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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욱 큰 보람= "윤동주의 시를 간직했다가 세상에 알린 일"
2017년 03월 18일 19시 17분  조회:4272  추천:0  작성자: 죽림

서시(序詩)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민족서정시인 윤동주. 일제 치하의 고통과 독립에의 염원을 주옥같은 시로 풀어낸 이.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담겨진 그의 문학정신은 아름답고 숭고하다. 일제는 독립운동을 했다는 죄목으로 윤동주를 감옥에 가두었고 그는 1944년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숨을 거둔다.

청년 윤동주가 남긴 시들은 자칫하면 세상에 나오지 못할 뻔 했다. 1943년 일본 경찰에 붙잡히기 전 친구 정병욱에게 그가 써놓은 원고를 맡기는 데 정병욱은 이 원고를 그의 집 마루 밑바닥에 숨겨놓고 잘 간직했다. 그 장소가 바로 전남 광양시 진월면 망덕리에 있는 ‘정병욱 가옥’이다.

윤동주의 시에 많이 등장하는 ‘하늘’과 ‘바람’과 ‘별’들이, 1945년 광복이 오기까지 2년여 동안 땅속에 묻혀 있었던 곳이 바로 광양이다. 광양을 통해 어둠속에 갇혀 있던 ‘윤동주시인의 하늘’이 다시 열리고 ‘정지했던 바람’은 다시 생기를 얻어 동서남북으로 향하고 ‘빛을 잃었던 별’들은 다시 반짝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도 많은 이들은 윤동주와 광양과의 이런 인연을 잘 알지 못하고 있다. 최근 들어서 한 지역 언론의 보도로 이 같은 사실이 알려졌으며 시는 지난 2007년 7월 이곳을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했다.

직접적인 인연은 아니지만 윤동주시인과 광양시 간에 맺어진 인연은 문학사적으로 의미가 크다. 그 인연을 어떻게 가꿔나가느냐는 광양시민들의 몫이다.

 

정병욱의 어머니가 일제의 감시를 피해 2년여동안 원고를 숨겨두었던 마루밑.

 

 

 

 

 

 

 

 

 

 

 

■ 일제감시 피해 윤동주 유고 숨겨둔 정병욱 생가

 

섬진강변에 위치한 진월면 망덕리 길가에는 1925년에 지어진, 가옥 한 채가 자리하고 있다. 정 병욱 가옥으로 알려진 이 집은 과거 양조장이었다. 따라서 도로 쪽 가옥에는 가게가 나 있고 뒤쪽은 살림집으로 돼 있다.

당시 이 집에는 정병욱과 그의 어머니 등이 살고 있었다. 정병욱은 연희전문에 다니던 시절 윤동주와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아주 가까운 친구였다. 윤동주 시인은 연희전문 졸업을 (1941) 즈음해 시집을 출판하고자 했으나 주위의 만류로 뜻을 접는다.

은사였던 이양하교수는 일제가 시의 내용을 문제 삼을 것을 우려해 출판을 만류했다. 윤동주는 일본유학을 떠나기 전 3부의 원고를 만들어 한권은 자신이 갖고 다른 두 권은 이양하교수와 후배이자 친구인 정병욱에게 각각 건넸다.

이후 정병욱은 학병으로 징용 당하게 되자 광양의 어머니에게 윤동주의 원고를 맡기며 일본헌병에게 들키지 않게끔 잘 간직해줄 것과 자신이 죽을 경우 연희전문학교 교수님들에게 갖다 줄 것을 당부했다.

정병욱의 어머니는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일제의 수색을 피해 이 집 마룻바닥 밑에 원고를 숨기고 보관해 왔다고 한다.

광복 후 학병에서 무사히 돌아온 정병욱은 어머니로부터 2년여 동안 숨겨왔던 유고를 건네받았고 1948년 윤동주의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발간했다.

윤동주 본인과 이양하교수가 지니고 있었던 원고는 모두 사라지고 없어서 정병욱 집안이 아니었더라면 오늘날의 윤동주는 없을 뻔했다.

