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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그리움이 만년의 강 따라 흐르고...
2017년 10월 30일 23시 30분  조회:2968  추천:0  작성자: 죽림
 
출생 1861년 05월 07일
사망 1941년 08월 07일
국적 인도
대표작 《기탄잘리》, 《들꽃》, 《마나시》 등

인도의 문화와 문학, 정신을 세계에 알렸다. 1913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타고르는 인도의 시인이자 사상가로, 서정시집 《기탄잘리》로 1913년 아시아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벵골어 문학을 발전시킨 한편, 인도의 문화와 문학, 정신을 세계에 알렸다. 그의 사후 인도는 인도와 방글라데시로 분리되었는데, 각국은 각각 타고르의 시를 애국가로 채택했다. 또한 타고르는 한국과도 인연이 깊은데, 그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 〈동아일보〉의 요청으로 조선의 독립에 대한 염원을 담은 〈동방의 등불〉이라는 시를 지어 게재했으며, 최남선의 요청으로 〈패자의 노래〉를 짓기도 했다.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는 1861년 5월 7일 인도 콜카타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의 이름은 '라비(태양)'인데, 자라서 온 인류를 비추는 태양이 되라는 의미에서 지어졌다고 한다. 아버지 데벤드라나트 타고르는 인도의 근대 종교 개혁을 이끈 브라마 사마지의 지도자이자 인도 독립의 정신적 지주 중 한 사람으로, 벵골인에게 '마하리시(위대한 성자)'로 불리는 인물이다. 전통 있는 브라만 계층 집안에서 라빈드라나트는 14명의 아이 중 막내로 자랐다. 부유한 환경에서 인도의 고전, 사상, 종교, 천문학을 비롯해 토착어인 벵골어와 산스크리트어, 영어 등 많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8세 때 처음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으며, 가정교사에게 배우거나 귀족학교에서 공부하기도 했으나 격식과 규제를 싫어하여 늘 꾀병을 부리거나 수업 전에 도망쳐 산과 들에서 뛰놀았다고 한다. 때문에 대부분의 교육은 아버지에게 받았다. 특히 12세 때 아버지와 함께 인도 히말라야 여행을 다녀왔는데, 이때 인도의 역사, 위인, 천문학, 과학 등을 체험을 통해 배우고 고대 인도 시인들의 작품을 접한 경험은 후일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또한 진보적인 아버지로부터 영국 및 유럽의 문학, 정서를 자연스럽게 터득하기도 한다.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16세 때 발표한 첫 시집 《들꽃》으로 타고르는 '벵골의 셸리'라는 별칭을 얻게 된다. 17세 때에는 형과 함께 영국으로 유학을 가서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에서 법률을 공부했으며, 이 시기에 서구 낭만주의 문학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역시 정규교육에 적응하지 못한 타고르는 1년이 조금 지나 학교를 중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인도로 돌아온 후 타고르는 시와 희곡, 소설, 수필 등 다양한 분야의 습작을 하면서 작가로서 역량을 키워 나갔다. 1890년 시집 《마나시(마음의 화현化現)》로 주목받는 작가가 되었으며, 이후로도 서간집 《벵골의 섬광》, 희곡 〈우체국〉, 〈암실의 왕〉, 〈희생〉, 〈왕과 왕비〉 등을 발표하면서 작가로서 두각을 드러냈다.

타고르는 전통적인 산스크리트어 문학 규범에서 벗어나 일상적 구어를 사용했으며, 서구 문화의 전통 중 훌륭한 것들을 인도 문학에 접목시키고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예이츠, 앙드레 지드를 비롯한 서양 문학 작품들을 번역하여 인도에 소개했다. 이로부터 인도 근대 문학이 태동하기 시작한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타고르의 이런 시도는 인도가 아니라 영국에서 먼저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인도 지식인들은 고전적 산스크리트어 문학 작품을 선호했으며, 일반인들은 신디어나 힌디어로 된 글을 주로 읽었고, 벵골어는 지방 속어로 간주하여 경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벵골어로 쓴 그의 작품1) 들은 유럽 문인들에게 인도의 전통 언어로 현상 세계의 모순과 혼돈, 인간의 내면을 통찰하고 있다며 각광받았다.

