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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 대한 몇 가지 생각(상) 나 태 주(시인 ․ 공주문화원장)
1. 시 일반 독자들 입에서 시가 어렵고 이해가 안 될 뿐더러 접근이 까다롭다는 말이 나온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더구나 요즘에 발표되는 젊은 시인들의 시들을 읽으면 더욱 그렇다는 말들을 한다. 특히 문학잡지에 발표되는 시들이 그렇다고 한다. 그래서 독자들은 시인을 떠날 수밖에 없다는 말들을 한다.
여기에는 물론 독자들의 몰이해나 수준미달 같은 것들이 요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허지만 더 많이는 시인들 편에 있겠지 싶다. 시인들이 시의 본분을 망각해서 그렇다. 어디까지나 시는 짧은 형식의 글이요 많은 내용을 축약해서 쓰는 글이고 될수록 아름다운 언어를 다듬어서 써야 하는 글이다. 그것은 하나의 어길 수 없는 약속이요 전제이다. 이것을 시인들 편에서 어겼다는 말이다. 그러니 독자들이 시인을 떠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시는 어디까지나 시여야 한다. 시다운 시여야 한다. 그럼 어떻게 쓰는 시가 정말로 시다운 시일까? 이에 대한 분명한 대답은 있을 수 없다. 흔히들 한자로 된 시(詩)라는 글자를 파자破字해서 ‘시는 말[言〕의 절[寺〕이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듯한 말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시는 경전과 같은 글이어야 한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것을 또 어떤 이들은 ‘시는 말이 절에 들어가는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절은 스님들의 수행공간이다. 이러한 절에 말이 들어가면 어떻게 해야 할까? 스님들이 절에 들어가서 하는 일들을 떠올려보면 좋을 것이다. 스님들이 하는 일로는 우선 참선과 독경과 불경공부가 있을 것이다. 이런 일들을 할 때 스님들은 될수록 말을 줄인다. 때로는 묵언으로 일관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은 말을 다루는 스님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될수록 말을 줄여야 할 일이다. 긴 문장이나 말을 축약해서 표현해야 할 일이다. 또한 진리에 가까운 말을 쓰려고 애써야 할 일이다. 이것이 시와 시인이 가진 임무이며 본질이다. 이를 떠날 때, 시는 시가 아닌 그 어떤 것이 된다. 오늘날 시인들의 불행은 시인들이 시인 이상이 되려고 하는 데에 있고 시가 시 이상의 것이 되려고 할 때에 있다. 시의 소외와 고적도 또한 시가 시 이상의 것이 되려고 하는 데에서 오는 것이다. 시가 그 본분에 충실할 때 독자는 저절로 돌아올 것으로 믿는다. (“말이 절에 들어가면 시다. 말의 농축이 시다. 끝내 적멸의 세계가 시다. 그런 의미에서 시는 무를 세계, 침묵의 나라를 지향한다.” 이것은 어느 날 모임에서 함께한 분이 시에 대해서 들려준 말이다. 상당한 타당성이 있어 여기에 옮기면서 잠시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2. 금잔옥대 ‘금잔옥대金盞玉臺’란 단어가 있다. 매우 아름답고 매력적인 말이다. ‘금으로 만든 술잔과 옥으로 만든 잔대’란 뜻으로 ‘수선화’를 가리키는 말이다. 흔히 주변에서 보는 수선화가 아니고 제주도나 거문도 같은 남쪽 섬에서 자생하는 수선화를 말한다. 이들 수선화의 꽃모양을 살피면 보통 육지의 수선화처럼 노랑색 한 가지로만 된 것이 아니라 하얀색과 노랑색 두 가지로 되어 있음을 본다. 하얀색 꽃잎 여섯 장에다가 가운데에 둥글게 생긴 노랑색 꽃술이 불쑥 나와 있는 형상이다. 이를 가리켜 금잔옥대로 표현한 것이다.
