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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란 태음신과 같은 현무(玄武)로서 시첩(詩帖)속에 잘 가두기를...
2016년 10월 23일 20시 33분  조회:3978  추천:0  작성자: 죽림

 

밀어도 두드려도 시원찮은 사립문
/윤정구


흔히들 말한다. 시란 쓰기도 어렵지만, 고치기는 더욱 어렵다고. 처음 써내려갈 때 힘들이지 않고 쉽게 쑤욱 빠진 놈보다도, 고치고 다듬어 천신 만고 끝에 낳아 놓은 놈이, 정이 더 가는 것과는 무관하게 흠이 많은 경우가 많다고. 나도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시란 원래 성질이 까달스러워서, 억지로 만들려고 하면 더욱 잘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러기에 힘들수록 여유를 가지고 잘 몰아가야 하는 현무(玄武)같은 놈인지도 모른다.
원래 현무란 놈은 우리가 교과서에서 보듯 두 개의 머리와 꼬리가 대칭을 이루어서 꿈틀거리기 때문에 도통 어디로 가려는 것인지 방향을 알 수 없는데다가, 일단 네 다리를 출렁이기 시작하면 어디에든 불시에 도착할 수도 있고, 연기처럼 사라질 수도 있는 놈이다. 어쩌면 시란 특별한 정형이 없다는 점에서, 그러면서도 늘 조화를 이루고, 살아 있는 것처럼 출렁이고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또한 현실 그대로를 그려낸 것이 아닌 최고의 상상력의 산물이면서 사실 이상의 신비한 진실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나는 감히 시를 우리 조상들이 북쪽 방위의 태음신(太陰神)으로 그려놓은 걸작 현무에 비교해 본 것이다. 어쨌건 이 다루기 힘든 야성(野性)의, 우리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제 가고 싶은 대로 가버리는 시를 일단 식물이 아닌 움직이는 동물로까지 생각해 놓고 넘어가 보자. 
얼마 전만해도 시가 식물이던 때가 있었다. 그때에는 시가 될 듯한 꼭지 하나를 발견해서, 제대로 생각이 싹을 틔우고, 넝쿨을 벋어, 꽃을 피울 때를 천천히 기다려서, 소담한 꽃바구니에 담아내면 되었다. 그때에는 시간도 아주 천천히 흐르던 때이어서, 서두르지도 않고 넉넉한 마음으로 익을 때를 기다릴 수도 있었다. 그때의 시쓰기는 얼마나 ‘아름답고 행복한 작업’이었을까? 그러나, 불행하게도 지금 우리는 더이상 아름다운 시를 음미하며 살 수 없는 ‘물질과 속도의 세계’에 살고 있다. 따라서, 혜택받고 있는 풍요와는 다른 관점에서 현대의 시인들은 시대적으로 어려운 운명을 타고났다고 할 수 있겠다. 다시 말해서, 시인이 대상을 깊이 인식하는데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는 사유가 부족하기 쉬운, ‘관조(觀照)가 어려운 시대’에 이미 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보통 사람들에게 그렇듯, 시인에게 있어서도 하루 하루의 일상이란 얼마나 복잡 다단하며 예측 불가능한 ‘무거운 짐’인가? 나는 그 점에서 이 황망한 시대에 물질로 환산되지도 않고, 자동화로 공정을 개선할 수도 없는 시를 팽개치지 않고, 매일 매일 물을 주어, 매달 매주 새로운 꽃을 피워내는 시인들에 대해 경의를 표한다. 
나의 경우를 얘기한다면, 바쁘다는 핑계로 일상에 쫓겨 허덕거리며 메모해 놓은 몇 마디를 가지고, 어거지로 잎도 붙이고 줄기도 늘리다보니, 살아 움직이는 동물은커녕 아직 그럴듯한 꽃 한송이 못 피우고 있는 셈이다. 그러 저러한 사정에서 본다면, 나의 경우에는 퇴고(推敲)가 상당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의도만 가지고 시를 쓸 수는 없으므로, 그 의도가 의도에 알맞는 모양새를 갖추고, 때로는 적당히 의도를 감추기도 하면서 그 맛이 제대로 우러나도록 몇 번이고 고쳐 확인한 다음에야, 비로소 화일링하고 있는 시첩(詩帖) 속에 한 페이지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다음에 소개하려는 졸시 「소나기를 맞은 염소」는 비교적 주제가 뚜렷하고 재미있는 발상으로 시작되어 흥미로왔던 경우인데, 의도에 비해 주제가 힘에 부쳤던지 제대로 선명하게 그려내지 못했던 예이다. 우선 전문을 옮겨놓고 생각해 보기로 한다.
소나기를 맞은 염소
―사석원, 이인화에게

