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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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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들이 시가 싫어 도망치고 있다...
2017년 03월 10일 19시 45분  조회:2306  추천:0  작성자: 죽림

거리를 잃어버린 시를 위한 형식 /최인자      

 


1

젊은 시인들이 우르르 도망을 치고 있다. 그 무엇인가(자신의 욕망이든, 죽음이나 폭력처럼 두려운 대상이든)에 쫓기면서 어디 론가 가기는 가는데, 숨기 위하여 간다는 의미에서 그들의 '이동'은 도망이다. 그것은 줄지어 같은 방향을 향해 뛰어가는 달리기 도 아니고 세상을 관조하면서 즐기는 산책도 아니다. 활짝 열린 곳, 트인 곳으로 향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탈출도 아니다. 그 것은 필사적이면서도(죽음을 불러올 수 있으므로) 대단히 우스꽝스러운(시대착오적임으로) 행동이다. 그러다가 간혹 커다란 심장 을 가지고 있는 운 나쁜 시인은 갑작스러운 최후의 순간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 

여기 침묵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하여 자신이 선택한 공간 속으로 뿔뿔이 도망치고 있는 네 명의 젊은 시인들이 있다. 시인에게 있어서 침묵은 죽음의 또 다른 얼굴이기에 그들은 필사적으로 어딘가를 향해 움직이고 있다. 전대호는 어둡지만 행복했던 중세의 시절로, 김태형은 소란스러운 로큰롤 헤븐의 땅으로, 이선영은 비좁고 견고한 글자의 집으로, 성윤석은 현실과 환상이 서로 공 존하는 극장이 너무 많은 동네로 뛰어들어/나간다.

신비라는 말을 쓰고 싶어질 때
운명을 얘기하는 무식의 따뜻함과
속 깊음을 알게 될 때

난 자랑스럽게
중세
암흑으로 불리는 그 성곽에
갑니다
-------- 전대호, [가끔 중세를 꿈꾼다 1]

글자 밖에서 어여쁜 당신과 희희낙락 세월 가는 줄
모르다가
무엇에 놀란 듯 글자 안으로 쫓겨들어가지나 않을지?
-------- 이선영, [글자 밖에서]

일찍부터 빈 자리 하나 없는 우드스탁을 돌아
나와
퍼펙트 셀렉션 그녀는 도어즈의 좁은 이층 문을 당긴다
-------- 김태형, [짐 모리슨 듣는 밤]

어둠 속에 들어앉아 지붕을 쓰고 있으면
내 봄을 보여주지 않아도 될 줄 알았다
-------- 성윤석, [극장이 너무 많은 우리 동네 1]

우리는 '부정'이란 말로 80년대와 90년대의 시인들을 특징지우면서 구별했다. 80년대의 시인들이 외부세계와 사회 현실에 대한 부정을 시도했다면, 90년대 시인들은 외부세계를 부정하려고 했던 스스로를 부정하고자 노력한 것으로 파악된다. 물론 그것은 사 회 현실에 대한 부정을 부정하는 작업이 아니라, 부정할 중심이 온 사방으로 스며들어간 상황 속에서 텅 비어버린 중심을 향한 자기 파괴적인 방식이었다. 그러므로 부정과 죽음의 블랙홀 속으로 빠져드는 시인들의 움직임을 오히려 긍정의 형식으로 읽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90년대의 그러한 형식은 어디까지나 80년대를 전제로 한 80년대와의 힘겨루기, 후기, 뒷풀이에 불과하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벌써 90년대의 후반으로 들어섰다. 지금 또 다시 권력의 맨 얼굴을 그리워하거나 부정과 절망의 방식으로서 긍정을 이야 기한다면, 그것은 변주곡도 고별사도 아닌 베껴먹기, 토한 것을 다시 주워먹기, 반복함으로써 자신의 불모성을 드러내기일 것이 다. 이제 더 이상 부정할 대상이나 절망할 현실이 없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절망이나 부정이 더 이상 새로운 형식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절망과 부정의 형식은 달라진 현실 속에서 낡고 허름한 것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과거의 전략은 새로운 현실을 바꿀 수 있는 힘이 되지 못한다.

