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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과 시인] - 문예부흥운동을 주도한 "상원의원"시인
2017년 10월 30일 00시 41분  조회:3904  추천:0  작성자: 죽림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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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버틀러 예이츠Nobel Prize.png
William Butler Yeats
1911년에 조지 찰스 베레스포드가 찍은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사진
1911년에 조지 찰스 베레스포드가 찍은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사진
출생 1865년 6월 13일
아일랜드 아일랜드 더블린 샌디마운트
사망 1939년 1월 28일 (73세)
프랑스 프랑스 제3공화국 망통 Hôtel Idéal Séjour
직업 시인
국적 아일랜드 아일랜드
사조
수상내역 노벨문학상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 : 1865년 6월 13일 ~ 1939년 1월 28일)는 아일랜드의 시인이자 극작가로 1923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노벨 위원회는 "고도의 예술적인 양식으로 전체 나라의 영혼을 표현한, 영감을 받은 시"라는 평가를 남겼다. 아일랜드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노벨상을 받았다.[1] 예이츠는 노벨상을 수상한 이후에도 자신들의 뛰어난 작품들을 완성해 낸 몇 안되는 작가 중 한 사람으로 여겨진다.[2] 예술가인 잭 버틀러 예이츠의 형이며 존 버틀러 예이츠의 아들이다.

 

 

생애[편집]

더블린에서 태어나서 그 곳에서 교육을 받았지만, 그의 유년시절은 슬라이고 주에서 보냈다. 어린 시절에 시를 공부했고, 어렸을 때부터 아일랜드의 전설과 신비주의 모두에 매료되었다. 두 가지 주제 모두 그의 초기 작품에서 볼 수 있으며, 이후 세기가 바뀔 때인 1900년 무렵 까지도 그의 작품에 계속해서 나타난다. 그 가 처음으로 낸 시집은 1889년에 출간되었고, 그 시집에 담긴 시들은 느리고 서정적이었는데 이러한 표현은 라파엘 전파의 서정시와 마찬가지로 영국 시인 두 사람 곧 에드먼드 스펜서와 퍼시 비시 셸리에게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예이츠

화가 집안에서 출생한 그는 화가를 지망하여 미술 공부를 시작하였다. 뒤늦게 를 쓰기 시작하여, 1889년 처녀 시집 <마신의 방황>을 발표하여 와일드 등 유명한 시인들에게 절찬을 받았다. 그의 초기 작품은 낭만적이었으나 후기에는 점차 상징적인 방향으로 기울어졌다. 아일랜드 자유국이 세워지자 원로원 의원으로 정계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으며, 국민 극장 창설에 앞장섰다. 대표작으로 시집 <갈대 사이로 부는 바람>과 희곡집 <심원의 나라> 등이 있다.

어린 시절[편집]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는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의 샌디마운트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인 존 버틀러 예이츠 (1839-1922) 는, 윌리엄마이트 군의 군사이자 리넨 상인이었다가 1712년 세상을 떠난 저비스 예이츠의 자손이었다. .[3] 저비스 예이츠의 손자 벤저민은 킬데어의 부유한 지주의 딸인 메리 버틀러와 결혼했다.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부친인 존은 결혼할 당시에 법률을 공부하고 있었지만 곧 런던의 헤더리 예술학교에서 미술을 공부하기 위해 법률 공부를 중단했다.[4]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모친인 수전 메리 폴렉스핀은 슬라이고에서 제분업과 운송업으로 성공한 부유한 가문 출신이었다. 윌리엄이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그의 가족은 외갓집과 함께 지내기 위해 슬라이고로 이사하는데 그 곳은 어린 시인의 가슴 속에 어린 시절 속 공간일 뿐만 아니라 마음속의 집으로 남게 된다. 시간이 흐르면서 슬라이고는, 사실로써 뿐만 아니라 상징적으로도, 예이츠에게 “마음속의 고향” 이 된다.[5] 버틀러 예이츠 가족은 무척 예술적인 집안이어서, 그의 남동생 잭은 유명한 화가가 되었고, 누이 엘리저베스와 수전 메리(가족들과 친구들은 그들을 롤리와 릴리라고 불렀다)는 미술 공예 운동에 가담하였다.[6]

예이츠가 어렸을 때, 아일랜드에서는 개신교 우위(Protestant Ascendancy) 시대가 펼쳐지고 있었는데 급격한 시대 변화로 인해 개신교 신자였던 예이츠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그의 가족은 아일랜드에 벌어지는 변화에는 전반적으로 찬성했지만 19세기 민족주의의 부활로 인해 재산에 피해를 입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 사건은 예이츠의 인생관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97년, 예이츠의 전기집을 쓴 포스터(R. F. Foster) 는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20세였을 당시의 세상을 이해해야한다는 나폴레옹의 말이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경우 완벽하게 들어맞는다.” 라고 했다.[7] 개신교 신자가 권력을 잃어가면서 예이츠의 어린 시절에도 그림자가 드리웠다. 1880년대에는 정치가 파넬(Charles Stewart Parnell) 이 권력을 얻으면서 홈룰 운동(아일랜드의 토지를 영국계 지주들의 손에서 되찾아내려는 운동)이 널리 유행했고 1890년대에는 민족주의가 급속도로 퍼져나갔으며, 세기말에는 가톨릭 신자가 기득권층으로 부상했다. 이러한 변화와 발전은 예이츠의 시 문학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고 아일랜드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그의 시도는 그의 국가의 역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8]

1867년, 예이츠의 부친 존이 영국에서 예술 공부를 계속하기를 원하자 그의 가족은 영국으로 이주한다. 예이츠의 부모는 처음에 아이들을 집에서 교육하였다. 예이츠의 모친은 아이들에게 아일랜드 전래동화와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부친은 예이츠를 슬라우 지역으로 데려가 자연사 탐구를 도우면서, 독특한 지리와 화학 교육을 제공하였다.[9] 1877년 1월 26일, 어린 시인은 고돌핀 학교에 입학해 4년 동안 학교를 다닌다.[10] 예이츠는 학업 면에서 눈에 띄는 학생이 아니었으며, 그의 담임교사는 성적표에 “나쁘지 않은 수준. 다른 과목보다는 라틴말에 능한 듯함. 철자법에 매우 취약함.”이라는 평가를 남겼다.[11] 예이츠는 수학과 언어 공부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아마 그가 음치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12]) 생물과 동물학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1880년 말, 예이츠의 가족은 경제적인 이유로 인해 더블린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의 가족은 처음에는 도심에서 살다가 후에 호스 시 교외로 이사했다. 1881년 10월, 예이츠는 더블린에 위치한 에라스무스 스미쓰 고등학교에 입학해 학업을 재개한다.[13] 부친의 화실이 학교 주변에 위치했던 덕분에 예이츠는 많은 시간을 화실에서 보냈고 도시의 유명한 화가들과 작가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이즈음, 그는 시작(詩作)을 시작했고, 1885년 예이츠의 초기 시들과 <사무엘 퍼거슨 경의 시 (The Poetry of Sir Samuel Ferguson)> 라는 제목의 수필집이 더블린 대학 논평지(Dublin University Review)에 발표되었다. 1884년에서 1886년까지, 예이츠는 토마스 거리에 위치한 메트로폴리탄 예술학교(현 국립 예술 디자인 대학)에서 공부했다. 그의 초기작품들은 그가 17살이었을 때 지어졌는데 그중에는 중앙아시아에서 왕위에 오르는 마법사에 관한 시(퍼시 비시 셸리(Percy Bysshe Shelley)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가 있었다. 이 시기에 예이츠가 지은 다른 작품에는 어느 양치기에게 이교도로 고소당한 여인, 주교, 그리고 수사에 관한 연극을 비롯해 사랑과 관련된 시, 그리고 중세시대 독일 기사에 관한 설화시 등이 있다. 그의 초기작들은 지극히 평범했고, 비평가 찰스 존슨(Charles Johnson)의 말에 따르자면 “아주 아일랜드답지 못하고 그에게 속삭이는 꿈이라는 어둠에서 나온 것” 같다고 하였다.[14] 하지만 그의 초기 작품들이 셸리, 에드먼드 스펜서(Edmund Spenser), 그리고 라파엘 전파(pre-Raphaelite) 시의 구절들과 분위기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에 반해, 예이츠가 이후에 지은 작품들은 아일랜드의 전설과 전래동화, 그리고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의 영향을 받았다. 예이츠는 후에 블레이크를 “인간들에게 위대한 진실을 전달해 준, 위대한 조물주 중 하나”라고 칭하며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15] 1891년, 예이츠는 <존 셔먼(John Sherman)> 과 <도호야(Dhoya)> 를 출판했는데 전자는 중편소설이었고, 후자는 짧은 이야기였다. 두 작품은 더블린의 더 릴리풋 프레스(The Lilliput Press)에서 1990년 재출판 되었다.

