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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문학과 소통해보다...
2016년 02월 01일 01시 16분  조회:4367  추천:0  작성자: 죽림

 

인간 중심시대의 생태문학

 

                                                       김병중(시인, 문학평론가)

 

 

1. 들어가며

 

세계에서 손꼽히는 경제 강국 일본이 얼마 전 진도 8.8의 대지진으로 인해 전국이 초토화가 되는 엄청난 재앙을 입었다. 다행히 우리는 일본 열도가 방패막이 역할을 해 준 덕분에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는 않았지만 그 후유증은 우리와도 무관하지 않다. 일본 앞바다에 유출된 핵물질로 인해 일부 농수축산물은 수입이 금지되는 특단의 조치가 내려지기도 했다.

지금 지구는 매우 불안하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지구는 무절제한 산업화의 진전으로 하늘의 오존층이 구멍 뚫려 피부암 환자가 증가하고 있고, 북극과 남극, 그리고 히말라야 만년설이 녹아내리고 있으며, 아프리카 들소들의 대이동이나 중국남방 난대림지역에는 상상하지 못할 폭설같은 기상이변이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참혹한 재앙 앞에 우리는 하늘에 운명에 맡긴 채 이대로 방관하고 있을 것인가? 아니면 이를 극복할 대안을 찾아야 할 것인가? 라는 화두를 던져야만 할 때가 도래한 것이다.

무참히 자연을 파괴한 인간들의 행위가 더 이상 용서받지 못하고 자연의 재앙으로 단죄를 받고 있는 형상이지만 아직도 정신차리지 못하고 지구 곳곳에서는 쉼 없이 환경파괴가 지속되고 있으니 이제는 이 시대 정신세계를 선도해 가는 문학인들이 이대로 침묵하고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귀에 다소 생소하게 들릴지는 모르지만 생태문학, 환경문학, 녹색평론, 녹색시, 자연시 등은 이미 1990년대부터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생태문학을 거론하자면 그리스시대 신화로 거슬러 올라가야하며, 또한 독일 낭만주의 문학을 거쳐 2차 세계대전 후의 독일의 생태문학을 빼놓을 수 없다. 2008년 8월 대만에서 열린 국제아동문학대회의 주제가 “생태문학”으로 결정된 것도 그만큼 환경문제에 대한 국제적 관심도가 증대되고 있다는 반증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새만금 방조제사업이나 경인운하사업 같은 환경과 관련된 대규모 개발로 인해 사회 전반적인 여론은 환경의 중요성을 무시한 개발로 후일 자연재앙이라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어 이제 문학인들이 앞장서서 생태문학 붐 조성에 나서만 하는 책임감을 느끼고 있어 이 시점에서 한번쯤 우리나라 생태문학의 근황을 살펴보고자 한다.

 

2. 우리나라 생태문학의 태동

 

우리나라에서 생태학적 세계관은 1990년대로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파급되었고, 장르로는 시, 소설, 비평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 중에서도 단연 시가 주를 이루고 있는 데 <시문학, <현대시학>, <현대시>, <시와 사람> 등 각종 시전문지들이 생태시에 대한 창작과 평론 특집을 지속적으로 다루어 왔다. 1990년 이전 민중문학은 민주주의 쟁취를 위한 투쟁이었다면 생태문학은 인간과 자연의 상생을 파괴하는 사회적 요인들에 대항하는 새로운 참여문학으로 인간과 자연의 공생을 지켜내야만 한다는 관점을 지향하고 있다.