억압과 광기는 지금도 여전히 우리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을 '억압'과 '광기'로 읽어내던 시대는 지나갔다. 우리는 90년대 시의 새로운 형식을, 새로운 실험을, 새로운 읽기를 불러와야만 한다. 90년대 후반의 시를 거론하면서 굳이 '도망'이라는 형식을 선택한 것은, 그들의 움직임이 더 이상 적극적인(과거의 시대를 부정한다거나 혹은 지금 이 시대를 부정한다는 의미의) 방식의 탈출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한 거리가 사라진, 그래서 투쟁 이 불가능하다고 느껴지는 이 시대에 '도망'은(80년대와는 달리) 단지 비겁이나 회피가 아니라 죽음을 각오한 필사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두들 더 이상 도망갈 필요가 없다고 믿고 있을 때, 이제는 안전하다고 그러므로 여기에서 낙원을 꿈꾸 자고 말할 때, 멀리 달아나는 자는 복이 있다. 70년대도 80년대도 아닌 바로 지금, 심장이 마비되어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도망치 는 한 젊은이의 모습은 분명히 시대착오적인 모습으로 비칠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시대착오적인, 우리가 생각하는 혹은 믿고 있는 현실과 어울리지 않는 것 때문에, 그의 도망은 작은 걸림돌이 되어 순탄하고 그럴 듯하게 흘러가는 세상의 흐름 앞에서 걸리적거린다. 세상에! 요즘도 죽기까지 도망치는 젊은이가 있다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세상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잘못되었거나 혹은 그의 도망이 잘못되었다고……. 하지만 어떤 식으로 결론을 내리더라도 도망치는 자의 발걸음 소리는 우리의 귓가에 남아 끊임없이 불안을 불러 일으킨다. 온통 물결 위로 은모래빛 죽음들이 반짝(김태형, [천산북로])'이는 호수 속에 모든 시름과 피로를 잊고 누워있는 시인을 일깨우는 그 소리처럼.

언뜻 무슨 소린가 들려왔네 그
온갖 소리들, 이제 다시 길을 떠날 때가 되었는지
눈을 들어 바라보는 길 끝에 더 먼 산맥의 끝자락
이 이어지고 있었네
-------- [天山北路]

그러므로 여기 젊은 시인들의 도망은 죽음과 절망의 블랙홀로 빠져들어서 귀가 멍멍한 침묵에 사로잡힌 90년대의 시에 '소리' 를 가져다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다고 말하는 시대에, 보다 많은 시인들이 도망치는 순간을, 제각기 고통스럽고 필사적으로 발을 구르는 소리를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젊은 네 명의 시인들이(그 중에서 이선영을 제외한 세 명의 시집은 모두 첫번째 시집이다) 보여주고 있는 도망은 이런 의미에서 과거의 시대가 구축한 형식으로부터의 도망이다. 그들은 부정과 절망이라는 거대하고 집단적인 움직임으로부터 달아난다. 그리 고 아주 좁고 내밀하고 개인적인 공간 속으로 스며 들어간다.

이런 조짐은 이미 유하나 박청호의 시에서도 읽혀지고 있다. 그들 또한 개인적인 '추억에로의 회귀'와 개인적인 '상징의 숲으로 들어서기'를 통해 '소극적인 탈출방식'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을 떠나고 싶어한다는 점에서, 또 미래를 지향하 지 않는다는 점'(강상희, [추억과 상징의 시, 그 희망없음의 세계])에서 이들의 탈출방식은 여전히 이전 시대와 궤도를 같이 한 다. 그것은 또 다른 절망의 한 방식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현실과 조응하지 않는 상징, 미래를 담보로 하지 않는 추억이란 결국 죽음으로 이어질 뿐이다. 이것이야 말로 '그가 그릴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몸짓으로 죽음을 달'래는 행위(정과리, [기억의 저편 ])일 것이다. 그들의 상징과 추억은 더 이상 힘을 얻지 못한다. 오직 연약한 껍질 속에 웅크린 채 서서히 소멸의 순간을 맞이하는 것이다.