청년 시인[편집]

예이츠의 가족은 1887년에 런던으로 돌아왔다. 1890년에 예이츠는 플릿 스트릿(Fleet Street) 술집에서 정기적으로 시낭송을 하면서 알게 된 런던 시인들 중 한 명인 어니스트 리스(Ernest Rhys)와 라이머클럽(Rhymers' Club)을 공동설립하였다[16]. 이 때 발표한 작품들은 훗날 <비극적인 세대(Tragic Generation)>[17] 라는 이름으로 1892년 첫 번째, 1894년에 두 번째 작품집이 출판되었다. 그는 에드윈 엘리스(Edwin Ellis)와 함께 처음으로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작품집을 완성시키면서, 잊혀진 시 를 재발견하게 된다. 훗날 셸리(Percy Bysshe Shelley)에 대한 에세이에서 예이츠는 “<사슬에서 풀려난 프로메테우스(Prometheus Unbound)>를 다시 읽어보았다. 신성하다고 여겼던 그 어떤 책들보다도 훨씬 확고한 세계가 있는 것 같았다.”라고 썼다.[18]

 
존 버틀러 예이츠가 그린 1900년도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초상

예이츠는 평생 신비주의나 심령론, 점성술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일생동안 광범위한 주제의 글들을 읽고 초자연현상 연구단체인 <고스트 클럽(The Ghost Club, 1911년)> 회원이 되었는데, 특히 에마누엘 스베덴보리(Emanuel Swedenborg)의 글에 영향을 받았다.[19] 1892년 초에 예이츠는 “내가 신비로운 힘에 대해 끊임없이 연구하지 않았더라면 블레이크집에 단 한 단어도 쓸 수 없었을 것이며, <캐서린 백작부인(Countess Kathleen)>도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신비로운 인생이야말로 나의 모든 행동과, 나의 모든 생각과, 나의 모든 글의 중심이다.”라고 저술했다.[20] 신지학자인 모히니 채터지(Mohini Chatterjee)가 연구했던 힌두교, 그리고 신비주의 등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예이츠의 그러한 관심은 훗날 그의 작품에서 큰 토대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몇몇 비평가들은 지적 신뢰성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이러한 영향력을 무시하고 있다. 특히 위스턴 휴 오든(W.H. Auden)은 이러한 면에 대해 “다 큰 성인이 뻔한 마술과 쓸데없는 인도(India) 의식에 사로잡혀 우스운 꼴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며 비판했다.[21]

처음 주목을 받았던 작품은 에드먼드 스펜서(Edmund Spenser)를 시적 모델로 한 판타지 작품 <아일랜드의 위상(The Isle of Statues)>이었다. 이 작품은 더블린 대학 논평지(Dublin University Review)에 실렸으나 그 이후 재출판되지는 않았다. 첫 단독 출판집은 <모사다 극시(Mosada: A Dramatic Poem> (1886)라는 소논문으로, 예이츠의 부친이 돈을 들여 100부를 인쇄하게 된 것이었다. 그 후 1889년에는 그가 1880년대 중반에 지었던 시들을 모아 <오이진의 방랑기(The Wondering of Oisin and Other Poems)> 라는 작품집을 발행하였다. 예이츠 전기작가인 포스터(R. F. Foster)는 이 긴 제목의 시집에 대해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게일(Gael)식 이름, 두드러지는 반복기법, 끊어짐 없는 운율이 세 단락에 걸친 이 시들에 미묘한 변화를 준다.”라고 말했다.[22]

We rode in sorrow, with strong hounds three,

Bran, Sgeolan, and Lomair,

On a morning misty and mild and fair.

The mist-drops hung on the fragrant trees,

And in the blossoms hung the bees.

We rode in sadness above Lough Lean,

For our best were dead on Gavra's green.

포근하고 맑은 어느 날의 안개 낀 아침,

힘센 사냥개 세 마리 브란, 스지란, 로메이어와 함께,

비탄에 잠겨 말을 타고 달렸네.

향기로운 나뭇잎 끝에 이슬 맺히듯,

활짝 핀 꽃잎 끝에 꿀벌들 맺혔네.

린 호수 그 위를 슬픔에 잠겨 달렸네,

가브라의 초원에서 죽어 여한이 없으니.

<오이진의 방랑기>는 아일랜드 신화 중 피니언 편(Fenian Cycle)의 구절들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며, 사무엘 퍼거슨 경과 라파엘 전파 시인들로부터 받은 영향 또한 드러내고 있다.[23] 완성하기까지 2년이 걸린 이 시는 그가 아직 미성숙했던 시절의 몇 안 되는 작품 중 하나이다. 이 작품의 주제는 훗날 예이츠가 다룬 가장 중요한 주제들 가운데 하나가 되는데, 그것은 바로 행동하는 삶을 넘어 명상하는 삶을 호소하는 것이었다. 이 작품 이후에 예이츠는 더 이상 장편시를 쓰지 않았다. 사랑 또는 신비롭고 난해한 주제에 대한 명상을 담은 초기 시들로는 <시들(Poems,1895)>, <비밀의 장미(The Secret Rose, 1897)>, <갈대밭의 바람(The Wind Among the Reeds, 1899)>이 있다.

1885년에 예이츠는 더블린 연금술회(Dublin Hermetic order) 창립에 합류하게 되었다. 6월 16일에 열린 첫 번째 회의에서 예이츠는 의장 역할을 맡았다. 같은 해, 신지학협회(Theosophical Society) 런던지회에 강의를 하러 온 체터지와 공동으로 더블린 신지학회 지부(Dublin Theosophical lodge)를 열었다. 다음 해에 예이츠는 그의 첫 강신회에 참여하였다. 훗날 신지학협회와 신비학, 특히 황금여명단(Golden Dawn)의 장미 십자회 이념이 접목된 신비학에 깊이 관여하게 된다. 1912년에 열린 강신회에서는 자신을 ‘레오 아프리카누스(Leo Africanus)’라 칭하며 예이츠의 수호신 또는 반(反)자아라고 주장하는 혼령을 만나게 되는데, 여기에서 영감을 얻어 쓴 산문집이 이다.[24] 예이츠는 1890년에 황금여명단에 정식으로 가입되어 'Daemon est Deus inversus(‘악마는 신의 다른 이름’이라는 뜻)'라는 마법명을 받았다. 이 이시스 우라니아(Isis-Urania) 종단 사원의 열렬한 전도자였던 예이츠는 그의 숙부인 조지 폴렉스펜(George Pollexfen)과 모드 곤(Maud Gonne), 플로렌스 파르(Florence Farr)를 입단시켰다. 그는 비록 개인숭배가 저변에 깔린 추상적이고 독단적인 종교에 대한 혐오감을 갖고는 있었지만 황금여명단에서 만난 사람들에게는 매력을 느꼈다.[25] 예이츠는 플로렌스 파르, 맥그리거 매터즈(Macgregor Mathers)와 함께 협회의 권력 투쟁에 가담하였으나, 블리스 로드 사건(Battle of Blythe Road)이 있던 당시 매터즈가 알레이스터 크로울리(Aleister Crowley)를 퇴출시키고 황금여명단의 소유물들을 독점하도록 하는 데 가장 두드러진 역할을 하였다. 황금여명단이 해체되어 여러 분파로 나뉜 후에 예이츠는 1921년까지 샛별회(Stella Matutina)에서 활동하였다.