한편 정병욱은 서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로 근무하면서 한국 고전문학 연구와 판소리 연구 등에 큰 발자취를 남겼으며 평소 자신의 가장 큰 보람으로 ‘윤동주의 시를 간직했다가 세상에 알린 일’이라고 밝혀왔다

 
 

===============덤으로 더 보기@=@

 

윤동주가 세상을 떠난 지 아느덧 3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가 즐겨 거닐던 서강일대에는 고층 건물이 즐비하게 들어서고, 
창냇벌을 꿰뚫고 흐르던 창내가 자취를 감추어 버릴 만큼,
오느날 신촌은 그 모습이 완전히 달라졌다.
달 밝은 밤이면 으레 나섰던 그의 산책길에 풀벌레 소리가 멈춘 지 오래고,
그가 사색의 보금자리로 삼았던 외인묘지는 계절 감각을 상실한 지 오래다.
그가 묵고 있던 하숙집 아주머니는 어쩌면 이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을지도 모르겠다....

이렇듯 세월은 모든 것을 바꾸어 놓고 마는 것이지만, 
동주에 대한 나의 추억은 조금도 퇴색하지 않고 생생하게 살아 있다.
내가 동주를 처음 만난 것은 1940년, 연희 전문학교 기숙사에서였다.

오똑하게 솟은 콧날, 부리부리한 눈망울, 한일 자로 굳게 다문 입, 
그는 한마디로 미남이었다. 
투명한 살결, 날씬한 몸매, 단정한 옷매무새, 이렇듯 그는 멋쟁이였다.
그렇지만 그는 꾸며서 이루어지는 멋쟁이가 아니었다. 
그는 천성에서 우러나는 멋을 지니고 있었다. 
모자를 비스듬히 쓰는 일도 없었고, 
교복의 단추를 기울어지게 다는 일도 없었다.
양복 바지의 무릎이 앞으로 튀어나오는 일도 없었고, 
신발은 언제나 깨끗했다.
이처럼 그는 깔끔하고 결백했다.
거기에다 그는 바람이 불어도, 눈비가 휘갈겨도 요동하지 않는 태산처럼 믿음직하고

씩씩한 기상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연희 전문 학교 문과에서 나보다 두학년 위인 상급생이었고, 
나이는 나보다 다섯 살 위였다.
그는 나를 아우처럼 귀여워해 주었고, 나는 그를 형처럼 따랐다.
신입생인 나는 모든 생활의 대중을 그로 말미암아 잡아 갔고,
촌뜨기의 때도 그로 말미암아 벗을 수 있었다.
책방에 가서도 그에게 물어보고 나서야 책을 샀고, 
시골 동생들의 선물도 그가 골라 주는 것을 사서 보냈다.

오늘날, 나에게 문학을 이해하고, 민족을 사랑하고, 
인생의 참뜻을 아는 어떤 면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오로지 그가 심어 준 씨앗의 결실임을 나는 굳게 믿고 있다.
그러기에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그가 내 곁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는 달이 밝으면 곧잘 내 방문을 두드려서 침대 위에 웅크리고 있는 나를 이끌어 내어,
연의의 숲을 누비고, 서강의 뜰을 꿰뚫는 두어 시간의 산책을 즐기고 돌아오곤 했다.
그 시간동안 그는 입을 여는 일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는 지금도 수수께끼이다.

가끔은 "정 형, 아까 읽던 책 재미있어요?"하는 정도의 질문을 했는데,
그것에 대해 내가 무슨 대답을 했는지는 뚜렷이 생각나지 않지만,
그는"그 책은 그저 그렇게 읽는 겁니다."라고 하기도 했고,
어떤 때에는 "그 책은 대강 읽어서는 안 돼요. 
무척 고심하면서 읽어도 이해하기가 어려운 책입니다." 라고 일러 주기도 했다.
그만큼 그는 독서의 범위가 넓었다.


-정병욱[잊지 못할 윤동주]中-

정병욱1922∼1982. 국문학자.

 

 

윤동주 유고 시집과 정병욱 이야기

 

1940년 봄, 열여덟의 정병욱이 연희점문에 입학했다.

그가 가장 먼저 친한 선배가 윤동주였다.

멀리 북간도에서 온 윤동주는 정병욱의 2년 선배였다.

전남 광양에서 상경한 정병욱과 윤동주는 같은 하숙방에서 지냈다.

그 하숙방이 서촌 부암동에 있는 소설가인 金松의 집이었다.

이 무렵 윤동주가 정병욱에게 보여준 시가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참회록>

<간(肝)> 같은 것이었다. 