벌겋게 기가 살아 있다
한줄기 소나기가 멈추자
양철지붕 아래에서 튀어나온 저 수탉
잽싸게 헐다만 보리짚가리에 올라
후다닥 헛날개를 쳤다
穀氣요!
온 동네가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다

소나기를 몽땅 맞은 염소는
죄도 없이 목을 움추렸다
수염을 밀고 안경을 씌우면
영낙없는 우리 회사 진 부장이다
그는 말대꾸 한번 변변히 한 일이 없다
집염소는 한번도 바람을 마주하여
절벽 위에서 수염을 흩날린 일이 없다

녜에에에녜에
평생 아니오!를 말해보지 못한
오종종한 얼굴이 달려나와 머리를 조아렸다
무장해제 당한 포로같이
뿔을 뒤로 감고 나온 염소는 눈 한번 옳게 뜨지 못한다
갓을 잃어 뿔을 보임이 사뭇 송구스러울 따름인 즉

그럴수록 수탉은 붉은 갈기를 세웠다
소나기 바람에 네 속을 알것다
네놈이 갓속에 늘 비수를 감추고 다녔것다?
수염까지 젖은 염소가 다리를 후들후들 떤다
웬걸입쇼 소인이 꿈에라도 그럴 리가 있습니까요
오십에 다 와가는 진 부장은 
큰놈이 이제 겨우 중학교에 들어갔다

이렇게 대충 쓰고 나니 우선 기분이 상쾌하였다. 모처럼 새로운 것이 나온 것 같았던 것이다. 말하자면 매양 시들시들하는 꽃나무만 길러내다가, 오랜만에 비록 염소와 수탉일망정 살아 움직이는 동물을 등장시킨 것이었다. 게다가 힘을 가지고 지배하는 자의 억지와, 가진 것이 없어 힘들게 한 세상을 살고 있는 소시민의 의식이, 한바탕 소나기가 지나간 후의 수탉과 염소를 통하여 마치 ‘극적(劇的)인 형상화(形象化)’가 이루어진 것처럼 생각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사극조(史劇調)의 고전물(古典物)에 현대판 진부장(이긴 部長이 아니라 진 부장)과 그 아들까지 끼워 넣었으니, 제법 성공한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흡족했던 마음은 곧 실망으로 변하였다. 등장인물이 많고, 기대치가 높다보니, 소우주(小宇宙)가 아니라 질서를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정리가 힘들었던 것이다. 나 역시 대부분의 경우, 써 놓은 직후에는 잘못을 바로 찾기가 어렵다가도, 며칠 지난 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허(虛)가 보이게 되고 알맞은 수술방법이 찾아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번 경우에는 좀 달랐다. 욕심을 부려서인지, 어떻게 고쳐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꽤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야 나의 과욕을 인정하고, 주인공들을 두개의 집을 지어 정리할 수 있었다. 첫번째 집은 당연히 염소의 몫이다.

소나기를 맞은 염소
―이인화에게

소나기를 몽땅 맞은 염소가
죄도 없이 목을 움츠렸다
수염을 밀고 안경을 씌우면
영낙없는 우리 회사 진 부장이다
그는 말대꾸 한번 변변히 한 일이 없다
집염소는 한번도 바람을 마주하여 
절벽 위에서 수염을 흩날린 일이 없다

녜에에에녜에
평생 아니오!를 말해 보지 못한
오종종한 얼굴이 달려나와 머리를 조아렸다
무장 해제 당한 포로같이
뿔을 뒤로 감고 나온 늙은 염소는
눈 한번 옳게 쳐다보지 못한다
갓을 잊어 뿔을 보임이 
사뭇 송구스러울 따름인즉