조지와의 결혼[편집]

1916년, 51세가 되던 해에 예이츠는 결혼하여 아이를 낳기로 결심했다. 그는 1916년 여름에 모드 곤(Maud Gonne)에게 마지막으로 청혼을 했다.[26] 곤의 정치 혁명 활동 경력과 클로로포름 중독, 1916년 부활절 봉기사건에 연루되어 훗날 영국군에게 처형당한 존 맥브라이드(John MacBride)와의 순탄치 않았던 결혼생활 등 그녀에게 있었던 최근 몇 년간의 개인적인 재앙들 때문에 그녀는 부적절한 아내로 여겨졌다. 전기작가인 포스터(R.F. Foster)는 예이츠의 마지막 청혼은 모드 곤과 결혼하려는 진심어린 마음 보다는 의무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한다.

 
1908년 앨빈 랭던 코번(Alvin Langdon Coburn)이 찍은 예이츠

예이츠는 조건을 붙여서 무관심한 태도로 청혼했으며, 내심 그녀가 거절하기를 바랐다. 포스터(R.F. Foster)에 따르면 그가 의례적으로 모드에게 청혼하고 의례적으로 거절당했을 때, 그의 생각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그녀의 딸에게로 옮겨갔다.” 이조 곤(Iseult Gonne)은 당시 21세로 모드가 루시앙 밀레보이예(Lucien Millevoye)와의 사이에서 낳은 둘째 아이였다. 그녀는 그 때까지 슬픈 삶을 살아왔다. 짧은 생을 살고 간 그녀의 오빠를 환생시키려는 시도에서 태어났고, 태어나자마자 몇 년 동안은 그녀의 엄마의 입양된 조카로 소개되었다. 그녀는 11세에 계부에게 성추행을 당했고,[27] 후에는 아일랜드 공화국군을 위해 총기 밀반입자로 일했다. 15세 되던 해, 그녀는 예이츠에게 청혼을 했었다. 그리고 예이츠는 모드 곤에게 접근한지 몇 개월 후에 이조 곤에게 청혼했으나 거절당했다.

그 해 가을, 예이츠는 올리비아 셰익스피어의 소개로 만난 25세의 조지 하이디 리즈(Georgie Hyde-Lees, 1892-1968)에게 청혼했다. “조지, 안돼. 그 사람은 곧 죽을 노인이야.”라는 그녀의 친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하이디 리즈는 청혼을 받아들였고, 그 해 10월 20일에 결혼식을 올렸다. 그들의 나이차이와 예이츠가 신혼여행 도중 품었던 후회와 회환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결혼생활은 성공적이었다. 부부는 안느(Anne)와 마이클(Michael) 2명의 자녀를 낳았다. 비록 나중에 예이츠가 다른 여성들과 불륜관계를 맺었을 때라도 조지는 그녀의 남편에게 이렇게 썼다. “당신이 죽은 후에 사람들은 당신의 불륜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할거에요.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거에요. 왜냐하면 난 당신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사람인지 기억하고 있을테니까요.”[28]

그의 결혼생활 초반에 예이츠와 조지는 사이코그래프법에 푹 빠져 있었다. 그 안에서 조지는 그들이 “선생님”라고 부르는 다양한 영혼, 안내자들과 소통했다. 영혼들은 글자와 역사에 관한 복잡하고 난해한 시스템에 대해 이야기 했고, 부부는 이를 무아지경(최면상태)의 환경과 단계, 원뿔, 나선형에 대한 설명을 통한 실험을 하면서 발전시켰다.[29] 예이츠는 이 내용을 《비전》(1925)으로 출간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1924년에 그는 자신의 출판인인 워너 로리(T. Werner laurie)에게 “나는 아마 이 책이 내 책 중의 책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 고 인정하는 글을 썼다.[30]

문체[편집]

예이츠는 20세기 영시 작가의 주요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상징시를 즐겨 지었는데 작품 속에서 사물을 암시적으로 형상화시키거나 상징적 구조를 주로 사용했다. 그는 단어를 선택하고 배열하는 과정에서 표면적 의미 이상의 추상적 의미를 전달하는 동시에 공명을 불러일으켰다.[31] 그가 사용한 상징은 대부분 그 자체로서의 의미와 더불어 무형적이고 영원한 의미를 전달하는 것들이었다.[32]

다른 모더니즘 작가들이 자유시 창작을 시도한 것에 반해 예이츠는 기존 문학 양식의 대가로서 문학 양식을 지켜나갔다.[33] 하지만 그 또한 모더니즘 사조의 영향을 받아 차츰 종래의 시어법에서 벗어나 소박한 언어와 주제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서술을 사용하였다. 이와 같은 변화는 그의 중기 작품인 《일곱 개의 숲에서》(In the Seven Woods), 《책임》(Responsibilities), 《초록 투구》(The Green Helmet) 등에 두드러진다.[34] 예이츠의 후기 작품에는 보다 개인적인 내용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가 사망하기 20년 전에 지어진 작품들에서는 그의 아들과 딸에 대한 언급이나[35] 늙음에 대한 사유가 드러난다.[36] 《서커스 동물들의 탈주》(The Circus Animals' Desertion) 이라는 시에서 예이츠는 후기 작품 창작의 영감에 대해 이야기한다:

Now that my ladder's gone

I must lie down where all the ladders start

In the foul rag and bone shop of the heart.

이제 나의 사다리가 사라졌으니

모든 사다리가 시작하는 곳에 누워야하겠다

마음 속 낡은 중고가게 안에

예이츠는 1919년 이래로 골웨이 주 고트 인근의 투르 발릴리(Thoor Ballylee) 탑 (위도53°06'11.4", 경도08°46'29.2") 에서 매년 여름을 보내다가 1929년을 기점으로 더 이상 그 여름별장을 사용하지 않는다. 예이츠는 1932년 더블린 근교 래스파에서 리버스데일(Riversdale) 휴양지를 임대해 머물기도 했지만 그의 삶의 발자취는 주로 아일랜드 외부에 남겨져 있다. 그는 말년에 창작활동에 주력하면서 많은 운문, 연극, 산문시 등을 발표했다. 1938년, 예이츠는 그의 희곡 《연옥》(Purgatory) 의 첫 공연을 감상했다. 같은 해에 그는《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자서전》(Autobiographies of William Butler Yeats) 을 완성했다.[37]

예이츠의 초기 작품 중 대부분이 아일랜드 전설과 민담을 소재로 삼은데 반해 그의 후기 작품은 보다 현실과 관련된 사항을 다루고 있는 만큼 예이츠의 초기 문체와 후기 문체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예이츠의 작품은 시기별로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초기 작품은 라파엘 전파의 영향을 받은 어조와 함께 화려한 수식을 특징으로 삼으며, 인정없는 비평가들의 말에 따르자면, 부자연스러우리만큼 격식을 갖추고 있다. 예이츠의 초기 시에는 서사시인 《오이진의 방랑기》(The Wanderings of Oisin)이나 《아일랜드의 위상》(The Isle of Statues) 이 있다. 《오이진의 방랑기》는 예이츠가 남긴 유일한 장편시이다.[38] 그의 다른 초기작품에는 사랑이나 몽환적 주제에 관한 서정시가 있다. 중기 작품을 창작할 때 예이츠는 초기 시의 라파엘 전파적 경향을 떨쳐내고 [39] 새로운 특징의 시를 짓는다.[40] 그가 초기 작품에서 보여주던 여성적이고 우미하던 스타일은 딱딱하고 건조한 남성적인 것으로 변화하고, 환상적이던 심상은 금속적이라 할 만큼 구체성을 지닌 심상으로 전화한다. 예이츠의 중기 작품을 좋아한 비평가들은 그의 작품이 부드러우면서 강인한 리듬을 가지고 있으면서 어떤 측면에서는 매우 모더니즘적이라고 평가한 반면, 그의 작품을 비방한 비평가들은 시적 형상화가 부족하다고 평했다. 예이츠의 후기 작품들에는 시인이 강신론의 영향을 받아 얻은 창의적인 영감이 잘 드러난다. 여러 가지 면에서 후기 작품들은 초기 작품들로의 회귀라고 할 수 있는데 예이츠의 초기 작품인《오이진의 방랑기》에서 다뤄졌던 세속적인 기사와 종교적인 성직자 사이의 갈등이라는 주제는 후기 작품《영혼의 대화》(A Dialogue Between Self and Soul)에서 다시 한 번 나타난다.[41]

