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땡- <<우표학교>> - 윤동주 우표에 오르다
2016년 02월 16일 21시 57분  조회:6471  추천:0  작성자: 죽림

 


윤동주 서정적인 시어로 조국의 독립을 노래한 아름다운 청년이었습니다.

그의 집안은 증조부 대에 북간도로 이주하였습니다.

1917년 명동촌에서 태어난 윤동주는 소학교 때 급우들과 잡지를 발행하는 등

어릴 적부터 문학에 소질을 보였습니다.

평양 숭실학교 시절 신사참배가 강요되자 자퇴한 그는 일본경찰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서시』를 비롯하여 수많은 작품을 썼던 그는 연희전문학교를 거쳐 일본유학길에 올랐는데

1943년 독립운동 혐의로 검거, 투옥되었습니다.

그리고 1945년 2월 그가 옥에서 사망했다는 전보 한장이 고향집에 배달되었습니다.

그의 나이 만27세였습니다.

"우표에서 얻은 지식이 학교에서 배운 것보다 많다."

                                                                                           - 프랭클린 루스벨트

1) 2) 3)

 

1976 - 영국 북해유전 채유 성공

역사속 오늘[1976년 2월 16일] 영국 북해유전 채유 성공

1976년 오늘, 영국의 북해유전 오크필드 광구에서 석유가 쏟아져 나왔다.
영국이 북해유전에서 채유하는 데 성공하기는 이번이 세 번째.
이번 유전 탐사는 세계적인 석유회사 셸과 에소사(社)의 합작으로 이뤄졌다.
이 광구에서 원유 3억5천만 갤런을 뽑아낼 수 있을 것으로 추정됐다.

 

2) 1957 - 인도네시아 수카르노 대통령 교도민주주의 제창

수카르노(Sukarno, 1901~1970)는 1928년 국민당을 결성하여 민중주의()를 주창하다가, 1929~1933년 투옥 후에 플로레스섬의 엔데, 수마트라섬의 펜쿠렌에서 유배생활을 보냈다. 1942년 일본군에 의하여 석방되어 일본군에 협력하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네덜란드로부터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선언, 1950년 인도네시아공화국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55년 제1회 아시아아프리카회의(반둥회의)를 주최, 비동맹중립외교의 주역으로 각광을 받았는데, 내정면에서는 다당난립 때문에 단명내각의 연속이었다. 1957년 그는 내부혼란의 원인이 서구형 의회정치에 있다고 하여 대통령중심제를 채택, 촌락민주주의의 전통에 입각한 이른바 교도()민주주의(일반 대중에 대한 엘리트의 교도적 역할을 강조한, 인도네시아에 적합한 민주주의)를 제창하였다. 그 후 국내에서 절대권력을 장악하고, 네덜란드에 대항해서 서(西)이리안해방투쟁을 전개, 1963년 목적을 달성하고 종신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1965년 9월 30일에 발생한 쿠데타에서 공산당을 감쌌다고 하여, 1966년 3월 장군 수하르토가 지휘하는 반공

육군에 실권을 넘겨주고, 이듬해 종신 대통령의 지위를 박탈당했으며, 정치활동이 금지된 가운데 보고르 교외의 바트트리스의 자택에 살다가 정계복귀도 못한 채 죽었다.

 

3) 1954 - 영화배우 마릴린 먼로 내한

외로움에 지친 먼로(Monroe, Marilyn)에게 메이저리그 타자출신인 스포츠 스타 '조 디마지오'(Joe Dimaggio)가 손을 내밀었다. 당시 두 사람의 만남은 오늘날 우리가 흔히 보는 스포츠 스타와 연예인간의 만남 처럼 화려한 이벤트로 세상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1954년 1월, 두 사람은 화려한 결혼식을 올린다. 일본 토쿄로 신혼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일본에서의 달콤한 밀월은 먼로의 한국방문으로 삐걱거렸다. 먼로는 한국에 주둔하는 미군위문을 이유로 조 디마지오만 일본에 남겨둔 채 홀로 한국을 방문한다. 이탈리아의 엄격한 보수적 가정에서 자라 먼로에게 헌신적인 아내의 역할을

기대했던 조디마지오는 먼로의 자유로움과 영화에 대한 열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먼로의 끝없는 남성편력과 디마지오의 결벽증은 잦은 충돌을 일으키다 <7년만의 외출>에서 그 유명한 뉴욕 지하철

환풍구위 노출장면을 촬영한 뒤 9개월 동안의 결혼생활을 청산한다.

디마지오는 먼로에 대한 애정만큼 온전한 남편으로 남기를 기대했지만, 먼로의 영화에 대한 열정과 대중적 사랑에 대한 갈망은 한 사람의 아내로 머물 수 없었다.먼로가 마약과 약물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도 디마지오와의 이혼 직후부터였다.

1) 2) 3)

 

1) 1945 - 시인 윤동주() 일본 형무소에서 옥사

윤동주 [, 1917.12.30~1945.2.16]

[어제의 오늘]1945년 시인 윤동주 옥사

ㆍ일제 강점기 고뇌를 사색한 젊음

스물아홉 젊은 나이, 단정한 용모, 아름답고 투명한 감성을 가진 한 청년이 일본 형무소에서 1945년 오늘 눈을 감았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로 시작하는 ‘서시’의 시인

윤동주다.윤동주는 1917년 12월30일 만주국 간도성 화룡현 명동촌의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1925년 명동소학교에

입학해 13세 때 문예지 ‘새명동’을 펴내며 동시, 동요 등을 실었다. 18세 때에는 ‘초한대’ ‘삶과 죽음’ ‘내일은 없다’라는

시 3편을 쓰기도 했다.그는 문학을 반대하는 아버지에게 맞서 단식과 가출까지 감행하면서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해 본격적인 시작 활동을 하게 된다. 그는 시를 줄곧 썼지만 발표하지 않았다. 연희전문을 졸업하던 1941년에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출간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다음해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릿쿄대학 영문과에 입학, 도시샤대학 영문과로 전학했고 1943년 7월에 귀향하려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된다. 1944년 3월31일, ‘치안유지법 위반’이란 죄목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윤동주는 해방을 여섯 달 남겨놓고 형무소에서 ‘이름 모를 주사’를 맞고 비통하게도 세상을 떠나고 만다. 당시 전쟁 시에 부족한 혈장 대용으로 식염수를 사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생체실험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그도 이 생체실험의 희생물이라는 의혹에 싸여 있었다. 하지만 형무소 측의 사인은 뇌일혈이었다. 꿈 한번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한, 안타깝기 그지없는 짧은 생애였다.사후 2주기를 앞둔 1947년 2월13일 ‘경향신문’에는 당시 주필이었던 시인 정지용에 의해 무명의 시인이 쓴 시 한 편이 소개됐다. 윤동주의 유작 중에서 가장 마지막에 쓴 것으로 추측되는 ‘쉽게 씌어진 시’였다. 이미 고인이 된 시인의 생애도 간략히 소개됐다. 윤동주의 시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첫걸음이었다. 이어 3주기에는 지인들에 의해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만들어졌다.“일제 헌병은 동(冬) 섣달에도 꽃과 같은, 얼음 아래 다시 한 마리 잉어와 같은 조선청년 시인을 죽이고 제 나라를 망치었다. 뼈가 강한 죄로 죽은 윤동주의 백골은 이제 고토 간도에

누워 있다.”(정지용의 서문 중) 

2) 1959 - 카스트로, 쿠바 수상에 취임

카스트로(Castro, Fidel, 1926/27~ )는 1945년 아바나대학를 졸업하고 변호사가 되었다. 대학 재학 때부터 정치활동을 하였으며, 1947년 도미니카공화국에 독재자 트루히요를 타도하기 위하여 침공한 일도 있다. 1948년 콜롬비아의 보고타에서 발생한 도시폭동사건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953년 7월 동지 156명과 함께 쿠바의 산티아고데쿠바에 있는 몬카다군 병영를 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체포되어 15년형을 선고받았다.
1955년 특사로 풀려나 아바나로 돌아오자마자 멕시코로 망명, F.바티스타 타도계획을 세웠다. 1956년 86명의 동지들과 함께 원정에 나서 오리엔테주() 시에라마에스트라에 숨어들어 게릴라전을 전개, 1959년 2월 바티스타정권을 무너뜨리고 공산독재정권을 세워 총리가 되었다. 총리에 취임한 후 토지개혁을 실시하는 한편, 미국을 비롯한 외국의 자본을 접수하는 등 사회개혁을 진행하였으며, 그 해 9월 제1차 아바나선언을 발표하여 라틴아메리카 해방을 제창하였다.

 

3) 1950 - 이승만 대통령, 맥아더 초청으로 일본 방문

한국 대통령 이승만이 주일 연합군사령관 맥아더로부터 미국의 대일정책에 대한 힌트를 얻은 것은 1948년 가을이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지 두 달 남짓 되는 10월 19일, 이승만은 맥아더의 초청을 받아 대한민국 대통령의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하게 되는데, 그때 맥아더는 이승만에게, 일본을 아시아의 반공 보루로서 중점 육성할 계획이라고 귀띔한다.

일본에게 아시아의 반공 보루 역할을 맡긴다니, 이승만에게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미국의 발상이었다. 뒷날 이승만은 한국 자유중국 필리핀 남베트남을 잇는 반공밸트를 구상하게 되거니와, 아무튼 그때 이승만은 맥아더에게, 일본은 반공 보루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항변한다. 일본이 아시아의 반공 보루가 되려면 우선 한국으로부터 그 자격을 인정받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원래 한국의 영토였던 대마도를 한국에게 돌려주고, 일제강점 35년동안 착취한 한국의 재산을 반환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승만이 또다시 맥아더의 초청으로 일본을 방문한 것은 1950년 2월 16일이었다. 이승만과 맥아더의 우정은 소문난 것이었지만, 오랜 망명생활 중에 세계를 떠돌면서도 일본 땅에 발을 딛은 것은 고종황제의 밀사로 미국대통령을 만나러 가던 1904년, 그를 실은 미국 선박 오하이오호가 고오베항에 정박했을 때의 잠깐,

그 한번 뿐이었는데, 대통령이 되자마자 연거푸 두 번이나 가게 된 것이었고, 그렇게 두 번씩이나 맥아더가 이승만을

일본으로 초청한 것은, 하루빨리 아시아를 일본에게 맡기고 물러서자는 미국의 정책을 주지시키기 위해서였다.

1) 2) 3)

 

1) 2010 - 모태범, 한국 스피드스케이팅 사상 첫 금

스피드스케이팅 500m서 ‘금빛 질주’
세계정상 이규혁·이강석 넘어 돌풍

“쇼트트랙이 아닌 롱트랙에서 일궈낸 놀랄 만한 우승이다.”