이후 태안 앞바다 원유 유출사고가 문인들을 다시한번 생태사회 건설이라는 기치아래 모이는 단결된 모습을 보여주게 만든다. 청정해안이 기름으로 범벅된 참혹한 모습은 회복 불가능한 상태로 보일 때, 시인들은 지금이야말로 뜨거운 글을 써야한다며 한국시인협회 회원 434명이 모여 <지구는 아름답다>는 생태시집을 내기에 이르렀다. 일부 진보적인 문인들은 경부운하예정지 답사 르포 출정식과 함께 운하 반대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또한 함평 생태시 축전을 열어 한국시 사상 처음으로 <생태시 선언문>을 채택하기도 했다. ”...그 부드럽고 차진 흙은 내 살이며, 졸졸졸 맑게 흐르는 물은 내 피이며, 아름답게 우거진 수목들은 내 머리털이며, 밀물과 썰물로 나드는 푸른바다는 내 심장이며, 찬란하게 빛나는 하늘은 내 영혼이다...“라는 내용은 우리에게 공생 공존의식을 갖게하는 문학선언으로 우리가 공감하는 생태문학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생태 환경의 파괴는 이 시점에서 인류가 풀어야 할 가장 화급하고도 절실한 숙제”라는 한국시인협회의 선언문도 있었고, 서귀포 KAL호텔에서 열린‘2004 생태도시 국제포럼’에 참여한 국내외 생태도시 및 환경 전문가들도‘<서귀포 생태도시 선언문>을 통해 국내외 도시들간 협력과 연대를 통해 지속가능한 삶의 녹색 공간을 만들어 나가자고 결의했다.

미학사에 ‘환경’이라는 개념을 정초시킨 환경미학자 아놀드 벌리언트는 환경윤리학과 생태철학을 미학과 융합시키고, 미적 예술적 행위의 새로운 차원을 제시하기에 이르렀지만 생태문학이란 녹색옷만 입힌 글을 일컫는 말이 아니다. 소재만 자연을 선택한 다음 폭로와 비판만 노골적으로 일삼는 저급한 삼류는 고급 생태문학의 범주에 넣기 어렵다.

타자의 문제에 대한 심오한 성찰로 프랑스 철학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에마뉘엘 레비나스에 따르면 예술가의 창조적인 작업은 세단계로 이루어진다. 첫째, 받아들이기, 둘째, 예찬하기, 셋째 전달하기를 주장한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회 병리적 현상을 수용하되, 문학의 본질에 입각하여 기술로서의 진실이 아니라 묘사와 표현으로서 수준 높은 작품을 써야만 한다는 점이다. 한국문인협회 회원 1만명 시대에 과연 문학인다운 문학인은 몇 명인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보다 수준있는 녹색냄새가 물씬 풍기는 시인들의 작품을 살펴보기로 한다.

 

3. 녹색냄새 나는 생태시

 

 

문학이 시대를 반영하고 새로운 가치의 정신세계를 주도해 간다는 점에서 볼 때 환경문제와 생태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현상으로 보여진다. 레오폴드는 ‘대지윤리’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생태 중심의 윤리에 대한 가장 고전적이고 체계적인 최초의 주장을 하고 있다. 자연을 도구적 가치로 보지 않고 내재적 가치로 인정하면서 자연은 단순히 인간의 존재를 위한 소유물이 아니라 공동의 유기체로서 윤리적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데 장호 시인의 시에서도 이와 같은 감성코드가 발견되고 있다.

 

눈 속에 파묻힌 활엽수의 낙엽같은

세계지도의 그 구겨진 골목안 어드메선가

정월은 영원한 신부처럼

얼음장에 찍히는

내 언 발소리를 엿듣고 있으리라

 

장 호- <겨울산에 갇혀서> 일부

 

장호 시인의 <겨울산에 갇혀서>에는 시적화자가 눈쌓인 ‘겨울산’ 속에 갇혀 있으며, 겨울산은 ’세계지도의 구겨진 골목‘의 모습으로, 다시 ’영원한 신부같은 정월‘로 묘사되면서 얼음장에 찍혀서 나는 언 발소리를 기다리고 있다. 다시 말해서 영원한 신부의 모습을 하고 시적화자가 오기를 간절하게 기다리는 겨울산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엿볼 수 있으며, 자연이 신부라면 화자는 신랑으로서 서로 동등한 자연의 일부로 표현되고 있다.

인간이 대지의 정복자가 아니라 대지 공동체의 단순한 구성원일 뿐이며, 서로 도구적 가치이기보다는 내재적 가치로 교감하고 있다. 겨울산에 갇혀있는 구속된 의미가 아니라 화자는 오히려 스스로 겨울산에 들어가 영원한 신부의 속살을 탐닉하면서 눈 속에 파묻힌 활엽수 모습의 자연과 물아일체가 되기를 간구하고 있다.