작가로서 활동하던 타고르는 1890년경부터 아버지에게 토지 관리를 위임받아 일했는데, 그러면서 벵골 농촌의 현실과 문화를 접하고 현실 문제에 눈뜨게 된다. 이에 따라 1901년에는 샨티니케탄2) 에 학교를 세워 자연에서 이루어지는 전인 교육을 실시했는데, 이곳은 후일 국제적인 대학(비슈바바라티 대학)으로 성장한다. 또한 학교를 설립한 지 10년 뒤에는 학교 인근에 농업 공동체를 구성하여 농민의 정신적, 경제적 자립을 지향하는 농촌 계몽운동을 시작했다. 초기 시들은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은 유미주의적 작품들이 많지만, 이런 과정을 통해 점점 현실적인 색채를 띠게 되었으며, 1912년에 출간된 《한 다발의 이야기들》에는 농민들의 비참한 삶과 일상의 불행에 대한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1905년, 영국 식민정부가 벵골 분할령을 실시하자 이를 계기로 인도 내에서는 민족운동이 대두되었다. 타고르는 그 지도적 입장에 서기도 하는 등 인도 독립과 관련된 정치적 활동을 한다. 하지만 1915년에 간디가 귀국하여 스와라지(자치) 운동을 시작하면서 그에게 참여를 요청했을 때는 거절했다. 그는 독립을 중요한 가치로 여겼으나 유일한 가치로 생각하지는 않았으며, 또한 간디의 노선이 자칫 국수주의적인 것이 될 수 있을 뿐더러 군중 통제가 불가능해졌을 때 생길 폐해를 우려했다. 타고르는 간디를 '마하트마(위대한 영혼)'라고 불렀고 간디는 타고르를 '구르데브(위대한 스승)'라고 불렀으나, 민족주의자였던 간디와 범세계주의적 관점을 지닌 타고르는 사상적으로 차이가 있었다.

1940년 샨티니케탄에서 만난 타고르와 간디
1940년 샨티니케탄에서 만난 타고르와 간디

타고르는 정치적, 사회적 문제에 대해 큰 관심을 두었지만, 무엇보다 벵골의 전원과 갠지스 강을 사랑하는 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더욱 강하게 지녔다. 그리하여 많은 사회 활동을 하는 동시에 집필도 활발하게 했는데, 문학의 중심 제재는 그가 사랑한 벵골의 자연이었다. 타고르는 이런 제재를 서정성과 낭만성, 신비주의적 정서로 승화시키는 데 특히 뛰어났다. 《황금조각배》, 《경이》, 《꿈》, 《희생》 등의 시집이 대표적이다.

1900년대 초, 타고르는 아내와 두 아들, 아버지를 병으로 연이어 잃으면서 비탄에 빠졌다. 그는 이런 일을 겪으면서 점차 종교적으로 변모하여 많은 시를 썼는데, 이때의 시 대부분이 《기탄잘리》에 수록되어 있다. '님에게 바치는 노래, 신에게 찬미 드리는 송가'라는 부제처럼, 이 작품집에 실린 157편의 시는 생과 사의 문제를 다루는 한편, 인간은 어디까지나 신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사상을 토대로 하고 있다. 타고르는 이 시집을 일부 영역해서 영국인 친구에게 건넸고, 이로써 영국 문인들이 이 시집을 접하게 되었다. 그중에는 시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도 있었다. 예이츠는 이 시집을 언제나 손에서 떼지 않고 가지고 다니면서 읽었으며, "내가 얼마나 감동하는지 누군가가 알아볼까 봐 두려워 가끔 원고를 가려두었다."라고 말할 정도로 크게 감동해 영역본 출간을 추진했다. 1912년에 런던에서 《기탄잘리》가 출간되면서 타고르는 인도의 대표 시인으로 꼽히게 되었으며, 이듬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기에 이른다. 1915년에는 영국으로부터 기사 작위까지 받았는데, 1919년 독립을 주장하던 인도인 시위대 수백 명이 영국군의 총격에 희생된 암리차르 학살 사건이 터지자 이에 대한 저항의 표시로 기사 작위를 반납했다.