어떤 비평가들은 미술 분야의 파블로 피카소와 비슷하게 시 분야에서는 버틀러 예이츠가 19세기에서 20세기 모더니즘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있었다고 평가하지만, 예이츠가 정말로 T.S. 엘리엇 (T. S. Eliot) 이나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 와 더불어 모더니즘 작가로 인정받는 데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다.[42] 모더니즘 작가들은 《재림》(The Second Coming) 이 예이츠가 엘리엇의 모더니즘을 모방해 유럽에서 문명이 쇠퇴함에 따라 바치는 장송곡이라고 평가했지만 훗날의 비평가들은 이 시가 예이츠의 종말론 이론에 관한 시이기 때문에 1890년 대 사회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평가내렸다. 예이츠의 작품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는 그가《초록 투구》(1910) 와《책임》(1914)를 짓기 시작했을 때이다. 시인이 늙어감에 따라 그의 시 속 심상은 강력해져가서《탑》(The Tower) (1928),《나선 계단》(The Winding Stair) (1929), 그리고《새 시들》(New Poems) (1938) 은 20세기 시 가운데 가장 강력한 심상을 이용한 작품들로 손꼽힌다. 신지학과 주술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예이츠의 환상적 경향[43] 은 예이츠의 후기 작품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일부 비평가들은 그의 시를 보고 지적 신뢰도가 낮아졌다고 평가했다. 예이츠의 후기 작품에 드러나는 형이상학은《환상》(A Vision) (1925) 에 나타난, 소수의 사람들만 공유했던 근본과 연관되어 해석돼야 한다.[44]

예이츠가 1920년 쓴 《재림》은 20세기 창작된 시 가운데 시적 형상화가 무척 두드러지는 시이다.

Things fall apart; the centre cannot hold;

Mere anarchy is loosed upon the world,

The blood-dimmed tide is loosed, and everywhere

The ceremony of innocence is drowned.

The best lack all conviction, while the worst

Are full of passionate intensity.

모든 것이 파괴되고 그 중심은 무너진다

오직 혼돈만이 지상에 만연하다

온 누리에 핏빛으로 얼룩진 조수가 퍼지고

순결한 의식은 물에 잠긴다

선인은 주저하고 악인의 열정은 가득하다

이 시에서 “선인”이라고 일컬어지는 존재는 당시 유럽을 휩쓸던 물질주의의 바람 앞에서 전통 문화를 지키는데 무능력했던 기존의 기득권층이다. 시의 마지막 구절은 역사는 반복되고 당시 사회는 순환하던 역사가 마무리되고 새롭게 기독교가 성장하는 시대였다는 예이츠의 믿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And what rough beast, its hour come round at last,

Slouches towards Bethlehem to be born?

그런데 마침내 때를 맞이하여 태어나고자 베들레헴으로

뚜벅뚜벅 걷고 있는 저 거친 짐승은 누구인가?

예이츠와 연극[편집]

예이츠는 19세기 말의 아일랜드 연극운동의 주요한 추천자이기도 했다. 1904년에 설립된 더블린의 애비 극장이 초기의 곤란을 극복하고 존속한 것은 예이츠의 작가로서의 재능과 지도자로서의 통솔력이 크게 기여했었다.

그러나 근대극에서의 예이츠의 참된 공헌은 사실주의로 덮여 있던 연극에 시극(詩劇)을 회복시켰다는 점이다. 예이츠의 초기의 시극 <심원의 나라>(1894), <캐슬린 백작부인>(1899), <환영(幻影)의 바다>(1897-1906) 등은 관객의 상상력에 호소하는 것이며, 계속되는 <모래시계>(1903), <왕의 인구(人口)>(1903), <별에서 온 유니콘>(1907)에서는 극적 수법에 진보를 보이고 있다. 또한 농민극(農民劇)이나 아일랜드 전설에 의거한 영웅극도 썼다.

만년의 작품에서는 예이츠 시극의 특징인 단순한 표현에 포함되는 사상의 심원(深遠)함이 관객의 지성(知性)과 상상력에 가장 강하게 의존하는 형태로 정점에 이르렀다. <창가에 쓰여진 말>(1934), <연옥(煉獄)>(1938)이 그 대표작이다.






 
(아일랜드)   윌리엄 버틀리 예이츠                             출생 1865.06.13
사망 1939.01.28

요약 아일랜드 민족주의 정치가로도 활약했으며 1923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아일랜드 문예부흥운동을 주도한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

아일랜드 문예부흥운동을 주도한 당대 최고의 시인, 민족주의 정치가

개요

아일랜드 민족주의 정치가로도 활약했으며 1923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아일랜드 문학).

대립되는 전통의 계승

예이츠의 아버지 존 버틀러 예이츠는 변호사였지만 나중에 초상화 화가가 되었다. 처녀시절 이름이 수잔 폴렉스펜인 어머니는 아일랜드 슬라이고의 부유한 상인의 딸이었다. 사람들은 예이츠가 아일랜드의 압도적인 로마 가톨릭교도 사이에서 강력한 소수를 대표하는 영국계 아일랜드의 프로테스탄트 전통을 이어받은 인물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렇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런던에서 학교에 다닐 때도 아일랜드의 영상으로 가득 차 있어 자신을 이방인으로 느낄 정도였지만 아일랜드에서도 2가지 역사적 전통에서 분리된 채 있었다.

왜냐하면 가톨릭교도들과는 신앙을 공유할 수 없었기 때문이며 프로테스탄트들은 '출세만 생각하고 있는 듯해 보였기 때문이다' 예이츠는 조너선 스위프트, 에드먼드 버크, 올리버 골드 스미스, 조지 버클리 같은 유명한 영국 문인들의 문학과 사상에 나타나 있는 18세기의 찬란한 프로테스탄트 앵글로아일랜드 전통을 존중했다. 그러나 이 전통은 이제 쇠퇴해가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새로운 시대가 부상하고 있는 것 같았고 그 시대는 가톨릭 전통에 유리하며 영어보다 게일어로 표현되는 시대였다.

예이츠는 자신의 엄격한 예술적 취향과 조화시킬 수 있는 이 운동을 지지했지만 아일랜드가 영국 정부로부터 완전히 분리될 것을 주창하는 애국단체에서의 그의 행동은 자주 애매한 것이었다. 예이츠는 그 두 아일랜드 사회 중 어느 한 곳에 자리를 잡기 전에, 자기 자신의 입장을 주목할 만큼 애매한 자신의 고국의 입장과 관련지어 명백하게 밝혀야 했다. 이러한 시도는 그의 시를 통해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최고의 희망은 가톨릭 전통이나 프로테스탄트 전통보다 더욱 깊은 전통을 계발하는 것이었는데 그 전통은 그리스도교보다는 더 이교도적인 성격을 띠며 아직까지 남아 있는 관습·신앙·성지 같은 인류학적 증거 속에서 널리 찾아볼 수 있는 숨겨진 아일랜드의 전통이다. 1886년부터 발표된 예이츠의 많은 수필과 평론들은 시기가 적당했으므로 진정한 아일랜드를 알려야겠다는 시도였다.

