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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또 하나의 열쇠가 있어야...
2017년 06월 12일 23시 54분  조회:2063  추천:0  작성자: 죽림
약속과 위반, 긴장과 이완의 풍경들


      박 남 희


  지금까지 지속되어 온 이 땅의 모든 역사는 약속과 위반의 기록이다. 역사는 쉬지 않고 흐른다. 역사는 흘러 흘러 또 다른 약속과 위반을 낳는다. 신이 내려 준 가장 대표적인 경전인 구약과 신약 역시 약속과 위반의 기록으로 채워져 있고, 그리스로마 신화 역시 약속과 위반의 기록이다. 자세히 보면 우주도 인간의 몸도 약속과 위반의 연쇄로 이루어져 있다. 우주는 한편에서는 신이 약속한 질서를 따라서 움직이지만, 우주의 또 한편에서는 예기치 않은 무질서가 존재한다. 인간의 몸 역시 생로병사의 과정 속에서 무수한 약속과 위반이 일어난다. 이렇듯 세상사는 무수한 약속과 위반으로 이루어져 있다. 약속은 위반을 낳고 위반은 다시 약속을 낳는다. 
  나는 시를 읽을 때도 무수한 약속과 위반의 풍경을 본다. 시의 내용과 형식은 물론이고, 시가 지시하고 담아내고자 하는 것들이 대부분 약속과 위반의 풍경 안에 포섭된다. 그런 점에서 시 역시 약속과 위반의 산물이다. 시는 약속과 위반이라는 인간의 삶을 끌어안고 무수히 길항하면서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찾아나간다. 이러한 시의 존재방식은 때때로 긴장의 시학을 낳기도 하고, 이완의 미학 쪽으로 다가서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시학에서는 이완보다는 긴장을 선호하는데, 이는 인간이 본래 지니고 있는 모험성과 무관하지 않다. 실낙원이 신의 예정에 있는 것이라면, 신은 본래부터 인간에게 ‘모험성’이라는 중요한 속성을 부여한 것이다. 이러한 모험성이야말로 인간의 창조성의 원천이다. 현대 문명이 기존의 안정적인 문화의 고정적인 틀을 부정하고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하는 노마드(Nomad), 즉 유목민적 마인드에 눈을 돌리고 있는 것도 ‘모험성’이 새로운 ‘창조성’을 낳는 바탕이 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현대의 시학 역시 끊임없이 미학적, 사상적 탈영토화를 추구하면서 새로운 시 쓰기와 전통적 시 쓰기 사이에서 단속적으로 길항해 온 것이 사실이다. 시학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부단히 문학적 탈영토화를 추구해야 하지만, 자칫 기존의 미학적 범주를 무시하고 끝없는 모험을 추구할 경우에는 지나친 긴장이나 불안이 찾아오게 된다. 실낙원 한 아담이 다시 낙원을 그리게 되는 것도 일종의 안정에 대한 인간의 욕구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약속이 위반을 낳고, 위반이 다시 안정을 갈구하게 되어 약속을 희망하게 되는 것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숙명인지도 모른다.
  신이 인간의 몸을 흙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인간의 몸이 자연과 하나라는 것을 말해준다. 자연에서 나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다가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연의 질서를 위반하고 인간이 만든 문명을 통해서 자연의 질서를 파괴하려 든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의 욕망은 자연의 힘에 견주어 보면 극히 일시적이고 제한적인 것에 불과하다. 인간은 자연과 더불어 시-공간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변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먼저 다음의 시를 읽어보자. 

늙은 경비원이 비질하고 있다
비 쏟아지기 직전
마당이 팽팽하다
한 발짝 건너 갓 씻어 놓은 하얀 접시들
잠시 하늘이 얼비치고 간

엄마는 폐경기였고
노을 한 국자씩 풀어 
붉은 국을 끓이는 저녁마다
어둠은 화단을 넘어와 마루 끝을 핥았다
시간의 모서리가 자욱이 부서져내리던

생각나지 않는 록밴드 이름처럼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스러져 간 구름들
점점 밀려오고 부풀어 오르고
드디어 쏟아지는 빗소리
세상의 접시들 왕창 왕창 깨지는
저, 믿을 수 없는

