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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를 돌려주고... 녀자를 돌려다오...
2017년 08월 17일 02시 14분  조회:1876  추천:0  작성자: 죽림

 

시와 소통 

박찬일(시인) 

1. 

  시를 상대적 이미지 시, 절대적 이미지 시, 무의미시로 나눌 수 있다. 앞의 두 개는 수용미학상 소통에 문제가 없다. 그러나 무의미시의 창작미학에는 수용미학상 소통을 불가능하게 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상대적 이미지 시는 문덕수의 말을 빌면 수퍼비니언스 원리의 시이다. “시에서 모든 관념은 어떤 형태든 물리적 존재에 실려 운반되어야 한다.”1) ‘물리적 존재’는 토머스 S. 엘리엇이 1919년 「햄릿과 그의 문제들」(1919)이라는 에세이에서 처음으로 언명한 ‘객관적 상관물’과 같다. 

  김춘수는 상대적 이미지 시와 관념시를 구분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도 미묘한 차이는 있다. 파울 첼란의 두 편의 시를 예로 들어보자. 첼란의 유명한 「죽음의 푸가Todesfuge」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그것을 저녁에 마신다. 

  우리는 그것을 한낮에 마시고 아침에 마신다 우리는 그것을 밤에 마신다 

  우리는 마시고 또 마신다 

  우리는 공중에 무덤을 판다 거기서는 사람이 갇히지 않는다 

“검은 우유”가 표상하는 것은 독가스였다. 유태인 대량학살에 사용된 독가스였다. 정확히 말하면 검은 우유는 ‘유태인 대량학살’을 표상하였다고 할 수 있다. “공중”은 경계를 지을 수 없는 곳, 그러므로 ‘자유로운 곳’[수용소 밖]을 표상하였다고 할 수 있다. 검은 우유와 공중은 물리적 존재로서, 혹은 객관적 상관물로서 독자와 소통하였다. 혹은 유태인 대량학살과 ‘자유로운 곳’은  물리적 존재로써, 혹은 객관적 상관물로써 독자와 소통하였다고 할 수 있다(검은 우유와 공중이 물리적 존재, 혹은 객관적 상관물이었다). 「죽음의 푸가」를 간단히 상대적 이미지 시라고 할 수 있다. 

  첼란의 다음 시 역시 상대적 이미지 시라고 할 수 있지만 물리적 존재나 객관적 상관물을 통해 의미를 전달하지 않고 관념을 통해서 관념을 전달하고 있다는 점에서 순수 관념시라고 할 수 있다. 순수 관념시는 상대적 이미지 시보다 소통을 더 어렵게 한다. 이 시에는 제목도 없다. 全文이다. 


  낯선 것이 

  우리를 그물로 가두고 있다 

  무상無常은 사정없이 

  우리를 꿰뚫고 쥐어오는데 




  헤아려 주렴 너는 나의 맥박을 

  네 안에서 내 것까지를 




  그러면 우리가 일어서리라 

  너를 향해 너를 넘고 

  나를 향해 나를 넘어서 




  무언가는 우리에게 

  피부처럼 낮과 밤을 입힌다 

  추락으로 끝내려는 

  더없이 집요한 유희를 위해 




“그물”, “맥박”, “피부”처럼 물리적 존재들이 있기는 하지만 “낯선 것”, “무상”, “너를 향해 너를 넘고/ 나를 향해 나를 넘어서”, “무언가”, “추락”, “유희”라는 관념어들이 이것들을 가리고 있다. 관념이 승하다고 해서 이 시가 폄하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이 시는 첼란의 존재론적 성찰을 담은 빼어난 시편에 속한다. 이런 시도 있고 저런 시도 있는 법이다. 

  상대적 이미지 시가 있다면 절대적 이미지 시가 있다. 




  날이 저물자 

  肋骨과 肋骨 사이 

  홈을 파고 

  거머리가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베고니아의 

  붉고 붉은 꽃잎이 지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다시 또 아침이 오고 

  바다가 또 한 번 

  새앙쥐같은 눈을 뜨고 있었다. 