 윤동주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교회에 다녔는데 정병욱도 같이 다녔다고 한다. 

 

당시 윤동주는 일본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윤동주는 일본으로 가기 전에 졸업 기념으로 시집을 낼 계획을 세웠으나

시대가 허락지 않았다. 윤동주는 1941년 졸업을 앞두고 19편의 시를 노트에 적어놓고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란 제목까지 써 두었다.

이 시집의 서문으로 써둔 것이 <서시>다.

윤동주는 이 시첩을 자기가 하나 갖고 연희전문 문과 교수였던 이양하 교수와 또 하나는

정병욱에게 주고는 일본으로 갔다.  

 

정병욱 교수가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학병으로 끌려가기 전에

윤동주의 시 원고를 고향 전남 광양의 어머니께 맡겼다.

<어머니, 소중한 것이니 잘 간수하세요.>

그리고는 정병욱은 학도병으로 전선에서 부상을 당하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리고는 1945년 2월 후쿠오카 감옥에서 윤동주가 세상을 뜬 것을 알게 되었다.

정병욱은 어머니께 맡긴 윤동주의 시를 어머니께 여쭙는다.

<잘 간수하고 있으니 걱정 마라.>

어머니는 명주 보자기에 싼 시 노트를 아들께 내놓았다. 

 

이리하여 이 원고는 서울로 보내졌고 1948년 1월 윤동주의 3주기를 앞두고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정음사에서 출판되었다.

정부는 2007년 정병욱의 광양 집을 국가가 관리하기로 했다.

1925년 건축된 일본식 목조건물인 이 집이 문화재로 등록되었다.

이 생가 옆에 정병욱의 외조카 박춘식 씨기 지금 관리하고 있다.

 

 

 

 

 

잊지 못할 윤동주

 

                                                          정병욱(1922~1982)

 

 

<윤동주 유고 시가 보존됐던 진월면 망덕리의 정병욱 가옥(근대문화유산 제341호)>

 

1941년 9월, 우리의 알차고 즐거운 생활에 난데없는 횡액이 닥쳐왔다.

당시에 김송 씨가 요시찰 인물이었던 데다가

집에 묵고 있는 학생들이 연희 전문학교 학생들이었기 때문에,

우리를 감시하는 일제의 눈초리는 날이 갈수록 날카로워졌다.

일본 고등계 형사가 무시로 찾아와 우리 방 서가에 꽃혀 있는 책 이름을 적어 가기도 하고,

고리짝을 뒤져서 편지를 빼앗아 가기도 하면서 우리를 괴롭혔다.

우리는 다시 하숙을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때 마침, 졸업반이었던 동주는 생활이 무척 바쁘게 돌아가고 있는 형편이었다.

진학에 대한 고민, 시국에 대한 불안, 가정에 대한 걱정,

이런 가운데 하숙집을 또 옮겨야 하는 일이 겹치면서 동주는 무척 괴로워하는 눈치였다.

이런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그는, 그의 대표작으로 널리 알려진 중요한 작품들을 썼다.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서시' 등은 이 무렵에 쓴 시들이다.

 

동주는 시를 함부로 써서 원고지 위에서 고치는 일이 별로 없었다.

즉, 한편의 시가 이루어지기까지는 몇 주일, 몇 달 동안을 마음속에서 고민하다가,

한번 종이 위에 옮기면 그것으로 완성되는 것이었다.

그의 시집을 보면, 1941년 5월 31일 하루에 '또 태초의 아침', '십자가', '눈 감고 간다' 등 세 편을 썼고, 6월 2일에는 '바람이 불어'를 썼는데,

동주와 같은 과작의 시인이 하루에 세 편의 시를 쏟아 놓고,

이틀 뒤에 또 한 편을 썼다는 사실은 믿어지지 않는 일이다.

그것은 머릿속에서 완성된 시를

다만 원고지에 옮겨 적은 날이라고 생각할 때에야 비로소 수긍이 가는 일이다.

그는 이처럼 마음속에서 시를 다듬었기 때문에,

한 마디의 시어(詩語) 때문에도 몇 달을 고민하기도 했다.

 

 

유명한‘또 다른 고향’에서

 

 

어둠 속에서 곱게 풍화 작용(風化作用)하는

 

백골(白骨)을 들여다보며

 

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라는 구절에서 '풍화 작용'이란 말을 놓고,

그것이 시어답지 못하다고 매우 불만스러워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고칠 수 있는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해 그대로 두었지만, 끝내 만족해하지를 않았다.