2

젊은 시인들이 보여주고 있는 이전 시대와의 단절은 역설적이게도(어쩌면 당연하게도) 80년대에 대한 그리움과 회상으로 가득 차 있는 전대호의 시집 {가끔 중세를 꿈꾼다}에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사라져간 벗들과 시간으로 대체되고 만 역사를 말하 는 전대호의 시들은 80년대의 환상과 그에 따른 환멸로 읽을 때, 매우 진부하고 시대착오적일 수
밖에 없다. 그것이 아무리 아름 답고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흘러간 세월에 대한 서글픔과 탄식이라면 '조로한 벗들의 잔등에 업혀…… 다 들 어디 갔니 다들 어디 갔니'([가끔 중세를 꿈꾼다 1.4]) 힘없이 중얼거리는 잠꼬대 이외에 달리 무엇일 수 있겠는가?그러나 전대호의 이러한 시들은 그 시대착오적인 언술, 맥 빠진 타령 때문에 오히려 가장 분명하고 확실하게 '지나간 일들은 정 말로 지나가 버린다'는 것, '지나간 일은 일도 아니([상처])'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상기시킨다.

80년대는 사라졌다. 그것은 과거 속으로 역사 속으로 가버렸다. 이제는 
아무런 통증도 느낄 수 없는, 딱딱해진 흉터만이 남았을 뿐이다. 전대호의 시에 이르러 '이미 가버린 것들이 마침내 떠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이후에 나타나는 모든 일들, 처음으로 시간을 말한 '어느날의 대학 동창회'([시간을 얘기하다])나 시간의 손 안에서 '두려움 없이 쪼개지'([시간의 손 안에서])는 벗 들의 모습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를 가리키고 있으며, 닭벼슬처럼 머리를 세우고 거품의 노래를 부르며, 그러면서 울었다는 그의 모습은 영웅적이지 않고 희화된다. 앞서 '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선언이 있었지만, 전대호의 시는 보다 구체적이고 철저하게 80 년대의 형식을 구식舊式화한다. 과거를, 온전한 과거의 것으로 되돌리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90년대는 80년대의 그림자먹다 남은 음식이기를 거부한다. 젊은 시인들은 90년대를 새로운 기점으로 삼는다. 80 년대의 무게에 억눌린 채 신음하지도 않고 고통스럽게 여기지도 않는다. 이제 그곳은 완전히 지나간 과거라는 의미에서 수백 년 전의 중세와 동일한 선상에 놓인다. '다른 눈을 준비해야' 하는 다른 마을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가끔 중세를 꿈꾼다}의 첫장을 여는 [별똥별]은 김중식의 {황금빛 모서리}의 첫머리에 실린 [이탈한 자가 문득]과 더불어 읽을 수 있다.

우리는 어디로 갔다가 어디서 돌아왔느냐 자기의 꼬리를 뱅뱅 돌았을 뿐이다 대낮보다 찬란한 태양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한다 태양보다 냉철한 뭇별들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하므로 가는 곳만 가고 아는 것만 알 뿐이다 집도 절도 죽도 밥도 다 떨어져 빈 몸 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보았다 단 한 번 궤도를 이탈함으로써 두번 다시 궤도에 진입하지 못할지라도 캄캄한 하늘에 획을 긋는 별, 그 똥, 짧지만, 그래도 획을 그을 수 있는, 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는 것을
-------- [이탈한 자가 문득]

별똥별이 천구에
한 십오도 쯤 원호를 긋고 사라진다

이렇게 멀리 있어
내 귀와 눈은 느끼지 못했지만
아주 높은 곳에서는 장엄했으리라,
공기를 찢는 그의 속도가 쏟아 놓는 소리
불타 오르는 그의 몸뚱이가 내뿜는 빛