빙상대표팀 막내 모태범(21·한국체육대3)이 16일(이하 한국시각) 한국 스피드스케이팅 사상 첫 금메달을 따자 <에이피>(AP)는 이렇게 보도했다. 한국은 쇼트트랙에서 세계 무대를 휩쓸어 왔다. 그러나 세계 빙상계는 한국을 빙속 강국으로 평가하진 않았다. 쇼트트랙은 변수가 많고, 때론 실력보다 운이 좌우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던 한국 빙속이 이제 세계 정상급으로 우뚝 올라서고 있다. 대회 첫날 이승훈이 아시아 선수로는 처음으로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5000m 은메달 쾌거를 이룬 데 이어 쇼트트랙 1500m에서 이정수가 우승하고, 이날 그토록 갈구하던 ‘스피드스케이팅의 꽃’ 남자 500m에서 마침내 금빛 질주를 해냈다. 이날 자신의 생일을 맞은 모태범은 캐나다 리치먼드 올림픽오벌 빙상장에서 열린 밴쿠버 겨울올림픽 이틀째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500m에서 1·2차 합계 69초82로 2위 나가시마 게이이치로(일본)를 0.16초 차로 제치고 금메달을 차지했다. 왕년의 빙속 스타이자 현재 500m 세계기록(34초03) 보유자 제러미 워더스푼(캐나다)조차 이날 2차 레이스에서 모태범을 쫓아가지 못했다. 이로써 한국은 스피드스케이팅 종목에 김정연 등 3명이 일장기를 달고 처음 출전했던 1936년 독일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대회 이후 무려 74년 만에, 광복 이후로는 48년 스위스 장크트모리츠 대회 이후 62년 만에 첫 우승의 감격을 누렸다. 한국 빙속의 이번 쾌거는

△지난여름 강도 높은 체력훈련 △이규혁·이강석 투톱을 앞세운 내부 경쟁구도

△쇼트트랙에 치중됐던 빙상연맹의 지원 확대 등에 힘입었다. 김종덕 태릉선수촌 훈련본부장은 “역대 어느 빙상팀에

견줘도 이번 대표팀의 훈련량과 수준은 대단했다”며 “지난여름 빙상대표팀은 적게는 120㎞, 길게는 200㎞까지 사이클 훈련을 통해 하체강화 훈련을 소화해냈다”고 말했다. 김관규 대표팀 감독은 “이규혁과 이강석의 선의의 경쟁 속에 모태범이 형들에게 지지 않아야겠다고 노력한 것이 결실을 맺었다”고 말했다.

모태범은 지난 6일 자신의 싸이월드 누리집에 “누군가는 언제나 다른 누군가가 불가능하다고 말한 어떤 일을 하고 있다”고 써놓았다. 국내 모든 언론이 이규혁과 이강석 등 쟁쟁한 선배들에게만 주목할 때 그는 남몰래 구슬땀을 흘리며 얼음을 지쳐댔다. 그러곤 꼭 열흘 뒤 역사적인 기록을 남겼다.

그는 18일 오전 9시 자신의 주종목이자 월드컵 랭킹 2위인 남자 1000m에서 두번째 메달에 도전한다.

 

 

2) 1951 - 지평리 전투가 끝나다

지평리 전투는 1951년 2월 13일부터 2월 16일까지 경기도 양평군 지평리 일대에서 원형 방어진지를 구축한

미국 2 보병사단 23연대전투단(Regiment Combat Team,RCT)과 23RCT에 배속된 프랑스 대대가

중국 인민해방군 39군과 3일간 벌인 격전이었다. 3일 동안 완전히 포위된 미군 23RCT와 프랑스 대대는 포위

3일째인 2월 16일에 미국 1 기병사단 5 기병연대 3대대를 주축으로 편성된 크롬베즈 특별임무부대에 의해 구출되었고,

중국군은 큰 피해를 입고 철수했다.

 

3) 1965 - F-5 전투기 처음으로 한국에 배치

F-5 Freedom Fighter (Tiger)는 노드롭사(社)가 자주적으로 개발을 추진해 온 경량 전투기를 미공군이 해외 공여용으로 채용한 전투기이다. 유시계 전투용의 소형 기체였기 때문에 당초는 그다지 주목을 끌지 못했지만, 센튜리 시리이즈 이후의 새 기술을 도입하여 만들어진 만큼 설계의 기교성과 함께 사용하기 쉽고 우수한 전투기로서 높이 평가되고, 많은 나라에서 사용되는 동시에 라이센스 생산도 행해졌다. 그러면서도 F5A∼D 시리이즈에서는 차차 개량되어 갈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불충분하게 되었다. F-5A∼D시리이즈의 후계기를 구하여 1970년에 행해진 해외공여용 전투기 설계 콘테스트를 위해서 전면적으로 재설계된 것이 F-5E이다. F-5E는 F-16이나 F-18이 등장한 오늘에도 값싸고 쓰기 좋은, 유용한 기체로서 각국이 채용해 가고 있다.

 

"1833년 2월 16일에서 17일에 걸친 밤은 축복 받은 밤이었다.
그날 밤의 어둠 위에는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그것은 마리우스와 코제트가 결혼식을 올린 날 밤이었다.
그날은 실로 멋진 하루였다."

 

- 빅톨 위고 <레미제라블>에서

- 가톨릭신문 (공중전화카드)

 

2009 - 김수환(金壽煥) 추기경 선종

김수환 [金壽煥, 1922.7.2(음력 5.8)~2009.2.16]

한국 가톨릭계를 대표하는 인물이자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온 김수환 추기경이 16일 오후 6시12분께 강남성모병원에서 선종(善終ㆍ서거를 뜻하는 천주교 용어)했다. 향년 87세. 1922년 5월 대구에서 출생한 고인은 1951년 사제품을 받았고 1966년 초대 마산교구장을 거쳐 1968년 대주교로 승품한 뒤 서울대교구장에 올랐다.

1969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한국인 최초 추기경으로 서임된 고인은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 아시아 천주교

주교회의 구성 준비위원장 등을 역임한 뒤 1998년 정년(75세)을 넘기면서 서울대교구장에서 은퇴했다.

- 공중전화 카드

1998 - 태극기 원형 [고려국기] 발견

우리나라 태극기의 원형인 「고려국기」의 4卦(괘)가 청색임이 기록돼있는 국내 최초의 문헌이 발견됐다.

사단법인 대한민국국기선양회 金永煥(김영환)회장은 정부수립 50주년을 맞아 대한민국국기보감 발간작업을 벌이던중 고려대대학원 도서관에 소장돼있는 「通商約章類纂 (통상약장유찬)」이란 문헌에서 이같은 태극기 원형을 발견했다고 16일 밝혔다. 이 책자는 1874년 당시 청나라 정부의 조약 및 외국사신의 서한등을 모아 엮은 책으로 당시 59종의

각 나라 국기가 실려있으며, 우리나라의 국기가 「고려국기」로 수록돼있다.
이 문헌에는 고려국기의 旗面(기면)은 황색,太極(태극)은 청색과 홍색,4卦 (괘)는 청색으로 4괘와 태극이 동일색상으로 기록돼있다. 국기선양회 金회장은 『그동안 발견된 태극기의 경우 색상에 대한 논란이 끊이질 않았다』면서

『이번 사료의 발굴로 태극기의 명확한 색상을 정립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 '소년 입상' (공중전화카드)

 

1992 - 한국의 조각가 김경승(金景承) 사망

김경승 [金景承, 1915.7.18~1992.2.16]

김경승 [金景承]

1937∼1944년 조선미술전람회 조각부에 인물상과 두상(頭像)이 거듭 입선하였다. 그리고 1940년부터 〈목동〉·〈어느 감정〉·〈여명〉 등이 연이어 특선함으로써 추천 작가가 되어 각광을 받았다.

특히 〈여명〉은 한복 바지저고리에 해머를 든 노동자상을 사실적 역동감으로 조형하여 민족색 짙은 작품으로 주목되었다. 그러나 광복 후 뚜렷한 특질의 창작적 작품 활동보다는 미술 대학 교수직과 역사 인물상 또는 기념 동상 제작으로 많은 실적을 남겼다.주로 소녀와 젊은 여인의 전신 또는 반신 나체상으로 시종된 작품들은 대개 1949년 이후 국전(國展)을 통하여 발표되었다. 제1회 국전 때부터 추천 작가·심사 위원으로 참가한 뒤로 마지막 제30회(1981) 때까지 초대 출품한, 엄격한 사실주의와 서정적 시각으로 포착한 여러 자세 및 움직임의 나녀상들이 순수한 창작 활동의 전모였다.

그에 비하여 기념 동상과 기념물 제작은 두드러지게 거듭되었다. 〈충무공 이순신장군상〉(1955년)·〈안중근의사상〉(1959년)·〈세종대왕상〉(1968년)·〈김구선생상〉(1968년)·〈김유신장군기마상〉(1969년)·〈정몽주선생상〉(1970년) 등과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상〉(1957년) 등이 주요 동상 작품들이고, 그밖에 청동 주조의 많은 초상 작품들을 만들었다. 기념물로는 〈4·19학생혁명기념탑〉(1963년) 등이 있다.

이화여자대학교·홍익대학교 교수 및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을 역임하였으며, 1958년 서울시문화상 미술부문상, 1964년 3·1문화상 예술본상, 1969년 대한민국예술원 공로상, 1982년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대표작으로는 〈소년 입상〉

(1943년)·〈춘몽〉(1961년)·〈잠자는 여인〉(1967년)·〈피리 부는 소녀〉(1980년) 등이 있다.

 

1981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아시아 순방 등정

교황 요한 바오로2세(Joannes Paulus II, 1920~2005)가 1981년 2월 16일 즉위후 9번째의 해외여행인 극동방문길에

올랐다. 교황은 아시아순방에 나서기 전날인 15일 성베드로광장에 모인 5만명의 군중들에게 행한 일요미사 강론을 통해 자신의 이번 아시아방문 목적은 "세계평화의 대의를 진착시키고 가톨릭 신도들의 신앙심을 돈독하게 하는데 있다"고

말했다. 12일간 총 3만3천km를 여행한 이번 극동방문에서는 파키스탄 카라치에 첫 기착해 필리핀, 괌을 거쳐 일본 등

아시아 등지를 방문했다. 이번 극동여행은 요한 바오로2세와 아시아의 첫 접촉이 됐다. 일본을 마지막으로 방문을 끝낸

교황은 알레스카 앵커러지에 기착, 27일 귀국길에 올랐다.