 

그렇다고 자기의 작품을 지나치게 고집하거나 집착하지도 않았다.

‘별 헤는 밤’에서 그는 '따는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 로 첫 원고를 끝내고 나에게 보여 주었다.

나는 그에게 넌지시 "어쩐지 끝이 좀 허한 느낌이 드네요". 하고 느낀 바를 말했었다.

그 후,

현재의 시집 제1부에 해당하는 부분의 원고를 정리하여 '서시'까지 붙여 나에게 한 부를 주면서

"지난번 정 형이 '별 헤는 밤'의 끝 부분이 허하다고 하셨지요.

이렇게 끝에다가 덧붙여 보았습니다." 하면서 마지막 넉 줄을 적어 넣어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우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우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이처럼, 나의 하찮은 충고에도 귀를 기울여 수용할 줄 아는 태도란,

시인으로서는 매우 어려운 일임을 생각하면,

동주의 그 너그러운 마음에 다시금 머리가 숙여지고 존경하는 마음이 새삼스레 우러나게 된다.

 

 

 

 

정병욱. 국문학자(1922~1982).  호는 백영(影).

서울대학교 교수를 지내면서 고전문학의 여러 분야를 두루 연구하였으며, 

특히 판소리 연구에 업적을 쌓았다.

저서에 <국문학산고(文學散藁)>,  <시조문학사전> 등이 있다.

 

 


 

 

 

지난 2007년 전라남도는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을 등록문화재 제341호로 등록한다는 통보를

문화재청으로부터 받았다고 밝혔다.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은 광양시 진월면 망덕리에 소재하는데,

1925년에 건립된 가옥으로 백영(白影) 정병욱(鄭炳昱, 1922∼1982)과

그의 가족에 의해 윤동주(尹東柱, 1917∼1945) 시인의 유고가 온전히 보존되었던 곳이다.

 

윤동주는 1943년 항일운동의 혐의를 받고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2년형을 받고

광복 전인 1945년 2월에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사망했다.

또한 위의 수필을 쓴 그의 친우 정병욱은 한국 고전문학 연구와 판소리,

한글 연구 등에 매진한 인물로 우리나라 국문학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분이다.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던 해인 1941년에

자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발간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자

이 원고를 정병욱에게 맡겨 그의 집에서 보관함으로써 어렵게 보존되다가

광복 후 1948년에 간행되어 빛을 보게 되었다.

 

윤동주의 대표작으로는 <서시>, <자화상>, <별 헤는 밤> 등이 있는데,

그의 시력여정(詩歷旅程)은 청년기의 고독감과 정신적 방황

그리고 조국을 잃음으로써 삶의 현장을 박탈당한 동일성의 상실이

그 원천을 이루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위의 사진의 가옥은 고 정병욱 교수가 기거하던 고택이라는 점,

양조장과 주택을 겸용해 온 보기 드문 건축물이라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민족사 중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한글로 작성된 시고가

두 분의 우정과 신뢰로 보존됨으로써 광복 후에 시집으로 간행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건축적ㆍ국문학사적인 의미가 크다.

건물 뿐만 아니라 윤동주와 정병욱 두사람만 알 수 있는 사연을

정병욱 자신이 글로 표현한 점도 이채롭다.

물질적인 유산의 형태는 찾아서 보존하면 되겠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두사람 간의 무형의 우정은 이렇게 글로써 표현되어

후세에 남겨지는 것도 의미있는 일로 보아진다.

 

 
 

대한민국의 국문학자

 


연희전문학교 시절, 윤동주와 함께 찍은 정병욱의 사진


만년의 정병욱 교수


평생 윤동주를 추억했던, 윤동주의 친구
우리 국문학의 선구자

鄭炳昱, 1922.3. 25 ~ 1982. 10. 12.