1867년 예이츠가 불과 2세였을 때 가족은 런던으로 이사했으며 그곳에서 아버지는 더블린에서 받았던 것보다 더 많은 수수료를 받기를 희망했다. 1880년 가족은 다시 더블린으로 돌아왔고 거기서 고등학교에 다녔다. 휴일에는 슬라이고에 있는 외삼촌 조지 폴렉스펜과 함께 지냈는데 이 슬라이고는 많은 시의 배경이 되었다. 1883년 더블린에 있는 메트로폴리탄 예술학교에 다녔으며 이곳에서 받은 교육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다른 시인과 예술가들을 만난 것이었다.

탐미주의자·신비주의자·민족주의자로서의 예이츠

그동안 예이츠는 시를 쓰기 시작했다. 처음 발표한 것은 2편의 짧은 서정시로 1885년 〈더블린 유니버시티 리뷰 Dublin University Review〉에 발표되었다. 같은 해에 예이츠는 비술에 관심이 있는 단체, 즉 더블린 연금술협회의 결성을 도왔다. 1887년 가족이 다시 런던으로 돌아가자 예이츠는 '신지학협회'에 가입했다. 이 협회는 신비주의를 통해 지혜와 형제애를 추구하는 국제적인 운동으로 점차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마술은 일상 세계에서 멀리 떠난 상상의 삶의 한 방식이었기 때문에 그를 사로잡았다. 반면 과학의 시대는 혐오스러웠으며 천문학보다 점성술에 훨씬 관심이 많았던 신비주의자로서 자신이 시적 영상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주장했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예언서들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이런 모험은 플라톤 철학, 신플라톤 철학, 스베덴보리 신학, 연금술 등의 다른 신비주의 전통과 접촉하는 것으로 발전했다. 예이츠는 이미 자긍심이 강한 젊은이였고 이런 자존심 때문에 자신의 취향과 예술 감각에만 의지하게 되었다. 자랑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정신적 오만함이 잘 드러나곤 했다. 〈오이신의 방랑기 외 The Wanderings of Oisin, and Other Poems〉(1889)에 수록된 초기 시는 탐미주의 작품으로, 아름답지만 난해하며 사소한 문제로부터 해방되고 싶어하는 한 영혼의 외침이었다.

1889년 예이츠는 열정적이고 화려한 미모의 아일랜드 여인 모드 을 만났다. 그는 그 순간부터 "내 인생의 고뇌는 시작되었다"라고 기술했다. 예이츠는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으나 그 사랑은 희망이 없는 것이었다. 모드 곤은 그를 좋아하고 존경했으나 사랑하지는 않았다. 자신의 열정을 아일랜드에 아낌없이 바쳤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목소리와 몸으로 몸소 구사하는 반항자이며 웅변가였다.

예이츠가 아일랜드 민족주의 운동에 가담했을 때 부분적으로는 신념 때문이었으나 대부분은 모드를 향한 사랑 때문이었다. 그 시절 아일랜드에 대해 쓴 많은 글들은 모드를 향한 속삭임이었다. 1902년 더블린에서 희곡 〈캐슬린 니 훌리안 Cathleen ni Houlihan〉이 초연되었는데, 모드가 캐서린 역을 맡았다.

1891년 논쟁의 여지가 많은 아일랜드의 지도자 찰스 스튜어트 파넬의 급속한 몰락과 죽음 이후 예이츠는 아일랜드의 정계가 희망을 잃었다고 느꼈다. 정치가 남긴 텅빈 공간을 문학·예술·시·희곡·전설이 채울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에세이집 〈켈트의 여명 The Celtic Twilight〉(1893)은 이런 목적을 향한 예이츠의 첫번째 노력이었지만 1896년 오거스타 그레고리 부인을 만날 때까지는 진전이 없었다.

그레고리 부인은 귀족으로서 극작가가 되었고 그의 한 친구가 되었다. 그녀는 이미 서부 아일랜드 지방의 민간전승인 옛날 이야기들을 수집하고 있었다. 예이츠는 이 전승 지식이 고대 의식 및 자신의 감정과 그리스도교가 완전하게 파괴하지 못한 이교도 신앙에 대한 자신의 느낌과 일치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이 민간전승이 농촌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몰두하여 연구하면 사람들과의 명백한 관계를 증명할 수 있으리라고 느꼈다.

예이츠가 아일랜드의 민속을 엄격하고 고매한 문체로 표현하면 순수한 시를 창작할 수 있고 개인적인 용어로 그 자신의 정체성에 접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이상을 정치에 적용하면 농부와 귀족을 연결시키는 것인데, 즉 경험은 농부의 것, 문체는 귀족적인 것을 취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었다. 그런 연결은 도시와 부의 산물인 미움받는 중산층을 비난하게 된 것이고 이것이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더라도 도덕적 효과는 가져올 것이다. 1897년부터 예이츠는 카운티 골웨이의 쿨파크에 있는 그레고리 부인 집에서 여름을 보냈고 쿨파크를 사라져가는 우아함의 세계와 결부시켰다. 그 공원이 농부들로 둘러싸여 있다는 사실이 그 시각을 완벽하게 해주었다.

1899년 예이츠는 모드 곤에게 청혼했으나 거절당했다. 4년 후 그녀는 아일랜드의 애국 동지이며 영국의 압제를 함께 증오하던 아일랜드 군인 존 맥브라이드 소령과 결혼했다. 그는 1916년에 일어난 부활절 봉기에 참여한 죄로 사형당한 항거자들 중 한 사람이었다. 한편 예이츠는 시와 연극이 아일랜드 전 국민을 변모시킬 수 있으리라 믿고 문학과 희곡에 전념했다. 그런 활동은 더블린에 그 유명한 애비 극장을 설립하면서 절정에 다다랐고 이 극장은 1904년 첫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아들과의 반목을 주제로 한 〈베일 해변에서 On Baile's Strand〉는 첫 상연 계획에 들어 있었다. 그후 수년 간 예이츠는 애비 극장의 일반적인 운영에 몰두해 있었다.

그당시는 논쟁이 빈번한 시기였다. 그의 작품들은 비종교적이고 반가톨릭적이어서 반아일랜드적이라고 비난받았다. 배우·제작자·신문 등과 논쟁도 잦았다. 1907년 존 밀링턴 싱의 〈서부의 난봉꾼 Playboy of the Western World〉의 초연 때는 극장 안에서 소동이 일어났다. 언제나 자긍심이 강하고 당당했던 예이츠는 논쟁시 만만찮은 투사였다. 그는 또한 과거의 상처를 빨리 잊지 못해 많은 사람의 미움을 샀으며, 중산층, 상인 및 대부분의 더블린 사람들처럼 인습적인 성공을 원하는 모든 사람들을 경멸했다.

현대의 시민들, 가톨릭교도, 프로테스탄트 등은 모두 예이츠가 영웅적 가치관에 호소한다는 사실을 자신들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했다. 점차 중산층의 관심사에서 멀어져갔고, 애비 극장도 생명력을 잃어가는 것 같았다. 애비 극장에서 상연된 많은 연극들이 그의 눈에는 천박하고 통속적인 것으로 보였다. 예이츠는 대중의 변덕에 의존하지 않는 다른 종류의 연극으로 마음을 돌렸다.

1913년 서식스 주에 있는 스톤카티지에서 미국의 시인 에즈라 파운드와 몇 개월을 보냈다. 파운드는 그당시 일본의 고전극인 [能]의 번역 원고를 교정하고 있었고 예이츠는 그 극으로 인해 큰 자극을 받았다. 왜냐하면 그 극들은 대중보다 조신들을 기준으로 한 귀족문화에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었다. 점차적으로 노극에 해당되는 대응물로 간주될 수 있는 극들을 고안해냈는데 그것은 〈무희를 위한 4개 극 Four Plays for Dancers〉(1921)으로 극장에서뿐만 아니라 응접실에서도 상연될 수 있는 일련의 짧고 형식적인 극이었다.