 

1964 - 빌리 브란트, 서독 사회민주당 당수에 취임

브란트(Brandt, Willy, 1913~1992)는 16세 때에 사회민주당(SPD)에 입당하여 사회주의 운동에 참가하였으며, 1933년 나치스 정권이 성립하자 노르웨이로 망명하여 W.브란트(본명 Herbert Ernst Karl Frahm)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그후 나치스가 노르웨이를 점령함에 따라 다시 스웨덴으로 이주, 그곳에서 신문기자가 되어 반()나치스 운동가로서 활약하였다. 전후에는 노르웨이 국적으로 뉘른베르크 재판을 취재하기 위하여 귀국, 이어 주()베를린 노르웨이 외교대표부에서 근무하였다.1948년 독일 국적을 회복하고, 1949년 사회민주당 소속의 서베를린 시의회의원으로서 정계에 진출하여, 1957년 서베를린 시장에 취임하였다. 1964년 사회민주당 당수가 되었으며, 1966년 기독교민주동맹(CDU)과의 연립내각에서 외무장관, 1969년 총선거자유민주당(FDP)과의 연립내각 성립에 성공하여 수상이 되었다. 이후 독소조약 체결 등 소련·폴란드·동독을 중심으로 ‘동방외교’를 추진, 동서의 긴장 완화를 위해 노력한 공로로 1971년 노벨평화상

수상하였다. 그리고 동독을 국가로 인정, 양국의 안정에 기여하였으나, 1974년 동독 스파이사건으로 사임하였다.

 

1937 - 듀폰사, 꿈의 인조섬유 나일론 특허 획득

미국 듀폰사가 1937년 2월 16일 `나일론`이라는 새로운 인조섬유로 특허를 획득했다. 이 인조섬유는 값이 싼 석탄, 공기, 물이 주원료여서 섬유시장에 가격혁명을 불러왔다. 미국에 비단을 수출해 오던 일본과의 관계가 악화되자 이를 대체할 인공섬유 개발에 박차를 가한 끝에 이같은 개가를 올렸다.

나일론 개발에는 듀폰연구소의 월리스 캐로더스(41) 박사가 결정적 공헌을 했다. 조수 줄리언 힐이 쓸모없어진 화합물질을 실험용 컵에 넣어 가열하다가 유리막대를 타고 거미줄처럼 가는 섬유가 올라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하버드대 화학과 교수였던 캐로더스 박사는 1928년 문을 연 듀폰연구소에 합류, 인공고무인 네오프렌을 개발하는 등 그간 실용화학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보였다.나일론은 종합-응축 반응을 통해 만들어진 고분자 물질로 아주 질기고 탄력성이 있으며

마모에도 강한 특성이 있다. 듀폰사는 1938년 9월 나일론의 상품화를 발표하고 이어 1940년 5월에는 나일론으로 만든

스타킹을 발매했다.

 

[역사 속의 인물] 비운의 천재 나일론 발명 '캐러더스'

뛰어난 과학자들이 그러했듯, 그도 괴짜였다. 쑥대머리에 뭐든 잃어버리기 일쑤였고 행동도 예측불가였다. 월리스 캐러더스(1896~1937)는 누구나 인정하는 천재였다. 20세기 최고의 발명품인 나일론(nylon)과 합성고무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늘 자신의 능력에 회의를 품고 있었고 우울해 했다.

미국 아이오와에서 태어난 그는 하버드대에서 유기화학을 가르치다 월급을 2배 더 주겠다는 설득에 못 이겨 듀폰사로

옮겼다. 실험에 목숨을 거는 다른 화학자와는 달리, 이론을 파고드는 스타일이었다. "실험의 95%는 연필과 종이로

가능하다"며 도서관에서 지냈다. 나일론과 합성고무도 그의 수많은 아이디어 중 하나였을 뿐이다.

어느 날 석탄, 물, 공기를 원료로 뿌연 액체 덩어리를 만들었는데 누구도 그 진가를 몰랐다. 조수 중 한 명이 덩어리를 가열해 녹인 후 핀셋으로 뽑아 보니 강한 실 모양이 됐다. 1937년 오늘, 나일론의 특허가 출연됐고 두 달 후 비운의 발명가는 필라델피아의 한 호텔에서 갖고 다니던 청산가리를 마셨다. 우울증이 도진 때문이다. 나일론은 여성 스타킹부터

낙하산 줄까지 최고 히트품이 됐지만, 발명가는 그 영광을 함께하지 못한 채 쓸쓸히 사라졌다.

박병선(편집부국장) 매일신문 2011년 02월 16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7183&yy=2011

- 한국방송 70주년 기념 (1997.2.15 발행

- 한국방송 60주년 기념 (1987.2.16 발행)

 

1927 - 우리 나라 최초의 방송국 경성방송국(호출부호 JODK) 방송 시작
사단법인 경성방송국 설립 이듬해인 1927년 (1월 20일 시험방송을 개시하고) 2월 16일 오랜 기간의 시험방송을 거쳐 마침내 본 방송이 개시되었고, 6월에는 최초로 무선 중계방송이 시행되기도 하였다.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방송 사업의 발전을 위해 전력이 증강되었고 한국어와 일본어가 별도의 채널을 통해 이중방송 됨에 따라 정동연주소가 증설되고, 연희방송소가 착공되었다. 1935년에는 방송망의 규모가 팽창함에 따라 경성방송국의 명칭이 경성중앙방송국으로 바뀌었고, 2년 후에는 주파수 변경과 아울러 제2방송이 출력을 증강함으로써 간이수신기로도 전국청취가 가능하게 되었다.

수신기도 고급화되어 스피커가 달린 수신기가 생산됨으로써 라디오 방송의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1.20 - 경성방송국 시험방송 개시.
2.16 - 경성방송국 본방송 개시.
- 방송구역:한국일대 - 호출부호:JODK 주파수:870kHz 공중선전력:1kw
방송편성:조선어3,일본어7 교차방송
KBS 방송박물관 /http://museum.kbs.co.kr/history/history01.php

 

[경성방송국은…]조선총독부 주도 1927년 첫 전파

1927년 2월 16일 오후 1시.
호출부호 ‘JODK’의 경성방송국이 첫 전파를 발사했다. 개국식이 끝나자 이왕직 전속 경성음악대와 중앙악우회 관현악단이 축하연주를 펼쳤다. 서울 정동 1번지에 들어선 크림색 2층 방송국 건물은 2개의 안테나 철탑과 함께, 곧 장안의 이국적인 명물로 자리잡았다.개국 당시 한 달 청취료는 2원. 당시 물가에 비해 너무 비싸다는 여론에 밀려, 곧 1원으로 내렸다. 개국 직후 등록된 라디오 대수는 1440대에 불과했으나, 1943년 말에는 28만5000대까지 늘어났다.
사단법인으로 출발한 경성방송국은 조선총독부가 설립을 주도했고, 이사장도 일본인이 맡았다. 초기에는 한 채널에서 일본어와 우리말 방송이 교대로 이뤄졌다. 주요 방송 내용은 경제 시황과 물가 시세, 일기예보 등이었고, 우리말 방송으로는 창(唱)과 민요·동화·방송극이 마련됐다. 1933년 제2방송이 설립돼 우리말 방송이 본격적으로 이뤄졌으나, 주 방송은 여전히 일본어 방송이었다.
사실상 총독부 관영방송이었던 경성방송국은 1941년 태평양전쟁과 함께 정보국 통제 아래 놓이면서 전쟁 수행 도구로 전락했다. 경성방송국은 광복 이후 서울 중앙방송국, KBS로 이어졌다.

 

1918 - 리투아니아 독립 선언

1918년 2월 16일 리투아니아(Lithuania)가 독립을 선언했다. 13세기 중엽에 민다우가스가 리투아니아의 여러 부족을 통일시켰다. 이후 그의 후손들이 대공작 신분으로 통일 리투아니아를 통치했으며 이들 가운데 게디미나스가 14∼16세기에 동유럽 대부분을 차지하는 제국으로 확장시켰다. 리투아니아를 지배하던 대공작은 1386년 폴란드도 지배하게 되어 이 두 국가는 400년 동안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뒤 리투아니아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국가에서 실제적으로 종속적 위치에 있다가 폴란드의 제3차 분할(1795) 때 러시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864∼1905년에 있었던 집요한 러시아화 운동에 굴복하기도 했으나 20세기초에 들어와 리투아니아 민족주의 정신이 싹트기 시작했으며,

독일이 지배하던 1918년 스스로 독립을 선포하게 되었다.

 

1903 - 미국의 코미디언 버건(Bergen, Edgar) 출생

1893 - 소련의 육군 원수() 투하체프스키(Tukhachevskii, Mikhail) 출생

1884 - 일본의 화가 야스다 유키히코[安田彦] 출생


1831 - 러시아 소설가 레스코프(Leskov, Nikolai Semyonovich) 출생

1823 - 프랑스의 화가 프뤼동(Prud'hon, Pierre-Paul) 사망

1821 - 독일의 지리학자, 아프리카 탐험가 바르트(Barth, Heinrich) 출생

 

 

 

1740 - 이탈리아 인쇄업자 보도니(Bodoni, Giambattista) 출생

1620 - 독일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Friedrich Wilhelm) 출생

 

1543 - 일본의 화가 가노 에이토쿠[狩野永德] 출생

1519 - 프랑스의 제독, 위그노의 수령 콜리니(Coligny, Gaspard de) 출생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루스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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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 -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총선 실시

342년 간의 백인통치와 흑백인종차별정책(아파르트헤이트)에 종지부를 찍은 남아공 최초의 다인종 선거가 1994년 4월 26일부터 3일간 투표에 들어갔다. 이번 선거에는 흑인 민권지도자 넬슨 만델라(Mandela, Nelson, 1918~ )가 이끄는 아프리카 민족회의(ANC)와 데 클레르크(de Klerk, Frederik, 1936~ ) 대통령의 집권 국민당 등 총 27개 정당이 참여했다.

한편 투표 전날인 25일 백인극우파의 소행으로 보이는 2건의 폭탄 폭발사고로 12명이 사망하는 등 선거 방해테러 행위가 격화되기도 했다. 선거 방해테러에도 불구하고 하루 연장한 29일 투표가 끝났고 투표결과 아프리카 민족회의(ANC)가 전체 유효 투표의 62.5%를 획득하며 승리했다.