1921년 독일에서 발행된 《기탄잘리》 표지
1921년 독일에서 발행된 《기탄잘리》 표지

노벨상을 받은 뒤 그는 미국, 일본, 프랑스, 싱가포르, 자카르타, 자바 등 세계 각국을 순방하며 제국주의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인도 독립을 지지하는 활동을 하는 한편, 시인으로서 자신의 시와 인도 시 문학에 대한 강연 활동을 했다. 또한 샨티니케탄 운영에 힘을 기울이면서 시집 외에도 〈인간의 종교〉, 〈제국주의〉와 같은 평론 등을 펴냈다.




 






영적 자유 즐긴 행동하는 신비주의자-라빈드라드 타고르

기복적 힌두교 버리고 정신적인 면 추구
기복적 힌두교 버리고 정신적인 면 추구
신·자연·인간은 하나 … 체험, 시로 표현
동양인 최초로 노벨 문학상 금자탑 쌓아

동양인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타고르는 제도로서의 종교는 너무 피상적이어서 참된 내적자아를 발견할 수 없다며 이를 배격했다. 인도의 시성이라 불리는 라빈드라드 타고르(Rabindranath Tagore)는 1861년 벵골의 콜카타(옛 이름은 캘커타)에서 열세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데벤드라드 타고르(1817~1905)는 그 당시 ‘근대 인도의 아버지’라 불리는 람 모한 로이(Ram Mohan Roy, 1774~1833)가 인도사회의 개혁을 목표로 창설한 브라흐모 사마즈(Brahmo Samaj) 운동의 제2대 지도자였다.

어머니는 일찍 죽고 아버지는 여행에 많은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어린 타고르는 주로 하인들의 손에서 자랐다.정식 학교 교육보다 저택 주위를 배회하거나 아름다운 자연에 거니는 것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 12세 때 아버지를 따라 여러 달 동안 인도를 여행하면서 여러 가지 전기도 읽고, 역사, 천문, 과학, 산스크리트어를 공부하고, 고전 시도 살펴보았다. 


문맹과 가난 퇴치에 앞장

16세 때 첫 시집 『들꽃』을 썼고, 다음 해인 1878년 변호사 공부를 하기 위해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런던에서 법 공부보다는 셰익스피어와 기타 문인들의 글에 더 크게 매료되었다. 1880년 학위를 끝내지 않고 인도로 돌아와 인도의 자연과 가난한 사람들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특히 갠지스 강은 평생을 통해 그의 정신적 젖줄과 같은 역할을 했다. 

1883년 결혼을 하고 다섯 자녀를 얻었다. 1890년 타고르는 지금의 방글라데시에 있던 광대한 가족 농지를 맡아 돌보기 시작했다. 여기서 보낸 이후 몇 년 간 타고르는 가장 많은 글을 쓸 수 있었다.아버지의 개혁정신을 물러 받은 타고르는 1901년 자기의 개혁적인 이상을 실천하기 위해 산티니케탄 (Santiniketan)으로 옮겨가 아쉬람을 세웠다. 여기에 기도하는 집, 도서관, 정원과 함께 실험적이고 자유로운 학교까지 설립하여 새로운 교육을 실천하기도 했다. 여기서 그의 부인과 두 자녀가 죽었다. 1921년에는 가까운 곳에 ‘농촌 재건 기구’를 설립하고 문맹과 가난을 퇴치하는 일에도 앞장섰다. 그는 인도의 카스트 제도와 불가촉 천민 차별제를 비판하는 등 한 때 정치에도 참여하였다. 또 자연과학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연구했다. 그러나 그는 무엇보다 시인으로 가장 잘 알려졌다 