  ― 김춘수, <처용단장 제1부> 부분 




“거머리가 우는 소리”는 거머리가 우는 소리이고, “베고니아의 […] 붉은 꽃잎이” 진다는 것은 베고니아의 붉은 꽃잎이 진다는 것이다. “바다가 […] 새앙쥐같은 눈을 뜨고 있”다면 바다가 새앙쥐같은 눈을 뜨고 있는 것이다. 이육사의 「절정」 끝에 있는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개”와 비교해보자. ‘강철로 된 무지개’는 겨울의 은유이자 알레고리이다. 알레고리라고 한 것은 식민지 상황을 고려한 것이다. 알레고리는 1회적 알레고리, 역사적 알레고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용된 김춘수의 <처용단장 제1부>에서는 어떠한 알레고리도 찾을 수 없다. ‘저문 어느 날 거머리가 우는 소리가 들렸고, 베고니아의 붉은 꽃잎이 지는 것을 보았고, 새앙쥐같은 눈을 뜨고 있는 바다를 보았다’고 한 것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리듬만 남아있는 시, 이미지만 남아있는 시라고 할 수 있다. 절대적 이미지 시이다. 의미나 정보가 아닌, 절대적 이미지로 독자와 소통하려는 시라고 할 수 있다. 절대적 이미지의 아름다움으로. 

  이 지점에서 김종삼의 ‘내용 없는 아름다움’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북치는 소년」 전문이다.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 




  가난한 아희에게 온 

  서양나라에서 온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카드처럼 




  어린 羊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깨비처럼 




“가난한 아희에게 온/ 서양나라에서 온/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카드”에 “어린 羊들”이 인쇄되어 있었을 것이고 그 위에는 유리가루같은 것이 붙여져 있었을 것이다(그래서 “진눈깨비처럼” “반짝”인다고 했을 것이다). 일견 가난한 아희, 서양에서 온 크리스마스 카드, 어린 羊, 진눈깨비 등이 어떤 의미, 어떤 정보를 제공해주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제목 “북치는 소년”은? ‘가난한 아희, 서양에서 온 크리스마스 카드, 어린 羊, 진눈깨비’ 등과 ‘북치는 소년’의 관계는? ‘북치는 소년’과 끝의 두 연을 연결시켜주는 것이 바로 첫 연의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으로 보는 것이다. 이 시에는 시에 구조를 부여하려는 김종삼의 의도적 노력이 있었다. ‘제목’과 ‘끝 두 연’을 ‘내용 없는 아름다움’의 구체화라고 할 수 있다. 내용 없는 아름다움은 김춘수의 경우 절대적 이미지의 이름이다. 

  상대적 이미지 시(혹은 관념시), 절대적 이미지 시가 있다면 무의미시가 있다. 무의미시는 앞서 말했지만 수용미학상 소통 불가능을 목표로 하는 시이다. 물론 의미, 정보들의 소통이다. 역시 김춘수가 이에 대한 모범답안을 제시해주었다. 




  돌려다오. 

  불이 앗아간 것, 하늘이 앗아간 것, 개미와 말똥이 앗아간 것, 

  女子가 앗아가고 男子가 앗아간 것, 

  앗아간 것을 돌려다오. 

  불을 돌려다오. 하늘을 돌려다오. 개미와 말똥을 돌려다오, 

  女子를 돌려주고 男子를 돌려다오. 

  쟁반 위에 별을 돌려다오. 

  ― <처용단장 제 2부> 부분 




“불이 앗아간 것, 하늘이 앗아간 것, 개미와 말똥이 앗아간 것”을 돌려달라고 하다가 “불을 돌려다오. 하늘을 돌려다오. 개미와 말똥을 돌려다오”라고 하고 있다. “女子가 앗아가고 男子가 […] 앗아간 것을 돌려다오”라고 하다가 “女子를 돌려주고 男子를 돌려다오”라고 하고 있다. 한 술 더 떠 “쟁반 위에 별을 돌려다오”라고 하고 있다. 김춘수의 말을 빌면 의미가 고정되려고 하면 그 의미를 다른 의미로서 가차 없이 처단하고 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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