그 장엄함 앞에
거미줄처럼 어둠 속으로 길게 이어져 있던
그의 이탈의 궤적(軌跡)도
일순간에 불타 없어졌으리라
모든 별들이 침묵했으리라

그리고 그가 보여준 마지막 궤적을 이어
나는 이렇게 적어야겠다:
방금 그가 별들의 무리 속으로 돌아갔다고.
-------- [별똥별]

동일한 별똥별의 움직임이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두 시인의 시각은 천동설과 지동설만큼이나 커다란 차이가 있다. 김중식은 궤도 를 따라 움직이는 태양이나 다른 별들을 '우리'와 동일시한다. 단 한 치의 이탈도 허락되지 않지만 어쨌든 그는 별들의 무리 중 에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별똥별은 무리 중에서 홀로 떨어져 나온 이탈한 자가 될 수 있었으며, 문득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김중식에게 별똥별의 움직임은 궤도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 무한히 열린 공간(비록 그곳이 어두운 암흑이더라도)을 향한 자기 파괴적인 탈출이다.

그러나 전대호에 이르면, 별들의 무리로부터 '이렇게 멀리 있어 내 귀와 눈은' 별똥별의 움직임을 느끼지 못한다. 그의 몸은 어디까지나 이 땅 위에, 별들로부터 아주 먼 곳에 있다. 별똥별의 이탈이 장엄했을 것이라는 사실은 그가 직접 목격한 장면도 아니 며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다. 그와 별들은 전혀 다른 궤도, 다른 공간에서 움직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별똥별의 이탈이 가 져온 장엄한 소리와 빛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 별똥별의 이탈의 궤적도 일순간에 불타 없어지는 소멸과 모든 별들의 침묵까지도 바라볼 수 있다. 별똥별의 이탈은 텅 빈 소멸과 거대한 침묵을 낳았다. 결국 전대호에게 별똥별의 이탈은 더 이상 이탈이 아니며 자유를 향한 탈출도 될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수많은 '별들의 무리 속으로 돌아'가는 행위이다. 무한한 공간, 텅빈 자유는 어느 곳에도 없다. 이젠 우주조차도 붐빈다.

똑같은 하나의 움직임을 두고 무리 속에서의 이탈과 무리 속으로의 돌아감이라는 엄청난 전환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탈한 별똥별을 별들의 무리 속으로 돌려보냄은 90년대의 시가 소멸과 침묵의 블랙홀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필연적 전환이다.

'방금 그가 별들의 무리 속으로 돌아갔다고.'라는 마지막 귀절에는 이 시집에서는 유일한 마침표가 찍혀 있다. 우리는 이 마침 표에서 80년대를 중심으로 한 이전 시대의 거대한 문이 마지막으로 쾅 닫히는 소리를 듣는다.

이제 80년대는 일상의 나날 위에서 그가 가끔 꿈을 꾸는 혼자만의 공간 '첨단이 아닌 기반에 있는 큰 집'을 향한 도망의 공간이 다. 80년대의 의미를 재확인하기 위해 존재하는 90년대가 아니라, 90년대를 역동적으로 살아있게 하기 위한 80년대인 것이다. 그 에게 중요한 것은 지나간 80년대가 아니라 바로 여기 '방금 그가 별들의 무리 속으로 돌아갔다고' 이렇게 적을 수 있는 '나'의 공간이다. 그는 이곳을, 나를 부정하지 않는다. 이곳이야 말로 죽음 이후에도 계속 이어질, 죽음을 무화시킬 수 있는 '이야기'이 며, 나는 그 이야기를 들려줄 주체이기 때문이다.