2천편 시-3천편 그림 남겨

1913년 스스로 벵골어에서 영어로 번역한 103편의 연작시 『기탄잘리(Gitanjali, 신에게 바치는 송가)』로 동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죽기 전 몇 년 동안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었는데, 그 때 지은 시들이 가장 아름다운 것들로 여겨지고 있다. 1941년 여든 살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2천여 편의 시를 쓰고, 3천여 점의 그림을 그리고, 2천여 곡을 작곡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시집 『황금 조각배 The Golden Boat』, 『초승달 The Crescent Moon>』, 『정원사 The Gardener』 등이 있다.예이츠, 앙드레 지드, 로망 놀랑, 에즈라 파운드 등으로부터 극찬을 받기도 한 그의 시는 인도 문학을 세계에 널리 알리는 일을 했을 뿐 아니라, 주로 종교적 신비 체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종교적 영성의 중요성을 인지시키는 일에도 크게 기여 했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힌두 전통에 기반을 둔 것은 틀림없는 일이지만 특별히 전통적인 기성 종교에 속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다. 타고르는 아버지가 이끌던 브라흐마 삼마즈의 정신에서 크게 영향을 받았다. 이 운동 단체는 힌두교의 형식적이고 기복적인 면을 배격하고 정신적이고 ‘순수한’ 면을 강조하였다. 그는 또 우파니샤드와 베단타 전통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베단타 전통 중에서 그는 샹카라와 라마누자를 조화시킨 ‘중도 코스’를 따랐다. 타고르는 특히 제도화된 종교의 형식적인 면을 배격하고 단순하면서도 깊은 예배 방식을 실천하던 벵골의 신비주의적 시인들로부터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부처님의 가르침도 공부했다. 그러나 타고르는 그의 깨달음이 근본적으로 책을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이 영적 ‘비전’에서 얻어지는 것이라 여겼다. 

타고르가 처음 비전을 본 것은 18세 때였다. 그의 회고록에 보면 “해가 잎이 무성한 나무 꼭대기 위로 막 떠오르고 있었다. 내가 그것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내 눈에서 눈꺼풀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온 세상이 온통 아름다움과 기쁨의 물결과 함께 찬연한 빛으로 목욕한 것처럼 보였다. 그 빛줄기가 내 심장에 겹겹이 쌓여 있던 슬픔과 실의의 장벽을 꿰뚫고 들어와 우주적인 빛으로 넘쳐나게 했다. 어릴 때부터 나는 내 눈으로만 보았다. 그러나 이제 나는 나의 의식 전체를 가지고 보기 시작했다. 나는 헤아릴 수 없이 깊은 영원한 기쁨의 샘을 감지할 수 있었다. 거기서부터 셀 수 없이 많은 웃음의 물안개가 온 세상으로 날아가 흩어졌다.” 

타고르는 살아가면서 이런 경험을 몇 번 더 했는데, 이런 경험들은 무엇보다 신과 자연과 인간이 하나라는 만물동체의 느낌을 가져다주었다고 했다. 그는 이런 경험을 갖기 위해서 어떤 종교의 특수한 수행을 실천하지도 않았다. 그의 유명한 시 “폭포의 일깨움”에서 표헌한 것처럼 그런 경험은 자연적으로 그에게 이르렀다. "그날 아침 햇살이 내 영혼의 뿌리를 건드렸다. 아, 아떻게? 아침 새의 노래가 이 어두운 동굴 안으로 들어왔다. 아 어떻게? 나는 그것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나의 삶은 잠에서 깨어났다.” 고 했다. 그리고 “나는 내가 느낀 것을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고 하면서 이런 엄청난 체험이 언설을 넘어서는 것이라 했다. 그러면서도 이런 체험에서 그는 참된 깨달음을 얻었음을 확신한다고 했다. 사실 타고르가 가졌던 이런 경험은 세계 여러 신비주의자들이 가지는 공통적 체험인 셈이다. 