나비떼
그 순간을 엄마는 모란이라 불렀을까
작약이라 불렀을까

부서지는 음악
나는 손톱을 물어뜯었다
초경 중이었다 

             ―박유라,「그 순간의 나비떼」전문

  인간의 삶은 순간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순간과 순간이 단절되는 순간 인간의 생명은 끝이 난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순간이 매우 중요하다. 위의 시를 통해 시인은 구름이 밀려오고 비가 쏟아지는 풍경에 폐경기의 엄마와 초경중인 시인 자신을 나비 떼의 이미지로 겹쳐놓음으로써, 자신의 생을 뒤흔들었던 엄청난 변화의 순간을 회상하고 있다. 이 시의 첫 연, “늙은 경비원”의 이미지는 폐경기의 엄마에, 하얀 꽃을 지시하는 듯한 “갓 씻어놓은 하얀 접시들”은 초경중인 ‘나’에 대응되면서, 늙음과 젊음이라는 상반된 두 가지 상황에 적용되는 소통의 통로인 ‘나비 떼’의 알 수 없는 정체에 주목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 시에서 나비 떼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시인의 엄마가 사추기에 겪게 되는 심리적 황홀감의 또 다른 이름일 것이다. 이러한 황홀은 직접적으로는 엄마와 관련되어 있지만, 간접 체험만으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시인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므로 시인은 그 나비 떼의 추억을 쉽게 잊을 수 없다. 일종의 카오스를 동반하는 듯한 이러한 황홀은 인간이 영원한 코스모스에 이르는 과정 속에서 만나게 되는 잊을 수 없는 환영 같은 것이다. 아마도 사춘기의 시인은 폐경기에 있는 엄마가 추구하는 꿈과 사랑이 “세상의 접시들 왕창왕창 깨지는” “믿을 수 없는” 일로 느껴졌을 것이다. 엄마가 모란이나 작약으로 느꼈을 황홀한 감정이 사춘기의 시인에게는 ‘부서지는 음악’처럼 들렸을 것이다. 이러한 시인의 혼란은 엄마가 자식에게 보여준 약속과 위반에서 비롯된다. 시인에게 있어서 모성으로서의 엄마는 약속이지만, 여자로서의 엄마는 일종의 위반인 것이다. 

이제 나는 흐르는 눈물 때문에
뒤로 물러나는 물고기
낯선 바다에서 온 물고기

죽는 순간 단 한번 눈을 감는 물고기
당신을 무덤처럼 봉인하는 그때까지
뒤로 물러나는 물고기

당신의 주름살에 눈물의 힘이
심해의 파도를 일으키고
감정이 딱딱하게 굳는 그 순간까지
제자리에서 천천히 지느러미를 젓는 물고기

흐르는 눈물 때문에
당신이 정말 거기 계신지도 모르는
단 한번 당신 모습
제대로 본 적 없는
이제 나는 반쯤 눈이 먼 장님 물고기

        ―박형준,「장님 물고기」전문

  장님 물고기는 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는 심해에 살기 때문에 눈이 퇴화되어 장님처럼 된 물고기를 말한다. 시인이 이 시에서 유독 장님 물고기를 시적 소재로 삼고 있는 것은 극한적인 삶의 환경이나 조건을 통해서 신이 물고기에게 부여해 준 존재조건을 부정해보려는 의도가 숨어있는 것이다. 시인은 각주를 통해서 장님 물고기가 보르헤스의 별칭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데, 이는 장님 물고기가 단순한 물고기의 차원을 넘어서고 있음을 암시해 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여기서 장님 물고기는 시인의 또 다른 자화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흐르는 눈물 때문에 뒤로 물러나는 물고기”야말로 시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므로 시인은 “낯선 바다에서 온 물고기”이며, “죽는 순간 단 한번 눈을 감는 물고기”이며, 시 또는 뮤즈로 표상되는 “당신을 무덤처럼 봉인하는”, “감정이 딱딱하게 굳는 그 순간까지” 뒤로 물러나거나 제자리에서 지느러미를 천천히 젓는 물고기인 것이다. 
  이러한 물고기는 물론 일반적인 물고기의 이미지에서 상당히 일탈해 있는 것으로 일종의 위반인 셈이다. 시인은 겸손하게도 단 한번도 ‘당신’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시인의 태도는 물살을 거슬러 올라서 끝없는 욕망의 성취를 꿈꾸는 다른 물고기들과는 다른 삶의 태도와 맞물려서 시인으로서의 심성과 인생관이 근본적으로 무욕에 닿아있음을 말해준다. 이 시가 근본적으로 위반의 표정을 하고 있으면서도 비교적 편안하게 읽히는 것은 시인의 이러한 삶의 태도와 무관하지 않다. 