 

어머니가 매던 김밭의

어머니가 흘린 땀이 자라서

꽃이 된 것아

너는 사상을 모른다

어머니가 사상가의 아내가 되어서

잠 못드는 평생인 것을 모른다

 

이근배- <냉이꽃> 일부

 

이근배 시인은 <냉이꽃>에서 봄바람에 한들거리는 냉이꽃을 보는 게 아니라 하나의 사상을 보고 있다. 그의 사상은 어머니다. 어머니는 보릿고개를 넘기 위해 초근목피(草根木皮)하던 때 땀을 흘리며 김을 매고 있다. 김을 매면서 흘린 땀으로 냉이꽃을 피워내는 것은 희생정신이오, 그 냉이를 뽑아 허기진 가족 생계를 채우는 것은 가족사랑 정신으로 숨어있다.

냉이꽃은 논틀밭틀에 지천으로 자라는 잡초이자 식용하는 봄의 미각이며, 예쁘지는 않지만 눈에 쉽게 띠는 봄꽃이다. 어머니는 시적화자에게 잡초처럼 다가가지만 그러나 냉이꽃은 사상을 모른다고 역설한다. 오히려 냉이꽃이 사상이어서 어머니는 춥고 배고프고 고단한 사상가의 아내로 평생 잠 못드는 운명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이 시에서 냉이꽃 하나가 사상가로 현현되는 것은 그만큼 자연이 배타적이기보다 포용적이며 생명중심의 에코토피아(Ecotopia)에 접근하고 있다고 하겠다.

 

햇볕도 가을에는 칼날과 같아서

잎사귀마다 영화로움 속절 없으니

무엇으로 위무하랴, 저 유숙할 데 없는

등때기가 허이옇게 바랜 가을 수목들

그러나 수목들아 수목들아

햇볕은 바람이 다 지나간 자리에

문득

창창한 이빨을 드러내 웃고 있느니

쓸쓸한 것은 오로지

초토에 떨어지는 햇볕뿐이다.

 

이수화- <가을햇볕> 일부

 

위 시에서는 <가을햇볕>이 주제와 소재가 되어 낙엽지는 가을의 쓸쓸한 정경을 생동감 있게 노래하고 있다. 대상과 인식을 자연에 두고 가을이라는 계절이 가져다 주는 인간적인 우수와 비감을 담담하게 묘사하고 있다.

햇볕은 생명을 꽃피우고 열매 맺도록 하는 위대한 힘을 갖고 있지만 가을햇볕은 그러하지 않다. 가을햇볕은 칼날을 가지고 있어 영화로움도 유숙할 곳도 남기지 않고 수목들의 등허리를 허옇게 벗기고 만다. 그런 연후에 햇볕은 창창한 이빨을 드러내고 웃고 있으니 감히 가을 햇볕에게 그 무엇이 대적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햇볕이 무법자이건 독불장군이건 가을은 햇볕의 칼부림으로 하여 낙엽이 지고 또한 겨울을 오기에 이는 이런 칼 한자루 가지지 못한 인간의 나약함 보다는 빛나는 칼을 가진 자연이 중심되어 있는 것이다.

 

목숨을 구걸할수록

햇볕이 톱질을 했다

자벌레처럼 꿈틀대며 발을 옮기고

말초신경도

3도 화상을 입었다

 

한 주먹 바람이 아쉬운데

열대림은 죄인처럼 수갑을 차고

망고나무 잎은 햇볕이 무거워

소름끼치게 번들거렸다

 

김용언- <적도를 가다> 일부

 

김용언의 <적도를 가다>에서는 햇볕(태양, 절대자)에 대한 숭배사상이 깔려 있다. 우주에 빛과 생명을 부여하고,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정의의 강력한 수호자이며, 모든 것을 밝혀주고 알게 해주는 지혜의 원천이다. 태양은 고대로부터 하늘을 가로지르며 서서히 떠오르는 모습과 만물에 새로운 생명력을 부여하는 힘 때문에 경외의 대상이었는데 이 시에서도 태양의 위력이 뚜렷하게 보여진다.

