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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論]
이미지에 관하여
권혁웅
시의 이미지에 관한 가장 보편적인 통념은 ‘시의 언어가 재현해내는 시각적인 상像’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고작 짝퉁 초상화나 풍경화를 얻어내려고 이미지를 구사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것을 오감에 확대적용하더라도 사정은 마찬가지인데, 어떤 것이든 특화된 감관이 목적으로 삼고 있는 바로 그 감각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언어는 뇌를 경유해서만 활용 가능한 간접적인 질료인데, 어떻게 코의 본래 목적인 냄새를, 귀의 본래 목적인 소리를 그 기관보다 잘 구현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약점(언어란 간접적인 것이다)은 장점이기도 해서(언어란 종합하는 것이다) 이미지는 그 모든 감관들의 통섭이자 재인, 곧 지각을 지양하고 종합하여 통각에 이르는 작업이기도 하다. 이미지에 관해서 다시 물어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미지는 무엇인가? 나아가 시의 이미지란 무엇인가?
이미지가 실재하는 어떤 것을 감각 아래로 다시 불러모은다(재현)가니, 실재하지 않는 어떤 것, 감각 너머의 어떤 것을 지시한다(상징)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런 관점은 이미지를 실재하거나 실재하지 않는 어떤 것의 아래로 끌고 간다. 차라리 이미지 자체가 실재하는 것이라고, 그래서 이미지를 말하는 것은 실재하는 것과 실재하는 것의 관계 혹은 실재하는 것과 실재하지 않는 것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이미지는 실체이자, 그 실체들의 관계의 체계다. 전자는 이미지가 다른 어떤 것, 이질적인 것들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어떤 것들, 이질적인 것들의 구성적 계기물임을 말한다. 후자는 이미지가 서로 다른 감각들, 다른 운송체계들(이를테면 말과 그림, 소리와 건축)을 통할하는 등가적, 부등가적 교환의 체계 그 자체임을 말한다. 우리는 전자를 통해 수단(예컨대 언어)과 목적(예컨대 의미)이라는 오래된 이분법을 벗어나서, 그 자체로 존재하는 실체로서의 이미지라는 개념을 얻는다. 실체이기 때문에 그것은 의미를 전달하는 한편으로 차단한다. 후자를 통해 우리는 이미지를 경유하여 서로 다른 예술 체계를 체계화할 수 있다. 각각의 예술 체계는 이미지를 통해서 대화적 관계에 들어간다.
<사건으로서의 이미지>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묻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미지론의 가능성이다. 이미지는 사건이 일어나는 장소(사건은 이미지 바깥에서는 감지될 수 조차 없기 때문이다)이자 그 자체가 사건(이미지가 사건들의 계기적 연쇄를 촉발하기 때문이다)이자 사건의 사건(이미지는 그런 계기적 연쇄의 체계를 이루기 때문이다)이다.
조강석은 시적 이미지를 검토하기에 앞서 ‘이미지는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질문을 ‘이미지는 무엇을 욕망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이동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이미지는 전통적인 도상학iconography을 넘어선 도상해석학iconolgy의 소관이다. 이것은 이미지와 텍스트가 별개의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분리불가능한 수준으로 상호 침투된 채로 혼융되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미지란 “사회적인 집단”을 형성하는 것. “제2의 자연”을 구성하는 것이며, 따라서 “세상에 대한 새로운 배치와 지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미지의 욕망을 탐색하기 위해서 그가 소환하는 것은 의미론이다. 해석 작용이 선행되어야 이미지가 내부에서 생산해낸 실재를 탐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보기에 “중요한 것은 시 텍스트를 하나의 ‘내적 실체’로 간주하고 그 안에서의 논리적 정합성을 통해 텍스트의 의미망을 기술하는 것”이다. “시적 이미지가 궁극적으로 내부로부터 외부로 전개되면서 자신의 욕망을 가치와 윤리, 그리고 정치라는 사회적 욕망의 차원에 기입하기 위해서는 텍스트-이미지의 내부에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장소가 지정되어야 한다”는 그의 결론은 거듭해서 숙고할 가치가 있다.
이나라는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의 이미지론을 명료하고도 섬세하게 스케치해 보여준다. 위베르만은 이미지가 “이질적인 것들을 모으는 인식론적 방법”이며, 따라서 이미지를 인식하는 일은 역사를 인식하는 일이라고 보았다. 우리는 이미지에서 어떤 “불투명함”과 “모호함”을 읽어야 한다. 이미지는 단순히 상징질서를 독해하고 나면 버려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미지는 그런 독해의 끝에 남아 있는 잔여물, 사라지는 것의 “잉여물”이다. 위베르만이 “인류학적 이미지 산물들, 정신병원의 기록사진, 교회의 제단에 바쳐진 민중의 조야한 공예품, 필름에 근근이 기입되어 있는 단역들의 형상”에서 이미지-사유를 길어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미지를 해석하는 일은 그러므로 모든 주체가 경험하고 있는 내적인 상실, 실재의 균열과 구조 내의 붕괴 가능성을 인정하는 일이다”
두 사람의 글에서 새로운 이미지-사유, 이미지-사건으로 나아갈 지평을 얻을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수많은 역사적, 사회적, 개인적, 파편적인 이미지들을 채집하고 해석하고 사유하는 일이며, 그 이미지들이 우리에게 건네는 의식적 무의식적 전언에 귀 기울이는 일일 것이다.
•권혁웅: 1997년『문예중앙』으로 등단했으며, 시집으로『황금나무 아래서』,『마징가 계보학』,『그 얼굴에 입술을 대다』,『소문들』,『애인은 토막 난 순대처럼 운다』가 있다. 그밖의 저서로『시론』,『미래파』,『당신을 읽는 시간』,『입술에 묻은 이름』,『꼬리 치는 당신』등이 있다. 현대시학 작품상과 미당문학상을 수상했으며, 현재 한양여자대학교 문예창작과교수, 본지 편집위원
- 월간 [현대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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