18세 때 영적 깨달음 체험

미국의 종교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January, 1842~1910)는 신비적 체험이 갖는 네 가지 특성으로, 말로 표현할 수 없음, 잠시적임, 피동적으로 얻게 되었다는 느낌, 깨달음이라고 했는데, 타고르의 체험은 이런 특성들을 두루 갖춘 체험이었다. 이런 체험이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타고르는 시인으로서 이를 시적으로 표현하려고 했다. 보통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미술이나 음악이나 시와 같은 예술을 통해 부분적으로나마 표현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표현 불가능하다고 그냥 버려둘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인간을 위해 어떻게라도 표현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나의 종교는 본질적으로 시인의 종교다”고 선언하고, “나의 종교적 삶은 나의 시적 삶과 동일한 신비적인 성장 라인을 따랐다”고 하면서 그의 시가 신비체험과 직결된 것이라 했다. 

타고르는 신과 하나 됨, 그러면서도 동시에 개별성을 강조하고 이를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랑과 자연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그는 특히 자연의 아름다움이 이런 신비적 체험을 촉발하는 수단이라 주장했다. 그는 신비체험을 갖기 위해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 금욕주의적 생활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그는 또 제도로서의 종교는 너무나 피상적이어서 사람들에게 참된 내적 자아를 발견하도록 할 수 없다고 보고 이를 배격했다. 타고르는 제도권에 구애되지 않고 자유를 구가한 행동하는 신비주의자였던 셈이다. 

타고르와 관련하여 한국인들에게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이 있다. 타고르는 영국을 비롯하여 유럽 여러 나라, 중동, 미국, 캐나다, 멕시코, 일본 등 많은 나라를 방문해서 강연도 하고, 앙리 베르그송,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로버트 프로스트, 토마스 만, 조지 버나드 쇼, H.G. 웰즈 등 문화계 지도자들이나 지식인을 만나 보았다.1929년 타고르가 일본을 방문 중 동아일보 도교 지국장 이태로 기자가 찾아가 한국 방문을 요청했지만, 다음 날 캐나다로 떠나고, 인도로 돌아갈 때도 일본을 거치지 않기 때문에 요청에 응할 수 없음을 안타깝게 여기고, 다음 날 그를 배웅하러 나간 그 동아일보 기자에게 짧은 시를 써 주었다고 한다. 


일제 시대 한국인의 ‘희망’

일즉이 亞細亞의 黃金時期에/ 빗나든 燈燭의 하나인 朝鮮/ 그 燈불 한번다시 켜지는 날에/ 너는 東方의 밝은 비치 되리라 타고르가 써준 원문은 없고, 그 원문이라 생각되는 영어 시는 다음과 같다 In the golden age of Asia/ Korea was one of its lamp-bearers/ And that lamp is waiting to be lighted once again/ For the illumination in the East.원래는 이처럼 4행시인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동아일보 1929년 4월 2일자에 주요한 번역으로 실린 시에는 1912년에 영역된 타고르의 『기탄잘리』 35편의 일부와 “나의 마음의 조국 코리아여 깨어나소서.” 하는 한 줄이 여기에 덧붙여진 형태로 변형돼 나타났다. 덧붙여진 부분은 다음과 같다. 

마음에 두려움이 없고/ 머리는 높이 쳐들린 곳/ 지식은 자유롭고/ 좁다란 담벽으로 세계가 조각조각 갈라지지 않은 곳/ 진실의 깊은 속에서/ 말씀이 솟아나는 곳/ 끊임없는 노력이 완성을 향해 팔을 벌리는 곳/ 지성의 맑은 흐름이 굳어진 습관의 모래벌판에 길/ 무한히 퍼져 나가는 생각과 행동으로 우리들의 마음이 인도되는 곳/ 그러한 자유의 천국으로/ 나의 마음의 조국 코리아여 깨어나소서 물론 이 덧붙여진 부분이 한국을 위해 쓰이어진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시의 배경이 어떠했든지 간에, 이 시가 일제시대 암울한 환경에 처했던 한국인들에게 큰 용기와 희망을 주었던 만은 확실하다. 이런 인연 때문인가 인류의 스승 타고르는 우리에게 더욱 친숙하게 여겨진다. 

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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