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하얼빈역에는 안중근의사기념관이 만들어져 있다. 기념관을 들어서면 유리창 너머로 거사 현장이 바로 보인다. 플랫폼 바닥에 현장임을 나타내는 삼각 표시가 선명하다. [사진 송의호]
1909년 10월 26일 세계의 이목은 중국 하얼빈으로 집중됐다. 안중근(安重根‧1879∼1910) 의사는 하얼빈역 플랫폼에서 열차에서 내려 환영 군중 쪽으로 발길을 옮기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향해 권총을 발사했다. 거리는 불과 5m. 이토에게 3발이 명중됐다.
사형 10분 전 쓴 ‘爲國獻身軍人本分’
최후의 유묵으로 글씨에 흔들림 없어
일본 간수가 보관하다 한국에 기증
안중근은 이토가 쓰러지는 것을 보고 그 자리에 서서 “코레아 우라!”를 목청껏 외쳤다. 분명 강심장이었다. 체포된 안 의사는 이후 도의 경지에 이른 평상심(平常心)으로 또 한 번 주변을 놀라게 한다.
대표적인 모습이 옥중에서 남긴 유묵이다. 안 의사가 뤼순(旅順) 감옥에서 남긴 유묵은 박은식의 『한국통사』에 따르면 200여 점에 이른다고 한다.
2011년 설립된 대구가톨릭대 안중근연구소. 대학으로는 유일한 안 의사 연구소다. [사진 대구가톨릭대]
현재까지 확인된 것은 60여 점. 이들 유묵은 1910년 2월 14일 사형선고를 받은 이후 순국한 3월 26일 사이에 모두 쓰였다. 유묵을 받은 이는 모두 일본인이다. 뤼순 감옥의 간수‧형사‧검찰관‧통역‧판사‧교화승 등이다.
놀랍게도 전하는 유묵 모두가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도 글씨에 흔들림이 없다. 이 가운데 최후의 유묵은 무엇일까.
이경규(64) 대구가톨릭대 역사교육과 교수 겸 안중근연구소장은 “마지막 글씨는 ‘爲國獻身軍人本分(위국헌신군인본분) ’(25.9cmx126.1cm, 비단, 먹. 안중근 의사 기념관 소장. 보물 569-23호)”이라며 “사형 집행 10분 전쯤 쓴 것”이라고 말했다.
안중근 의사의 최후 유묵인 ‘위국헌신군인본분’. [사진 송의호]
안 의사는 생의 마지막에 뤼순 감옥에서 5개월 동안 전담 간수를 맡았던 일본 헌병 지바 도시치(千葉十七)에게 그 글씨를 쓴 뒤 건넸다. 지바는 안 의사의 인품에 감화를 받아 자신도 글씨 하나를 받았으면 했지만, 그때까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지바는 제대 뒤 고향에 돌아가 죽을 때까지 안 의사의 이 옥중 유묵과 영정을 놓고 정성을 다해 추모했다.
그가 죽은 뒤엔 부인 기츠요가, 기츠요가 죽은 뒤엔 조카딸 미우라(三浦)가 추모를 이어갔다. 1979년 미우라는 안 의사 탄신 100주년에 이 유묵을 한국 안중근기념관에 기증했다. 유족이 전한 이야기다.
대구가톨릭대 캠퍼스에 세워진 안중근 의사의 동상. [사진 대구가톨릭대]
안 의사는 도마라는 세례명의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맏딸 안현생은 대구가톨릭대에서 1953년 불문과 교수로 봉직했다. 그런 인연으로 대구가톨릭대에는 2011년 안중근연구소가 만들어졌고 캠퍼스에는 동상이 세워져 있다.
안 의사의 이 글씨를 보면 죽음을 목전에 두었지만 흐트러짐이라곤 찾을 수가 없다. 놀라운 평상심이다. 대인의 풍모가 저절로 느껴진다.
직장인은 갑작스런 해고나 정년퇴직을 당하면 막막해지게 마련이다. 그럴 때 사형 집행을 눈앞에 두고 애국과 평화를 담담히 써내려간 안 의사의 평상심을 떠올린다면 조금은 위안이 될 지도 모르겠다.
///송의호 중앙일보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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