적도 여행을 간 시적화자는 햇볕의 톱질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다. 자벌레처럼 꿈틀대며 비실비실 발걸음을 옮기고, 말초신경도 3도 화상을 입고 만다. 그리고 열대림과 망고나무는 ‘죄인처럼 수갑을 차거나’ ‘소름끼치게 번들거리는’ 굴복의 공간으로 묘사된다. 결국 태양 앞에 인간의 존재는 하잘 것 없어 힘없이 순응하고 마는, 이는 곧 자연숭배사상의 맥과 닿아 있음을 간파할 수 있다.

 

나의 살던 고향엔 높은 미루나무 까치집에 걸려 솟고

앞 냇가엔 송사리 떼를 지어 노니는 야트막한 산골

빨간 뺨에 스치던 봄바람, 한여름 땡볕

높이 혹은 낮게 노니는 텃새, 멧새들

어깨동무들은 어데로 사라졌는가

이젠 시들어 눈물도 마른 이마의 골을 따라

거친 세월의 오욕이 흐를 따름이다

 

장윤우- <시린 날> 일부

 

장윤우의 <시린 날>은 고향에 대한 정감어린 풍경들이 사라진 아픔이 작지않은 울혈로 다가온다. 관념이 없이 전개되는 언어의 풍경화가 술술 읽혀진다. ‘어깨동무들은 어데로 사라졌는가’라고 탄하면서 ‘눈물도 마른 이마의 골을 따라/거친 세월의 오욕이 흐를 따름이다’는 감회가 시야를 흐리게 하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마음이 시린 날은 어디에 근원된 것인가? 시적화자는 잃어버린 고향의 미루나무 까치집과 송사리떼 노니는 야트막한 산골, 빨간 뺨을 스치던 봄바람, 그리고 한여름 땡볕, 텃새와 멧새에 대한 향수가 더 감정의 샘을 건드리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도시화로 인한 자연파괴와 인간중심적 삶이 낳은 필연적 업보 때문이다. 인간은 스스로 저지른 자연훼손에 대한 댓가를 고스란히 치루고 있는 셈인 것이다.

 

비자나무 숲에는

산갈치 한 마리 살지

은빛 지느르미 반짝이며

원시림을 지켜온 산갈치

안개 자욱한 새벽이면

백록담에 오르는 고사목

손잡아 끌어주고

동네 고샅까지 둘러보고 오는

산갈치, 비자나무 숲에 살지

 

진동규-<비자나무숲에는> 일부

 

진동규의 <비자나무숲에는>은 산갈치와 비자나무숲의 도입과 조응이 읽는 이의 오감을 신선하게 자극한다. 비자나무 숲과 산갈치는 공존할 수 없다. 숲은 산과 가깝고 산갈치는 바다에 살기에 환경적으로는 서로 배타적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이를 ‘손잡아 끌어주고/ 동네 고샅까지 둘러보고 오는’ 대상으로 표현하면서 하나의 이미지로 잘 아우르고 있다.

서로 이질적인 대상을 동질의 감정으로 묶어내는 힘, 이것은 실험시가 아닌 시적 파격으로 유추에 의한 유사성의 발견에 비해 훨씬 큰 효과를 갖는다. 시인은 의도적으로 산갈치라는 물고기를 도입하여 산갈치가 마치 한라산을 지키는 수호신 정도의 존재로 격상시키고 있다. 물고기가 은빛 지느르미를 반짝이며 비자나무 숲을 보호하는 일이란 바다와 산이 무관하지 않음을 암시하고 있다. 산갈치가 숲을 보호하고 있다면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송충이 같이 잎을 갉아먹는 해충 정도에 불과하다면 이제 인간이 자연에게 행하고 있는 악의 행동을 거두고 함께 공존하는 대상으로 마주서야 할 것이다.

 

빗물이 빗방울이기를 거부할 때

그곳엔 폐허밖에 없었다

누군가 거꾸로 걸어간 발자국

이미 숨끊긴 질펀한 갈대밭에 버려져

그곳엔 기다림도 없었다

빗방울이 성난 홍수로 다가올 때

목말라 그리던 꿈마저

이젠 누렇게 온 천지를 뒤덮는 허망

어쩌면 내 숨소리 조이며

한떨기 풀꽃

꽃송이 활짝 피우기를 거부할 때

그곳엔 우리의 노래가 지워졌다

훈훈한 바람줄기도 멀리 휘돌아 가고 있었다

 