남아공의 역사적 전인종 총선에서 압승을 거둔 아프리카민족회의(ANC)의 넬슨 만델라 의장이 5월 10일 첫 흑인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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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 - 미국의 성우, 영화배우 루실 볼(Ball, Lucille, 1911~1989) 사망

오랫동안 텔레비전 코미디 스타였다. 그녀가 출연한 프로그램 〈왈가닥 루시 I Love Lucy〉는 1951년 10월 15일 컬럼비아방송국(CBS)이 처음 방영한 상황희극물이었다. 그후 이 프로그램은 여러 가지 형태로 1957년까지 방영되었고, 1962~68년과 1968~74년에 재방영되었다.

젊은시절 볼은 일찍이 연극에 뜻을 두고 15세 때 맨해튼으로 가서 드라마 학교에 다니며 온갖 뜨내기 일을 했다. 몇 년 후 모델을 한 것이 계기가 되어 영화에서 조역을 맡게 되었다. 1933년에 영화를 시작했고 주로 아르케이오영화사(RKO)에서 일했다. 10년 뒤 더 비중 있는 역할을 맡게 되었으며, 1947년에는 CBS 라디오 연속극에서 변덕스러운 가정주부 역을 맡아 주목을 받았다. ... /na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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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 - 소련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사고 발생

1986년 4월 26일 소련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 북동쪽 100km 지점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그린피스가 20세기 역사에서 `전쟁을 제외한 가장 큰 재앙의 날`로 정한 비극이 일어났다.
누출된 방사능 물질이 1945년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폭의 350배. 1995년 발표된 유엔보고서에 따르면 체르노빌 사태로 인해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등 3개국에서 900만명의 주민들이 직간접으로 피해를 당했으며 최소한 80만명이 피폭우려자로 분류됐다.
사고는 이날 새벽 1시24분, 이 발전소의 4호 노에서 터빈발전기의 관성운전시험이 실시되던 중 일어났다. 시험가동 중 초고온이 된 핵연료로 인해 주위의 냉각수가 순간적으로 비등해 일어난 수증기 폭발이었다. 하늘로 치솟은 불기둥과 함께 지붕이 날아가고 원자로에 있던 핵연료가운데 3~4%가 공중으로 분산됐다.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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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 - 이승만 대통령 하야 성명 발표

3.15부정선거를 규탄하는 4.19혁명의 불길이 맹렬히 타오르던 1960년 오늘!
이승만(, 1875~1965) 대통령이 하야 성명을 발표했다.
이 대통령은 오전 11시 방송을 통해 직접 하야의 뜻을 밝히고 다음 날 정식으로 '대통령사임서'를 국회에 제출했다.
이승만 박사는 29일 극비리에 하와이로 떠난다.
1948년 대한민국정부 수립과 함께 초대 대통령에 오른 뒤 제4대 대통령까지 지내면서 그가 이끈 자유당의 12년 장기집권은 이로써 비극적인 종말을 맞았다. /YT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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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 - 소설가 강경애(, 1906~1943) 사망

1943년 4월 26일 소설가 강경애가 3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필명은 가마(珂瑪)로 1907년 4월 20일 황해도 송화에서 출생했다. 6살 때 개가한 어머니를 따라 장연으로 이주해 그곳에서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23년 장연에서 문학강연을 하던 양주동을 만나 `금성`사에서 기거하며 문학을 공부하게 됐다.
1931년 `조선일보`에 단편 `파금(破琴)`을, 그리고 `혜성`에 장편 `어머니와 딸`을 발표하며 문단에 등단했다. 1931년 장하일과 결혼해 간도로 옮겨간 후에도 작품을 계속 발표했다. 1934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장편 `인간문제`는 그녀의 대표작 중의 하나이다. 1935년 `모자` `원고료 이백원` 1936년 `지하촌` `이땅의 봄` `파경` 1937년 `산남(山男)` `검둥이` 등을 발표했다. 그녀의 작품활동은 1931년에서 1939년에 이르는 짧은 기간에 집중되어 이루어졌다.
동아일보에 연재된 `인간문제`는 식민지 시대 최고의 리얼리즘 소설이자 최고의 노동소설로 평가받았다. 농민에서 노동자로, 노동자에서 각성된 노동자로, 각성된 노동자에서 조직적 활동가로 변모해 가는 식민지 시대의 투쟁적 인간상을 그린 이 작품은 공장 내부에 대한 구체적이고 생생한 묘사가 더욱 돋보였다. /조선

 

 

- 'Guernica 1937', by Imro Weiner-Kr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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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 - 독일군, 스페인 게르니카 공습
1937년 4월 26일 오후 4시30분, 독일 공군 ‘콘돌 군단’의 무차별 폭격으로 스페인의 작은 도시 게르니카(Guernica)에 재앙이 내렸다. 게르니카는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에 위치한 고도(古都)로 분리독립을 원하는 바스크족에게는 성지나 다름없던 곳.

스페인 내전 때 프랑코에 반대하고 공화파에 속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이날, 프랑코를 지지하는 독일군은 전투기의 성능도 시험할 겸 그들이 자랑하는 하인켈Ⅲ와 콩커스 52를 주력으로 43대나 되는 폭격기를 게르니카 상공에 띄워 올렸다. 4시간 동안이나 계속된 폭격은 마을의 70%를 쑥밭으로 만들었고 주민 7000여명 중 1600여명의 목숨을 빼앗았다. 장날이라 북적거렸던 중앙광장에도 폭탄이 떨어지고 도망가는 부녀자나 노인들에게도 기총사격이 가해졌다. 사건이 국제사회의 공분을 불러 일으키자 프랑코측은 한때 공화파의 자작극이라며 발뺌했지만 곧 독일군이 조준불량과 경험부족 때문이었다고 실토함으로써 독일군이 자행한 공습으로 판명됐다.

이 사건이 지금까지 사람들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것은 피카소(Picasso, Pablo, 1881~1973)가 그린 ‘게르니카’ 때문이다. 공화파 정부로부터 파리 만국박람회의 스페인관에 걸릴 대형 벽화를 의뢰받아 고민하고 있던 피카소가 ‘게르니카의 피’ 소식을 접한 것은 이틀이 지난 뒤였다. 조국 스페인을 떠나 파리에 머무르고 있던 피카소는 주체할 수 없는 분노에 몸을 떨었고 곧 깊은 슬픔에 잠겼다. 6월 4일, ‘게르니카’가 완성되자 ‘전쟁과 폭력을 고발한 20세기 묵시록적 작품’ ‘학정에 대한 저항과 화해의 상징’이라는 찬사가 쏟아졌다. 검은 색 바탕의 대형 캔버스(7.82m ×3.51m)에는 고통과 분노, 절규와 죽음이 가득했다. 화려한 색채를 즐겨 사용했던 평소와 달리 흑·백을 주조로 한 단순배색과 기하학적 구도로 전쟁의 비극을 더욱 강하게 부각시켰다. 2차대전 중 미국으로 건너간 ‘게르니카’는 스페인에 민주주의가 찾아왔을 때 돌려주라는 피카소의 유언에 따라 1981년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조선

 

"살고 죽기 위한 공포와 용기
그렇게 어렵고 그렇게 쉽기도 한 죽음
보석을 노래하게 한 사람들
보석을 망쳐버린 사람들
절망 때문에 희망의 삼켜버릴 듯한 불을 피게 한 사람들
미래의 마지막 꽃봉우리를 피우자."

- 폴 엘리아르의 시 <게르니카의 승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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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 - 미국의 천체물리학자 펜지어스(Penzias, Arno, 1933~ ) 출생

독일 뮌헨 출생. 1940년 가족과 함께 도미(), 1954년 뉴욕시립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하였다. 1962년 컬럼비아대학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1961∼1976년 벨연구소 연구원, 1976∼1979년 동() 전파연구소 소장을 역임하였다. 1967년 프린스턴대학의 강사, 1974년 뉴욕주립대학 조교수로도 있었다. 1964년 우주의 기원에 관한 빅뱅이론을 설명할 수 있는 3K의 우주배경복사()를 발견하였다. 이 공로로 1978년 R.W.윌슨(Wilson, Robert W., 1936~ )과 함께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하였다. /na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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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 - 에스파냐의 시인 알렉산드레(Aleixandre, Vincente, 1898~1984) 출생

1927년세대의 일원이었고 1977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초현실주의 시작법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철도기관사의 아들이었던 알레익산드레는 법학과 경영학을 전공했으며, 1920~22년에 상법을 가르쳤다. 1925년 심하게 앓기 시작해 요양기간중 최초의 시를 썼다. 1936~44년 자신의 시가 출판금지되었으나 스페인 내란 동안 스페인을 떠나지는 않았다. 1949년 스페인 왕립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자유시의 대가로 간주되었다. 그 자유시체는 초기 주요저서 〈파괴 또는 사랑 La destrucción o el amor〉(1935)에 나타나 있는데 이 작품으로 스페인 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이 작품에서 인간과 물질적인 우주의 동일성이라는 주제를 탐구했다. ... /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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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 - 사학자, 문인 최남선(, 1890~1957) 출생

본관 동주(:), 호 육당(), 자 공륙(), 아명 창흥(), 세례명 베드로이다. 자습으로 한글을 깨쳐 1901년(광무 5)부터 《황성신문》에 투고했고 이듬해 경성학당에 입학하여 일본어를 배웠다. 1904년 황실유학생으로 소년반장()이 되어, 도쿄[]부립중학에 입학했으나 3개월 만에 귀국했다. 1906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지리역사학과에 들어가 유학생회보 《대한흥학회보()》를 편집하면서 새로운 형식의 시와 시조를 발표했다.

1907년 모의국회 사건으로 퇴학, 이듬해 귀국하여 자택에 신문관()을 설립하고 인쇄와 출판을 했다. 다음해 잡지 《소년》를 창간하여 논설문과 새로운 형식의 자유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하고, 한편 이광수의 계몽적인 소설을 실어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 1909년 안창호()와 함께 청년학우회 설립위원이 되고, 이듬해 조선광문회()를 창설하여 고전을 간행하고 20여 종의 육전소설()을 발간했다. 1913년 다시 《아이들 보이》를 창간했으나 이듬해 폐간되자 다시 《청춘()》을 발간하여 초창기 문학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1919년 3·1운동 때는 독립선언문을 기초하고 민족대표 48인 중의 한 사람으로 체포되어 2년 6개월형을 선고받았으나 다음해 가출옥했다. 1922년 동명사()를 설립, 주간지 《동명()》을 발행하면서 국사연구에 전념했다. 1924년 《시대일보()》를 창간, 사장에 취임했으나 곧 사임, 이듬해 《동아일보()》의 객원이 되어 사설을 썼다. 1927년 총독부의 조선사편찬위원회 촉탁을 거쳐 위원이 되고, 1932년 중앙불교전문학교 강사가 되었다.