나도 내 나름대로
죽음 이후의 모습일 거라고 상상해 둔 게 있다
어릴 적부터 즐겼던 상상인데,
그것이 죽음 이후와 닿아 있음을 알게 된 건
최근의 일이다

많은 이들이 내게로 와서
내가 거쳐온 세상을 얘기해 달라고 부탁할 것
같다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
그들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그들은 정녕 얘기를 듣고 싶은 이들

그 자리에 설 때까지는
내 안에 이 세계가 정리되어 있기를 바란다
여기에서의 삶이
그것을 허락한다면,
내겐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 [죽음 이후]

김태형의 시를 두고 '사막의 길, 생성과 동시에 소멸하는 자기 파괴적인 길'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사막의 길'은 오래 전부터 나 있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황지우로부터 김중식까지 앞서 간 자들이 너무 많아서, 길없는 사막에 이미 길이 생겼을 정도인 것이다.

3

[청라길], [타클라마칸], [낙타의 길], [부족] 등을 비롯한 김태형의 많은 시들이 사막을 지나가는 것은 사실이다. 그뿐만 아니 라 '여기서 멈춰 버리면 그뿐 어깨가 필요한 것은/아니지만/그렇다고 막무가내 될 대로 되라는 듯이 죽음을 딛고/발끝을 들어 황 망히 휘날리고 싶지는 않다' ([타클라마칸]) 혹은 '나의 노역은 힘들어도 결국 짐을 벗은 몸의 갈/곳은/딱딱한 바닥과 긴 다리 힘 겹게 꿇려진 비굴함이/라는 것을'([낙타의 짐])과 같은 시에서 느낄 수 있는, 시인이 걸어가는 사막의 길은 비장하다 못해 장엄 하기까지 하다. 과연 시인은 이토록 의연하게 고난의 사막을 지나 어디로 가는 것일까? 그냥 소멸을 향해? 김태형은 '툭툭 몸 아픈 불거진 가지 잘라내지 않고도/온전히 들 수 있는 물방울의 집, 그 눈빛 맑은 그곳'([물방울의 집])으로 가고 싶다고 말한다. 그의 시에서 '물방울의 집'의 현실적인 표상인 '빗방울'이나 '물방울'에 서로를 환히 비추어 줄 수 있는 불빛이나 눈빛이 등불처럼 매달리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러므로 건조한 사막의 길을 걸어가던 시인은 소망한다. 그곳에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 서로 물방울처럼 투명하게/맺혀질 수 있다면 서로에게 제 얼굴만큼 비춰질 수/있다면'([뒷문 밖 에는 갈잎의 노래]) 얼마나 좋을까?

'물방울의 집'은 그가 힘들게 걸어가는 '사막의 길'과 너무나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어서 더 이상 행복한 만남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할 수 있다. 물과 사막, 길과 집의 만남을 어떻게 갈라놓을 수 있을까? 그러나 김태형이 물방울의 집을 향해 의연하고 꿋꿋하게 사막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라면, 또한 그 길이 생성과 동시에 소멸하는, 그래서 언제나 영점이 되고 마는 길이라면, 모래를 날리는 바람소리 이외에 도대체 무슨 '소리'를 우리에게 들려줄 수 있을까? 사막에서 무슨 도망치는 자의 발자국 소리를 들을 수 있는가?

그러나 김태형의 시에서는 그 어느 시집에서보다 요란하고 이질적인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그 소리는 사막과는 전혀 동떨어진 또 다른 공간에서 들려온다. 그곳은,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을 서역의 이미지, 식물성 이미지, 동물시, 설화시 등으로 꼼꼼 하게 나누면서 자세히 구획을 정리한 해설에서조차 단 한 번도 언급되지 못할 만큼 외지고 음습한(도망자들이 돌아다니기 좋은) 곳이다. 그러나 일단 먼지바람 부는 사막으로 초연히 걸어가는 히말라야 시다가 아니라 요란스럽게 달아나는 도망자로서의 시인 의 이미지를 받아들인다면, 무시해도 될 만큼 무의미하게만 느껴지던 소리는 우리의 귀를 쟁쟁 울린다.