예이츠는 이러한 연극들을 새로운 종류의 연극, 즉 말·가면·춤·음악, 모방이 아니라 상징적인 동작의 조화로 생각했다. 그 연극들은 상류 사람들, 즉 그런 형태의 장점을 즐기는 소수들에게만 사랑받을 수 있을 것이다. 1916년 초연된 〈매의 우물에서 At the Hawk's Well〉는 그가 믿어왔던 많은 가치관을 구현한 작품이었다. 돈과 대중을 위한 부르주아 극장은 고대 그리스 연극이 일으킨 동정과 공포보다는 '신경질적인 흥분'의 장소일 뿐이었다. 이 시기에 예이츠가 관심을 가졌던 예술은 관객들을 잠시 동안이나마 '지금까지 너무나 미묘해서 우리가 들어가 볼 수 없었던 마음의 심연' 속으로 빠져들도록 할 수 있는 예술이었다.

이러한 가치관은 아일랜드 생활의 일상적인 상황에서는 존속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1913년 휴 레인 경이 수집한 39점의 프랑스 인상파의 그림 처리문제에 대해 벌어졌던 분쟁은 예이츠의 눈에는 사악한 힘이 작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레인은 그 그림들을 더블린 시립현대미술관이 한 화랑을 마련해 그것들을 전시한다는 조건 아래 기증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계획대로 되지 않자 레인은 화가 나서 런던의 국립미술관에 빌려주었고, 1915년 그가 죽자 두 미술관이 이 그림의 소유권을 주장했다.

1913년 예이츠는 이 논쟁에 개입했다. 왜냐하면 레인의 훌륭한 행동이자 귀족적 조치가 한 비천한 더블린인에 의해 능멸당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예이츠의 〈책임 Responsibilities〉(1914)에 실린 많은 시들은 레인 논쟁에 의해 고취된 작품으로 매우 통렬한 작품들이다. 이것은 예이츠와 아일랜드 관계의 새로운 국면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1907년 그레고리 부인과 함께 피렌체·밀라노·우르비노·페라라·라벤나 등지를 여행했고 이탈리아 마을과 도시들이 나타내는 귀족적 우아함의 증거를 결코 마음속에서 잊지 않았다. 1913년부터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즉 예의와 정중함을 존중하던 완전히 사라져버린 왕국에 대한 갈망이 그의 작품 속에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성숙한 시인이며 상원의원

1917년 예이츠는 모드 곤의 딸 이졸트 곤에게 청혼했으나 거절당했다. 몇 주 뒤 조지 하이드 리스에게 청혼해 1917년 결혼했다. 1919년 딸 앤이 태어났고 1921년 아들 윌리엄이 태어났다. 1922년 아일랜드 자유국이 설립되어 예이츠는 아일랜드 상원의 새 일원이 되어달라는 요청에 수락했고 6년간 봉사했다.

1923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이제는 유명한 인물이 되어 현대의 가장 탁월한 시인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명예에 의존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상상력, 역사, 비술의 관계에 쏠려 있었다. 그는 그의 생각을 한 위대한 책, 즉 예술에 관해 신성시될 만한 책으로 재현하고 싶었다. 그결과 1925년 〈비전 A Vision〉의 초판이 출간되었다. 그러나 예이츠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몇 년 간 계속적으로 연구하여 1937년 결정판을 냈다.

한편 그의 시는 날이 갈수록 기량을 더해가고 있었다. 〈탑 The Tower〉(1928)은 그가 고트에서 구입한 무너진 노르만 성의 이름을 따서 붙인 제목으로 그의 작품 중 가장 도도한 것 중의 하나이며 매우 노련한 예술가의 작품이다. 그 작품 속에는 일생의 경험이 완벽한 형태로 구사되어 있다. 그렇지만 예이츠의 가장 위대한 작품들 가운데 일부는 그뒤에 씌어진 〈나선층계 The Winding Stair〉(1929)로 나왔다.

예이츠는 60대 후반에 이르러서도 계속 작품을 썼다. 그의 감정은 예전처럼 강렬했지만, 이 시기의 시는 대부분 상상력의 병적인 흥분 때문에 손상되었고 현실과 정의 사이의 균형도 불안정했다. 세계는 산산 조각나는 것 같았고, 예이츠는 그것을 혐오했지만 자주 세상의 몰락에 매혹되기도 했다. 귀족적 스타일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독재적인 이데올로기에 봉사해 말년에는 파시스트라는 비난을 받았다. 자신이 존중해온 가치관이 파괴되고 있다고 느끼며 예이츠는 그 가치들이 위대한 인물, 즉 강력한 지도자에 의해 구출될 수 있다고 상상했다.

예이츠는 활력과 독재주의적인 명쾌함 때문에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를 숭배했다. 산문으로 된 소책자 〈보일러에 관하여 On the Boiler〉(1939)에서 자신의 분노와 절망을 부패한 세상에 토로했다. 이것으로 인해 그는 정치 권력을 갈망하며 그 권력을 갖게 되면 폭력적으로 사용하리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예이츠의 분노는 시인의 분노였고 삶에 대해 갖고 있던 시각은 시인의 시각이었다.

그는 단지 도덕의 힘, 즉 어떤 위대한 상징들이 만들어내는 힘을 원했다. 그는 아일랜드 상원의원으로서 정치적 권력을 실질적인 것에 쏟았다. 즉 검열, 레인의 그림들, 건강 보험, 이혼, 아일랜드어, 교육, 저작권 보호, 아일랜드의 국제연합 가입 문제 등에 관심을 가졌다. 상원의 화폐위원회 의장이기도 했다.

예이츠의 말년은 긴장의 연속이었었다. 그의 건강은 좋지 않았고 그래서 아일랜드의 습한 겨울을 피해 여행을 다녔으나 은퇴하지는 않았다. 1930년대의 폭력이 끝내 전쟁을 몰고올 것이라고 생각한 그는 한편으로는 그 전망에 두려워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매혹되었다. 그는 무솔리니가 이끄는 이탈리아의 군대의 행진소리가 사랑·예술·미·예의범절의 주제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다.

그 시절 예이츠의 삶의 감각은 계시적인 것이었다. 가끔 그는 두려워 그 계시로부터 도망치기도 했으나 또 어떤 때는 그 계시에 동조했다. 1936년 자신이 사랑했던 시이며 대부분 자기 친구들이 쓴 시모음집 〈옥스퍼드 현대시 모음집 1892~1935, Oxford Book of Modern Verse 1892~1935〉가 발간되었다. 여전히 그의 마지막 연극 작품들을 쓰면서 예이츠는 그의 시 중 가장 귀에 거슬리는 시 〈헌의 알 The Herne's Egg〉을 1938년 완성했다. 그후 1년도 채 되지 않아 그는 외국에서 죽었다.

아일랜드에 매장하기 위한 최종적인 준비는 성사될 수 없었다. 그래서 프랑스의 로크브륀에 묻혔다. 그의 시신을 슬라이고에 매장하려는 의도는 1939년 가을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좌절되었다. 1948년 그의 시신은 슬라이고로 결국 넘겨져서 드럼클리프에 있는 작은 개신교 교회 묘지에 매장되었다. 이곳은 그의 〈마지막 시집 Last Poems〉(1939)에 수록된 시 〈벤 블벤 아래에서 Under Ben Bulben〉에 명시된 장소로 그의 묘 비문에는 자신이 직접 썼던, "삶과 죽음을 냉정히 바라보라. 그리고 지나가라!"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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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니스프리 호수 섬(The Lake Isle of Innisfree)
-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
 
