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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팔꽃 시 모음>
(복효근·시인, 1962-)
나팔꽃 - 송수권
바지랑대 끝 더는 꼬일 것이 없어서 끝이다 끝 하고 다음날 아침에 나가보면 나팔꽃 줄기는 허공에 두 뼘은 더 자라서 꼬여 있는 것이다. 움직이는 것은 아침 구름 두어 점, 이슬 몇 방울 더 움직이는 바지랑대는 없을 것이었다. 그런데도 다음날 아침에 나가보면 덩굴손까지 흘러나와 허공을 감아쥐고 바지랑대를 찾고 있을 것이다. 이젠 포기하고 되돌아올 때도 되었거니 하고 다음날 아침에 나가보면 가냘픈 줄기에 두세 개의 종까지 매어달고는 아침 하늘에다 은은한 종소리를 펴내고 있는 것이다. 이젠 더 꼬일 것이 없다 없다고 생각되었을 때 우리의 아픔도 더 한 번 길게 꼬여서 푸른 종소리는 나는 법일까
나팔꽃
나태주
여름날 아침, 눈부신 햇살 속에 피어나는 나팔꽃 속에는 젊으신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어있다.
얘야, 집안이 가난해서 그런 걸 어쩐다냐. 너도 나팔꽃을 좀 생각해보거라. 주둥이가 넓고 시원스런 나팔꽃도 좁고 답답한 꽃 모가지가 그 밑에서 받쳐주고 있지 않더냐. 나는 나팔꽃 꽃 모가지밖에 될 수 없으니, 너는 꽃의 몸통쯤 되고 너의 자식들이나 꽃의 주둥이로 키워보려무나. 안돼요, 아버지. 안 된단 말이에요. 왜 내가 나팔꽃 주둥이가 되어야지, 나팔꽃 몸통이 되느냔 말이에요!
여름날 아침, 해맑은 이슬 속에 피어나는 나팔꽃 속에는 아직도 대학에 보내달라 투덜대며 대어드는 어린 아들을 달래느라 진땀을 흘리는 젊으신 아버지의 애끓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팔꽃
오세영
땅이 아니라 아스팔트 위에서 피는 꽃도 있다. 어깨와 어깨를 메고 팔과 팔을 엮어 와와! 바리케이트를 넘는 그 향일성(向日性), 넝쿨들의 부단한 항쟁, 너에게 억압이란 있을 수 없다. 항상 푸른 하늘을 향해 자라는 너는 오히려 장벽을 꽃밭으로 일구는구나. 초연(硝煙) 가신 광장의 깃발들처럼 울타리 가득 뻗어 올라 빛을 향해서 만세! 총궐기한 빛 고운 우리 나라 6월 나팔꽃.
-6月 항쟁을 보고-
나팔꽃 - 김건일
뼈가 없는 나 큰 뼈의 해바라기를 감고 타고 올라 해바라기와 같이 세상을 본다
질긴 힘줄로 친친 감고 올라 해바라기보다는 못하게 보이지만 해바라기가 보는 세상은 다 본다
큰 얼굴로 환히 웃는 해바라기 작은 얼굴로 그 턱밑에 딱 붙어서 웃는 눈길보다 더 찬찬히 세상을 본다
나팔꽃
강 세 화
세상에 제일 먼저 빛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생겨난 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아침에 햇살과 나란히 나팔꽃이 피었습니다.
나팔꽃/박덕중
굳은 땅, 가녀린 목숨 박고 찌든 공간 권태로운 마당 한줌씩 웃음 피어 울린다.
가녀린 목숨의 마디마디 피어내는 웃음꽃 삶의 頂点을 향해 쭉쭉 뻗어 나가고
네 웃음 송이 어두운 마음 자락 밝혀 주면 네 목숨의 줄기 만큼 뻗어 가는 내 마음.
나팔쫓 네 화사한 웃음 천리만리 뻗어 가라 뚜뚜뚜 나팔 불어라.