김송배-<부재중ㆍ4 >

 

김송배의 <부재중ㆍ4>는 부재하고 있는 생명중심의 세계관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인간의 속물적인 삶과 물신주의적 가치관을 부정하는 시인의 부재는 비판의 붓을 더 높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원초적이고 자연적이며 순수한 심층세계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빗물이 빗방울이기를 거부하거나 꽃송이가 꽃을 피우기를 거부할 때 그곳에는 우리들의 노래가 없다고 외치고 있다. 빗물이 성난 홍수가 되고 꽃송이가 꽃을 피우지 못하면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자연적 환란으로 빠지게 된다. 이미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 돌이킬 수 없는 거대한 자연의 심판이다.

아직도 인간은 그런 심판 앞에 큰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숨끊긴 질펀한 갈대밭에 버려지는 일, 누렇게 온 천지를 뒤덮는 허망의 날을 맞이 하는 최후의 심판에 대한 경고가 깔려 있다. 이제 이런 재앙을 예고하고 또 그것을 깨우치도록 해야 할 의무가 시인들에게 있으며, 이것이 곧 생태문학의 발전의 필요성이라고 할 수 있다.

 

비가 내렸어

비가 내리면서

하늘에 떠돌던 사람 사는 냄새와 아우성도 함께 내렸어

하늘엔 솔바람 소리와 개울물 냄새가 흐르고 있었어

잠에서 깨었을 땐

낙숫물 소리가 피아노를 치고 있었어

 

양영길- <새가되어 날아다니고 있었어> 일부

 

양영길의 <새가되어 날아다니고 있었어>는 자연과 인간이 하나 되어 생존하고 조화되는 진지한 시선이 보인다. 비가 내리고, 비는 소나무 숲에 내려 솔바람을 타고 흘러 개울물이 된다. 그런데 비에는 사람사는 냄새와 아우성이 함께 용융되어 있다는 특별한 사실이 인지된다. 그만큼 비와 인간의 밀접한 관계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건 잠이었다는 데 충격을 준다. 잠 속에서 꿈을 꾼 것이라면 그렇지 못한 현실에의 염원 또는 비판의 의미가 내재되어 있다. 그렇다고 시적화자는 초연히 수용적 자세에 머물러 있지 않고 ‘낙숫물 소리에서 피아노치는 소리’를 듣고 있다. 자연의 음향을 듣는 시인의 세계 너머 또 다른 생명 구원에의 몸부림이 초록 희망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고선주 시인은 <새>에서 ‘새가 나무에 앉는 것은/하늘이 싫어서가 아니다/너무도 푸른/그곳에 차마 동선을 그릴 수 없어서다//새가 하늘을 나는 것은/땅이 싫어서가 아니다/새싹들이 자라는/그곳에 차마 발길질을 할 수 없어서다’라고 쓰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공존의 삶, 자연(나무, 새싹)과 동물(새)이 하나 되는 생명주의를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은 그들의 틈서리에서 자연인가? 동물인가? 아니면 양자가 아닌 파괴자인가?

이제 시인들은 생태문학, 초록빛 세상을 맘껏 노래해야만 한다. 서해 갯벌을 지켜내고, 천성산 도룡농의 집을 돌려주고, 실개울에 가재를 살게 하는 일이 환경전문가들의 일이 아닌 바로 시인들의 일이다. 미국의 생태시인 게리 스나이더는 “시인이 해야할 일은 바로 숲을 지키는 것이다”고 말했다. 하여 이제 봄이 열리고 세상의 기본 바탕색이며, 싱그럽고 폐와 심장을 가진 생명력을 가진 자연 최고의 초록색, 그것을 지키기 위하여 이제 “생태시”는 딱딱한 환경용어 대신 “초록시”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생명 중심의 문학을 발전시켜 나갔으면 한다.