나는 이제 일어나 가련다, 이니스프리로. 나뭇가지와 진흙으로 거기 조그만 오두막집을 한 채 짓고, 아홉 이랑의 콩밭을 일구며, 꿀벌집도 마련하리라, 그리하여 꿀벌 소리 요란스런 그 숲 속에서 홀로 살아가리라. 그곳에서 나는 얼마간의 평화를 느끼리라, 그것이 천천히 아침장막으로부터 귀뚜리가 노래하는 곳으로 방울져 떨어지고 있으리니, 그곳에선 한밤중에도 온통 어렴풋한 빛으로 가득하고, 한낮은 자주 빛으로 타오르리라, 그리고 저녁 즈음엔 홍방울새 나래소리 그득하리라. 나는 이제 일어나 가련다, 밤이나 낮이나 호숫가에서 나지막이 찰랑대는 물결소리 항상 들려오고 있으니, 철로 위를 달리거나 회색 포장도로 위에 있을 때에도 그 소리 가슴 속 깊이 들을 수 있으니. I will arise and go now, and go to Innisfree, And a small cabin build there, of clay and wattles made: Nine bean-rows will I have there, a hive for the honeybee, And live alone in the bee-loud glade. And I shall have some peace there, for peace comes dropping slow, Dropping from the veils of the morning to where the cricket sings; There midnight's all a glimmer, and noon a purple glow, And evening full of the linnet's wings. I will arise and go now, for always night and day I hear lake water lapping with low sounds by the shore; While I stand on the roadway, or on the pavements grey, I hear it in the deep heart's core.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 1865-1939)의 유명한 이니스프리 호수 섬('The Lake Isle of Innisfree')이라는 시입니다. 도시의 소음과 번잡스러움을 떨치고 한적한 자연에 묻혀 홀로 살고 싶은 마음, 그 떨쳐버릴 수 없는 소망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는 전원서정시입니다. 시인 자신의 설명에 의하면, 이런 전원적 삶에 대한 동경의 마음은 어린 십대 때부터 간직하게 되었답니다. 나중에 런던 한복판을 걷다가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듣거나 쇼윈도에 마련된 작은 샘 장식만 보아도 향수에 젖어 이 호수를 떠올리고는 이내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곤 했습니다.

 
William Butler Yeats / 예이츠 1865.6.13~1939.1.28 아일랜드의 시인?극작가 국적 : 아일랜드 활동분야 : 문학 출생지 : 아일랜드 더블린 샌디마운트 주요수상 : 노벨문학상(1923) 주요저서 : 《상 A Vision》(1925) 이니스프리는 아일랜드 Sligo현의 Lough Gill 호수에 있는 작은 섬입니다. 어린 시절 시인은 아버지와 함께 이 섬에서 지낸 적이 있습니다. 그 시절 그의 아버지는 쏘로우(Henry David Thoreau, 1817-62)의 [월든](Walden)에 나오는 구절들을 그에게 읽어주곤 했습니다. 시인은 그것에 감명을 받아 언젠가 “이니스프리라 불리는 작은 섬 오두막집에서” 살아갈 계획을 하게 됩니다. 쏘로우의 삶을 모방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쏘로우는 세속에 휩쓸리지 않고 자기 나름의 독특한 삶에 충실했던 미국의 대표적인 초절주의(Transcendentalism) 사상가입니다. 그는 국가주의에 의한 것이든 자본주의의 물질문명에 의한 것이든, 맹목적인 대중추수 경향에 저항했습니다. 스스로의 기준에 의해 검증되지 않은 것은 그 어떤 것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 것입니다. 미국이 일으킨 멕시코 전쟁에 반대하여 납세를 거부하기도 했던 그의 비폭력 저항운동 정신은 간디(Mahatma Gandhi, 1869-1948)나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1929-68) 목사 등에게 고스란히 전수되었습니다. 예이츠가 감동했던 구절은 아마 [월든]의 이런 부분이었을 것입니다. 내가 숲에 간 것은 삶을 철두철미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인생의 근본적인 사실들과 맞대하고 싶었던 것이다. 삶 같지 않은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삶은 그만큼 소중한 것이다.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체념을 감내하지도 않을 것이다. 심오하게 살아가며 삶의 모든 골수를 흠뻑 빨아들이고 싶은 것이다(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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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덤으로 더... <동생 예이츠 화가>...
 

 
출생 1871. 8. 23, 런던
사망 1957. 3. 28, 더블린
국적 아일랜드

요약 20세기에 뛰어난 아일랜드의 화가.

 
예이츠(Jack Butler Yeats)
예이츠(Jack Butler Yeats)

20세기 아일랜드의 화가

아일랜드인의 일상생활과 켈트족의 신화를 주제로 다룬 그의 그림들은 아일랜드 독립 이후 아일랜드 미술에 민족주의 미술을 고취시키는 데 기여했다. 유명한 초상화가 존 버틀러 예이츠의 둘째 아들이며 시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동생으로 슬라이고에서 개인교습을 받았다.

초기에는 주로 더블린 부근의 던드럼에 있는 던에머사(社)에서 누이들이 제작하는 1면짜리 신문과 책에 삽화를 그렸다. 나중에는 쿠알라신문사에서 일했다. 1915년경 유화를 그리기 시작하여 이후 아일랜드 독립투쟁의 시기를 거치면서 성숙해진 화풍으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아일랜드적 주제를 낭만적이며 감정 위주로 다루었지만 결코 사실성을 벗어나지는 않았다.

예이츠는 또한 문필가로서 자신의 그림처럼 환상적이고 화려하며 자유분방함을 특징으로 하는 문학 작품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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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이츠 시모음

 

하늘의 융단

 

 

금빛 은빛 무늬 든 하늘의 수놓은 융단이,

 

밤과 낮의 어스름의 푸르고 침침하고

 

검은 융단이 내게 있다면,

 

그대의 발 밑에 깔아 드리련만

 

내 가난하여 오직 꿈만 지녔기에

 

그대 발 밑에 내 꿈 깔았으니

 

사뿐히 걸으소서,

 

내 꿈 밟고 가시는 이여.

 

 

 

 

 

 

이니스프리 섬으로

 

 

나 일어나 이제 가리라,

 

내 고향 이니스프리로 돌아 가리라.

 

거기 외 얼고 진흙 바른 오막살이 집 지어

 

아홉 이랑 콩밭 갈며 꿀벌도 치며

 

벌소리 잉잉대는 숲 속에 홀로 살리라.

 

그러면 거기 얼마쯤의 평화 있으리라,

 

평화는 천천히 안개 자욱한 아침부터

 

귀또리 노래하는 곳까지 내린다하니,

 

밤은 온통 훤한 빛,

 

낮은 보라빛 저녁이면

 

홍방울새 가득히 날고,

 

나 일어나 이제 가리라,

 

 밤낮을 두고 기슭에 나직이 찰싹이는

 

물소리 들으리라.

 

길가에서나 회색빛 포도 위에서나

 

마음 속 깊이 그 소리를 들으리라.

 

 

비잔티움으로의 항해

 

I

 

저것은 늙은이를 위한 나라가 아니다.

젊은이들은 서로 팔짱을 끼고

나뭇가지 속에서 새들은- 저 죽어 가는 세대들은- 노래를 부르며

 

연어가 튀는 폭포, 고등어가 우글대는 바다,

물고기,짐승,새들이 온 여름을 찬미한다.

 

잉태되고 태어나고 죽는 모든 것들을.

 

저 관능의 음악에 사로잡혀

모두들 늙지 않는 지성의 기념비를 소홀히 하는구나.

 

II

 

늙은이는 한낱 하찮은 물건,

막대기에 꽂힌 누더기.

 

다만 영혼이 손뼉치며 노래부르지 않는다면,

썩어질 누더기 조각을 위해 더욱 소리 높이 노래부르지 않는다면.

 

또한 영혼의 장엄한 기념비를 탐구하지 않고서는

노래하는 학교도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바다를 건너

성스러운 도시 비잔티움으로 왔노라

 

III

 

오 현인들이여, 벽의 금빛 모자이크 속에서처럼

신의 성스런 불꽃 속에 서있는 그대들

 

성화로부터 걸어나와 뱅뱅 맴돌며

내 영혼의 노래 선생이 되어 다오.

 

그리하여 내 심장을 태워 없애 다오.

욕망으로 병들고 죽어 가는 동물에 매달려 그것은 자신을 모르나니

나를 모아 영원한 예술품으로 만들어 다오.

 

IV

 

한 번 자연에서 벗어나면 나는 결코

자연계의 어떤 사물을 닮은 내 육체의 모습을 취하지 않으리라.