대기는 만성(大器 晩成)이라는데
인어공주
신데렐라
백설공주
피터팬
피노키오……등등
자라기도 전에 유명인사가 된 이 아이들에게도
성장권을 주어야 해

고통의 악취 진동하는 세상으로 데려와야 해
고독과 절망과 공포를 혼신으로 겪어보게 해야 해
모든 것이 애매하고 불투명하고 불확실하여
오히려 가능성만 넘치는 세계에서
쓸쓸하고 불쾌하고 두렵고 고통스런 대가를
날마다 때마다 혼신으로 감당해 내면서
제 힘으로 당당하게 어른으로 자라도록

이 아이들을 명사로 만들어 내느라고
악역을 강요당한 어른들도
누명을 벗겨주고 복권시켜 줘야 해
철없는 아이들의 동화童話 속에 갇혀서
끝도 없이 매도당하는 건 인권유린이니까

뉴턴 하면 사과
사과 하면 뉴턴이지만
사과는 익어 향기를 풍기고
아이작 뉴턴 그도 늙어서 죽었는걸
그가 발견한 운동법칙이 적용되는 여기가
훨씬 더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계인 걸.

                 ―유안진,「독후감」전문

   시인은 인어공주, 신데렐라, 백설공주, 피터팬, 피노키오와 같은 명작동화를 읽고 쓰는 독후감의 형식을 빌려 “자라기도 전에 유명인사가 된 아이들”을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시인의 인식은 본질적으로 나약해져서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어린 아이들에 대한 우려와, 매스컴을 통해서 자라기도 전에 유명인사가 되는 청소년들의 현실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현실을 통해서 왜곡되는 것은 아이들뿐만 아니라 그런 “아이들을 명사로 만들어 내느라고 악역을 강요당한 어른들도” 해당된다. 이와 같은 시인의 비판은 지나치게 환상을 쫓는 현대인들의 허황된 현실인식을 바로잡으려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시인의 이러한 비판은 단지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니다. 왜냐하면 시인은 “모든 것이 애매하고 불투명하고 불확실”한 세계를 오히려 가능성이 넘치는 세계로 바라볼 수 있는 건강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인의 인식은 “가장 어려운 시기가 오히려 기회의 시기”라는 역설과 맞닿아 있다. 그러므로 시인은 동화속의 세계를 부정하고 현실 세계를 직시할 것을 주장함으로써,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동화적 낭만성이나 문학적 천진성에 대한 선입견을 전복시켜서 긴장감을 유발시키고 있다. 시인의 이러한 인식은 문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일종의 위반이지만, 현실적인 관점에서 보면 위반의 바로잡기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시를 또 다른 측면에서 분석해 보면, 고통에 정면으로 대응해 나감으로써 건강한 어른이 되어가는 통과 제의적 성격이 감지된다. 이는 시인의 풍부한 삶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것으로, 인간이 훨씬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준다. 이 시가 표면적으로는 비판의 표정을 하고 있지만, 날카로움보다는 오히려 건강성과 인간다움이 느껴지는 것도 시인의 이러한 인간적인 풍모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아이가 또 열쇠를 잃어버렸다
등짝을 때리고 내 열쇠를 건네준다
뭔가 이야기를 하려던 아이가
성난 얼굴을 보더니
훌쩍이며 그냥 나간다
하루 종일
내 마음속에 틀어 앉아 울고 있는 아이
열쇠는 다시 복사하면 되는데,
미안하다는 생각에 자꾸 전화하지만
텅 비어 있는 집
내가 아이에게 건네준 것은
열쇠만이 아니었다
문을 여는 순간 왈칵 쏟아질 서러움
아이는 어쩌면 그 서러움에 대해
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한동안 잊고 있었다
빈 집에 들어와 가장 먼저 불을 켜는 사람이
바로 아이라는 것을
그 불빛을 보고
나와 남편이 들어선다는 것을

