶이나 글을 쓰던 당시의 이상의 상황 등을 파악하고 읽는다면, 악명에 비해서 너무나도 간단히 해석되는 작품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26]

의외로 도깨비를 주제로 한「황소와 도깨비」라는 어린이용 동화를 쓴 적이 있다. 이상이 쓴 유일한 동화 작품. 그러나 이상이 쓰지 않았다는 설도 있다. 

 

7. 대중매체의 이상 


 

1995년도 한국영화인 '금홍아 금홍아'에선 단명연기의 본좌 김갑수가 이상, 구본웅은 가수 김수철이 연기했다. 포스터의 인상과 광고때문에 에로물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현실은 시궁창을 처절하게 보여주는 이상 전기 영화이다. 금홍이로 나온 이지은의 발연기만 눈을 감으면 나름 괜찮은 작품으로 평은 좋았지만 흥행은 실패했던 영화이다. 물론 저 정도 에로물도 안 나온다 어쨌든 젊은 시절의 김갑수를 볼 수 있는 작품이니 케이블채널에서 방영하면 한번 봐두자. 근데 캐스팅이 에러인게 이상이 금홍이를 알게된게 1933년이었으니 1910년생인 이상은 당시 24살(만으로는 23살)이었다.
윗 표지의 김갑수의 얼굴이 24살의 얼굴인가??

건축무한육면각체가 뜻하는것이 바로 백화점인데 1937년 동경으로 간 이상이 현대식 백화점을 구경하고 느낀바를 담아낸 시인데 이 시가 부산롯데백화점 지하1층 롯데호텔로 가는 통로에 벽면을 장식하고 있다.번쩍거리는 백화점의 디스플레이와 어울려 사뭇 괜찮은 조화를 이루고 있다.이 백화점 점장의 문학적 소양을 알수있는 부분으로 부산 사시는 분들은 지나가다 유심히 보시길 

2013년 11월28일 mbc드라마 페스티벌 '이상 그 이상,역시 이상이 나온다.
이상을 중심으로 그의 전 총독부 동료의 살인사건에 휘말린 이상의 내용이 전개되는 내용으로 이상 역에 조승우 구본웅에 정경호 이상을 사모한 여인에 박하선이 캐스팅 되어 화려한 캐스팅을 자랑한다.


 

8. 여담 

여담이지만, 이상이 죽기 전 당시 서양화가 길진섭이 이상의 데드 마스크를 떴다는 소문이 있다. 하지만 길진섭이 1948년 월북해버려 그 진위는 불투명하다. 김연수의 장편소설 "꾿빠이 이상"도 그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첫 시집을 낸 1931년부터 건축일을 그만둔 1933년까지의 행적이 비교적 불분명한 상태다.[27] 대부분 이 때 백부의 사망 후 친부모를 부양하게 되면서 경제적 부담에 시달리며 심한 스트레스[28]를 받았을 것으로 추측하나 확실히 알 수는 없다. 이것을 소재로 한 것이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이라는 영화지만... 소재는 너무나 좋았지만 망했어요

마광수 교수가 가장 싫어하는 시인.

그의 생애를 다룬 평전으로는 고은이 쓴 "이상 평전"이 있는데, 어느정도 난해한 문장으로 숨기고 있지만 이상에 대해 꽤나 비하적이고 악의적인 시각으로 쓰여져있다. 심하면 중상모략적인 부분까지 보이기 때문에[29] 이상에 대해 중립적인 시각을 유지하고 싶다면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면서 보자.

옹호하는 측에선 고은이 이 평전을 쓸때만 해도 군사정권등의 독재체제하에서 세월아 네월아 놀면서 순수문학을 주장하는 부류를 어용 작가보다 더 미워하는게 일반화되었던 시절이었다. 일종의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이나 민중문학이 아닌 작품은 불쏘시개로 간주하던 시절, 그러니 일제하에서 기괴한 장르를 소개한 이상은 천하의 개쌍놈으로 묘사될수 밖에 없었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러한 주장이 변명이 될 수는 없다. 정부나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원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해당 인물의 명예를 훼손하면서까지 그 인물의 평전을 쓰고 싶은 사람이 세상에 누가 있을까? 또 이러한 시각 때문에 50년대 실존주의를 한국 문학에 도입한 오상원이나 서정적인 자연 이야기로 호평을 받은 오영수 모두 문단에서는 배척을 받았던 것이고, SF 등의 장르문학 역시 한국에서는 이단시되었던게 그 영향인만큼 잘했다고 볼 순 없는 일이다. 괜히 대체역사소설 장르를 한국에 소개한 복거일이 자신의 상당히 좌파적인 시각과 독재체제에 대한 비난을 비명을 찾아서에 넣은게 아니다.

여담으로, 위의 평전에서 저자가 서문에 '비슷한 케이스인 해외의 랭보는 80살까지 그의 시를 파는 노학자도 있는데 이상은 그런 경우가 없다. 젊은 시절 이상에 빠져들어도 나이를 먹을수록 그 시절은 청년기의 유치한 기억으로 남게 된다.' 라고 적었는데, 그에 반발해선지 김연수는 그의 소설 '꾿빠이, 이상'에서 죽을 때까지 이상의 시를 연구하며 그의 삶을 쫓아가는[30] 일흔 살 아마추어 이상연구가를 등장시킨다(...). 명백한 디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이 기사에서는 내일 모래면 칠순이 되는 경제학자가 이상 시인의 작품의 수수께끼를 풀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김연수와 김학은 교수는 이상과 마찬가지로 문과와 이과를 통섭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런 점에서 이상과 동질감을 느끼는 듯. 안티들이 하나 같이 문과 출신인 건 기분 탓

시인을 기려 이상문학상이라는 문학상을 매년 수여한다.