 

오직 그리스의 금장이가

졸음 오는 황제를 깨워 두기 위해

망치로 두들기고 금박칠을 한,

 

혹은 비잔 티움의 귀족들과 귀부인들에게

지나갔거나 지나가고 있는 또 장차 다가올 일들을 노래불러 주는

 

황금 나뭇가지 위에 앉은

그런 형상을 취하리라.

 

 

 

쿨 호수의 백조를 보며

 

                        

 

나무들은 가을의 아름다움으로 단장하고

숲 속의 길들은 메말라 있다.

 

10월의 황혼녘 물은고요한 하늘을 비치고

돌 사이로 넘쳐흐르는 물 위에는

쉰 아홉 마리의 백조가 떠 있다.

 

 

내가 처음 백조의 수를 헤아린 이래

열 아홉 번째의 가을이 찾아왔다.

 

그땐 미처 다 헤아리기도 전에

백조들은 갑자기 날아올라

 

요란스런 날개 소리를 내면서

끊어진 커다란 원을 그리며 흩어지는 것을 보았다.

 

 

지금껏 저 찬란한 새들을 보아 왔건만

지금 나의 가슴은 쓰리다. 맨처음 이 호숫가

 

황혼녘에 저 영롱한 날개 소리를 들으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었던 그때 이래

모든 것은 변해 버렸다.

 

 

지금도 여전히 피곤을 모른 채

짝을 지으며 차가운 물 속을

 

정답게 헤엄치거나, 하늘로 날아오르는

그들의 가슴은 늙을 줄 모르고

 

어디를 헤매든 정열과 정복심이

여전히 그들을 따른다.

 

 

지금 백조들은 신비롭고 아름다운

고요한 물 위에 떠 있지만

 

어느날 내가 눈을 뜨고

그들이 날아가 버린 것을 알았을 때

 

그들은 어느 등심초 사이에 집을 짓고

어느 호숫가나 웅덩이에서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해줄 것인가?

                                              

 

 

훔쳐 온 아이

 

스루스 숲 바위산이

호수 속에 잠긴 곳에

나뭇잎 우거진 섬 하나 떠 있다.

 

푸드득 나래치는 왜가리들이

잠자는 물쥐들을 깨우는 그 곳

 

우리들 요정의 통 속엔

딸기를 가득

훔쳐 온 빨간 버찌를 가득 숨겨 두었다.

 

 

"자 아이야, 어서 오너라!

거친 들판 물가로 손에 손을 잡고

요정과 함께 오너라.

 

세상은 생각보다 눈물이 많은 곳이니."

 

 

어두운 잿빛 모래밭

달빛 물결이 빛나는

 

먼 로시즈 해변에서

우리는 밤새도록 춤을 춘다.

 

손에 손을 잡고서

서로 마주보며

 

저 달이 사라져 버릴 때까지

옛 춤을 엮어낸다.

 

 

우리는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끓어오르는 물거품을 쫓지만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차고

잠 속에서도 근심에 싸여 있다.

 

 

"자 아이야, 어서 오너라!

거친 들판 물가로 손에 손을 잡고

요정과 함께 오너라.

 

세상은 생각보다 눈물이 많은 곳이니."

 

 

그렌 카 언덕 사이로 굽이치는 시냇물 쏟아지는 곳

별 하나 목욕할 수 없는 등심초 우거진 웅덩이 속에

 

우리는 잠자는 송어들을 찾아내어

그들의 귀에 대고 속삭이며

불길한 꿈을 안겨 준다.

 

작은 시냇물 위에

눈물방울 떨어뜨리는 고사리들 사이

살짝 몸을 내밀고서,

 

 

"자 아이야, 어서 오너라!

거친 들판 물가로 손에 손을 잡고

요정과 함께 오너라.

 

세상은 생각보다 눈물이 많은 곳이니."

 

 

이 아이는 우리와 함께 가고 있다.

진지한 눈을 하고서.

 

이제 다시는 듣지 못하리라,

따뜻한 언덕 위 송아지 우는 소리를,

난롯가 주전자의 평화로운 노래를.

 

다시는 보지 못하리라,

갈색 새앙쥐가 귀리통을 돌고 도는 것을.

 

 

"사람의 아이 그가 오는구나.

거친 들판 물가로 손에 손을 잡고서

요정과 함께 오는구나.

 

세상은 생각보다 많은 눈물로 가득 찬 곳이니."

 

 

부활절 1916

 

내가 그들을 만난 것은 해질 무렵

 

18세기풍의 회색 집들 사이

카운터나 책상으로부터 벗어나와

생기 도는 얼굴을 하고 다가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정중하게 의미없는 말로

인사를 하며 지나갔다.

 

혹은 잠시 머뭇거리며

정중하게 의미없는 말을 건네다가

 

인사도 채 끝나기 전에

클럽의 난로가에 앉아 있는

 

한 친구를 즐겁게 해줄 수 있는

농담이나 조롱거리를 생각했다.

 

그들도 나도 어릿광대의 옷을 입고

살고 있다고 믿었다.

 

모든 것은 달라졌다. 완전히 달라졌다.

무서운 미(美)가 탄생한 것이다.

 

 

저 여자의 나날들은

무지한 자선으로 보내고

 

밤은 논쟁으로 지새워

마침내 그녀의 목소리는 날카로워졌다.

 

그녀가 젊고 아름다웠던 시절

사냥개와 더불어 말을 타고 달렸을 때의

그녀의 목소리보다 더 아름다운 소리가 있을까?

 

 

이 남자는 학교를 경영했고

날개 달린 천마를 탄 시인이었다.

 

또 한 사람은 그를 도와 준 친구이며

이제 막 그의 시재가 피어난 사람.

 

끝내는 명성을 얻어

그토록 예민한 천성과

대담하고 감미로운 사상을 가질 듯 보였던 아까운 인물,

 

 

이 또 한 사람은 주정뱅이요

허풍선이라 생각했던 사람.

 

그는 내 마음의 친구에게,

아주 몹쓸 가혹한 짓을 저질렀지만

이 노래에 그를 담아 두자.

 

그도 또한 이 예사로운 희극에서

자신의 역을 벗어버렸다.

 

그도 차례가 오자 달라졌다.

완전히 변했다.

무서운 미가 탄생한 것이다.

 

 

일 년 내내 오직 하나의 목적만을

좇는 자들의 심장은

 

살아 있는 시냇물을 어지럽히는

한 개 돌이 된 것만 같다.

 

길에서 오는 말도 기수도

떠도는 구름 사이를 날으는 새들도

시시각각 변한다.

 

시냇물 위의 구름 그림자도

시시각각 변한다.

 

강 언저리에 미끄러지는 말발굽 소리

시냇물 속에 첨벙대는 말

 

다리 긴 붉은 뇌조의 암컷들이 잠수하며 수컷들을 부르는 소리

시시각각 그들은 살아 있다.

 

 

돌은 모든 것들의 한 가운데에 있다.

너무 긴 희생은

심장을 돌로 만들 수 있다.

 

아 언제 만족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하늘의 역할

 

우리들이 할 일은 한 사람씩

이름을 속삭이듯 불러 주는 일

 

마구 뛰어놀던 아이의 몸에

잠이 찾아왔을 때

어머니가 그의 이름을 부르듯이.

 

 

이제 밤이 되었는가?

아니 밤이 아니라 죽음이다.

 

그것은 결국 쓸모 없는 죽음이었던가?

영국은 모든 언행을

약속대로 지킬지도 모르는 일.

 

우리는 그들의 꿈을 알고 있다.

그들이 꿈을 꾸고 죽은 것을 잘 알고 있다.

 

비록 지나친 사랑이

그들을 죽음에 이르도록 당황케 했다면 어쩌겠는가?

 

나는 그것을 한 편의 시에 적노라.

맥도나와 맥브라이드,

코널리와 피어스는

 

오늘 그리고 돌아오는 훗날에도

푸르름이 우거진 어느 곳에서도

 

달라졌다. 완전히 달라졌다.

무서운 미가 탄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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