1938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만몽일보(滿)》 고문으로 있다가 1939년 일본 관동군이 세운 건국대학() 교수가 되었고, 귀국 후 1943년 재일조선인 유학생의 학병지원을 권고하는 강연을 하기 위하여 도쿄로 건너갔다. 광복 후 우이동()에 은거, 역사논문 집필에 전념하다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기소되어 1949년 수감되었으나 병보석되었다. 6·25전쟁 때 해군전사편찬위원회 촉탁이 되었다가 서울시사() 편찬위원회 고문으로 추대되었고, 그후 국사관계 저술을 하다가 뇌일혈로 작고했다.

신문화 수입기에서 언문일치()의 신문학운동과 국학() 관계의 개척에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다. 이원()의 진흥왕순수비()를 발견하였다. 저서에 창작 시조집 《백팔번뇌()》, 시조집 《시조유취(調)》, 역사서 《단군론()》 《조선역사》 《삼국유사해제》 《조선독립운동사()》 등 다수가 있다. /na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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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 - 오스트리아 출생의 영국 철학자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 Ludwig, 1889~1951) 출생

오스트리아 빈 출생. 1920년대에는 오스트리아학파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 무렵의 사상은 논리적 원자론()에 속하는 것이었으며, B.러셀과의 상호 영향에 따라 형성된 것이었다. 그후 점차 인공언어()에 의한 철학적 분석방법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되었으며, 1939년에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교수로 있으면서 일상언어() 분석에서 철학의 의의를 발견하게 되었다.
생존 중에 출판된 저작은 1921년에 간행된 《논리철학론()》뿐이지만, 구두논의()로 영국의 분석 철학계()에 끼친 영향이 크다. 최근에 《철학적 탐구 Philosophische Untersuchungen》(1953) 등 많은 유고(稿)가 출판되었다. /na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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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9 - 독일의 외과의사 빌로트(Billroth, Theodor, 1829~1894) 출생

프로이센 베르겐 출생. 그라이프스발트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한 후 괴팅겐대학으로 옮겼다가 다시 베를린대학으로 옮겨 1852년에 졸업하였다. 그 후 베를린대학 외과교수 랑겐베크의 조수로 있으면서 주로 외과 병리학에 관한 연구에 전념하였다. 1860년에 취리히대학의 외과학 교수가 되었으며, 1867년부터 빈대학 외과학 교수로 재직하였다. 1863년 발간된 저서 《외과적 병리학총론과 치료 A11gemeine chirurgische Pathologie und Therapie》는 10개 국어로 번역 ·출판되었고 11판의 증판을 냈다. 1872년 최초로 식도 절제수술에 성공하였으며 1881년 최초로 위암 환자의 유문절제()수술에 성공하였다. /na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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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2 - 미국의 조경 건축가 옴스테드(Olmsted, Frederick Law, 1822~1903) 출생

매사추세츠주 브루클린 출생. 예일대학교에서 농업과 공학을 공부하고, 처음에는 미국 남부 여러 주()를 돌면서 노예제도가 각 주의 사회 ·경제에 미치는 공과()를 연구하고, 그 성과를 3권의 책에 정리하였다. 1856년 유럽을 여행하고 공원시설을 연구하였다. 1857년 뉴욕시() 센트럴파크 조성 때 감독이 되었으며, 1861년 이것을 완성하였다. 그후 미국 공중위생위원과 뉴욕시 공원위원 등을 역임하였고, 만년에는 보스턴에 살면서 조경계획에 종사하였다. 그가 관계한 공원은 미국 각지에 80개가 넘으며, 나이아가라폭포의 자연경관 보호의 기본설계도 하였다. /na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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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elf-portrait' - 'The Giaour' - 'Frederic Chop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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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n the Barricades-Liberty Leading the People' - 'Greece in Missolong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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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acob Wrestling with the Angel', detail - 'The Capture of Constantinop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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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oulay Abd-er-Rahman' - 'A Jaguar Attacking a Ri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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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ene from the Massacre' - 'The Capture of Constantinople', detail @

 

1798 - 프랑스의 화가 들라크루아(Delacroix, Eugene, 1798~1863) 출생

1798년 4월 26일 샤랑트현() 생 모리스에서 출생하였다. 명문가 외교관의 아들로 명석하며 정열적인 상상력을 타고났다. 16세에 고전파 화가인 P.N.게랭에게 그림을 배웠고, 1816년 관립미술학교에 입학하였다. 이때부터 루브르미술관에 다니면서 P.P.루벤스, P.베로네세 등의 그림을 모사하였고, T.제리코의 작품에 매료되어 현실묘사에도 노력하였다. 1819년 제리코가 발표한 《메두사호()의 뗏목 Raft of the Meduse》은 그에게 낭만주의를 수립하는 결정적인 감격과 영향을 주었다. 그리하여 1822년 최초의 낭만주의 회화인 《단테의 작은 배》를 발표하였다.

여기에서 엿볼 수 있는 극적인 표현은 다비드풍()의 고전주의에 대한 도전이라고 할 수 있다. 계속하여 1824년에는 그리스의 독립전쟁에서 취재한 《키오스섬의 학살》을 발표하여 '회화의 학살'이라는 혹평을 받기도 하였지만, 힘찬 율동과 격정적 표현은 그의 낭만주의를 더욱 확립시켰다. 더욱이 이때 살롱의 똑같은 방안에 진열된 영국의 J.컨스터블의 풍경화의 밝은 색조에서 자극을 받고, 자기의 작품을 밝게 새로 칠하여 한층 더 강렬한 효과를 나타냈다.
다음 해 런던에서 R.P.보닝턴, J.P.로런스 등과 사귀는 동안 더욱더 빛깔의 명도와 심도를 증가시켰다. 즉, 자신과 낭만주의 회화의 성숙기를 맞이한 것이다. 그 후 수년간의 작품 중에서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1827),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1830)은 대작이다. 그 후에도 계속 진전하여 1832년 모르네 백작을 수반으로 하는 외교사절단을 수행한 모로코 여행을 통해, 근동 지방의 강한 색채와 풍속에서 깊은 감동을 받고, 그의 예술에 대한 새로운 눈을 뜨는 동시에 그 후의 낭만주의 회화에서의 동방취미
풍속화의 기반을 닦았다. 명작 《알제의 여인들》(1834)은 이 여행에서 얻은 훌륭한 성과였다. 뿐만 아니라 이때를 중심으로, 초기에 볼 수 있었던 외면적인 격렬한 맛이 점차 내면화되었다.

작품으로는 이상에서 말한 대표작 이외에 초상화, 성서에서 제재를 택한 것, 말이나 사자 등의 동물을 그린 것도 많다. 더욱이 문학적·음악적인 정서도 풍부하여 셰익스피어, 바이런, 괴테 등의 작품을 일찍부터 가까이하였고, 음악가 F.리스트와 당시의 여성문학가이던 G.상드와도 친하였다. 이와 같은 풍부한 재능과 환경은, 그에게 회화작품 외에도 오늘날 미술사상() 귀중한 문헌으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는 뛰어난 예술론이나 일기 등을 집필하게 하였다.

그의 예술형성에 전술()한 화가 이외에도 16세기 베네치아파 화가인 미켈란젤로나 고야도 영향을 주었으며, 한편으로 그 자신의 영향은 그 후의 낭만주의 회화를 물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E.드가와 A.르누아르에게 직접 연결되는 점도 많다. 후반기에는 교회와 파리의 공공건축물을 위한 대벽화 장식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국회 하원의 《국왕의 방》(1833), 국회 하원도서관(1844), 국회 상원도서관(1845∼1847), 파리시청의 《평화의 방》(1849∼1853, 소실), 루브르궁전의 《아폴로의 방》(1849) 등을 잇달아 그렸고 만년에는 동판화와 석판화 제작에도 뛰어난 솜씨를 보였는데, 흑백의 대조가 강조되고 한층 더 환상적으로 표현하는 기교로써 《파우스트 석판화집》(1827) 《햄릿 석판화집》(1843) 등의 걸작을 남겼다. /na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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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8 - 미국의 산악인 벡워스(Beckwourth, Jim, 1798~1866?) 출생

오랫동안 인디언들과 함께 살았던 미국의 산악인. 백인 제닝스 벡워스 경과 혼혈 노예여성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법률상으로 노예였다. 1810년 그의 아버지는 그를 루이지애나 준주로 데려갔다가 다시 세인트루이스로 가서 노예신분을 벗겨주었다. 그뒤 사람들로부터 '자유 신분의 흑인'대접을 받았다. 생김새는 아메리카 인디언과 비슷했다고 전해진다. 1823년 모피 교역 원정대의 마부로 고용되었고, 다음해에는 로키 산맥으로 가는 원정대에서 말을 돌보는 일을 하게 되었다. 서부에서 지내는 동안 여러 인디언 여자들과 결혼했으며 약 6년 동안 크로족 인디언들과 함께 살기도 했다. 과장하기를 좋아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힘과 손재주로 인디언들에게 상당히 깊은 인상을 주었다고 자처하는 이야기는 여러 증거들을 볼 때 사실인 것 같다. ... /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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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7 - 독일의 시인 울란트(Uhland, Ludwig, 1787~1862) 출생

민요풍의 서정시와 발라드로 유명하다. 시작()에 종사하는 한편 법률학을 전공하여 한때 변호사와 의회의원으로도 활약하였다. 또 튀빙겐대학에서 독일의 중세문학() 강의도 하여 이 방면의 저서도 많다. 널리 애송되고 있는 《양치기의 일요일의 노래 Schafers Sonntagslied》 《소년의 산의 노래 Des Knaben Berglied》 등은 모두 20세 이전에 쓴 작품들이다. 그의 서정시는 간소한 아름다움을 지녔으며, 자연을 소박한 감정으로 노래하였다. 《Walther von der Vogelweide》(1822)가 그의 대표적인 저서로 꼽히고 있다. /na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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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5 - 미국의 조류 연구가, 화가 오두본(Audubon, John James, 1785~1851) 출생

도미니카의 산토도밍고 출생. 1791년 프랑스로 건너가 고전주의 화가 J.L.다비드로부터 그림을 배웠다. 20세 때 혼자 미국으로 건너갔다. 펜실베이니아의 아버지 소유지에서 생활하였으며 일찍부터 자연, 특히 새에 대한 흥미를 가지고 많은 시간을 채집 ·관찰 ·묘사에 쏟았으며, 후반의 생을 조류 화가 및 연구가로 지냈다. 489종 1,065마리에서 435매의 사실화()를 얻어 《미국의 새들 The Birds of America》(전4권, 1827~1838)에 수록하여 출판하였다. 그 밖에 《조류학적 전기 Ornithological Biography》와 포유류를 그린 《북아메리카의 포유류 The Viviparous Quadrupeds of North America》(전3권, 1845~1848)도 유명하다. 흔히 미국 조류학의 아버지라 부르고 있으며 미국에는 그의 이름을 붙인 유명한 자연보호 단체인 국립오두본협회(National Audubon Society)가 있고 100여 개의 지부가 있다. /na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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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4 - 영국의 시인, 극작가 셰익스피어(Shakespeare, William, 1564~1616) 출생
세계 연극사와 문학사에 길이 남을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1564년 4월 26일 영국 중부 잉글랜드에서 태어났다. 그는 영국 르네상스의 최정점인 엘리자베스 여왕1세 때 출생해 유복한 가정의 장남으로 유년시절을 보냈으나 13세때 집안이 몰락해 대학에는 진학하지 못했다.