해변의 락 페스티발 그런지 하드코어 펑크 락
사이키델릭 트윈 기타 오오 머리를 박박 밀어버린
여성 보컬이 첫 무대에 등장한 그룹 겟 잇 업
------- [락 페스티발 퍽 유]

그냥 만지기만 해 제발 손가락은 집어넣지마
그년한테나 가라구 꺼져버려 더러운 새끼 겟 아웃 겟 아웃
단지 넌 지저분하게 놀지만 않으면 괜찮아
넌 냄새가 좋아 아이 내가 너무 취했나 봐
벌써 다 젖었잖아 젠장 모르겠어 그런데 말이야
팬티를 벗고 있으니까 기분이 이상해 하지만 여기선 안 돼
우리 저기 화장실에 가 거기서 한번 해 줘 어서
-------- [펑키 걸]

'사막의 길'과 '물방울 집'의 완벽한 구조로 이 시집을 파악한다면, 이런 시들은 오갈 데가 없다. 오직 '록큰롤 헤븐'이라는 제목 때문에 그나마 '시의 집'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상한 것은 그의 시집 어디에도 '록큰롤 헤븐'이란 시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록큰롤 헤븐'이란 대개의 시집이 그렇듯이 어떤 하나의 시 제목에서 따온 것이 아니라, 시들이 모여서 살고 있는 이 집의 문패로써만 존재하는 것이 분명하다. 다시 말하자면 시집 전체의 방향을 일러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혹시 그가 정말로 가고 있는 곳은 물방울 집이 아니라 록큰롤 헤븐? 해탈한 성자처럼 사막이라는 고난의 길을 걸어서 도달한 곳 이, 분명히 무슨 락카페 이름일 것 같은 록큰롤 헤븐이라니? 그래도 헤븐은 헤븐이니까!

좀 더 간단하고 쉬운 길을 택해서 우리에게 지극히 익숙한 논법을 따라 
이 문제를 해결한다면, 록큰롤 헤븐으로 이름지어진 이 공간은 삭막하고 메마른 현대판 사막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식의 
해결이야 말로 순간적이고 서정적인 화해, 바로 상징의 함정이 아닐까? 비릿한 피 냄새만이 이빨 자국 뜯어진 모래 속으로 스멀스멀 스며'
([部族])드는 사막이나 '메가데 스 헬리콘 잉베이의 다크 에이지스'가 울리는 록큰롤 헤븐이나 똑 같은 불모성의 상징이라면, 그 상징 속으로 무화되어 버리는 숱한 이질적 요소들을, 그 단절의 의미들을 서툴고 힘
들게나마 읽어내려는 노력은?)'사막'이 우리나라 자연환경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이국적인 공간이라면 '록큰롤 헤븐' 또한 결코 우리의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외래적인 공간이다. 

그러나 사막은 이미 자연스러운(혹은 의미 깊은 그러므로 바람직한) 시적 공간 형식의 하나로 인정 받고 공인된 것이지만, 외래어와 상소리가 난무하는 록큰롤 헤븐은 기존의 형식 속에 어설프게 끼어든 새로운 공간 형식이다. 김 태형의 시집에서는 바로 이러한 두 개의 형식의 힘겨운 몸싸움, 밀어내기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다툼의 공간 속에서 시인은 때때로 '모래 바람에 길을 잃고 노련한 채찍조차도 힘을/잃을 때/나의 눈 나의 메마른 다리는 길을 찾아야 한다'([낙타의 짐])고 다짐하다가도, 메탈 지프를 타고 '레드 핫 칠리 페퍼스를 틀어도 좋을 거야/빗속으로 시속 백구십 이백 어때 숨쉬기조 차 힘'들게 달리면서 도망친다. 그의 모터사이클에는 백미러도 없다. 뒤돌아볼 필요조차 없기 때문이다. 그가 순간 순간 도망치 는 길, 그것이 록큰롤 헤븐을 만든다.