수험생들에게는 윤동주의 친구로 잘 알려져 있으며, 전공자들에게는 국문학의 체계를 확립한 제1세대 학자로 유명하다.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대학에 윤동주와 함께 다니다가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오사카의 방공포에서 근무. 광복 후에는 서울대학교에 편입하여 졸업 후 바로 대학 교수가 되었다. 이른바 3음보 학설[1]을 비롯한 고려가요, 조선시대 시조의 체계와 특징을 정리한 첫 세대의 학자이다. 최치원을 연구하던 중 <대동야승>을 모조리 읽고 학사 졸업논문을 썼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있다.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모아서 간행하는 데 도움을 준 한 명으로도 유명하다. 학도병으로 끌려가기 전 시인의 육필을 전라남도 광양시에 위치한 본가[2]에 맡기면서 '자기 목숨보다 소중한 것이니 잘 간직해 달라'라고 모친에게 당부한 일화가 있다. 암울한 시절에 사실상 목숨을 걸고 윤동주의 유고를 지켜낸 장본인인 셈.
6차 교육과정 고등학교 국어(상)에는 "잊지 못할 윤동주"라는 그의 수필이 실려 있었다.

1982년 10월 12일에 급성 저혈압과 양성 신장종양의 합병증세로 인하여 61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자료@===

'윤동주 정병욱 학회' 만들어 문학사적 조명을"

정병욱 가옥 활용 방안 심포지엄 개최
정병욱 가옥 활용 방안 심포지엄 개최
(광양=연합뉴스) 김재선 기자 = 전남 광양시 13일 시청 대회의실에서 '백영 정병욱과 민족시인 윤동주의 문학사적 조명을 통한 정병욱 가옥 활용 방안'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2013.11.13 <<광양시>>

광양시,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 활용 방안 심포지엄 개최

(광양=연합뉴스) 김재선 기자 =
전남 광양시가 청년시인 윤동주의 유고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보존해 우리에게 건네준 백영 정병욱 선생 가옥의 활용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광양시는 2013년 11월 13일 시청 대회의실에서 '백영 정병욱과 민족시인 윤동주의 문학사적 조명을 통한 정병욱 가옥 활용 방안'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이날 심포지엄에서는 정병욱 가옥을 '윤동주와 정병욱'을 동시에 기리는 공간으로 활용하고, '윤동주 학회' 또는 '윤동주 정병욱 학회'를 결성해 문학사적 조명을 하자는 제안이 나왔다.

이날 '한글과 시혼을 지킨 윤동주와 정병욱'이라는 주제로 발표한 숙명여자대학교 김응교 교수는 "윤동주의 한글 유고가 섬진강 가의 한 양조장 마루 밑에 숨겨 있었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며 정병욱의 가옥을 윤동주의 유고만을 기리는 공간을 넘어 정병욱을 기리는 공간으로도 의미망을 확대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선배의 시집을 목숨처럼 보전하고 알려온 정병욱은 이후 서울대 국문과 교수로 임용돼 '시조문학사전', '한국고전시가론', '한국의 판소리' 등을 냈고 1979년 외솔상, 1980년 3·1문화상을 수상하는 등 국문학계의 거목으로 기록된다"며 "이 공간을 '윤동주'만 강조되는 곳을 넘어 '윤동주 + 정병욱'이 합해질 때 시너지 효과가 일어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특히 "정병욱의 여동생 정덕희와 윤동주의 남동생 윤일주의 결혼으로 두 사람은 인척 관계가 되면서 두 인물의 관계가 한국 문학의 중요한 흐름의 하나를 형성한다"며 "따라서 정병욱이 이뤄놓은 삶과 학문적 업적의 궤적만으로도 정병욱의 유고나 자료를 전시하는 부스도 마련하고 윤동주와 정병욱의 삶과 우정을 설명하는 동영상도 있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어 성균관대학교 윤인석 교수는 '역사적 터의 내력과 활용, 이야기가 있는 정병욱 가옥의 미래를 그려보며'라는 주제 발표에서 "전문적인 학자들이 중심이 돼 유족과 함께 '윤동주 학회' 또는 '윤동주 정병욱 학회'를 만들면 광양시에서 매년 정기적으로 학술대회도 할 수 있을 것"이라며 "이처럼 대학과 학자와 국제적인 관계망을 가질 때 광양시를 찾아오는 방문자도 많아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광양시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청년시인 윤동주의 유고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詩)'를 보존해 우리에게 건네준 백영 정병욱 가옥의 활용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이번 심포지엄을 마련했다.

또 등록문화재 제341호로 지정된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을 윤동주 시인과 정병욱 선생의 인연을 기념하고 시인의 순결한 시 정신과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역사적 장소로 발전시켜 나갈 계획이다.