 이상의 친필 연애편지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짝사랑의 아픔은 대작가도 별 수 없었던 듯.

9. 작품 목록 


괄호 안은 발표지와 발표연월일이다.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이상 단편선 날개에 수록되어 있는 것을 참고하였다.

    • 이상한가역반응(조선과 건축, 1931. 7)
    • 파편의 경치(조선과 건축, 1931. 7)
    • ▽의 유희(조선과 건축, 1931. 7)
    • 수염(조선과 건축, 1931. 7)
    • BOITEUX·BOITEUSE(조선과 건축, 1931. 7)
    • 공복(空腹)(조선과 건축, 1931. 7)
    • 조감도(鳥瞰圖)[31][32](조선과 건축, 1931. 8)
    • 삼차각설계도[33](조선과 건축, 1931. 10)
    • 건축무한육면각체[34](조선과 건축, 1932. 7)
    • 꽃나무(가톨릭청년[35], 1933. 7)
    • 이런 시(가톨릭청년, 1933. 7)
    • 1933. 6. 1[36](가톨릭청년 1933. 7)
    • 거울(가톨릭청년 1933. 10)
    • 보통기념(월간매신 134. 6)
    • 오감도(烏瞰圖)(조선중앙일보, 1934. 7. 24~8. 8)
    • ㆍ소ㆍ영ㆍ위ㆍ제ㆍ(素榮爲題)(중앙, 1934. 9)
    • 정식(가톨릭청년, 1935. 4)
    • 지비(紙碑)(조선중앙일보, 1935. 9. 15)
    • 지비-어디갔는지모르는안해(중앙, 1936. 1)
    • 역단(易斷)(가톨릭청년, 1936. 2)
    • 가외가전(街外街傳)(시와 소설, 1936. 3)
    • 명경(明鏡)(여성, 1936. 5)
    • 위독[37](조선일보, 1936. 10. 4~9)
    • I WED A TOY BRIDE(34문학, 1936. 10)
    • 파첩(破帖)(자오선, 1937. 11)[38]
    • 무제[39](맥, 1938. 10)
    • 무제[40](맥, 1939. 2)
    • 실락원[41](조광, 1939. 2)
    • 최저낙원(조선문학, 1939. 5)
    • 청령(젓빛구름, 1940)
    • 한개의밤(젓빛구름, 1940)
    • 척각(隻脚)(이상전집, 1956)
    • 거리(이상전집, 1956)
    • 수인이만든소정원(이상전집, 1956)
    • 육친의장(이상전집, 1956)
    • 내과(이상전집, 1956)
    • 골편에관한무제(이상전집, 1956)
    • 가구(街衢)의추위(이상전집, 1956)
    • 아침(이상전집, 1956)
    • 최후(이상전집, 1956)
    • 유고(현대문학, 1960. 11)
    • 무제(현대문학, 1960. 11)
    • 1931년(현대문학, 1960. 11)
    • 구두(현대문학, 1961. 1)
    • 습작 쇼윈도 수점(현대문학, 1961. 2)
    • 회한의 장(현대문학, 1966. 7)
    • 애야(哀夜)(현대문학, 1966. 7)
    • 무제(현대문학, 1966. 7)
    • 황(현대문학, 1966. 7)
    • 단장(斷章)(문학사상, 1976. 6)
    • 황의 기(1976. 7)
    • 작품 제3번(1976. 7)
    • 여전준일(與田準一)(1976. 7)
    • 월원등일랑(月原橙一郞)(1976. 7)
    • 각혈의 아침(1976. 7)
    • 단상(斷想)(1986. 10)

       
  • 소설

한국 최초의 다방이 남대문역에 위치했던 기사텐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 최초의 다방은 1909년 11월1일 남대문역에 개업한 ‘기사텐(喫茶店 끽다점, 다방을3년 ‘이견(후타미)’으로


이 사파이어는 최소 1억 달러(1188억원) 이상의 가치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익명의 소유주는 이 사파이어가 경매에 붙여질 경우 최고 1억7500만 달러(약 2079억원)에 낙찰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스리랑카의 보석시장 규모가 연간 1억300만 달러 규모인 점에 비춰보면 이 사파이어 하나만으로도 연간 보석 거래 전체 규모를 능가하는 것이다.

블루스타 사파이어는 중심부에 나타나는 독특한 문양 때문에 이 같은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

현 소유주는 "이 사파이어를 보자마자 세계 최대의 블루스타 사파이어라는 생각이 들었고 곧바로 구매를 결정했다”고 전했다. 그는 이 사파이어를 얼마에 구입했는지는 극비사항이라고 말했다. 
 

'보석의 도시'로 불리는 스리랑카 남부 라트나푸라에서 채굴된 것으로 전해진 이 사파이어에는 '아담의 별'(The Star of Adam)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아담이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후 스리랑카에 도착해 '아담의 정상'(Adam's Peak)에서 살았다는 무슬림들의 믿음에 따른 것이다.에게 보내는 편지'|작성자 세르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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