일찍이 추사 김정희 선생도 제주도로 유배살이할 때, 유배지에서 금잔옥대의 이 수선화를 보면서 시를 쓰기도 했고 유배생활의 고달픔을 달랬다고 한다. 이러한 금잔옥대란 말을 우리들의 시에 대입시켜보면 재미있는 생각을 얻을 수 있다. 시에서도 금잔 부분이 있고 옥대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두 부분 가운데서 우선순위는 금잔이 먼저고 옥대가 그 다음이다. 그야말로 금잔부분은 하늘이 내려주시는 언어, 신이 내린 문장이다. 그러므로 그 어떤 것으로도 수정 불가하다. 그렇다고 옥대 부분이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금잔 부분이 있으려면 옥대 부분이 있어야 한다. 뒷받침을 해주어야 한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이것은 나의「풀꽃」이란 이름의 내 시이다. 여기서 금잔 부분은 ‘너도 그렇다’이다. 이 부분은 그 어떤 말로도 대신할 수가 없다. 시인 자신도 고칠 수가 없다. 그렇게 벼락같은 언어이다. 이 말을 위해서 앞의 말들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앞의 문장을 삭제하면 어떻게 되는가? 앞의 문장이야말로 뒤의 문장을 있게 한 원인이며 전제이다. 없애서는 안 된다. 이러한 것은 고등학교 학생들도 이내 이해하고 알아맞히는 문제이다. 앞으로 시를 대할 때 시에서 ‘금잔 부분’과 ‘옥대 부분’을 찾아보는 일은 매우 흥미 있는 시 읽기를 제공해줄 것으로 믿는다.
3. 구양수의 다상량 글 쓰는 사람들이 알고 있는 작문법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권위 있는 것으론 중국 송나라 때의 구양수란 사람이 이야기했다는 ‘삼다법三多法’이다. 많이 읽고(多讀), 많이 쓰고(多作) 많이 생각하자(多商量).
흔히 사람들은 이 가운데 중요한 것으로 다독과 다작을 꼽는다. 많이 읽고 많이 쓰기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다. 일단은 수긍이 가는 말이다. 그런데 정작 글을 쓰는 마당에서도 그런가?
글을 오래 써본 사람들은 경험적으로 알 것이다. 글에 대한 밑그림을 제대로 그리지 않았거나 생각을 많이 하지 않고 글 쓰는 시간을 길게 잡는 경우와 오래 동안 생각하면서 밑그림을 세밀하게 그린 다음 글 쓰는 기간이 짧은 경우 어느 때가 더 성공적으로 글을 쓸 수 있는가에 대해서 말이다.
백이면 백, 앞의 경우보다는 뒤의 경우가 훨씬 더 효과적이란 걸 알 것이다. 그러하다. 생각은 길게 하고 글을 쓰기는 단숨에 써야 한다. 그 반대가 될 때는 단연코 패착이다. 어쩌면 생각과 느낌을 내팽개치듯이 빠르게 속사포로 써야 한다. 그래야만 글에 생기가 들어간다.
물론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다독과 다작이 기본이고 필수이고 선행조건이다. 그러나 실제로 글을 쓰는 마당에서는 다상량이 단연 제일이다. 어쨌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준비해야 한다.
다상량은 그냥 단순한 생각이 아니다. 그것은 글에 대한 구체적인 구상을 말한다. 글의 내용이 되는 소재를 모으고 생각을 다듬고 느낌을 새롭게 하는 과정을 말한다. 이렇게 다상량 부분을 많이 할애했을 때 비옥한 글이 되고 다상량 부분이 부족할 때 메마른 글이 되기 십상이다.
글이 시원치 않게 빠졌을 경우에는 아예 지금까지 쓴 글을 덮어버리고 다시 쓰는 것이 백번 좋은 방법이다. 공연히 시원찮게 써진 글을 붙잡고 고친다고 오랜 시간 부대껴보았자 여전히 시원치 않은 글의 범주를 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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