1580년대부터는 배우로서 생활하기도 했으며 1592년경에는 신인배우로서의 평판이 높았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극작가로서 초기에는 선배작가의 희곡을 부분적으로 수정하는 작업에 매달렸다. 주요작품으로는 `로미오와 줄리엣` `한여름밤의 꿈` `햄릿` `오셀로` `리어왕` 등이 있다. 그는 연극이라는 매개를 통해 인간 내면세계의 극한을 추구했다.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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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4 - 코페르니쿠스, 처음으로 토성관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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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2 - 경복궁 경회루 준공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景福宮)이 창건된 것은 1395년으로, 이때 경회루(慶會樓) 주위에 작은 연못이 조성되었고, 1412년(태종 12) 태종의 명에 의하여 큰 방지를 파고 경회루를 창건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불타서 273년간 폐허로 남아 있다가 1867년(고종 4) 흥선대원군에 의하여 재건되었다. 방지의 크기는 동서가 128m, 남북이 113m인데, 못 안에 방형의 섬을 만들고 거기에 누를 세웠다. 이 섬에 들어가는 3개의 석교()가 있는데, 모두 하엽동자()에 회란석()을 섬 주위까지 돌렸다...

이 집은 건축기술상 너무 커서 어려움이 있었으나 이를 잘 처리하여 견고하게 지었다. 한국 목조건축기술의 우수성을 과시하는 이 누가 화려한 단청의 집 그림자를 연못 속에 드리우면 그 영상이 아름답다. 또한 연못은 뱃놀이도 했던 곳이다.
1985년 1월 8일 국보 제224호로 지정되었다. /na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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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 로마제국의 제16대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Antoninus, 121~180) 출생

121년 로마에서 출생하였다. 5현제()의 마지막 황제로, 후기 스토아파()의 철학자이다.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의 양자가 된 후 140년 로마의 콘술(집정관)이 되었고, 145년 안토니누스의 딸(사촌누이)과 결혼, 161년 안토니누스의 뒤를 이어 로마 황제로 즉위하였다.
당시의 로마제국은 경제적·군사적으로 어려운 시기여서 변방에는 외적의 침입이 잦았으며, 특히 도나우강() 쪽에서는 마르코만니족 및 쿠아디족이 자주 침입하여 그 방비에 힘썼다. 그동안 페스트가 유행하여 제국은 피폐하고, 게르만족과의 전쟁에 시달리면서 발칸 북방의 시리아 및 이집트 등의 진영()에서 병을 얻어 도나우 강변의 진중에서 죽었다.

유명한 《명상록()》은 이 진중에서 쓴 것으로 스토아적 철인의 정관()과 황제의 격무라는 모순에 고민하는 인간의 애조(調)가 담겨 있다. 여기서 그의 철학은 본질적으로는 반 세기 전의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토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으나, 한층 내면적으로 침잠해 들어오는 철학을 이루고 있다. 이에 따르면 세계의 모든 것은 불이며, 신적()인 세계 영혼으로 관통되고 살려지게 되고 지배받고 있으며, 인간의 영혼도 세계 영혼의 한 유출물에 불과하여 죽으면 자연히 세계 영혼에 귀일하게 된다.

물질적·육체적인 세계의 모든 것은 이 신적인 이성에 의하여 운명적·자연필연적으로, 그러면서도 신적·합법칙적으로 끊임없이 생멸변화()하고 있다. 따라서 개물()·개인()은 그 이름도 기억도 이 필연의 운동 속에서 소멸되고, 망각으로 빠져들어간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이 자연필연의 이법()을 확인하여 이를 신의 섭리라 믿고, 외적인 어느 것에도 마음을 괴롭히는 일이 없이 주어진 운명을 감수하며, 내적으로 자유롭고 명랑하고 조용하고 경건하게 그의 죽음의 날을 기다리며 살아가야 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있어서는 철학자와 황제는 전혀 별개의 것이었다. 그가 죽은 후 로마제국은 쇠퇴하였다. 로마시에는 ‘마르코만니전쟁’을 부조()한 기념주()와 그의 기마상()이 있다.

 



 

2000년 - 스리랑카의 총리 반다라나이케(Sirimavo Bandaranaike, 1916~2000) 세상 떠남

세계 최초로 여성 총리를 지낸 스리랑카의 전 총리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Sirimavo Bandaranaike)가 2000년 오늘 84살을 일기로 숨졌다.
반다라나이케는 이날 국회의원 투표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다 심장마비로 숨졌다.
반다라나이케는 1959년 총리였던 남편이 암살되자 남편이 이끌던 스리랑카자유당의 총재가 돼 정계에 나섰다.
이듬해 1960년 총선거에서 승리해 세계 처음으로 여성 총리에 오른 이후 40년 동안 스리랑카 정계를 이끌다 건강이 악화돼 숨지기 두 달 전 총리직에서 물러났었다.
그녀의 딸도 1994년 스리랑카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 당선됐었다.

 

 


 

1973년 - 해병대, 해군에 통합

한국의 해병대는 1949년 4월 15일 경상남도 진해(鎭海)의 덕산(德山)비행장에서 해군 장병 380여 명을 기간으로 창설되었다. 6·25 이전에는 진주(晉州)·제주(濟州) 등지의 좌익토벌작전에서, 전쟁중에는 인천상륙작전을 비롯한 많은 전투에서 전과를 올렸다. 1955년 자주적 상륙작전 단위부대인 제1상륙사단이 창설되었고, 베트남전쟁이 일어나자 1965년 1개 여단병력이 파병되었다. 1973년 해병대 개편계획에 따라 사령부가 해체되었으나 1987년 중간사령부로서의 해병대사령부가 다시 창설되어, 해병전투력 제고에 이바지하였다.

 

 


 

1964년 - 제18회 도쿄올림픽 개막

유럽에서 탄생한 올림픽이 처음으로 아시아에서 개막됐다. 제18회 올림픽이 일본 도쿄에서 1964년 10월 10일 개막된 것이다. 94개국 5586명의 선수가 출전한 도쿄올림픽 개막식에는 7만5천4백여명의 관중이 운집했다.

4년전 소련에 뒤졌던 미국은 금메달수에서 다시 소련을 제치고 스포츠강국으로 부상했다. 미국이 얻은 금메달중 가장 화제에 오른 것은 1만m에서 우승한 빌리 밀스였다. 밀스는 수우족 인디언의 혈통을 물려받은 해병대원이었다. 전통적으로 북유럽선수가 강한 1만m에서 미국선수가 금메달을 딴 것은 밀스가 처음이었다. 맨발의 마라토너 아베베도 2시간12분11초의 세계신기록으로 2연패했다. 또한 홍보용 포스터는 많은 외국인을 유치한 광고로 평가 받았다. <조선>

 

 


 

1962년 - 제10차 인도, 태평양지역 수산(水産)이사회 조선호텔서 개막

국제연합식량농업기구(FAO)에 속하는 하부기구. 국제협력에 의해 인도 ·태평양 지역의 수산자원의 개발 및 적절한 이용을 도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1948년 설립되어 사무국을 방콕에 두고 있다. 가맹국은 동남 아시아 여러 나라와 미국 ·영국 ·프랑스 ·오스트레일리아 등 31개국이다.

 

 

- '해(海)에게서 소년에게'
 

1957년 - 육당 최남선(, 1890~1957) 세상 떠남

본관 동주(:), 호 육당(), 자 공륙(), 아명 창흥(), 세례명 베드로이다. 자습으로 한글을 깨쳐 1901년(광무 5)부터 《황성신문》에 투고했고 이듬해 경성학당에 입학하여 일본어를 배웠다. 1904년 황실유학생으로 소년반장()이 되어, 도쿄[]부립중학에 입학했으나 3개월 만에 귀국했다. 1906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지리역사학과에 들어가 유학생회보 《대한흥학회보()》를 편집하면서 새로운 형식의 시와 시조를 발표했다.

1907년 모의국회 사건으로 퇴학, 이듬해 귀국하여 자택에 신문관()을 설립하고 인쇄와 출판을 했다. 다음해 잡지 《소년》를 창간하여 논설문과 새로운 형식의 자유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하고, 한편 이광수의 계몽적인 소설을 실어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 1909년 안창호()와 함께 청년학우회 설립위원이 되고, 이듬해 조선광문회()를 창설하여 고전을 간행하고 20여 종의 육전소설()을 발간했다. 1913년 다시 《아이들 보이》를 창간했으나 이듬해 폐간되자 다시 《청춘()》을 발간하여 초창기 문학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1919년 3·1운동 때는 독립선언문을 기초하고 민족대표 48인 중의 한 사람으로 체포되어 2년 6개월형을 선고받았으나 다음해 가출옥했다. 1922년 동명사()를 설립, 주간지 《동명()》을 발행하면서 국사연구에 전념했다. 1924년 《시대일보()》를 창간, 사장에 취임했으나 곧 사임, 이듬해 《동아일보()》의 객원이 되어 사설을 썼다. 1927년 총독부의 조선사편찬위원회 촉탁을 거쳐 위원이 되고, 1932년 중앙불교전문학교 강사가 되었다.

1938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만몽일보(滿)》 고문으로 있다가 1939년 일본 관동군이 세운 건국대학() 교수가 되었고, 귀국 후 1943년 재일조선인 유학생의 학병지원을 권고하는 강연을 하기 위하여 도쿄로 건너갔다. 광복 후 우이동()에 은거, 역사논문 집필에 전념하다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기소되어 1949년 수감되었으나 병보석되었다. 6·25전쟁 때 해군전사편찬위원회 촉탁이 되었다가 서울시사() 편찬위원회 고문으로 추대되었고, 그후 국사관계 저술을 하다가 뇌일혈로 작고했다.

신문화 수입기에서 언문일치()의 신문학운동과 국학() 관계의 개척에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다. 이원()의 진흥왕순수비()를 발견하였다. 저서에 창작 시조집 《백팔번뇌()》, 시조집 《시조유취(調)》, 역사서 《단군론()》 《조선역사》 《삼국유사해제》 《조선독립운동사()》 등 다수가 있다.