========================

 

 지금으로부터 50여 년 전인 1962년의 정병욱 교수의 집 전경이다. 망덕산 자락에 딱 붙어서 옹색하게 보이는데 축대 앞 선착장 쪽으로 20여m 바다쪽을 메꿔서 지금은 아래 사진의 모습이 되었다. 그러나 50여년 전의 모습이 훨씬 정겨웠었다. 전라도 동부 6군에서는 장어를 먹으려면 망덕이(망덕포구)로 모였고 그것도 돈많은 사람들 몫이었고 대부분은 백합조개와 갱조개를 즐겼다. 우럭조개나 맛조개, 새조개 등은 축에도 끼지 못했던 넉넉한 그런 때가 있었다.

 

                                윤동주의 육필원고가 보관되었었다 해서 근대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갑작스런 관심에 급히 함석을 덧대어 보수하여 어쩐지 어설픈 모습이다.

 

 문은 잠겼고 안내는 물론 물어 볼 곳도 없어 도둑처럼 흘깃할깃 유리창을 통해 안을 들여다 보지만 왠지 허망하다. 아예 폐쇄를 하던지, 멀리서 와가지고 헛걸음 하니 기분은 썩 좋지 않다. 그럼 그렇지!. 무슨 사정이 있었겠지만 그것을 미뤄 짐작한다는 것이 쉽진 않다. 망덕포구 '랜드마크'조형물을 만들겠다고 공사중이다.

 

 

 

 정병욱이 학병으로 강제 징용 당하자 그의 어머니에게 부탁하여 항아리에 담아 마루밑에 묻어 뒀던 것을 정병욱이 해방되자 귀가하여 이 원고를 1948년에 시집을 간행하였다.

 

 윤동주가 1917년생이고, 정병욱이 1922년생이다.

윤동주는 아버지 윤영석과 어머니 김용(김약연의 누이동생)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후쿠오카 감옥에서 윤동주의 유해를 안고 나온 사람이 경희대 교수를 지낸 당숙 윤영춘이고

 세시봉의 윤형주가 윤영춘의 아들이다. 윤동주가 윤형주의 6촌형이다.

 

 

윤동주 시인 유고 보존 정병욱 교수 가옥

1925년에 건립된 이 가옥은 국문학자 鄭炳昱(1922~1982)의 옛 가옥으로 尹東柱 (1917~1945)시인의 유고가 보존되었던 곳이다.윤동주 시인은 1943년 일본 유학 중 항일운동 혐의로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1945년 2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그의 친우 정병욱(전 서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은 한국고전문학 연구와 판소리 등 민족문화진흥에 크게 공헌한 학자로서 윤동주와 그의 시를 세상에 알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윤동주 시인은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던 1941년 자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발간하려 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여의치 않게 되자 자필원고를 정병욱에게 맡기고 유학을 떠났다.

이 가옥에서 일제의 감시를 피해 은밀히 보존되던 윤동주시인의 유고는 정병욱에 의해 1948년 한 권의 시집으로 간행되어 빛을 보게 되었다. 윤동주시인의 시는 아름다운 우리말로 다듬은 순수 서정 속에 민족의식을 담아내 일제 암흑기의 어두운 문학사를 밝혀주는 저항의 등불로 밝혀지고 있으며 <서시>. <자화상>. <별 헤는 밤>. 등의 대표작은 널리 애송되는 작품으로 유고가 이곳에서 보존되지 않았다면 그 존재조차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이 가옥은 국문학자 정병욱 교수가 기거했던 옛 가옥이라는 점, 요즘은 보기 힘든 1920년대 점포주택이라는 점, 그리고 특히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쓰여진 민족문학의 귀중한 시집이 두 분의 우정으로 온전히 보존되어 겨레에 전해지게 된 자리라는 점에서 문학사적·건축사적 의미가 크다. 

광양제철이 들어서기 전까지 그 이름값을 톡톡히 했던 배알도해수욕장,이 섬 정상에 큼직한 정자가 있어 좋은 쉼터였었다.

'망덕산'을 향해 절하는 형국이라는 '배알도'는 이야기거리가 많다.

고전소설 '전우치전'의 전우치가 쇠섬 궁기마을에 왕국을 세우고 활동했다는 이야기는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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