        -정경란,「또 하나의 열쇠」전문

  아이가 열쇠를 잃어버리면서 시인과 아이 사이에 갈등이 생긴다. 그것은 아이가 열쇠를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엄마와의 약속을 위반했기 때문이다. 아이는 엄마의 성난 얼굴을 보고 그냥 나가버리고, 엄마는 복사하면 되는 열쇠 문제로 아이에게 너무 심한 상처를 준 것이 아닌가 반성하게 된다. 시인은 자신이 “아이이게 건네준 것은/ 열쇠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곧 깨닫는다. 시인이 열쇠 이외에 아이에게 건네준 것은 ‘서러움’이다. 아이의 서러움은 엄마가 자신을 알아주지 못하는 데서 생긴 것이다. 사실 “빈 집에 들어와 가장 먼저 불을 켜는 사람”은 바로 ‘아이’였으므로, 아이는 시인이 사는 집의 또 다른 열쇠였던 것이다. 
  시인의 이러한 깨달음은 아이의 위반이 단순한 위반이 아니라 ‘빈집’의 적막을 여는 ‘또 하나의 열쇠’였다는 사실을 통해서, 오히려 자신이 ‘또 하나의 열쇠’인 아이의 존재가치를 망각하고 있었다는 반성에 이르게 된다. 그런 점에서 보면 시인 자신이야말로 ‘또 하나의 열쇠’인 아이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인식의 역전은 약속과 위반의 절대성에 의문을 갖게 만든다. 
  시를 쓰는 작업 역시 우리가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을 깨뜨려서 새로운 인식의 지평으로 나아가게 해준다. 그런 점에서 보면 시는 약속과 위반, 긴장과 이완이 끊임없이 길항하면서 생겨난 창조적 산물이다. 하지만 시는 위반을 넘어서 또 다른 약속을 지향하거나 긴장을 해소하고 이완에 이르려는 노력을 보여주기 위한 것은 아니다. 약속과 위반, 긴장과 이완은 그것들 나름대로 하나의 문학적 가치를 지니면서 서로 조응하고 대화를 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우열을 가리는 일은 하늘에 떠다니는 별들의 우열을 논하는 것만큼 공허한 것이다.

  우리는 저마다 ‘또 하나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 그것을 깨닫고 그 열쇠를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시인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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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 속의 허공 ―채필녀(1958∼ )

공이 대문 한쪽에 놓여 있다
저 공, 운동장 한구석에서 주워왔다
그 한구석도 어딘가에서 굴러왔을 것이다
또 어딘가에서 또 어딘가에서 왔을 것이다
무심하게 놓여진 공은 또 어딘가로
가고 있을 것이다

공은 한 번도 스스로 굴러본 적이 없다
우주가 돌아가는 대로 몸을 맡길 뿐이다
엄마의 큰 보폭에 아이가 종종종 발짝을 맞추듯
커다란 톱니에 작은 톱니가 맞물리듯이
둥그런 우주를 살아내고 있는 것이다
지구와 공이 겨우 이마를 맞대거나
손가락 하나 걸고 있는 듯 아슬아슬하다
어쩌면 공은 새처럼 나무처럼 살고 싶어
빈 가죽부대로 버려지고 싶은지도 모른다
팽팽한 긴장에서 벗어나고 싶은지도 모른다

공의 상처를 본다
제 몸을 터질 듯 솟구쳐 승리에 도취하기도 했던,
함정에 빠져 패배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던,

공의 내면이 궁금하다
공기가, 공의 몸이 될 수 있을까
살이 되고 세포가 될 수 있을까
공의 몸이 허공으로 풀어지고 있다
공의 중심이 허공의 중심을 채우고 있다
붉은 살이 서쪽 능선을 넘고 있다
공이 제 몸인 허공을 보고 있다
허공은 언젠가 공의 몸이 되어
굴러가고 또 굴러올 것이다 

 

 

대문간의 낡은 공이 ‘지구와 겨우 이마를 맞대거나/손가락 하나 걸고 있는 듯 아슬아슬’한, 그러나 ‘둥그런 우주를 살아내고 있는’ 인간 존재까지 튀어 오르고 굴러간다. 직관과 성찰, 그리고 그를 시로 형상화하는 능력을 빼어나게 보여주는 시다. 이 시가 담긴 시집 ‘나는 다른 종(種)을 잉태했다’는 혈기 방장한 처자 시인의 시골생활이 발랄한 해학과 감성으로 그려져 흥미롭고 재미있게 읽힌다. 가령 ‘우리 집은 동네 입구에 들어서면 보이는 첫 번째 집도 아니고 수령 이백 년 된 은행나무집도 아니고 마을회관 옆이나 뒤도 아닌 평범한 나무대문집이다 대문 안에 들어서면야 커다란 사철나무가 있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열 가지가 넘는 붓꽃이 자라고 있지만 자장면 배달은 대문 밖의 일이다 이름이나 번지수가 아닌 표시를 대라고 성화다, 아직 신이 오르지 않아 깃발도 꽂지 못하고 아들이 없어 농구대도 세우지 못한 나는, 우리 집 지도를 그릴 길이 막막하다 길이 없다//비 오는 날, 대문 밖에 나가 무슨 깃발처럼 두 팔을 흔들어 배달된 불어터진 자장면을 먹으며 내가 누구에게든 하나의 상징이 될 수 있을까 생각해 본다’(시 ‘자장면 배달은 상징 찾기이다’)에서 읽히는, 아무도 알아보는 이 없는 소외감을 대범한 편임에도 어쩌지 못하는 시인의 마음. 보석 같은 재능이라도 주목 받지 못하면 도태된다지. 흙 속에 묻힌 보석 같은 시인이 얼마나 많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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