 

 


 

1935년 - 거슈윈(George Gershwin) 작곡, 오페라 '포기와 베스' 초연

거슈윈은 뉴욕에서 태어났다. 대중적인 경음악을 작곡하면서 재즈기교에 의한 수준 높은 관현악곡과 오페라를 창작하여 새로운 측면을 개척하였다. 소년시절 개인교사에게 피아노와 화성학을 배우고 16세 때 고등학교를 중퇴, 음악출판사의 피아니스트로서 작곡을 시작하였다. 19세 때부터는 극장 전속 피아니스트로 근무하였으며, 21세 때에는 《스와니》를 발표하여 히트하였다.

이후 계속해서 인기를 모아 리뷰나 쇼의 일류 작곡가가 되었으며, 1924년(26세) 폴 화이트먼이 위촉한 재즈의 기법을 따른 피아노협주곡 《랩소디 인 블루》를 내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고전음악과 경음악을 조화시켜 관현악곡 《파리의 미국인》(1928) 《피아노협주곡 F장조》(1925) 및 오페라 《포기와 베스》(1935) 등의 본격적인 작품 외에도 많은 통속 희가극과 대중음악, 영화음악을 작곡하였는데 뇌종양이 발병해 3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포기와 베스(Porgy and Bess)'

3막 9장. 헤이워드부부의 희곡《포기》를 바탕으로 한 헤이워드(남편)와 이라 거슈윈의 대본에 의하여 작곡되고 1935년 9월 보스턴에서 초연되었다. 무대는 사우스캐롤라이나주()의 찰스턴. 하역인부() 크라운의 정부() 베스는 포기에 대한 애정을 끊지 못한다. 이에 분노한 크라운은 베스를 찾으러 갔다가 도리어 포기에게 살해된다. 그러나 체포된 포기는 얼마 가지 않아 살인혐의를 벗고 출소()하나 베스는 뉴욕으로 떠나고 만다. 포기는 뉴욕이 먼 곳에 있는 도시라는 것을 알면서도 베스를 찾으러 떠난다. 한 사람의 단역을 제외하고는 등장인물이 모두 흑인이고 흑인영가와 민요가 많이 들어 있으며 유럽의 전통을 대담하게 탈피한 이색적인 미국적 오페라이다. 곡 중에서 제1막의 <서머타임>과 제2막의 <피로할 따름>이 유명하다.

 

 


 

1932년 - 독립운동가 이봉창(李奉昌, 1901~1932) 의사 순국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31년 동안 대강 맛보았습니다. 영원한 쾌락을 위해 독립사업에 투신하겠습니다.” 1931년 1월, 상하이 임시정부를 찾아간 이봉창(李奉昌) 의사가 김구 선생에게 자신의 결연한 의지를 이렇게 밝혔다.

일본에서 6년간 생활한 적이 있는 이 의사는 1년 전 도쿄에 있을 때 일왕이 지나간다고 길 위에 엎드리면서 “폭탄이 있었으면...” 하고 아쉬워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임시정부도 일왕 제거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던 터라 이 의사의 주장이 설득력 있게 들렸다.

1931년 12월에 도쿄에 도착한 이 의사는 때를 기다렸다. 마침 일왕이 도쿄 요요기 연병장에서 거행되는 신년 관병식에 참석한다는 소식을 알아낸 이 의사는 이날을 거사일로 잡았다. 1932년 1월 8일, 히로히토(裕仁) 일왕이 황궁으로 돌아가기 위해 도쿄 경시청 앞을 지날 때 이 의사는 그가 탄 승용차를 향해 폭탄을 힘껏 던졌다. 폭탄은 승용차 뒤쪽에서 굉음을 내며 터졌지만 거리가 멀어 뒤를 따르던 마차만 거꾸러졌다. 현장에서 체포된 이 의사는 대역죄로 사형을 선고받아 1932년 10월 10일, 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조선>

 

 


 

1917년 - 미국의 재즈 피아니스트, 작곡가 멍크(Thelonious Monk, 1917~1982) 태어남

노스캐롤라이나주()에서 출생하였다. 독학으로 피아노를 배우고, 1940년경 당시의 재즈에 만족할 수 없었던 젊은 음악가들 속에 끼여들어 비밥(bebop) 창조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 1944년 레코드를 출반하여 가요계에 데뷔하고, 1950년대 중기에 실력을 인정받아 작곡가 ·연주자로서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독창적인 스타일과 타협을 모르는 성격으로 유명하며 전위재즈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대표작에 《라운드 미드나이트》 《스트레이트 노 체이서》 등이 있으며, 그 밖에도 모던재즈의 표준이라고 할 수 있는 곡들을 많이 만들었다.

 

 


 

1911년 - 중국 신해혁명(命)

20세기 들어 청조의 몰락은 거역할 수 없는 대세였다. 1911년 10월 10일, 양쯔강 중류지역에 위치한 우창(武昌)에서 혁명파 군인들이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신해혁명(辛亥革命)이 시작된 것이다.
이튿날 혁명군이 우창·한커우(漢口)·한양(漢陽)의 우한(武漢) 3진(鎭)까지 장악, 혁명의 봉화를 지피자 중국 전역은 혁명의 소용돌이로 빠져들었다.
1개월 만에 12개 성이 혁명진영에 가담하자 청조는 베이징 군벌 위안스카이(袁世凱)를 총리로 임명, 진압에 나섰다. 위안(袁)은 한커우와 한양을 탈환했으나 곧 혁명군과 타협을 모색했다. 임시대총통 자리를 내주겠다는 혁명군의 제의를 받은 마당에 굳이 승산도 불투명한 내전에 뛰어들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혁명군도 힘의 열세를 느끼고 있었다.
1912년 1월 1일, 난징에서 중화민국 수립이 선포되고 쑨원이 임시대총통으로 취임했지만 쑨원은 3월 11일 위안에게 대총통직을 이양했다. 이미 2월 12일에 청조 마지막 황제 푸이가 황제직을 내놓아 286년간에 걸친 청조가 무너진 뒤였다. 그러나 신해혁명은 국민의 참여가 뒷받침되지 않은 미완의 혁명이었다.
<조선>

 

 


 

1902년 - 도량형규칙 공포

1875년에 국제미터협약이 체결되어 전세계적으로 미터법만을 사용하게 됨에 따라 1902년 도량형 규칙이 제정되고 국내에 평식원(平式院)이 설치되었으며, 1905년 조선 고종 때 대한제국 법률 제1호로 도량형 규칙을 제정 공포하여 척관법을 미터법과 서양에서 사용하는 야드-파운드법과 혼용하도록 하였다. 이 때 비로소 척관법의 기본단위가 되는 길이의 단위인 척은 0.303m로, 무게의 단위인 관은 3.75㎏으로 정의하였다.
그 후 1961년 5월 10일 구(舊)도량형 관계법이 폐지되고 새로운 형태의 계량법이 제정되었으며, 또한 미터법 통일사업이 추진됨에 따라 국제적인 추세에 맞추어 한국도 미터법만을 사용하도록 법이 제정되고, 이에 따라 1964년 1월 1일부터는 토지 건물이나 수출입, 무기·항공·선박 및 연구분야의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척관법이나 야드-파운드법은 거래상 또는 증명상의 계량에서 그 사용이 금지되었다. 1983년 1월 1일부터는 토지 건물에 사용되는 평도 사용이 금지되었다.

 

 

1901년 - 스위스의 조각가, 화가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 1901~1966) 태어남

 

 

 


 

1898년 - 프랑스의 육군 장교 쾨니그(Marie-Pierre Koenig, 1898~1970) 태어남

제2차 세계대전 때 샤를 드골 장군이 이끄는 자유 프랑스군에서 활약했던 주요 지휘관 중의 한 사람이다. 제1차 세계대전 때와 전후에 북아프리카에서 군 복무를 마친 뒤, 제2차 세계대전초 노르웨이와 프랑스 전선에 참가했다. 1940년 6월 영국으로 철수한 그는 드골 운동에 가담해 자유-프랑스군에서 계속 진급했으며, 1940년 가봉 점령과 1942년 북아프리카에서 독일에 맞서 비르하케임을 방어하여 유명해졌다. 그뒤 프랑스가 아이젠하워 장군 사령부에 파견한 보조 군대 참모장이 되었으며, 1944년 6월에는 점령된 프랑스의 반(反)독일 게릴라 부대인 프랑스 국내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전쟁 말기 독일에 있는 프랑스 군대를 지휘하던 쾨니그는 1949년 북아프리카 검열관이 되었으며, 1950년에는 전시비상의회의 부의장이 되었다. ...

 

 


 

1897년 - 미국 장로회 선교사 베어드, 평양에 숭실학교 설립

숭실대학교는 1897년 10월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배위량(:W.M.Baird)이 개설한 학당이 모체이다. 교훈은 진리와 봉사이다. 1901년 평양으로 교사를 신축 이전하면서 교명이 숭실학당으로 정하여졌다. 1905년 숭실대학으로 승격하여 한국 최초의 대학이 되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1925년 숭실전문학교로 개편되었다가 1938년 폐교되었다.

1954년 서울에서 숭실대학으로 재건하였으며, 1971년 대전대학(1956년 미국 남장로교 재단에서 대전기독학관으로 설립하여 1959년 대학으로 승격)과 통합하여 교명을 숭전대학교로 변경하였다. 1983년 대전캠퍼스는 한남대학교로 독립·분리되었다. 1986년 교명을 숭실대학교로 환원하였다.

 

 


 

1895년 - 중국의 소설가, 문명비평가 린위탕(林語堂, 1895~1976) 태어남

원이름은 위탕[]. 푸젠성[] 룽치[]의 가난한 목사 집안 출신. 상하이[]의 성 요한대학[] 졸업 후 베이징 칭화학교[] 영어교사가 되었다. 1919년 하버드대학에 유학, 언어학을 공부하고 독일로 건너가(1921) 예나, 라이프치히 두 대학에서 수학했다.

1923년 귀국하여 국립 베이징대학 영문학 교수가 되었는데, 음운학()을 연구하는 한편 루쉰[] 등의 어사사()에 가담하여 평론을 썼다. 1926년 군벌정부의 탄압을 피하여 아모이[]대학 문과 주임, 이듬해 우한정부[]에 가담하여 그 외교부 비서가 되었다.