나팔꽃
허영자
아무리 슬퍼도 울음일랑 삼킨 일 아무리 괴로워도 웃음일랑 잃지 말 일 아침에 피는 나팔꽃 타이르네 가만히.
* <문학과창작2003년05월호>에 수록
나팔꽃
김명배
아침마다 눈물로 꽃을 빚어도 네 가슴속의 꽃으로 피어나지 못한다면, 한세상 오래 사느니보다 또 한세상 더 사는 게 낫지 않니. 태초의 하늘 그 푸른 약속만 다시 지켜진다면.
나팔꽃
김명배
먼 산을 바라보면, 왜 눈물이 고일까. 그 너머 그 너머를 생각하면, 왜 서러울까. 가고 오는 것이 무엇이길래. 오요요 나팔꽃, 왜 먼 산을 바라보는가. 오요요 나팔꽃, 왜 그 너머 그 너머를 생각하는가.
나팔꽃
문효치
담벼락을 부여잡고 부르는 노래는 무엇일까? 한사코 달아나는 하늘의 꼬리를 잡고 늘어지며 부르는 노래는 무엇일까?
나팔 소리에 귀 시끄러운 세상 이제도 더 불러야 할 노래가 있느냐.
나팔꽃
백우선
나팔을 불어 버릴까 아침부터 용용 나팔을 불어 버릴까 간밤 이 방의 꽃불 회오리 열대야로 달구던 뒤엉킴의 꽃잠을 동네방네 죄다 까발려 버릴까
짙붉은 이 방의 불봄 속내 깊고 큰 입으로 내벌려 보지만 밤내 염천봄 홀로 앓다가 말의 길, 말의 문 왼통 막혀 그놈의 꽃입만 벙긋벙긋
나팔꽃
詩/명서영
어느 바람에 실려 여기까지 왔을까? 아파트 잔디에 싹을 낸 나팔 꽃 나무 감아 밟고 벽 꼭 붙잡고 서있다
지나는 사람들이 제비꽃 쳐다보며 예쁘다 하니 나팔꽃 보라색 띄었을까? 분홍 장미 어루만지는 사람들 바라보고 분홍빛 띄었을까? 분홍도 보라도 아닌 푸르스름한 나팔꽃
분홍에서 보라로 보라에서 분홍으로 가는 길에는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피어 있다 그 아이들 중 교통사고로 부모 잃고 고아원에 있다 큰집으로 온 인혜, 하얀 덧니 쌩긋 보인다
말수는 적지만 오래전부터 사귄 친구처럼 인혜는 아이들 속 소담소담 피어있다 땡볕 더욱 진한 색의 나팔꽃 하늘 향해 두 손 번쩍 들고 까르르 웃다 도담도담 한 뼘 더 자란다
(2004. 6.14)
나팔꽃/목필균
어둠에 지쳐 새벽 창문을 열면 나를 불러 세우는 붉은 나팔 소리
나이만큼 기운 담장을 타고 음표로 그려진 푸른 잎새의 노래
밤새 쏟아지던 비에 말끔하게 닦여진 환한 미소 따라 달려가는 귀바퀴
나팔꽃 씨
정병근
녹슨 쇠울타리에 말라 죽은 나팔꽃 줄기는 죽는 순간까지 필사적으로 기어간 나팔꽃의 길이다 줄기에 조롱조롱 달린 씨방을 손톱으로 누르자 깍지를 탈탈 털고 네 알씩 여섯 알씩 까만 씨들이 튀어나온다 손바닥 안의 팔만 대장경, 무광택의 암흑 물질이 손금을 빨아들이고 있다 마음에 새기는 것은 얼마나 힘겨운 일이냐 살아서 기어오르라는, 단 하나의 말씀으로 빽빽한 환약 같은 나팔꽃 씨 입속에 털어넣고 물을 마셨다 오늘 밤, 온 몸에 나팔꽃 문신이 번져 나는 한 철 환할 것이다
나팔꽃 우체국 / 송찬호
혹시 너와 나 사이 오랫동안 소식이 끊긴다 하더라도
올부터 우리는 그리운 옛 꽃씨를 모으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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