 

태안의 청정해안이 멸종 위기의 바다로 오염되고 말았고, 새만금 간척지 완공과 천성산 터널공사를 둘러싼 도룡뇽 사건도 아직도 뇌리 속에 잘 지워지지 않고 있다. 이대로 간다면 인류 파멸과 지구 멸망이라는 극단적 위기를 맞게 된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는 가운데 문학이 이대로 시대의 환난을 방관할 수 없다는 자각이 표출되고 있다. 환경윤리를 근간으로 한 새로운 생태이데올로기가 생겨나고 있고, 이는 인간 중심시대에서 생명 중심주의에 무게를 둔 생태문학이 태동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4. 녹색의 혼돈

 

 

자연철학과 미학의 관계를 복원시켜 이를 생태미학으로 발전시키려는 문학사조는 생태미학을 지향한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서 발표되고 있는 생태시는 문학으로서의 몇 가지 한계를 갖게 된다.

첫째, 생태문학이라는 편중된 성향은 문학의 사회적 기능의 문제로 발전된다. 문학이 특정 사회적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서 전락하는 것을 경계하는 것으로 사회적 기능을 넘어 보다 가치 있는 세계관의 구축이 요구된다.

둘째, 문학은 상상력을 바탕으로 하는 예술장르다. 그렇다면 오늘날 환경훼손과 같은 문제의 발생은 문학인들의 상상력에 의해 이미 극복되었어야 할 사안이지만 오늘날 사후약방문식의 논쟁은 뒤늦은 감이 없지 않다. 인류 미래 사회에 대한 예견과 통찰부족이 빚어낸 생태주의 문학의 복원을 운운하는 것은 문학인으로서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상상과 통찰로 빚어낸 고전적 가치를 지닌 고뇌의 작품들이 우리 앞에 나타나길 고대한다.

셋째, 문학적 진실의 바탕 위에 수준 높은 생태문학의 자리매김이 요구된다. 눈에 보이는 현상 그대로를 적나라하게 묘사하는 것을 탈피하여 생각의 깊이가 있고 상징과 비유가 숨어 있는 공감주는 창작이 필요하다. 중언부언늘어놓는 자랑이 아닌“뽑히지 않는 공장의 검은 말뚝”,“세금 만금이 든 방조제”, “검은 바다 검은 고기의 검은 허파”같은 문제점을 던져주고 무엇을 생각하게 만드는, 그래서 독자들이 외면할 수 없는 특별하고 시선이 오래 머무는 작품을 써야만 한다. 한국문협회원 1만명 중 과연 몇 명에게 진정한 문인이라 지칭할 수 있을지 스스로 부끄러운 생각이 들기도 한다.

넷째, 문학은 유행이 아니라 고전처럼 시대를 초월하여 오래도록 지속되는 정신세계이며, 이 시대를 밝히는 동방의 찬란한 등불이 되어야 한다. 사회적 환경적 여건에 따라 문학의 경향도 여러 가지 형태로 변화되어 왔지만 가장 수명이 긴 것은 순수 자연주의라는 사실에 유념해야만 한다. 생명력이 길다는 것은 그만큼 문학성과 대중성과 효용성까지 골고루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생태문학을 테러리스트들의 우발적인 도발같은 파괴적 성향과 단발성 인기에 영합하는 목적주의를 지향해서는 아니 된다.

다섯째, 문학은 현실을 외면해서도 안 되고 외면할 수도 없으므로 무엇을 하느냐 보다는 어떻게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홍수처럼 쏟아지는 환경 관련 새로운 정보에다 문학적 상상력을 배가시켜 문학의 깊이를 더하여야 한다. 새로운 정보를 오려붙이기 하거나 덧칠하기가 아니며, 남들이 다 아는 너무도 뻔한 이야기로 허풍과 너스레를 떠는 일은 더욱 아닌 것이다.

민중문학이나 참여문학, 순수문학 역시 독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다. 사고 및 행동양식의 변화를 갖게하고 문학적 진실은 공감을 통해 정신에너지로 승화되어 많은 독자들을 행복의 블랙홀로 빠지게 만든다. 그러나 아직도 생태문학의 동력은 너무나 미미하고 왜소하게만 느껴지고 있으니 그만큼 문학인들이 사회문제에 관심이 없거나 나태하다는 것은 아닐까?

 

5. 나가는 말

 

 

생태문학에 대한 정확한 개념 정리는 어렵다. 환경문제가 워낙 광범위하고 생태학이라는 학문 자체의 성격이 매우 다양하며, 아직은 지구 전체에 대한 생존과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별로 관심을 갖지 않는 문제점이 엿보인다.