1932년 유머와 풍자를 주장하는 《논어》, 1934년 소품문지() 《인간세()》 등을 창간, 소품문을 유행시켰으며, 1935년 평론집 《나의 국토 나의 국민 My Country and My People()》을 쓰고, 이듬해 영국으로 가서 《생활의 발견 The Importance of Living》(1938) 등으로 중국문화를 소개하였다. 소설 《Moment in Peking()》(1937) 《폭풍 속의 나뭇잎 A Leaf in the Storm》(1941) 등에서는 근대중국의 고민을 표현하였다.

영문 저작으로는 모국문화의 옹호, 중국문으로는 모국의 속물성()을 풍자하였으며, 뛰어난 세계문화 창조에는 상식 ·이성() ·생활감정 등을 교묘하게 조화하는 중국정신이 유효하다는 주장은 미래소설 《The Unexpected Island》(1955)에도 잘 나타나 있다. 자유주의자로 불리며 세계정부를 제창하였다. 1970년 6월, 제37차 국제 펜클럽 대회 참석차 한국에 왔었다.

 

 


 

1892년 - 크로아티아의 소설가 안드리치(Ivo Andri?, 1892~1975) 태어남

보스니아 트라브니크에서 출생하였다. 자그레브·크라쿠프·빈 등의 각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남슬라브 독립 청년운동에 가담하여 오스트리아 정부에 체포되어 대전 동안을 거의 옥중에서 보냈으며, 석방 후에는 자그레브로 가서 잡지인 《문학의 남쪽》을 간행하였다. 1918년에 발표한 처녀작인 《에크스 폰토 Ex Ponto》는 옥중에서 쓴 서정적 산문에 의한 일기이다. 이것은 전쟁으로 인하여 초래된 고독한 세대의 절규로서 절찬을 받았다. 그 후 외교관으로 유럽 각국에 주재하며, 그 사이에 에세이와 《알리아 제르젤레즈의 여행 Put Alije Dierzeleza》(1920) 등의 뛰어난 단편을 썼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나치스 점령하의 베오그라드에 있으면서, 3부작 《드리나강의 다리 Na Drini uprija》 《보스니아 이야기(트라브니크 연대기) Travin ka hronika》 《아가씨》를 완성하여 전후에 발표되었다. 이 3부작의 처음 2편은 문명에 뒤떨어진 보스니아의 비참한 역사와 인간의 운명을 냉정한 시인의 눈을 통하여 묘사한 것이고, 《아가씨》는 젊은 처녀의 폐쇄된 일생을 묘사하여 여성심리를 깊게 관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집필을 시작한 《저주받은 안뜰》은 10년이나 지난 1955년에야 완성하였다. 이것은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이스탄불의 저주받은 감옥에 있는 수도사 페탈의 이야기로서, 시대와 장소를 초월한 근대생활에 있어서의 개인의 위치를 시사하고 있는 걸작이다. 이어 1961년에 《드리나강의 다리》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다.

 

 


 

1861년 - 노르웨이의 북극 탐험가 난센(Fridtjof Nansen, 1861~1930) 태어남

1861년 10월 10일 오슬로 근교 프뢴에서 출생하였다. 크리스티아니아대학교(현 오슬로대학교)에서 동물학을 공부하였다. 1882년 그린란드를 탐험하고 돌아와서는 베르겐의 자연사박물관에 근무하였다. 1888년 그린란드를 횡단, 고트호프에서 월동하는 동안 에스키모의 생활을 연구하여 《그린란드의 최초의 횡단》(1890)과 《에스키모의 생활》을 썼다. 1893∼1896년 프람호()로 북극탐험에 나섰으며, 북위 83°59'까지 표류하다 F.H.요한센과 함께 배에서 내려 개썰매와 카약을 이용하여 북위 86°14'지점에 도달하였다. 이 지점은 당시까지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북방이었다. 이 탐험기록을 《극북()》(1897), 《노르웨이의 북극탐험》(1900∼1906) 등에 남겼는데 북극연구에 좋은 자료이다.

1897년 모교의 동물학 교수, 1906∼1908년 노르웨이의 영국 주재 초대대사 및 해양학() 교수를 역임하였다. 1910∼1914년 북대서양·북극해 및 시베리아의 탐험에도 참가하였다. 1918년에는 국제연맹의 노르웨이 대표였으며, 제1차 세계대전 후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포로의 본국송환·난민구제에 힘썼으며, 1921∼1923년 러시아적십자 기근구제사업의 총관리자가 되었다. 이와 같은 평화사업에 공헌한 업적으로 1922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고, 1927년에는 국제연맹군축위원회의 노르웨이 대표가 되었다. 그 밖의 주요 저서에 《북극해의 해양학》(1902) 《시베리아를 지나서》(1922), 《아르메니아와 근동()》(1928) 등이 있다.

 

 


 

1856년 - 조선 후기의 서화가, 문인, 금석학자 김정희(金正喜, 1786~1856) 세상 떠남

추사 김정희 선생이 1856년 10월 10일 나이 일흔에 한 세기를 대표하는 학자로서, 예술가로서의 생을 마쳤다. 충남 예산에서 영조의 사위인 김한신의 증손자로 태어난 김정희는 서화와 금석학에 한평생을 몰두해 성균관 대제학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24살 때 청나라 때 대학자를 만나 필담을 나누고 '해동에서 제일 뛰어난 학자'라고 극찬 받았으며 무학대사가 세웠다고 전해지던 북한산 비석이 진흥왕 순수비라는 사실을 밝혀내기도 했다. 헌종 6년인 1840년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1848년 풀려났고 철종 2년인 1851년 헌종의 묘천문제로 다시 북청으로 귀양을 갔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대쪽같은 성품으로 귀향살이를 다녀온 그는 이후 과천 토담집에 칩거하며 그림 그리기로 여생을 보냈다.

추사는 조선 500년의 지도이념인 성리학 대신 새로운 사상과 이념이 요구되는 때에 청나라의 고증학을 깊이 체득하여 실사구시의 경학세계를 이루었고 금속학에서 명성을 떨쳤으며 고금의 필체를 수렴, 추사체란 독보적인 경지를 구현했다. <조선>

 

 

 


 

1834년 - 핀란드 문학의 아버지 키비(Aleksis Kivi, 1834~1872) 태어남

누르미야르비 출생. 가난한 시골 양복점 아들로 태어났다. 헬싱키대학에 입학했으나, 대학도 중퇴하고 일생 동안 심장병과 정신병으로 고통을 겪다가 38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겨우 10년간의 창작활동밖에 하지 않았지만, 그의 작품은 핀란드 문학사상 최초의 고전이 되었다.

작품에는 사실주의 연극을 대표하는 희곡 《마을의 구둣방 Nummisuutarit》(1865) 《레아 Lea》(1869)와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소설 《7인의 형제 Seitsem n veljest 》(1870)가 있다. 《7인의 형제》는 풍속소설 ·모험소설 ·풍자소설 ·서사시소설을 하나로 묶은 자유분방한 작품으로, 핀란드에서는 《칼레발라》 다음으로 치는 고전적인 작품이다.

 

 


 

1830년 - 스페인의 여왕 이사벨 2세(Isabel II, 1830~1904) 태어남

에스파냐의 여왕(재위 1833∼1868). 페르난도 7세와 마리아 크리스티나 사이의 딸. 모후()인 크리스티나 왕비의 섭정하에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는데, 숙부인 돈 카를로스가 왕위를 요구하여 카를로스 전쟁이 발발하였다. 모후가 승리한 후에는 에스파르테로, 나르바에스, 오돈넬 등 군인이 정권을 잡았으나, 1858년부터는 친정()을 시작하였다. 보수 반동정치를 하였기 때문에 공화파 시민층과 군대의 반발을 일으켜 토페테 등의 혁명이 성공하자 파리로 망명하였으며(1868), 1870년에 폐위되었다.

 

 


 

1825년 - 보어인 국가를 건설한 남아프리카의 농부, 군인, 정치가 크뤼에르(Paul Kruger, 1825~1904) 태어남

남아프리카에서 보어인 국가를 건설했다. 1883년부터 보어 전쟁 발발 후인 1900년에 유럽으로 피신할 때까지 트란스발(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대통령을 지냈다. ...

 

 


 

1813년 - 이탈리아의 오페라 작곡가 베르디(Giuseppe Verdi, 1813~1901) 태어남

이탈리아 북부 파르마현()의 레론콜레 출생. 처음 마을 성당의 오르간 연주자로부터 초보교육을 받고, 후에 부세트와 밀라노에서 본격적으로 음악공부를 하였다.

1836년 부세트시절의 보호자 바레치의 딸 마르게리타와 결혼하고, 학업을 마친 후 잠시 부세트의 악우협회() 악장 노릇을 하다가 1839년 밀라노에 나와, 스칼라극장의 지배인 메렐리의 후원으로 오페라 《산 보니파치오의 백작() 오베르토》를 상연하여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그 후 곧 두 아이와 아내를 잃고 또 희가극 《왕국의 하루》(1840)의 상연마저 실패하여 극도로 우울한 나날을 보냈는데 이때 메렐리와 가수 주세피나 스트레포니(나중에 그와 결혼) 등의 격려로 용기를 얻어 다시 활발한 작곡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때 쓴 것이 오페라 《나부코》이다.

이 작품은 1842년에 상연되었는데, 그 내용이 애국적이어서 당시 오스트리아의 압제하에 있던 이탈리아인들에게 크게 어필하였다. 그 후에도 《십자군의 롬바르디아인》(1843) 《에르나니》(1844) 《아틸라》(1846) 《레냐노의 전쟁》(1849) 등, 애국심이 넘치는 많은 작품을 썼다.

그리고 이 밖에도 셰익스피어의 희곡에서 따 온 《맥베스》(1817), 실러의 《간계()와 사랑》을 각색한 《루이자 밀러》(1849) 등으로 새로운 극적 경지를 개척해 나갔다.

그 후 베르디는 밀라노를 비롯하여 베네치아 ·로마 ·파리 ·카이로 등지에서 잇달아 오페라 초연을 가졌으며, 오늘날까지 상연되고 있는 《리골레토》(1851) 《일 트로바토레 Il trovatore》(1853) 《라 트라비아타 La Traviata》(1853) 《시칠리아섬의 저녁 기도》(1855) 《시몬 보카네그라》(1857) 《가면무도회》(1859) 《운명의 힘》(1862) 《돈 카를로스》(1867) 《아이다》(1871) 《오셀로》(1887) 《팔스타프》(1893) 등은 모두가 19세기 이탈리아오페라의 걸작으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

 

 

1738년 - 영국에서 활약한 미국의 역사화가 웨스트(Benjamin West, 1738~1820) 태어남

 

 

 

1684년 - 프랑스 로코코 양식의 화가 와토(Antoine Watteau, 1684~1721) 태어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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