소나기 바람에 네 속을 알것다
네놈이 갓속에 늘 비수를 감추고 다녔것다?
수염까지 젖은 염소가 다리를 후들후들 떤다
웬걸입쇼 소인이 꿈에라도 
그럴 리가 있습니까요?
오십에 다 와가는 진 부장은
큰놈이 이제 겨우 중학교에 들어갔다

말하자면 시적 통일을 위해서 수탉을 완전히 제거해버린 꼴이니, 16밀리 시네마스코프를 만들려다가, 8밀리 소형 영화를 찍어버린 격이라고나 할까? 어찌보면 두 가지 색깔을 써서 극명하게 보여주려 했던 ‘수탉 : 염소’의 대비 구조에서 애석하게도 한쪽 주인공을 포기한 셈이 되었다. 커트된 나머지 조각을 모아 ‘황금(黃金) 수탉’이란 제목으로 두번째 집까지 지었으니, 필름 한통을 생재기로 잘라 두 편을 만든 셈이다. 그러나, 나는 실망하지 않는다. 언젠가 역량이 생기면, 두 채의 집을 허물어 애초에 꿈꾸었던 대로 『벤허』나 『닥터 지바고』같은 크고 웅장한 스펙타클 한 편으로 다시 찍을 것이다. 염소나 수탉도 찰톤 헤스톤이나 오마 샤리프같이 근사한 모습으로 찍어줘야지. 그때에는 이인화같은 귀걸이는 달지 않아도 될 거라. 궁금하다면, 소나기를 맞은 염소는 내가 좋아하는 한국화가 사석원의 그림을 봄으로써 시작한 것임을 밝혀 둔다. 여러 말 말고 너는 언제나 사립문을 고쳐 달 거냐고? 사립문 가지고 열심히 두드리고 밀어봐도 소용 없다고? 그런 분들을 위해 나는 특별히! 성호를 놓는다. 아멘. (윤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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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 받은 날― 유안진(1941∼ )

춘삼월 초아흐레
볕 밝은 대낮에
홀연히 내게 
한 천사를 보내셨다

청 드린 적 없음에도 
하늘은
곱고 앙징스런
아기천사 하나를 

탐낸 적 없음에도 
거저 선물로 주시며
이제
너는 
어머니라 

세상에서 제일로 
복된 이름도 
함께 얹어주셨다. 

 

 


몹시도 사랑스러운 이 시를 읽기 위해서는 3월 하고도 9일, 그것도 봄볕이 좋은 한낮을 기다려야만 할 것 같다. 그러나 굳이 3월이지 않아도 되고, 9일을 기다리지 않아도 좋다. 이 시는 탄생의 시이고, 세상의 모든 아가와 엄마를 위한 시이기 때문이다. 

‘선물 받은 날’이란, 한 어머니가 출산하던 날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3월 9일은 그녀가 어머니가 된 날이자, 그 어머니의 아이가 태어난 생일날이기도 하다. 출산이란 어려운 일이니까 아팠다고 쓸 수도 있고 힘들었다고 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시에는 땀과 고난의 얼룩이 단 한마디도 없다. 그 대신 복되게도, 참 다행스럽게도, 이 어머니 시인은 탄생의 의미를 너무나 잘 표현해주고 있다. 
 

 

아가가 세상에 태어나면, 어머니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선물 두 가지를 받게 된다. 하나는 아가이고, 또 하나는 덤으로 받게 되는 선물 즉 ‘어머니’라는 이름이다. 한 생명이 탄생하는 순간, 다른 생명도 재탄생하게 되다니 참 기적 같은 일이다. 

이 시는 분명 아가와 엄마를 위한 시이지만 사실 모든 사람을 위한 시이기도 하다. 이 세상 어떤 사람도 아가이지 않았던 이가 없을 테니까 말이다. 새순이 돋기 시작하는 3월에, 이 시는 모든 사람에게 일러주는 듯하다. 진실로 어떤 아가든 복된 선물이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도 선물 같은 아가였다는 것을, 기적 같은 일이 사람을 낳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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