물론 그곳은 결코 이상적인 유토피아가 아니다. '여기서는 단 한 줄의 
시조차 쓸 수 없다'([커트 코베인 듣는 밤]). 오직 록큰롤 음악이나 의상, 영화 혹은 영화 배우나 가수의 전설만이 그들의 삶을 지배한다. 그것은 일종의 신호이자 행동 강령으로서 그 들이 해야할 행동을 철저하게 결정해준다. '그날 입은 옷에 따라/체위도 바뀌게 되거든 올리버 스타일엔 아스트라드/더티 진엔 렉스 오버([모터 사이클 온리])'. 듀크의 음악을 들으며 펠라티오를 즐기는 여자나 지미 헨드릭스를 들으며 에이널을 즐기는 남 자, 혹은 베이스 인트 부분만 들려도 흥분을 하는 여자, 레오 까락스에 미쳐 있는 그 남자들은 모두 이 신호에 따라 움직이는 것
이다. 그러므로 이곳은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이 자유분방한 에너지가 넘쳐 흐르지만 그들은 결코 자유롭지 않다. 이곳은 그들의 헤븐이 아니라 록큰롤의 헤븐이기 때문이다. 이 인공적인 공간에서 사막을 건너는 시인의 이미지는 세속화된다. 낙타는 메탈 지프나 모터 사이클이 되고 모래바람 소리는 락 음악의 소리가 된다. 목마른 갈증은 메마른 성욕이 되고 피 냄새는 정액 냄새로 떠돈다.

그러나 이 공간에 투영된 문명 비판적인 이미지들, 세속화된 시인의 이미지들에 시선을 고정시켜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곳을 자유롭게 떠도는 록큰롤, 그 외래어와 생경한 언어들을 주목해야만 한다. [커트 코베인 듣는 밤], [락 매니아 케이스 바], [메탈 지프], [그런지 보이], [모터사이클 온리], [펠라티오를 즐기는 여자], [에이널을 즐기는 남자] 

등의 시로 표현되는 이 공간은 시끄럽고 무식하고 생경한 언어들로 온통 가득 차 있다. 진정 '요즘 애들' 그것도 흔히 하는 말로 '오렌지족'들이나 사용할 것 같은 이 직설적이고 폭력적인 언어는 '여직 잎 피기 전 몸이라곤 미욱한지라 낡은 버/스에 달랑 싣고 거슬러 길 거슬러 폴폴폴 내려선/길이지요'([작은키나무숲]) 혹은 '가는 곳 그것을 길이라 한다면 이곳의 운명은/스스로 저의 한쪽을 닫아 놓고 끝없이 뒷 걸음치/는 것으로/마지막 제 소멸의 끝을 완성한다'([낙타의 길]) 등과 같이 진지하고 깔끔하고 철학적인 언어와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다. 또한 '레이어드 룩 매니시 풍 가끔 그녀는 재봉선을/겉으로박아/바디 라인을 고스란히 드러낸 재킷을 걸치고'([락 매니아 케이스 바])와 같이 외래어가 난무하는 시는 '한 사나흘 산갓 사방 거 된통 눈 내렸다지요 무/쇠솥 등긋한 부뚜막에 불을 넣으면 매운 굴뚝 연/기'([산수갑산])와 같은 토속적인 언어에 정면으로 맞선다. 

한 시인이 이토록 상반된 언어를 마음대로 구 사할 수 있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인 것이다. 아마도 사막의 길이나 물방울 집과 같은 친숙하고 그럴 듯한 이미지에 도취 되어서 고개를 끄덕였던 독자들은 이러한 시들 앞에서 크게 속은 듯한, 혹은 놀림을 당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이 시끄 러운 록큰롤은 그런 모든 시들을 점잖만 빼는 허상으로, 현실을 미화하는 죽은 언어로(그것이 아무리 절망과 부정을 이야기 한다 하더라도) 느껴지도록 만든다. 물론 사막의 길에서 듣는 록큰롤 또한 죽은 언어, 무의미한 소음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먼 이 국의 사막과 사막과 같은 도시의 록큰롤 헤븐 사이에 놓인 그 엄청난 거리감은 겟 아웃 겟 아웃이라고 소리치며 도망가는 시인의 숨가뿐 질주를 가능하게 한다. 그 이질적인 공간의 맞부딪힘, 그 사이의 오고감이 이 시에 '소리'를 가져다주는 것이다.