그러므로 생태문학의 정의와 방향성에 대한 명확한 주장을 펼치기는 어렵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방관할 수 없는 위치에 처해 있다는 점도 인식해야만 한다. 어느 날 갑자기 문학인이 생태학자가 될 수 없고 생태학자가 문학인이 될 수 없다. 적어도 문학은 유행이 아니라 정도를 가면서 시대의 흐름을 선도해야하는 입장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대부분의 애국자들은 문학인이었고 독립운동가였으나 문학이 진실정신을 말하는 장르라는 점에서 독립운동가들의 애국정신 보다 더 후한 점수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녹색성장과 탄소권을 매매하는 21세기를 사는 문학인들은 환경문제에 남다른 관심을 가져야 한다. 관심을 통하여 통찰과 직관이 작품 속에 반영되고 이는 다가올 사회의 커다란 변화를 요구하는 힘이 된다. 결국 인간중심주의에서 자연중심주의로의 변화를 요구하지만 이는 서로 상생하는 길을 구하고자 함이요, 어느 양자에게 편중되지 않는 세계관의 구축, 즉 자연과 인간 상생주의, 이것이 우리가 꿈꾸는 건강한 미래사회를 이룩하는 동력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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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0 남미주 칠레 민중시인 네루다를 다시 만나다 2016-02-09 0 4225
1079 詩人은 풍경속을 걷는 者 2016-02-08 0 4384
1078 령혼을 깨우는 천재시인의 향기 - 2천여편 : 23편 2016-02-08 0 4500
1077 <새해> 시모음 2016-02-08 0 4126
1076 <설날> 시모음 2016-02-08 0 4442
1075 동시는 童詩 2016-02-07 0 3898
1074 詩쓰기에서 상징, 알레고리를 리용하기 2016-02-07 0 4656
1073 동시창작론 2016-02-07 1 4319
1072 동요창작론 2016-02-07 0 3892
1071 세계기행詩 쓰기 2016-02-06 0 4280
1070 소설가로만 알았던 포석 조명희, 시인으로 만나다... 2016-02-06 0 4927
1069 詩의 벼랑길위에서 만나는 시인들 - 이용악 2016-02-06 0 4645
1068 젊은 나이에 요절한 시인 오장환을 기리며 2016-02-06 0 4125
1067 詩의 벼랑길위에서 만나는 시인들 - 오장환 2016-02-05 0 4026
1066 산문시를 확실하게 알아보기 2016-02-05 1 5211
1065 참 재미있는 산문시 2016-02-05 0 4247
1064 산문시를 다시 알아보기 2016-02-05 0 4734
1063 산문시를 아십니까... 2016-02-05 0 4573
1062 詩창작의 최고의 교과서는 詩와 詩集 2016-02-05 0 4703
1061 散文詩이냐 산문(수필)이냐 2016-02-05 0 4178
1060 산문시 쓰기전 공부하기 2016-02-05 0 4937
1059 동시야 동시야 나와 놀자... 2016-02-05 0 4114
1058 우리도 산문시 써보자... 2016-02-05 0 4681
1057 산문시를 공부하기 2016-02-05 0 4157
1056 詩와 산문시, 수필의 차이점 2016-02-05 0 4607
1055 무감각해진 詩의 하체를 톡톡 건드려봅시다 2016-02-05 0 4972
1054 散文詩에 대하여 2016-02-05 0 6282
1053 은유에 관한 보고서 2016-02-05 0 4252
1052 詩쓰기와 자아찾기 2016-02-05 0 4594
1051 풍경이 곧 시인의 재산 2016-02-03 0 4162
1050 "스물여덟 삶" ㅡ 영화 "동주" 이달 18일 개봉 2016-02-03 0 4237
1049 詩의 언어운용에 관하여 2016-02-03 0 5437
1048 겁없이 쓰는 詩와 겁먹으며 씌여지는 詩 2016-02-03 0 4920
1047 태양아래 새로운 것 없다?!... 있다?!... 2016-02-03 0 4605
1046 生态詩 공부하기 2016-02-02 0 4211
1045 "생태시" 시론을 공부하고 생태시 쓰자... 2016-02-02 0 4019
1044 유교사회 조선시대 녀류시인들 2016-02-01 0 5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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