결국 김태형이나 전대호가 80년대의 형식으로부터 달아남은 그것에 대한 절대적 동경도 환멸 때문만도 아니며, 다만 침묵 속에 가라앉지 않으려는, 추억이나 회상에만 머무르지 않으려는, 바로 지금 이곳을 끌어 안으려는 노력이다. 그들은 '비릿한 피똥이라 도 찢어지게 내지르려면/한 덩이 비애로운 제 몸 숨길 어둠조차도 갉작 갉작/갉작갉작 뭐든지 또 우겨 넣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을'([두 마리 쥐])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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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주대낮에 여자들이 칼을 들고 설치는 이유 
―문성해(1963∼ )

이 시절에는요
여자들이
시렁 위에 얹힌 작지만 앙칼진 칼 하나씩 손에 들고 나오는데요
여자들이 칼을 들고 설쳐도 암말 못하는 건
지천에 내걸린 풋것들을 오살지게 베어다
서방과 새끼들을 거두기 때문인데요
이 시절에는요
세상 모든 여자들은 코밑이 거뭇해지고
팔뚝 속에 알이 차올라서는
지천에 돋는 풋것들이 아까워라, 아까워라
저도 모르게 들판과 한판 엉겨붙게 되는데요
난생처음 억세디억센 수컷이 되는데요
가끔씩 그 독한 칼날에
논배미가 잘리고 칡뿌리가 잘리고 수맥이 잘리기도 하는데요
이 시절 여자들은요
푸줏간 안주인이 내걸린 고기들을 슥슥 잘라가듯
이 나무 이 바람 이 구름을
훌훌 베어 망태기에 담아서는
종다리처럼 지저귀며 언덕을 넘어가는데요
하늘도 암말 못한다는데요

 

 

산과 들에 풋것들이 지천으로 돋아나는 봄날, 망태기 가득 나물을 캐는 건강한 여인들을 그린 풍경으로만 읽어도 썩 호쾌하다. 그런데 이 시에서 ‘이 시절’을 자연의 계절로만 읽으면 좀 아깝다. 자연 속에서 나물 캐고 뛰놀던 어릴 적 기억을 현재의 시대상(時代相)으로 끌어올리는 시인의 힘! 자연을 공간 배경으로 삼으면 시에 힘이 생긴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도 시인의 기량이다.

여자가 결혼을 하면 집안에서 살림이나 해야지 직장에 다니면 흉이 되던 시절이 있었다. 1970년대까지 그랬던 것 같다. 그런데 80년대부터는 신붓감을 물색할 때 직업이 뭔지 은근히 묻기 시작했고, 90년대에는 여자가 맞벌이를 안 하면 남편이나 시댁 어르신이 무시하고 짜증을 내기도 했다. 급기야 현재는 당연히 맞벌이다. 여자가 살림은 물론이요 경제활동도 해야 하는 게 사회적 추세다. 항구나 선착장 같은 데는 남자 인부가 많겠지만, 시장에는 여자 상인이 많다. 저임금의 생활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이도 대부분 여성이다. 그이들이 갖고 다니는 가방들은 왜 그리 큼지막한지. 어떤 역경이나 고난도 썩썩 베어낼 작은 칼이 들어 있는 그 큼지막한 망태기! ‘서방과 새끼들을 거두기’ 위해 ‘코밑이 거뭇해지는’, 모든 일하는 여성들! 시인은 그들 힘의 원천인 모성성을 찬양하고, 여성성을 격려하며, 힘찬 승리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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